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 보쿠토 x 혁명군 아카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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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꿈을 꿨던 것 같았는데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아카아시가 묻는다. 그의 맞은 편 그늘 속에 잠긴 남자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알아볼 수 있는 것은 일견 흉흉하기까지한 황금빛 눈동자 뿐이다. 아카아시는 눈을 내리떴다. 남자가 말했다.
“죽여.”
“…….”
“지금 죽여, 아카아시. 나를.”
잔뜩 쉬어버린 것처럼 가라앉은 듯도 했고 피가 끓는 쇳소리가 나는 것도 같았다. 아카아시는 고개를 들고 남자를 바라보았다. 눈동자에 맺히는 물기를 떨쳐내기 위해 부던히 노력해야 했다.
“그럼 모든 게 끝납니까.”
“아무도 없어, 나 혼자 왔으니까! 아카아시! 지금 뿐이야!”
남자가 마침내 그늘 속에서 뛰쳐나와 아카아시의 어깨를 거세게 붙잡고 흔들었다. 은빛 머리가 물결치고 그 아래 금빛으로 빛나는 태양같은 눈동자가 일렁거렸다. 아카아시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이 왜 이 위치까지 기어코 올라오고 말았는지 모른다. 모르니까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남자가 아카아시의 손을 잡아 자신의 심장 위에 갖다대고는 흔들었다. 빨리 이 심장을 밟고 깨부수라 말하는 것이었다. 아카아시는 그 거센 고동소리를 손 끝으로 느끼며 입술을 깨물었다.
“아니오. 그게 아니에요. 보쿠토 씨. 저를 죽이면 됩니다. 계획의 청사진을 알고 있는 건 저뿐입니다. 문서로도 남기지 않았어요. 어디에 얼마의 병력이 대기하고 있는지도 어떻게 해야 그들을 움직일 수 있는지도 알고 있는 건 저뿐입니다. 제가 죽으면 모두 당황하다 어찌할 바 모르고 흩어질 겁니다. 제 목이 있으면 다른 사람들도 납득할테니 대신 그 사람들은, 사형만은…….”
아카아시의 말을 듣던 남자가 아카아시를 돌연 밀쳤다. 아카아시는 말을 끝맺지 못하고 목소리를 흐렸다. 남자의 눈에서, 아카아시가 미처 흘리지 못했던 굵은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 눈이 그를 선명하게 노려보았다.
“너를 죽여서 누굴 살리라고 말하는 거야?”
-당신을.
“그저 땀흘려 일굴 밀밭 한 뼘만 바란 사람들입니다. “
-당신 하나를.
아카아시가 간절하게 말했지만 남자는 고개를 흔들었다. 눈물이 후두둑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카아시. 돌아가면 이제 다시 만날 기회는 없어.”
“그러니까 보쿠토 씨, 지금 저를…….”
“하……. 네가 죽으면, 내가 그 사람들 살려둘 것 같아? 내가 그렇게 좋은 사람첨 보여?”
남자의 눈매가 거칠게 일그러진다. 그 눈길을 따라 아카아시의 마음 역시 깨지고 조각났다.
“네가 죽으면 모두 죽여버릴 거야. 잊지 마. 살리고 싶으면, 네가 그렇게……그렇게 목숨 건 사람들 살리고 싶으면!”
말을 끝으로 남자가 몸을 돌렸다. 그 거센 동작을 따라 어깨에 걸친 망토가 펄럭거린다. 아카아시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남자가 눈 앞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구름이 개어 달빛이 비쳐들었다. 아카아시는 천천히 주저앉아 무릎을 꿇고 말았다.
같은 꿈을 꾸었는데 우리는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마침내 남자에게 보여주지 못했던 눈물이 뚝, 바닥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
“아카아시 씨! 어디 갔다 오셨어요?”
아카아시는 자신을 향해 살갑게 말을 붙이는 청년을 보고서 잠깐 산책 하고 왔다고 말을 돌렸다. 청년은 기사들이 쓰다 버린 갑옷을 얼기설기 엮은 어설픈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걸을 때마다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난다.
혁명군의 대다수가 이런 형태였다. 가진 것이 없어 들고 일어날 수 밖에 없었던 사람들이었다. 마음이 아팠다. 일이 이렇게 되기 전에 어떻게든 돕고 싶었다. 하지만 이렇게 되고 말았고, 그렇다면 조금이라도 한 사람이라도 더 살려서 바라는 바를 이루어주고 싶었다. 그저 일굴 밭 한 뙤기만. 먹고 살 곡식 한 줌만.
분명 그와 같은 꿈을 꾸고 있었다. 같은 미래를 보고 있었다. 함께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보다 행복한 앞날을, 빵 한 조각이 없어 굶어 죽는 사람이 없고 꽃을 보고 아름답다 말할 수 있는 한 움큼의 여유를…….
그런데 어쩌다 이렇게 되었지.
“많이 피곤하세요? 오늘은 일찍 들어가서 쉬실래요?”
“아뇨. 이제 수도가 목전인데 쉴 수야 없지요.”
아카아시는 청년의 제의를 거절하고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막사 안에는 서 너명의 사람이 심각한 표정으로 탁상 위의 지도를 노려보듯 바라보고 있었다. 켜 놓은 램프가 그들의 불안한 마음을 비추는 듯이 쉴새없이 흔들렸다.
“아카아시!”
“어디 갔다 왔습니까.”
“남쪽에서 오던 병력이 군량미가 떨어져 발이 묶였답니다.”
아카아시는 피로함을 드러내지 않으며 입구에서 가장 먼 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카아시가 지도를 내려다볼 때 곁에 앉은, 허름한 천옷을 걸친 남자가 조금 눈치를 살피다 입을 열었다.
“남부의 병력은 이제 없는 셈 쳐야합니다. 도착해도 허기져서 제대로 싸울 수 없을테고…….”
“힘들게 됐군요.”
“그래서 말인데.”
남자가 말을 잇기 어려워하는 걸 눈치챈 그 옆의 기사 정복 차림을 한 남자가 말했다.
“황제 암살은 어떤가.”
“다음 황제는 누구로 할 것인지 정했습니까?”
“……그건 아니네만…….”
“황실을 갈아엎겠다는 얘기라면 오히려 이쪽이 더 불리합니다.”
가능하고 불가능하고의 여부를 떠나, 대다수 사람이 일천한 지식을 가지고 농사나 일구며 귀에 못이 박히도록 황실에 대한 충성 맹세를 듣고 자란 사람들이었다. 황제를 미워할 수도 있다. 황실을 증오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다른 황실’이라는 건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이 사람들은 반역을 하려고 모인 게 아닙니다. 땅을 나누어주고 세율을 낮춰달라 말을 하려고 모인 거지. 우리가 황제를 죽인다는 말이 나돌면 모두 놀라 흩어질 겁니다.”
“그건 아무것도 모르는 자들의 생각 아닌가. 우리가 그리 한다고 알리자는 것도 아닐세. 그러니 암살이라 한 것이고. 황제군은 오합지졸이야! 황제의 카리스마로 붙들고 있는 것뿐이니 황제만 없어도 모두 제 이익을 탐하다 자멸할 것이야.”
아카아시는 그 말에 참으로 공감했다. 황제의 힘 하나만으로 붙들고 있는 황제군이었다. 알고 있었다. 기사의 말은 모두 옳았다. 능력있는 장수들은 바로 이전에 있었던 황위계승을 위한 내전 때 모두 소모되어 지금의 제국은 진정으로 황제 단 한 사람이 이끌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황제만 죽으면 군은 흩어질 것이고 그들의 혁명은.
“황제가 죽으면 누구에게 땅을 돌려주고 세금을 낮춰달라 말할 겁니까.”
“그 말을 하려면 우선 살아야 할 것 아니오! 지금 살려면 그 방법밖엔 없어!”
“살아서 도성에 남아도 목적을 이루지 못하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황제가 죽으면 다시 내전이 발발할 겁니다. 숨죽이고 있던 황실의 서출 황자들이 제각기 찢기고 남은 세력을 다시 또 모으고 나눠 싸우겠죠. 그 와중에 누가 죽어나갑니까.”
아카아시는 피로한 눈두덩이를 눌렀다.
“저 사람들 아닙니까.”
“…….”
“그리고 그 모든 걸 떠나서 암살, 성공할 만한 사람 있습니까?”
“허락한다면 내가 가겠소.”
말을 꺼냈던 기사가 담담하게 응했다. 아카아시는 기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훌륭한 사람이었다. 단지 옳다고 믿기에,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한 기사이면서도 모욕을 견디고 이 편에 서주었다. 가능하다면 살리고 싶었다. 살리고 싶은 사람이 너무 많았다.
“황제 바로 곁의 친위대만 십수명이지 않습니까. 그 모두를 물리친다 하여도 경께서 황제를 일시에 살해하고 증거 남지기 않고 빠져나올 수 있으십니까?”
“…….”
“이 상황에서 황제가 말에서 떨어져 죽어버려도 사람들은 혁명군에게 암살당한 게 아닐까 수군거릴텐데 하물며 미심쩍은 정황 증거 하나라도 남으면 돌이킬 수 없습니다. 반역이 아니라는 우리의 유일한 명분이 그 자리에서 일거에 박살나고 모두 섬멸당하는 것 밖에는 끝이 없다는 얘깁니다.”
“…….”
“다시 묻지요. 암살, 할 만한 사람 있습니까.”
기사도 남자도 입을 다물었다. 아카아시는 한숨을 꾹 참고 다른 지도를 펼쳤다.
“암살은 안 됩니다.”
살리고 싶은 사람이 너무 많았다. 너무 많았지만, 아카아시가 이 자리에 있게 된 것은 그 사람들 때문이 아니었다. 그 모든 사람들, 올바르고 정의로워 살아주었으면 하고 살리고 싶은 그 모든 사람들을 저울에 올린다 해도 양보할 수 없는 단 한 사람 때문이었다. 오로지 그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였다.
지도 위로 깃발이 꽂힌 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카아시는 다 타버린 것 같은 신경을 애써 추슬렀다.
자신이 말했듯 도성이 목전이었다. 어떤 식으로든 결말이 나기까지도 얼마 남지 않았다. 조금만 더 달리면 끝이었다. 조금만 더.
*
“도성 근처의 숲에서 진을 치고 있는 모양입니다.”
“숲에 해박한 자가 있는가 보군요.”
“역시 그 자 아니겠습니까? 아카아시 케이지…….”
남자는 비뚠 자세로 의자의 팔걸이에 턱을 괴고서 탁상 위를 바라보았다. 황제군의 장수들이 넓은 지도를 펼쳐놓고 이리저리 전술과 전략을 쥐어짜고 있었다.
그 때 말 없이 탁상 위의 지도를 바라보고만 있던 한 장수가 새카만 말을 집어들고 도성 앞의 숲에 탁 소리내며 내려놓았다. 많은 이들이 모여 수근거리던 소리가 순식간에 잦아들었을 때 장수가 입을 열었다.
“죽이심이 어떠한지요.”
“죽여?”
“혁명군의 구성을 잘 보면 대다수가 가진 농작물 다 뺏긴 농노, 세금도 못 내던 평민들입니다. 이 무지렁이들이 어떻게 수도까지 압박해 들어올 수 있었겠습니까? 아카아시 케이지가 이끌었기 때문입니다. 이 자가 혁명군을 이끌고 올라오면서 세를 불려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다행이 남부에서 오던 병력을 발을 묶어두었으니 지금 혁명군은 아카아시 케이지의 기재에 의지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가 뭔가 수를 쓰기 전에 죽여버리지요. 그러면 혁명군도…….”
파창!
장수는 안색이 하얗게 질려 입을 다물었다. 그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남자, 황제가 곁에 놓여있던 술병을 그대로 집어던진 것이다. 장수의 뺨을 스치고 날아간 술병은 그대로 벽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났다. 황제의 황금색 눈동자가 서늘하게 번뜩였다. 장수들은 숨을 죽였다.
“……기껏, 내놓는다는 계책이 혁명군 수장의 암살 모의란 말이냐?”
“……그것이 아니오라 소장의 뜻은…….”
“이 황제군이 무능해 저 혁명군을 이길 수 없을 것 같으니 우두머리의 목을 치자는 것, 아니냐?”
황제가 술잔을 손에 쥐고서 빙글빙글 돌리며 묻는다. 장수는 파랗게 핏기가 가신 얼굴로 부정했으나 내리깐 황제의 금빛 눈동자는 차갑게 가라앉은 채 풀릴 줄을 모른다.
폭정으로 나라를 도탄에 빠뜨렸던 선황이 까닭모를 병으로 죽고 황자들이 황위다툼을 시작했을 때였다. 내전으로 나라가 뒤흔들리고 이 압제를 견디다 못하여 혁명군이 일어났고 황위를 두고서 황자들이 죽어나갈 때, 그저 가볍고 유쾌할 뿐이라 이 황위다툼에서조차 밀려났던 이름도 모를 황자가 흩어졌던 근위병단을 모았다. 그리곤 남아있는 다른 황자들을 모두 꺾어 보위에 오르기까지 두 달도 채 걸리지 않았다.
그가 바로 지금 이 자리에 앉아있는 황제, 보쿠토 코타로였다. 흩어진 귀족들의 사병을 모두 모아 정비하고 혁명군을 상대하는 것까지 이 젊은 황제가 아니었으면 무엇도 이루지 못했으리라는 것을 이 자리에 앉은 장수들 모두가 알고 있었다.
“혁명군 수장 암살이라…….”
황제가 술잔을 손에 쥐고서 끝을 빙그르르 돌렸다. 그러다 황제가 손에 힘을 주었다. 술잔이 파삭 깨어지고 그가 손에 힘을 주는 것을 따라 핏방울이 후두둑 떨어졌다. 곁에 선 사람들이 다급히 그를 불렀지만 황제는 손을 펼쳐 술잔 조각을 떨쳐내고는 좌중을 쳐다보았다.
“내가 어떻게 황제가 됐는지 말해 봐라.”
“…….”
“…….”
사방이 쥐죽은 듯이 고요했다. 황제의 손에서 핏방울이 똑 똑 떨어지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내가 군을 규합하고 난 뒤로 암살당해 죽은 황자가 있었나?”
“……없사옵니다.”
“그런 내가 고작 혁명군 따위를 어쩌질 못해서 암살하자는 소리를 듣고 있어야 하나?”
“……아니옵니다. 소장을 벌하시옵소서. 소장 생각이 짧아…….”
“됐다.”
황제는 손을 내저었다. 겨우 공기가 풀리고, 시종이 새파랗게 질려서는 눈물까지 글썽거리며 황제의 손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황제는 넝마짝이 된 자신의 손을 멀거니 바라보며 계속 말을 이었다.
“저들을 이끌던 수장이 암살당한다면 혁명군은 황실을 더 증오하겠지. 당장은 혁명군을 와해시킬 수 있을지 몰라도 혁명군의 불씨는 꺼뜨릴 수 없다. 그런 수는 아무 소용이 없어. 정면으로 깨부순다.”
거기까지 말한 황제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황금색 눈동자가 시퍼렇게 빛났다.
“-수장은 반드시 살려서 내 앞에 데려와라. 반드시.”
장군이 말했듯 수장이 죽으면 혁명군은 와해되고 만다. 그것을 제압하는 것은 손쉬운 일일 터였다. 반수는 도주할 것이고 반수는 저항할 마음을 잃어버릴 것이다. 장수가 ‘손쉬운 일’로 이끌고자 함은 조금이라도 피를 덜 보려는 뜻에서였다. 정면으로 부딪히면 훨씬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치게 된다.
황제, 보쿠토는 붕대가 감긴 자신의 손을 천천히 힘주어 말아쥐었다. 통증이 신경을 불태우고 상처가 벌어져 피가 새어나온다. 하지만 아픈 것을 느낄 수 없었다.
모른 척 할 수 있었다. 황제가 되는 것은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다른 길로 같은 꿈을 이끌어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황자들의 내전에 나라가 황폐해지고 마침내 혁명군이 일어섰을 때, 그 선두에 아카아시 케이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보쿠토는 황제가 되는 것을 선택했다.
이 모든 것이 오로지 단 한 사람을 위해서였다.
*
가진 것이라고는 곡괭이와 돌, 기름조차 없어 끓인 물이 전부인 사람들이었다. 이들의 싸움은 치열하고 필사적이었으나 애달프고 그리고 잔혹했다. 마침내 피바다는 황제의 군이 점령하였고 혁명군의 수뇌들은 모조리 잡혀와 참수 당했다. 혁명군은 반란군이 되었고 저잣거리에서조차 오르내리지 않게 되었을 때, 모두가 그 일을 뒤안길에 묻어두고서 황제의 치세를 칭송하기 시작했을 때, 황제는 모든 사람들을 물리치고서 홀로 북쪽 탑의 지하로 내려갔다.
계단을 수십 걸음 걸어 내려가는 동안 의전용 망토는 바닥에 끌려 그 끝이 질척한 습기에 젖어들었다. 찰각, 찰각, 황제의 걸음에 맞추어 어둑한 지하에 소리가 울려 퍼진다. 꾸벅꾸벅 졸며 지하 감옥의 입구를 지키고 있던 간수가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보쿠토는 아무 말 없이 바깥을 가리켰다. 간수는 어쩔 줄 모르다가 손을 벌벌 떨며 겨우 허리춤의 열쇠를 풀어 보쿠토에게 넘겨주고서 바깥으로 뛰어나갔다.
이제 이 지하감옥엔 보쿠토 뿐이었다. 이보다 더 깊은 곳의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
보쿠토는 천천히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찰각, 찰각, 찰각, 찰각. 허리춤의 검이 부딪혀 나는 소리가 죽음처럼 고요한 감옥 안에 울려퍼졌다. 그가 거쳐 온 감옥들은 모두 비어있었다. 그리고 횃불조차 희미하여 사람의 존재를 파악하는 것이나 겨우 할 수 있을 만큼 깊은 곳에, 녹이 슨 창살 안에 누군가가 있었다.
눈을 감고 있는 남자였다. 남자의 손목은 족쇄에 죄여 위로 향한 채 묶여있었고 발목에는 어지간한 장사도 들기 어려운 쇠구슬이 사슬 끝에 달려있었다. 남자의 손목과 발목에는 이 희미한 빛만으로도 구분할 수 있을 만큼 붉은 생채기가 선연했다. 보쿠토는 쇠창살을 움켜쥐었다. 남자가 눈을 떴다. 심해의 바다와도 같은 색이라며 보쿠토가 사랑했던 청록빛은 불투명하게 흐려져 있었다. 오래도록 빛을 보지 못한 탓이었다.
“누구……?”
“…….”
그를 보고도 알아보지 못한다. 보쿠토의 태양같은 눈동자에서 굵은 액체가 타고 흘러내렸다. 그 액체가 다시 지하감옥의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는 소리가 났을 때, 남자는 상대를 알아차렸다.
“……보쿠토 씨…….”
그리고 그 이름 끝에, 남자의 얼굴 위로 희미한 미소가 맺힌다. 보쿠토는 그 미소를 보고 창살을 거서게 흔들었다. 격렬한 소리가 지하감옥의 차가운 벽에 부딪혀 우뢰처럼 울었다.
“내가 말했지. 모조리 죽여버릴 거라고.”
“그러셨습니까.”
“그래. 내가 다 잡아 죽였다.”
“……그러셨습니까.”
“네가 그렇게 목숨 걸고 지키려고 했던 것들 중에서 남아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보쿠토가 입술을 악물고 말했다. 마침내 그 입술이 터져 피가 날 지경이었다. 아카아시는 보쿠토와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고 눈을 내리깔았다. 보쿠토가 다시 창살을 부술 듯이 흔들었다.
“이제 아무것도 없어! 알겠어? 아무것도!”
보쿠토는 황위도 무엇도 바란 적이 없었다. 부친이었던 선황의 학정에 피흘리는 백성들을 보며 안타까워하던 연인을 위하여 부디 다음 황제만은 올곧은 사람이 되기를 바랐을 뿐이었다. 그게 자신이기를, 그런 생각은 한 적이 없었다. 그저 연인과의 행복한 매일이 그가 바란 전부였다.
그러다가 혁명군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도 보쿠토는 이런 끝을 상상하지는 못했다. 어느 날 갑자기 그의 연인이었던 아카아시 케이지가 그 혁명군의 우두머리가 되어 황성으로 올라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기 전까지는.
그러니 보쿠토는 이 창살을 두고서야 말할 수 있었다.
너와는 같은 꿈을 꾼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왜 저는 죽이지 않으셨습니까.”
“……뭐라고?”
보쿠토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진다. 아카아시는 여전히 보쿠토의 발 언저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 저를 죽이지 않…….”
보쿠토가 검을 뽑아 지하감옥의 자물쇠를 내리치는 소리에, 아카아시가 내뱉던 문장이 스러졌다. 보쿠토는 지하감옥의 문을 열어젖히고 안으로 들어갔다. 벽에 문이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했다. 보쿠토가 곧장 아카아시의 멱살을 쥐어틀었다.
그 몸이, 부서질 듯이 가벼웠다.
“왜 안 죽였냐고? 지금 그걸 나한테 물었어? 네가? 네가, 나한테?”
“보쿠토 씨, 제가 혁명군 앞에 섰는데 저를 죽이지 않으시면 측근들이 틀림없…….”
“하, 혁명군!”
보쿠토가 아카아시를 쥐고 흔드는 통에 아카아시의 손과 발에 매인 족쇄가 사슬과 부딪혀 천둥같은 소리를 낸다. 보쿠토의 눈에서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그것들은 모조리 반란군이 되어 숙청당했다. 혁명군 같은 건 없어. 그리고 그 앞에 섰던 아카아시 케이지도 없다.”
“…….”
왜냐고 묻고 싶었다. 보쿠토는 묻고 싶었다. 지금도 혁명군 ‘아카아시 케이지’의 이름을 들었던 그 날을 생각하면 내장에서부터 배신감이 끓어올라 죽어버릴 것 같았다. 함께 혁명군의 앞에 서자고 말했다면 기꺼이 그리했을 텐데. 어떻게든 바로 옆에서 지켜주었을 텐데. 언제고 함께 했을 텐데. 왜, 도대체 왜, 한 마디 말도 없이. 왜…….
“……하지만 살아남은 사람들도 있다.”
그 말에 아카아시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여지껏 보쿠토가 쥐고 흔들고 몰아세워도 지는 갈대처럼 나부낄 뿐이던 아카아시였다. 처음으로 그 얼굴에 다급한 빛이 감돈다. 보쿠토는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그들을 살려줄 수도 있어.”
“보쿠토 씨, 그 사람들은…….”
“네가 없는 사람이 된다면, 살려주마.”
아카아시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보쿠토는 천천히 손에서 힘을 뺐다. 아카아시가 바닥에 쓰러지듯 주저앉아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 북쪽 탑 꼭대기에서 누구와도 말하지 않고 누구와도 눈 마주치지 않고, 영원히 여길 나가지 않고 여기에 있겠다고 맹세하면 그 사람들을 살려주마.”
“……보쿠토 씨.”
“맹세 해! 맹세 하란 말야!”
매섭게 몰아세우는 말인데도 어린 아이가 울며 떼쓰는 것처럼 마음이 아팠다. 아카아시는 표정이 무너져 고개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보쿠토는 그를 향해 그가 지키려던 것들 중에서 남아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했지만, 아니었다. 그가 틀렸다. 아카아시가 가장 지키고 싶었던 것이 바로 눈 앞에서 이렇게 형형히 빛나고 있었다.
혁명군이 처음으로 일어났다는 소식이 수도에까지 닿았을 때, 아카아시는 처음엔 불안함을 느꼈고 나중에는 그 불안을 확신했다. 황제의 폭정으로 나라의 피폐함이 극에 달해 있었다. 이 혁명군이 들불처럼 번져 나라를 집어삼킬 것이다. 그리고 그렇다면 그 끝에는 누군가가 반드시 혁명군을 상대하게 될 것이었다. 누가?
황궁의 누가, 선봉이 되어 이들과 맞서게 되는가?
아카아시는 그것이 보쿠토가 짊어지게 될 몫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그렇게 둘 수는 없었다. 다른 사람에게는 여분이 몇이나 되는 아들 중 하나일지 몰라도, 세력이라고는 만들 줄 몰랐을 뿐인 그저 사람 좋은 황자일지 몰라도, 그에게는 단 하나뿐인 빛이었다. 그렇게 둘 수는 없었다.
그렇게 둘 수는,
없었다.
처음부터 그가 목숨을 걸고 지키고 싶었던 건 단 한 사람 뿐이었다. 이 얼마나 지독한 배신인가. 가난하고 가진 것 없던 그 자들은 오로지 자신만을 믿었을 터인데, 자신은 그저 연인 한 사람을 지키려고 그 자리에 섰다. 그렇게 아무도 보쿠토를 죽일 수 없도록 막아섰다. 마침내 보쿠토가 새 황제가 되었을 때에도 새 황제의 암살을 주청하는 이야기는 모조리 묵살했고 혁명군을 규합한다는 명목으로 전투는 길고 지리해졌다.
대의, 백성, 태평성대, 이런 것을 말한 적이 있었다. 그저 사람들에게 일용할 곡식과 시들지 않은 장미 한 송이를, 이런 것을 말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대화가 자신에게는 시들지 않은 장미 한 송이였다. 그 대화를 나누는 눈 앞의 상대가 바로 자신에게는 매일 매일 호흡할 곡식이고 물이고 생명이었다.
이 사람이 그의 생명이었다.
그의 뒤를 따르던 모든 이들이 그저 자신의 한 뙤기 밀밭을 위하여, 그저 생을 이어가기 위하여, 그것마저 그리할 수가 없어서 들고 일어났듯이 아카아시 역시 그랬다. 그저 생을 위해서…….
하지만 자신이 아니었더라면 어쩌면 이 사람들은 원하는 바를 이루어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바라는 바를. 그저 한 뼘의 밀밭을. 그저 먹고 살 여분을 남겨줄 만큼만의 세금을, 이런 유혈을 지나 다음 세대에 겨우 이루는 것이 아니라 황제에게 청하고 원하여 얻어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나서고 말았던 것은 그들이 청원할 황제가 보쿠토가 아니라 선황이 될지도 모른다는 것 때문이었다. 그 길은 틀림없이 다른 황자들의, 보쿠토의 피를 딛고 이루어낼 것이기 때문에.
그 가시사슬이 그의 심장을 옥죄었다. 마침내 황제군이 모든 것을 점령했을 때 아카아시는 차라리 이렇게 죽게 되어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보쿠토는 살았으니 그가 바란 모든 건 이루어진 셈이었다. 저 하나 죽는 것으로 수십만을 배신한 대가는 되지 못하겠으나, 그래도 그것으로…….
“대답은 들은 것으로 알겠어.”
보쿠토는 아카아시를 팽개치듯 내버려두고서 몸을 돌렸다. 지하감옥의 문이 휑하게 열린 채였다. 아카아시는 점점 멀어지는 거친 걸음을 들으며 결국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그치지 않는 눈물이었다.
모든 일이 끝났을 때, 마침내 보쿠토 앞에서 무릎 꿇린 채 그를 올려다보지도 못하게 되었을 때 아카아시는 자신의 목숨에 쓰임이 하나 더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자신이 죽어서 이룰 수 있는 것이 하나 더 있었다. 황제는 적잖은 수의 군사를 잃은 황제군의 장군들에게 분노를 풀 수 있는 창구를 내어주어야 한다. 그것이 혁명군의 수뇌부들을 모두 처형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보쿠토의 세력은 더욱 더 단단히 결속하고 그에게 충성하게 될 것이다. 아카아시는 그 정도면 만족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여 지금 이 순간, 보쿠토는 아카아시를 그들에게서 몰래 빼내어오기 위해 무슨 대가를 치렀을 것인가. 어쩌면 자신 대신에 자신의 형상을 하고 대신 죽은 이가 있을지도 몰랐다. 대신 죽은 자는 누구일까. 혁명군의 불씨를 위하여 끝까지 그를 믿고서 대신하고자 했을까. 그렇다면 살아남은 혁명군의 세력들은 그의 생존을 믿고 생환을 기다리고 있을까. 그게 아니면 보쿠토는 휘하의 장수들에게 무슨 말을 하여 자신을 빼내었을까. 무엇을 대가로.
그 모든 것을 생각하면 이 자리에서 목을 그어 죽는 것이 옳았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제멋대로 굴었던 자신이었다. 전부 보쿠토 한 사람을 살리겠다는 자신만의 욕심이었다. 그것이 그에게 상처였다는 것을 안다. 그러니 이 이상은 멋대로 굴 수 없었다. 하지만 그보다도. 그런 것들보다도 더.
-이제, 더 이상…….
더 이상은 보쿠토와 맞서지 않을 수 있다. 맞은 편에 서지 않아도 된다. 어쩌면 보쿠토는 다신 북쪽 탑 끝에 닿지 않을지 몰라도, 바람결에나마 소식은 들을 수 있을지 몰랐다. 오늘은 폐하께서 웃으셨다고 합니다. 어제는, 그제는, 그런 이야기를 며칠에 한 번 혹은 몇 달에 한 번 어쩌면 몇 년에 한 번이라도 들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아카아시는 눈물을 그치지 않았다. 저버린 붉은 장미꽃 수천송이가 피가 되어 흘러내렸건만 그의 눈 앞에 한 송이가 피어 있어,
오직
단 한 송이가 아름답게 피어있어 그것으로 안도하고 말았다.
*
황제는 하루 일과가 끝나면 매일같이 북쪽 탑에 들렀다. 사람들은 그것을 두고서 수군거렸다. 황제는 때로는 북쪽 탑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오기도 했다. 사람들은 황제가 너무나도 총애하는 애첩을 남들 눈에 보여주고 싶지 않아 북쪽 탑에 숨겨두는 것이라 떠들기도 했지만 냉혹한 황제의 모습에 그런 소문은 금방 수그러들었다.
하지만 북쪽 탑 꼭대기에 종종 수건과 먹을거리를 가져다 놓곤 하는 시종이 몰래 말을 전하기를, 그 꼭대기에는 앞을 볼 수 없는 청록색 눈동자의 사람인지 혹은 요정인지 알 수 없는 것이 살고 있으며 황제가 그것을 귀애하기를 거상이 금은보화를 보듯 하고 학자가 고명한 선생의 서책 보듯 하고 무사가 하나뿐인 제 검을 다루듯 하고 농사꾼이 볕드는 제 밭을 보듯 하고 어린애가 저와 함께 앞날을 약조한 뺨이 붉은 이웃의 아이 보듯 하고 나비가 겨울날 홀로 피어난 제비꽃을 보듯 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저 무정한 황제의 그런 모습을 상상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으므로 시종의 말은 누구에게도 닿지 못하고 사라졌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황제가 승하하던 날, 북쪽 탑이 무너져 내렸고 그 안에 누가, 혹은 무엇이 있었는지 알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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