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쿠아카 | 사냥꾼과 인어공주
-영화 아가씨 AU
-영화를 보지 않으신 경우에도 이해하실 수 있도록.. 노력은 했습니다.
-큰 줄기는 비슷합니다.
-다른 부분도 많습니다. 양해부탁드립니다..ㅠ
아카아시의 새로운 하인은 성미가 불같다.
아카아시는 가만히 의자에 기대어 그가 하는 꼴을 지켜보았다. 지긋하게 앉아서 옷을 찬찬히 개는가 싶더니, 금방 또 개던 것을 돌연 펼치며 아카아시에게 대어 보았다.
“음, 이거 도련님한텐 좀 많이 큰 거 같은데?”
“아……. 그건 제 옷 아니네요.”
“아니야? 그럼 누구 옷?”
성미도 불같고, 말도 짧다. 아카아시는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황금색 눈동자를 마주보다가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구름이 잔뜩 끼어 흐린 날이었다. 저택을 둘러싼 숲의 초록이 너무 짙어져 오히려 새카맣게 보일 지경이다. 아직 해가 저물지도 않았는데 실내는 벌써 불을 밝혔다.
“숙부님 애인 옷인 것 같군요.”
“……히익?”
보지 않아도 표정을 알 수 있다. 괴상한 그림이라도 본 것처럼 표정이 휘둥그레 커진 눈동자. 아카아시가 천천히 고개를 움직여 다시 바라보니 하인은 그에게 대어보았던 옷을 이리 저리 뒤집어 보고 있었다.
“보통 체격 이상은 되는 것 같은데…….”
“숙부님 취향이 그러니까요.”
“큰 남자?”
“예.”
하인은 제 몸에 옷을 대어보았다. 옷은 그에게 꼭 맞거나 아니면 조금 작을 것 같았다. 아카아시는 그에게 입어 보라는 말을 해줄까 하다가 숙부의 애인이 걸쳤던 옷이라 생각하니 마음에 차지 않아 내다 버리라고 말했다. 하인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가, 조금 아쉬운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련님은 숙부님이랑은 취향 비슷해?”
“……제 취향이요?”
“응.”
글쎄요. 아카아시는 나직하게 대답했다. 하인이 눈을 동그랗게 뜬다. 아카아시는 눈을 피하려는 의도를 들키지 않기 위하여 느릿 느릿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폭풍우가 올 것 같았다.
*
아카아시는 자신의 하인이 상당한 성격의 소유자라는 것을 만난 첫날 알았다.
지난밤 도착했다기에 해가 뜨고 불렀더니 하인은 맨발로 왔다. “신발은 어디 갔습니까?” 아카아시의 질문에 하인은 머쓱한 표정을 짓고서는 말을 돌렸다. 하지만 알만했다. 여기에 오자마자 자신의 직속으로 바로 배정받아 왔으니 있던 고용인들이 심술을 부린 것일 터였다. 이런 일로 울고 도망칠 것 같은 인상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내버려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카아시는 한 소리 해두기는 해야 겠다 하고 그날 오후 하인들의 숙소 근처까지 내려갔더랬다. 하지만 그 근방은 이미 엉망이었다. 숙소 바깥엔 온갖 종류의 신발이 하늘을 날아다니고 있었고 그 가운데에 아카아시의 하인이 있었다.
주위에서 어떻게든 붙잡고 말리려고 하는 것을 전부 뿌리치고서 마침내 자신의 신발을 찾아낸 아카아시의 하인은, 신발을 숨긴 게 분명한 다른 고용인들을 한 대씩 후려쳐주고는 제 발에 신발을 꿰어신으며 밖으로 나왔다.
-뜨헙.
-……신발은 찾았네요.
-그, 그게.
아카아시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의기양양하던 얼굴은 간데없고 당황이 역력하여 눈동자만 굴리더니 또 배시시 웃었다. 살가운 웃음이었다. 아카아시는 말없이 하인을 가만히 올려다보기만 했더랬다. 아카아시가 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렸고 하인이 따라붙었다. 더듬더듬 변명을 하기에 아카아시가 괜찮노라, 말 편히 하라 하였더니 하인의 말이 곧장 짧아졌다. 무슨 일로 여기까지 왔어? 뭐 갖다 줄까? 편히 하라는 게 그 뜻은 아니었지만 아카아시는 탓하지 않았다.
하인은 보모로 쓰기도 틀렸다 싶을 만치 사람을 돌보는 데에는 어울리지 않는 목소리로 조잘거렸다. 아카아시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고 하인은 조금 갸웃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카아시는 그런 하인을 흘끗 보았다. 신고 있는 신은 흠집이 가득했다. 백작에게 어리숙한 사람을 보내주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는데, 이건 어리숙하기보다는 어린애 같고 제멋대로인 사람 같았다.
일정이 급하게 잡혀서 어쩔 수 없었던 거겠지, 아카아시는 그렇게 생각을 맺었다.
“무슨 책 봐?”
아카아시가 책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들자 반쯤 널브러진 옷가지가 눈에 들어왔다. 열심히 개어보려는가, 하고 여겼는데 그새 싫증이 난 것 같았다. 하인은 아카아시의 곁으로 바짝 다가와 그가 보던 책을 내려다보았다. 아카아시는 책을 뒤집어 제목을 보여주었지만 하인은 어깨를 으쓱했다.
“글은 몰라.”
“……백설 공주라는 겁니다. 어린 아이용 동화책입니다. 이국에서 들여온 것인데.”
“동화책?”
“어린 아이들 읽으라고 만들어 둔 거죠.”
아카아시가 조근조근 말해주었고 하인은 고개를 기울였다.
“도련님, 애기야?”
“…….”
“무슨 내용인데?”
아카아시는 창밖을 흘끗 바라보았다. 구름이 잔뜩 끼어 하늘은 어둑한 잿빛이었고 덕분에 저택을 둘러싼 깊은 숲은 한층 더 음산하고 어두웠다. 아카아시는 책으로 고개를 돌렸다.
“옛날에 백설이라는 공주가 있었습니다. 흑단처럼 검은 머리카락, 눈처럼 하얀 피부, 피처럼 붉은 입술을 가지고 있었지요. 그런데 왕비가 공주의 미모를 시기하여 사냥꾼을 시켜 공주를 살해하라고 합니다. 사냥꾼은 공주를 데리고 숲으로 향했지만 차마 죽이지는 못하고, 도망치라고 하지요. 도망친 공주는 숲 속에서 일곱……. ……왜 그렇게 봅니까?”
하나 하나 책의 내용을 설명해주던 아카아시는 문득 뺨에 닿는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하인은 책 속의 삽화를 보고 있지 않았다. 눈이 마주친다. 태양 같기도 하고 보름달 같기도 한 황금색 눈동자였다. 아카아시는 저런 것을 찬란하다고 하는 것 같다, 잠깐 사이에 생각했다.
“좀 비슷한 것 같아서.”
“네?”
“그 백설 공주랑, 도련님.”
“……네?”
“그찮아, 새카만 머리에 입술 빨~갛고! 어두운데 있어서 그런가? 얼굴도 희…….”
하인은 손을 뻗어 아카아시의 뺨을 쓸어보다가 뒤늦게 정신이 들었는지 깜짝 놀란 얼굴로 후다닥 손을 거두었다. 아카아시는 잠시 아무 말 없이 하인을 바라보다가 호흡을 꾹 억누르고서는 천천히 책을 덮었다.
“책 내용엔 관심 없나 보군요.”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비슷한 거 같아서. 다시 얘기해줘, 도련님!”
조르는 하인을 혼낼 수도 있었지만 아카아시는 그러지 않았다. 대신 한숨을 내쉬고 다시 책을 펼쳤다.
“공주는 일곱 난장이들을 만나서 함께 살게 됩니다. 왕비는 공주가 죽지 않은 것을 알고 변장을 하고서 찾아가 독사과를 먹이지요. 공주는 독사과를 먹고 쓰러집니다. 지나가던 왕자가 공주를 보고 한 눈에 반하여 입을 맞추는데, 목에 걸려있던 사과 조각이 빠져나오며 공주는 다시 눈을 뜨지요.”
“한 눈에 반했다고 입맞춤까지 해?”
“그런가 봅니다. 이후 공주는 왕자와 혼인하여 행복하게 살았다는 내용입니다.”
“사냥꾼은?”
“네?”
하인은 어느새 아카아시의 의자 옆에 주저앉아 팔걸이에 기댄 채 책 속의 삽화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하인이 멋대로 손을 뻗어 책을 앞장으로 넘겼다.
“사냥꾼이 살려준 거잖아, 백설공주.”
“아니지요. 왕자가…….”
“아, 아니지, 도련님. 목에 사과가 걸려 있었다며. 그럼 뭐야. 툭 치면 턱하고 뱉어서 살아났을 거 아냐. 그럼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처음에 사냥꾼이 살려준 준 게 제일 중요한 거 같은데.”
“…….”
“사냥꾼이 안 살려줬으면 꼼짝없이 여기서 죽었네. 그치?”
“……그렇겠네요.”
“공주 이거 매정하네. 살려준 사냥꾼한테는 은혜도 안 갚고.”
“그도……그러네요.”
“그치?”
하인이 그를 올려다보며 활짝 웃었다. 아카아시는 다시 책으로 고개를 돌렸다. 사냥꾼이 공주의 손을 붙들고 숲 속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배경으로 보이는 어둡고 음산한 성에서 도망치는 모습이었다. 사냥꾼은 공주를 죽이려는 뜻은 없는 듯이 부드럽게 공주의 손을 쥐고 있었다.
*
하인의 이름은 보쿠토라고 했다.
아카아시는 침대에 기대어 앉아 한참 높은 곳에 있는 보쿠토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잠자리를 챙겨준다고 이불을 정리하려고 했지만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하인 일은 제대로 해 본적이 없는 것 같았다.
“됐습니다.”
“아?”
한창 이불을 붙잡고 씨름하던 보쿠토가 고개를 돌려 아카아시를 쳐다본다. 아카아시는 옷깃을 여미고 침대에서 일어섰다. 한창 올려다보아야 했던 얼굴이 가까워졌다. 보쿠토가 이불을 엉성하게 든 채 물었다.
“안 자?”
“오늘은……. 숙부님에게서 수업을 듣는 날이에요.”
“에엑? 수업? 한밤중인데?”
보쿠토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물었다. 아카아시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유리로 된 넓은 창에 휘영청 높이 뜬 보름달이 눈에 들어왔다. 낮 동안은 내내 구름이 끼어 어둑하더니 밤이 되고 나서야 날이 개었다. 바깥에서 풀벌레 우는 소리가 울리는 듯했다.
“예. 늦게 들어옵니다. 적당히 두고, 돌아가서 쉬세요.”
“어……. 에, 어, 어, 어디서 수업 듣는데?”
“숙부님 방에서요.”
“데려다 줄까!?”
“아직 저택의 방 위치도 제대로 모르지 않습니까.”
이만 쉬세요. 아카아시는 그렇게 말하고서는 얇은 가운을 한장 걸쳤다. 보쿠토는 왠지 민망한 표정을 지으며 목덜미를 쓸었다.
“그렇긴 하지만. 아니 근데 이 밤중부터 수업을 하면 어떡해? 잠은 도대체 언제 잘 건데? 공부를 왜 낮에 안 하고 왜 밤에 한대…….”
“낮엔 숙부님이 바쁘시니까요.”
“그거 방에 불도 안 켜져서 촛불 같은 거 써야 하는 거 아니야?”
“여긴 전기 들어온다는 이야기, 못 들으셨습니까?”
“그치만 자주 정전 난다며.”
아카아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기는 하지요. 아카아시의 담담한 대답에도 보쿠토는 어린애가 천둥 번개를 무서워하듯이 까닭을 모르고서 불안해하는 얼굴이었다. 아카아시는 보쿠토를 가만히 들여다보듯 바라보았다. 묘하게 천진한 구석이 있다 싶었는데 감도 좋은 것일까. 붙잡는 것은 본인의 뜻인가, 아니면…….
“무슨……수업, 하는데? 많이 어려워?”
보쿠토가 물었다. 아카아시는 가운 사이의 틈으로 드러난 목덜미가 괜히 섬뜩하여 조금만 더 옷깃을 추슬렀다.
“예. 어려운 내용이지요. 아주 오래된 곳에서부터 비롯됐다는 고전 철학입니다.”
“에? 고전 철학?”
“세계와 인간과 사물에 대해서 생각하고 탐구하는 그런 학문입니다.”
아카아시는 단조로운 목소리로 말했고 보쿠토는 기겁하는 표정을 지었다. 돈 많으신 귀족 나리들은 뭐 그런 쓸데없는 것까지 배우는 거야? 보쿠토의 물음에 아카아시는 보쿠토와 만나고 처음으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윽고 조그맣게 웃었다.
“그렇네요. 쓸데없는 거죠…….”
보쿠토는 그런 아카아시를 보며 처음엔 뜨악한 얼굴로 허둥거리다가 나중에는 어쩔 줄 몰라서 손발만 휘저었다. 아카아시는 잠깐의 미소 뒤에 옷깃을 추스르고는 턱으로 자신의 방 바깥, 보쿠토의 처소를 가리켰다. 조그만 벽장같은 방이었다.
“그럼 다녀올 테니 먼저 주무세요. 내일 보지요.”
“어, 으응……. 공부 열심히 해, 도련님.”
겨우 침착해진 보쿠토는 머쓱했는지 뒤통수를 문지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카아시는 보쿠토와 함께 자신의 방을 나섰다. 보쿠토는 아카아시의 방 맞은편, 벽장의 문고리를 쥐고 서서 느리게 느리게 멀어지는 아카아시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아카아시가 걸친 가운은 빛을 투과시킬 듯이 투명한 색이 돌고 발치에 끌리도록 길어, 마치 인어의 꼬리인 것처럼 보였다.
*
쿠로오가 말했다.
-일, 십, 백, 천……. 1800억!
-워후? 진짜? 진짜 진짜?
쿠로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보쿠토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서 쿠로오의 손에서 팔랑거리는 종이를 낚아채려고 했지만 쿠로오가 그 종이를 위로 휙 치켜 빼들었다. 보쿠토는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음 비슷한 것을 만든 채 쿠로오를 노려보다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이야……. 1억씩 나눠줘도 천팔백 명한테 줄 수 있는 거야?
-하, 이 새끼 통 없는 거 봐라. 1억을 누구 코에 갖다 붙이냐.
쿠로오가 씩 웃으며 무릎을 세우고 턱을 괴었다. 보쿠토가 눈을 가늘게 떴다.
창밖으로는 비가 들이치고 있었다. 온통 습기가 차 실내는 찐득했고 이른 더위 탓에 연거푸 찬물을 들이킨다. 종이가 물을 머금고 울렁거렸다. 쿠로오가 울고 있는 종이들을 전부 밀어버리고 그 위에 종이를 쾅 내려놓았다.
-1800억! 전부 우리 거!
그 종이 위에는 보쿠토로서는 읽을 수 없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 보쿠토는 종이에서 눈을 떼고 눈살을 찌푸린 채 쿠로오를 바라보았다.
-미친놈아, 무슨 수로.
-자, 들어봐.
쿠로오가 신이 난 목소리로 말을 늘어놓았다.
-이 재산이 전~부 도련님 거긴 한데. 우리 도련님이 아직 성인이 아니라서 말이지. 삼촌 하나가 그걸 관리하고 있거든. 근데 봐봐……. 도련님이 다 크면 그 재산은 전부 누구 거다?
-도련님?
-그렇지! 그러면 삼촌은 뭐 된다?
-뭐 되는데?
-아 진짜……. 닭 쫓던 개 꼴이 난다 이거지. 그래서 이 삼촌이 지금 아주아주 필사적이에요.
-그냥 그 도련님 죽이면 되잖아.
보쿠토가 읽을 수 없는 글자를 흘끗 내려다보곤 시큰둥하게 말했고 쿠로오는 허리를 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게 또 그럴 수가 없는 게. 우리 도련님이 죽으면 재산이 전부 뿔뿔이 흩어지거든. 유언장이 있어서. 도련님 죽고 나면 재산 처분하는 데만 해도 백년쯤 걸릴걸?
-그래서 삼촌이 우리 도련님을 죽이지도 못하고, 뭐 어쩐대?
-방법이 두개가 있지.
쿠로오는 손가락을 두 개 펼쳐보였다.
-하나는 삼촌이 우리 도련님하고 결혼하는 거.
-하여간 돈 많은 것들은 미친 생각도 수준이 다르시네. 그럼 다른 하나는?
-유언장 내용을 바꾸는 거지.
-유언장?
-우리 도련님이 사망하면 가장 가까운 직계 친척에게 유산을 전~부 물려주는 걸로.
-그럼 그 중에 어디서 어떻게 1800억이 우리 돈이 되는데?
보쿠토는 앉아있던 의자 등받이에 체중을 싣고서 팔짱을 끼고 물었다. 질이 나쁜 나무로 만든 낡고 오래된 의자는 보쿠토의 몸을 받치며 삐그덕 소리를 내고 울었다.
쿠로오가 보쿠토의 그 말만 기다렸다는 듯이 허리를 펴고, 어깨를 벌린 다음 제 가슴을 팡팡 두드렸다.
-나!
-신이시여, 이 개새끼를…….
-야야야, 보쿠토! 들어봐, 들어봐봐.
쿠로오는 주먹을 말아 쥐는 보쿠토를 서둘러 말리며 말을 늘어놓았다.
-우리 도련님이 미술에 취미가 있는 모양인데, 그래서 가르쳐줄 사람을 구하더라고. 거기에 나! 바로 이 몸! 쿠로오 테츠로가 딱~! 가서. 도련님을 살살살 구슬리는 거지. 자, 그러면 도련님은 나와 결혼하시고, 그 다음엔 뭐다?
-뭔데.
-야이 새끼야, 생각하기 귀찮아도 장단은 좀 맞춰봐라. 진짜…….
-아 그래서 뭔데. 뭐냐고.
-유언장 내용을 바꾼다, 알겠냐? 배우자에게 모든 재산을 상속하는 걸로. 그 다음엔 뭐 도련님 정신병원에 넣으면 재산은 전부~ 우리 거! 짜잔! 어떠냐.
-그 와중에 삼촌이 지 1800억 고스란히 빠져나가는 걸 잘도 보고만 있겠다?
-아하하, 보시게. 보쿠토. 이 몸을.
쿠로오가 제 턱을 들고 입꼬리를 느긋하게 끌어올리며 눈을 내리떴다. 어둑한 분위기와 걸친 정장에 맞추어,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저도 모르게 침을 삼키고 눈길을 빼앗겼을 모습이었다. 보쿠토가 그 정강이를 냅다 후려쳤다.
-악!
-아 개새끼야. 내가 그 표정 내 앞에서 하지 말라고 했지.
-진짜 힘만 세가지고……. 아파 죽겠네……. ……삼촌 취향이 나야. 나라고.
-……? 꿈꾸십니까, 쿠로오 테츠로 씨?
-아 진짜래도! 그동안에 거쳐 간 삼촌님 애인 목록을 철저히 분석해서 알아낸 거라고!
-그래서 삼촌을 꼬셔서 뭘 어쩌겠다고?
-내가 삼촌하고 도련님을 다 꼬시는 거지. 삼촌한테는 내가 도련님과 혼인해서 재산을 모두 가지고 우리 둘이 알콩달콩 살자고 하는 거야. 삼촌도 좀 맘에 걸리긴 할 걸? 조카랑 결혼하겠다는 거? 그리고 도련님한테는……. 진실한 사랑을 말하는 그런 계획?
-진실한……뭐?
-장단 맞춰 주라고 했다, 새끼야. 그래서 여기서 보쿠토 씨가 아주아주 중요하단 말입니다, 알겠어요?
쿠로오가 양손으로 보쿠토의 어깨를 꽉 붙들었다. 보쿠토는 눈을 가늘게 뜨며 쿠로오를 바라보았다. 평소에는 천진난만하기까지 했던 금색 눈동자가 먹이를 노려보는 것처럼 매서웠다. 쿠로오는 씩 웃었다.
-우리 도련님 직속 하인이 지금 관둬서 자리가 비었거든. 네가 들어가라.
-나 다른 사람 수발 들어본 적 없다.
-들어가서, 내가 올 때마다 네가 옆에서 말해줘. 도련님, 그건 사랑이에요!
-나 몸종으로 일해본 적 없다고.
-백작님이 오실 때마다 왜 이렇게 뺨을 붉히세요, 도련님. 어머. 백작님이 도련님을 좋아하시나 봐요! 이렇게 조곤조곤 연결 다리를 놔주라고.
-새끼야! 나 하인으로 일한 적 없다니까! 그리고 누가 백작님이냐? 너냐, 설마?
-아 그러면 아카아시 가문쯤 되는데 거기 미술 선생을 아무나 쓰겠냐? 당연히 백작 급은 돼야지.
-그래서 옷을 그렇게 쳐입고 오셨구만…….
-하여간! 도련님하고 진실한 사랑으로 혼약의 맹세를 하는 거야. 도련님도 맘이 급할걸? 여차하면 그 늙은 자기 삼촌이랑 결혼하게 생겼으니까. 그 와중에 방문한 백작님에게 맘을 뺏겨! 크으, 최고 아니냐.
보쿠토는 그 말을 곰곰이 들어보았다. 아주 허황된 소리는 아니었다. 보아하니 쿠로오가 말하는 그 도련님은 일생을 저택에 갇혀서 제 숙부와 산 모양이니 쿠로오가 맘을 먹고 덤벼들면 꼬여 내는 것쯤은 일도 아니다. 도련님의 숙부가 두 눈 퍼렇게 뜨고 있는데 어떻게 혼인을 해내느냐가 문제인 것 같았지만 그것도 쿠로오가 숙부를 유혹해보겠다고 하고. 쿠로오가 저렇게까지 말했을 때엔 정말로 해낼 자신이 있다는 뜻이었다.
-야, 근데 나 들어갔다가 일 못한다고 짤리면 어떡하냐.
-안 짤려. 그 도련님이 성미가 관대하기로는 부처님 뺨을 치신댄다. 원래 그만뒀다는 몸종이 도련님 물건을 그렇게 훔쳐다 팔았는데 걸릴 때마다 용서해주고 걸릴 때마다 용서해주고, 그러기를 몇 년을 했다던데. 야 근데 그쯤 되면 무섭거든, 사람이. 그래서 도망간 거야. 뭐 집 한 채 마련할 돈도 챙기긴 했겠지만.
-살아있는 인간이긴 하냐?
보쿠토는 시큰둥하게 물었고 쿠로오는 그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서 다른 문서를 꺼내들었다. 다른 귀족에게서 받아온, 위조한 추천장이었다.
-성공하면 그 저택과 부지, 전부 네 거다.
-이 날강도 새끼 보소? 1800억은 다 니 거고?
-야! 내가 이 한 몸 바쳐 목숨 걸고 도련님을 꼬시는데! ……라지만 당연히 아니지. 1할 준다.
-아하. 1할.
-이게 옆에서 부채질만 해놓고 날로 먹으려고……. 2할.
-내가 좋아하는 숫자 알 텐데?
-개새끼야! 4할은 미쳤냐? 금으로 된 부채로 부채질을 해줘도 4할은 못 줘, 인마!
-아 그럼 관두시든가.
보쿠토가 테이블 위에 다리를 척척 올리며 의자를 기울어뜨렸다. 의자가 비명을 지르듯 끼익끼익 울었고 쿠로오는 입술을 꽉 깨물고서 보쿠토를 노려보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4할, 됐냐?
-됐다!
-날강도는 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보쿠토 씨.
-엄살은. 근데 그 도련님 이름이 뭐라 그랬지?
쿠로오가 다시 종이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아카아시 케이지!
그렇게 보쿠토는 아카아시 저택에 들어오게 되었다.
저택의 담벼락은 끝없이 길고 넓었다. 그를 태운 운전기사는 본관까지는 아직 한참 남았으니 편히 있으라 말해주었다. 보쿠토는 무신경한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울창한 숲은 틈하나 없이 빽빽했고 휘영청 뜬 달빛을 받아 새카맣게만 보였다. 빠져나갈 수 없는 감옥 같은 숲이었다.
그 숲을 지나서 저택에 도착했다. 집사에게서 벽장이나 다름없는 방을 소개받았고 보쿠토는 그 날 그대로 뻗어서 잤다. 나름대로 긴장한 탓에 피로가 쌓였는지 정신없이 자다가 아침에 눈을 떠 보니 신발은 온데간데없었다. 신발이 있었던 자리를 보며 한창 인상을 찌푸리고 있으려니 집사가 찾아왔다. 도련님께 인사를 가야한다는 것이었다. 보쿠토는 정신없이 씻고 옷을 챙겨 입은 뒤에 집사를 따라 나섰다. 별수 없이 맨발이었다.
지난밤엔 어둡고 새카맣게 보이던 저택이 아침 햇살을 받으니 달리 보였다. 고풍스러운 목재가 빛을 받아 반짝거렸고 창마다 달려있는 흰 커튼이 아름답게 하늘하늘 거렸다. 나선형으로 올라가는 계단의 손잡이엔 나무로 정교하게 만든 장식이 붙어있었다. 보쿠토는 뒷목을 긁적이며 앞으로 그가 ‘사랑’을 속살거려야하는 도련님을 기다렸다. 도련님은 위층에서 나오는 모양이었다.
나무로 만든 바닥을 밟는 소리가 한 번 울렸을 때 보쿠토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가 숨을 멈췄다.
청년인지 소년인지 가늠할 수 없는 사람이 계단에서 천천히 내려오고 있었다. 먹을 부은 듯이 새카만 머리카락 아래에 눈동자가 있었는데 도무지 무슨 색인지는 알아볼 수 없었다. 입술은 빨간 빛이었는데 계집애들 연지를 빼앗아 바른 마냥 하염없이 붉었다. 창으로 비치는 햇빛이 닿는 뺨은 그 자리마다 흰 물감이 퍼져나가는 것 같았다.
‘쿠로오 이 개-새끼가! 애가 저렇게 예쁘면 예쁘다고! 말을! 해줬어야 할 거 아냐!’
보쿠토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지만 흘끗거리는 눈은 어쩔 수 없었다. 집사가 도련님을 소개하는 말은 귀에서 웅웅 겉돌았다. 어떻게 이름을 말했는지는 기억에 없었다. 보쿠토가 기억하는 건 도련님의 나직한 한 마디였다.
‘신발은 어디 갔습니까?’
보쿠토는 대답하지 못하고서 다만 기필코 신발을 찾아오고 말겠다고 생각했다.
'하이큐 > 보쿠아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보쿠아카 | Dear. Winter (7) | 2016.08.25 |
---|---|
보쿠아카 | Moonrise Kingdom (9) | 2016.08.20 |
보쿠아카 | 여전히 꿈결 (0) | 2016.06.28 |
보쿠아카 | 레모네이드 금지령 (7) | 2016.06.26 |
보쿠아카 | 빛에 관한 기억 (2) | 2016.06.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