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오이 | 발렌타인 데이
-오이른 전력 주제 : 소문
이와이즈미가 정중하지만 단호한 표정으로 대답한다. 그 표정에는 충분히 미안하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상대는 잠시 말이 없다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긴장으로 굳은 얼굴이 까닭을 알지 못해 헤매고 있었다. 이와이즈미는 잠시 말이 없다가 대답했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서.”
“아…….”
탄식 같은 소리를 흘렸던 여학생의 눈동자 위로 금방 눈물방울이 차올랐다. 이와이즈미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가 고개를 꾸벅 떨어뜨렸다. 미안. 거듭된 사과의 말이 오히려 상처였을까, 여학생은 고개를 흔들고는 빠르게 몸을 돌려 그의 앞에서 도망치듯 사라졌다. 이와이즈미는 말 없이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마른 입술을 다시며 한숨을 내쉬었다.
발렌타인 데이였다.
*
이와이즈미는 부실 밖에서부터 들려오는 웅성거림에 혀를 찼다. 일년에 한 번 있는 날이라도 매해 이렇게 난리 법석이면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역시나, 문이 열리자마자 단내가 퍼지듯 덮쳐왔다.
“선배, 올해도 굉장하네요…….”
“그, 글쎄. 일단 이거 좀 잡, 으아아!”
얼굴을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무언가를 껴안고 들어오던 오이카와가 결국엔 뭔가를 놓쳤는지 부실 바닥 위로 들고 있던 걸 쏟고 말았다. 자잘한 종이 상자 같은 것이 우르르 퍼져나간다. 달콤한 향기가 한층 더 진해졌다. 저지를 찾아 걸치던 이와이즈미는 혀를 찼다.
“하여튼…….”
“이, 이와쨩. 좀 도와줘!”
바닥에 앉아서 겨우 수습을 하던 오이카와가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그를 올려다본다. 이와이즈미는 눈살을 찌푸리고선 산더미같은 초콜릿을 바라보기만 했다.
겉으로 보기에 무게가 없어 보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의외로 부활동 외의 친교에는 연약하게 군 탓인지, 오이카와에게 진심으로 부딪혀 오는 상대는 드물어 모두들 그가 절벽위의 꽃이라도 되는 양 굴었고 저 산더미같은 초콜렛이 그 사실의 증거였다.
“아, 큰일났네…….”
사물함 아래에까지 굴러간 초콜렛도 수습해 겨우 정리하는데 오이카와가 곤란한 표정으로 초콜렛 더미를 내려다보며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정리를 함께 도와준 후배가 무슨 일이냐는 표정이 된다. 오이카와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머쓱하게 웃고는 손을 내저었다. 후배들이 부실을 나가고 나서야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를 바라보았다.
“뭔데?”
“다 섞였어. 나눠먹어도 되는 거랑 안 되는 거 구분해 뒀거든, 애들도 주려고…….”
“뭔 기준으로.”
“어, 그러니까 우정초코……? 나눠먹어도 된다고 말해준 거랑 아닌 걸로.”
그랬는데 다 섞여버렸네. 오이카와가 뺨을 매만지며 곤란한 표정으로 말한다. 이와이즈미는 저 초콜렛 더미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매해 받아온 걸 어쩌지 못하고 곤욕스러워하더니 올해만은 수를 쓴 것 같았다. 다 무산되기는 했지만.
오이카와는 의식의 모든 걸 단 하나에만 쏟고 있었는데 그게 바로 배구였다. 애정도 끈기도 집중력도 모두 그 하나, 그래서 그걸 제외한 다른 것들에겐 터무니없이 무르곤 했다. 가령 그를 향해 오는 꽃잎같은 마음과 말들이라거나.
‘그래도 이렇게 밤새 직접 만들었다는걸, 어떻게 거절을 해…….’
시라토리자와로 오라는 권유는 칼같다 못해 냉랭하게 걷어차더니, 누가 뭔가 주는 것 앞에서는 봄날 마지막 눈마냥 흐물흐물 녹았다. 혹자는 왕자님다운 상냥함이라고 일컬었으나 이와이즈미만은 알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그런 곳까지 쓸 단호함이 남아있지 않은 것이다.
“어쩌려고.”
“어쩌긴, 집에 가져가서 먹어야지. 흐아…….”
오이카와가 어색하니 웃더니 금방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와 벌써 짠게 먹고싶다는 이야기를 하며 옷을 갈아입었다. 이와이즈미는 말없이 그 초콜렛 더미를 바라만 보았다.
*
오이카와와 이와이즈미는 서로가 지나치게 가깝기 때문에, 되레 교내에서 상대에 대한 소문에는 느리고 둔했다. 으레 둘 다 알고 있으리라 여겨서 학교의 사람들이 당사자들에겐 상대에 대한 얘기를 드문히 하는 탓이었다.
“에, 에엑? 진짜?”
오후 연습을 다 끝냈을 때였다. 누군가가 이와이즈미에게 말을 걸었다. 선배, 오늘 발렌타인 초콜렛 다 거절하셨다면서요. 오로지 오이카와에게만 매몰찰 뿐인 이와이즈미였으므로 후배들에게 인망은 두터워 그의 일은 금방 뜨겁게 화제가 되었다. 그리고 그 중에 누군가가 말했다.
-선배, 좋아하는 사람 있으시다고!
말 한 마디로 체육관 안의 시선이 모조리 이와이즈미에게로 쏠렸다. 그 박력은 이와이즈미도 움찔할 정도였다. 그리고 그 선봉장에 오이카와가 있었다. 오이카와는 생전 처음 듣는 얘기라는 표정이었다.
“이와쨩,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어?”
“어.”
오이카와의 표정이 벼락이라도 친 듯이 흔들렸다. 그리고 오이카와의 그 얼굴을 보고서 다들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이와이즈미의 말이 진실이라고 확신한 모양이었다. 체육관이 금방 쩡하고 달아올랐다. 이와이즈미가 몇 반의 누구냐고 캐묻는 말들, 언제부터냐는 추궁같은 것들을 건성으로 걷어내며 샤워실로 돌아간다. 그 뒤에 남겨진 오이카와는 마치 비련의 여주인공 같았다.
“오이카와, 차였냐!”
동기들이 깔깔대며 놀리고서 지나간다. 투닥거리기는 하여도 지나치게 사이가 좋아서 사귀는 것 아니냐며 놀리는 말들이 곧잘 나오곤 하던 두 사람이었다.
“으아! 그런 거 아니거든! 아니, 그런데 나 진짜 전혀 몰랐어…….”
“네가 그런 반응일 게 뻔하니까 말 안했겠지.”
친구들이 핀잔을 주며 지나가고 그 사이에 서 있는 건 마츠카와와 하나마키였다. 오이카와가 뒤를 획 돌아보며 둘을 쳐다보았다.
“둘은 알고 있었어?”
“뭐를.”
“이와쨩이 조, 좋아한다는 사람…….”
하늘이 무너져도 저런 표정을 짓지는 않지 않을까. 하나마키는 나직하게 혀를 차며 생각했다.
“뭐 소문은 있었지. 오늘 들어오는 초콜렛은 전부 거절했다는 모양이니까.”
“왜 나, 나만 몰랐지?”
그러니까 그걸 몰랐다는 점에서, 이와이즈미의 마음이 어느 쪽으로 향하고 있는지 알아채야 하지 않나 싶지만. 마츠카와는 조금 고개를 기울어뜨렸다.
한 사람은 보통을 뛰어 넘어 눈에 띄고 옆의 사람은 그에 비하자면 놀랄만치 담백한 편이다. 그 화려한 불균형이 둘의 기묘한 관계에도 연막을 치고 있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진작 둘은 도마 위에 올라간 생선 꼴이 되었을 것이다. 그 정도로, 가만히 들여다보면 누구나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제대로 모르는 건 주위만이 아니었다. 당사자들조차, 아니, 당사자조차.
모두들 너라면 이와이즈미의 일을 모조리 알고 있을거라 생각하여, 아무도 굳이 너에게는 얘기하지 않은 것인데.
“맛키, 누군지 알아? 이와쨩이 좋아한다는 사람.”
“글쎄. 나도 누군지까진.”
하나마키는 능숙하게 모른척했다. 정신이 하나도 없는 모양인지 오이카와는 오랜 친구의 거짓말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마츠카와가 어찌할 바 모르고서 발만 구르는 오이카와의 옷깃을 잡아채어 샤워실로 향했다.
“뭐 이와이즈미가 좋아하는 애가 있을 수도 있지.”
“아, 안 되지!”
“뭐가 안 돼.”
“나한테 말도 안 하고…….”
“말 하면?”
“어?”
마츠카와가 툭 하고 던지듯 묻는다. 오이카와가 평소와 달리 당황이 버무려진 멍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마츠카와는 수건을 챙겨들며 다시 물었다.
“너한테 말하면, 뭐 어떡할건데.”
“아니, 꼭 뭘 어떡하려고 말을 하는 건 아니잖아…….”
“어쨌든 너 이와이즈미를 도와줄 생각은 아니잖아? 그러니까 말 안했겠지.”
“!”
스스로의 마음도 모르고서 화들짝 놀란 얼굴이 그를 올려다본다. 마츠카와는 혀를 찼다. 사랑받고 자란 사람만의 그 시야 좁은 오만함을 좋아한다. 그래서 오이카와도 좋아하는 편이었지만, 이럴 땐 오이카와를 이 모양으로 빚어놓은 이와이즈미를 향해 탄식을 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
세 사람이 샤워실로 들어갔을 땐, 이와이즈미는 이미 씻고 나간 것 같았다. 마츠카와는 반쯤 얼이 나간 것 같은 오이카와를 하나마키에게 떠안기곤 대충 휘리릭 씻고서 바깥으로 향했다. 수건으로 머리를 적당히 털며 부실로 향한다. 문을 열자마자 단내가 훅 하고 풍겼다. 대부분이 오이카와가 받아온 초콜렛들이었다.
“이와이즈미.”
때마침 부실에는 이와이즈미 한 사람 뿐이었다. 마츠카와는 적당히 이와이즈미 곁으로 가서 캐비넷을 정리하는 척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 수는 그다지 먹히지 않았다.
“그냥 물어봐.”
“갑자기 왜 맘이 변했어?”
이와이즈미는 마음을 밝힐 생각이 없었다, 지금까지 계속해서. 마츠카와도 하나마키도 알고 있는 일이었다. 두 사람이 옆에서 몇 번 부추긴 적도 있었지만 그 때마다 이와이즈미는 부드럽고 단호하게 넘어갔다.
-글쎄, 봐서.
옆에서 보기엔 오이카와와 이와이즈미의 방향이 너무나 명확하여 머뭇거릴 이유조차 없는 것 같았는데도 이와이즈미는 꼼짝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본인이 움직이지 않겠다는데 제3자가 나서서 감놔라 배놔라 하는 것에도 정도가 있어서 그대로 둔 채 지금까지 이어진 것이었는데.
“아니, 별로 마음이 변한 건 아닌데……. 조금 짜증나서.”
“짜증?”
“저거.”
이와이즈미는 셔츠를 꿰어입으며 턱짓으로 오이카와의 초콜렛 더미를 가리켰다. 마츠카와는 눈을 가늘게 뜨며 그와 초콜렛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칠렐레 해서 다 받아 오는 거…….”
“네가 받지 말라고 하면 저 녀석도 안 받을 거 아냐.”
“그렇게 말하긴 싫고.”
저 고집들을 이해할 수가 없다. 마츠카와는 혀를 찼고 그의 뜻을 알아들은 이와이즈미는 약간 머쓱한 표정을 짓고는 해명하듯 말했다.
“비슷하겐 말해봤는데. 어차피 먹는 것도 고역스러워 하니까. 그런데 거절하는 말 하는 게 더 힘든 거 같길래.”
“……그럼 왜 네가 그러고 있는데?”
“나중에 되돌려주게.”
“뭐?”
“뒤에 가서 얘기할 때 나는 안 받았다고 말하려고.”
그래야 오이카와 녀석 콧대를 눌러주지. 이와이즈미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뭔가를 의도한 말투는 아니었다. 둘에 대해 적당히 알고 있는 마츠카와가 그에게 물었고, 그러니까 그 나름대로는 성심성의껏 솔직하게 생각을 말해주는 것 뿐.
“그 ‘뒤’가 언젠데?”
“글쎄……. 그건 생각 안 해봤는데.”
형태가 없기 때문에 영원을 확신할 수도 있다. 오이카와와 이와이즈미의 관계란 그런 것이었다. 그저 오래된 친구라기엔 지나쳤으나 연인이라고는 누구도 먼저 확언하지 않아, 그 무엇도 아닌 채 두 사람은 뭉근하고 둥근 관계 속에서 맴돌고 있었다. 모르는 건 오이카와, 지키는 사람은 이와이즈미였다.
“뭐 오늘일 수도 있고. 한 오십년 쯤 뒤일 수도 있으려나.”
마츠카와는 어처구니 없다는 마음을 표현할 기력도 없어 혀를 차곤 고개를 저었다. 때마침 부실의 문이 열리며 오이카와와 하나마키가 들어왔다. 오이카와가 곧장 이와이즈미에게 다가가는 거센 걸음에 문가에 기대두었던 종이봉투가 넘어져 안의 초콜렛이 우르르 쏟아졌지만 오이카와는 돌아보지 않았다.
“이와쨩!”
“어, 왜. 머리나 말려.”
“좋아한다는 애 누구냐니까! 왜 말 안해주고 도망 가!?”
샤워를 끝내자마자 뛰어왔는지 오이카와의 머리카락에서 뚝뚝 물방울이 떨어졌다. 이와이즈미는 눈살을 찌푸리며 캐비넷에서 수건을 꺼내 오이카와의 머리에 얹어주었지만 오이카와는 그 수건을 잡아채며 다시 이와이즈미에게 물었다.
“이거 말고, 누구냐구!”
“아 없어. 없다고. 머리 당장 안 말리냐, 오이카와.”
“……없어?”
눈앞에 당장 닥친 시비를 피하기 위한 변명인 게 분명한 ‘없다’는 말인데도, 오이카와는 마치 갈대가 바람에 휩쓸리듯 감정의 방향을 틀고서 이와이즈미를 바라보았다.
“없어. 그냥 둘러댄 말이야. 그리고 넌. 머리, 말리라고.”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의 손에서 다시 수건을 빼와 그의 머리에 올리곤 거칠게 부벼주었다. 수건에 시야가 가린 오이카와가 아프다며 빽빽거렸지만 처음 부실에 들이닥칠 때의 박력은 없었다.
오이카와가 이와이즈미의 압정 아래에 겨우 반쯤 머리를 말렸을 때 하나마키가 소리쳐 둘을 불렀다. 넷이 모여 부실 바닥에 산개한 초콜렛을 겨우 치우고 정리한다. 그 와중에 오이카와가 무엇이 우정초콜렛이었는지 알 수가 없다며 울상을 지으면서 중얼거려, 마츠카와가 흘끗 이와이즈미를 바라보게 했다. 이와이즈미가 시원하게 오이카와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악! 아파! 이와쨩! 왜!”
“단내 퍼져서 짜증나.”
“윽…….”
오이카와가 조그만 목소리로 사과의 말을 한다. 그리고 초콜렛을 사이에 둔 둘의 실랑이는, 적어도 교내에서의 실랑이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마츠카와는 양손에 커다란 종이봉투를 주렁주렁 쥐고서 귀가하는 오이카와와 이와이즈미의 뒷모습을 흘끗 바라보았다. 거리가 멀어지며 흐릿해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와쨩, 이거 먹는 거 도와줄거지?’ ‘안 도와준 적 있었냐.’ 여느 때와 똑같이, 오후의 햇살처럼 강렬하고 굴곡없이 평이한 음성은 금방 골목 너머로 사라졌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관계는 사소한 가시 하나에도 상하고 틀어질 수 있다. 그 관계를 이것도 저것도 아닌 채로 유지하기 위하여, 오이카와의 찬란한 외양보다 더한 연막이 필요하다면 이와이즈미는 기꺼이 그리할 셈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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