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쿠아카 | 빛에 관한 기억
그 녀석은 처음부터 아주 특별했다. 누군가는 보쿠토 옆에 머무는 그 녀석의 모습을 보고서 초승달같다느니 하는 가벼운 소리를 했지만 틀린 얘기였다.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그저 가만히 서있기만 해도 눈을 끄는데 그런 것이 초승달 같이 있는듯 없는듯 은은한 것일 리가 없다.
그 녀석은 처음부터, 아주 특별했다. 그걸 제일 먼저 알아본 사람은 나였다.
*
아카아시 케이지입니다. 중학교 때엔 세터였습니다.
그 녀석은 단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긴장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갓 중학교를 졸업한 것치고는 어른스러운 목소리였다. 주위의 녀석들이 왜 이제와서, 어쩌다 이렇게 늦게, 그렇게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 4월 중반이 다 넘어가는 시기였다. 어지간한 동아리들은 가입 신청기간까지 모두 끝냈고 그건 우리 배구부도 마찬가지다. 요 며칠간의 연습으로 떨어져나갈 녀석들은 가버리고 남은 인원만 추슬러 정비를 마쳤는데 갑자기 신입부원이라니 영문을 알수 없을 만 했다.
그 녀석이 사실은 학년에서 손에 꼽힐 만한 성적으로 입학을 했고 척보기에도 침착하고 차분해 보이는 모습 탓에 선생님들이 학생회로 끌고 오려고 꽤나 난리였다는 건 뒤에 알게 되었다. 그것을 어떻게든 수습을 하려고 하다가 입부가 늦었다는 것이었다. 다른 교사들이 녀석을 붙들고 학생회에 넣니마니 하는 것을 코치와 감독에 고문까지 나서서 빼어왔다고 했다. 그래서 이런 애매한 시기에 입부가 가능했다고.
먹을 부은 듯이 새카만 머리칼 아래에 크게 뜨고 있는 눈은 아니었는데 눈매가 길었다. 누군가 아주 가느다란 붓으로 가늘게 그려 뺀듯이 얄쌍한 선이었다. 입고 있는 교복은 목 끝까지 단추를 채웠고 타이도 빈틈이 없다. 블레이저의 단추는 모두 잠그고서 단정하게 허리를 펴고 서 있는 녀석은 이리봐도 저리봐도 운동부 같지는 않았다. 제 말대로 학생회나 하면 딱일 인상이었다.
누군가가 말했다. 저래서 버티겠어? 그 말은 이런 어정쩡한 시기에 특별 취급을 받는 신입생을 향한 터무니없는 질투만은 아니었다. 녀석은 이제 겨우 고등학교 1학년이었고 그 ‘겨우 고등학교 1학년’이라고 하기에 어울리는 체격이어서, 180도 미치지 못하는 키에 아무리 봐도 마른 편이었다. 고생이라고는 모르고 자라서 뛰노는 동급생들을 내려다보며 책이나 펼치면 모를까 아무리 봐도 코트 위에서 뛰는 모습은 연상이 되질 않는 것이었다.
우리의 우려와 함께 부활동은 이어졌고 아카아시는 큰 소음 없이 부활동에 적응해나갔다. 큰 소음 없이, 라고 하기보다는 그럴 수 밖에 없었지만. 3학년 선배들은 코치나 감독까지 관심을 기울이는 신입생을 눈여겨 보기는 했어도 정도 이상의 친절을 베풀지는 않았고 신입생들은 제 또래라기엔 침착하다 못해 서늘한 인상의 동기와 제대로 말문조차 트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리고 2학년들은.
우리에게는 괴물이 하나 있었다. 입학하여 배구부에 들어올 때부터 모두의 관심을 휘어잡은 사람, 1학년때부터 차기 에이스로 당연하다는 듯이 이름이 거론되었던 녀석. 그 괴물의 이름은 보쿠토 코타로였다.
신입생 때부터 키도 체격도 남다르고 파워도 상당하여, 한 번 스파이크를 내리치면 미들블로커가 따라붙어도 거뜬히 뚫어냈다. 힘과 재능과 기회, 그 모든 것이 응축되어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그것에 붙은 이름이 보쿠토 코타로였다. 녀석은 혼자서 빛을 발하는 태양같아서 누구나 돌아보았고 모두 그 앞에서 찬탄의 말을 올리는 것이 당연해졌다. 하지만 태양은 가까이 오는 것들을 모두 태워버리는 존재이기도 했다.
동기들은 그의 불꽃에 모두 불타고 남은 잿빛 그림자가 되었다. 저런 건 대단한 천재라고, 따라갈 수 없는 게 당연하다고 여길 수 있었다면 그나마 나았을텐데 그러지도 못했다. 보쿠토는 아침 저녁 할 것 없이 연습에 소홀한 적이 없었다. 개구진 표정에 재미없는 건 하기 싫다고 내뺄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서 제일 먼저 체육관에 왔고 제일 늦게 체육관에서 나갔다. 주위 사람들 전부가 차기 에이스라고 추켜세워주는 것으로 콧대 세울 법도 했는데 행여나 코트에서 실수라도 하면 하면 모두가 알 수 있을 만큼 축 처졌고 그런 날이면 시간 가는줄 모르고서 실수한 것을 또 연습하고 연습했다.
이름을 부르면 어린애처럼 천진한 표정으로 웃었고 가진 것을 내세우지도 않아 보쿠토 코타로는 진정으로 태양이었다. 우리는 그를 시기하지도 못하고 질투하지도 못하고 미워하지도 못하고서, 그저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그 누구도 향하지 못한 오갈 데 없는 감정의 응어리들은 우리 사이를 항상 떠돌면서 우리들을 엮어놓았다. 그걸 쥐고 흔드는 건 보쿠토였다. 보쿠토가 열을 올리면 우리도 관심을 기울였고 보쿠토가 관심없는 듯이 고개를 저으면 우리도 시들해졌다.
그렇다고 해도 보쿠토가 특별히 낯을 가리는 편은 아니었다. 오히려 사람에겐 금방금방 살갑게 구는 녀석이었다. 다만 필요하지도 않고 관심도 없고 특별한 것도 없는 사람에겐 놀랄만큼 시큰둥한 태도를 보이곤 했는데, 보쿠토에겐 1학년들이 딱 그짝이었다. 이제 겨우 중학교를 졸업하고 올라온 신입생들은 보쿠토의 연습량조차 따라가지 못했고 보쿠토는 거기에 대해서 실망도 하지 않았지만 그걸 어떻게 해 보겠다고 붙어있지도 않았다. 보쿠토의 그런 태도는 우리에게도 자연스럽게 퍼져서 다들 제 할일에만 몰두할 뿐 후배들과는 묘하게 데면데면했다.
그러니까 그 녀석을 가장 먼저 알아본 건 나였다.
*
저래서야 버티겠어, 누군가 그렇게 말했던 것이 기억에서 흐려져갔다. 아카아시는 특별히 친하게 지내는 부원은 없었으나 자연스럽게 부활동에 적응해갔고 연습도 거르지 않고 거뜬히 소화해냈다. 그다지 거뜬히는 아니었고 죽을만큼 힘을 냈었노라 훗날 말해주었지만, 어쨌든 그랬다.
부원이 워낙 많다보니 매니저들은 주로 3학년과 2학년을 챙기기에 바빠서 1학년들은 수건이나 음료를 알아서 해결해야 했다. 알아서라고 하면 거창하게 느껴지니 직접 챙겨마셔야 했다, 정도가 좋을 것 같다. 그게 뭐 대단히 서럽고 고달픈 일은 아니었고 그냥 수건과 음료가 조금 더 멀리있는 정도였다.
한창 리시브 연습을 하고서 마른 목을 축이고 있는데 아카아시가 눈에 들어왔다. 사실 눈에 들어왔다기 보단, 내가 이 곱상하게 생긴 후배에게 계속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게 더 맞는 말이겠다. 저렇게 생겨서는 운동부 활동을 얼마나 잘할지 궁금하기도 했고 코치에 감독에 고문까지 붙어 학생회에서 빼올 정도라면 보쿠토에 준하는 녀석이 아닐까 하는 기대도 있었다.
하여간 아카아시는 뚝뚝 떨어지는 땀을 훔쳐내며 몸을 숙인 채 호흡을 고르고 있는데, 녀석의 손에도 마실 게 없고 병이 놓여있어야 할 곳도 텅 비어 있었다. 나는 내 손에 쥔 음료의 뚜껑을 열며 아무 생각없이 아카아시를 흘끗거리다가 퍼뜩 떠오르는 것이 있어 내 음료를 내려다보았다.
그건 그 날의 소박한 충동이었고 동시에 우리들 중 누구도 표현하지 못하고 간직하고 있는 뾰족한 마음을 내보이고 싶다는 반발심리였다. 보쿠토가 관심 두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까지 그럴 필요는 없잖아. 보쿠토가 그러라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목 말라?”
“…….”
숨을 고르던 아카아시가 고개를 들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눈동자가 청록색이라는 건 그 때 처음 알았다. 나는 아카아시의 눈은 아주 까만 색일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조금 놀랐다. 후배는 잠시 말이 없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요.
“마실래?”
“코노하 선배는요?”
여기선 사실 정말 크게 놀랐다. 이 후배가 내 이름을 알고 있을 거라곤 전혀 생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사람이 열 몇명 밖에 없는 소박한 곳도 아니었고 내가 하늘같이 느껴질 3학년도 아니었으며 그렇다고 내가 누구나 돌아볼 만큼 대단한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닌데, 말 한마디 해본 적 없는 1학년 후배가 내 이름을 알고 있을 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을까.
“난 괜찮아. 아까 마셔서. 너 마셔.”
나는 아카아시에게 내 몫이었던 드링크병을 반쯤은 강제로 쥐어주고서 곧장 몸을 돌렸다. 사양하는 말을 들을까 싶어서이기도 했고 아까 마셨다는 말은 거짓말, 보쿠토의 음료를 뺏어마실 작정이었기 때문이었다.
보쿠토 녀석은 뭐야, 네 건, 하며 투덜거리기는 했지만 반쯤 남은 드링크를 넘겨주었다. 나는 나만 눈여겨보고 있는 후배에게 건네줬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아카아시가 내 이름을 알고 있다면 다른 사람들의 이름도 알고 있을 것이고, 그건 그 애에겐 특별할 것도 없는 일이란 뜻이었다. 그런 걸 붙잡고서 호들갑 떨고 싶지는 않았다. 치기어린 자존심이었다. 누군가가 보쿠토에게 마실 것이며 수건을 챙겨주는 게 당연한 것처럼 아카아시에게도 당연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 것도 있었다. 누구에게도 대수롭지 않은 일을 굳이 입 밖으로 떠벌려본들 무엇할까.
그 뒤로 며칠이 지났고 그 동안 아침 저녁으로 부활동이 있었지만 아카아시와 내가 특별히 친밀하게 지내는 일은 없었다. 여전히 우리는 후배들과는 데면데면했고 3학년과 2학년에 주전이 밀집되어 있는 만큼 그런 분위기를 탓하는 사람조차 없었다. 내 소소한 반란 아닌 반란은 그 날로 끝이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보쿠토가 평생을 다해 내 주스에 고마워해야 하는 그 일이 없었다면 아마 계속 그랬을 것이다.
내가 아카아시에게 내 몫의 드링크를 주었던 날로부터 일주일이 채 지나기 전의 어느 날이었다.
배구부원들끼리 특별히 대단한 의리나 친목을 다지는 건 아니었지만 학생식당에서 마주하면 합석 정도는 편하게 하는 사이였고 그 날도 그랬는데, 함께 한 자리에서 유독 보쿠토가 들떠있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들떠있었다기 보다는 체육관 조명 수리 건으로 아침 연습을 못한 분량 만큼 에너지가 남아 넘치는 것 같았다. 하여간 그렇게 온몸에 기력이 넘치는 티를 감추지 못하고서 밥을 먹는 건지 전쟁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싶었는데 기어코 보쿠토가 사고를 쳤다. 큰 소리로 이야기하며 팔을 휘두르다가 후식으로 나온 사과맛 음료를 냅다 후려쳐버렸는데, 입부할 때부터 차기 에이스로 거론되던 배구부 윙스파이커가 넘치는 힘을 주체하지 못하고 쳤으니 팩에 담긴 음료는 그대로 기운차게 날아가 학생식당 바닥에 떨어진 것이다. 아직 포장도 뜯지 않은 것이라 제때 줍기만 했으면 수습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참 기가 막히게 그 순간 그걸 또 누가 밟아버렸고 퍽, 하는 소리가 나더니 사과향이 훅 퍼졌다. 기어코 보쿠토의 주스가 누군가의 발 아래에서 시원하게 터져버렸다.
밟았던 사람이 휘청하며 뒤로 넘어가는 걸 다른 사람이 붙잡아 겨우 세워주는데도 보쿠토는 터져버린 자신의 사과맛 음료를 바라보며 거의 울것 같은 표정을 짓느라 바쁘다. 밟은 쪽은 후배였는지 놀라서 사과부터 하고 있었다.
도대체, 보쿠토가 주스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세상이 무너진 듯이 굴기에 나는 혀를 차며 내 몫의 팩을 내어주었더랬다. 얼굴도 모르는 후배에겐 적당히 괜찮노라 말을 해주고 어떻게 상황을 수습하려는데 보쿠토의 그러잖아도 큰 눈이 화등잔만해지더니 또 활짝 웃는다. 좋다고 신이 나서 팩에 빨대 꽂는 모습을 보며 나는 혀를 찼다. 차라리 이 녀석을 속편하게 시기하고 질투하고 미워할 수 있었다면.
그렇게 자리에서 일어설 때였다. 불쑥 내 눈 앞에 다시 그 음료 팩을 든 손이 나타났다.
“어……. 아, 아카아시.”
보쿠토의 음료 팩을 밟아 터뜨린 사람이 아카아시의 같은 반 친구였던 듯했다. 나는 의외의 장소에서 마주친 후배의 모습에 놀라서 움찔했다가 나도 모르게 보쿠토를 한 번 흘끗 쳐다보았다. 보쿠토는 벌써 빨대를 입에 물고 있었다. 한 번 입술을 움직일 때마다 팩이 홀쭉해지기를 반복한다. 보쿠토는 아카아시가 누구인지 궁금하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이미 알고 있는 것인지 특별히 감정이 드러나는 표정은 아니었다.
“안녕하세요.”
아카아시가 꾸벅 인사했다. 나만을 향한 인사는 아니었다. 다른 동기들도 어 안녕, 하며 조금 어색한 목소리로 인사한다. 아카아시는 담백한 목소리로 사과의 말을 전했다. 사실은 밟고 넘어질 뻔한 사람이 있었으니 정말 미안한 건 이 쪽이라서 서둘러 손을 내젓는데 아카아시가 들고 있던 걸 내게 내밀었다.
“-이거, 하나 남아서요. 코노하 선배 드세요.”
아카아시는 얼떨떨해하는 내가 뭐라 대꾸할 기회도 주지 않고서 내 손에 팩을 쥐어준 뒤 꾸벅 인사를 하고는 몸을 돌렸다. 나는 직감했다. 뜬금없이 식단 메뉴 중에 하나였던 주스가 남을 리 없다는 것과 이것이 며칠 전 내가 양보해주었던 드링크의 답례라는 것을. 그리고 동시에 내가 여기서 저 애가 우리 부의 1학년이고 이름은 아카아시 케이지이며 중학교때는 세터를 했었다는 애라는 설명을 해야하는지 아니면 그래도 일단은 모두 같은 부원이니까 알고 있을 거라는 가정 하에 자연스레 넘어가야하는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데 돌연 보쿠토가 물었다. 녀석이 먹던 음료는 이미 깨끗하게 비어서 빨대에서 한 번 거친 소리를 냈다.
“코노하. 너 쟤랑 친해?”
“어? 아니, 조금. 그냥.”
“그래?”
보쿠토가 다 비운 팩을 반으로 접어 휙 던졌다. 팩은 조금 멀리 떨어져있는 쓰레기통에 빨리듯 깔끔하게 들어갔다. 이런 곳에서까지, 그런 생각에 나는 속으로만 혀를 내두르다가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보쿠토는 우리를 보고 있지 않았다. 팩을 던지는 그 순간에도 한 곳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친구와 함께 멀어지는, 아카아시의 뒷모습이었다. 까닭도 모르고서 등골이 쭈뼛 섰다. 서로 불러도 듣지 못할 만큼 멀리 떨어졌던 아카아시가 문득 뒤를 돌아본다. 나는 그 애의 청록색 눈동자를 알아보았다. 아카아시가 다시 꾸벅, 우리를 향해 인사했다.
보쿠토의 질문은 보쿠토가 이미 아카아시를 인지하고 있었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는 걸 나는 며칠 뒤 아침에 알아차렸다.
*
아침에는 연습하기 전 20분 정도 운동장을 달리는데, 물론 선두에 있는 건 보쿠토와 3학년 선배 몇 명뿐이었다. 나머지는 뒤에 적당히 뭉쳐가고 1학년들은 대부분 그보다 뒤다. 위계 질서를 맞추어 뛰는 것이 아니라 체력과 속도가 되는 대로 하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었는데 아카아시는 첫번째 그룹과 두번째 그룹 사이쯤에서 뛰고 있었다. 나는 저 괴물들만큼 체력이 되진 않아서 조금 뒤에서 달리며 아카아시의 등을 보고 있었다. 작년까지 봤던 건 선배들과 보쿠토의 등이었지만.
요 며칠간 나는 아카아시와 제법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지켜본 바, 아카아시는 여전히 특별히 친밀하게 지내는 사람은 없었지만 부활동에는 차고 넘치게 열의가 있었다. 너처럼 생긴 애가 이러는 건 좀 반칙 아니냐? 내 질문에 아카아시는 멀뚱히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손짓 발짓을 섞어가며 생각을 말했다. 아무리 봐도 학생회나 하게 생겼으면서 이렇게 배구부 활동 열심히 하는 거 말야. 완전 안 어울리는 느낌이라고. 내 말에 아카아시는 곰곰이 생각하는 표정이 되더니 나를 보곤 말했다. 그건 선배도 그런데요.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허를 찔려 입만 벌리고 있으려니 아카아시가 조금 헛기침하면서 짧게 사과했다. 녀석 딴의 농담이었다. 나는 그냥 갑자기 주체하지 못할 만큼 웃음이 터져서 그 날 하루종일 실실거렸고 아카아시는 나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왠지 부끄러워하는 듯이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나늘 오늘에서야 저 애를 눈여겨보고 있는 건 나만은 아니었을거라는 걸 알아차렸다. 앞에서 달리는 쪽에선 뒤에서 누가 뛰는지는 관심도 가지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선두에서 달리던 보쿠토가 흘끗 뒤를 본다. 보는 쪽은 명확했다. 아카아시였다.
이 때 내가 왜 배신감을 느꼈는지 정말 모를 일이다. ……아니, 솔직히는 알고 있지만. 나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쿠토는 인식조차 하지 못한 귀한 것을 나만 알아차렸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사실 보쿠토도 진작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 왜 여태껏 모르는 척했느냐고 따져 묻고 싶은 마음이었다. 보쿠토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괜히 원망스럽고 억울했다. 사실 보쿠토가 잘못한 건 무엇도 없지만.
잘못한 것이 없는 상대를 미워하는 감정은 결국 스스로에게 생채기를 낼 뿐이었다. 지난 1년동안 지독하게 깨달아온 것이기도 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위해, 스스로를 보호하고 싶어서, 그리고 사실은 정말 어떻게 해도 싫어할 수가 없어서 보쿠토를 좋아했지만 이미 자라난 감정이 어디론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건 언제나 터질 준비를 하고서 우리 주위를 맴돌았고 나는 그 보이지 않는 것을 붙들고서 제발 졸업할 때까지만 버텨달라고 내내 기도하고 있었다.
기도는 끝났다.
나는 천천히 뛰던 것을 멈추고 몸을 숙였다. 앞이 어질어질했다. 지금 이렇게 뛰던 것이 문제가 아니라 앞으로 부활동을 어떻게 해야할지 막막했다. 이런 마음으로는 누굴 봐도 헛소리나 지껄일 게 분명했다.
“코노하! 괜찮아?”
“코노하 선배!”
그랬는데.
나는 내 시야에 들어오는 신발 두 쌍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하나는 익숙한 것이고 하나는 낯선 것이었다. 천천히 고개를 들자 두 사람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하나는 보쿠토였고 하나는 아카아시였다. 순간 눈 앞이 빙글 돌았다. 내가 휘청거리자 두 사람이 놀라서 부축하려고 한다. 서로 손을 부딪히고는 흠칫하는 것까지 보고서, 나는 결국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코노하, 괜찮아? 많이 어지러워?”
옆에서 보쿠토가 주인 잃은 개마냥 어쩔 줄을 모르고 부산스레 굴었다. 실질적으로 도움이 된 건 후배인 아카아시였다. 누구와 살갑게 말하는 건 한 번도 보질 못했는데 곧장 매니저에게 달려가 차갑게 적신 수건과 음료를 들고 온다. 보쿠토는 그걸 보면서 눈을 휘둥그레 떴다가, 다시 나를 보고서 어쩔 줄을 모르다가 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양호실 갈래? 업어줄게!”
“……됐어, 치워, 인마.”
날파리처럼 허둥거리는 팔을 쳐내고 아카아시가 내미는 찬 수건을 목에 댔다.
왜 너희가 왔냐, 묻고 싶었다. 무릎을 세워 얼굴을 묻었다. 왜 하필 너희야. 왜 하필 너야. 너때문인데, 진짜, 이렇게까지 미워하지도 못하게, 왜 너야.
보쿠토가 모를까. 아니.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 녀석은 바보는 맞지만 멍청이는 아니다. 다 알고 있을 것이다. 중학교 때부터 휘황찬란하게 빛났다고 모두가 얘기했다. 중학교 때부터 그랬을테니 자신의 주위를 둘러싼 아름답지만은 않은 감정의 기류를 보쿠토 역시 알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내가 어떻게 어떤 마음으로 보는지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달려와주면. 알면서도 와주면. 알면서도 진심으로 저렇게 걱정하는 얼굴을 하고 있으면.
정말로 어떻게도 미워할 수 없게 이렇게.
“코노하아…….”
당황이 역력한 얼굴이 뜻하는 것은 너를 걱정하고 있다는 것. 옆에서 눈을 떼지 않고 바라보는 것도 같은 의미였다.
나는 깊은 탄식처럼 한숨을 내쉬고서는 다시 무릎에 고개를 묻었다. 나만이 아카아시를 알아보았던, 짧고 꿈결같던 시간의 끝이었다. 고개를 든다. 두 쌍의 눈동자가 나를 보고 있었다. 이젠 저 두 사람의 시간이라는 걸 내가 어떻게 알아차렸는지는 나도 모를 일이다. 다만 목에 닿는 수건을 쥐고서 생각했다.
아카아시, 누구하고도 곧잘 말 할수 있었으면서 왜 그 땐 드링크 찾아 마시지 않은 거야. 괜한 심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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