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쿠아카 |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행복하게 해줄게!”
처음 본 천사의 눈동자는 금빛이었다.
*
아카아시는 벤치에 앉아서 정면을 바라보았다. 늦겨울, 개인적으로 그가 가장 황량하다고 생각하는 계절이었다. 꽃과 나무는 모두 지고 추위를 장식할 눈꽃마저 녹아 아무것도 없이 봄을 기다리는 것밖에 할 수 없는 시간. 삭막하고 쓸쓸한 계절.
“이거 진짜 최고다……! 진짜 맛있어……!”
“아, 예……. 많이 드세요.”
이런 계절에 열려있을 리가 없는데 어째서인지 그가 앉은 벤치 앞에는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파는 노점상이 영업 중이었고 그에게 온 ‘천사’가 눈을 빛냈다. 얼결에 아이스크림 콘을 쥐여줄 때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거짓말 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아카아시는 양손으로 입을 가린채 최대한 옆을 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이 쓸쓸한 계절, 흐릿한 구름이 그림자마저 가리는 날씨, 남은 것은 봄을 기다리는 추위뿐이었던 오늘 아카아시의 앞에 반짝 하고 나타난 건 태어나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금빛 눈동자였다. 구름이 잔뜩 끼어 흐린 날이었고 빛조차 연약한 늦겨울인데 그 눈동자는 마치 한여름 뙤약볕 아래의 유리구슬처럼 반짝거렸다.
그것만은, 그의 말대로 천사같았다.
‘진짜? 정말?’
그저 천사라고만 했으면 당연히 이상한 사람이라고 여기고 말았을 텐데 그럴 수가 없었다. 그의 눈앞에서 하얀 깃털이 팔락거렸다. 빛을 받아 금색으로 반짝거리는, 새하얀 깃털이었다. 남자의 등에서 돋아나 활짝 펼쳐진 날개에서 흩어진 깃털. 아카아시는 멍한 얼굴로 자신의 손에 내려앉은 깃털을 바라만 보았고, 남자는.
-행복하게 해줄게!
활짝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쳐다만 보고 있는데 주위를 지나가는 사람들은 전혀 알지 못하는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스쳐지나갔고 아카아시는 자신의 눈에만 보이는 것 같은 그 날개를 무시하지 못했다. 아카아시가 신경쓰는 기색을 보이자 남자는 우쭐하듯이 날개를 선보이는데, 서둘러 감춰보라 말했더니 또 허둥지둥 숨기기는 하였다.
그래서 아카아시는 더욱 좌절하고 말았던 것이다. 가짜나 조잡한 장식이라도 그렇게 한 순간에 눈 앞에서 사라지게 하지는 못할텐데!
‘몰래카메라 같은 건가?’
아카아시는 침착하게 숨을 고르며 생각을 정리했다. 그래, 현대의 기술은 생각보다 훨씬 더 대단하고 눈앞에서 진짜 날개같은 걸 정말로 펼쳤다가 정말로 없애는 것도 불가능한 일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아무리 생각해도 원리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말이다.
그러면 이 사람은 배우?
아카아시는 결국 옆을 흘끗 바라보았다. 온 입가에 아이스크림을 묻히면서 열심히 먹고 있는 남자였다. 사람이 정말로 아이스크림같은 걸 처음 먹어보면 저런 얼굴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연기력에 대해서는 인정해야 할 것 같다.
“그……. 천사시라고.”
“응응!”
마지막 한입 정도 남은 아이스크림을 안타까운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던 남자가 아카아시의 질문에 성심성의껏 대답하고는, 결의에 찬 눈빛이 되어 남은 것을 한입에 덥석 털어넣는다. 아카아시는 마른침을 넘겼다. 정말로 저게, 다 연기?
“그런데 왜 그……. 천사라면 위에 있어야 하지 않나요.”
아카아시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차마 ‘천국’이라거나 ‘하늘 나라’라는 말은 하지 못하고서, 손가락으로 하늘만 가리켰다. 남자는 조금 처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실수해서 벌받으러 내려온 거야.”
“아, 그러시구나…….”
아카아시는 영혼없이 고개를 끄덕였는데 남자는 개의치않는 얼굴로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래서 케이지를 행복하게 만들어주면 다시 위로 돌아갈 수 있어!”
“왜 전데요……?”
“내가 케이지로 정했으니까!”
“아 예…….”
아카아시가 영혼 없는 목소리로 고개만 끄덕거렸다. 남자는 다 먹어버린 아이스크림 콘이 못내 아쉬운 것 같았다. 아카아시는 미간에 힘을 주고서 끊임없이 침착하게 생각하기 위해 애썼다. 어떻게 하면 좋은가? 무얼 해야 하나? 그리고 얼굴에 잠시 손을 묻었던 아카아시는 고개를 들고 벌떡 벤치에서 일어섰다. 콘의 끄트머리만 바라보고 있던 남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쳐다본다. 아카아시는 눈 앞에 있던 노점상에서 아이스크림 콘을 하나 더 사서 남자의 손에 쥐어주었다.
“우와아아아!”
“저 행복하거든요, 이제.”
얼굴에 함지막하게 웃음을 그리고서 아이스크림에 입을 대려던 남자가 눈만 깜박이며 아카아시를 올려다본다. 아카아시는 벤치에 앉아있는 남자 앞에 서서 차분하게 말을 늘어놓았다.
“그 쪽이 이렇게 아이스크림 먹는 모습만 봐도 굉장히 행복하니까요. 이제 됐네요. 다시 위로 가시면 되겠네요.”
“아……?”
“그건 제 선물이니까 맛있게 드시고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날도 추운데 수고 많으시네요.”
아카아시는 꾸벅 인사를 하고는 몸을 돌렸다. 이만하면 양호한 대처였다. 나쁜 말을 하지도 않았고 미친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고 할수 있는 한 최대한 어울려주었다고 생각한다. 카메라에 잡혔더라도 흠잡을 구석은 없었겠지, 아카아시는 결론내리고서 뚜벅뚜벅 걸음을 옮겼다.
남자에게 잡히기 전까지는, 그랬다.
“케, 케이지! 잠시만!”
남자는 다급한 표정이었다. 아카아시는 슬쩍 주위를 살폈다. 도와줄 만한 사람은 없는지, 여차하면 뿌리치고 도망칠 구석은 있는지 확인해보기 위해였다. 남자는 그런 아카아시의 뜻도 모르고서 간절한 표정이 되었다.
“그, 그러면 안 돼. 그러면 나 못 돌아가.”
“아니, 제가 행복하다니까요. 지금. 굉장히.”
“거짓말하는 거지!”
당연히 거짓말이지, 그럼 이게 진짜려고. 아카아시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남자는 열렬하게 그의 거짓말을 주장했다. 아카아시가 대단히 도리에 어긋난 짓을 하고 있다는 투였다. 거의 울먹거릴 기세라 아카아시는 그만 곤란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저기, 우리 상식 선에서 생각을 해보죠.”
아카아시는 남자에게 붙잡힌 팔을 떼어내며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하기 위해 애썼다. 남자가 그를 바라본다. 아카아시는 어린애를 어르고 달래듯 조곤조곤 말했고 그 말을 듣고 있던 남자는 억울한 표정이 되었다.
“그래서 지금 내 말 못 믿겠다는 거지!”
“……뭐, 말하자면 그렇죠. 증거도 없고.”
천사라는 증거를 어떻게 댈 수 있겠어? 아카아시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붙잡을 셈이었다면 이 정도 반응 역시 예상했을 테니 준비한 게 있을 거였다. 뭔가 어디서 헬리콥터라도 나타나 조명이라도 쬐어주려나? 아니면 신상 정보를 줄줄이 읊는다거나? 아카아시는 시큰둥하게 생각했다. 뭘 하든 적당히 맞장구쳐주고서 다시 돌아설 생각이었다.
남자는 속이 상해서 반쯤 울 것 같은 표정인데도 결연했다.
“그럼 내가 지금 케이지를 조금이라도 행복하게 해주면, 믿을 거지?”
“예?”
아카아시는 눈을 깜박였다. 그 쪽이 천사라는 증거를 대야지, 무슨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어……. 하지만 아카아시가 말을 하기도 전에 남자가 입술을 꽉 깨물고 뺨을 부풀렸다. 그러다 이윽고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눈을 감고서 자신의 두 손을 맞잡는다. 아카아시는 남자가 하는 대로 지켜보기만 했다. 그렇게 남자가 반짝 눈을 떴을 때.
“짜잔!”
구름이 가득해 그림자조차 없이 흐릿하던 늦겨울이었다. 남자가 눈을 뜨는 순간 구름의 틈새로 빛이 깃들었다. 잿빛인지 은색인지 알 수 없는 남자의 머리카락이 반짝거리고 그 아래의 금빛 눈동자에 태양의 색이 스며들어간다. 구름 사이를 튿고 나온 햇빛이 남자의 얼굴 위로 유화같은 굴곡을 만들었다.
구름이 걷히고 햇빛이 내리쬐기까지는 두 호흡이 채 걸리지 않았다.
“이, 이제 믿을 거지?”
아카아시는 자신의 손끝을 적시는 햇빛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팔짱을 꼈다가, 잠시 뒤에는 미간을 꾹꾹 눌렀다. 그의 앞에선 남자가 초조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기만 하다. 아카아시는 한참 뒤에 겨우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지금 날이 갠 게.”
“응! 케이지한테 햇빛!”
그렇게 말하는 남자의 표정은 조금 창백했다. 아카아시는 초조하게 발끝을 따닥거리다가 돌연 다시 말했다.
“전 구름 낀 게 더 좋은데요.”
“……아?”
“햇빛 나면 눈부셔서.”
“구, 구름이 더 좋아? 구름……. 구름, 지금……?”
“왜요.”
“지, 지금은 무리인데.”
“그럼 언제 되는데요?”
아카아시의 물음에 남자가 다급하게 손가락으로 숫자를 셌다. 한 손으로는 모자라서 다른 쪽 손까지 써야 했다.
“어……. 이, 일주일쯤?”
아카아시는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일기예보를 뒤졌다. 그 동안 남자는 초조한 얼굴로 손끝을 맞잡고 있기만 했다. 아카아시는 일주일치 날씨를 뒤져보았다. 1주일 뒤 오늘은, 햇빛 그림이 선명하게 그려져있었다.
“그럼 그 때 봐요.”
“지, 진짜?”
“네. 그럼 이만.”
“어! 아! 어어! 어……. 어어…….”
뒤에서 아련하게 목소리가 흩어지는 걸 들었지만 아카아시는 단호하게 몸을 돌렸다. 남자는 더 이상 그를 붙잡지 않았다.
*
‘스토킹이라도 당하고 있는 거 아닌가 몰라.’
아카아시는 우산을 기울어뜨리며 생각했다. 수업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늦은 겨울비까지 오니 날이 쌀쌀하여 따뜻한 거라도 하나 사들고 갈까 싶어서 편의점을 눈끝으로 찾는데, 때마침 찾아낸 편의점의 유리문 근처에 누군가가 서서 그를 향해 열렬히 손을 흔들었다. 바로 자신을 천사라고 주장했던 남자였다. 어처구니가 없어 날을 셈해보니 오늘이 그 날로부터 딱 일주일 되는 날이다. 아카아시는 이대로 돌아갈까 고민했지만 주춤거리는 사이에 편의점 앞에서 뛰쳐나온 남자가 그의 앞에 섰다.
“케이지!”
“아……. 그게. 네.”
“왔어, 왔어?”
“왔다기 보다는…….”
지나가는 길이지만요. 아카아시는 떨떠름하게 대답하다가 결국 한숨과 함께 우산의 일부분을 공유해주었다. 남자가 놀란 듯이 눈을 깜박거리다가 활짝 웃었다.
“이거 빗방울 가려주는 거야?”
“아, 네. 보통 인간은 이런 거 맞으면 감기 걸려서 죽거든요.”
“뭐어어?!”
농담한 것이었는데 남자가 화들짝 놀라더니 어쩔 줄 모른다. 한참이나 팔을 허둥거리다가 마지막에 남자의 손이 닿은 것은, 정확히 말해 위치한 것은 아카아시의 어깨 위였다. 남자에게 우산을 기울여주느라 빗방울이 떨어지는 곳이었다. 이대로는 무슨 얘기도 할 수가 없다. 아카아시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문이 열린 빌딩 건물 앞에 섰다. 발치에 비가 떨어지는 소리가 나고 우산을 접을 수 있게 되자 남자는 큰 시련이라도 지나온 것처럼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그 뭐 증거라도 보여주시려고 다시 온 건가요.”
“응! 응응! 일주일동안 열심히 힘 모았다구!”
남자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양손을 맞잡는다. 아카아시는 손을 들어 겨울비가 오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지난 주에 봤던 일기예보에선 햇볕이 든다 하더니 비가 왔다. 일기예보가 틀리는 것이야 흔한 일이지만.
‘그래도 여기서 비가 그치기라도 하면, 정말로 조금 믿어버릴지도 모르겠는데.’
아카아시는 손을 내리고서 옆을 흘끗 바라보았다. 눈을 꾹 감고서 꽉 깨문 입술, 덕분에 조금 부푼 뺨, 뭔가 기도 비슷한 거라도 하는 것 같았다. 그 눈매 끝으로 빛이 감돌아서 어딘가 정말로 천…….
아카아시는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휙 고개를 돌려 다시 하늘을 쳐다보았다. 어느새 빗소리는 그쳤고 빌딩 앞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하나 둘씩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우산을 접고 있었다. 가도에 고인 물웅덩이를 밟아 찰박거리는 소리가 나고, 그 물웅덩이들이 반짝거렸다. 햇빛을 받고 있어서였다.
“…….”
“그, 그쳤……. 아……. 구, 구름. 구름까지 걷혀버렸다. 어쩌지……. 케, 케이지. 그게. 내가 힘조절이 잘 안돼서. 진짜 미안. 구름 다시……. 다시 해 줄테니까, 나 진짜니까! 정말! 일주일만 더! 진짜! 진짜 구름! 진짜!”
“아니, 됐습니다…….”
아카아시는 손을 내저었다. 바깥으로 손을 뻗어본다. 빌딩의 입구에서 생긴 그림자가 뚜렷하게 졌고 그러지 않은 부분엔 희고 선명한 빛이 들고 있었다.
정말로 햇빛이었다.
“케이지, 진짜 미안! 진짜! 내가 구름 정말로 만들어 올게, 진짜, 진짜 미안!”
“아뇨. 그러니까, 알겠으니까 일단 진정하시고.”
남자는 거의 울것 같은 얼굴로 그에게 매달렸고 아카아시는 이쯤에서 적당히 현실을 포기하기로 했다.
“그래요, 천사시라고.”
“응! 응응!”
“저를 행복하게 해주신다고요.”
“응! 행복하게!”
“그런데 이거, 그러니까……. 이미 정말로 행복하니까 어떻게 그 위로 돌아가셔도 되거든요, 정말로.”
“지금보다 훨씬 더 행복하게 해줘야 해!”
“아, 그래요…….”
일주일동안 ‘이미 행복하다’는 말에 어떻게 대꾸할지만 생각해 온 모양이었다. 아카아시는 우산을 말아 접고는 손등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남자는 하얀 긴팔 티에 면바지 차림이었다. 그러고도 추운 기색 하나 없다.
“춥진 않고요?”
“응? 추워?”
아예 더위 추위라는 개념을 모르는 건가? 아카아시는 고개를 흔들었다. 남자는 여기서 추워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고심하는 표정이었다.
“집은 어디인데요?”
“어? 집?”
남자가 눈동자만 굴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점점 더 가관이었다. 이미 연기라는 생각은 반쯤 포기했지만, 그래도 새삼 굉장하다는 생각이 들고야 만다.
‘정말로 진짜 천사같잖아. 아니면 그 비슷한 거라던가.’
“그럼 일주일동안 어디서 지내신 건데요?”
‘하늘나라’라고는 죽어도 말하고 싶지 않아서, 아카아시는 최대한 에둘러가기 위해 애썼다. 남자는 어깨를 으쓱했다.
“여기 저기에서!”
“아하.”
여기저기…….
“그 행복하게 해준다는 건, 그러면 어떻게 하는 건가요.”
“으, 으응? 그러니까…….”
“제 소원같은 걸 들어주는 겁니까?”
“아니, 그건 기본적으로 권한 밖인데.”
“날씨 만든 건 제 소원 들어준 거잖아요.”
“앗, 아니지. 내가 케이지 기쁘게 해주고 싶어서 한 거니까~!”
와, 굉장한 직구……. 아카아시는 가볍게 헛기침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왠지 목덜미가 홧홧했다.
“……그래요. 그런데 전 이제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어! 그! 그래! 가자!”
아카아시는 마른 입술을 축였다. 가자니, 어디를? 우리 집엘? 같이? 지금 그런 뜻인가?
“아니, 집까지 혼자 갈 수 있으니까요.”
“나도야!”
남자가 활짝 웃었다. 아카아시는 입을 꾹 다물었다가 더는 말하지 않고 먼저 한 발을 내딛었다. 더 이상은 대화가 소용없을 거라는 강렬한 예감이 들었다. 남자가 서둘러 아카아시의 곁에 붙었다.
“저기…….”
“보쿠토야!”
“네?”
“내 이름! 보쿠토 코타로!”
-코타로!
-코타로?
아카아시는 순간 귓가에서 맴도는 앳된 목소리에 눈을 깜박였다가 다시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여전히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네, 그래요. 보쿠토 씨. 그. 제가 얼마나 더 행복해지면 되는 겁니까?”
행복이라니, 이런 말을 육성으로 떠드는 것조차 낯설었다. 아카아시의 말에 남자가 금빛 눈동자를 도록도록 굴렸다.
“얼마나?”
“수치로 측정할 수 있어야죠. 보쿠토 씨가 돌아가고 말고가 달려있는 문젠데.”
“그, 그냥 자연스럽게 알게 돼.”
“…….”
이런 어설픈 면면은 정말로 어디 몰래카메라나 속임수같은데. 아카아시는 그렇게 말하며 손으로 눈을 가려 하늘을 흘끗 올려다보았다. 갑자기 개어버린 날씨는 어떻게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럼 뭐……. 애써보시고요.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어? 다, 다 왔어?”
“네. 안녕히 가세요.”
아카아시는 최대한 정중하게 인사를 마무리지었다. 우리의 만남도 대화도 여기까지라는 확고한 뜻이었다. 남자는 더는 그를 붙잡지 못했고 아카아시는 산뜻한 걸음으로 몸을 돌렸다.
*
아카아시가 남자, 보쿠토를 본 것은 바로 다음날이었다.
방학 중에도 부활동은 쉬지 않았고 아카아시가 겨울에 바깥을 오가는 것도 그래서였다. 추위를 심하게 타는 아카아시로서는 부활동이 아니었다면 겨울에 문 밖을 나설 일조차 없었을 테니까.
선배들에게 인사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어깨와 손을 주무르며 체육관으로 들어섰다. 스트레칭을 하려고 마음먹는 바로 그 순간에 어디서 들어본 목소리가 나기에 고개를 들었더니 거기엔 아카아시 자신과 같은 체육복을 입고 있는 보쿠토가 있었다.
아카아시가 너무 놀라서 입을 떡 벌리는데 주위의 모두, 그 누구도 위화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오히려 익숙한 것처럼 보쿠토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서 서로 장난 치고 웃고, 그러고 있다. 아카아시가 마른침을 꿀꺽 넘길 때 보쿠토가 그를 알아보았다.
“케이지!”
“아, 아니……. 이게…….”
아카아시는 아무나 붙잡고 이 사태에 대해서 묻고 싶었지만 그보다 똑바로 다가오는 보쿠토가 훨씬 일렀다. 아카아시는 저도 모르게 뒤로 주춤, 뒷걸음질 쳤다가 그만 보쿠토에게 그대로 양 어깨를 붙잡혔다.
“케이지! 왔어!”
“저는 왔는데……. 왜……. 어떻게 당신도 여기에…….”
아카아시가 더듬 더듬 말을 하는데, 지나가던 2학년이 와하하 웃음을 터뜨리곤 선배한테 당신이 뭐냐고 한 소리를 한다. 아카아시는 아연실색한 얼굴로 보쿠토를 바라보았다. 선배?
“어, 언제부터?”
“사실 오늘부터야!”
보쿠토가 속삭이듯이 눈을 찡긋하며 대꾸했다. 그 얼굴을 뜯어보자니 처음 봤을 때보다 앳되어진 것 같았다. 처음 만났을 때는 분명히 성인이라는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확실히 고등학생 같았다.
‘정말로?’
날씨가 개어버린 것도 기가 막힌 우연이라고 억지를 부릴 수 있었다. 일주일만에 딱 맞추어 만난 것도, 자신의 동선을 파악하면 어려울 것도 없는 일이다. 마냥 이쪽에 발 디딘 사람이 아닌 것처럼 구는 것도 탁월한 연기자를 쓰면 될 일이고 부원들 모두가 보쿠토와 이미 아는 사이인 척 구는 것도 부원들을 섭외하면 될 일이지만 본인의 나이가 도로 어려지는 것만은.
‘말이 되나?’
아카아시는 마른 세수를 한 번 하고서 곧장 보쿠토를 끌고 갔다. 옆에서 어딜 가느냐고 물었지만 대답할 겨를은 없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
“아, 아니. 그러니까 가까운 곳에 있어야…….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 것 같아서!”
“그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말은 이제 안 하셔도 괜찮고, 도대체가 왜 어떻게 이렇게 자연스럽게…….”
이쯤이면 소름이 끼칠 법도 한데 그런 것보다 당황스러운 마음이 먼저인 건 저 표정때문이었다. 천진난만한 얼굴로 그림처럼 웃어버리면 나쁜 생각이 들 수가 없다. 아카아시는 입술이 바싹바싹 마르는 기분을 한껏 느꼈다.
“그야 나 천사니까!”
“아, 예. 그렇죠. 그랬죠.”
“그런데 내가 선배야? 계산 잘못했네……. 이거 다시 바꾸려면 또 며칠은 있어야 하는데…….”
“됐습니다. 선배 하세요.”
까딱했으면 동급생이 될 뻔 했다 싶으니 등뒤로 식은땀이 주륵 흐르는 기분이었다. 아카아시는 자신이 현실을 대충이나마 수용하겠다고 마음 먹은줄 알았지만 막상 닥쳐보니 아니라는 것만 실감하게 된다. 마음의 각오같은 건 조금도 되지 않은 상태였다. 아찔할 만큼.
“내가 선배인 게 좋아? 그런 거야?”
보쿠토가 눈을 반짝거리며 물었다. 아카아시는 마른 입술을 다셨다. 이것도 설마,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어준다는 과정의 하나인가? 하지만 동급생보다는 선배인 쪽이 그나마 덜 부딪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어 아카아시는 고개를 끄덕여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돌이켜보건대, 이 때 고개를 끄덕일 일이 아니라 학교에서 만나지 않는 쪽이 행복하다는 말을 했어야 했던 것이다.
보쿠토가 마치 한여름 해변의 태양처럼 활짝 웃음을 꽃피웠다.
*
“배구 규칙은 어떻게 잘 아시네요…….”
이쪽 세계의 더위 추위 개념도 없었던 주제에 배구 경기 규칙만은 꿰고 있는 게 괜히 어처구니가 없어 말을 했더니 보쿠토가 양손으로 공을 쥔 채 활짝 웃었다.
“그야 케이지가 좋아하는 거니까!”
“……그, 케이지 말고 아카아시라고 하죠.”
“응? 그 편이 좋아?”
아카아시는 그 말이 ‘그 편이 행복해?’로 들렸다. 괜히 침을 꿀꺽 삼키고 서둘러 고개를 끄덕인다. 보쿠토는 곧장 ‘아카아시!’라고 그를 불렀다.
‘하지만 그래서야 꼭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 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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