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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 새끼 보통 진상이 아니네…….”


널부러지듯 쓰러질 뻔한 것을 겨우 세워둔 나미카와를 보고서 보쿠토가 제일 먼저 한 말이었다. 상대가 술 취해 인사불성이라 생각했는지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 거침이 없다. 아카아시는 보쿠토를 한 번 흘낏 보기는 했으나 별달리 책하는 말은 하지 않고 나미카와를 부축했다. 


“샴페인도 탄산수 수준이던데 이걸 뭐 얼마나 마시면 여기서 정신을 못 차려?”

“술에 약한가보죠.”


아카아시는 그렇게 대꾸하며 나미카와의 뺨을 툭툭 건드렸다. 모두 물 건너 불구경 하듯 쳐다보고 있기만 한 것이, 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도움을 줄 뜻은 전혀 없는 게 분명했다.


‘설마 내가 수습해야 하는 것은 아니겠지?’


이 갤러리에서 나미카와가 아는 사람이라고는 보쿠토의 사촌이라는 아키오 뿐인 것 같았는데 그가 도움을 줄 생각이 없다면 남은 건 아카아시 자신뿐이다. 여기가 아주 낯선 갤러리나 클럽이었다면, 아니, 보쿠토와 되먹지도 않은 계약을 한 상태만 아니었더라도 신경 쓰지 않고 버리고 갔겠지만.


‘그 막내 숙부도 보고 있을 테니…….’


보쿠토와의 계약으로 자신이 할 일은 그럴듯한 애인을 연기해 집안의 모든 검사를 통과하고 결혼상대로 허락을 얻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엔 ‘술 취한 같은 학과 같은 연구실 선배를 갤러리에 버리고 간다’는 선택지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제 의지할 것은 아키오뿐이었다. 별로 의지하고 싶은 상대는 아니지만 전혀 살갑지도 친하지도 않은 선배를 챙기느니 차라리 그 음험한 보쿠토의 사촌에게 의지하겠다. 아카아시가 그렇게 생각하며 나미카와를 깨우기 위한 손에 힘을 싣기 시작했을 때였다. 


쨍그랑! 


멀리서 얇은 유리잔이 박살나는 소리가 쩡하고 울려퍼졌다. 천장이 높고 사람들이 소리를 높이지 않는 갤러리에서 유리 깨지는 소리는 날카롭고 청명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의 윽 하고 신음하는 소리까지 들린다. 아카아시는 그 목소리가 들어본 적 있다고 생각했다. 


‘설마.’


보쿠토가 나미카와를 들여다보던 자세에서 허리를 펴고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얼굴에 미약한 짜증이 올라왔다. 


“이 새끼 약 하고 술 처먹고 난리친 건 아니겠지.”

“……한 번 가 보세요.”

“…….”


보쿠토의 얼굴이 못마땅함으로 낮게 일그러졌다. 알아서 잘 했겠지, 하고 못들은 척 하려고 했던 보쿠토였지만 곧 그럴 수 없게 되었다. 웨이터들이 흰 천과 구급상자를 들고서 그들을 지나쳐 다급히 뛰어갔던 것이다. 보쿠토는 잠깐만 기다리고 있으라는 말만 남겨두고 유리 깨진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카아시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요즘 한숨이 늘었어. 안 좋은데.’


옆에 있는 나미카와는 정신을 차릴 기미가 없다. 아카아시는 미간을 찌푸렸다. 보쿠토나 갤러리 점원들의 반응을 보았을 때 다친 사람은 아키오인것 같았고, 그가 다친 상황에서 나미카와까지 챙겨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가 다른 사람에게 나미카와를 부탁할 만한 인물로도 보이지 않았다.


‘진짜 싫다…….’


앞에서 덤덤하게 군다고 해서 정말 아무렇지 않은 것은 아니다. 견디지 않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으니 흘려보내는 것뿐이다. 아카아시는 부당한 대우에 일일이 화를 내는 것에까지 할애할 기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다니던 대학원을 그만 둘 수도 없다. 그간의 노력이 열매 맺기까지 남은 시간은 반년도 채 되지 않았다. 


제대로 토로하지 못한 화, 응어리, 어쩔 수 없는 체념의 결정체 같은 사람이 술에 취해 뻗어있는데 신나게 뺨 한대 때리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하고 얌전히 챙겨 가야 하는 상황이라니!


그나마 위안이라면 보쿠토가 있다는 것 정도일 테다. 그 거침없이 솔직한 사람이 이 선배에게 마구잡이로 말하는 것을 듣기만 해도 조금은 기분이 풀렸으니까. 


하지만 아카아시의 가냘픈 희망은 몇 분도 가지 않아 완연히 부서졌다.


“보…!”

“하, 아카아시. 이 자식 데리고 병원 좀 갔다 와야 겠다.”


돌아온 보쿠토는 뒤에 혹을 달고 있었다. 창백한 안색의 아키오였다. 잔을 떨어뜨려 깨뜨린 것을 무심결에 만졌다가 심하게 베였다며 손에는 피로 물든 붕대를 감고 있다. 아카아시는 척 봐도 심각해 보이는 그의 상처를 보며 목 끝까지 치밀어 오르는 말을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아카아시 너는 택시타고 먼저 들어가. 미안.”


보쿠토가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통째로 그에게 쥐어주고는 한껏 미안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아카아시는 그 얼굴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곧 보쿠토와 그의 사촌이 자리를 비우고, 이 자리의 주최가 먼저 돌아간 것을 본 사람들도 이 갤러리에 흥미를 잃은 듯이 삼삼오오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아카아시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나미카와의 팔을 어깨에 걸쳤다. 정신을 잃은 사람을 들어 올리자 무게에 숨이 턱 막혔지만 어렵지 않게 부축해 갈 수 있었다. 웨이터들이 차를 잡아주고 부축을 거들어줘 어렵지 않게 택시에 타는 것까지는 어렵지 않았다. 


“나미카와 선배. 선배! 정신 좀 차려보세요!”

“……어디로 모실까요…?”


어려운 건 나미카와의 집주소를 캐내는 일이었다. 인사불성이 된 나미카와는 자기 입으로 집주소를 말하기는커녕 눈을 뜰 생각조차 없어 보인다. 아카아시는 한 손으로 자기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싫어하는 사람이 하는 말이라고 다 한 귀로 듣고 흘리지 말고 사는 곳 정도는 알아놓을 걸…….’


결국 아카아시는 자신의 자취방 주소를 입에 담아야 했다.


*


[집 도착했어?]

[네. 사촌은요?]

[개자식이 엄살 피웠어]


아카아시가 뭐라고 답장해야할지 고민할 때 벨소리가 울렸다. 아카아시는 화들짝 놀라서 자신도 모르게 통화버튼을 누르고 말았다. 아카아시는 수화기를 가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미카와는 아카아시의 자취방 바닥에 널브러져 자고 있었다. 아카아시는 침대의 이불 한 장을 끌어와 덮어주고는 발코니 쪽으로 나갔다. 밤이 되자 밤공기가 서늘하게 뒷목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춥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 이 자식이 별것도 아니면서 난리쳐서 병원까지 왔어!》

“심하게 다친 게 아니었으면 다행이네요.”

《다행은 무슨……. 너는? 잘 들어갔어?》

“네. 집 왔어요.”

《그 자식은? 선배?》

“데려왔어요.”

《……?》


보쿠토가 아무 말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그 이해하지 못했다는 표정이 선명히 떠올랐다. 아카아시는 한숨 속에 야트막한 웃음을 섞었다. 살짝 입김이 맺혔다. 


“뻗어서 정신은 못 차리지, 아는 사람은 없지……. 보쿠토 씨 사촌이 챙겨줄 것 같지는 않고요. 자기 집 주소도 말을 못하니까 어쩔 수 없이.”

《아니 그렇다고 집에 들여? 길에 버려!》

“어떻게 그럽니까.”

《너 그렇게 상냥한 애였어!? 나한테 그 반만 해주지!》

“지금 내가 왜 나미카와 선배를 데려왔는지 전혀 모른다는 건 알겠네요.”

《뭐! 왜! 뭐!》

“보쿠토 씨의 그 대단한 하루키 숙부님이 보고 계시는데 제가 어떻게 같은 과 선배를 내치고 갑니까. 매정한 애는 조카사위로 싫다 하시면 어떡해요?”

《아…….》

“그래서 사람이 죽을힘 다해 들쳐 메고 왔더니 한다는 말이 자기한테 더 잘하라고……. 내참.”

《……나 때문이야?》

“그럼 보쿠토 씨 때문이지 누구 때문입니까?”


확 풀죽은 목소리는 듣기만 해도 웃음이 나왔다. 아카아시는 눈을 내리떴다. 그 아키오나 다른 사람이 자길 싫어한단 이야길 할 때는 참 답지 않다 싶을 만큼 아무렇지도 않더니 자기 때문에 좋아하지도 않는 선배를 굳이 집에 들였다는 얘기에는 이렇게 축 쳐진다. 어린애가 순간순간 온 마음을 기울일 때는 그것이 어떻게도 숨겨지지 않아서 사랑스러운 것처럼 보쿠토도 그랬다. 


‘나보다 나이도 많은 사람인데.’


누군가가 자신을 싫어한다 해도 꿈쩍 않는 것은 그의 마음이 강건하기 때문에, 자신 탓에 누군가가 싫은 일을 했다는 것에 무너지듯 구는 것은 그의 마음이 솔직하기 때문에. 


시간의 흐름에도 꺾여나가지 않고 변색되지 않은 것이 바로 앞에서 찬란히 빛나는 걸 보는 건, 조금 눈이 시렸다. 


“그냥 해본 말입니다. 그보다 지갑은 어떡할 거예요. 그 땐 저도 정신이 없어서 가져와버렸는데.”

《아……. 다음에 만날 때 신분증만 챙겨줘. 그거 재발급 귀찮아서.》

“다음 주에 보기로 했잖아요. 그 때까지 괜찮겠습니까?”

《그치만 약속된 날 아닐 때 찾아가면 아카아시 싫어하잖아…….》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이 정도는 양해해드릴 수 있어요.”

《나도 남 좋은 일 할 줄도 알거든!》


보쿠토가 팩 소리쳤다. 어떤 표정일지, 목소리만 들어도 눈에 선했다. 아카아시는 난간에 기대어 거리의 야경을 내려다보았다. 이제 곧 겨울이 오려는지 차가운 밤공기 속으로 사람들의 호흡이 영혼처럼 아른거리고 있었다. 


보쿠토는 통화를 끊을 때까지 다음 주에 약속한 날 만날 것을 거듭 다짐했다. 아카아시가 괜찮다는 말을 두어 번 더 했지만 보쿠토는 굳센 목소리로 다음 주에 꼭, 이라고 대답했다. 


하여튼 오라고 할 때는 안 와요. 아카아시는 전화가 끊어진 액정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펜스에 기대어 야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둔 천에 빛나는 수가 놓여있는 것처럼 빛들이 아른거리는 모양새는 큰 그림을 작정하고 그린 것처럼 아름다웠다. 겨울이 다가오는 가을밤이 이상하게 춥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