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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네가 나 대신 사과해?”


그건 아마도 가을이었으리라, 아카아시는 찬찬히 기억을 되짚어 보며 생각했다.


*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이마에 이름표를 붙이고 태어나는 게 아닐까. 이 애는 앞으로 사랑받을 사람. 이 애는 사랑을 줄 사람. 이 애는 사랑받지 못할 사람. 이 애는 사랑하지 못할 사람. 


아카아시가 그 생각을 처음 한 것은 고등학교에 들어와 한 학년 위의 선배를 보았을 때였다. 혼자만 체력 게이지가 하나 더 있는 것 같은 사람이었다. 본인이 납득하지 못하는 결과가 나오면 주위를 아랑곳 않고 무너지듯 처졌고 기대 이상의 결과가 나오면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기뻐했다. 단순한 것 같은데도 다루기 까다롭고 제멋대로다. 아무리 실력이 출중하다 해도 저렇게 감정기복이 심하면 함께 지내기 지치고 피곤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그렇지가 않았다. 빠져드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그림으로 그린 듯한 스파이크를 꽂아 넣고서도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삐죽거리는 모습을 볼 때, 목소리조차 변치 않는 목소리로 굉장하다 시큰둥하게 말해준 것만으로 기뻐하며 코트를 가로지를 때, 먹고 싶은 것 앞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모습을 볼 때…….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그의 친구들도 똑같이 짓곤 하는 표정이었는데. 그런 것을 제외하면 금방 시무룩하게 처졌다고 또 놀라울 만큼 신이 났다가 하기를 반복하는 피곤하기만 한 사람이었는데. 


처음에는 목소리가 들리면 돌아보게 되었고 그 다음엔 그가 오기를 기다리게 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언제나 바라보게 되었고 마침내 눈을 마주치면 더는 보고 있을 수가 없게 되기까지는, 계절이 한 번 변하는 시간이면 충분했다.


매미소리가 귀청을 때릴 듯이 울고 습기 찬 공기가 끈끈하게 몸에 달라붙던 한 여름의 어느 날이었다. 한참을 뛰었더니 숨만 쉬어도 구역질이 날 정도라 겨우 체육관 벽에 기대어 숨을 돌리고 있었는데 불쑥 그 선배가 그의 앞에 나타났다. 다들 더위에 나가떨어져 가는데 혼자만 다른 세상 사람인 것처럼 쌩쌩했다. ‘설마 여기서 토스 올려달라는 말을 하지는 않겠지’ 라고 생각하면서도 불안해서 숨을 들이키는데 그가 불쑥 손을 내민다. 손에는 얼린 생수병이 들려있었다. 


-어…….


부에서 매니저들이 챙겨주는 드링크도 아니고 부활동 시작한지도 몇 시간이나 됐는데 어디서 얼린 생수병이, 아카아시가 그렇게 생각하는데 보쿠토는 받아주지 않는 것이 민망한지 재차 그에게 다시 내밀었다. “친구가 학원 가는 길에 들린다고 해서 사달라고 했어.” 얼결에 받았는데 그 선배가 자기 뺨을 툭툭 건드렸다.


-얼굴 빨개, 아카아시. 더위 먹겠다.


천생 남에게 보살핌을 받으면 받았지 누굴 보살펴줄 성격은 아니라고 멋대로 생각했는데 의외의 면이었다. 본인도 자주 하는 행동은 아니었는지 쌩하니 몸을 돌린다. 보쿠토가 그 일로 같은 학년 부원들에게 얼마나 놀림 받았는지는 나중에야 들었다. 


이런 자잘한 관심도 시선도, 아카아시는 사실 익숙했다. 사람들은 기꺼이 그에게 호의어린 도움을 주곤 했다. 더한 것도 많이 받았다. 그 하나 하나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언제나 감사히 생각했지만, 그래도 그 모든 게 그에게 특별한 울림으로 다가온 적은 없었다. 


그런데 고작 여름날의 얼음물 하나로 이렇게 마음이 흔들리고 마는 건 도대체 왜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억울할 지경이었다. 무어 대단한 걸 받았다고 이렇게 되는지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신이 받은 것보다 준 게 훨씬 많았다. 매일같이 보쿠토에게 붙잡혀 토할 때까지 토스를 올려주었고 기분이 들쭉날쭉한 모습을 보일 때에 달래준 것도 그였으며, 며칠 전에 부실 청소를 하던 저 선배가 망가뜨린 캐비닛을 수리한 것도 그였고, 동급생의 머리카락이 교복 단추에 얽혔을 때 끙끙거리다 머리카락을 한 움큼 뽑아버렸을 때에 대신 사과한 것도 그였다.


그런데 고작 얼음물 하나를 받았다고


이렇게 마음이


어떻게 마음이 이럴 수가 있지. 


아카아시는 더운 열기에 물방울이 잔뜩 맺힌 페트병을 이마에 대고서 한숨을 내쉬었다. 어여삐 여길 구석이라고는 없는 사람이었다. 손이 더 가기밖에 더하나. 그런데 왜 좋아하게 되는 건지, 신이 있다면 붙잡아 묻고 싶었다. 저 사람의 어디에 자신이 이렇게 되었느냐고. 이건 불공평하지 않느냐고. 사랑받기 위해 죽을 만큼 애쓰는 사람들도 있는데 왜 그 사람들은 안 되는 걸, 저 사람은 저렇게 쉽게 해내는지 알 수가 없다고. 


하지만 신이 와서 네 마음을 돌려 주겠다고 한다면 고개를 저을 것이었다. 


아카아시는 그게 가장 억울했다. 


*


그의 한 학년 선배인 보쿠토 코타로는 정말로 종잡을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낯을 가리는 것도 같고 사람한테 관심이 없는 것도 같은데, 어느 면에서는 깜짝 놀랄 만큼 거리감 없이 친근하게 굴기도 했고 다른 사람이 했으면 실례라며 질책 들었을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기도 했다. 하지만 누구도 그를 미워하지는 않았다. 악의가 없는 것을 너무나 잘 알 수밖에 없는 얼굴인 것이 한 몫 했을 것이다. 그래도 사과하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보쿠토는 사고를 치고, 그럼 아카아시가 대신 사과하는 것이 일상인 나날이 이어졌다. 


그 날은 2학기가 시작하고 몇 주인가 지났던 날이었다. 음악실에서 수업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보쿠토의 교실이 있다. 보쿠토는 친구들과 웃고 장난치고 있다가 때마침 그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선 와락 달려들었다. 아카아시가 그것을 받아주느라 뒤로 휘청거리며 음악책이 떨어진다. 주워준 건 보쿠토와 같은 반인 사람이었다. 


-아, 얘 또 후배 잡네. 


보쿠토의 반 친구들은 이미 아카아시와도 제법 안면이 있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책을 건네주며 보쿠토 탓에 고생이 많다고 사과의 말을 한다. 아카아시는 예의상으로도 괜찮다는 말이 나오지 않아서 한숨만 꾹 참는데 아카아시의 어깨에 매달린 보쿠토가 불쑥 말했다. 


-네가 왜 대신 사과해?


이해할 수가 없는 듯이 순수한 의문으로 가득 찬 목소리였고 친구는 웃음을 터뜨리며 보쿠토를 툭 쳤다. 야, 네가 민폐를 끼치니까 그렇지! 대화는 부드럽게 흘러갔고 아무도 무안해하지 않았지만 아카아시만은 그 사이에서 알아차릴 수 있었다. 보쿠토는 그에게는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 


거기에 또 마음이 흔들, 흔들. 


아카아시는 돌연 분한 듯이 보쿠토를 교실로 밀쳐내고는 음악 교과서를 챙겨준 다른 선배에게 꾸벅 인사했다. 그 날 오후 내도록 휴대전화는 그에게 연유를 묻는 보쿠토의 메세지로 바빴지만 아카아시는 뚱한 표정으로 응해주지 않았다. 


도대체가 대신 사과해주고 다니는 걸 당연히 여기는 것으로 마음이 또 기울어버릴 것은 무어란 말인가? 그게 무어 대단한 특권이라도 준 것이라고, 그걸로 또 혼자 기뻐하는 건 뭐야? 도리어 번거로운 일이기만 했는데 도대체 자신은 왜?


보쿠토는 오후 부활동 하는 내내 그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그러더니 마지막엔 정말로 자기가 민폐였느냐고 축 처져서 묻는다. 아카아시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자신의 가슴팍을 꾹 눌렀다. 늑골 사이가 저린 것처럼 아팠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있으려니 이제 어디 많이 아프냐고 난리가 난다. 보쿠토의 난리 법석에 선배들까지 몰려와서 아카아시의 상태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서 아카아시는 스르르 허물어졌다. 놀라서 새파랗게 질린 보쿠토가 아카아시를 받치고서는 어쩔 줄을 모르는데 아카아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보쿠토에게 기대어 있기만 했다. 그의 작은 심술이었다. 


근육의 섬유 하나 하나 사이 사이로 작은 싹이 돋는 것처럼 간지럽고 아팠다. 아카아시는 왜 사람들이 사랑을 일러 꽃이 핀다고 말하는지 깨달았다. 자신의 꽃을 피게 한 사람이 누구인지도 알았다. 모르는 척 하고 싶었는데 모를 수가 없었다. 바라보고 있으면 뿌리가 깊어져갔고 자신을 보고 웃어주면 철모르고 잎사귀가 돋았다. 가슴에 붉은 꽃봉우리가 맺혀있는 것 같았다.


그가 고등학교에서 첫 여름을 보내고 가을이 접어들 때의 일이었다. 


*


가을이 지나고 금방 추위가 찾아왔지만, 마음에는 겨울이 올 줄을 몰랐다. 아카아시가 마음을 지키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보쿠토가 스스로 특별하게 여기는 사람에게 온 마음을 다하는 것은 감출 수도 숨길 수도 없었다.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사람은 누구나 알 수가 있었다. 목소리에서부터 색깔이 바뀌고 떠나면 아쉬워했으며 오는 것을 보면 빛이 넘쳐흐르는 것처럼 활짝 웃었다. 보쿠토에게 가장 특별한 건 아카아시 자신이었다. 


연인이 아니어도 좋았다. 그에게 가장 특별하면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그 이상을 바라느라 도중에 헤어지는 것보다는 끝까지 그에게 가장 특별한 사람인 것으로 충분했다. 그렇게 생각하여서일까, 마음은 시들 줄도 꺾일 줄도 몰랐다.


생일이 언제냐기에 12월이라고 했다. 며칠이냐고 해서 오늘이라고 했다. 보쿠토는 소스라치게 놀라더니 하루 종일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는 눈치였다. 아직 그는 주전도 아니었던지라, 함께 시합에 나간 적도 없는 동아리 후배의 생일에 그렇게 열을 올릴 필요는 없다고 만류하고 싶었는데 그 모습이 싫지 않아서 내버려두었다. 그랬더니 부활동이 끝나고서 무작정 그를 끌고 가 저녁은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마치고 나서는 누군가에게 물어봐 알아냈다는 과자점에 들러 산더미만큼 쿠키와 과자를 사다 안겨주고 그 다음에는 초조한 듯이 길거리를 배회하다가 그를 데리고서 스포츠 용품점으로 향했다. 본인이 매번 서포터 하는 것을 생각해 서포터라도 사줄 생각이었던 것 같았다. 저 서포터 안 하는데요, 그 말에 보쿠토는 세상이 무너진 것 같은 표정으로 그를 돌아보았었다. 


그게 재작년이었다. 작년 겨울에는 만반의 준비를 했다는 듯이 뿌듯한 얼굴로  그의 생일이 되는 자정에 그의 집 앞에 나타났다. 미리 사왔다는 케이크에는 초가 불 붙어 있었는데 두어개는 겨울바람을 맞고 꺼진 뒤였다. 이거 몇 개는 꺼졌네요, 아카아시가 그렇게 말했더니 보쿠토는 또 화들짝 놀라서 덥석 케이크를 그의 손에 쥐어주고는 꺼진 초에 다시 불을 붙이고, 케이크를 다시 자기가 쥐고서 그제야 또 활짝 웃었다. 선물은 배구화였다. 작년에 섣불리 서포터를 사주려고 했던 실패를 만회하려는 듯이. 


그리고 또 다시, 세 번째 겨울이 오고 있었다. 


밤하늘은 점점 더 청명한 남빛으로 물들고 별빛이 선명하게 반짝였다. 호흡하면 공기 중에 시린 안개가 섞였다가 희뿌옇게 사라진다. 가슴 속에 꽃을 피운 지도 3년이 다 되어간다는 뜻이기도 했다.


작년 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기 전 보쿠토가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조금 허전하겠다고만 생각했는데 막상 졸업식을 하느라 블레이저의 단추는 다 뜯기고 품에는 모두에게서 받은 꽃다발을 한아름 안고 있는 보쿠토를 보고 있으려니 까닭 모를 억울함이 솟구치는 것이었다. 혼자 졸업한다고 머리도 표정도 엉망이 되어서는 와하하 큰 소리로 웃고 있는 것이 그가 알고 있던 보쿠토와 똑같아서 더욱 그랬다. 괜히 화가 나서 축하한다는 말도 하지 못하고 먼저 등을 돌렸다. 이런다고 해도 그는 모를 거라 생각하니 더 속이 엉망이 되어갈 때, 보쿠토가 달려와서 그를 붙잡았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에 몰아쉬는 숨이 급하게 달려왔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보쿠토는 몹시 섭섭한 표정을 하고서 품에 있는 꽃다발들을 꾹꾹 움켜쥐었다. 그를 보고 어디갔었느냐고 묻는다. 


-3학년들 졸업식이잖아요, 2학년은 할 것도 없고…….


말을 하면서도 스스로의 졸렬함에 입술을 깨물어야 했다. 문장의 전부가 오로지 한 가지 목적만을 위해 태어난 것이다. 그를 상처주고 싶다는 목적 하나만을 위하여. 


혼자 좋아하는 것뿐인데, 그가 고백조차 하지 않은 자신의 마음에 응해주어야 할 까닭도 없는데, 그런데 혼자서 화가 났고 혼자서 섭섭하고 혼자서 속이 엉망이 되어서 당신의 졸업식 같은 건 아무짝에 상관없다는 투로 뱉고 말았다. 이렇게 말한들 그에겐 아무 의미도 없을 텐데. 상처주고 싶다는 자신의 마음은 죄를 짊어지지도 못할 텐데. 그는 자신의 말에도 상처받지 않을 것이고 자신의 그런 목적은 존재할 수 있는 조건이 결핍되어 그 문장은 태어날 때부터 미수에 그칠 수밖에 없었으므로. 


그마저도 화가 나서 사람들이 찾을 테니 가보라고 말을 하려고 했는데 그만 아카아시는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보쿠토의 눈가가 빨갰다. 마치 어린 애가 눈물을 꾹 참고 있는 것처럼 그랬다. 그가 무언가 말을 하려다가 후두둑 눈물을 떨어뜨린다. 마음을 참아본 적이 없는 사람이니 어쩌면 당연했다.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면서도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또 마음이, 마음이.


-아, 이, 이게 아닌데. 아, 왜 이러지, 아~! 진짜!


손으로 부채질도 하고 발도 구르면서 눈물을 그치려고 하는 보쿠토였지만 모든 건 아무짝에 소용없었고 눈물만 더 격하게 흐르도록 할 뿐이었다. 아카아시는 한참이나 말을 잃은 채 그의 눈물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아, 죄를 지었다…….


보쿠토는 자신의 감정도 모르고서 눈물을 참으려고 애쓰기만 했다. 한참을 그러고 있기에 결국 아카아시가 나서서 그 눈에 눈물을 닦아주었다. 보쿠토는 그 손을, 그 손의 주인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어린애마냥 소리 내 울음을 터뜨렸다. 왜 한 해 늦게 태어났느냐고 그를 비난하면서. 


유리 조각이 가슴에 박히는 것 같았다. 쇠기둥으로 찍히는 것도 같았다. 아카아시는 그것들을 천천히 조립해 가슴 위에 유리 온실을 지었다. 무너지지 않도록 보쿠토의 눈물로 덧칠한 투명하고 아름다운 유리온실이었다.


이제 보쿠토가 곁에 없어도 그의 가슴에 핀 붉은 꽃은 시들지 않는다. 


*


“선배, 연습은요.”

“하고 왔어, 하고 왔어~!”


보쿠토는 졸업을 하고서도 일주일에 한 두 번은 아카아시를 만나러 왔다. 한 학기에 한 번쯤은 학교로 직접 찾아오기도 했다. 그러지 않아도 마음이 정리될 일은 없을 것인데 꼬박꼬박 연락을 하고 찾아오니 더욱 시들 줄을 몰랐다. 


“아카아시! 생일 축하 합니다!” 

“네, 네에.”


오늘도 부활동을 끝내고 나오니 교문 앞에서 보쿠토가 기다리고 있었다. 체육관까지 찾아와도 됐을텐데 왜 추운 날 밖에서 기다렸느냐 하는 말에 보쿠토는 어물쩍 대답하지 않고서 대뜸 생일을 축하한다고 한다. 아카아시는 덤덤하게 수긍했다.


“엣! 안 놀라!?”

“……제 생일 잊으실 거였습니까?”

“무, 물론 아니지! 당연히 아니지!”


화들짝 놀라서는 부정하는 모습도 내내 봐온 그대로다. 아카아시는 작게 웃음을 삼켰다. 사실은 몇 주인가 전에, 아마도 친구인 쿠로오에게 보내는 것이었을 메세지를 봤다. ‘아카아시 생일 선물 뭐 샀어?’ 라는 질문이었다. 실수로 보낸 것인지 텍스트가 연이어 올라오며 혹시 방금 전에 보낸 메세지를 보았느냐 다급하게 묻는다. 아카아시는 그 쪽에서 삭제한다고 해서 이쪽에서도 메세지가 지워지는 것은 아니라고 말을 해줄까 말까 고민하다가 ‘무슨 메세지 보내셨는데요?’라고 답장해 보쿠토를 안심시켜주었더랬다. 


아카아시는 자연스레 걸음을 맞추며 옆을 흘끗 바라보았다. 보쿠토는 추위에 노출된 탓인지 발갛게 달아오른 뺨으로 정면을 보며 걷고 있었다. 같은 학교에 있을 때에는 마냥 손이 많이 가는 사람이기만 했는데 대학에 가서 그런 것인지 떨어져있는 시간 탓인지 어른스러워진 것도 같았다. 눈가의 선이 깊어져있다. 자신은 모르는 시간이라고 생각하니 입 끝에 쓴맛이 감돌았다. 


“오늘 즐거웠어?”

“네? 네, 뭐…….”


반에서도 부에서도 요란하게 축하하고 선물들을 주었다. 단 것도 잔뜩 먹었다. 하루 종일 축하 인사를 듣고 돌아다녀, 조금 피곤하긴 했지만 보쿠토의 말대로 즐거웠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무슨 말을 더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던 아카아시는 슬그머니 입을 다물었다. 보아하니 정말로 그가 즐거웠는지 어땠는지 궁금해서 물어본 것은 아닌 듯했다. 교문 앞에서 보았을 때는 평소와 다를 바 없어 보였는데 한 걸음 한 걸음 지날 때마다 긴장이 도를 더해가는 것이 눈에 보였다. 


“보쿠토 선배?”

“어, 아, 어! 그……새, 생일 축하해!”

“아까 말씀하셨잖아요. ……저녁은 드셨어요? 안 드셨으면 저녁 먹으러 가죠.”


보쿠토가 아카아시를 만나러 왔던 지난 1년 동안 보쿠토가 저녁을 먹고 온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아카아시는 굳이 그렇게 얘기했다. 떠듬떠듬 저녁을 먹으러 가자고 말을 하려던 보쿠토가 단숨에 입을 틀어막고는 고개를 젓는다. 


“보쿠토 선배?”

“그, 어, 밥 말고……. 나 어디 갈 데 있는데 같이 가자!”


아카아시는 웃음을 꾹 참았다. 자신이 가장 특별하게 생각하는 후배의 생일을 위해서 무언가 준비를 하는 모양이었다. 저 배가 고픈데요, 이런 말을 하면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를 것이다. 그런 장난을 쳐볼까 하는 마음이 살짝 들었는데 그마저도 녹아내려서 그만두었다.


같은 색의 마음이 아니어도 좋았다. 보쿠토가 다른 누군가를 자신 같은 마음으로 바라보게 된다면 멀쩡할 것이라 장담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이것이면 괜찮은 것 같았다. 


그렇게 보쿠토가 그를 끌고 간 곳은 어느 백화점이었다. 10층인가 12층인가 높이 올린 곳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설마 백화점에서 선물을 사주려고 그러나, 아카아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보쿠토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보쿠토는 자주 와본 것인지 헤매는 것 없이 엘리베이터를 찾아간다. 아카아시는 묻지 않고서 잠자코 그의 곁에 서주었다. 


백화점의 안쪽 깊숙한 곳에 위치한 승강기여서인지 사람이 많지는 않았다. 문이 열리고 탔던 사람들이 내리고 나서 승강기에 오르는 건 아카아시와 보쿠토 뿐이었다. 아카아시는 보쿠토가 알아서 목적한 위치를 누르는 동안 승강기의 유리벽 바깥을 내려다보았다. 백화점의 화단들 위로 부드러운 색의 전구가 장식되어 있고 사람들이 바삐 오간다. 학교를 나설 때만 해도 해가 저물어가고 있었는데 이젠 완전히 새카만 밤이었다. 승강기가 올라가면서 바닥이 멀어지고 하늘이 가까워지며 속이 살짝 울렁거렸다. 아카아시는 바깥에서 눈을 떼고 안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또 웃음을 꾹 참았다. 보쿠토가 제 손을 꽉 붙들고서는, 연신 긴장이 역력한 얼굴로 승강기의 층수가 올라가는 것만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좀처럼 멈추지 않는다 싶었더니 옥상까지 올라가는 것이었던 듯했다. 바깥으로 나오자 서늘한 겨울 초입의 공기가 뺨을 스친다. 그들 앞에는 아주 커다란 관람차가 천천히 굴러가고 있었다. 보쿠토가 아카아시의 손목을 덥석 움켜쥐고는 앞장선다. 매표소가 따로 있는데 그 곳을 들르지도 않고서 품에서 티켓 두장을 꺼내는 보쿠토였다. 미리 준비한 것 같았다. 


옥상에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 두 사람은 기다리지 않고 곧장 관람차에 오를 수 있었다. 아카아시는 관람차 안에 자리를 잡고 나서야 짧은 숨을 토해냈다.


“보쿠토 선배한테 이렇게 낭만적인 면이 있을 줄은…….”


관람차의 유리창에 손을 대고서 작게 말해보는데 대답이 없다. 아카아시는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눈만 깜박거렸다. 보쿠토가 자신의 손을 맞잡고서는, 긴장이 역력한 표정으로 아카아시의 자리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눈이 마주하는 것은 아닌 걸 보니 무릎이나 발을 보고 있는 것 같다.


“보쿠토 선배……?”


관람차는 천천히 올라가며 점점 더 하늘과 가까워져간다. 아카아시가 이젠 조금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아카아시…….”


보쿠토가 고개를 들고 겨우 그와 눈을 마주했다. 아카아시는 고개를 끄덕여 듣고 있다는 뜻을 표출해주었다. 보쿠토의 얼굴이 긴장인지 아니면 다른 까닭인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쯤 되면 몸이 안 좋은 게 아닌가 싶은데 관람차 안이어서 도중에 내릴 수도 없었다.


“아카아시 그……내가.”

“네. 선배 무슨 일 있어요? 설마 누구 보증 섰어요?”

“……아니야……그거 아니야…….”


보쿠토가 그 와중에도 고개를 젓는다. 아카아시는 그럼 됐다며 무슨 일인지 말해보라고 보쿠토를 도닥여주었다. 


“네, 그럼 무슨 일인데요.”

“그게 내가……. 내가…….”

“네.”


이제 보쿠토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 그러다가 보쿠토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의 손바닥에 반도 차지 않는 조그만 상자였다. 비슷한 것을 어디서 봤던 것도, 아카아시가 그렇게 생각했을 때 보쿠토가 그만 상자를 놓치고 만다. 바닥에 떨어진 상자가 배를 보이며 반으로 열렸다. 먼저 주은 사람은 아카아시였다.


“선배, 조심하…….”


아카아시는 그만 열린 상자의 내용물을 보고서 입을 다물었다. 보쿠토는 이제 목까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아카아시가 아무 말도 못하고 보쿠토를 돌아보았다. 보쿠토는 이번만은 눈을 피하지 않고 그를 마주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외쳤다.


“조, 좋아해! 아카아시 좋아해!”


유리 온실이 산산이 부서지는 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온 것 같았다. 


*


“어…….”

“……아, 아카아시는 싫어……?”

“아니, 그게 아니라. 좀 당황해서……. 선배 뭐라고 하셨죠, 방금?”

“아 좋아한다고!” 


아카아시는 반지를 내려다보며 한참을 생각했다. 좋아한다고? 보쿠토 선배가 나를? 내 생일에 나에게 고백? 


지나치게 꿈같은 일이라 오히려 침착할 수 있다. 관람차가 꼭대기에 다다랐을 때 아카아시는 차분히 생각했다. 이 사람이 착각했나? 너무 좋아하는 후배라서 아끼는 마음을 착각했을까? 가능성이 높았다. 기뻐한 후에 진실을 알고서 실망하고 싶지 않았다. 낙하할 거라면 처음부터 오르지 않고 싶다. 


“선배…….”

“……으, 으응.”

“저한테 키스할 수 있어요?”


그건 ‘정말로 저를 사랑한다는 뜻이 맞나요?’라는 뜻이었다. 그렇게 사랑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면, 또 후배를 아끼는 마음 위에 사랑이라는 단어를 덧씌워 그렇다고 해버릴까봐 돌려 물었다. 이런 말을 들으면 놀라서 물러설 거라고 생각했다. 그랬는데.


“해…….”

“네?”

“해도 돼!?”


반짝반짝, 겨울 밤의 빛은 관람차의 탁한 유리창을 통과해 흐릿한 흔적만 남을 뿐인데 저 사람의 눈은 어쩌면 저렇게 빛나는지 알 수가 없는 노릇이다. 보쿠토는 벌떡 일어났다가 관람차가 흔들리자 놀라서 주춤하고는 아카아시 앞에 무릎 꿇고 선다. 바닥이라 지저분하다는 말로 만류할 틈도 없이 보쿠토가 아카아시의 교복 깃을 끌어당겨 그대로 입맞춤했다. 길고 깊은, 참아온 모든 것들이 담긴 입맞춤이었다. 


“좋아해…….”

“…….”

“좋아해. 아카아시, 좋아해. 좋아해…….”

“아, 알았어요. 알겠으니까…….”

“아카아시는? 응? 아카아시는?”


보쿠토가 이제 일어났으면 좋겠고, 잡고 있는 옷깃도 놓아주었으면 좋겠고, 지금 이렇게 가까운 거리도 조금은 멀어졌으면 좋겠는데 영원히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함께 떠올랐다. 


아카아시는 천천히 눈을 깜박이며 보쿠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늑골 사이 사이가 저린 것처럼 아팠다. 숨을 쉬기가 버거웠다. 꽃이 피어난다. 한 송이, 두 송이, 세 송이, 열 송이, 수십송이, 수백송이, 수천송이가 동시에 피어난다. 아카아시는 보쿠토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그만 눈을 감았다. 


그에게 가장 특별한 후배인 것으로 만족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영원히 무너지지 않을 유리 온실 속에 꽃을 피워둘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에게 다른 누군가가 생겨도, 그래서 그 사람에게 사랑을 속삭인다고 해도, 그에게 특별한 후배는 자신 단 하나뿐이니까 그것으로 괜찮다고. 온실 속에 시들지 않을 단 한 송이 꽃으로 괜찮을 거라고. 


“……좋아했어요. 쭉 좋아했습니다.”

“지금은?! 지금은? 지금은 아니야?”


초조하게 대답을 재촉하는 그 모습마저 좋아서 아카아시는 보쿠토를 끌어당겨 먼저 입맞춤했다. 아마도 사랑하는 것 같아요. 입 속에서 속삭인다. 그 말을 듣고서 보쿠토의 얼굴이 화악 붉어졌다. 고백을 한 뒤에 먼저 입을 맞출 때까지는 아카아시가 만류할 여지도 없었건만 지금은 천진난만한 아이 같다. 반지를 끼워주려는 손이 떨리고도 있었다. 약지에 반지를 끼워주고는 한참을, 넋을 놓은 듯이 그의 손을 만지작거린다. 그건 관람차가 처음 위치로 돌아올 때까지 계속되었다. 


보쿠토는 홀린 듯이 아카아시의 손을 잡고 내려섰다가 백화점 옥상의 찬바람을 맞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아!”

“왜, 왜 그래요.”

“이, 이게 아니었는데.”

“……네?”

“아, 관람차에서 야경 보여주려고 했는데! 제일 높이 올라갔을 때 야경 보여주려고 했는데……. 야경 보여주면서 멋있게 고백하려고 했는데…….”

“…….”

“너무 긴장해서 깜빡 했어……. 아카아시, 다시 탈래?”

“……됐습니다.”


아카아시가 거절했더니 보쿠토는 또 냉큼 고개를 끄덕이곤 그의 손을 잡고 앞장섰다. 배고프니 어쩌니 큰 목소리로 떠드는 게 평소와 다를 바 없어서, 잡힌 손에 땀이 흥건한 것을 몰랐으면 그가 아직도 긴장하고 있는 것을 알아채지 못할 지경이었다.


“밥부터 먹고 뭘 하던가 하지 그랬어요.”

“아, 그게……. 너무 긴장해서 토할까봐…….”

“…….”

“근데 지금은 먹으면 체할 것 같다.”

“왜요.”

“너무 좋아서…….”


꽃이 지치지도 않고 피어난다. 아카아시는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가슴팍을 꾹꾹 내리눌렀다. 보쿠토가 또 놀라서는 어디 아프냐고 묻는다. 내려가는 승강기에서도 올라올 때처럼 단 둘뿐이었다. 아카아시는 자신의 가슴팍에서 손을 떼고 보쿠토의 손을 붙잡은 채 짧게 입맞춤했다. 보쿠토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서 얼어붙는다. 


“너무 좋아서요.”


가슴에서 피어난 이 꽃을 모두 당신에게 줄 수 있어서 생에 가장 기쁜 생일이라고 말하고 싶은데 입이 떨어지지 않아서 아카아시는 그저 다시 한 번 짧게 입맞춤했다. 얼었다 깨어나는 보쿠토의 눈가가 또 빨갰다. 눈물을 참는 것처럼 빨갰다. 


“왜 울어요…….”

“나, 나도 몰라! 아! 진짜! 이거, 이게 아닌데!”


보쿠토는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면서 손으로 부채질을 하기도 하고 발을 구르기도 했다. 아카아시가 그의 졸업식 날 매서웁게 말미를 떼었던 그 때처럼. 


가슴 위에 세웠던 조그만 유리 온실이 모두 부서지고, 세상 전부가 그의 꽃을 피우는 유리온실이 되어간다. 아카아시는 보쿠토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보쿠토가 아카아시의 양손을 붙잡아 자신의 이마에 대고서 흡사 기도하는 듯이 중얼거렸다. 문장은 잘 들리지 않았다. 다만 고개를 든 그의 눈이 빛으로 가득 차 있어서, 그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어떤 모양새인지 너무나 선연히 보여서, 보쿠토가 사랑을 말한 것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