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쿠아카 | 9월의 겨울
늦었지만 보쿠토상 생일축하해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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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보쿠토는 굴러가는 공을 집어들었다가 고개를 들었다. 바로 코앞의 벤치엔 누군가가 앉아있었다. 반팔 셔츠 차림의, 어린 보쿠토는 처음보는 형이었다. 잠깐 고민하던 보쿠토는 자신의 손에 끼고 있던 벙어리 장갑을 슥슥 벗었다.
“형아!”
“……맙소사.”
무릎에 팔을 괸 채 앞만 바라보고 있던 소년이 ‘형아’ 소리에 옆을 바라보았다가 눈을 크게 떴다. 마치 어린 보쿠토를 알아본 것 같았다. 보쿠토는 고개를 갸웃했다.
“웅?”
“어쩜 이렇게 똑같이 생겼을 수가…….”
“응? 나? 누구랑?”
“……아니, 아닙니다. 아, 그러니까……아니야. ……놀러 나왔어? 집에 가는 길이니?”
보쿠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하고 대답한 소년은 가볍게 재채기를 했다. 어린 보쿠토는 뺨을 부풀렸다. 이 추운 날에 반팔을 입고 있으면 당연히 기침을 한다. 하지만 소년은 재채기를 한 번 하고서, 이 추운 날씨에 자신의 팔을 한 번 쓸어본 다음 도리어 어린 보쿠토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아 시선을 마주하더니 옷깃을 정돈해주기 시작했다. 헝클어진 목도리는 바로 채워주고 어린 보쿠토가 잠깐 벗었던 벙어리장갑도 다시 손에 끼워준다. 보쿠토는 얼른 고개를 흔들었다.
“아, 아냐!”
“응?”
“형아! 이거 줄게!”
어린 보쿠토는 소년이 끼워주었던 장갑을 다시 벗어 소년에게 내밀었다. 소년은 고개를 갸웃했다. 어린 보쿠토는 추위 탓에 발갛게 달아오른 뺨을 부풀리고서 자못 엄하게 말했다.
“그케 입고 다니면 감기 걸린다! 엣취 해!”
“이미 한 것 같지만……. ……오늘 며칠이지?”
“오늘? 웅……. 12월 5일?”
“……그래?”
“왜?”
소년은 보쿠토가 내미는, 자신의 손에 반이나 찰까 싶은 어린이용 벙어리 장갑을 가만히 쓸어보며 조그맣게 미소지었다. 어린 보쿠토는 눈을 깜박거렸다. 소년의 청록색 눈동자는 다정한 색이었다.
“여기서는 오늘 제 생일이네요……. 내 생일이네.”
“형아 생일이야? 진짜?”
“……응.”
어린 보쿠토는 일단 소년의 손 위에 벙어리 장갑을 턱 올려놓고는 메고 있던 책가방을 풀어 그 안을 뒤흔들었다. 곧 먹지 않고 아껴두었던 사탕과 초콜렛이 한움큼 나온다. 소년은 반쯤 웃음을 참고 있었다.
“형아 자! 생일 축하해!”
“……정말 어쩜 이렇게 똑같은지…….”
“아?”
“아니요. 고맙습……고마워.”
소년은 어린 보쿠토가 챙겨주는 것들을 품에 잘 갈무리하고는 빙긋 웃으며 보쿠토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생일 축하해요.”
“응? 내 생일 아닌데? 오늘은 형아 생일이라며?”
“네, 그런데……. 하, 누가 누구 선물을 주는 건지. 저한테는 보쿠토 선……. 그러니까 네 생일이었어.”
이 형아는 누군데 내 이름까지 알지? 내 생일은 지났는데. 어린 보쿠토는 엄격한 눈으로 소년을 올려다보았지만 소년은 거기까지는 신경쓰지 못하는지, 해가 저무는 길목 너머를 흘끗 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생일 선물 고마워. 얼른 집에 들어가. 감기 걸리겠다.”
“형아도 감기 걸려!”
“난 이거 있으니까.”
소년은 자신의 손 안에 있는 벙어리 장갑을 보며 빙긋이 웃었다. 어린 보쿠토는 왠지 이대로 돌아가면 안 될것 같아서 머뭇거렸지만 소년이 그의 등을 떠밀었다. 얼른 가렴.
“형아 여기 살아?”
“곧 이사 올거야.”
“언제?”
“글쎄……. 백 밤 자고 나면?”
백 밤이나 자야 한다니, 너무 멀다. 어린 보쿠토는 뺨을 부풀린 채 어딘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뭐가 이상한지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었다.
“공놀이 재밌니?”
“응!”
“……그래.”
“형아는? 형아도 할래?”
“나는 다음에.”
“치, 거짓말…….”
“거짓말 아닌데.”
“아냐! ‘다음에’는 다 거짓말이야!”
‘다음에’ 하자고 해놓고서 정말로 다음에 해준 사람은 한 명도 없는 걸 어린 보쿠토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그의 표정을 보고서 소년이 부드럽게 눈을 내리깔았다.
“조금 오래 지나서긴 하겠지만, 꼭 같이 할거야.”
“……정말?”
“응. 그러니까 오늘은 더 늦기 전에 들어가렴.”
소년이 다시 그의 등을 떠밀었다. 보쿠토는 주춤주춤 걸음을 옮겼다. 뒤돌아 볼 때마다 소년은 여전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침내 어린 보쿠토가 마지막 골목을 돌아설 때, 소년은 어린 보쿠토가 주었던 조그만 벙어리장갑에 뺨을 묻고 있었다.
*
“거기 형아? 괜찮아?”
“…….”
소년 보쿠토는 한 겨울에 반팔 차림으로 벤치에 앉아있는 사람을 알아보고는 조금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눈이 올락말락한 날씨에 반 팔만 걸치고 있다니, 이 정도면 좀 수상쩍으니 피해갈 법도 했지만 왠지 눈길이 가 어쩔 수가 없었다. 소년 보쿠토는 마음이 끌리면 주춤거리는 법이 없었다. 앉아있던 사람이 가볍게 재채기를 하고는 고개를 들었다. 소년 보쿠토는 그게 이 근처 고등학교의 교복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고등학생 형들이 여름 내내 입었던 옷이었다. 상대는 마치 마네킹에 입혀둔 것처럼 단정한 차림새로 그를 빤히 보더니 한 마디를 툭 뱉었다.
“초등학생?”
“뭐, 뭐어! 내년엔 4학년 되거든!”
청록색 눈동자가 가늘어진다. 보쿠토는 그게 상대방의 미소라는 걸 알아차렸다. 거기까지 정신을 차린 보쿠토는 일단 목에 감고 있던 머플러를 벗어 그에게 불쑥 내밀었다.
“감기 걸려!”
“……이런 건 변하질 않네요.”
“어? 나 알아?”
“어렸을 때 몇 번 봤어요.”
보쿠토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크게 의문을 가지지는 않았다. 이 근방에서는 대개 그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상대가 그의 앞에 몸을 굽히고 서서 옷깃을 정돈해주었을 때 소년 보쿠토는 불현듯 아주 어렸을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상대가 말했듯이 ‘어렸을 때’였다.
“어……. 어! 12월 5일! 오늘 생일인 형아!”
“……그…….”
“백밤 자면 여기 이사온대놓구서 거짓말 한 형아다!”
“……아니, 그게. 아니 그걸 어떻게 기억을…….”
“방금 생각났어!”
보쿠토는 일단 몸을 굽힌 상대방의 목에 머플러를 휙 둘러준 다음 억울함을 가득 담아 소리를 높였다. 백 밤 자면 이사와서 같이 공놀이 해 준다고 해놓고서 안 왔으니 거짓말쟁이라고. 그의 탄핵을 한참이나 듣던 상대가 미약한 웃음을 섞어 한숨을 내쉬었다.
“친구 많잖아요.”
“그거랑 무슨 상관이야!?”
“저 말고 놀아줄 친구 많으면서.”
“내가 형아랑 놀고 싶댔지!”
“……그 때 처음 한 번 봤잖아요.”
“그거랑은 상관 없잖아!”
보쿠토는 상대가 자꾸만 이상한 얘기만 한다고 생각하여 입술을 삐죽거렸다. 처음 만났든 한 번 만났든 그게 그렇게 중요한 건가? 같이 놀기로 했고 약속도 했는데. 소년 보쿠토는 한참을 투덜거렸고 상대는 그 말끝마다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그리고 소년 보쿠토는 주머니를 뒤져 막대사탕 하나를 찾아냈다.
“오늘 또 생일이지?”
“……그렇네요.”
“형아, 근데 집에서 누가 괴롭혀?”
“네?”
“나도 울 엄마 아빠가 가끔 나 괴롭히면 빤쮸바람으로 내쫓거든……. 막 겨울에도……. 형아도 그래?”
사탕을 받은 상대가 잠깐 멍하니 그 말을 듣고만 있다가 입을 가리고서 웃음을 흘렸다. 그런 것 아니라며 고개를 젓는다. 소년 보쿠토는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 그런 게 아니라 선물로 온 거지만요.”
“선물?”
“네. 그런데 날짜가 왜 이런지…….”
“왜긴 왜야, 눈이 와야 되니까 이렇지.”
“그런가요.”
소년 보쿠토는 다 안다는 투로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는 또 조그맣게 웃었다.
“선물 감사합니다.”
“그거 진짜 제일 맛있는거야. 사실 오늘 밤에 몰래 먹으려고 아껴뒀던 건데 형아 주께.”
“고마워요.”
“이사는 왔어? 어디 살아?”
“아…….”
상대는 조금 난처한 듯이 시선을 피했다. 소년 보쿠토는 진지한 표정으로 상대의 대답을 기다렸다. 잠깐의 침묵 끝에 상대가 몸을 굽히고 소년과 눈을 마주했다.
“내년 이맘때쯤이요.”
“내년에? 365일 자는 거야?”
“그런 것도 알고 있나요.”
“학교에서 배웠어! 1년은 365일! 한 달은 30일! 31일일때도 있구!”
“그렇지요. 똑똑하네요.”
소년 보쿠토는 우쭐거리는 표정을 지었다. 상대는 사탕을 한 번 쓸어보고는 허리를 폈다.
“감기 걸리겠어요. 들어가세요.”
“형아도 집에 가?”
“아마도요. 해가 지면.”
“해 질 때까지 한참 남았는데? 반팔이잖아, 안 추워?”
“좀 많이 춥긴 한데……. 해는 금방 질 거예요. 이거 봐요. 벌써 그림자가 길어졌잖아요.”
상대는 천천히 보쿠토의 등을 떠밀었다. 얼른 들어가봐요. 머플러 고마워요. 언젠가 돌려줄게요. 소년 보쿠토는 돌려주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왠지 그가 떠미는 대로 걸음을 옮기게 되어 말끝이 흐려지고 말았다.
보쿠토가 마지막 골목을 돌아나갈 때 상대는 손 안의 막대사탕을 무언가 애틋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
신나게 스파이크를 내려친 것까지는 좋았는데 공이 기운차게 굴러가 체육관 밖으로 빠져나갔다. 체육관 밖에서 설렁설렁 따라잡으려는데 바람이 한 번 불더니 이제는 교문 밖으로 쌩하니 굴러간다. 보쿠토는 다급한 표정이 되어 반쯤 뛰다시피했다. 그가 공을 낚아챈 건 교문 밖까지 나와서였다.
그리고 이번엔, 보쿠토는 상대를 보자마자 알아차렸다.
“허, 허억. 귀신!”
“……네?”
이 한 겨울에 반팔 셔츠 차림으로 서서 작게 재채기하던 남자가 그를 돌아보곤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보쿠토는 망설이지않고 주위를 둘러보다가 남자의 팔을 잡아끌고 구석으로 향했다.
“형아, 아직도 성불 못했어?”
“……이게 무슨…….”
“아, 오늘 생일이지. 으아, 연습하다 나와서 줄 거 아무것도 없는데……. 어떡하지. 생일파티 해줄까? 그럼 성불하나?”
“잠시만요. 잠깐. 무슨 소린지…….”
보쿠토는 한껏 안타까운 표정으로 상대방을 바라보았다. 그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기억에 있는 상대였다. 첫만남은 유치원에 다닐 때, 돌아오는 길에 추워보였던 그에게 벙어리장갑을 주었다. 두 번째 만남은 초등학생이었을 적에, 그 때도 추워보였던 그에게 두르고 있던 머플러를 주었다.
잊어버리기에는 상대의 인상이 강렬해 잊을 수가 없었다. 서늘하고 조각같은 표정, 먹을 부은 듯이 깊고 검은 머리카락과 어딘가의 심해 조각같은 청록색 눈동자는 보쿠토로서는 드물게 본 미형이었고 그 사람이 가만히 그를 보더니 웃음을 비추었을 땐 무언가가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는 감각만이 남아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겨울마다 가끔 만났던 그 남자의 모습이 거의 변하지 않았다는 걸 알아차렸다. 자신은 유치원생이던 시절부터 이제 곧 있으면 고등학교 2학년이 되는데, 겨울마다 보던 그 남자는 매번 비슷한 인상이었다. 대부분은 이 근방 고등학교의 교복이었고 항상 그를 안다는 투로 말했다. 어느날은 자기 전에 누워 가만히 그에 대해 생각해보다가, 보쿠토는 벼락처럼 깨달음을 얻고 벌떡 자리에 일어나 앉았더랬다. 귀신이구나! 그렇게 생각하면 모든 게 앞뒤가 맞았다. 이 한겨울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반팔도, 처음 보는 것이 분명한데도 자신을 속속들이 알아보는 것하는 것도, 묘하게 사람 마음을 휘젓는 것도 딱딱 들어맞는다.
“귀신을 이렇게 잡을 수 있습니까.”
“……아…….”
“애써 매해 왔더니 귀신이란 소리나 듣고……. 가겠습니다.”
“헉, 혀, 형아! 형! 잠깐! 잠깐만! 미안! 잘못했어!”
보쿠토는 깜짝 놀라서 얼른 남자를 붙잡았다. 돌아본 남자는 무표정했지만 보쿠토는 그 안에 숨겨진 장난기 어린 웃음을 기민하게 알아차렸다.
“아, 아니. 나는……. 아 뭔가 이상하잖아!”
“이상합니까?”
“아니, 꼭 이 날에 우연히 만나는 것도 그렇고 항상 반팔인 것도 그렇고……. 그렇게 어릴 때 봤는데 안 잊어먹은 것도 그렇고…….”
보쿠토는 투덜거리듯 말하며 걸치고 있던, 번호가 쓰인 조끼를 벗어 건네주었다. 연습 경기를 막 끝마치고 나서도 연습을 하고 있었다. 자신이 고집을 부려서 하던 연습이니 얼른 돌아가야 할테지만 왠지 남자를 두고 갈 수가 없었다.
“일단 팔이라도 감싸고 있어봐. 뭐냐구 매번, 한 겨울에 반팔로.”
“저도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 건 아니에요.”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어딘가 그리운 것같은 눈으로 그 조끼를 바라보았다. 보쿠토는 괜히 가슴이 덜컥 내려앉아 조끼를 왈칵 뭉치고는 그의 품에 안겨주었다.
“그럼 왜 이렇게 오는 거야?”
“좋아하는 사람 소원을 들어주느라.”
“……형, 좋아하는 사람 있어?”
까닭을 모르고서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남자는 그런 보쿠토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엉뚱한 소리를 했다.
“보쿠토 선……. 크흠. 좋아하는 사람 있습니까?”
“그, 글쎄. 뭐어, 나도 한 명쯤…….”
“없구나.”
“…….”
정곡을 찔려서, 보쿠토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래, 없다!
“엄마가 밥 먹기 전엔 과자 먹는 거 아니랬다.”
“네?”
“밥 먹기 전에 과자 먹으면 과자 너무 맛있어서 밥이 맛 없어져버리니까.”
“……네?”
보쿠토는 남자가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는 줄 알면서도 투덜거리듯 말했다. 설명해주고픈 마음은 들지 않았다. 보쿠토가 한참이나 모르쇠로 입을 다물고 있자 남자는 골목 너머를 흘끗 보고는 말문을 텄다.
“이제 곧 있으면 고등학교 2학년이 되나요?”
“응.”
“그렇구나……. 그럼 이제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 사람이 첫사랑이겠네요.”
“……모르지, 그건.”
보쿠토는 때마침 발치에 보이는 돌멩이를 걷어찼다. 남자는 부드럽게 웃었다.
“소원이 뭔지 설명 좀 해 줘요.”
“……응?”
“내년에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거든 도대체 이게 무슨 소원이었는지, 설명 좀 해 주세요. 그리고…….”
“에, 에에?”
골목길 너머로 노을이 저물고 있었다. 남자는 길게 늘어지는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처음부터 생일 축하해주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소원 들어달라고 꼭 먼저 말해주세요.”
“에?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형아? 형? 오늘은 형 생일이잖아!”
“그러니까 말이에요.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남자는 부드럽게 웃으며 보쿠토가 쥐어준, 4번이라는 등번호가 적힌 조끼를 가만히 쓸었다.
“이거, 제가 가져도 될까요.”
“어……. 어어, 하지만…….”
“제 생일 선물로요. 안 될까요.”
“가, 가져도 돼. 괜차, 괜찮아.”
보쿠토는 감독님께 혼이 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어쩐지 어찌할 바를 모르고서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남자는 금방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곤란하게 만들어서 미안해요.”
“아, 아냐! 별로! 곤란하지는!”
“이제 곧 약속 지킬 거니까…….”
“약속?”
보쿠토는 고개를 갸웃했다. 남자는 눈을 내리깔고는 이제 돌아가보라고 그의 등을 떠밀었다. 보쿠토는 주춤 주춤 학교 쪽을 향해 걸어가며 뒤를 돌아보았다. 남자는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보쿠토는 교문 앞에 서서 한번 더 뒤를 돌아보았다. 남자는 애틋한 눈으로 그 조끼를 바라보고 있었다.
*
“아카아시! 아카아시!”
“……네?”
숨을 몰아쉬며 드링크를 마시던 후배가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오늘은 그의 생일이었다. 오늘 하루종일 보쿠토는 몹시도 바빴다. 교실에서도 생일 파티를 했고 점심시간엔 부원들끼리 다 같이 모여 미리 사온 케이크를 나누어먹으며 간소한 파티를 했다. 선물은 모두 함께 돈을 모아 케이크와 보쿠토의 무릎 서포터를 사주었더랬다. 한 살 어린 이 후배도 거기에 보탠 것을 보쿠토는 이미 알고 있었다.
모두들 돌아가고 둘만 남아 하는 연습이었다. 후배는 숨에 부쳐 하면서도 고집이 있어서, 그가 그만두자고 하기 전에는 본인이 뒤로 넘어갈 때까지도 관두지를 않았다.
후배가 땀을 닦아내며 허리를 펴고 그를 바라보았다.
“보쿠토 선배?”
“나 오늘 생일인 거 알아?”
“……알죠.”
학교가 다 들썩거린 건 아세요? 후배의 눈동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게 된지 오래다. 보쿠토는 씩 웃으며 후배의 양손을 덥석 쥐었다.
“내 생일선물은?”
“네?”
“내 생일 선물은~!”
“그……서포터 다 같이…….”
“그거 말고! 아카아시가 나한테 주는 거는!”
후배의 표정이 곤혹스럽게 변한다. 하지만 보쿠토는 그 귀끝이 물드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자꾸만 웃음이 나오려고 해서 꾹 눌러 참는 것이 힘들었다.
“준비 못했어? 어어? 이것 봐라? 응? 제일 친한 선배 생일인데 따로 준비한 것도 없고?”
“……제일 친한……입니까?”
“나하고 제일 친한 후배 아카아시니까 당연히 아카아시랑 제일 친한 선배도 나지!”
당당하고 뻔뻔하게 턱을 세워본다. 후배는 애써 한숨 쉬는 척하고 있었지만 목덜미가 붉었다. 연습을 정리하고 나와서 교복으로 갈아입고 교문을 나설 때까지도 보쿠토는 연신 준비 못한 불성실한 후배를 놀렸고 후배는 따박따박 받아치면서도 여전히 귓가가 붉었다. 노을이 지는 하늘을 흘끗 본 보쿠토는 고개를 숙이고 후배와 눈을 마주했다.
“내 생일 선물 준비 못했지?”
“……네.”
“그럼 대신 내 소원 들어줘.”
“……소원이요? 제가 할 수 있는 것에 한해서입니다.”
“야! 이럴 때는 뭐든 들어드리겠습니다! 하는 거지!”
“공수표는 함부로 쓰는 거 아닙니다.”
“……아카아시, 진짜…….”
보쿠토는 맥이 탁 풀린 표정으로 입술을 삐죽거리다가 또다시 금방 살아나 아카아시 앞에서 활짝 웃었다.
“그~러~니~까! 소원 들어줘!”
“……뭔지 말씀부터 해보세요.”
“아, 근데 아카아시. 긴팔 저지 없어? 그거 챙기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그건 락커룸에 있죠……. 안 들고 왔는데. 긴팔은 왜요?”
“겨울 추울텐데…….”
“네?”
아까부터 계속 보쿠토가 알아듣지 못할 말을 한다, 후배의 눈이 의심스러운 걱정으로 가느다랗게 변했다. 보쿠토는 헛기침을 하고서는 후배의 등을 탕탕 두드려주었다.
“보쿠토 선배? 그래서 소원이 뭡니까?”
“-내 첫사랑 생일 축하하게 해줘!”
“……네?”
그렇게 외치는 것만은, 보쿠토도 마음이 떨렸다. 갑자기 호흡이 급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상대의 얼굴이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 채 그를 보고 있었다. 보쿠토는 에잇 모르겠다, 하고는 아카아시의 입술에 쪽 하고 뽀뽀하곤 등을 돌렸다.
“보, 보쿠토 선배!?”
“생일 선물 대신이다!”
“선배, 잠깐만요!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고 뭘 하신…….”
뒤에 남겨져 있던 아카아시가 빠르게 걸어가는 보쿠토를 잡아세웠다. 보쿠토는 화끈 달아오른 뺨을 어쩌지 못하고서 아카아시의 눈을 피하곤 서둘러 아무렇게나 말을 늘어놓았다. 몇 번이나 상상하고 또 생각했던 것인데 막상 해버리고 나니까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아카아시에게 들릴지도 모른다 싶을 정도였다.
“12월 5일에 추, 축하하게 해 달라고. 생일…….”
“……아…….”
“시, 싫어도 못 무른다 이거!”
보쿠토는 다시 한 번 빽 외치고는, 이번만큼은 도망치듯 걸어가지 못하고서 발 끝으로 바닥만 문질렀다. 아래를 보고 있으려니 맞잡고 있는 아카아시의 손이 보였다. 그 손끝이 파르르 떨리는 것도 보였다. 그리고 홀린 듯이 고개를 드니까 아카아시의 얼굴이.
“……그거면 되나요.”
“그, 그리고. 어. 그리고 하나 더 있어. 이제 아카아시도 나만 좋아해야 되고, 또……. 나만……나만 좋아해야 해.”
이번엔 보쿠토가 아니라 아카아시가 몸을 휙 돌리고 앞서갔다. 보쿠토는 당황해서 서둘러 그런 아카아시의 뒤를 따라갔다. 아카아시, 간절하게 부르는 말에 아카아시가 빠르게 말을 뱉었다.
“이미 하고 있는 거잖아요, 그건.”
어쩌지, 이렇게 좋아서. 보쿠토는 거세가 뛰는 심장 때문인지 손끝까지 찌르르 아파와, 그만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표정을 짓고 말았다. 다른 소원을 말해보라는 아카아시, 그 등을 바라보며 보쿠토는 간절하게 원했다. 아주 처음만났던 순간부터 네 생일을 축하해주고 싶어…….
“……내 소원도 이루어지고 있었어.”
후배가 그를 돌아보았다.
노을이 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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