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쿠아카 | 어깨 위로
“아, 더워, 귀찮아, 귀찮아, 귀찮아~!”
“……저 혼자 다녀오겠다고 했잖아요.”
“흐아, 5월인데 벌써 더운 느낌~!”
아카아시는 말을 덧붙이길 관두었고 보쿠토는 처음부터 들은 척도 하지 않았던 것 그대로 아카아시의 어깨에 팔을 걸고서는 축 늘어져 칭얼거렸다. 수업 종이 치기가 무섭게 체육복으로 갈아입었던 보쿠토는 외출하기 위해 저지를 걸치고 있었다. 평상시의 체온도 아이처럼 높은 사람이니 더워할 만도 했다.
두 사람은 은행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품에는 플라스틱 카드가 들려있는데 부비가 모두 들어있는 계좌와 연결된 체크카드로, 이번 황금연휴를 맞이해 하는 합숙에 쓸 현금을 조금 인출해 오라고 시로후쿠가 내어준 것이다. 보쿠토를 붙잡고서 주의사항만 10분동안 떠들던 시로후쿠는 보쿠토가 아카아시를 붙잡고 ‘같이 가자!’라고 말하자마자 그의 손에 있던 카드를 낚아채어 아카아시 손에 쥐어주곤 그에게 필요한 액수만 말해주고 모든 전언을 끝냈다. 보쿠토가 기가 막혀서 쫑알거렸지만 시로후쿠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더우면 걸친 저지라도 벗으세요.”
아카아시가 한숨 쉬는 걸 포기한 건 지난해의 일이었다. 보쿠토는 은행 안으로 들어가서야 겨우 아카아시 곁에서 떨어졌다. 보쿠토는 귀찮다며 고개를 흔들었다. 더워하는 쪽이 더 힘들 것 같았지만 아카아시는 첨언하는 것 없이 ATM 앞으로 향했다.
“뭐 하는데 현금 필요한 거야?”
“음료 파우더가 떨어졌는데 인터넷으로 주문하는 건 배송 날짜를 못 맞출 거라고 하셨어요. 연휴라.”
보쿠토는 물어본 것이 자신이면서도 시큰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크게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일개 고등학교 부활동이었으나 인원이 많고 제법 지원을 받는 터라 계좌 안의 액수도 상당했고 인출한 금액도 고액이다. 아카아시가 카드를 챙기는 사이에 보쿠토가 현금을 촤르르 넘겨보았다. 그마저도 무성의했다. 아카아시는 흘러내린 가방끈을 추슬러올리며 흘끗 보쿠토의 모양새를 살폈다. 어느새 보쿠토는 유리문을 밀어 열고 있었다.
“보쿠토 선배, 돈은 넣고 나가요. 위험하잖아요.”
아카아시는 서둘러 인출기 근처에 비치되어 있던 종이봉투 하나를 꺼내와 보쿠토에게 내밀었다. 보쿠토는 의아한 표정이었다. 뭐가 위험해? 아카아시는 결국 포기했던 한숨을 내쉬었다. 보쿠토는 까닭은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아카아시가 시키는 대로 착실하게 봉투 안으로 현금을 집어넣고 있었다.
“소매치기나 뭐, 그런 거요. ATM들렀다 나오는 사람은 둘중 하나는 현금을 손에 쥐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이 말을 할 때까지만해도 아카아시는 정말로 그런 일이 생길 것을 염려한 것은 아니었다. 매사 인간 사회의 상식과는 동떨어진 것처럼 구는 사람에게 한 마디라도 더 일러주려 하던 평소 습관 쪽에 더 가까웠다.
“혹시 선배 혼자서 올 일 있으면 현금같은 건 잘……!”
유리창에 비친 사람이 손에 금속성 물체를 쥐고서 다급하게 다가오는 걸 알았을 때 보쿠토를 먼저 끌어당긴 것도 또한 평소의 버릇이었다. 행여나 무슨 일이 있다고 해도 자신에겐 보쿠토보다 1년이 더 있다는 것. 그 생각의 위로 빠르게 다른 것들까지 스치고 지나갔다. 바로 내일 모레인 연휴의 합숙, 여름 인터하이, 겨울에 있을 봄고, 그 사이에 있을 가능성이 높은 보쿠토의 추천입학까지.
부욱 하고, 날붙이로 천자락 찌르는 소리와 함께 매서운 통증이 팔을 할퀸다. 아카아시가 주춤하는 사이에 낯선 남자가 아카아시 손에 있던 카드와 보쿠토가 쥐고 있던 종이 봉투까지 낚아챘다. 눈 깜짝할 새의 일이었다.
“아카아시!”
아카아시는 오른손으로 왼팔을 움켜쥐었다. 손끝을 타고 붉은 액체가 뚝 떨어진다. 깊은 상처는 아닌 듯 했고 다행이 보쿠토도 갑자기 낯선 사람과 부딪혀 조금 놀랐을 뿐 다치지는 않은 것 같았다.
“아카아시, 이게 뭐야! 아카아시! 상처!”
“이건 스친 건데 그보다, 인출한 게……. 큰일이네요…….”
소매치기가 저 멀리 뛰어간다. 아카아시가 중얼거리는 말에 보쿠토가 창백한 안색으로 버럭 소리쳤다.
“지금 인출한 게 문제야!?”
“카드도…….”
정지부터 해야겠어요, 아카아시가 차분하게 중얼거리는 사이에 보쿠토가 인상을 왈칵 썼다. 아카아시가 손으로 붙잡고 있는 상처를 한 번 살펴보고는 순식간에 저지를 벗어 아카아시의 어깨에 걸쳐준다. 보쿠토는 거세게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여기 꼼짝말고 있어.”
“보쿠토 선배……? 선배!”
그리고 아카아시가 보쿠토를 채 불잡기도 전에, 그대로 보쿠토가 튀어나가듯 달려갔다. 소매치기가 도망친 방향이었다.
*
보쿠토가 돌아온 것은 은행 ATM 근처에 경찰차와 구급차가 당도했을 때였다. 출동한 구급요원이 응급처치를 하는 동안 얌전히 앉아있던 아카아시는 숨을 들썩거리는 보쿠토의 모습을 보자마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즈와 붕대가 튀어 휘날리고 아카아시의 어깨에 걸쳐있던 보쿠토의 저지도 펄럭거렸다.
“보쿠토 선배!”
“이거 찾아왔고, 그래서 지금 상처는 괜찮아?”
“저는 괜찮다고 했잖아요, 선배, 지금 선배가…….”
“아, 이건 그냥 긁힌 거야. 그래서 이 애 상처는요?”
보쿠토의 손에는 그새 구겨진 종이 봉투가 꽉 쥐어져 있었다. 소매치기가 훔쳐갔던 돈이었다. 뺨이며 팔다리에 자잘한 생채기가 가득하다. 범인을 추격하면서 여기저기 부딪히고 뒹군 게 분명했다.
“보쿠토 선배! 칼 든 상대를 쫓아가면 어떡합니까!”
“넌 그럼 상대가 칼 들고 있는걸 보고도 무슨 짓이야, 이게.”
보쿠토는 땀과 생채기로 범벅이 된 얼굴로 언성을 높이지도 표정을 바꾸지도 않은 채 그저 서늘하게 아카아시를 노려보듯 바라보았다. 옆에서 조치를 하던 구급요원이 서둘러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깊은 상처는 아니고, 반창고를 잘 붙이고 있으면, 일주일은 격한 운동은 삼가시고요, 그런 말들이 의미 없이 두 사람 사이에 흘러갔다.
보쿠토의 자잘한 상처까지 치료하고 경찰들과 얘기까지 나누고 나자 어느새 해가 저물어갈 시간이었다. 사건이 정리되고 관중들까지 흩어질 때 아카아시는 여태껏 걸치고 있던 보쿠토의 저지를 내밀었지만 보쿠토는 고개를 흔들곤 다시 아카아시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아카아시는 자신의 어깨 위로 올라온 보쿠토의 옷을 흘낏 바라보곤 호흡을 골랐다.
“선배.”
“…….”
잃어버릴 뻔했던 돈은 큰 액수이긴 했지만 사정이 그러하니 누구도 탓할 수 없을 것이고 카드는 정지하면 되었는데 그것때문에 칼을 든 사람을 쫓아가는 건 무슨 배짱인지 알 수가 없다. 아카아시는 엄한 목소리를 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위험한 짓을 하면 어떡합니까.”
“그럼 아카아시는?”
보쿠토가 벌컥, 돌아보며 말했다. 그 목소리가 물에서 자맥질하듯 울컥하는 기색이 있어 아카아시가 놀라 눈을 크게 뜨는데 보쿠토의 금빛 눈동자가 그렇게 울렁거리고 있었다.
“너는 왜 그랬어?”
“보쿠토 선배……?”
“네가 한 건 위험한 짓 아냐?”
아카아시는 입술을 달싹거렸다. 보쿠토는 지금 아카아시가 자신을 감쌌던 일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선배, 그건…….”
“내가 뛰어나가서 다치고 굴러오니까 아카아시는 기분 어땠어.”
“……선배. 지금 그거랑 이게…….”
뭐라 말을 이으려 했던 아카아시는 결국 입을 다물어야했다. 보쿠토가 그렁거리는 눈으로, 여전히 매서운 표정을 하고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 마디 더 했다간 그가 울어버릴지 아니면 화를 내버릴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왜 그랬어.”
“…….”
그래도 지켜준 셈인데 이렇게 화를 내시고, 이런 농담이라도 해서 어떻게든 분위기를 풀고 싶었지만 보쿠토의 눈동자는 받아줄 기색이 없다. 아카아시는 보쿠토가 걸쳐준 그의 저지 자락을 꾹꾹 매만졌다.
“내가 주장이라서?”
“……뭐, 그것도 없지는 않죠…….”
“아카아시!”
“에이스잖아요, 선배는.”
아카아시는 최대한 차분하고 침착한 목소리로 말을 늘어놓았다.
“조금 있으면 인터하이고. 보쿠토 선배가 뛰는 거랑 뛰지 않는 거, 코트 분위기가 전혀 달라요. 선배는 없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그럼 내가 배구 그만두면 너도 안 그럴거야?”
“선배!”
보쿠토의 목소리는 낮았다. 노려보듯 직시하는 눈동자 속의 물결은 여전했으나 목소리에서만큼은 그런 기미를 찾아볼 수 없었다. 흔들림없는 진심이었다.
“내가 배구부 주장이고 에이스고 윙스파이커고 이런 게 네가 나 대신 다칠 이유가 되는 거야? 그럼 그거 다 관둘래.”
“선배, 제 상처는 정말로 대단한 게 아닙니다. 그냥 스친 거예요. 꿰매지도 않았고…….”
“그만 둘거야.”
“선배, 왜 이러세요. 보쿠토 선배.”
아카아시가 초조한 목소리로 보쿠토를 부르며 그의 팔을 붙잡았다. 보쿠토는 그 팔을 뿌리치지는 않았다. 하지만 뱉은 말을 철회하지도 않는다. 아카아시는 입술을 깨물었다. 보쿠토가 정말로 마음 먹었으면 그게 무엇이든 그대로 해버릴 위인이라는 것은 처음 만났던 날부터 알고 있었던 일이다.
“보쿠토 선배, 오늘 같은 일은 다신 없을 거예요. 이런 일이 흔하게 일어나는 것도 아니…….”
“백 번 일어나든 한 번 일어나든 일어난 건 일어난 거야.”
“선배, 일단 진정하시고 배구부는 계속…….”
“그만 둘 거야.”
“선배!”
끝내 아카아시가 언성을 높였고 이번에는 보쿠토도 단호한 목소리를 내지는 못했다. 격양되어 흔들리는 눈빛이 아카아시를 돌아본다.
“내가 배구 하고 있어서 아카아시가 이렇게 될 생각을 하는데 그럼 어떻게 계속해!”
“배구하곤 상관 없어요!”
“내가 주장이라서 에이스라서 그런 거잖아!”
“좋아하는 사람이 다치는 꼴을 어떻게 봐요!”
“어떻게 보……. 뭐?”
“……젠장…….”
아카아시는 다치지 않은 오른쪽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며 고개를 푹 떨어뜨렸다. 지금까지 차갑게 화를 내던 사람이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는 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렇게 말하려던 게 아니었는데…….
“어……. 어? 어어……? 아카아시? 지금……. 방금…….”
“…….”
죽어도 말하고 싶지 않았는데…….
“어……. 아카아시, 방금 뭐라고 했어?”
“아무 말 안했습니다.”
“현실도피 하지 말고 빨리 재생해줘.”
“싫습니다.”
“나 배구부 관둔다 진짜?”
“아, 정말이지…….”
아카아시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아무 말 하지 않는데도 앞에 선 사람의 체온이 오르는 걸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고개를 들 자신이 없어서 그저 숙이고만 있는데 불쑥 아래에서 보쿠토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아카아시, 나 좋아해?”
“…….”
“정말이야?”
운동장을 다섯바퀴는 뛰고 온 것처럼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 눈은 조금도 피하지 않는 보쿠토가 그를 바라본다. 아카아시는 휙 고개를 돌렸다.
“정말이야? 진짜? 정말로?”
“예. 정말입니다, 네, 네. 그러니까 이제 배구부 관둔다는 말은 하지 마세요.”
“진짜 나 좋아해?”
듣고싶은 말만 골라 듣는 재주가 탁월도 하다. 아카아시는 다 포기하고서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예, 예.
“왜 이제 말해, 그걸!”
“죽어도 말 안할 생각이었습니다만…….”
“왜! 왜왜! 왜!”
이럴 거 같았으니까요. 유리가루를 흩뿌리는 것처럼 반짝거리는 눈동자였다. 마주보고 있자면 그 빛에 눈이 멀것 같아서 아카아시는 고개를 돌렸다.
“그러니까 배구부를 관두든 계속 하든, 마찬가집니다. 알겠습니까, 보쿠토 선배.”
“……그래도 이러는 건 싫어. 하지마.”
보쿠토가 아카아시의 왼쪽 검지 끄트머리를 꾹 쥐었다. 언제 들떴냐는 듯이, 서늘하게 쳐진 얼굴이었다. 아카아시는 입을 다물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해. 약속할게요. 보쿠토는 진심을 가늠하려는 듯이 한참이나 아카아시의 눈동자를 살피다가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셨다.
“그럼 우리 오늘부터 1일이야?”
“사귀자는 말은 아니었는데요.”
“엑!? 왜! 나도 아카아시 좋아하는데!”
“압니다.”
모를 리가.
가장 좋아하는 건 배구. 모든 걸 다 바치는 것도 배구. 그 배구를 그만두겠다고 말하는 것은 아카아시의 팔을 스치고 간 붉은 자상 때문에.
“근데 왜!”
“……아닙니다. 오늘부터 1일 하죠, 해요. 합시다.”
“아카아시 완전 귀찮다는 말투!”
“아니에요, 그런 거…….”
아카아시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고 그 고갯짓에 맞추어 그의 어깨를 장식하고 있는 저지가 사르르 흔들렸다. 그 모습을 보고서 보쿠토가 순식간에 뺨을 붉힌다. 아카아시는 괜히 그의 사고 과정을 추리했다가 자신까지 얼굴이 달아오를 것 같아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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