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른 전력 주제 : 처음
이와이즈미에게 여자친구가 생겼다.
“어? 진짜? 누군데?”
오이카와는 마시던 드링크를 곧장 입에서 떼고 몸을 휙 돌렸다. 덕분에 먹다 만 음료가 주륵 흘러서 이와이즈미는 미간을 찌푸리곤 수건 한 장을 오이카와의 얼굴에 부볐다. 오이카와가 수건을 걷어내며 재차 물었다.
“누구냐니까!”
“말하면 아냐, 네가.”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의 얼굴에 묻은 액체가 적당히 닦인 걸 확인하곤 땀을 닦았다. 오이카와가 그런 이와이즈미의 체육복을 붙들었다.
“그래도, 누군데? 언제부터?”
“어제부터.”
“왜 자꾸 누구인지 말을 안 하는 건데에!”
“후배야, 후배. 2학년인데…….”
이와이즈미는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배구 외에는 관심도 없는 녀석이 말한들 알겠나 싶어서, 말해봤자 소용없겠다 여긴 것 뿐인데 숨긴다고 생각하기라도 하는 건지 오이카와는 물러날 줄을 몰랐다.
“어제? 어제 언제?”
“어제 연습 끝나고.”
“……학생회 회의 있었을 때?”
“어어.”
이와이즈미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는 한 달에 한 번씩 학생회에서 동아리 부장들과 함께 진행하는 회의가 있는 날이었고 한 달 중에 딱 하루, 이와이즈미가 혼자 귀가하는 날이기도 했다.
“이와쨩 좋아하는 사람 있는 줄 전혀 몰랐는데…….”
오이카와가 먹다 만 드링크 병을 양손으로 쥐고서 시무룩하니 쳐진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이와이즈미는 머쓱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 그냥 나 좋다고 하니까…….”
“엑.”
“뭐, 뭔데.”
“이와쨩 헤퍼! 헤퍼!”
“너야말로 너 좋다고 하면 금방 칠렐레 해서 사귀잖냐!”
“나는……!”
뭐라 말을 하려던 오이카와는 결국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기만 하다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이와이즈미는 그런 오이카와의 이마를 꾹 눌러 밀어냈다. 자기는 신명나게 여자친구를 만들었다가 헤어졌다가 만들었다가 헤어졌다가 하더니.
“너는 뭐.”
“나랑은 경우가 다르지!”
“뭐가, 어떻게 다른데.”
이와이즈미는 땀을 다 닦아낸 수건을 어깨에 걸치고서 오이카와를 바라보았다. 오이카와는 여전히 그저 병을 양손에 쥔 채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처진 표정을 바꾸지 못했다.
“하여튼 애예요, 애.”
“몰라…….”
오이카와의 표정에는 온통 섭섭함이 엉망진창으로 묻어 있었다. 이와이즈미는 손가락으로 오이카와의 이마를 한 번 튕겼다. 오이카와가 한 손으로 발갛게 달아오른 이마를 매만지며 먼저 코트로 나가는 이와이즈미의 뒷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
오이카와는 쿨다운을 위해 스트레칭하며 멍하니 이와이즈미의 여자친구에 대해 생각했다. 여자친구, 여자친구.
그가 알기론 이와이즈미의 첫 여자친구였다. 그 전까지 이와이즈미는 여자 문제엔 도통 무감각하게 굴곤 했으니까. 줄기차게 여자친구를 갈아치운 건 오이카와 쪽이었다. 오이카와는 왈칵 바닥에 엎어지고 싶은 마음을 겨우 추슬렀다.
‘왜 갑자기 여자친구를! 좋아하지도 않는다면서!’
포인트는 그것이다.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저 쪽에서 좋아한다고 해서 사귀게 되었다고 했다. 그러니까 이와이즈미는 깊은 마음이 있어서 응한 건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사귈 필요 없는 거 아니야? 하지만 그런 말을 할 근거가 부족했다. 이와이즈미의 말대로, 누가 좋다고 하면 금방 사귀고 하기를 반복했던 건 오이카와 그였다.
‘하지만 나랑은 경우가 다르잖아!’
으아아아!
오이카와는 결국 참지 못하고 체육관 바닥에 대자로 드러누웠다. 내가 누구때문에 아무나라도 만나고 다닌 건데! 오이카와는 팔뚝으로 눈을 가린 채 발을 굴렀다. 죽어도 말을 할 수는 없고, 말을 할 수 없으니 말릴 수도 없다. 오이카와는 차라리 죽고 싶다고 생각했다. 내가 왜그랬을까. 마음이 그래도 그냥 아무도 만나지 말고 있을걸.
‘좋아하게 되면, 어떡하지…….’
이러니 저러니 해도 사람에게 진실되고 다정한 이와이즈미였다. 그러니까 매번 오이카와 그가 어리게 때로는 어리석게 굴어도 곁에 있어준 걸 안다. 상대방이 그저 좋다고 했기 때문이라고 해도 관계가 시작된 이상은, 분명 이와이즈미도 최선을 다할 게 분명했다. 최선을 다하다보면 자연스레 마음도 기울지 않을까. 그리고 그렇게 마음이 기울면.
“오이카와. 뭐하냐. 일어나.”
“흐업.”
오이카와는 깜짝 놀라서 얼굴을 가리고 있던 팔을 치웠다. 이와이즈미가 위에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후다닥 몸을 일으켜세웠다.
“어, 이와쨩. 벌써 교복 갈아입었어?”
“어어. 오늘은 나 먼저 간다.”
“에……?”
오이카와는 바닥에 앉은 채 멍하니 눈을 깜박거리기만 했다. 이와이즈미가 눈살을 찌푸리고 그를 보고 있다가 팔 사이에 손을 넣어 번쩍 일으켜세운다. 오이카와는 입으로 맥아리없는 비명을 지르며 겨우 몸을 바로했다.
“여자친구가 어디 가자고 해서 그런다 했어. 먼저 갈테니까. 내일 보자.”
“어……. 어어, 응…….”
오이카와는 스스로도 느낄 수 있을 만큼 울적한 목소리로 대답하고 말았다. 이와이즈미가 또 애냐, 하고 그의 등을 한 번 내리치고는 척척 걸어 체육관을 벗어난다.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에게 맞은 등을 애써 매만지며 겨우 울상을 지었다.
애라고 구박할 거면 애 취급을 해달란 말이야. 애를 혼자 두고 가는 게 어딨어……. 하지만 그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미적거리며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오이카와는 교복 위에 저지를 걸치고선 터덜터덜 체육관 밖으로 나왔다. 부 일지까지 적당히 정리를 마치고 나자 아무도 남은 사람이 없었다.
학생회 회의도 없는 날인데 혼자 돌아가는 건 처음이야……. 오이카와는 노을 사이로 가로등 불빛이 하나씩 하나씩 들어오는 걸 보며 생각했다.
그러고보면 그에게는 모든 처음이 이와이즈미였다. 그가 눈을 떴을 때 이미 세상에는 이와이즈미가 있었다.
‘그야 이와쨩 생일이 나보다 더 빠르니까 당연하지!’
그의 손을 이끌고서 어른 손의 반도 차지 않을 발걸음으로 어린 세상의 가장 먼 곳까지 이끌고 가주었던 것도 이와이즈미였다. 눈을 뜨고 본 생에 첫 친구였다. 서로가 싫다며 빽빽 소리를 지르면서 머리를 쥐어뜯고 싸운 것도 이와이즈미가 처음, 한겨울 눈밭에서 구르고 뛰놀다가 오이카와 혼자 감기에 걸려 골골댈 때에 병문안을 와 준 것도 이와이즈미가 처음이었다.
배구 ‘놀이’에 함께 어울려 준 것도 이와이즈미가 처음, 방황하는 그를 때려가면서까지 일으켜 세운 것도 이와이즈미, 그리고…….
‘처음이란 처음은 전부 다 가져갈 줄 누가 알았겠어!?’
오이카와는 돌연 억울해져 길거리에 굴러다니던 빈 깡통을 발로 걷어찼다. 요란한 소리가 나면서 앞에 있던 초등학생들이 놀라 그를 돌아보곤 쌩하니 도망친다. 오이카와는 엉거주춤 사과를 하려던 손을 떨어뜨렸다.
-사랑에 빠진 것도,
이와이즈미가 처음…….
오이카와는 기력이 쭉 빠져 걷다 말고 가로등에 몸을 기댔다. 죽고 싶다……. 우울함이 발끝에서부터 꾸역꾸역 기어올라오는 감각에 오이카와는 치를 떨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로서도 항변할 말은 있었다. 사랑에 빠질 수 밖에 없었노라고. 넘어져 울고 있으면 툴툴거리면서도 달려와 일으켜주었고, 열이 올라 정신을 차리지 못할 땐 눈을 뜨는 순간마다 걱정어린 표정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허튼 짓을 하려 들면 손을 쥐고서 놓지를 않았고 늪에 파묻혀 허우적거릴 때에는 거침없이 그를 끌고 나왔다.
그가 어떤 잘못을 해도 어떤 실수를 해도 이와이즈미는 자신의 생에 오이카와를 내친다는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처럼 무슨 수를 써서라도 기어코 오이카와가 똑바로 걸어가게 만들어주었다. 옆을 보면 뚱한 표정으로 무슨 일이냐고 했지만 그렇게 언제나 옆에 있어 주었다.
정말로 사랑에 빠지는 것 말고는 도리가 없잖아.
그리고 그와 동시에, 마음을 말한다는 선택지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일생의 전부를 친구로 지내왔고 서로가 단 하나뿐인 절친한 친구라고 믿고 있었다. 말을 입 밖으로 꺼내게 되면 돌이킬 수 없게 된다. 오이카와는 마음을 깨달은 순간부터 저울을 기울여보고 있었다. 마음을 고백하는 대가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친구에게 솔직했다는 알량한 자기 위안, 그리고 아마도 미안하다는 이와이즈미의 사과. 그 이후의 어색하고 서먹한 거리감, 어쩌면 그대로 이별. 아주, 아주 어쩌면 이와이즈미가 고개를 끄덕여줄지도 모를 일이지만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를 두고서 도박한다는 선택지를 고를 수는 없었다.
그러니까 말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어차피 지금도 좋아한다는 말은 얼마든지 할 수 있으니까 그걸로 됐다고, 사귀어봤자 만나고 헤어지기밖에 더하겠어, 그러니까 이 마음은 평생 마음 속에만 묻어두고서 계속 함께 하겠다고.
‘으흑, 이건 생각 못했다고! 이와쨩한테 여자친구는!’
그래도 때로는 차마 이와이즈미에게 모두 보여주지 못한 마음이 넘쳐 흘렀다. 그럴 때면 오이카와는 그저 혼자 철철 흘러넘치는 것들을 애써 손으로 끌어모으다 어쩔 줄 몰랐다. 그러다 그런 순간 그에게 다가오는 사람이 있으면 오이카와는 그것들을 모아서, 넘치고 흘러버린 것들을 모아서 줘버리곤 했다. 이와이즈미에게 해주지 못하는 것들을.
오이카와의 여자친구들은 모두 그런 식이었다. 모두가 한 사람 대신이었고 그래서 오래가지 못했다. 잘못했다는 생각은 있었다. 이와이즈미가 안다면 무슨 짓을 한 거냐고 그의 머리를 후려칠지도 몰랐다.
그리고 이와이즈미는 그런 사람이기 때문에, 그의 여자친구에게 오이카와가 그랬듯 그러지는 않을 게 분명했다. 오이카와와 같은 이유로 만나는 것도 아닐 것이다. 진심으로, 자기 마음까지 기울만큼 진심으로 다정하려 노력하겠지.
오이카와는 쿵 하고 전봇대에 머리를 한 번 박았다가 비끗하여 쓰린 상처를 매만지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
“……오늘은 여자친구랑 안 가?”
“우리 부활동은 늦게 끝나잖아. 먼저 가라고 했어.”
아, 그렇지. 오이카와는 겨우 조금 풀어진 미소를 그렸다. 어제 하루 이와이즈미를 먼저 다른 길로 보낸 것뿐이었는데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아주 오랜만인 것처럼 느껴졌다. 오이카와는 저절로 새어나오려는 안도의 한숨을 안으로 끌어모았다.
“어제는 데이트 잘 했어?”
“어, 뭐. 그럭저럭.”
“또 그런다! 이와쨩 여자친구한테 그러면 미움받아요!”
“내 여친이 넌줄아냐.”
“그…….”
나 지금 내장이 푹 하고 긁힌 기분 들지 않았어? 오이카와는 속으로 왈칵 눈물을 삼켰다. 이와이즈미가 그에게 언제나 툭툭 던지곤 하는 그런 말일 뿐인데도 마음처럼 유연한 반응을 해낼 수 없었다. 오이카와는 애써 웃었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너 이마는 또 뭔데? 왜 그래?”
“어? 아…….”
오이카와는 깜짝 놀라서 앞머리가 스쳐지나가는 쪽 이마를 손으로 가렸다. 어제 괜히 속이 상해서 전봇대에 대고 쿵쿵거리다가 이 꼴이 났다곤 죽어도 말할 수 없었다. 차라리 좋아한다고 고백을 했으면 했지! 오이카와의 결연한 표정을 보고서 대번에 이와이즈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뭔데. 어디다 또 갖다 박았냐?”
“아, 아니. 그게. 길 가다가…….”
아아, 지금 오이카와 씨 표정 엉망일게 분명해요. 오이카와는 속으로 울상을 삼키곤 더듬더듬 말을 늘어놓았다. 이와이즈미가 팔을 뻗어 이마를 가리고 있는 오이카와의 손을 휙 잡아내렸다.
“또 약도 안 발랐지?”
“어어…….”
“얼굴 말곤 볼 것도 없는 놈이.”
“아, 아니거든! 이 오이카와 씨가 좀 잘생기긴 했지만!”
겨우 보통 때처럼 발끈하는 얼굴을 만들어서 빽 소리쳤더니 이와이즈미가 그의 등을 퍽 하고 내리쳤다. 집에 가서 연고 똑바로 발라, 임마. 이와쨩, 아파……. 오이카와는 으레 그러듯 홧홧한 등을 매만지며 울상을 지었고 이와이즈미가 전혀 신경쓰지 않는 얼굴로 정면을 본다. 오이카와는 어렵게 눈을 피해 입술을 삐죽거렸다. 고작 이런 걸로 내가 받은 마음의 상처가 어떻게 될 거라고 생각하지 마! ……내가 마음에 상처를 받았는지도 모르겠지만.
“이제 이런 거 알아서 좀 해라. 나이가 몇인데.”
“……왜? 이와쨩이 챙겨줄 거잖아!”
“이게 사람을 진짜 보모인줄 알지?”
이와이즈미가 확 눈썹을 치켜올리며 그를 돌아본다. 오이카와는 아니라며 서둘러 부정에 부정을 하고 사과까지 십수마디를 더 덧붙인 뒤에야 이와이즈미의 표정을 원래대로 되돌려놓을 수 있었다.
그 날 이후로 이와이즈미는 때때로 여자친구와 약속이 있다며 오이카와를 두고서 먼저 돌아가는 일이 생겼고,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를 붙잡지는 않았다. 데이트 에스코트는 잘 해주느냐고 놀리는 말을 겨우 할 뿐이었다.
“……오늘도 데이트 있어?”
“어, 아아…….”
이와이즈미가 교복을 평소보다 서둘러 갈아입으면, 그건 그 날 그녀와의 일정이 있다는 뜻이다. 오이카와는 스스로의 상태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눈동자를 굴리며 짚어보았다. 오늘 오이카와 씨는 표정부터 웃는 얼굴이 나와주질 않네요. 그야 이와쨩이 어제도 데이트 갔으면서 오늘 또 가니까!
“이와쨩, 그거……. 꼭 가야 돼?”
“……꼭 가야되는 게 아니라 약속이니까 그렇지.”
이와이즈미가 답지않게 조금 어르듯이 말한다. 오이카와는 겨우 웃을 수 밖에 없었다. 차라리 등을 후려치는 이와쨩이 나아. 여자친구랑 약속 어기고 싶지 않아서 억지로 상냥해지기까지 하는 이와쨩이라니, 정말로 최악이야.
“그으~렇지, 뭐! 그럼 안녕히 다녀오시죠, 이와쨩! 오이카와 씨는 오늘도 혼자 돌아가겠습니다아.”
오이카와는 장난기를 한껏 섞어 투덜거렸다. 그 말에 이와이즈미가 돌아서지 않고 가만히 멈춰서서 그를 바라보았다.
“……뭐가 그렇게 섭섭하냐.”
그를 구박하는 것 같기도 했고 답을 구하는 것 같기도 하고, 억지로 웃는 얼굴을 만드는 데에 모든 기력을 쏟아붓고 있는 오이카와로서는 감정을 종잡을 수 없는 질문이었다. 오이카와가 무슨 그런 질문을 하냐는 듯이 입술을 툴툴거렸다.
“섭서업? 당연히 섭섭하지! 여자친구 생기고 나서부터 이와쨩이 나한테 불성실해졌다구?”
“……말은 잘해요. 너도 그랬거든!”
“나, 나는 안 그랬어!”
오이카와는 이 말만은 진심을 담아 빽 소리쳤지만 이와이즈미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눈치였다. 그래, 그래, 건성으로 대답하곤 몸을 돌려 체육관을 나간다.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결국 손에서 힘을 푼 오이카와는 고개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내가 여자친구 만들었을 때 상처받은 것처럼 말하고 있어…….
그런 거, 전혀 아니면서.
*
연인들이 할 수 있는 수없이 많은 처음에 대하여 어째서 생각하지 못했느냐 한다면, 오이카와는 억울해서 버럭 외칠 말이 많았다. 나도 사람인걸! 아픈 생각은 피하고 싶은 게 당연하잖아!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생각해두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싶어지고 만다. 이와이즈미가 데이트도 갔겠다 아무도 건드릴 사람이 없으니 신명나게 혼자서 서브 연습을 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오이카와는 처음엔 가로등 뒤에 어찌어찌 숨었다가 이 얇은 기둥으로는 무엇도 가리지 못한다는 걸 깨닫고는 얼른 골목을 찾아들어갔다. 멀찍이서 두 사람이 걸어오고 있었다. 서로 한 손을 맞잡고 있다. 그리고 그 둘 중에 한 명은, 오이카와가 그림자만 보고도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이와쨩……이랑 이와쨩 여자친구다…….’
으아. 지나가는 길인가? 어쩌지? 진짜로 보고싶진 않은데. 오이카와는 골목길 사이에 주저앉아서 배구공을 꽉 끌어안은 채 이 난관을 어떻게 해결할지 고민했다. 담이라도 타고 넘어볼까? 진심으로 담벼락을 올려다보았지만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넘어가는 건 무리일게 뻔했다.
다행이 두 사람은 오이카와가 있는 골목길까지 오지는 않았다. 이 근처가 이와이즈미의 여자친구네 집인 모양이었다.
‘데려다줬나보네. 하긴 나도 데려다주는데.’
오이카와는 골목 너머로 흘끗 쳐다보곤 괜히 뺨을 부풀리고 투정조로 생각했다가 그것도 그만두었다. 왈칵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하지만 뭐라고 하고 울겠는가. 친구한테 여자친구가 생겨서요? 여자친구를 집까지 데려다줘서요? 오이카와는 입술을 꽉꽉 깨물고서 하늘만 올려다보았다. 두 사람이 무어라 대화를 나누는 것 같은데 목소리까지는 들리지 않았다.
그러다가 문득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땐 대화 소리가 멎은 뒤였다. 오이카와는 슬쩍 골목 너머로 고개를 내밀었다가,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가로등의 어둑한 불빛 아래에서도 이와이즈미의 얼굴은 선명하게 보였다. 그리고 이와이즈미가 앞에 선 소녀의 머리카락을 살짝 쓸어넘겼다. 그를 대할 때와는 전혀 다른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이와이즈미가 천천히 고개를 숙이고, 그리고…….
뚝, 오이카와는 자신의 손등에 떨어진 빗방울을 내려다보았다. 늦은 밤이었으나 구름 하나 없이 청명한 날이었다. 오이카와는 덧없는 웃음이라도 지어보려고 했지만 빗방울은 쉴새없이 툭투둑 떨어져내렸다.
생각, 했어야했는데.
뒤늦은 후회가 물밀듯이 쏟아졌다. 생각을 하고 있었어야 했는데. 아무런 각오도 다짐도 없이 직시하고 만 현실은 몹시도 아팠다. 둘은 연인사이이고, 몇 번이나 데이트도 했고, 손을 맞잡고 귀가하니까, 그 다음도 어쩌면 당연한데.
그런데…….
“……오이카와.”
“흐압.”
배구공 위에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던 오이카와는 깜짝 놀라서 번쩍 고개를 들었다. 등 뒤로 가로등 빛을 인 이와이즈미가 눈살을 찌푸린 채 그를 보고 있었다. 놀란 오이카와가 뒤로 넘어가려는데 이와이즈미가 덥석 그의 팔을 잡아채 일으켜 세웠다.
“어, 어떻게.”
“뭘 어떻게야. 숨는 것부터 다 봤거든.”
“지, 진짜?”
오이카와를 세워놓고서, 이와이즈미는 팔짱을 낀 채 오이카와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오이카와는 놀라서 눈물이 그쳐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어쩔 줄 모른 채 이와이즈미의 눈을 피했다.
“울었냐?”
“아, 아니거든요? 이 오이카와 씨가 왜 울어요?”
“흠.”
‘안 믿어’라는 뜻의 흠, 이다. 오이카와는 자신의 입을 때리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기만 했다. 그 뒤로 한참이나 오이카와를 바라만 보던 이와이즈미가 덥석 오이카와의 손을 낚아챘다.
“가자.”
오이카와는 손을 뿌리치지도 않고 맥아리 없이 이끌려가며 이와이즈미의 뒷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어렸을 때와 똑같았다. 그가 처음으로 또래 친구들과 다투었을 때, 이와이즈미는 어디선가 번쩍 하고 나타나서는 다툼도 시비도 다 주먹으로 꽝꽝 끝내버리곤 이렇게 그의 손을 잡아 끌고 집으로 향하곤 했다.
“……어어, 이와쨩, 여기 어디…야……?”
집으로 향하곤 했는데……. 오이카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집에서 조금 멀리 떨어져 자주 가지 않는 공원이었다. 시간이 늦어 지나가는 사람도 없이 한적했다. 공원 벤치 쪽에 다다랐을 때 이와이즈미가 오이카와의 손을 놓고 뒤돌아서서 그를 바라보았다.
“너 왜 울었는데.”
“크헙.”
이와쨩, 너무 직구야……. 오이카와는 굳은 표정을 풀질 못하고서 입술을 달싹거리기만 했다.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의 말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뭐가 그렇게 서운해 죽겠는데?”
“……어어, 그게요…….”
“왜 울었어. 뭘 보고 울었는데. 거기 숨어서 뭐했어?”
“아, 아니…….”
나 안 그래도 요즘 쭉 서러워서 죽을 것 같았는데 그렇게 추궁하면. 오이카와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면서 어떻게든 둘러댈 말을 쥐어짜고 싶었지만 이와이즈미가 입맞추는 현장을 목격한 충격과 근래의 마음고생 탓인지 생각만큼 머리가 돌아가질 않았다.
“저기요, 이와쨩…….”
“어. 말해봐.”
“그러니까 그게요…….”
마음이 짓이겨지고 그렇게 흐르는 진물이 차고 넘쳐서 버럭 외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런데도 말하지 않는 것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어떻게도 이와이즈미를 잃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랬는데…….
“야, 아, 아니. 야, 오이카와. 내가 뭐, 뭐랬다고 울어. 야. 야야.”
“우, 우는 거 아니거든!?”
오이카와는 빽 소리치고는 결국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으아, 눈물아 좀 그쳐봐! 주인님 인생이 망하고 있다구! 하지만 말을 들을 줄 모르는 눈물은 그칠 줄도 모른다. 한참을 당황해 허둥거리던 이와이즈미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꾸 오해하게 하지 마라, 오이카와.”
“무, 무슨 오해요.”
오이카와는 앵도라진 목소리를 내면서도 서둘러 눈물을 그치게 하려고 애썼다. 노력한 것은 보람이 있어서 목소리에는 눈물이 꽉 들어차긴 했으나 그나마 멈출 수 있었다.
“내가 여자친구 생긴 게 뭐라고 네가 이렇게 우냐.”
“…….”
이와쨩에게 여자친구가 생긴 게 뭐라고 내가 우냐고? 그야, 내 세계가 전부 망가지게 생겼으니까. 이 말을 할줄 알고. 죽어도 안 할거야. 죽어도. 죽어도, 절대, 죽어도…….
“너 이렇게 울고 그러면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줄 알긴 하냐? 어? 멍청아.”
“무, 무슨 생각을 하는데.”
바보라는 생각? 멍청이라는 생각? 아, 이미 멍청이라고 불렀지. 그러면 귀찮고 번거롭다고 생각할까? 손이 많이 간다고?
오이카와는 답은 이미 알고 있다며 젖은 뺨을 쓱쓱 닦아냈고.
“아, 나 좋아하나? 하고 생각하거든.”
오이카와의 눈물로 젖은 종이같은 세계가 단번에 찢어졌다.
*
오이카와는 처음에는 얼어붙었다가 그 다음에는 입을 딱 벌리고서 이와이즈미를 바라보았다. 이와이즈미는 아까 전부터 쭉 그를 곧게 바라보고 있었다. 오이카와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
어떻게 알았어,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 손에 잡힐 듯이 보이는 표정이었다. 이와이즈미는 끝내는 오이카와의 시선을 피하고서 한숨을 쉬었다. 햇빛은 모두 자취를 감춘 어둑한 밤이어서 붉어진 목덜미는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여자친구는 도대체 왜 만들고 다녔냐?”
“마, 만든 건 이와쨩이잖아!”
“네가 먼저거든.”
일부러 평소마냥 구박하는 투로 말을 해보는데 겨우 그치게 해두었던 오이카와의 눈물이 또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내가 죄인이지, 이와이즈미는 한숨을 푹푹 내쉬며 오이카와의 뺨을 손바닥으로 쓱쓱 닦아냈다. 그래도 눈물은 멎지를 않았다.
“그리고 울기는 왜 우냐고, 도대체.”
“이, 이와쨩이 뽀뽀했잖아! 여자친구랑! 첫키스!”
“……이게 진짜. 일단 안했고 했어도 첫키스는 아니거든!?”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오이카와가 세상이 다 무너진 표정을 지으며 이와이즈미를 바라본다. 이와이즈미는 부글부글 끓는 속을 꾹꾹 내리눌렀다. 이 녀석 새까맣게 다 잊어먹었구만?
“그, 그럼 누구랑 했어? 나 몰래 했어?”
“뭘 너 몰래 해!”
“그럼 누구냐니까!”
“너다, 임마! 너! 너! 초등학교 때 대차게 박아놓곤 다 까먹었지? 어?”
“……아?”
오이카와가 둥글게 뜬 눈을 깊이있게 깜빡, 했다. 남은 눈물이 후두둑 쏟아졌다. 그제야 눈물을 그친 형상이다. 이와이즈미는 머리가 띵하고 아파서 아까부터 연거푸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그에겐 아무 관심 없다는 듯이, 몇 번이나 여자친구가 바뀌는 것을 아무 말 하지 못하고 보기만 해야했다. 그런가보다 했다. 자신의 마음은 열병으로 생각해 묻어두기로 했다. 언제나 아슬아슬하고 위태로워 눈을 뗄 수 없었던 그의 소꿉친구는, 그의 시선도 관심도 마음도 모조리 가져가놓고서는 모르는 척 새침하게 웃기만 했다. 그래, 그만해야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돌아서는 그를 보는 오이카와는 언제고 수도꼭지가 터질 듯이 아슬아슬 울듯 말듯한 얼굴로 그를 보고 있었다. 세상의 마음 아픈 것은 모두 자기 심장에 둔 것처럼 다쳐서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그 얼굴을 보고 있자면 또 금방 마음이 흔들려서 약속도 무엇도 다 그만두고 저 녀석 챙겨 집에 가야겠다, 싶다가도. 그러지 않기로 했잖아, 했다가도.
“말해.”
“네, 넵?”
“말하라고. 나한테. 지금. 네가 하는 생각.”
저렇게 울려가면서까지, 하고 싶은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당장 말해.”
“……도망 안 간다고 약속해.”
“약속해.”
“서먹해지지 않을 거라고 약속해줘.”
“약속한다.”
“앞으로도 쭉 나랑 있어줄 거라고도 약속해.”
“……빨리 말 안하냐?”
오이카와가 고개를 푹 떨어뜨렸다. 머리카락이 흩어졌다. 우느라 지쳐, 귓가에는 땀방울이 맺혀있다. 닦아주고 싶었다.
“이와쨩이 좋아…….”
“맨날 하는 말이잖아.”
“…….”
“어떻게 좋은데.”
“그, 그럼 이와쨩은?! 나 좋다고는 한 번도 말 안했-.”
오이카와가 번쩍 고개를 들고 빽 소리치다가 그의 목소리가 이와이즈미의 입술에 푹 묻혔다. 은하수 흐르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 정적 뒤에 이와이즈미가 겨우 오이카와를 놓아주었다. 이와이즈미는 제발 붉어진 얼굴이 들키지 않기를 바라며 말했다.
“이렇게 좋다고.”
“…….”
“어떻게 좋은데, 넌.”
하지만 이와이즈미는 결국 오이카와의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오이카와가 그의 옷깃을 붙잡은 채 하늘을 보고 펑펑 울어버렸던 것이다. 아주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울기만 한다. 이와이즈미는 우는 오이카와의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오이카와는 정작 기억도 하지 못하는 불꽃같은 첫 입맞춤의 추억을 연거푸 말해주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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