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쿠아카 | 여전히 꿈결
보쿠아카 전력 주제 : 담배
언뜻 보면 아카아시 쪽이 이건 해라 저건 하지 마라 할 것 같지만, 사실 아카아시는 그런 쪽으로는 말수가 적은 편이었다. 한두 번 정도는 말을 하지만 그 뿐이다. 오히려 보쿠토가 이건 이렇게 해야 하고, 이러면 안 되고, 안 된다니까, 해야 한다니까, 이런 말을 더 자주 하는 편이었다.
아카아시는 몇 번 얘기한 걸 보쿠토가 제대로 듣지 않는 것 같으면 더는 얘기하는 것 없이 직접 자신이 하곤 했다. 물병에 입 대고 마시지 마세요, 컵 쓰세요, 아카아시가 말했지만 보쿠토는 매번 목이 마르면 잔에 따르는 것까지 기다리지 못하고서 벌컥벌컥 들이키기 일쑤였다. 아카아시는 두어 번 말하고 난 다음에는 더 얘기하는 것 없이 작은 물병 여러 개를 준비해 나눠담아 주었다. 보쿠토는 처음엔 미안해했지만 금방 익숙해졌고 때로는 제가 먼저 마실 걸 나누어두기도 했다. 아카아시가 그런 건 할 수 있으면서 컵에 따라 마시는 건 왜 안 되느냐고 핀잔을 주었던 것이 그에 대한 마지막 언급이었다.
그것은 포기가 아니라 그 나름의 애정이었다. 어느 날은 보쿠토가 몹시도 부끄러워하여, 이렇게 다 받아주면 어찌하느냐 창피함을 견디다 못해 투정부리는 듯한 어조로 말을 했는데 아카아시는 덤덤하게 대꾸했다. 어차피 제가 있잖아요. 아무 문제없다는 말투였다.
그런 면에 있어서는 보쿠토는 아카아시와는 조금 달랐다.
아카아시는 꼭 치약을 가운데에부터 눌러서 짜는 버릇이 있었는데, 보쿠토는 매번 욕실에 양치를 하러 들어갔다가 입에는 칫솔을 물고 손에는 허리가 움푹 들어간 치약을 쥐고 나와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아카아시를 다그치곤 했다. 아카아시, 이거 뒤부터 눌러 짜야 하는 거야! 그러면 아카아시는 깜빡했네요, 그렇게 대답했고 보쿠토는 꼭 다음부턴 끝부터 눌러 짜야 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아카아시는 이틀 정도는 치약을 끄트머리부터 잘 눌러 짜다가 며칠 가지 않아 다시 또 습관대로 허리부터 눌러 짰고 보쿠토는 지치지도 않고 짜증을 내지도 않고, 다시 또 칫솔을 입에 물고서 아카아시 앞에 치약을 흔들며 처음 얘기한다는 것처럼 말하곤 했다. 아카아시, 치약 끝부터 눌러 짜야해! 그러면 아카아시는 또 미안해요, 깜빡했어요, 그렇게 말했다.
어느날은 아카아시가 이렇게 자꾸 같은 말을 하게 해서 미안하다며 피곤하지 않으냐 했지만 보쿠토는 칫솔을 입에 문 채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가? 그가 아카아시를 향하는 문장에는 피곤이나 짜증이 자리할 공간이 없었다. 보드랍고 다정한 것만으로도 자리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물을 병으로 들고 마시는 것, 뜨거운 국 요리를 서둘러 먹다가 매번 혀를 데는 것, 외출하고 돌아와서 겉옷을 의자에 걸어두는 것, 매번 자동차 열쇠를 전에 입었던 바지 주머니에 넣어두는 것, 아카아시는 그런 것은 두어 번 말하다가 모두 저가 해주었다. 마실 건 적당한 크기의 병에 나눠 담아 주었고 국 요리는 한 김 식힌 후에 내어왔다. 보쿠토가 옷을 의자에 걸기 전에 받아서 옷걸이에 걸었고 자동차 열쇠는 보쿠토가 현관에 들어올 때면 내어달라 하여 챙겨두었다.
치약을 허리부터 눌러 짜는 것, 책을 읽고서는 책갈피를 쓰지 않고 책날개로 책갈피를 대신 하는 것, 다 먹지 않고 남긴 과자의 봉투를 열어두는 것, 카페에서 매번 홀더를 잊어 뜨거운 컵을 쥐는 것, 보쿠토는 언제나 그런 것들에 대해 말했다. 아카아시가 말한 걸 들어주지 않아도 실망하거나 짜증내지 않고, 항상. 아카아시, 치약은 끄트머리부터야. 책갈피 사왔으니까 이거 써줘! 아카아시, 과자 눅눅해져버렸잖아~! 다 먹고 닫아둬야 돼. 주문하고 나서 홀더도 챙겨야 해, 홀더!
언제나 그랬다.
*
이별이 의무가 되는 순간이 왔을 때 두 사람은 담담하게 그것을 인정했다. 이것 역시 삶을 걸어 나가는 계단의 하나라고. 우리는 만나서 사랑하게 되기까지, 그리고 사랑하는 것이 모두 꿈결 같았으니 꿈에서 깨어날 차례도 있는 것이라고. 이별에 매몰찬 말은 없었다. 상처였지만,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러면 꿈에서 깨어날 줄로만 알았다.
*
보쿠토는 매번 병째 물을 마시다가, 한 번은 손에서 병이 미끄러져 냉장고 앞 바닥을 온통 물바다로 만들었다. 그러기를 몇 주에 한 번 꼴이었고 때로는 유리병을 깨뜨리기도 했지만 보쿠토는 물을 잔에 따라 마실 생각은 하지 않았다.
식사가 뜨겁게 나와도 서둘러 먹다가 혀를 데기 일쑤였고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함께 밥을 먹는 친구들이 매번 핀잔을 주었지만, 보쿠토는 언제나 요리가 나오면 가장 먼저 숟가락을 들었다.
외출할 때면 외투를 찾기 위해 겉옷이 잔뜩 쌓여 언덕 비슷한 모양새를 하고 있는 의자 등받이를 헤집어야했다. 반절은 구겨져서 입고 나갈 수가 없었고 그나마 최근에 입었던 것을 겨우 걸쳤다. 그래도 보쿠토는 외투를 옷걸이에 걸지는 않았다.
그렇게 현관 앞까지 가면 다시 자동차 열쇠를 찾기 위해 침실로 돌아가야 했다. 전날 입었던 바지가 무엇인지 뒤져야 했고 기억이 나지 않으면 며칠간 입었던 바지를 전부 꺼내놓고 주머니를 뒤졌다. 이러다가 약속에 곧잘 늦곤 했지만 그래도 보쿠토는 매번 주머니에 자동차 열쇠를 넣어두곤 했다.
아카아시는 치약을 끝에서부터 꾹꾹 눌러 짰다. 가끔 몹시 피곤하거나 술을 마신 날이면 허리를 꾹 눌러 짜버리고 다음날 욕실의 컵에 고꾸라지듯 꽂혀있는 치약을 발견하게 되었지만, 그럴때면 다시 아래부터 눌러 제대로 된 모양을 만들어 두었다.
책장 곁에는 조그만 상자에 책갈피 여러 개를 담아두고서, 책을 읽다가 손에 잡히는 대로 쓰곤 했다. 가끔은 책 여기저기에 책갈피를 꽂아 둔 탓에 책갈피가 동 날 때가 있는데 아카아시는 그럴 때는 테이블 위에 책을 엎어두었다.
과자를 한 봉 뜯으면 입천장이 헤져도 굳이 끝까지 전부 먹어 치우거나 아니면 남은 것은 그냥 버렸다. 버리기 여의찮을 상황이면 부득이 밀봉할 것을 찾아 봉해두었다. 하지만 남긴 과자를 다시 먹는 일은 없었고 대부분은 봉해둔 채로 버리게 되었다.
카페에서 음료를 시킬 때면 차가운 음료를 주문할 때도 온음료용 홀더를 챙겨, 음료를 다 마시고 나면 홀더가 축축하게 젖어 너덜너덜해지곤 했다. 그걸 손으로 계속 문질러 마침내 헤지고 나면 아카아시는 플라스틱 컵과 홀더를 함께 버렸다.
그러고 나서,
외출하고 돌아와 옷을 의자 위에 아무렇게나 걸쳐두고 나서, 음료를 다 마시고 난 뒤에 빈 컵을 버리고 나서, 그러고 나서 두 사람은 담배를 피웠다.
*
먼저 담배를 건드려본 사람은 보쿠토였다.
두 사람 모두 학창 시절 내내 운동에 몰두하느라 연기 근처에도 간 적이 없어, 보쿠토는 은퇴를 하고 나서 가장 큰 일탈이라며 큰소리로 웃으면서 담배를 샀다. 빨간색 곽에 흰 줄무늬가 들어간 것이었다. 요즘은 중학생들도 피워본다던데요. 아카아시의 말에 보쿠토는 조금 졌다는 표정을 지었다가 의지를 불태우며 라이터를 켰다. 그 때는 라이터를 켜는 것도 어설펐다. 겨우 피워서 몇 모금 입에 빨아들이는가 했는데 죽을 만큼 기침을 하고 난리가 났다. 보쿠토는 눈에 눈물을 머금고 자신이 피우던 것을 아카아시에게 건네주었다. 아카아시도 이거 해봐! 아카아시는 보쿠토의 등을 두드려주며 그가 내미는, 빨갛게 불타고 있는 담배를 쳐다보았다. 아카아시라고 다르지는 않았다. 기침이 보쿠토보다 조금은 더 점잖기는 했다.
이거 정말로 왜 피우는지 모르겠는데요.
그러게……. 아 진짜 죽는 줄 알았어. 이거 열 몇 개피나 남았는데 어쩌지?
주위에 피우는 분에게 주세요.
있으려나……. 라이터는 어떡해?
놔두면 언젠가 쓸 일이 있겠죠.
아! 우리도 촛불 피우고 그럴까? 로맨틱하게!
하아…….
아 진짜! 내가 말만 하면 왜 한숨 쉬고 그래! 아카아시 미워!
담배는 관두죠.
담배는 피우지 말자!
두 사람은 말했고, 보쿠토는 아카아시가 담배를 빼앗지 않아도 더는 관심두지 않았고 아카아시는 보쿠토가 말하지 않아도 담배에서는 신경을 끊었다.
두 사람은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두 사람은 담배를 피운다.
*
보쿠토는 자동차 열쇠를 찾아 집안의 바지를 전부 뒤집어엎고 나면, 차를 몰아 목적지까지 가는 길에 차창을 내리고서 담배를 피웠다.
아카아시는 책을 한 권 다 읽고 책갈피를 꽂아둘 필요가 없게 되면, 책이 뒷면이 오도록 올려놓고서는 밖으로 나가 담배를 피웠다.
붉은 색 곽에 하얀 줄무늬가 들어간 담배였다.
꿈에서 깨어날 줄 알았지만, 희고 불투명한 담배 연기는 언제까지고 흐릿하게 주위를 떠돌며 꿈도 현실도 아닌 곳에서 길을 잃고 헤매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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