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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는 데이트도 참 답게 하네.”

“네?”

“월수금 딱딱 날짜를 지켜서 만나는 거, 아닌가?”


다섯시 반쯤 되면 연구실은 살짝 어수선해진다. 곧 저녁 식사를 할 때이므로 시간이 오래 걸리는 실험은 자연히 뒤로 밀리고 남은 시간동안 간단히 할 일을 하게 되느라 여러 가지 소리가 나고, 그 소리가 어느 정도 커졌다 싶으면 딱 여섯시였다. 제각기들 저녁을 먹자 어디로 가자 얘기를 하는 틈바구니에서 자연스레 사양의 말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서던 아카아시는 연구실 교수의 웃음기 어린 농담에 주춤하고 말았다. 


다들 그러고 보니 그렇다며 놀라는 걸 보고 교수가 그 정도 관찰력도 없이 무슨 실험을 하겠냐며 농을 던졌다. 모두 저녁 식사를 위해 우르르 연구실을 벗어날 때, 마지막으로 나미카와가 뒤를 흘끗 돌아보았다. 아카아시는 그 시선을 모른척하며 엘리베이터 한 대가 오갈 시간이 지났을 때쯤 연구실을 벗어났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아, 여기 별로야?”


맞은편에 앉아있는 보쿠토가 살짝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카아시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 아뇨. 여기 음식은 맛있네요.”

“그럼 다른 게 문젠가?”

“음……. 그렇다기보다는 간파당한 게 좀 신경 쓰여서.”

“뭐가?”

“교수님이 아시더라고요. 저희 월수금 날짜 맞춰서 만나는 걸.”

“근데?”


보쿠토가 아무것도 모르겠단 얼굴로 밥을 크게 한술 퍼 올렸다. 아카아시는 자신의 몫으로 나온 튀김덮밥의 꽈리고추 튀김을 젓가락으로 건드리며 고민했다. 


“그렇다고 곧장 날짜를 바꾸는 것도 너무 의식하는 것 같고…….”

“엥? 바꿔야 돼?”

“너무 의무감에 만난다는 느낌이 들키는 것 같잖습니까.” 


아카아시가 턱을 괴고 중얼거렸다. 보쿠토는 맹렬하게 튀김 덮밥을 입에 밀어넣는 중이었다. 아카아시의 고민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얼굴이다. 새우 튀김을 크게 한입 베어먹은 보쿠토는 녹차를 향해 손을 뻗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토요일에 만나는 걸 몰라서 그러시는 거 아냐? 일주일에 네번이나 만나는데 이게 사랑해서가 아니면 가능한가.”

“네번이 문제가 아니라 규칙성이 문젭니다.”


아카아시는 말을 잇다 말고 잠깐 멈칫했다. 이걸 자신의 입으로 말하려니 약간 열이 오르는 기분이었다. 결국 아카아시도 녹차로 손을 뻗었다. 


“사귀는 사이에 보통 하는 ‘보고싶어서 만난다’라는 느낌의 이벤트가 전혀 없는 거잖습니까.”

“아…….”


보쿠토는 이제야 뭐가 문제인지 알았는지, 컵을 내려놓고는 양손에 젓가락을 한짝씩 나뉘어쥐었다.


‘생각 많아질 때의 습관 같은 건가.’ 

“그럼 어떡하지?”

“이번 주는 그냥 이대로 하고, 다음주부턴 3일에 한 번씩 보죠.”

“엑?”

“그럼 1일 4일 7일 10일…이렇게 되는데 홀수와 짝수가 번갈아 나오고 요일이 반복되는 것도 아니니까요. 다른 사람들도 아무 생각 못하겠죠. 날짜도 고정되니 스케쥴 짜기도 편할테고.”

“엥. 그건 싫은데.”


보쿠토의 젓가락이 다시 하나로 합쳐졌다. 아카아시는 자신의 계획이 완벽하다고 생각한 것만큼 조금 당황했다. 보쿠토라면 숫자가 나온 시점에서 아무 말 하지 않고 응할 거라 생각했는데. 


“왜…왜요?”

“그럼 만나는 날 자체가 너무 적어지잖아. 지금까지는 일주일에 4번, 한달에 못해도 열 여섯번은 봤는데……. 그 계산대로 하면 딱 열 번 보는 거 아냐?”

“그건 그렇습니다만.”

“아카아시, 알바비 너무 날로 받으려는 거 아니고?”

“…….”


보쿠토는 불퉁한 표정이었다. 아카아시는 설마하니 전체 횟수 부분을 보쿠토가 인지하고 지적할 줄은 몰랐던 터라 잠깐 놀라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리고 연구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건 별로 중요하지 않잖아? 우리 할머니만 패스하면 되는데, 이제.”

“…그도 그렇네요.”


연구실 사람들이 아카아시와 보쿠토의 데이트 규칙성을 가지고 다른 생각을 한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헉. 설마 그 나미카, 뭐라더라, 하여튼 그 자식이 뭐라고 했어?”

“네? 나미카와 선배요? 아뇨,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

“아, 놀랐잖아. 그 뒤로 어때? 뭔가 수상쩍은 짓은 안 해?”

“뭐……. 묘하게 유들해지긴 했죠.”


아카아시는 꽈리 고추 튀김을 반으로 나눠 밥 위에 올리며 나미카와에 대해 생각했다. 그 갤러리에서의 파티가 있고 몇 주나 지났다. 나미카와는 그 전까지 사람 속 긁는 소리를 못해 안달이더니, 하룻밤 재워주고 난 뒤로는 기묘하게 눈치를 본다거나 기분나쁘게 상냥하게 군다거나 했다. 


‘보통 그렇게까지 태도가 바뀌나…….’


“얌전해졌단 말이지?”

“네? 말하자면 그런 셈이죠.”


보쿠토는 무언가 마음에 드는 듯 들지 않는 듯 뚱한 얼굴이었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뭐 내가 손 안 써도 되고 좋네.”

“……마음에 안 든다고 다 치우고 그렇게 살지 마요.”

“내 맘에 안 드는 게 아니라고!?”

“그럼요?”

“야! 너는 나랑 결혼하기로 남들이 다 알 텐데 너를 무시하는 걸 내가 가만 놔두냐 그럼? 너를 무시하는 건 날 무시하는 거야!”

“절 무시하는 건 절 무시하는 거고요. 지금 보쿠토 씨 하신 말씀은 자기 마음에 안 든다 이거잖습니까.”


아카아시는 자신이 억지를 쓰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빠른 어조로 몰아붙였다. 보쿠토가 어버버 입만 버끔거리기 시작한다. 아카아시는 보쿠토의 숟가락 위에 튀김을 올려주었다. 보쿠토는 시무룩한 얼굴로 숟가락을 입에 물었다.


“……내가 잘못했어?”


그 한마디에 아카아시의 말문이 턱 막혔다.


갑자기 자신의 말에 대한 후회가 밀려들었다. 저 사람은 자신과는 다른 세계에서 사는 사람이다. 자신이 싫은 사람을 그냥 남겨두는 것과 그가 싫은 사람을 남겨두는 건 아주 다른 문제가 될지도 몰랐다. 육식동물에게 풀을 삼키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 게 있을까?


“그게 아니라……. 제 주위에 대해서는 그럴 필요 없다는 거였습니다.”


그런 사람 좀 내버려둔다고 저한테 큰일 생기는 건 아니니까요. 제가 알아서 잘하면 돼요. 아카아시가 나직하게 하는 말에 보쿠토가 입술을 삐죽였다. 


“세상에는 남 일에 관심 있는 사람이 훨씬 더 많은데요, 놀랍게도요. 아카아시 선생님.”


언젠가 그런 애들이 네 발목 잡고 늪으로 끌고 갈지도 모른다? 보쿠토가 과거 아카아시 자신의 말을 고스란히 돌려주는 걸 들으면서도 아카아시는 도리어 작게 웃을 뿐이었다. 


두 사람이 제각기 자기 몫의 그릇을 거의 다 비웠을 때 보쿠토가 입을 열었다. 어째서인지 머쓱한 표정이었다.


“그…….”


오갈데 없는 손이 또 젓가락을 한 짝씩 나뉘어 쥐고 있다. 아카아시는 녹차를 찾으며 보쿠토의 말을 기다렸다. 두 사람 사이에 긴장감어린 침묵이 지나고 나서야 보쿠토가 입을 열었다. 


“부모님이 할머니한테도 벌써 말씀드렸나봐.”

“아.”

“할머니가 한 번 보자고 하셔.”

“생각보다는……이르군요.”

“아키오 자식이 날뛴 것도 있어서 오히려 일이 빨리 풀렸어. 잘됐지 뭐!”

“이번이 결승이겠지요?”


더는 없지요? 아카아시가 놀리듯 묻는 말에 보쿠토가 귀까지 새빨개져서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만 넘기고 몇달간 현상 유지만 해주면 돼.”

“할머님이 마음에 안 들어하시면 어떻게 됩니까?”

“별로 그럴 것 같진 않은데? 우리 어머니 아버지도 통과했고 막내 삼촌도 오케이했는데? 할머니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면 된다고 해.”

“어른들의 감을 우습게 보면 안 됩니다.”


아카아시는 그렇게 말하며 녹차로 입가심을 했다. 정말 생각보다 훨씬 이른 만남이었다. 계약에 명시되어 있던 것이니만큼 제대로 이행할 작정이지만 조금 당황스럽기는 했다. 


“아 된다니까! 걱정 말래도!”


보쿠토가 가슴팍을 팡팡 두드렸다. 그의 얼굴에 기대와 희망의 빛이 차오르기 시작한다. 그게 묘하게 어딘가 눈이 부셔서 아카아시는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이게 끝나면 보쿠토 씨도 바라던 유산을 받는 거지. 나도 돈을 받고.’


그리고 그러면 이제 정말 끝이다. 보쿠토의 자택에서 조모를 뵙고 난 이후의 현상 유지라는 건 어떻게 할 건지는 명확히 알 수 없었지만 지금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만나는 날짜는요?”

“아, 그건 너랑 얘기해보고 알려달래.”

“어르신들 되시는 날짜에 저희가 맞춰야죠.”

“그런가? 아, 진짜 이런 거 안 해봤으니 알게 뭐람.”


보쿠토가 모든 게 귀찮단 얼굴로 투덜거렸다. 아카아시는 그 얼굴을 빤히 보다가 말을 돌렸다.


“할머님께도 누구 소개시켜드린 적이 없었습니까?”

“우리 부모님한테도 아무도 보여준 적이 없다니까? 그리고 애당초 왜 보여주냐? 좋아하는 것도 아닌데.”


보쿠토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가 아차한 얼굴이 되어 서둘러 자기 입을 막았다.


“아, 아니. 좋아했지. 좋아했어, 다들. 좋아서 만났어…….”

“어느 쪽이든 문제가 되니까 그 화제는 그만하죠.”

“아, 둘다 문제야?”

“보통 자기 남자친구한테 예전에 만났던 사람들 진심으로 다 좋아했단 얘길 누가 합니까?”

“아…….”


사람 대하는 것을 보면 능숙한 것 같으면서도 이럴 때는 또 묘하게 맹한 것이 손이 간다. ‘그렇다고 이걸 하나하나 다 알려주고 있어야 하나’라는 생각과 ‘그렇다고 미래에 만날 사람에게 뺨맞게 하는 것도 그렇지 않나’하는 생각이 함께 떠올랐다. 


“그래도 저희 쪽에서 조율 가능하다면……. 2주 뒤가 제 기말고사라서요. 가능하다면 기말고사 끝나고 만나뵐 수 있겠습니까?”

“물론!”


보쿠토가 가슴을 펴곤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어린애의 치기라고 생각해야 할텐데 까닭을 모르게 그 모습이 의지가 되어서, 아카아시는 식당 공기가 답답하니 얼른 나가고 싶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보쿠토가 아카아시 따라 서둘러 일어서다 물잔을 엎을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