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쿠아카 | Lunatic
Lunatic
보쿠아카 전력 주제 - 뱀파이어
“선배가요? 뱀파이어요? 어젯밤에 무슨 영화 보셨습니까?”
“아 진짜야! 진짜! 진짜라니까!”
보쿠토가 열변을 토했고 아카아시는 미심쩍은 눈동자로 보쿠토를 바라보았다. 모두가 돌아가고 둘만 남은 부실이었다.
갑자기 할 말이 있다고 하더니 터무니없는 말을 한다. 아카아시는 팔짱을 끼고서 보쿠토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삐죽삐죽 솟아오른 머리카락, 급류가 몰아치는 것같은 표정, 훤칠한 키와 체격, 그리고 보쿠토를 생각할 때 제일 먼저 생각나는 건 체육관을 쩌렁 쩌렁 울리는, 토스를 부르는 목소리.
“그……. 뱀파이어라는 건 그러니까 흡혈귀 말하는 거 아닌가요.”
“맞아! 바로 그거!”
“흡혈귀는 보통……. 낮에는 못 돌아다닌다고 하던데.”
“아 그런 건 다 소설이고~! 요즘 세상에 무슨 낮이라고 못 돌아다녀.”
‘요즘 세상에’…….
“그래서 진짜 흡혈귀는 밤낮 상관이 없으시다?”
“그렇지!”
드디어 자신의 말을 믿어준다고 생각했는지 보쿠토의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이 난다. 아카아시는 미간을 꾹꾹 눌렀다. 이 사람이 바보는 맞지만 멍청이는 아닌데, 갑자기 이런 터무니없는 얘길 한다. 믿을 수 없는 얘기라서 오히려 ‘설마’하게 되는 것이 있었다.
“갑자기 저한테 이런 얘길 하시는 이유가 뭔데요. 기왕이면 죽을 때까지 비밀로 하고 사시지.”
“아카아시 냉정해!”
“선배가 말도 안 되는 얘길 너무 당당하게 하시는 겁니다. 보통 이런 건 아무에게도 들키면 안 되는 비밀 아닙니까?”
“아카아시가 아무나야?”
“굉장히 아무나가 되고 싶어졌습니다만…….”
“아카아시이!”
아카아시는 징징거리는 보쿠토를 밀어내며 자꾸만 한숨이 올라오려는 것을 꾹꾹 눌렀다. 정말? 진짜인가?
“그래서 갑자기 말씀하시는 이유가 뭔데요. 뭐, 피라도 달라고?”
“어! 바로 그거야!”
“…….”
“역~시, 우리 아카아시!”
“…….”
“실은 내가 요즘 피……. 아, 아카아시? 아카아시? 어, 어디가? 아카아시?”
“안녕히 계세요.”
아카아시가 냉정하게 몸을 돌렸고 보쿠토가 울상을 지으며 소리를 높였다.
*
아무래도 이야기가 길어지고 진지해질 것 같아서, 아카아시는 보쿠토와 함께 공간이 나뉘어진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보쿠토가 커피를 주문할 때 아카아시는 ‘얼음물이요’라고 대답해 보쿠토가 그의 눈치를 살피게 만들었다. 보쿠토는 아카아시가 말하진 않았지만 언제나 그가 달게 먹곤 했던 카페 모카를 주문했다. 휘핑크림도 잔뜩 올려서.
“그, 흡혈귀들은 사실 피를 안 마셔도 되거든?”
“네, 그런데요.”
아카아시가 노골적으로 ‘어디까지 하나 들어나 봅시다’라는 투로 대꾸했다. 보쿠토는 조금 시무룩해지기는 했으나 포기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근데 그게 한 번 남의 피를 마시면……. 그 때부터는 약간 그, 뭐랄까. 안 마시면 안 되는 그런 상태가 된달까…….”
“언제 뭘 하다가 남의 피를 또 마셨습니까? 제가 아무거나 주워먹으면 안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 아니! 나도 그러려고 그런 게 아니야!”
보쿠토가 억울하다는 얼굴로 서둘러 항변했다. 왜 얼마전에 아카아시 다쳤을 때 있잖아, 내가 팔 휘두르다가 맞아서, 그 때 아카아시 피 났던게 어쩌다 입에 들어갔나보더라고, 그래서 그 뒤로.
아카아시는 팔을 괸 채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보쿠토가 말하는 그 때를 회상했다. 가만히 두면 에너지를 주체하지 못하는 사람 마냥 난리가 나는 보쿠토에 대해서는 아카아시도 익숙했는데 그날은 아카아시가 조금 방심을 했달까 보쿠토가 유달리 기력이 넘쳤달까, 혹은 둘 다인 그런 날이었다. 얼굴을 스친 걸로 그대로 코의 혈관이 터질 거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고 당연히 난리가 났다. 보쿠토는 거의 세상이 무너지는 것처럼 굴었다. 손으로 피가 후두둑 떨어지고, 뺨이며 옷깃이며 수건을 다 적시고…….
“저 때문이니까 저보고 책임을 져라, 이런 건가요. 하지만 그 때 피가 난 원인을 따지면…….”
“아, 아니, 그게 아니야! 그게 아니라!”
보쿠토가 입을 다물었다. 아카아시는 도망치고 싶다고 생각했다. 터무니없는 몰래카메라든 아니면 보쿠토의 새로운 장난이든 혹은 정말로, 정말로 믿고 싶진 않지만 보쿠토의 저 모든 말이 진실이든, 보쿠토가 저런 눈 저런 표정으로 말을 했을 때 아카아시는 거절할 수 있었던 적이 없었다.
“아카아시한테 책임지라고 얘기하는 거 아니야.”
“그럼요.”
“아카아시니까 얘기할 수 있는 거야.”
아카아시라면 믿어줄 거라고 생각했어. 보쿠토의 말은 나직했고 평소의 그답지 않았으며 그래서 마치 비에 젖은 들짐승처럼 가슴 아픈 구석이 있었다. 아카아시는 탄식처럼 한숨을 흘리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마주 앉은 사람은 말이 없다.
“……그 피를 안 마시면 어떻게 되는 건가요.”
“음……. 처음에는 두통같은 느낌? 나중에는 피곤하고, 졸립고 뭐 그러다가. 몸살나는 것처럼 아프고.”
아카아시는 보쿠토의 말을 하나 하나 씹어보며 재차 한숨을 내쉬었다.
“피를 마시면요? 뭐 더 팔팔해지거나 그런 건 아니겠죠.”
“어? 응, 그냥 보통 상태가 되는 거야!”
묻고 싶은 말은 많았다. 꼭 제 피여야만 하는 건가요. 다른 방도로 다른 혈액을 구할 수 있는 길은 없나요. 정말, 지금 하는 말은 모두 진실인가요…….
“……그래요, 그건 그나마 다행이네요.”
“무, 무슨 뜻이야.”
“선배가 이 이상 씩씩해지면 곤란하단 뜻입니다. 그래서 피는, 제가 어떻게 드리면 되나요.”
보다 위생적인 방법이 있으면 합니다만. 아카아시가 탈력한 표정으로 나직하게 말했지만 보쿠토의 귀에는 ‘제가 어떻게 드리면 되나요’라는 문장만 들린 듯했다. 보쿠토가 태양이 피어나듯 활짝 웃었다. 아카아시는 아무리 생각해도 저렇게 웃는 얼굴로 뱀파이어라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싶었지만 말로 꺼내지는 않았다.
*
보쿠토는 자신의 집으로 가자고 했고 아카아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담벼락이 죽 늘어선 고급 주택가의 한 곳이었다. 긴 마당을 지나 실내로 들어오자 안은 휘황찬란했다. 전면의 드넓은 유리창으로 햇빛이 낭창하게 쏟아졌고 드높은 천장의 샹들리에에 반사되어 보석처럼 흩어졌다. 부모님은 일 가셨어, 보쿠토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며 아카아시를 데리고서 위층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그 혹시 부모님도…….”
“응! 엄마가!”
“그렇습니까…….”
일가의 비밀을 이렇게 누설해도 됩니까? 아카아시가 물었고 보쿠토는 대답했다. 아카아시잖아?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지 전혀 모르겠다는 투다. 아카아시는 대답하지 않았다.
보쿠토의 전초전은 길었다. 아카아시를 방에 앉혀두고서는 온갖 과자와 음료를 내오고, 그 사이에 지루할까 걱정된다는 듯이 게임기도 쥐어주었으며, 이제는 부채질까지 해줄 기세였다. 아카아시는 손에 든 게임기의 전원도 켜지 않은 채 묵묵히 앉아있다가 말했다.
“그래서 피는 어떻게 드리면 됩니까.”
“음, 그게 말이지. 아하하.”
“……설마 그…….”
“……이것만은 설마 그거야…….”
“……돌아가겠습니다.”
“아카아시이이이!”
아카아시가 벌떡 일어나자마자 보쿠토가 덥석 아카아시의 손목을 붙잡았다. 아카아시가 있는 힘껏 뿌리쳐도 보쿠토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실랑이를 하는 와중에 양손이 모두 잡혀 결국 다시 자리에 앉게 되었다. 아카아시는 양손을 보쿠토에게 내맡긴 채 보쿠토를 올려다보았다. 농담이라고 해주길 간절히 바라는 눈동자였지만 보쿠토는 한껏 미안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손을 풀지 않았다.
“아니, 그게, 주사기를 써도 되는데 그건 아프고…….”
“직접 깨무는 편이 더 아플 것 같은데요.”
“아냐아냐! 그러니까 깨물 때 그, 아프지 않게하는 그런…….”
보쿠토가 열심히 설명을 늘어놓았다. 아카아시는 탈력할 것 같은 얼굴로 잠자코 그 설명을 들었다. 깨물 때 마취 비슷한 성분이 들어가서 전혀 아프지도 않고, 끝나면 조금 어지러울 수도 있지만, 심하지는 않을 거고, 그리고, 그리고, 그렇게 보쿠토는 반쯤 울것 같은 얼굴로 설명을 마치고서는 눈동자를 굴리며 아카아시의 눈치를 살피다 천천히 그의 손을 놓아주었다.
“그, 아카아시. 진짜 싫은거면 괜찮아. 가도 돼.”
“거짓말하지 마세요.”
“…….”
“피 안 마시면 두통부터 온다고요? 지금은 어떤 상태이신 건데요.”
“아직은 조금 피곤한 정도니까 괜찮아.”
“요즘들어 이상하게 간식 많이 드시더니 그것도 그래서입니까?”
“아, 그랬나?”
보쿠토가 고개를 갸웃했고 아카아시는 자신의 미간에 벌써 주름이 생기겠다며 실없는 걱정을 했다.
“최대한 보이지 않는 곳이 좋겠는데요.”
“응응! 응! 조심할게!”
보쿠토는 목과 어깨 사이 즈음이 좋겠다고 했고 아카아시는 고개를 끄덕인 다음 물티슈를 좀 달라고 했다. 혹시 알콜솜 같은 건 없냐고 했지만 보쿠토가 박장대소를 하곤 물티슈를 가져왔다.
교복 재킷을 벗고, 넥타이를 잡아당겨 헐겁게 만들고, 그 다음엔 목끝에서부터 단추를 하나씩 푼다. 가슴께까지 풀었을 때, 아카아시는 천천히 한쪽 옷깃을 어깨 너머로 끌어내렸다.
“……침 넘기지 마세요.”
“헉, 미, 미안. 들렸어?”
“완전.”
선명하게요. 아카아시가 노려보는 말에 보쿠토가 서둘러 입가를 훔친다. 저걸 뭐라 할 수도 없고, 아카아시는 속으로 한탄하곤 물티슈를 꺼내 어깨와 목덜미를 닦아냈다. 보쿠토는 홀린 듯이 아카아시를 바라보고 있기만 했다. 목을 닦아낸 물티슈를 쥐고서 잠시 말이 없던 아카아시가 결국 입을 열었다.
“-드세요.”
“자, 잘 먹겠습니다.”
아, 저 탐욕스러운 눈동자.
아카아시는 자신을 바라보는 금빛 눈동자를 마주하고선 반대편으로 조금 고개를 돌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사탕을 눈앞에 둔 아이처럼 들뜨기만 했었는데 바로 이 순간, 그 눈에서 꿈틀거리는 것은 제 소유의 먹잇감을 바라보는 맹금류처럼 지독했다.
마주앉은 보쿠토가 아카아시의 어깨를 붙잡고서 천천히 다가온다. 보쿠토가 아카아시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었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 보쿠토의 향기가 난다. 바로 귓가에서 습기에 찬 숨소리가 살짝 들린 순간 따끔, 하는 통증이 일었다. 순식간에 맥박이 거세어진다. 아카아시는 저도 모르게 보쿠토의 옷깃을 움켜쥐었다. 보쿠토가 달래기라도 하는 것처럼 아카아시의 등을 쓸어준다. 심장이 한번 요동칠 때마다 무언가가 주욱 빨려나가는 느낌이었다. 자신의 피였다. 자신의 생명이었고. 자신의 마음이었다.
“……보쿠토…선배…….”
액체를 삼키는 소리가 바로 귓전에서 들린다. 아카아시는 눈앞이 몽롱해지는 걸 느끼며 어떻게든 보쿠토의 옷깃을 쥔 손이라도 풀고싶었지만, 이제 그 손은 보쿠토가 쥐고 있어 풀어주지 않았다.
*
“아카아시 진짜 진짜 미안!”
아카아시는 눈을 깜박거리며 눈앞의 풍경을 인지했다. 보쿠토의 방 천장이었다. 목소리는 옆에서 들린다. 위에 덮은 것은 아마도 이불인 것 같았고 등에 닿는 건 보쿠토의 침대일 것이다. 아카아시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보쿠토가 말한 ‘어지럼증’이 순식간에 몸을 덮쳤다. 고작 앉는 것인데도 눈앞이 빙글 돈다. 보쿠토가 사색이 되어 팔을 붙들어준다. 아카아시는 눈을 가늘게 뜨고 보쿠토를 쳐다보았다.
“사람이 피를 준 보람도 없이 안색이 왜 그 모양입니까.”
“미, 미안, 아카아시. 내가 처음이라서 조절을 잘 못해서. 진짜 미안. 많이 어지럽지.”
“……괜찮아요.”
보쿠토는 잔뜩 울상을 지으며 아카아시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해명을 늘어놓았다. 내가 그만 너무 좋아서, 진짜 미안, 큰일 날 뻔했어, 잘못했어, 앞으론 안 그럴게, 정말 미안…….
“그래서 맛은 있었습니까?”
“어? 아 최고 맛……. 헉. 그, 그러니까. ……응. 맛있었어. 엄청…….”
자신은 이 사람을 정말 잘 알고 있다. 아카아시는 생각했다. 보쿠토가 이제 와서 뱀파이어라고 해도 달라질 건 없었다. 좋아하는 것에 대해 얘기를 할 때는 쨍 소리가 날 듯이 활짝 웃고, 잘못했다고 생각 하면 눈썹도 어깨도 세모꼴로 추욱 늘어져서는 그의 눈치를 본다. 거짓말에는 재주가 없고 좋고 싫음도 뚜렷하여 싫은 일을 하게 하면 입부터 나오는 사람.
“사실 내가 먹어본 음식 중에 진짜 최고.”
“…….”
“다른 피는 안 먹어봐서 모르지만…….”
“……다른 사람의 피로는 안 되는 건가요?”
그 말이 이제는 피를 주지 않겠다는 얘기로 들렸는지 보쿠토는 얼굴이 납빛이 되어 허둥지둥 팔을 휘둘렀다. 아카아시, 진짜 미안해, 앞으로는 정말로 내가 잘 할거야, 진짜 미안, 내가, 내가, 미안해, 잘못했어, 미안해, 내가 업어줄게!
가만히 두면 무슨 말이 나올지 모르겠다 싶어 아카아시는 일단 보쿠토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소리를 잃어버린 보쿠토가 눈썹을 축 늘어뜨리고서는 아카아시를 바라본다. 아카아시는 겨우 조용해졌을 때 손을 놓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냥 궁금해서 여쭤본 겁니다. 제 피를 처음 먹어서, 제 피로만 되는 건지 어떤 건지.”
“……정말이지?”
“네.”
“응…….”
보쿠토는 연신 아카아시의 눈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피를 먹은 것이 아카아시의 것이어서 아카아시의 피여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아카아시는 잠자코 오늘 들은 얘기를 되짚어보며 보쿠토를 바라보았다. 보쿠토는 오늘 하루종일 아카아시에게 설명하고 또 설명하고 설명했다. 아카아시가 이해하고 받아들여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손에 잡힐 듯이 선명했다.
“다른 사람의 피로는 아예 해소가 안 되는 건가요?”
“음, 그러니까……. 약한 진통제 먹는 수준으로는 돼. 아예 안 되는 건 아니야.”
“그렇군요…….”
“그치만 다른 사람 피는 싫은데.”
보쿠토가 뾰로통한 표정을 짓는다. 아카아시는 잠시 말없이 보쿠토를 바라보기만 했다. 보쿠토는 한껏 뺨을 부풀리고서는 말을 늘어놓았다. 다른 사람 피를 먹어버려서 이렇게 됐어도 나는 아카아시한테 왔을 거야. 아카아시니까, 야. 듣고만 있던 아카아시는 그 말이 끝내 ‘아카아시 없으면 안 돼!’까지 왔을 때 겨우 잘라내고서 질문을 계속했다.
“주기는? 얼마나 자주 드셔야 합니까?”
“으음, 보통은 2주에서 한 달에 한 번 정도라고…….”
마시지 않으면 두통, 피로, 몸살, 온몸에 통증. 마치 약물의 금단 증상과도 같았다. 그 사람의 피로밖엔 해결할 수 없는 것을 한달에 한 번씩은 꼭 마셔야 한다고. 아카아시는 새삼 피로가 덮쳐와 눈의 초점을 흐리게 했다.
“-제가 죽으면요?”
“우와아악!”
응당 했어야 하는 질문이다 싶어 말을 꺼냈는데 보쿠토가 대뜸 비명을 지른다. 아카아시도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보쿠토는 무서운 것이라도 본 것마냥 창백한 얼굴이었다.
“왜, 왜 그런 말을 해!”
“아니……. 사람이 어떻게 될지 모르잖습니까. 제가 죽으면 피는 못 드리는데 그 땐 어떻게 되는지 저도 알아야죠.”
“뭘 어떻게 돼, 그런 거 나도 몰라!”
보쿠토는 듣기 싫은 얘기는 피하려는 어린애처럼 눈을 꼭 감고는 꽥 소리쳤다. 아카아시가 달래는 말을 해보려 시도했지만 그마저도 고개를 휘젓는다. 듣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결국 아카아시는 이 화제에 대해선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이제 슬슬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침대에서 일어서는데 보쿠토가 마치 금이 간 도자기 인형이라도 보는 것처럼 아슬아슬 긴장과 걱정이 역력한 표정이 된다. 아카아시는 괜찮다고 손을 내저었지만 바닥에 발을 디디는 순간 크게 휘청거려 결국 보쿠토의 손에 의지해야 했다.
아카아시는 어설프게 채워진 셔츠 아래로 보쿠토가 입을 대었던 자신의 목덜미에 손을 올렸다. 반창고가 붙어있는 것이 느껴졌다. 자신은 중반부터 기억이 없었으니 아마 보쿠토가 붙여준 것일 터였다.
“아카아시, 집까지 데려다 줄게.”
“괜찮습니다.”
“안 돼.”
보쿠토가 단호했다. 아카아시는 어지러움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것도 사실이고 하여 더는 거부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보쿠토의 집을 나설 때는, 어느새 해가 다 지고 달이 휘영청 뜬 밤이었다. 보쿠토는 아카아시의 걸음에 맞추어 천천히 걸었다. 달이 지극하여 가로등의 빛을 무색하게 했다.
“아카아시, 내가 업어줄까? 그게 낫지 않을까? 아니면 음, 택시타고 갈래? 택시?”
“……밤이 돼서 쌩쌩해진 겁니까, 아니면 피를 마셔서 쌩쌩해진 겁니까?”
“…….”
괜히 핀잔 주듯 한 마디를 하자 보쿠토가 쌜쭉한 표정으로 입을 다문다. 아카아시는 웃음을 흘렸다. 그 웃음을 보고서 보쿠토는 겨우 표정을 풀고는 투덜거렸다.
“밤낮 가리는 거 아니라고 했잖아! 피 마셔서 그런 것도 아니야!”
“네, 네. 그런데 조금 신기하긴 하네요. 원래 다들 햇빛 아래에서도 괜찮은 겁니까?”
“뱀파이어는 음, 사실 해가 문제가 아니야.”
“그러면요?”
“달이 있냐 없냐, 이게 문제인 거지.”
그 말을 하는 보쿠토는 어딘가 평소와는 조금 다른 표정이었다. 그의 피를 탐하여 다가오던 그 때와 흡사한, 본 적 없는 독점욕이 진득히 물든 얼굴로…….
보쿠토가 말하는 ‘달’이라는 것이 하늘에 떠 있는 것을 가리키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정확히 무슨 의미냐고 물어볼 수 없었다. 목덜미의 상처가 아릿하게 저려온 탓이었다.
*
“아카아시이- 목말라아아-.”
점심시간, 옥상 구석진 곳의 그늘은 언제나 보쿠토와 아카아시의 차지였다. 식사를 마친 보쿠토가 곁에 있는 아카아시를 와락 끌어안으며 칭얼거렸다. 그러면서 입술이 자연스레 아카아시의 목과 어깨를 스친다. 아카아시 또한 자연스럽게 보쿠토의 머리통을 붙잡고 그대로 밀어냈다.
“한 달에 한 번이면 된다면서요.”
“그래도오오…….”
보쿠토는 처음 아카아시의 피를 마시고, 그 다음날은 참는가 싶더니 며칠 지나지 않아 끈기있게 붙어왔다. 첫날처럼 아카아시가 아찔하게 정신을 잃을 정도는 아니었고 보쿠토 말대로 딱 한모금 정도인 느낌이었지만 그것이 거의 매일 이어졌다.
말인즉슨 보쿠토가 아카아시의 목에 입술을 대는 것이 매일이란 말이었다.
이 사람은 정말로 그게 아무렇지도 않나? 단순히 맛있는 걸 마시는 것 뿐인가? 아카아시는 눈을 가늘게 뜨고서 자신을 올려다보는 보쿠토를 쳐다보았다. 보쿠토가 아카아시의 옷깃을 쥐고 흔들며 졸랐다. 한 모금만, 아카아시, 한 모금만, 으응?
“안 됩니다.”
“그치만…….”
“한 달에 한 번이라고 했잖아요.”
“그래도!”
아카아시는 보쿠토를 밀어내며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그게 어지간히도 서운했는지 보쿠토가 눈까지 그렁거리며 그의 소매자락을 붙들었다.
“아카아시, 그래도 한 달에 한 번 왕창 힘든 것보단 매일 매일 조금씩이 나을 것 같아서…….”
“아뇨. 한 달에 한 번 왕창 힘든 게 낫습니다.”
이렇게 매일 닿아오니 없던 마음도 생길 지경이건만, 이미 있던 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아카아시는 칭얼거리며 붙어오는 보쿠토를 손끝으로 막아 밀었다.
“아카아시이…….”
“그렇게 불러도 안 됩니다.”
‘몸도 주고 마음도 주고’의 유혈 버전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다. 아카아시는 착잡한 표정으로 자신의 빈 도시락을 내려다보았다. 보쿠토가 다른 사람 피로 해결할 수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자신이 싫다 했을 것이었다. 이것만은 죽어도 말할 수 없는 마음이다. 그런데 보쿠토는 그것도 모르고서 그저 달고 맛있는 피를 먹겠다며 그의 목에 붙어오고…….
“그러면 피는 안 먹을 테니까 그냥 대고만 있으면 안 돼?”
“……뭐라고요?”
“그냥 입술만 대고 있으면 안돼……?”
“왜, 왜요.”
이번만은 아카아시도 조금 당황했다. 먹지도 않을 거면서 목에 입술을 대고 있겠다는 건 무엇을 위해서인가? 입맛만 다시려고? 그건 좀 더 그렇지 않아?
“왜긴……. 닿아있으면 좋으니까 그렇지.”
“네? 뭐가요?”
스테이크 냄새만 맡아도 기분이 좋아지는 그런 원리인가? 아카아시는 보쿠토의 행동 원리를 추론하기 위해 맹렬히 머리를 굴렸지만 그 모든 사고를 한 방에 부수는 말이 나오기까지, 보쿠토에게 망설임이라곤 없었다.
“아카아시가.”
“……제가 그렇게 맛있습니까?”
“그것도 그렇지만…….”
보쿠토가 조금 의아한 듯이 혹은 눈치를 보는 듯이 아카아시를 바라보았다. 당연한 일에 대해 질문을 받아 스스로 돌아보는 듯이 위축된 표정이었다.
“그냥 아카아시가 좋은건데.”
“……아 예.”
그 ‘예’를 허락의 뜻으로 받아들인 건지 잠시 뺨을 부풀렸던 보쿠토가 금방 배시시 웃으며 아카아시의 목깃으로 파고들었다. 더운 숨이 목덜미를 스치고 도톰한 살덩이가 금세 닿아왔다.
대고만 있겠다는 건 정말이었던 듯했다. 보쿠토는 아카아시의 목덜미에 뺨과 입술을 부빌 뿐이었다. 한참을 그러고 있더니 뜨겁고 습기찬 것이 살짝 살짝 스치고 지나간다. 순간적으로 등골이 오싹 달아올랐다.
“보쿠토 선배!”
“앗. 그냥 살짝만.”
훌쩍 밀어냈더니 보쿠토는 금방 눈치를 보는 것처럼 눈동자를 굴렸다. 아카아시가 지긋이 노려보자 그의 마음을 풀어주려는 것처럼 배시시 웃는다. 아카아시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
“요즘 아카아시 말야.”
3학년들에게 수건과 드링크를 건네주던 시로후쿠가 말문을 텄다. 아카아시는 후배들의 스트레칭을 도와주고 있었다. 본인도 똑같이 연습을 해서 지쳤을텐데 저런 것에는 소홀한 법이 없다. 보쿠토와 코노하는 음료를 쭉쭉 넘기며 시로후쿠를 바라보았다.
“좀 분위기가…….”
“응?”
“요즘 좀 묘하지 않아?”
코노하가 이해하기 어렵다는 눈치를 주었고 시로후쿠는 고심하는 표정을 짓는다. 그 와중에 보쿠토만이 아카아시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음, 치자면 뭐랄까, 좀 달 같은 느낌?”
“햇님 달님하냐…….”
“아니, 말이 그렇다는 거지!”
시로후쿠가 눈매를 모으며 하는 말에 코노하는 코웃음치며 고개를 흔들었다.
“코트에서는 저게 얼마나 가차없다고.”
상대가 후배든 선배든 제대로 하지 않으면 칼같고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서 코트 위를 지휘한다. 저 에이스라는 보쿠토까지 냉정하게 휘두르는 게 아카아시였다.
“아냐, 맞는 말 같아.”
“엥.”
시로후쿠의 말에 동의를 표한 쪽은 드링크를 쭉 비운 보쿠토였다. 코노하가 눈을 끔벅이며 보쿠토를 돌아보았지만 보쿠토는 여전히 아카아시를 바라보고 있었다.
“달, 맞네.”
“그치?”
시로후쿠가 이것 보라는 양 코노하를 바라본다. 보쿠토는 정말로 시로후쿠의 말이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다. 자신 역시 했던 생각이었다. 아카아시는 달 같았다. 깨닫기 전에는 무의식 중에 그렇게 여기고 있었고 처음으로 아카아시의 목에 입술을 댔던 날 완전히 알아차렸다.
-달은 사람을 살짝 미치게 하는 데가 있지.
보쿠토는 팔을 한 번 쭉 뻗어 스트레칭하고는 두 사람을 내버려두고서 성큼 성큼, 아카아시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후배들을 봐주고 있던 아카아시가 뒤에서 다가오는 기척에 몸을 돌렸다. 보쿠토가 또 목이 마르다며 아카아시의 등에 매달려 칭얼거리고 아카아시가 드링크를 찾아주려고 했다. 보쿠토는 고개를 내젓고, 그 뜻을 알아들은 아카아시가 한숨을 쉬었다.
“안 된다고 했잖아요.”
“그럼 대고 있기만 할게.”
“……하아.”
다른 사람들은 알아차리지 못하는 대화가 조그맣게 오간다. 보쿠토는 끊임없이 아카아시의 목에 팔을 걸었다가, 혹은 그의 소맷자락을 붙들거나, 혹은 후배의 스트레칭을 도와주는 아카아시 곁에서 말을 걸거나 하였고 아카아시는 목에 걸어오는 팔은 내버려두고 소맷단을 붙드는 손은 한 번 잡아주었고 스트레칭을 방해하는 선배는 후배 곁에 나란히 앉혀 같이 스트레칭을 하도록 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귀가하며 부실에 남아 있는 둘을 향해 인사를 한다. 보쿠토가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고 아카아시는 일지를 정리하며 먼저 돌아가는 부원들을 배웅했다. 마침내 마지막 사람이 부실을 나서며 문을 나섰을 때, 보쿠토는 곧장 의자를 잡아 끌었다. 의자의 다리가 바닥에 긁히며 거친 소리를 냈고 그건 아카아시의 바로 옆에서 멈추었다.
선배, 일지 정리해야 해요. 응응, 옆에 가만히 있을게. 보쿠토가 아카아시의 목덜미에 고개를 부빈다. 아카아시는 잠시 몸을 굳혔다가 결국은 그런 그를 내버려둔다. 보쿠토가 입매를 끌어당기며 그 목에 뺨을, 코를, 입술을 대었다.
아카아시는 보쿠토의 달이었다.
'하이큐 > 보쿠아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보쿠아카 | 레모네이드 금지령 (7) | 2016.06.26 |
---|---|
보쿠아카 | 빛에 관한 기억 (2) | 2016.06.15 |
보쿠아카 | 어깨 위로 (2) | 2016.06.11 |
보쿠아카 | 꿈같은 일 (4) | 2016.06.09 |
보쿠아카 | 늦게 피는 수국 (0) | 2016.06.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