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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쿠토의 눈썹이 꿈틀했다. 아카아시는 그것이 보쿠토가 정말 마음에 들지 않을 때나 짓는 표정이라는 걸 알아보았다. 그리고 자신은 그 얼굴을 지금 처음 보았다는 것도. 


“그래? 그럼 재미없는 너희 집으로 돌아가지그래.”

“너무 매몰차게 그러지 말지~! 그쪽이 새 약혼자?”

“눈 깔아. 신경 꺼. 돌아가.”


등골이 섬뜩할 만큼 차가운 목소리였다. 아카아시는 보쿠토의 옆모습을 흘끗 바라보았다. 보쿠토의 눈매는 매섭게 치뜬 채였지만 입매에는 미소가 있다. 아카아시는 속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야, 너 아무리 재산이 탐나도 그렇지~! 그 많은 애인들 다 뿌리치고 이렇게 급하게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 데려온 거야?”


아카아시는 뒷짐을 진 채 덤덤히 그 사촌의 말을 듣기만 했다. 단어 선정이 노골적으로 자신을 겨냥하고 있었다. 발끈하기에는 그 말을 하는 의도가 몹시도 훤히 들여다보이는 데다가, 자신이 보쿠토와 ‘진실한 사랑’으로 맺어진 사이도 아니다 보니 마음 깊이 아무런 감흥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야, 미래의 제수씨! 요 녀석이 얼마나 날렸느냐면요!”


눈치를 안 보는 건지 눈치가 없는 건지, 그것만은 핏줄인 게 확실하다고 아카아시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무언가 다른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보쿠토가 한달음에 그에게 다가가 멱살을 쥐어틀었다. 눈 깜짝할 사이였다. 


“커, 컥!”

“제수씨 아니고 형수님이다, 똑바로 해라?”


맹수가 으르렁거리는 것처럼 낮은 목소리, 살벌하게 웃는 얼굴의 보쿠토가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말하는 내용과 기세가 어울리지 않아 그 위화감이 험악함에 힘을 더했다. 작은 키도 아니건만 사촌의 발이 땅끝에 겨우 닿을 지경이 되어서야 그를 놓아준 보쿠토가 사촌의 주름진 옷깃을 탁탁 건드렸다. 펼쳐주려는 것 같았지만 도리어 가볍게 몇 대 더 친 꼴이 되었다. 


“보…코타로 씨.”

“가자.”


아카아시가 작은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보쿠토는 아카아시의 손목을 잡아채고는 거침없이 정원을 벗어났다. 아카아시는 뒤를 흘낏 돌아보았다. 한껏 졸렸던 목을 풀고 있는 남자가 두 사람을 음험한 눈길로 노려보고 있었다. 


*


“유산 문제가 얽혔다는 게 저 사람입니까?”

“어.”

“그래도 부모님껜 잘 하시나 보네요. 두 분 모두 환영하는 것 같고.”

“아직 유산 물려받은 게 없는데 환영 안 하면 어떡해? 저 새끼가 저래도 할머니 손자고.”


보쿠토는 아직도 기분이 풀리지 않는지, 소태 씹은 것 같은 표정으로 입안에 다과를 쑤셔 넣고 있었다. 야외 테라스 쪽에서 보이는 거실의 풍경 속에는 보쿠토의 양친과 갑작스레 방문한 그의 사촌이 도란도란 시간을 보내는 중이다. 유리창이 닫혀있어 대화는 들리지 않았지만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도…….”


스콘에 버터 스프레드를 듬뿍 올려 입으로 가져가고 있던 보쿠토가 눈동자만 굴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말을 기다린다는 표정이었다. 뭐라 말하려고 했던 아카아시는 돌연 입을 다물고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도 조심하는 게 좋겠다는 얘길 내가 해서 뭐하겠어.’


두 사람이 만나서 하는 일이라는 게 연인 행세를 하는 것뿐, 그걸 제외하면 건조하기 짝이 없는 사이였다. 저 사촌의 눈빛이 심상치가 않으니 그래도 조심하는 게 좋겠다는 말은 아무리 담백하게 해석하려고 해도 진실한 걱정과 염려인 것처럼 들렸다. 


‘괜히 오해라도 하면 곤란하고.’


연애 같은 건 절대 안 된다고 서로 못 박아두지 않았던가? 아카아시는 생각을 정리하곤 보쿠토의 앞으로 찻잔을 밀어주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보쿠토는 남은 차를 생수 마시듯 입에 털어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인사 안 드려도 되겠습니까?”

“저 자식이랑 있어서 일이 잘 풀린 적이 없다. 상종 안 하는 게 나아. 부모님도 알고.”


당장 앞에서는 웃고 하하호호 해도 자식한테 물려줄 유산 뺏어갈지도 모르는 놈이 예뻐 보여 봤자 얼마나 예뻐 보이겠냐? 보쿠토가 이죽거리듯이 말하고는 바깥쪽을 향해 고갯짓했다. 나가자는 말이었다. 


아카아시는 잠깐 테라스에 서서 안쪽을 바라보았다. 그림으로 그린 듯이 아름다운 실내, 중년 부부와 젊은이 한 사람. 


“못 나오겠어?”


아카아시가 잠시 서서 머뭇거린 것을 테라스 울타리를 뛰어넘지 못해서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보쿠토는 고개를 한 번 갸웃하고는 아카아시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아카아시가 거절이나 사양의 말을 하기도 전에 양손으로 그를 번쩍 들어 올렸다. 


“보쿠토 씨!”

“언제는 코타로 씨라며?”


그러더니 아카아시를 울타리에 앉히고, 자신은 번쩍 뛰어넘는다. 아카아시는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이 일련의 흐름에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었지만 먼저 울타리를 뛰어넘은 보쿠토가 자신을 향해 양팔을 벌렸을 때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어서? 뛰어내려. 별로 높지도 않잖아.”

“아…….”

“난 저 자식이랑은 더 말하고 싶지 않다고.”


보쿠토가 투정이라도 부리듯이 그를 향해 재촉했다. 집 안으로 들어가서 현관으로 나오려면 필히 그의 사촌과 부딪히게 된다는 이야기였다. 아카아시는 말없이 보쿠토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하다가 손을 휘저었다.


“이 정도는 가뿐합니다. 가서 차에 시동이나 걸고 있든가요.”

“에, 뭐야. 영 못 하는 거 같길래 해준 건데.”


보쿠토의 시선을 피해서 가뿐히 뛰어내리자 보쿠토는 속았다며 투덜거렸다. 아카아시는 속인 적 없다고 간신히 대꾸할 뿐이었다. 


“아~! 진짜 끝났다! 아!”

“이걸로 끝은 아니지 않습니까?”

“아 초 칠래? 진짜?”


운전석에 앉아서 시동을 건 보쿠토가 신이 나 소리치다가 아카아시의 덤덤한 반응에 입을 삐죽거렸다. 아카아시는 안전벨트를 끌어당기며 어깨를 으쓱했다.


“중요한 건 할머님이라고 들었습니다.”

“예선은 끝을 내야 본선을 할 거 아냐.”

“예선 끝난 걸 본선 끝난 것처럼 말씀하시길래요.”

“……너 그 뭐냐…….”


핸들을 양손에 쥔 보쿠토가 입을 버끔거리며 아카아시를 쳐다보았다. 아카아시가 고개를 기울였다.


“뭐가요?”

“아니다……. 정신 차리겠습니다요, 정신 차릴게요. 선생님!”

“그쪽 같은 학생은 별로인데요.”

“내가 말을 하질 말았어야 했는데! 입을 열지 말았어야 했는데!”


보쿠토가 자신의 입을 쥐어뜯듯 주먹으로 때리며 소리쳤다. 아카아시가 그 말에는 결국 졌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보쿠토는 말이 없다. 작게 웃던 것을 그친 아카아시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렇게 보세요?”

“어? 아, 아니. 아무것도…….”


얼빠진 얼굴로 아카아시를 쳐다보던 보쿠토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차고의 문이 부드럽게 열리며 그들을 배웅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내일은 쉬어.”

“오늘 큰일 했다고 휴가 주는 건가요.”

“네, 휴가입니다, 선생님.”


보쿠토가 이죽거렸다. 아카아시는 차창에 기대어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감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그라고 해서 보쿠토의 양친을 만나는 일이 간단하지는 않았다. 보쿠토의 본가를 벗어나기 시작하자 한쪽으로 미뤄두었던 피로가 밀려든다. 아카아시는 슬쩍 눈을 가늘게 떴다. 자동차의 백미러에 이쪽을 주시하는 누군가의 신형이 살짝 보인 것 같았지만 금세 멀어져 확인할 수 없었다. 


“많이 피곤했어?”

“긴장했으니까요.”

“긴장한 거 하나도 모르겠던데…….”

“자기 남자친구 부모님 만나는데 긴장 안 하는 사람이 어딨, 컥!”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늘어놓던 아카아시는 자동차가 급정거한 덕분에 앞으로 휙 쏠리며 말을 멈춰야 했다. 핸들을 양손에 쥔 보쿠토는 떨리는 눈동자로 정면을 바라보고만 있다. 넓지 않은 주택가 사이의 도로라 설마 뭔가 치기라도 했나 싶어 아카아시가 주위를 살펴보려는데 보쿠토가 삐그덕거리는 몸짓으로 옆을 돌아보는 것이었다.


“뭐, 뭐라…고…….”

“뭔가 쳤어요? 그런 거 같진 않았는데? 앞에 뭐가 있었습니까?”

“아니, 아무것도 없었어! 지금 누가 봐도 이거 내가 놀라서 멈춰버린 거잖아!”

“놀라요? 뭐에 놀랍니까?”


아카아시는 갑자기 압력을 받은 가슴팍을 쓸어내리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아무것도 친 게 없다니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보쿠토가 뭐에 놀랐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한참이나 버벅거리는 얼굴로 입술만 달싹거리던 보쿠토는 번뜩이듯 깨달음을 얻은 얼굴이 되어 다시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 그랬었지…….”

“뭐가 말입니까? 삼도천 구경하고 온 입장에선 도대체 뭐가 그렇게 놀랐는지 알고 싶습니다만.”


아카아시가 따박따박 말을 늘어놓았지만, 보쿠토는 여전히 혼이 나간 듯이 얼빠진 얼굴로 핸들을 움직일 뿐이었다. ‘그게 계약이었지…….’라는 말만 중얼거리며. 


아무리 다그쳐도 말을 해줄 기세가 아닌 데다가 괜히 얘기하다가 또 이렇게 덜컥 차를 세워버리면 그게 더 곤란한 일이다. 아카아시는 이 이상 캐묻는 것을 그만두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이지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는 고용주라고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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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겨주시는 댓글 모두 잘 보고있습니다ㅠㅠ 

덕분에 힘내서 계속 쓸 수 있어요ㅠㅠ

다만 지금 대운동회 마감이(..) 너무.. 급해서.. 

마감 친 연후에 모두 답글을 달 예정이에요ㅠㅠ! 

항상 감사합니다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