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쿠아카 | 레모네이드 금지령
“그러니까 2반에……. 부회장?”
“네.”
“그……. 그……, 어, 이, 이름이 뭐라고?”
“쿠스노키 츠카사요. ……모르세요?”
“어, 아, 아니. 아는데. 아는데, 내가 아는 쿠스노키는……. 나, 남잔데?”
“네, 맞습니다.”
아카아시는 담담하게 대답했고 보쿠토는 입술을 꽉 틀어쥐었다. 비명을 삼키는 표정이 분명했다.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의 강이 흐르고, 잠시 뒤에 아카아시가 두 손을 맞잡은 채 눈을 내리깔고 말했다.
“곤란하시면 괜찮습니다.”
“아, 아니, 곤란, 곤란한 게 아니라. 어, 그러니까, 어. 노, 놀라서. 내가 놀라서 그러지! 아카아시한테 조, 좋아하는,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줄! 몰라서! 놀랐어!”
보쿠토는 자꾸만 튀어나가려는 목소리를 억누르느라 거의 울 지경이었지만, 눈앞에 있는 후배는 그런 그의 사정 따위는 전혀 모르는 듯이 새초롬하게 눈만 깜박일 뿐이었다.
“그, 그래서. 그러니까. 그……. 도…도와달라고. 도와달라고?”
“네.”
“내, 내가? 어떻게 도와주면 되, 되려나.”
아카아시는 잠깐 고개를 기울여 고민하는 표정을 짓다가 ‘종종 상담 해주시고, 가끔 필요한 일 있으면 부탁드릴게요. 어려운 일은 아닐 거예요.’ 라고 말했다. 정말로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이었다. 보쿠토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
처음에 아카아시가 ‘상담하고 싶은 일이 있다’고 말하며 그에게 잠깐 시간을 내주었으면 하는 뜻을 내보였을 때, 보쿠토는 솔직히 말해서 엄청나게 기뻤다. 물론 아카아시에게 뭔가 상담을 해야만 하는 고민이 있었다는 건 마음이 아팠지만 그와 별개로 아카아시가 자신을 의지하고 있다는 뜻 같았던 것이다. 아카아시와 알아온 2년 가까운 시간동안 처음 있는 일이기도 했다.
그래서 무슨 일이든 다 들어줄 테니 얼른 말해보라고 했고 아카아시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덤덤하게 입을 열었는데 그것이.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 선배가 좀 도와주셨으면 좋겠어요.’
보쿠토는 순간적으로 천지가 뒤집힌 것이 아닌가 고민했다. 눈앞의 아카아시가 변함없는 표정으로 서 있었기에 겨우 균형을 잡을 수 있었다. 왜 이렇게 충격을 받았는지도 알 수가 없어서 겨우 더듬더듬 누구냐고 했더니 3학년 2반, 그의 옆 교실을 쓰는 선배란다. 이름은 쿠스노키 츠카사. 보쿠토도 익히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일 년 내내 운동부 주장을 했는데 학생회 부회장의 이름조차 모를 리가 없지 않은가.
보쿠토는 창틀에 기대어 바깥을 쳐다보았다. 옆 반은 이번이 체육 수업이었다. 그 중에서 쿠스노키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운동을 하지는 않아서 몸은 얄팍했지만 키는 컸고 나름대로 밸런스도 좋았다. 생긴 것도 멀끔하여 가만히 서 있자니 같은 반의 여학생들이 오며 가며 말을 건다. 보쿠토는 와락 표정을 구겼다.
그가 알고 있는 쿠스노키 츠카사는 남자였다. 그래서 아카아시의 입에서 이 이름이 나왔을 때, 처음엔 잘못 들은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아카아시는 무슨 문제라도 될 게 있냐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남자. 그 분 맞아요.
보쿠토에겐 그 순간이야말로, 정말로 천지가 뒤집어지는 때였다. 생각도 하지 못했다. 남자와 남자가 그런, 그런 뜻으로 좋아할 수 있는 거였어? 사귈 수 있는 건가? 그런 거야? 생각해보니 안 될 것도 없었다. 사람과 사람끼리인데 문제될 게 뭐가 있어? 그러니까 아카아시도 저렇게 덤덤하게 좋아하는 사람이 있노라 말하며 그에게 도와 달라 하는 것일 터였다. 남자 선배를 좋아한다고. 졸업이 다가와, 그 전에 제대로 고백이라도 해 보고 싶다고.
‘가능하다면 사진을 좀.’
보쿠토는 오늘 아침에 들었던 아카아시의 부탁을 생각하며 뒷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카메라를 켜는 손이 파르르 떨렸다. 사진? 사진을 갖고 싶단 말이야? 내 사진은 한 번도 달라고 한 적이 없으면서 저런 애 사진을 갖고 싶다고?
찍어달라는 말에 호기롭게 알았다며 아카아시의 등을 팡팡 내리치고 왔는데, 막상 찍으려고 하니 왠지 속이 자꾸만 울컥거렸다. 손이 흔들려 사진을 제대로 찍을 수가 없다. 하지만 찍어준다고 했는데. 사진도 하나 구해가지 못하면 아카아시가 실망할지도 몰랐다. 얼마나 보고 싶으면 평소에 뭐 해달라고 말 한마디 하는 적이 없는 애가 사람 사진을 구해달라고 할까.
얼마나, 보고 싶으면…….
“야, 보쿠토! 지금 매점 가자~!”
“어, 어어, 어어어!”
보쿠토가 멍하니 카메라 화면이 떠 있는 액정만 쳐다보고 있을 때였다. 뒤에서 같은 반 친구가 와락 달려들었다. 순간 보쿠토의 손에 있던 휴대전화가 튕기듯 위로 튀어 올랐다. 좁은 포물선을 그리며 휴대전화가 창틀을 넘어가고, 보쿠토가 손을 뻗었지만 그대로 손끝을 스쳤다.
“아.”
“어.”
단단한 물체가 보도블럭 위에 떨어져 부딪히는 소리만, 고요하게 위층의 교실까지 울렸다. 지나가던 학생들이 놀라서 위를 올려다본다. 보쿠토가 말을 건 친구와 함께 서둘러 1층으로 내려갔지만 휴대전화 액정은 거미줄처럼 금이 가고 난 뒤였다. 이리저리 흔들어봤지만 카메라는 제대로 작동되지도 않았다.
“으아아아! 어떡해! 보쿠토! 미안, 어떡해!”
“어? 아, 아냐. 어차피 바꿀 거였고~! 괜찮아!”
멍하니 망가진 휴대전화를 바라보던 보쿠토는 곧 호쾌하게 웃으며 친구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어차피 쓴지 제법 되기도 해서 바꿀 생각이었다는 말에도 친구는 어쩔 줄 모른다. 보쿠토는 연신 그 등만 두드려주며 흘끗, 운동장 쪽을 바라보았다. 교정에서의 소란에 다음 체육 수업을 준비하던 학생들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사람들 중엔 쿠스노키도 있었다.
“보쿠토, 진짜 미안…….”
“……어? 아, 아니. 괜찮다니까~! 그러면 오늘 오후에 샌드위치!”
“그, 그걸로 돼?”
“바꿀 거였대도.”
쿠스노키가 보쿠토를 알아보고 슬쩍 눈인사를 하는 것 같았지만, 보쿠토는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아! 그러면 나 잠깐 들렀다 갈 데 있으니까, 너 먼저 올라가라!”
“어? 어디 가는데?”
“우리 아카아시 보러~!”
“또 그 후배?”
친구는 익히 알겠다는 듯이 물었고 보쿠토는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다음, 서둘러 2학년 교실 쪽으로 뛰듯이 걸어갔다.
*
“아카아시, 나 핸드폰 부서졌어~!”
아카아시는 교실의 뒷문이 벌컥 열리기가 무섭게 터져 나온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반 친구들은 이미 이 3학년이 익숙한지 조금 웃을 뿐 크게 신경 쓰는 눈치는 아니었다.
“보쿠토 선배? 폰이 부서져요?”
복도로 끌고 나와 물어보자 보쿠토는 한껏 응석이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손에 있는 것을 내밀었다. 아카아시는 액정에 줄줄이 금이 간 휴대전화를 보고서 미간을 모았다.
“어쩌다가요.”
“아 그게~! 내가 그 쿠스노키! 크, 크흠. 쿠스노키……사진 찍어주려고 했거든. 걔네 다음 시간 체육이라서 바깥에 있길래. 근데 친구가 뒤에서 밀치는 바람에 떨어진 거 있지.”
“……제가 괜한 부탁을 드려서 이렇게 됐네요.”
“아, 아니, 아냐~! 아니! 그런 거 아니고!”
보쿠토가 서둘러 고개를 내저으며 부정했다. 그런 거 아니고, 그런 얘기 하려는 거 아니야! 하지만 조금 침울해진 듯이 고요해진 아카아시의 표정은 어쩔 수가 없는 것이었다. 보쿠토는 지금까지 꾸며냈던 울상이 아니라 정말로 어쩔 줄 모르는 울상을 지으며 손을 허둥거렸다.
“그, 그래서. 내가 쿠스노키 사진, 못 찍어주게 돼서. 그거 말하러 온 건데. 근데 진짜 아카아시 때문은 아니고! 나 곧 이거 바꾸려고 하고 있었고! 정말이야!”
“……그래요?”
“응응! 진짜, 진짜!”
으아아아!
보쿠토는 비명을 지르고 싶은 심정으로 아무렇게나 말을 쏟아냈다. 그는 자신의 세터가 이렇게 시무룩해진 모습에는 면역이 없었다. 지금껏 기분이 쳐지는 건 언제나 그의 몫이었고, 그런 그를 달래는 건 아카아시의 몫이었다.
“그래도 바꿀 때까지 불편해서 어떡합니까…….”
“어? 아니, 이거 별로 불편하지 않고! 액정도 잘 보이고, 그냥 카메라가 고장이 나서 그런 거니까!”
“잘 보이긴요…….”
이게 다 깨졌는데요. 아카아시는 조금 속이 상한 것도 같았다. 액정이 다 금간 보쿠토의 단말기에 손을 대고서는 여전히 미간을 찌푸린 채다. 보쿠토는 괜히 머쓱해서 뒷목을 쓸며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진짜 괜찮은데. 그치만 이대로 두고 싶기도 하고, 그래도 아카아시가 저런 표정 하는 건 진짜 싫은데.
오늘 부활동이 없다는 게 생각난 것도 그 순간이었다. 보쿠토는 떠오른 생각을 곧장 입 밖으로 냈다.
“저, 어, 그, 그러며는 오늘 오후에 바꾸러 갈 건데! 같이 갈래?”
“……그럴까요.”
“어, 그러니까 아카아시 안 바쁘면…….”
“그래요, 그럼.”
“어어? 정말? 진짜?”
아카아시가 선뜻 고개를 끄덕이고 보쿠토가 되래 더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아카아시가 갸웃한다. 무슨 문제라도 있냐는 것 같은 표정에 보쿠토는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저 오늘은 학생회 회의가 있다고 해서요. 조금만 기다려주실 수 있을까요.”
“……아.”
“곤란하시면…….”
“아, 아냐! 아냐! 생각을 못하고 있어서……. 어, 으응. 알았어! 끝나고 가면 되지!”
보쿠토는 얼른 웃었다. 아카아시가 수업에 늦겠다며 서둘러 그를 떠밀었다. 보쿠토는 몇 걸음 걷다 말고 뒤를 돌아보았다. 아카아시가 그를 보고 있었다.
“선배?”
“어……. 아, 아냐!”
보쿠토는 고개를 휘휘 내젓고는 자신의 교실이 있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
학생회, 학생회 회의.
방과 후 체육관은 조용했다. 오늘은 배구부활동도 없는 날이어서 남아있는 사람 하나 없었다. 보쿠토는 아무도 없는 체육관의 벽에 기대어 배구공 하나를 띄웠다 받았다 하며 오늘 오후 내내 머릿속을 점령한 단어만 입 속으로 굴렸다. 학생회 회의.
아카아시는 반에서 총무라고 했다. 무슨 총무가 학생회 회의를 가겠느냐 할 텐데, 저 반은 부반장이 없었다. 아카아시가 배구부 부주장이 되면서 낸 고육지책이었다. 굳이 그렇게까지 아카아시를 부회장 대리로 세울 건 없지 않을까 했지만 그렇게 아카아시를 고집하는 이유도 알 것 같아서 보쿠토는 거기에 대해 특별히 언급하지 않았다. 그 덕에 동아리의 부장들까지 전부 모이는 학생회 총회가 있는 날에도 만날 수 있어서 오히려 만족스러워 하기도 했다.
그랬던 날이 왠지 까마득했다.
보쿠토는 떨어지는 공에 정수리를 맞고는 인상을 찌푸렸다가 그만 체육관 바닥에 드러누웠다. 학생회 회의를 하고 있으면 아카아시는 지금쯤 쿠스노키를 보고 있을 것이다.
그 생각을 하자니 갑자기 위가 아픈 것 같았다. 보쿠토는 몸을 조금 웅크렸다.
‘진짜 좋아하는 사람 있는 줄 전혀, 몰랐는데…….’
정확히는 아카아시와 보쿠토, 그 둘을 둘러싼 세계에 다른 사람은 생각하지 못했다. 보쿠토는 자신과 아카아시가 완전한 관계라고 생각했다.
아침에 가장 먼저 만나고 가장 늦게까지 함께 하면서, 아름다운 것을 볼 때면 옆에 있는 옷자락을 잡아 당겼다. 그러면 아카아시가 거기에 있었다. 아카아시, 저거 봐! 진짜 예뻐! 그러면 아카아시는 보쿠토가 가리키는 것을 보고서 그렇네요, 하고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완전한 관계라고 생각했다.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이 완전한 관계. 닿고 싶을 때는 팔을 뻗으면 되었다. 목에 매달리면 아카아시는 내치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 다른 건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그만의 착각이었다.
-띠링
그 때 짧은 알림음이 울렸다. 보쿠토는 허겁지겁 옆에 벗어두었던 교복 상의의 주머니를 뒤졌다. 액정이 다깨지고 금간 것을 서둘러 손으로 훑다가 손 끝이 살짝 베였다. 보쿠토는 손가락을 입에 물고는 알림을 확인했다. 아카아시에게서 온 메세지였다.
-이제 다 끝나가요
-어디 계세요?
보쿠토는 ‘내가 갈게’라고 서둘러 입력하고는 아무렇게나 늘어놓았던 가방과 옷을 집어 들고 체육관을 박차고 나갔다. 항상 학생 회의를 하는 강당까지는 눈 깜박할 새였다. 방금 전 끝마쳤는지 낯익은 학생들이 그의 곁을 스쳐 지나가며 인사를 한마디씩 하고 간다. 보쿠토는 그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며 숨을 몰아쉬었다. 아카아시의 모습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그가 강당의 문까지 다가가 기웃거릴 때 눈앞에서 문이 양 옆으로 휙, 크게 열렸다.
“아. 보쿠토 선배.”
“보쿠토?”
“아…….”
보쿠토는 자신이 정말 이런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고 생각했다가 빠르게 그 생각을 털어냈다. 아카아시와 쿠스노키가 나란히 서 있었다. 아카아시도 결코 작은 편이 아닌데 쿠스노키는 그보다 더 컸다. 보쿠토 자신과 엇비슷한 것 같았다. 얇고 각진 안경을 끼고 있어서 지적인 느낌이 난다. 머리색은 짙고 차분했다. 문을 열어준 사람은 쿠스노키였던 것 같았다. 쿠스노키가 문고리에서 손을 떼며 보쿠토를 쳐다보았다.
“네가 여기까지 어쩐 일이야?”
“어? 아, 그게…….”
보쿠토는 입을 달싹이며 무슨 말이든 하려고 했지만 혀가 뻣뻣하게 굳어버린 것 같았다. 아카아시와 오후에 약속이 있어서 그렇다고 말해버리면 되는데 그럴 수 없는 건 아카아시 때문이었다. 괜히 쿠스노키 앞에서 오후에 다른 사람과 약속이 있다는 이야기를 해도 괜찮을지 걱정이 됐다. 마음같아서는 말해버리고 싶은데, 그냥 덜컥 얘기하고 싶은데!
“보쿠토 선배 휴대전화가 고장났다고 해서요. 보러 가려고요.”
“아아. 오늘 오후에 교정에서 뭔가 시끄러운 것 같더니 그 때야, 보쿠토?”
“어, 어어……. 봐, 봤어?”
쿠스노키가 친근하게 말을 붙였고 보쿠토는 최대한 평상시의 표정을 유지하기 위해 애쓰며 고개를 끄덕였다. 쿠스노키는 웃으면서 그 때 인사했는데 네가 못 봤던 것 같더라며 말했고 보쿠토는 차마 거기서 ‘사실은 나도 너 보긴 했어’라고는 말하지 못했다. 아카아시는 두 사람 사이에서 가만히 눈을 내리깐 채 이야기를 듣고 있기만 했다.
“그럼 두 사람 다 내일 보자.”
쿠스노키가 웃으면서 인사하고는 먼저 걸어갔다. 보쿠토는 성큼성큼 멀어지는 쿠스노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보쿠토 선배? 왜 그러세요?”
“……아카아시는 똑똑한 사람이 좋아?”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조금 처졌다. 옆에 서 있는 아카아시는 대답이 없었다. 잠깐의 침묵 뒤에 아카아시가 먼저 한 발을 내딛었고 보쿠토는 그 걸음을 따르며 아카아시를 흘끗거렸다. 아카아시가 나직하게 대답했다.
“아뇨. 저는 멋있는 사람이 좋아요.”
“아.”
그래, 그렇지……. 쿠스노키, 확실히 멋있지…….
“선배, 휴대전화 뭘로 바꿀지는 결정하셨어요?”
“어어, 그냥 아무거나……. 적당한 걸로 하게.”
보쿠토는 맥빠진 목소리를 추스르지 못했지만 아카아시는 그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대신 보쿠토의 손을 낚아챘다.
“웬 상처예요.”
“어어, 이거……. 아까 폰 급하게 만지다가 베였나봐.”
“약도 안 바르고 그냥 왔어요? 피 나는데.”
“별 거 아니고…….”
“별 거 아니긴요.”
아카아시가 미간을 모으고서는 주머니를 뒤졌다. 금방 반창고가 나오는 건 보쿠토가 걸핏하면 몸 사리지 않고 여기 저기에 부딪히고 갖다박는 탓이었다. 아카아시는 보쿠토의 손 끝, 베인 상처를 정성스레 감아주었다. 보쿠토는 눈을 꾹 감았다 떴지만 아카아시의 모습은 사라지지 않은 채였다.
*
봄고도 끝이 나고 3학년들은 대부분 정말로 은퇴하고서 이따금씩 체육관에 들르곤 했는데, 보쿠토는 그런 은퇴 같은 건 전혀 모른다는 듯이 들락거렸다. 쾌활하고 미운 구석이 없는 선배를 반기지 않는 후배는 없었고, 아카아시만이 종종 한숨을 내쉬긴 했지만 그런 보쿠토를 내치지는 않았다.
그래도 달라지는 건 있어서, 이제 보쿠토는 나름대로 본인의 연습보다는 후배들이 하는 걸 봐주는 쪽이었다. 한창 크게 웃으며 이제 2학년이 될 후배들을 데리고 놀던 보쿠토는 문득 목이 말라 고개를 들고 아카아시를 찾았다. 이쯤이면 아카아시가 물마시라고 할 텐데, 그런 생각에서였다. 그리고 보쿠토는 곧장 아카아시를 찾아낼 수 있었다.
아카아시는 체육관의 조금 열린 철문 쪽에 서있었다. 오후의 햇빛이 그 틈으로 들어와 아카아시의 뺨을 부드럽게 적셨다. 아카아시는 때로는 낮게 웃으며 체육관 밖의 상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누구와? 보쿠토는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그만 상대를 보아버렸다. 쿠스노키였다.
보쿠토는 칼이라도 찔린 듯이 얼어붙어있다가 금방 숨을 들이켰다. 화를 낼 셈이었다. 차기 주장이라는 녀석이 부활동 시간에 뭐하는 거며, 학생회 부회장이 배구부가 있는 체육관까지 무슨 일로 찾아와서 방해하는 건데, 이런 저런 할 말은 많았다. 그런데 처음에는 기세등등했던 걸음이 한 걸음 한 걸음 가까워질수록 힘이 빠져나갔다.
저렇게 부드럽게 웃는 아카아시는 본 적이 없었다. 그야 없을 거야. 앞에 있는 사람은 아카아시가 좋아한다는 사람이잖아. 나는 저런 표정 본 적 없는 게 당연한걸. 당연하지……. 마침내 아카아시 바로 옆까지 갔을때, 보쿠토는 화가 났던 얼굴은 온데간데 없이 눈썹까지 축 쳐진 표정이었다. 뒤에서 기척을 느낀 아카아시가 돌아보았다.
“보쿠토 선배?”
“아, 보쿠토.”
쿠스노키도 그에게 인사하고는 볼일이 다 끝났는지 내일 보자는 말을 남겨놓고 체육관에서 등을 돌린다. 보쿠토는 아카아시 옆에서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쿠, 쿠스노키……. 왜 왔어?”
“잠깐 얘기할 게 있다고 하셔서요. 선배, 물은요. 드셨어요?”
“아니, 이제 먹으려고…….”
아카아시는 별 것 아니라는 듯이 금방 평상시의 모습으로 돌아와서는 보쿠토가 마실 드링크를 챙기러 간다. 보쿠토는 아카아시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도와준다고 했던 건 없던 일로 하고 싶은 마음이 불쑥 불쑥 치고 올라왔다가 또 스르르 사라졌다. 아카아시가 저렇게 웃는 건 본 적이 없으니까, 웃게 해주고 싶었다. 그런데 그러기 싫다. 해주고 싶다. 해주기 싫다.
“보쿠토 선배. 드링크 드세요.”
아카아시가 드링크를 내밀었다. 보쿠토는 크게 숨을 들이키고는 그 병을 양손으로 붙잡았다. 해주고 싶다거나 싫다거나, 그게 어느 쪽이든 자신은 무엇도 해준 게 없었다.
“선배?”
“아, 아냐…….”
아직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마음이 이상했다. 보쿠토는 음료를 쭉쭉 들이켰다. 뭘 했다고 내가 벌써 이래?
“아카아시!”
“네?”
“뭐, 내가 해줄 거 있으면 얼른 말하라구!”
일부러 가슴을 세우고 호기롭게 말해보았다. 명치 근처가 따끔거리는 것 같았지만 보쿠토는 무시했다. 아카아시는 잠깐 입을 벌렸다가, 닫았다가,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가 입을 열었다.
“저, 그러면.”
“으, 으응.”
“오늘 부활동 끝나고 교실 잠깐 들렀다 간다고 하셨었죠, 선배.”
“어? 아, 그랬지…….”
오늘 낮에 숙제로 나온 프린트를 두고 왔다는 얘기를 체육관에 오자마자 했던 터였다. 아카아시가 말을 이었다.
“이따 캔 하나……. 그것 좀, 전해주실 수 있을까요? 쿠스노키 선배도 오늘 늦게까지 있다 가신다고 해서.”
“무, 물론이지!”
아카아시는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보쿠토는 잠시 넋을 잃고 그 모습을 보았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보쿠토 선배? 아카아시가 그를 부른다. 나만 믿어, 보쿠토는 그렇게 말했다.
*
아카아시가 건네준 건 정말로 작은 캔 음료 하나였다. 보쿠토는 한 손에 들어오는 캔을 위로 던졌다 받았다 하며 천천히 교사 건물로 향했다. 무슨 레모네이드 어쩌고 쓰인 캔이었다. 아카아시는 가방에서 그걸 꺼내 보쿠토에게 건네주었더랬다.
계속 가지고 있었나? 전해주지 못하고…….
거기까지 생각하자니 돌연 기분이 확 물결쳐, 보쿠토는 자기도 모르게 캔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가 서둘러 손을 펼쳤다. 캔은 살짝 눌린 채였지만 어떻게 조심스레 손 안에서 굴리자 원래대로 돌아오는 것도 같았다.
보쿠토는 교실까지 가는 길 내내 캔을 던졌다 받았다 하길 반복하다가 교실 문앞에 서서야 멈추었다. 교실엔 아무도 없었다. 이르게 진 노을은 벌써 이미 다 불타고 남빛으로 저물어가고 있었다. 느긋하게 프린트와 노트까지 챙긴 보쿠토는 잠깐 자신의 의자를 빼어 앉았다. 계단을 올라와서 숨차, 그렇게 아무도 듣지 않는 말을 중얼거리며.
아까부터 계속 쥐고 있던 캔을 책상위에 턱 올려놓았다. 보쿠토는 한쪽 다리를 끌어안아 무릎에 턱을 괴고서 그 캔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옆 교실에는 쿠스노키가 있다. 알고 있었다. 불이 켜져 있는 걸 봤고, 이 시간에 3학년 교실에 사람이 있다면 자신 같이 미련한 멍청이거나 아니면 쿠스노키일테니까. 그러니까 이제 일어서서, 나가서, 아카아시의 캔을 전해줘야 하는데. 전해주면 되는데. 이거 아카아시가 전해달라더라, 그 한마디만 해주면 되는데.
“아, 진짜 미치겠네…….”
보쿠토는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싣고 몸을 쭉 뻗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빛이 들지 않는 천장의 형광등이 이른 밤을 맞이하여 푸르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째깍 째깍, 벽에 걸어놓은 시계의 초침이 움직인다. 보쿠토는 의자를 기울어뜨리며 고개를 돌렸다. 시계가 그의 앞에서 흔들거리는 것 같았다. 얼른 가지 않고 뭐해? 아카아시가 부탁했잖아?
보쿠토는 휘청휘청 의자를 기울이다가 바로잡고는 캔을 낚아채듯 움켜쥐었다. 그걸 휙 치켜들었다가, 보쿠토는 결국 다시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보쿠토는 그렇게 한참동안 입술을 삐죽거리다가 결국 캔을 챙겨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카아시가 좋다는데 어쩌겠냐, 아카아시가 좋다는데.
옆 반의 창문으로 언뜻 안을 들여다보니 쿠스노키는 책상에 앉아서 무언가를 열심히 적고 있었다. 조금 흘러내린 안경을 다시 추스르고는 필기에 몰두한다. 보쿠토는 눈가에 아무것도 없는 제 얼굴을 조금 더듬어보다가 한숨을 내쉬고는 똑똑, 창문을 두드렸다.
“어? 보쿠토. 어쩐 일이냐?”
쿠스노키는 번거로워하는 기색도 없이 웃으면서 교실 밖으로 나와 주었다. 보쿠토는 입술을 한번 꽉 깨물었다가 웃고는 들고 있던 캔을 내밀었다. 그리고 말하려고 했었다. 이거, 우리 아카아시가 너 주라고 하길래. 난 뭔지 모르겠는데 전해달라고 하더라. 이렇게 말하려고 했다.
“아. 아카아시가 주는 거야?”
“어…….”
쿠스노키가 캔을 보자마자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보쿠토는 천천히 벌렸던 입을 다물었다. 쿠스노키는 그 캔이 반갑기까지 한 것 같았다.
“안 줘도 된다니까, 정말이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쿠소노키의 표정은 전에 없이 달콤한 빛이었다. 순간 보쿠토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보쿠토, 가져다줘서 고마워. 아카아시한테도 고맙다고 전해줘.”
쿠소노키가 그렇게 말하고는 또 웃는다. 보쿠토는 어어, 서둘러 고개를 끄덕이곤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났다. 눈앞이 어지러운 기분이었다. 보쿠토는 마치 넘어질 것처럼 허둥거리며 계달을 뛰어내려왔다. 당장 생각을 바꿀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보쿠토가 교사를 빠져나왔을 때였다.
“아, 아카아시.”
거짓말처럼 아카아시가 서 있었다.
노을은 이미 다 저물었고 떠오르는 건 달이었다. 그 달 아래에 아카아시가 있었다. 얇은 코트를 걸치고 말없이 서 있다. 눈을 내리뜬 조각상 같았는데 입술 근처로 희뿌연 달의 안개 같은 것이 머물렀다 흩어져 숨 쉬고 살아있는 것이라는 걸 알게 했다.
“보쿠토 선배. 이제 오셨네요. 가요.”
“어……. 어어. 어어, 기, 기다렸어?”
“예? 예.”
아카아시는 당연하다는 말투였다. 그렇게 묻는 보쿠토를 향해 되레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인다. 보쿠토는 누구를 기다린 것이냐고 물으려하다가 당장 그만두고서 서둘러 아카아시의 손목을 낚아챘다.
“보쿠토 선배?”
아카아시가 반쯤 뛰는 것처럼 걸음을 맞추며 그의 이름을 부른다. 보쿠토는 교문까지 닿고 나서야 아카아시의 손을 놓아주었다.
“보쿠토 선배, 무슨 일 있었어요?”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아니고……. 어, 그, 레모네이드? 그건 잘 전해줬어!”
“아. ……감사합니다.”
차마 곧 쿠스노키가 내려올지도 몰라서, 그래서 만날지 모른다 싶어 서둘러 달려왔다고는 할 수 없었고 대신 다른 말을 꺼냈는데 아카아시가 또 눈을 내리깔고 고맙다는 말을 했다. 보쿠토는 숨을 몰아쉬며 명치 근처를 꾹 눌렀다. 바늘로 한 땀 한 땀 찌르는 것 같았다.
“저기, 쿠스노키……는. 아카아시 마음 알아?”
“네? 아뇨……. 아마 모르지 않으실까요. 말한 적, 없으니까요.”
아카아시는 담담한 말투였다. 보쿠토는 자꾸만 입술을 깨물려고 드는 걸 꾹 참았다. 그건 아카아시가 처음부터 말했던 얘기였다. 한 번도 고백해 본 적 없으니 3학년들이 모두 졸업하기 전에 한 번은 말할 기회라도 갖고 싶다고, 그러니 도와주었으면 좋겠다고.
“마, 말해서 어떡할 거야? 사귀…사귀는 거야?”
“네? 그게 제 맘대로 되나요. 쿠스노키 선배도 저를 좋아해야 되는데.”
마치 어린애가 다소 터무니없는 말을 진지하게 하고 있다는 것처럼 아카아시는 조그맣게 웃었다. 애가 타는 건 보쿠토였다. 하지만 막상 무어라 말을 하려고 하니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보쿠토는 하염없이 입술을 닿았다 떼었다 했다.
“그러면 쿠스노키가 아카아시 좋아하지 않으면…….”
거기까지 말하던 보쿠토는 다음 문장을 치워버렸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스스로도 어찌할 수 없이 감정이 상했다.
“그건 어쩔 수 없지요. 쿠스노키 선배 마음이니까요.”
담백한 건 아카아시 혼자였다. 보쿠토는 아무렇지 않은 척 그래, 하고 대답하고서 화제를 돌렸다. 보통은 언제나 보쿠토가 떠들고 아카아시가 들어주는 구도였는데 오늘만은 달랐다. 드물게나마 아카아시가 이야길 했고 보쿠토는 거기에 맞추어 웃거나 심통을 부렸다. 그러면 아카아시는 한숨을 내쉬기도 하고 어깨를 으쓱하기도 했다.
그렇게 갈림길에서 헤어지고, 아카아시의 뒷모습마저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보쿠토는 눈앞에 보이는 돌부리를 거세게 걷어찼다. 돌조각은 가드레일에 부딪혀 요란한 소리를 내고 지나가던 사람들이 몸을 움츠린다. 보쿠토는 짤막한 사과의 말을 하고서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다고 말했던 아카아시지만 그게 그렇게 정말로 담담하게 끝날 리 없었다. 상대에게서 거절당하면 그게 얼마나 마음이, 지금 자신처럼 마음이…….
“아.”
보쿠토는 걸음을 멈춰 세웠다. 뒤에서 오던 사람이 부딪혀 인상을 찌푸리며 지나간다. 보쿠토는 비틀거렸지만 앞을 향해 다시 걸어 나갈 수는 없었다.
보쿠토는 한참이나 그렇게 가도 한 복판에서 꼼짝 않고 서있었다.
*
“어? 보쿠토. 또 보네.”
요즘 자주 만나네, 그런 뜻이었다. 쿠스노키의 말은. 보쿠토는 어어, 하고 그렇게 대답했다. 떨떠름하게 들릴 수도 있었을텐데 쿠스노키는 개의치 않고 빙긋이 부드러운 미소를 매달았다.
쿠스노키는 음악 수업을 들으러 가는 길, 자판기에 들러서 음료를 하나 사마실 참이었던 것 같았다. 보쿠토는 괜히 왔다고 생각했지만 돌아갈 수는 없어서 버티고 섰고 쿠스노키가 먼저 동전을 넣고 버튼을 눌렀다. 덜컹거리며 캔이 굴러나오는 소리가 요란했다.
“자, 보쿠토.”
“어? 뭐…뭔데?”
“이거 하나는 아카아시 전해줘~! 지난 번에 고맙다고. 이건 네 거.”
배달해주는 감사의 뜻이라며 쿠스노키는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웃었다. 그의 손에는 레모네이드가 두 개 들려있었다. 보쿠토는 그걸 쳐내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실행에 옮기지는 않고서 얌전히 캔을 받았다.
그리고 결국 보쿠토는, 손 안의 캔을 내려다보다 짜증을 한껏 섞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앞에서 웃으면서 안부의 말을 늘어놓던 쿠스노기가 놀라서 몸을 움츠린다. 보쿠토는 험악한 표정으로 인상을 왈칵 찌푸렸다가 펴고서는 고개를 들었다.
“쿠스노키.”
“어, 어어. 왜 그래……? 보쿠토, 무슨 일 있어?”
“너 이상형이 어떤 타입이냐?”
이 말을 하는 것만으로도 왈칵 울음이 터질 것 같았지만 표정은 갈무리 할 수 있었다. 쿠스노키는 보쿠토의 뜬금없는 질문에 어안이 벙벙한 것 같은 얼굴이었다. 한참이나 무슨 소리를 한 것인지 보쿠토를 바라보다가 와하하 웃으며 보쿠토의 등을 두드렸다.
“갑자기 웬 이상형이야~!”
“뭐, 그냥…….”
아카아시가 도와달라고 말하긴 했지만 실제로 해준 건 캔을 건네주었던 것 하나밖에 없었다. 보쿠토는 한 손으로 캔 두개를 쥐고서 빈 손으론 자신의 어깨를 주물렀다.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자니 울것 같았다. 아카아시도 울지도 몰랐다. 그것만은 싫었다.
“음, 나는 좀 발랄하고! 얘기 재밌게 잘하고~! 그런 애가 좋을까나. 좀 작았으면 좋겠다. 이렇게 한품에 쏙 들어오게. 딱히 이상형이라고 할 것도 없으려나. 보쿠토 너는?”
“아……. 나는…….”
캔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 알루미늄이 찌그러지려고 한다. 보쿠토는 서둘러 손에서 힘을 뺐다.
“키 큰 쪽. 말은 별로 없는 게 좋아. 차분하고.”
자신이 생각해도 자신의 말투는 공격적이었는데 쿠스노키는 그런 것을 탓하는 것도 없이 빙긋이 웃었다. 먼저 말을 걸어놓고서 이런 투로 답하는 것에 당황할 법도 했는데 그러지도 않았다. 쿠스노키는 부드럽게 웃음을 섞어 대화를 마무리 짓고는 먼저 수업을 들으러 가겠다며 돌아섰다.
보쿠토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천장을 올려다보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카아시는 쿠스노키의 저런 면이 좋았을까. 어떻게 말해도 어색하지 않게 배려해주고, 대화를 이끌어주고, 말하기 편한 분위기를 만들어준다. 저런 것을 어른스럽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신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보쿠토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엉망으로 헤집었다.
‘아, 어쩌냐. 진짜, 아카아시…….’
감정이 출구 없는 미로를 헤매는 동안 지치고 힘에 부쳐 화를 내는 것 같았다. 힘들어서 울 것 같은데 이 울음이 새어나갈 곳도 없었다. 쿠스노키가 말하는 이상형 어디에도 아카아시의 모습을 대입할 수 없었다. 쿠스노키가 아카아시를 좋아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땐 심장이 떨어지는 것 같았는데 아카아시가 쿠스노키에게 거절당해 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심장이 으깨지는 것 같았다.
*
레모네이드 캔이 위로 떠올랐다가, 낙하했다가. 다시 떠올랐다가, 낙하했다가. 배구공이 위로 올라왔다 다시 내려오는 것같은 동작이 계속 이어졌다. 보쿠토의 걸음이 느린 덕분이었다.
보쿠토는 쿠스노키가 주었던 음료 캔중에 하나는 반 친구에게 줘버리고, 하루 종일 남은 하나를 쥐고 어쩔 줄을 몰랐다. 쿠스노키가 전해 달라 했으니 전해주어야 하는데 자꾸만 마음이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것 같았다. 살면서 체육관에 가기 싫다는 생각이 든 건 오늘이 처음이다.
그 탓에 보쿠토가 체육관에 도착했을 땐 다들 연습이 한창이었다. 이 시기에 굳이 3학년들이 부활동에 오는 건 참견에 가까운 일이었기 때문에 아무도 보쿠토가 늦었다고 탓하지는 않았고 다만 조금 걱정해주었다. 혹시 무슨 일 있느냐는 질문에 보쿠토는 휙휙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보쿠토를 미심쩍은 눈동자로 바라보는 건 오랜만에 찾아온 시로후쿠였다. 보쿠토는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은 표정으로 시로후쿠의 눈을 피했다.
보쿠토는 오늘 자신이 늦게 오기도 했으니까 적당히 구경만 하다 돌아가겠다고 말했고 아카아시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알았다고 수긍했다. 보쿠토는 가볍게 몸을 움직이기만 하면서 아카아시를 눈으로 쫓았다.
선이 가늘고 눈매가 길어서 섬세한 얼굴이었다. 화사하게 웃지는 않지만 그래도 재미있는 것을 보면 웃었다. 가끔 보쿠토가 그 앞에서 어린애처럼 굴어도 웃곤 했다. 걷는 건 생각보다 보폭이 컸고 허리는 곧아서 움직임이 정갈했다. 그런 면은 보쿠토 자신과는 조금 달랐다. 항상 옆에 있으니까, 모두 알고 있었다.
항상 옆에 있었는데.
보쿠토는 멍하니 아카아시를 바라보았다. 항상 옆에 있었다. 그걸로 완전하다고 생각했다. 벽에 걸린 둥근 리스처럼, 언제 시작했는지 모르지만 끝도 없는 관계. 아름다운 것을 보면 그저 옆에 있는 옷깃을 잡아당겨 보여줄 수 있는 사이. 모든 것이 만족스러웠다. 아카아시 마음에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있다는 걸 알기 전까지는 그랬다.
‘좋아해?’
누구를?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남자를?
보쿠토는 지금에서야 자신이 그 날, 아카아시가 자신에게 도와달라고 말했던 그 날 느꼈던 감정이 생각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사람이 서로의 마음만으로, 서로 마음이 맞기만 하다면 성별이야 상관없이 사귈 수 있는 거라면, 그러면 아카아시는 당연히 나와…….
“…쿠토!”
“어, 어? 어어?”
“우리 부엉이 주장님이 왜 이렇게 넋이 나가셨지요?”
“그러게요……. 보쿠토 선배. 어디 아프신 거 아닙니까?”
어느새 눈앞에는 시로후쿠와 아카아시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보쿠토는 화들짝 놀라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언제 조용해졌는지 모르지만 벌써 부활동이 끝이 나 체육관에 남은 건 시로후쿠와 아카아시 뿐인 것 같았다. 보쿠토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아, 아니. 그런 거 아니고. 어, 아카아시.”
보쿠토는 연신 입이 바싹바싹 마르는 걸 느끼며, 저 둘의 시선도 피할 겸 또 화제도 돌릴 겸 아까부터 계속 들고 있던 캔을 아카아시에게 내밀었다. 아카아시가 고개를 갸웃한다.
“이거……. 쿠스노키가 주래.”
“아. 쿠스노키 선배…가요?”
“어. 너……주래.”
보쿠토는 아카아시의 손에 얼른 쥐어주고서 아카아시의 눈을 피했다. 아카아시의 표정을 보고 싶지 않았다.
“쿠스노키? 그 샌님 부회장?”
“……시로후쿠 선배, 샌님이라뇨…….”
“아. 너무 솔직하게 말해버렸네.”
보쿠토는 두 사람이 떠드는 것을 들으며 아카아시의 운동화만 내려다보았다. 아카아시가 마침 목이 말랐으니 잘 되었다며 곧장 캔의 뚜껑에 손을 댔을 때였다.
금속이 부러지는 경쾌한 마찰음에 뒤이어 탄산수가 치솟는 소리가 들린다. 보쿠토는 무심결에 고개를 들었다 그만 참혹한 꼴을 마주하고 말았다. 아카아시의 손과 머리카락이며 앞섬에서 투명한 액체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
“…….”
“…….”
캔에서는 거품과 액체가 넘실거린다. 보쿠토는 놀라서 눈만 휘둥그레 떴고 얼어붙어 있던 아카아시가 천천히 깨어나듯 고개를 움직여 보쿠토를 쳐다보았다.
“……얼마나 흔드셨습니까?”
“어? 아, 그, 그게. 그게.”
“제가 뭔가 잘못…했습니까, 선배?”
“아, 아니! 아니야! 아니! 그게 아니고!”
아카아시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보쿠토가 아무리 허둥거리며 아니라고 변명을 했지만 믿는 기색은 아니다. 아카아시는 보쿠토에게 남은 캔을 넘겨주고는 씻고 오겠다며 자리를 떴고, 보쿠토는 시로후쿠를 붙들고서 바닥에 쏟아진 음료를 열심히 치워야 했다.
“왜 아카아시 괴롭히고 그러세요, 주장님?”
“아카아시 괴롭힌 거 아니거든! 아니라고!”
보쿠토는 속에서부터 억울해서 다 닦아낸 수건을 휘두르며 빽 소리쳤다. 시로후쿠가 벽에 기대어 보쿠토를 쳐다보았다.
“주장님이 한 게 아니면 쿠스노키 부회장이 한 건가? 우리 아카아시 괴롭히려고 열심히 흔든 거 준 걸까나~?”
“…….”
보쿠토의 표정이 울상이 되고 시로후쿠는 놀리는 게 역력한 표정으로 웃음을 흘렸다.
“그 샌님 유순하게 생겨서 치밀한 데가 있네?”
“그, 그것도 아니야…….”
“그게 아니면? 나 떨어뜨린 캔을 땄을 때도 저렇지는 않았는걸? 샴페인이라도 흔든 건줄 알았네.”
“…….”
“그것도 아니면, 뭐야. 쿠스노키가 주는 거 전해주기 싫었어?”
순간 보쿠토가 번쩍 고개를 들고 시로후쿠를 쳐다보았다. 시로후쿠는 예고없이 그 눈동자와 마주했으면서도 움츠러드는 기색 하나 없었다.
“그렇게 네가 먹고 싶었어요? 내가 하나 사줘? 두 개 사줄까?”
“……그런 거 아니거든!”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오늘 우리 주장님 이상하네~!”
보쿠토는 레몬향 단내가 나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시로후쿠가 놀리는 듯이 말은 하고 있지만 걱정이 섞여있는 걸 아주 모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차마 아카아시가 쿠스노키를 좋아하고, 그래서 아카아시에게 쿠스노키가 전해 달라 한 것을 주고 싶지는 않았다고 어떻게 말을 한단 말인가?
“……별로 이상한 거 없어!”
“없기는. 자꾸 그렇게 응석 심하게 부리면 우리 아카아시도 못 버티고 도망가 버린다?”
그게, 시로후쿠의 그 말이 정말로 보쿠토의 마음을 상하게 하려고 한 말은 아니었을 터였다. 3년이나 얼굴을 맞대어 온 친밀한 사이에서 걱정을 섞어 기분을 풀어주려는 농담이었을 것이다. 분명히 그랬을 테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보쿠토는 눈에서 눈물을 뚝 떨어뜨리고 말았다.
“에?”
“으…….”
“보, 보쿠토?”
시로후쿠가 기겁한 표정으로 손을 뻗으려는 찰나였다.
“흐어어어엉!”
한 손에는 여전히 레몬 냄새가 나는 젖은 수건을 쥐고 서서, 보쿠토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체육관이 떠나가라 울음을 터뜨렸다. 그간에 모이고 쌓였던 것들이 한꺼번에 터져나갔다. 앞에서 시로후쿠가 당황하는 걸 알았지만 보쿠토는 개의치 않고 그저 엉엉 소리를 내 울었다. 굵은 눈물이 후두둑 그의 뺨을 타고 떨어져 내렸고 보쿠토는 그걸 닦아내지도 않고 내버려두었다.
당황한 시로후쿠가 주춤거리다가 어느샌가 체육관 밖으로 뛰어갔지만 보쿠토는 혼자 체육관에 남아 엉엉 울었다.
완전한 관계였다. 더 바라는 것도 더 원하는 것도 없었다. 옆에는 아카아시가 손닿는 거리에 있었고 손을 뻗으면 닿기도 전에 돌아봐 주었다. 아침에 일어나 가장 먼저 만났고 모두와 헤어지고 나서도 마지막까지 함께 하는 사람은 아카아시였다. 빈틈도 끝도 없이, 둘이 함께 있어 더할 것도 덜할 것도 없이 완벽하다고 생각했다.
그만의 착각이었다. 그가 생각하지 못하는 사이에 아카아시는 다른 사람을 꿈꾸고 있었다. 나여야 하잖아! 보쿠토는 그렇게 외치고 싶었다. 누군가와 사귄다면, 그게 누구라도 된다면 당연히 첫번째는 나여야 하잖아! 어째서 아닌 것인지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이해하기 싫었다.
“보, 보쿠토 선배! 보쿠토 선배!”
“흐엉, 흐어어엉!”
보쿠토는 눈물로 온동 흐린 시야 속에서 숨을 몰아쉬고 있는 아카아시를 알아보았다. 셔츠는 단추가 세 개쯤 풀려있고 손에는 목에 하려다가 급히 온 듯이 타이가 매달려 있었다. 아카아시를 보자 그간 견뎌왔던 설움이 다시 북받쳐 보쿠토는 더 크게 울었다.
“아, 아카, 아카아시, 흐어어어어엉!”
“보, 보쿠토 선배. 선배, 무슨 일이에요. 선배, 저 여기 있으니까…….”
“흑, 흐엉, 그, 그 애랑 사귀지 마아아!”
보쿠토는 걸레를 쥐고 있지 않은 손으로 아카아시의 셔츠 자락을 붙잡고 쩌렁쩌렁 울며 외쳤다. 아카아시는 많이 놀라고 당황한 것 같았다. 한참이나 말이 없다가 소맷자락을 끌어올려 보쿠토의 눈물을 닦아주었지만 쏟아내는 것이 더 많아 효과가 있지는 않았다.
“……사귀지 말까요?”
“흐어엉, 으응, 응, 하지마아, 히끅, 흐어어엉!”
“그럼 누구랑 사귈까요.”
“아무하고도 사귀지마아아! 흐엉, 아카아시, 하지마아!”
보쿠토는 숨을 몰아쉬면서 둑이 터진 듯이 울음을 토했고 앞에 선 아카아시는 소용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계속 보쿠토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아무하고도?”
“히끅, 힉, 흐어엉, 나말곤 아무도 안 된단 말이야!”
금빛 눈동자는 눈물에 얼룩져 벌꿀색처럼 짙어져 이지러지듯 떨렸고 그 위에 담기는 아카아시도 출렁거리고 있었다.
“보쿠토 선배 말곤 아무도 안 되나요?”
“안 돼! 흐어엉, 안 돼!”
아카아시의 소맷단은 이미 보쿠토의 눈물을 흠뻑 먹어 제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카아시는 손끝으로 보쿠토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럼 보쿠토 선배랑 사귈까요?”
“응! 응응! 히끅, 흐어……. ……어?”
“그래요, 그럼.”
보쿠토가 뚝 눈물을 그쳤다.
놀란 눈을 커다랗게 뜨고서 아카아시를 바라본다. 남은 눈물이 또르르 흘러 뚝 떨어졌다. 아카아시는 가만히 그 얼굴을 마주보고 있었다. 한참이나 얼어붙어있던 보쿠토가 마침내 깨어났을 땐 목까지 새빨갛게 달아오른 채였다.
“어, 어어? 어?”
“사귀자고 하셨죠, 보쿠토 선배가.”
“어? 나, 나? 나……. 나……. 그치만 아카아시는……. 아카아시는……. 쿠스…노…키…….”
“아, 그건. 사실 거짓말이었는데.”
“……어?”
보쿠토의 목이 제꺽 굳었다. 아카아시는 살짝 보쿠토의 눈을 피했다.
“음, 그렇지만 아주 거짓말은 아니었습니다.”
“뭐가 거짓말이고 뭐가……. 뭐가 아주 거짓말은 아닌……거야……?”
“그러니까 상대가 쿠스노키 선배라는 건 거짓말이었지만. 3학년 졸업하기 전에 고백이라도 하고 싶다는 건, 거짓말 아니었어요.”
“누구한테 고백……하는…데?”
“보쿠토 선배한테요.”
“아……아?”
보쿠토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고 아카아시가 무안한 표정으로 헛기침했다. 몇 번을 헛기침해도 보쿠토는 여전히 눈만 깜박일 뿐이었다. 아카아시는 짧게 한숨을 내쉬고 눈을 내리깔았다.
“욕심 내는 건 저 뿐인 것 같아서. 보쿠토 선배가 전혀 그럴 마음이 없으시다면, 정리하려고……. 접으려고 했습니다.”
“뭘 정리해! 뭘! 하지마! 안 돼! 접지마! 펴!”
정리라는 말에 화들짝 놀란 보쿠토가 와다다 외치고, 아카아시는 큰소리에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눈을 내리깔았다. 그 어떤 것 앞에서도 서로 떨어진다는 결론은 없었기에 아카아시는 선뜻 고백할 수 없었다. 거절하고 또 거절당하고 나서도 원래의 사이로 돌아간다 확신할 수 없었으므로.
보쿠토는 남은 눈물을 쓱쓱 훔쳐내고는 억울함이 섞인 목소리로 아카아시의 옷깃을 붙들었다.
“아카아시 진짜 진짜 너무 나빴어. 진짜 나빴어, 나빴어!”
“……죄송합니다. 꿈쩍도 않으시길래 정말 관심 없으신 줄.”
“뭘 꿈쩍도 안 해, 내가, 내가 얼마나……. 얼마나…….”
다시 생각하려니 또 눈물이 치밀어 올라서 보쿠토는 다시 손등으로 눈을 부볐다.
“레모네이드는 도대체 뭔데! 뭐야! 왜 준건데!”
“아……. 그건. 그러니까 좋아하는 시늉이긴 했는데……. 쿠스노키 선배가 좋아하는 애가 저희 반에 있어서요. 그거, 도와드린 거예요.”
“……죽을 때까지 다시는 레모네이드 안 먹을 거야…….”
“죽을 때까지, 입니까?”
“그래! 죽을 때까지! 절대 안 먹어! 그거 싫어!”
보쿠토가 빽 소리치고는 아직까지 쥐고 있던 수건을 내팽개쳤다. 아카아시가 웃음을 섞어 그걸 주워들었다. 보쿠토가 금방 어색한 표정이 되어 아카아시 손의 수건을 빼앗고, 아카아시가 괜찮다며 달라고 손을 뻗었을 때 보쿠토는 비어있는 손으로 그 손을 붙잡았다.
“나야?”
습기가 남아있는 목소리가 물었다. 아카아시는 조금 부끄러운 것 같았다. 눈을 마주하지 못하고서는 고개를 끄덕인다. 보쿠토는 굳이 몸을 움직여 아카아시와 다시 눈을 마주했다.
“정말 나야?”
“……네. 선배는요?”
“나 진짜 여기 아파 죽는 줄 알았거든!?”
보쿠토가 자신의 심장을 팡팡 거세게 내리쳤다. 웃을 수밖에 없게 만드는 동작이었다.
“이제 앞으로 아카아시, 농담으로라도 다른 사람 좋아한다고 하면 안 돼.”
“예.”
“진짜 아카아시가 나빴어. 진짜 잘못했어.”
“네에.”
“그냥 나보고 사귀자고 하면 됐잖아!”
“그렇지만 보쿠토 선배는 남자끼린 사귄다곤 생각도 못 하시는 거 같아서.”
“알려주면 됐을 거 아냐!”
“알려줬는데 싫다고 하면 어쩝니까.”
이번엔 아카아시가 조금 뚱한 목소리로 말했다. 보쿠토가 눈을 깜박이는데 아카아시는 보쿠토 손에 있는 젖은 수건을 빼앗아 정리하며 입을 열었다.
“꼭 사귀는 게 아니어도 헤어지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싫다는 말을 해버리시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내가 아카아시를 왜 싫다고 해! 아카아시는 바보야!? 바보지?”
“……보쿠토 선배한테 바보 소리를 듣다니…….”
“아카아시이이!”
보쿠토가 빽 소리를 지르고, 결국은 아카아시가 조그맣게 웃었다. 그 모습에 힘이 풀리고 만 건 어쩔 수 없는 순서였다. 보쿠토는 귓가를 빨갛게 만들며 투덜거렸다.
“시로후쿠는 어디 간 거야…….”
“아. 시로후쿠 선배가 얼마나 놀라셨으면 저 찾으러 남자 샤워실까지 들어오셨어요. 지금은 먼저 돌아가신 것 같네요. 내일 뭐라도 사다드려야겠습니다.”
“……시로후쿠가 아카아시 알몸 본거야?”
“…….”
아카아시가 입을 다물었고 그 서늘한 반응에 보쿠토가 손을 휘휘 내저었다.
“아, 아니! 시로후쿠가 샤워실까지 들어갔다며!”
“옷은 다 입고 있었습니다……. 그런 걸 생각하셨습니까?”
“아 진짜! 아카아시가 그렇게 말했잖아!”
크게 소리를 내고 토라진 듯이 팔을 휘두르지만 입가에 맺히려는 웃음만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애 마냥 소리 내어 울었던 적이 없었던 것처럼.
“그런데 보쿠토 선배, 그 캔은 진짜 선배가 심술부리신 거죠.”
“……이, 일부러는 아니었거든요…….”
“어쨌든 맞네요. 잔뜩 흔들어서 주신 거.”
“그러니까 일부러는 아니었어…….”
작은 목소리로 웅얼웅얼거린 보쿠토가 그래도 레모네이드는 이젠 꼴도 보기 싫다며 말을 덧붙였다. 아카아시가 눈을 내리깔고 웃으며 그래요, 레모네이드 말고 다른 거 먹어요, 그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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