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쿠아카 | On Air
겜방BJ 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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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먼저 BK님과 함께 요즘 핫한 오…….”
“저 3D 멀미 있습니다.”
“아.”
아카아시는 딱잘라 대답했고 가운데에 있던 프로듀서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맞은편에 앉아있는 BK라는 닉네임을 쓰는 남자가 눈을 크게 깜박이며 그를 쳐다보았다.
“그럼 AK님과 함께 워…….”
“그거 너무 어려워서 나 못해!”
“……아아…….”
이번엔 그 남자가 번쩍 대답했다. 프로듀서의 얼굴이, 눈물이 맺힐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
주로 A라고 불리는 AK는 실시간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을 주로 플레이했고 B라고 불리곤 하는 BK는 FPS게임을 잘했다. 두 사람 모두 개인 방송 스트리밍 사이트에서 순위권을 차지했지만 다른 장르의 게임을 하는 탓에 서로 이름만 알 뿐이었다. 그 두 사람을 한 자리에 불러 모은 것은 그 방송 스트리밍 사이트의 프로듀서였다. 요즘 콜라보레이션이 유행한다며, 두 사람이 한 번 같이 해보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이름밖에 모르는 사이인데 뭘 어쩌냐 했더니 프로듀서가 되레 놀랐다. 닉네임이 각기 그래서 친분이 있는 사이인줄 알았던 모양이었다.
그래도 프로듀서의 설득에 넘어가 삼자대면을 했지만 두 사람이 여지껏 서로 이름만 알아왔던 건 다 이유가 있었다. A는 도무지 1인칭 시점의 게임에는 쥐약이었다. 화면을 잠깐만 보고 있어도 멀미가 나 유명하다는 슈팅 게임도 건드려보지 못했다. B는 그 수많은 유닛의 특성을 줄즐이 꿰고서 모두 다 컨트롤하는 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니라고 고개를 내저었다. 프로듀서가 그 자리에서 반쯤 울먹거리지 않았다면 그 콜라보레이션 계획은 없던 일이 되었을 것이다.
A는 방송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10분만에 그만 잠깐만요, 라는 말과 함께 방송중이던 방을 벗어났다. 뒤에서 B가 조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보는 걸 알았지만 계속 하라는 말밖에 할 수가 없었다. 찬물을 마시고 먼 풍경을 보다가 돌아오니 화면 속에 자신의 캐릭터는 멀쩡히 서 있고 WIN이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번쩍거리는 중이었다. 때마침 B가 A의 상태를 보러 가기 위해서였는지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A는 조금 놀란 표정을 겨우 갈무리했다. 잘한다 잘한다 하더니 정말 잘하는 모양이었다. 한 사람이 자리를 비웠는데도.
프로듀서는 A가 이렇게나 멀미가 심할 줄은 몰랐다며 사과했고, 그 뜻에서 이번에는 A가 주력으로 하는 게임을 함께 하게 되었다.
처음에 B는 이런 건 잘 못한다고 했지만 A와 프로듀서가 괜찮다며 게임을 시작했다. 시작한지 15분쯤 지났을 때 A가 B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B는 알았다고 했다. 그러고 10분이 지났고, A는 도통 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 B의 본진으로 향했다가 그만 보고 말았다. B는 옹기종기 유닛들을 양육하고 있었다. 전쟁터에 나가면 알뜰살뜰 키운 아이들이 죽지 않겠냐는 말에 A는 그 자리에서 A와의 동맹을 끊고 1대 3인 경기를 치렀다. 가장 처참하게 박살이 난 건 B의 본진이었고 A는 승리했다.
프로듀서는 A가 특기인 게임 말고, B가 특기인 게임도 말고 다른 게임을 하자고 했다. 아기자기한 그래픽으로 꾸며진 샌드박스 생존 게임이었다. B는 기상천외한 건축물을 쌓아올렸고 A는 기하학적으로 잘 꾸려진 집을 만드는가 싶더니 집안 한가운데에 우물을 파서 B의 놀림을 샀다. A는 B가 공들여 지은 집을 TNT를 실은 카트로 날려버렸고 프로듀서는 다른 게임을 하자고 말했다.
그 다음 게임은 단순히 계단을 내려가기만 하는 공포 게임이었다. B는 이런 게임을 개발자의 의도에 걸맞게 정말 잘했다. 그러니까 2초에 한번씩 소스라치게 놀라고 5초에 한번씩 비명을 질렀고 30초에 한번씩 울먹거렸다는 뜻이었다. 게임이 끝났을 때 B는 A를 붙잡고 오늘 자기랑 같이 밤새 게임을 하고 가라고 했다. 프로듀서는 이번에야말로 다른 게임을 해보자고 했다.
A는 이쯤이면 이 콜라보레이션을 포기할 때가 되었지 않았느냐 했지만 B가 방금 전까지 한 공포게임의 여파로 그의 옷깃을 붙잡고 울먹이고 있었으며 프로듀서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시청률 그래프를 보여주었다. A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아니 우정초코랬잖아, 쟤가!”
보쿠토는 입술을 비죽이며 컨트롤러의 버튼을 눌렀다.
화면이 아주 큰 TV를 앞에 두고 등에는 베이지색 린넨으로 마감한 푹신한 좌식 소파를 둔 스테이지였다. 플레이하는 게임에 어울리게 아기자기하게 꾸민 방에서 카메라가 게임을 하는 두 사람을 잡고 있었다.
아카아시도 심각한 표정으로 화면을 바라보았다. 2월 발렌타인 데이 이벤트에서 분명히 ‘우정 초코일 뿐이야!’라며 초콜렛을 주기에 3월 화이트 데이 이벤트에서 똑같이 우정 사탕이라며 사탕을 건네주었더니 호감도 게이지가 뚝 떨어졌다. 아카아시는 곁에서 고개를 갸웃했다.
“뭔가 좀 더 다른 걸 해야 하는 거 아닐까요.”
“아……. 진짜 너무 어렵다. 아카아시가 하는 게임이 더 쉬운 거 같아.”
“…….”
“아, 아니. 내 말은. 그러니까……. 앗! 대화 떴다! 대화!”
보쿠토가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화면에는 예쁘게 생긴 소녀가 빙긋이 웃고 있다.
이번에 프로듀서가 제안한 건 소위 말하는 ‘미소녀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이었다. 주로 보쿠토가 플레이하고, 아카아시는 옆에서 한 마디씩 하는 정도였는데 보쿠토는 정말 이런 종류의 게임에 약했다. 행동 원리나 받아들이는 감정에 대해서 이해를 하지 못하니 응답을 고를 때도 기상천외한 걸 골랐다. 문제는 이 부분에 있어서 아카아시도 비슷했다는 것이다. 공략 루트가 엉망이 되어가고 보쿠토의 얼굴도 울먹거리는데 카메라와 프로듀서는 숨을 죽여 웃기에 바빴다.
“도대체 뭘 선택해야 여기서 조금이라도 날 좋아해줄까…….”
“음……. 숙제하러 가자고?”
선택지는 3개였다. ‘같이 숙제하러 갈래?’ ‘오늘은 집에 먼저 가야할 것 같아.’ ‘야외 콘서트 티켓이 있는데…….’
“아니지, 아카아시! 이거 그거 아니냐. 오늘은 먼저 집에 가겠다고.”
“왜죠.”
“그, 뭐냐. 그거. 밀당.”
“보쿠토 씨. 자석도 일정 거리 이상 멀어지면 다시 못 붙입니다.”
“그렇다고 여기서 숙제가 뭐냐, 숙제가!”
“전교 1등이잖아요, 쟤 스펙이……. 공부하는 거 좋아할 거 같은데.”
“아, 그건가? 그런가?”
프로듀서는 나중에 왜 거기서 야외 콘서트 티켓은 고르지 않았냐고 물었다. 보쿠토는 음악에 관심이 없어서라고 대답했고 아카아시는 그 이벤트가 발생한 때가 게임 상에서 7월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더워서 짜증날 것 같다는 이유였다.
“아……. 진짜 어렵다. 뭘 골라야 되지? 뭐에 설레는 거야, 정말.”
“그러게요…….”
“벽에 기대서 턱을……? 저게 진짜 설레는거야?”
이번엔 선택지가 두개였다. 하나는 손을 잡고 뛰어가는 것, 하나는 한쪽 팔로 가둔 채 턱을 살짝 들어올리는 것. 보쿠토는 울상을 지으며 아카아시를 돌아보았다. 아카아시 역시 미간을 모은 채 화면을 보고 있었다.
“자세가 상상이 안 되는데.”
“그치. 뭐 어쩌는 거지……. 뒤에 벽이 있으니까 저기에서 하는 건가? 손 잡고 뛰어가는 건 왠지 별로인 것 같으니까 이게 맞는 걸텐데…….”
“그러게요. 음.”
진짜 설레는 거 맞아? 보쿠토가 투덜거렸다. 화면을 한참이나 들여다보던 아카아시가 슥 고개를 돌리고 보쿠토를 쳐다보다가 슬쩍 몸을 일으키고서 보쿠토를 뒤쪽 소파에 밀어붙였다. 그리고는 몸을 붙여 팔로 보쿠토를 가두고서 남은 손으로 보쿠토의 턱끝을 들어올린다.
“이런 게 정말 설레는 건지…….”
아카아시의 고개가 갸웃하고 그를 올려다보는 보쿠토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리더니 보쿠토가 허둥지둥 고개를 끄덕였어.
“……어어.”
“네?”
“아니, 지금 알겠어. 완전 알겠어.”
“네?”
“이…이해했어.”
아카아시는 고개를 갸웃했고, 보쿠토의 목덜미가 붉어진 것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프로듀서가 웃다가 사레가 들려서 급히 스튜디오를 빠져나갔고 그가 겨우 돌아왔을 때엔 엔딩을 향해가고 있었다. 실로 고난과 역경이라고 할 만했다.
그러다 문득 아련한 키스씬이 흘러나올 때였다.
“아니 근데.”
“네?”
주위의 스탭들이 키스씬을 보고 거의 감격에 가까운 표정들을 하는데 보쿠토가 말했다.
“왜 열심히 한 건 난데…….”
“……?”
“뽀뽀는……. 쟤가 하는 거야?”
보쿠토가 화면 속의 유저 캐릭터를 바라보며 억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것을 덤덤히 쳐다보던 아카아시가 어깨를 으쓱했다.
“뭐……. 이런 거 보고 그러던데요. 미치게 연애했는데 시발 꿈이라고. 그래서 미연시라잖아요.”
“아……아아아!”
보쿠토가 억울해 울것같은 표정으로 바닥을 쾅쾅 두드리고, 아카아시가 그 사이에 대신 컨트롤러를 쥐고 클리어 버튼을 눌러주었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무덤덤한 얼굴이었다.
*
이것이 그들의 첫만남이었고, 이 연애시뮬레이션을 끝으로 두 사람의 1차 콜라보레이션 이벤트도 막을 내렸다. 마지막 방송을 하는 날 아카아시는 보쿠토에게 모 인디 게임을 추천해주었다. 최근에 배를 타고 항해하는 추가 확장팩이 나온 게임이었다. 캐릭터는 꼭 로봇으로 하라는 말과 함께. 보쿠토가 플레이한 그 게임 방송이 대단히 인기를 끌어 프로듀서가 그에게 따로 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아니, 플레이한 건 난데 왜 아카아시한테 준 거야!?”
보쿠토가 아카아시의 소파에 드러누워 목을 젖혀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카아시는 투덜거리는 보쿠토를 보며 피식 웃었다. 보쿠토의 손에 들려 팔랑거리는 것은 어느 온천 마을 여관의 티켓이었다. 꽤 오래 전의 것이라 테이블 위에 올려놓기만 했던 티켓 봉투는 살짝 빛이 바래있었다.
“보쿠토 씨 가지셔도 돼요. 받은지 한참 됐는데 바빠서 가지도 못 했네요. 날짜는 안 지났어요.”
“그 뜻 아니거든!”
보쿠토는 티켓을 팔랑 집어던지고는 몸을 일으켰다. 마신 물병을 다시 냉장고로 집어넣던 아카아시는 등 뒤에서 자연스레 허리를 감싸는 보쿠토의 손길에 뒤를 돌아보았다. 보쿠토가 살짝 허리를 굽히고 아카아시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나한텐 안 줬단 말야, 저런 거. 내가 그 때 게임하느라 얼마나 고생했는데.”
“고생이라니.”
“난파선 이벤트를 하는데 물속성 방어력 빵점인 애로 추천해주는 게 어딨어?”
“그러니까 재밌죠.”
보쿠토 씨는 그거죠. 꼭 동물원이나 수족관 같은 데 가면 돌고래한테 뺨맞는 사람.
“아니거든!”
“생존 게임같은 거 하면 꼭 아무것도 없는 섬만 골라서 가고.”
“아…니…….”
“3번 연달아 아무짝에 쓸모없는 섬 걸려서 마지막으로 항해하는데 상어 나오고…….”
“…….”
“상어한테서 겨우 도망쳐서 갔더니 원숭이밖에 없는 섬이 나와서 결국 한 대 맞고 죽는 거죠.”
“…….”
아카아시 너무해, 보쿠토가 울상을 지은 채 아카아시의 목덜미에 연신 뺨과 입술을 부볐다.
“간지러워요.”
“흥, 몰라.”
꽤 오래 전의 일인데 여전히 억울한 모양이었다. 아카아시가 고개를 움직여 피하려고 했지만 보쿠토의 집념에는 당할 수 없었다.
“내가 고백했을 때도~!”
“아.”
“진짜 나 서러워서 울 뻔 했거든!?”
“뭐, 그래도. 공략 잘 하셨잖아요.”
결국 아카아시는 뒤로 고개를 돌려 보쿠토의 입에 가볍게 키스했다. 보쿠토가 떨어지려는 아카아시를 붙잡고 깊게 키스했다.
생에 처음 해봤던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이 꽤나 충격적이어서, 보쿠토는 아카아시에게 고백하고 나서도 안절부절 못하고서는 그 게임처럼 힘내서 애쓴 건 자신인데 키스는 다른 사람과 하는 거 아니냐고 울먹거렸더랬다. 그랬더니 그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아카아시가 프롤로그는 이제 끝냈으니 본편 공략 열심히 해보라 하였던 것이다. 그 땐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그가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을 어떻게 클리어했던가? 한 다섯번 쯤은 배드엔딩을 연이어 보고서야 겨우겨우 해냈는데!
“다시 생각하니까 진짜 진짜 억울해.”
“몰랐죠?”
“뭐를?”
“사실 그 때 이미 호감도 맥스였는데.”
“아 진짜~! 말도 안 해줬었잖아!”
“원래 현실은 그런 수치가 다 히든이에요.”
“쳇!”
“아파요, 보쿠토 씨.”
아카아시는 자신의 귀를 깨무는 보쿠토를 보고서 한 마디 했지만 보쿠토는 아카아시를 놓아주지 않았다. 얇은 사탕을 정성들여 맛보는 것 같았다. 한참이나 아카아시를 괴롭히던 보쿠토는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오른 것처럼 반짝 눈을 빛냈다. 그 기척을 알아차린 아카아시가 한숨부터 내쉬었지만 보쿠토는 개의치 않았다.
“아카아시도 나 공략해봐!”
“……하.”
“아, 왜! 나는 했잖아!”
“이건 리로드 되는 게임이 아닌데요.”
“공략 캐가 다르잖아!”
보쿠토가 아카아시의 허리를 감싸쥔 손에 힘을 주고서 떼쓰듯 말한다. 아카아시는 잠깐 아무 대답이 없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아카아시가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보쿠토가 번쩍 팔을 들고 만세하고는 빙글 몸을 돌려 소파로 뛰어들었다. 마치 지금부터 공략해보라는 것 같았다. 아카아시는 피식 웃고는 방금 전 보쿠토가 집어던졌던 온천 여관의 티켓을 집어들었다.
보쿠토는 아카아시가 뭘 하려는지 보겠다는 투로 머리 뒤로 팔을 베고서 아카아시를 바라보았다. 아카아시가 티켓을 입에 물고 느릿느릿한 동작으로 다가오더니 천천히 보쿠토의 위에 올라탔다. 입에 물었던 티켓을 한 손에 쥔 아카아시가 보쿠토의 손을 깍지 껴쥐었다.
“저하고…….”
“…….”
“여기, 가주셔야겠네요.”
“……시, 싫은데.”
“싫어요?”
아카아시가 나른한 목소리로 물었다. 보쿠토가 입술을 꽉 깨물고 울상을 지은 채 고개를 젖혔다가 돌연 아카아시를 콱 끌어안고서 잡아먹을 듯이 키스했다. 짙고 깊은 입맞춤 끝에 겨우 틈을 벌린 보쿠토가 재차 입술을 맞대는 듯이 혹은 입을 삐죽거리는 듯이 투덜거렸다.
“치트키 쓰면 안 된다고.”
“물어본 것 뿐인데요.”
“아 진짜! 치트키 쓰기 없기!”
“네, 네. 그래서. 싫어요?”
“젠자아아앙.”
“나쁜 말 하시네. 싫으신가.”
“좋아! 좋아! 좋아 죽겠다! 좋아!”
그리고 다시, 깊은 입맞춤이 이어졌다.
*
제법 먼 곳의 온천 마을에 위치한 작은 전통 여관이었다. 성수기가 아닌데다가 평일이어서 한적했다.
“아, 배고파.”
“지금 당장 식사 준비는 안 될텐데……. 나가서 뭐라도 사먹을까요?”
급하게 온 터라 짐은 간소한 편이었다. 아카아시가 챙겨온 것을 내려놓는 사이에 벌써 바닥에서 뒹굴고 있던 보쿠토가 아카아시의 발목을 잡아챘다.
“아니. 난 이거.”
“……보쿠토 씨.”
보쿠토가 몸을 돌려 위를 올려다보며 씩 웃었다.
“공략 안 할거야?”
“여기 고기 요리 맛있게 하는 곳 바로 옆에 있어요.”
“…….”
아카아시가 몸을 굽히고 자신의 발목을 붙잡은 보쿠토의 손을 떼어 가볍게 입맞춤했다.
“굶기고 싶진 않으니까요.”
“…….”
“가요.”
보쿠토가 거의 우는 표정을 지었고 아카아시가 그를 붙잡아 일으켜 세웠다.
그 뒤로 아카아시가 말한 곳에서 고기요리를 먹고, 근처 디저트 전문점에 들러 혀가 떨어지도록 단 과자도 먹고, 공방 구경도 하다가 노천 카페에 나란히 앉아서 휴대전화로 게임도 했다.
“이거 퀘스트 진짜 끝장이다…….”
“그 다음은 더 장난 아니에요.”
“헉. 아카아시 레벨 왜 그래? 언제 이렇게 레벨 올렸어? 뭐야?”
“뭘……. 그냥 틈틈이 한 것 뿐인데요. 애당초 하라고 한 건 보쿠토 씨잖아요.”
아카아시가 보쿠토의 어깨에 기댄 채 휴대전화 단말기 위로 손가락을 톡톡톡 움직였다. 자신의 화면만 집중해서 보던 보쿠토가 흘끗 옆을 보았다가 눈이 휘둥그레진다. 아카아시는 면박을 주고서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보쿠토는 미련 없이 액정 화면을 내리고 아카아시를 따라나섰다.
조그만 곳이었다. 가도 곳곳에 노을이 물들어간다. 거리에 낯선 사람은 아카아시와 보쿠토 두 사람 뿐이었다. 거리를 걸어다니는 사람도 두 사람뿐이다. 아름답게 꾸며진 거리가 온통 두 사람만의 것이었다.
“이제 슬슬 들어가요. 모처럼 온천 여관 왔으니까 온천욕은 해야죠.”
“이거도 그거야? 공략이야?”
“글쎄요.”
아카아시가 슬쩍 웃었고 보쿠토가 그 표정을 보고서 결국 아카아시의 손을 잡아채어 앞장서고 말았다. 보쿠토에게 끌려가듯 가던 아카아시는 지나가는 편의점을 보고서 걸음을 멈춰 세웠다.
“보쿠토 씨, 잠깐만요.”
“왜?”
“여기 가게 잠시.”
보쿠토가 고개를 갸웃하는데 아카아시는 보쿠토를 바깥에 세워두고서 혼자 안으로 들어갔다. 보쿠토가 편의점 안을 기웃거렸다. 아카아시는 고민하는 것 없이 캔 두개를 빠르게 계산하고는 기다리고 있는 보쿠토에게 다가갔다.
“뭐야?”
“이거, 여기 있네요.”
“뭔데?”
“지난 번에 보쿠토 씨가 품절 돼서 못 먹었다고 했던 맥주요.”
지나가는데 광고 포스터가 붙어 있길래요. 여긴 있네요. 아카아시가 비닐 봉투를 열어 안을 보여주었다. 아직 열기가 감도는 더운 날씨에 벌써 물기가 맺히기 시작한 은빛 캔 두 개였다.
보쿠토는 그 캔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보쿠토 씨……?”
“으아아아아아!”
아카아시가 고개를 갸웃하는데 돌연 보쿠토가 발을 쾅쾅 구르며 비명같은 소리를 꽥 질렀다. 아카아시가 눈을 크게 뜨고서 보쿠토를 바라본다. 보쿠토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서는 훌쩍거리는 것 같은 얼굴로 아카아시를 바라보았다.
“……나 아카아시 너무 좋아하게 돼버려…….”
“…….”
보쿠토는 정말 왈칵 울어버릴 것 같은 얼굴이었다. 억울한 것 같기도 하고 기쁜 것 같기도 했다. 놀라서 눈만 깜박이던 아카아시는 시선을 누그러뜨리며 옅게 미소지었다.
“그런가요?”
“어떻게 이렇게 잘해. 완전 공략, 진짜.”
“그야 제일 좋아하는 거니까요. 잘할 수 밖에.”
이번에는 아카아시가 보쿠토의 손을 쥐고 앞장섰다. 보쿠토는 끌려가듯 가면서 연신 투덜거렸다.
“나도 제일 좋아하는 건데.”
“그런가요.”
“근데 엄청 힘들었는데. 아카아시는 이렇게 잘 하고.”
“힘들었습니까.”
“나 아카아시 공략집도 만들었다.”
보쿠토가 품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냈다. 앞장 서서 걸어가던 아카아시가 흘끗 뒤를 돌아보았다가 그만 멈춰서고 말았다. 보쿠토의 손에 반이나 찰까 싶은 조그만 노트였다. 얼마나 많이 펼쳐본 것인지 모서리는 다 헤져서 벌어지려고 했고 표지는 구겨져있었다.
“난 이렇게까지 해서 겨우겨우 했는데. 아카아시는 한 번에 해내고.”
오래되고 긴 기록이었다. 매일 매일 있었던 일, 아카아시가 얼마나 기뻐했는지, 혹은 슬퍼했는지, 힘들어할 때는 어땠는지, 그래서 자신은 어땠는지…….
보쿠토가 보란듯이, 억울한 얼굴로 보여주는 걸 바라보던 아카아시는 휙 몸을 돌렸다. 그의 목덜미가 붉었지만 보쿠토는 눈치채지 못하고서 끊임없이 투덜거렸다. 치트키 안 쓰기로 했잖아. 안 썼어요. 안 쓰기는, 안 쓰고 어떻게 이래. 말했잖아요, 제일 좋아하는 거라고.
“치트키 안 쓰기로 했잖아!”
“안 썼…….”
“그 말이 치트키야!”
뺨이 달아오른 보쿠토가 억울한 듯이 빽 소리친다. 그렇게 말하면 좋아하게 되어 있잖아! 아카아시는 결국 걸음 속도를 늦출 수밖에 없었다. 누가 누굴 공략하는 건지…….
“공략 끝났다면서요?”
“이익.”
“이제 에필로그 하러 가죠.”
다른 화제를 꺼내면 또 금방 눈을 반짝인다. 마냥 어린애같았다. 제 소유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에 탐욕을 보이는 것도 어린애같다.
“에필로그 언제까지야?”
“글쎄요. 보쿠토 씨가 질릴 때까지?”
“그럼 영원히?”
정말, 누가 누굴 공략하는 건지…….
“보쿠토 씨.”
“왜애.”
“이거, 취소 안 돼요.”
뒤로가기도 없어요. 리로드도 안 돼요. 세이브도 없어요. 아카아시가 줄줄이 말했다. 보쿠토도 대답했다. 필요없어. 안해. 알고 있어.
“나 튜브 가져왔어.”
“……온천은 그런 거 아닙니다.”
“풍선에 바람 넣는 것도 가져왔는데.”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오리도 안 돼?”
아무도 없는 두 사람만의 거리였다. 노을만이 발치를 적실 때 주홍빛 그림자가 천천히 겹쳤다가 부드럽게 떨어졌다.
저는 상어가 더 좋지만요, 아카아시의 말에 보쿠토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런 인형은 안 팔아! 아카아시가 낮게 웃었다. 그림자가 한 번 더 겹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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