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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ar dearest mine











“아~카아시이이이!”


아카아시는 보쿠토가 자신의 집 문을 전자 도어락으로 바꿔주었을 때 그가 이런 것까지 신경써줄 만큼 어른이 되었다며 기특하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한 감정을 느꼈지만, 이젠 알 것 같았다. 그건 보쿠토가 아카아시를 챙겨준 것이 아니라 아카아시가 보쿠토로부터 전부 빼앗아온 그의 집 열쇠를 대신할 수단이었던 게 분명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틈만 나면 멋대로 비밀번호를 알아내 쳐들어올 리가 없었다. 


“보쿠토 씨. 도대체 비밀번호는 또 어떻게……보쿠토 씨!”


모처럼 주말 오전을 만끽하고 있던 아카아시는 보던 책을 내려놓고 일어서며 들이닥친 보쿠토를 향해 꾸중하려는 말을 하려고 했지만 그게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신발을 거의 집어던지듯이 벗어 내팽개친 보쿠토가 그를 와락 껴안았던 것이다. 


그보다 훌쩍 커진지가 언제인데 이런 것은 아직도 여전히 어린애 같았다. 아카아시가 한숨을 쉬어도 모르는 척 하던 보쿠토가 겨우 아카아시를 풀어주고는 울먹거리는 눈동자로 종이 한 장을 그의 앞에 들이밀었다.


“이거 봐!”

“뭔가요…….”

“내 시간표! 봐봐!”


이제 보쿠토는 곧 있으면 대학에 들어간다. 얼마 전이 수강신청이었는지 끙끙 앓는 듯 하더니 그 결과물을 가져온 모양이었다.


“주말은 반드시 놀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엿보입니다만…….”

“아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경영 수학! 이거 뭐냐구~!”


보쿠토는 아카아시 앞에서 한참이나 서러움을 토로하고는 비척비척 자연스럽게 아카아시의 침실로 들어간다. 아카아시는 한숨을 내쉬었다. 제 집인 것 마냥 아카아시의 침대에 몸을 뻗은 보쿠토가 베개에 뺨을 부비고 있었다.


“보쿠토 씨.”

“경상대 가면 수학 계속 해야 된다고 아무도 말 안 해줬어~!”

“제가 말씀 드렸잖아요. 일어나세요.”

“싫어, 누워있을 거야.”


이젠 대학에까지 들어갔는데도 어린애 같다. 아카아시가 부러 큰 동작을 꾸며내 한숨을 푹 내쉬자 보쿠토가 그를 향해 팔을 쭉 뻗었다. 


“그러게 왜 굳이 경영학과를 간다고 그러, 보쿠토 씨!”


무어라 타박을 하려던 아카아시는 보쿠토를 일으켜주려고 붙잡은 팔이 역으로 휙 이끌려 차례대로 천장, 천장에 설치한 조명, 그리고 바로 숨이 섞일 거리의 보쿠토 얼굴까지 보고서 엄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머리를 받치고 있는 손의 주인은 보쿠토였고 자신의 위에 올라탄 것도 보쿠토였다. 


“뽀뽀해도 돼?”

“안 돼요.”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된다고 했잖아…….”

“제가 분명히 ‘스스로를 책임질 수 있으면’ 이라고도 했을 텐데요.”

“차가워, 아카아시 차가워…….”


조그만 짐승이 상처받은 것처럼 시무룩한 목소리를 내며 그의 목에 뺨을 부빈다. 슬깃슬깃 입술이 스치는 것을 알았지만 아카아시는 그것까지 혼을 내지는 못했다. 


그 때였다. 거실에 놓아 둔 아카아시의 휴대전화에서 벨이 울린다. 보쿠토는 벨소리를 듣고도 비켜주지 않았고 결국 아카아시가 짧은 한숨과 함께 살짝 몸을 들어 보쿠토의 입술을 콱 깨물었다. 아야야, 요란한 신음이 나오고 그 틈을 타 보쿠토를 밀쳐낸 아카아시가 서둘러 뛰어나가 전화를 받았다. 


“아, 이사님. 받았습니다. 네. 그 건은…….”


아카아시가 어깨와 뺨 사이에 휴대전화를 끼고서는 식탁에 올려놓은 노트를 펼쳐보며 무어라 상대와 대화를 나눈다. 아마 처음에 이사라고 했으니 저 회사 이사겠지, 보쿠토는 아카아시의 침실 문틀에 비딱하니 기대어 서서 팔짱을 끼곤 생각했다. 


아카아시가 그의 집을 나가버린 건 보쿠토가 고등학교 때의 일이다. 어렸을 때부터 줄곧 곁에 있어주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듯, 혹은 도망치듯 이곳으로 와버렸다. 아카아시의 돌아가신 부모님이 남겨주신 집이었다. 아카아시가 없어지면 그 곳이 커다란 구멍처럼 휑할 줄 알았는데 들고 난 줄도 모르게 하염없이 단정하기만 하여, 보쿠토는 그 때 알았다. 아카아시는 항상 어디론가 가버릴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짐을 늘리지 않고, 단정히 정리해두고, 그래서  언제라도 일어나 가버릴 수 있게. 


그래서 아카아시가 그대로 가버리게 내버려두었냐 하면 물론 아니었다.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당장 쳐들어오듯 찾아왔다. 어차피 아카아시에게 갈 곳은 이 곳 뿐이었다. 언제나 그에게는 무르고 다정하여 그가 붙잡으면 붙잡힐 것을, 그래서 그가 없는 사이에 가버린 걸 알았다. 자신을 보고 얼어붙어있는 아카아시에게 말했다. 좋아한다고. 싫어하는 게 아니라면 가지 말라고. 그러면 결코 싫다는 말을 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새파랗게 질려서는 얼굴도 마주하지 못하고서 겨우 쥐어짜듯 싫다고 말을 하는데, 그걸 어떻게 이길 수 있겠는가……. 보쿠토가 물러서주었던 것은 딱 그 한 번이었다. 


화해 아닌 화해를 한 것은 그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이다. 죽을힘을 다해 봄고에서 우승하고 그 트로피를 가지고 다시 이 집으로 쳐들어왔다. 이전에 그랬듯이 또다시 붙잡아 몰아세웠다. 싫다고, 가라고, 해 보라고. 그러면 가겠다고. 하지만 정말로 그런 말을 하면 죽어버릴 거라고, 그런 눈을 하고서. 


아카아시는 다시는 그런 말을 하지 못했다. 


“네, 그래서 그 쪽 이슈가 해결되면……. 네. 아, 오늘 저녁은…….”


보쿠토는 기가 죽어 시무룩한 표정으로 문틀에 머리를 기댔다. 


아카아시가 대학원까지 졸업하고서 취직을 해버린 건 보쿠토가 고등학생일 적의 일이다. 당연히 자신의 부친 아래로 들어가 일 해줄 거라고 생각했던 보쿠토도, 보쿠토의 부친 류이치로도 그 때 얼마나 실망했는지 모른다. 아카아시 본인은 더 이상 폐를 끼칠 수는 없다고 생각한 모양이었지만.


“……오늘 저녁은 조금 힘들 것 같고 내일 저녁은 안 되겠습니까? 네. 네……. 아닙니다, 그런 거. 네.”


웃음기 섞인 곤란한 목소리가 몇 마디 안부를 전하고는 끊는다. 보쿠토는 휘청거리듯이 걸어가 뒤에서 아카아시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기가 죽은 만큼 고개도 숙여 아카아시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지금은 그래도 많이 나아졌다. 그가 고등학교를 막 졸업하기 직전의 아카아시는 한 팔에 감길 만큼 말라붙어 있었다. 그래놓고서는 잘도 싫다고, 가라고…….


“오늘 저녁에 어디 가……?”

“……가긴 어딜 갑니까.”

“아?”


보쿠토가 고개를 반짝 든다. 아카아시는 자신의 허리를 감고 있는, 아직 소년티가 남아있는 보쿠토의 손을 떼어내고는 그 이마를 찰싹 때렸다. 보쿠토는 여전히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었다.


“어, 아아? 아카아시?”

“장이나 봐야겠어요. 집에는 먹을 게 없으니까…….”

“나, 나도 가?”

“오기 싫으면 집에 있던가요.”

“갈래! 갈래갈래!”


아카아시는 또 세상을 다 부술 것처럼 자신의 곁으로 다가오는 태양 같은 얼굴을 보며 웃음을 꾹 눌러 삼켰다. 


*


아카아시가 찬을 담을 그릇을 꺼내는 동안 보쿠토는 긴 요리용 나무젓가락을 손에 쥐고서 더없이 신중한 표정으로 불판 위의 고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카아시가 그릇에 밥을 퍼 담는 사이에 보쿠토도 레인지의 불을 내리고 접시에 고기요리를 담았다. 직접 만든 요리 몇 가지만 올린 상차림은 간소했다.


“잘 먹겠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함께 요리를 했으니 서로에게 인사를 하고서 수저를 집어 든다. 이런 것보다야 저택의 주방장이 해주는 것이나 바깥에서 사먹는 것이 더 맛이 좋을 텐데도 보쿠토는 아카아시와 함께 요리를 해 식사할 기회가 있으면 놓치는 법이 없었다. 아카아시가 처음 밥을 해주었을 땐 보쿠토가 너무 들떠하며 먹다가 체한 바람에 하루를 꼬박 고생해야했던 적도 있었다.


“그런데 보쿠토 씨, 경영 전공을 생각하는 줄은 몰랐는데요.”

“웅?”


뺨이 터져라 밥을 와구와구 먹던 보쿠토가 고개를 든다. 아카아시는 보쿠토의 밥그릇 곁으로 국그릇을 붙여주었다. 이런 면만 보면 아주 어렸을 때부터 봐온 모습 그대로인데 이따금씩 놀랄 만큼 어른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 나도 생각은 안 했는데…….”

“그런데 갑자기 왜요.”


전공 문제로 갈등을 하고 있었다면 얘기 한 마디는 할 줄 알았는데 아무 소식이 없다가 갑자기 경영학과로 진학했다고 해서 아카아시도 깜짝 놀랐더랬다. 보쿠토는 먹던 것을 꿀꺽 삼키고는 활짝 웃었다.


“아카아시 빼오게.”

“……네?”

“내가 아무리 회사 그만두라고 말해도 아카아시 안 들어주니까.”

“그게 왜 그쪽으로…….”

“그래서 내가 우리 아버지 회사 들어가서, 그 다음에 아카아시 빼내서, 우리 회사 데려오게. 그 편이 제일 낫겠더라고.”


보쿠토가 천진난만한 목소리로 말한다. 아카아시가 바싹 마른 입술만 다시는 동안에 보쿠토의 말은 계속되었다.


“뭘 해야 제일 승진 빠르냐고 물어보니까 경영 전공이래서 여기 왔지. 아, 수학 공부해야 할 줄은 몰랐지만!”

“보쿠토 씨, 잠시. 잠깐만요. 그런 이유로 전공을 결정해서…….”

“그럼 뭐로 전공을 결정하는데?”


보쿠토가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로 아카아시를 바라본다. 이럴 때였다. 아카아시는 어쩔 줄 모르는 한숨을 삼켜냈다. 이럴 때, 깜짝 놀랄 만큼 전혀 모르는 사람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에게 져주지 않는 보쿠토의 모습을 볼 때.


“제일 하고 싶은 걸로 하면 되는 거 아니야?”

“그러니까 그런 경우엔 보쿠토 씨는 배…….”

“난 아카아시랑 있고 싶어. 그게 제일 하고 싶은 거야.”


아카아시는 쥐고 있던 젓가락을 떨어뜨릴 것 같아서 서둘러 내려놓았다. 보쿠토는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학생이라곤 볼 수 없는 표정으로 아카아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계속 졸랐잖아. 우리 아버지 회사로 오라고. 싫댔잖아, 그건. 일 그만두고 나랑 있자고도 했는데 그것도 싫댔잖아.”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니까 그렇죠!”

“그러니까 내가 아카아시 옆에 있겠다는 거야.”

“보쿠토 씨!”


아카아시가 다그치듯 언성을 높였지만, 보쿠토는 움츠러드는 척을 할 뿐이었다. 


“왜? 뭐 문제 있어?”

“문제 있냐니, 당연히…….”

“내 인생 내 맘대로 하는데 아카아시가 무슨 상관이야?”

“……보쿠토 씨.”

“흥. 회사 옮기라고 해도 안 된다고만 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아카아시가 흔들리는 목소리로 부른다. 보쿠토는 고개를 휙 돌리고는 웅얼거리는 투로 투덜거렸다. 받아주기 어려워하는 아카아시의 마음을 전혀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아카아시가 어떤 식으로 생각하는지도 알고 있었다. 보쿠토 그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돌봐주었던 것도 단지 자신의 부친인 류이치로에 대한 은혜를 갚고자 하는 마음뿐이었다는 것도, 그러고서도 줄곧 빚을 지는 마음으로 지내왔다는 것도, 굳이 류이치로의 회사와 연이 없는 곳으로 정하여 입사한 것도 더는 폐를 끼치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였다는 것도, 그리하여 이제 와서 보쿠토의 마음마저 그에게는 또 다른 빚이라는 것도. 


보쿠토는 모두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카아시의 뜻대로 물러줄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건 한 번 해 보았다. 아카아시의 거짓말에 속아주었다. 넘어가주었다. 싫으니 이만 돌아가라는 말에, 새파랗게 질려서는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간신히 내뱉은 그 말에 뜻대로 해주었다. 인생에 한 번이면 족한 경험이었다.


“보쿠토 씨 이젠 숙제도 알아서 잘 하시면서 왜 자꾸 제 회사를…….”

“내가 숙제 해달라고 회사 그만두라고 한 줄 알아? 진짜 지금까지? 아카아시 멍청이!”

“보, 보쿠토 씨!”


빽 소리를 친 보쿠토는 밥그릇에 고기반찬을 쓸어 담고는 그릇과 숟가락을 쥐고서 식탁을 박차고 일어났다. 그대로 아카아시의 침실로 도망쳐 문을 걸어 잠근 보쿠토는 방문에 등을 대고 앉아 왁팍팍 밥을 퍼 입에 넣었다. 


“사람을 애 취급해도 정도가 있지!”


보쿠토가 투덜거리고 그와 동시에 아카아시가 방문을 쾅쾅 두드렸다.


-보쿠토 씨! 문 여세요! 보쿠토 씨!

“안 열어! 아카아시 미워!”

-이불에 고기 흘리면 혼납니다! 지난주에 세탁한 건데!

“아, 안 흘려!”


빽 소리를 치고서는 남은 밥을 비우는 데에 열중하는 보쿠토였다. 보쿠토는 순식간에 밥공기를 비우고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열자 바깥엔 방금 전까지 방문을 두드리고 있던 아카아시가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흘렸어요?”

“아, 안 흘렸어!”

“…….”

“아! 진짜! 아카아시는 손이 이렇게 될 때까지 두드리면 어떡해!?”

“누구 씨가 틀어박혀서 안 나오는데 그럼 어떡합니까.”


보쿠토가 발갛게 달아오른 아카아시의 손날을 보고서 왈칵 울상을 짓는다. 이번에 턱을 세우는 쪽은 보쿠토였다. 


“아카아시는 나만 싫어해!”

“……지금 뭐라고.”

“내가 싫은 거 아니면 어떻게 이럴 수 있어?”


보쿠토는 아카아시의 손을 자신의 손에 올려놓고서 쥐었다 놓았다 쥐었다 놓았다하며 땍땍 투덜거렸다. 


“내가 아카아시랑 있고 싶어서 하는 건 다 아니라 그러고 안 된다 그러고! 내 맘은 하나도 몰라주고. 맨날 이러고. 어리다고 뭐라고 하고.”

“지금 방문 걸어잠궜던 게 누군데…….”

“아카아시 나 싫어하지? 응? 나 싫지?”

“…….”

“내가 제일 싫지? 나만 싫어해. 이사님한테도 웃어줬으면서 나한테는 맨날 엄한 표정 하고 저리 가라고 하고 왜 왔냐고 하고.”

“…….”

“내가 아카아시랑 있고 싶어서 애쓰는 거 보고도 예쁘다고 한 번도 안 해주고.”

“…….”

“나도 아카아시 진짜 싫……. 싫으…….”


아카아시의 손을 쥐고서 한껏 입술을 삐죽거리는 보쿠토였지만, 아카아시를 향해 그간 말 못했던 원망을 가득 채워 토해내는 보쿠토였지만, 차마 그 뒷말만은 입 밖에 낼 수가 없었다.


“아 진짜! 나는 죽어도 말 못하겠는데 아카아시는 나만 싫-!”


반쯤 눈물이 들어찬 얼굴로 빽 소리치던 보쿠토의 입술을 막은 건 아카아시였다. 자신의 손으로 보쿠토의 손을 꽉 쥐고서 입을 맞댄다. 보쿠토의 눈이 화등잔만해진다. 아카아시는 짧게 입술을 대었다가 떼어 냈다. 


“……어…….”

“제발 좀 싫어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카아시는 그대로 몸을 돌리고는 부엌으로 돌아갔다. 식사가 남아있었지만 먹을 기분은 아니었다. 남은 걸 대충 치우고 싱크대에 물을 받는다. 물 흐르는 소리가 나는 사이 어느 샌가 그의 뒤에 보쿠토가 서 있었다. 아카아시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뒤를 돌아보았다. 


예전엔 그의 허리에도 오지 않던 어린아이였는데 어느새 이렇게 자랐다. 눈높이는 그보다 더 높았고 어깨도 팔도 그보다 더 두터워진지는 오래였다. 마냥 천진하게 반짝거리는 얼굴로, 때로는 눈물을 채운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았는데 이제는 때때로 그가 모르는 얼굴을 한다. 지금처럼.


“보쿠토 씨.”

“…….”

“나는 보쿠토 씨가……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하기 싫은 건 안 했으면 좋겠어요. 억지로 하는 것 없이, 바라는 건 다 하고, 원하는 건 다 가지고, 하고 싶은 것만 하고 그렇게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나 때문에 하고 싶지도 않은 공부 같은 거 하지 않…….”

“나 화낸다, 아카아시.”


보쿠토의 목소리가 쉰 것처럼 나직했다. 아카아시는 입을 다물었다. 한 걸음 뒤로 가고 싶었지만 뒤는 싱크로 막혀있었다. 


“아카아시 말 어렵고, 잘 모르겠지만……. 나 하고 싶은 대로 했으면 좋겠다는 거잖아.”

“그러니까 제 얘긴…….”

“어리다고 해서 참았어. 기다렸어. 초조해 죽을 것 같았는데 참았다고. 참아서, 참고 기다려서 이제 내 힘으로 뭔가 해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어. 그래서 그렇게 하기로 한 거야. 하고 싶은 대로 했으면 좋겠다고? 내가 하고 싶은 건 다 아카아시인데 그거 안 해주는 것도 전부 아카아시잖아!”


몰아세우는 듯이 울리는 큰 목소리인데 차마 아카아시의 어깨에도 손은 닿지 못했고 금빛 눈동자에는 눈물이 들어차 아주 어린 아이가 울음을 참는 것만 같았다. 


“내가 잘못한 거면 말해줘. 들을게. 그런 거 아니면, 그런 거면, 아카아시가 이제 참아주면 안 돼? 내가 참았던 만큼 참으라고 하는 거 아니야. 대학 다 해도 4년이잖아……. 나는, 나는 10년을 넘게,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서, 천장을 쳐다보고 울어버리는 남자가 있다. 아카아시는 엉엉 울어버리는 보쿠토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렸을 때도 이렇게 울었다. 그 땐 안아 올려서 등을 쓸어주고 눈물을 닦아줄 수 있었다. 그러면 빨갛게 부어오른 눈으로 밉다면서도 그의 옷깃을 잡고 놓아주질 않았더랬다. 그게 사랑스러웠다. 그게 그의 생을 밝히는 빛이었다.


그런데 지금도 그렇다는 것을, 역시 실감하고 만다. 이제 그는 안아 올릴 수도 없을 만큼 자랐는데도.


“보쿠토 씨. 나 봐요. 미안해요. 내가 나빴으니까 이제 그만 그쳐요.”

“흑, 아카아시 미워…….”

“걱정이 돼서 그랬어요.”

“뭐가! 또 뭐가아!”

“나 때문에 싫은 거 억지로 하다가 나까지 싫어지면 어쩌나 해서…….”

“나는, 아카아시, 나는 그거 진짜 이해가 안 되거든! 진짜!”


보쿠토가 우는 얼굴로 자신의 가슴을 퍽퍽 두드린다. 답답해서 발까지 구르며 어쩔 줄을 모른다. 아카아시는 웃음을 꾹 누르고 팔을 뻗어 그 눈 끝에 맺힌 눈물을 닦아주었다. 보쿠토는 그 손을 잡아채서 자신의 심장 위에 올려놓았다.


“나 진짜 이렇게……이렇게 좋아하는데…….”


빠르게 뛰는 심장은 단지 울어서만은 아니었다. 보쿠토는 금빛 눈동자를 눈물로 적셔 짙게 만들고서 아카아시를 바라보았다.


“정말 모르겠어? 나한테는 아카아시를 싫어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단 말야…….”


아까 아카아시가 그랬지, 차라리 싫어할 수나 있으면 좋겠다고. 이렇게, 이렇게나 마음 몰라주는 아카아시, 나도 차라리 싫어할 수 있었으면, 그런데 그런 생각도 할 수가 없을 정도로, 나는.


이젠 다 큰 것도 같은데 또 곧장 처음 만나던 그 날의 어린아이가 된 것처럼 울어버리는 남자가 있다. 아카아시는 그 울음이, 자신의 손아래에서 서둘러 울리는 이 심장박동이 사랑스러워 천천히 눈을 감았다. 마침내 껴안아버리는 품은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이제 싫다고 하기 없기야.”

“싫어한 적 없어요.”

“뽀뽀도 해주기야.”

“과제 잘 하면요.”

“아카아시는 나랑 뽀뽀하기가 그렇게 싫어!?”

“하고 싶으니까 과제 잘 해주세요.”


완전 열심히 할 거야, 아직 덜 마른 눈물이 남아있는 목소리가 귓가에서 웅얼웅얼 울린다. 아카아시는 그 등에 손을 올렸다. 보쿠토는 빠르게 뛰는 심장소리가 자신의 것인 줄로만 알겠지만.


“이제 다 컸으니까 이렇게 울면 안 되는데…….”

“우는 거 다 아카아시 때문이거든…….”

“네, 네에. 제가 잘못했습니다.”


이렇게 투덜거리는 얼굴을 보자면 또 어린아이 같아서 이 사람의 인생 전부를 가졌다는 생각이 들고야 만다. 그런데 줄 수 있는 건 그렇지가 않아서 더 늦기 전에, 아카아시가 그를 정말로 놓아질 수 없어지기 전에 다른 선택을 했으면 했다. 보다 많은 것을 줄 수 있는 사람에게. 자신의 전부를 더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줄 수 있는 사람에게. 


“나한텐 아카아시가 전부야.”

“그런가요.”


그렇게 했으니까. 


아카아시는 그 새 발갛게 부어오른 보쿠토의 눈을 바라보았다. 스스로 돌이켜보아도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보쿠토에게 물렀다. 무르고, 다정하고, 상냥하고……. 좋아하게 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자신을 바라보는 빛이 필요했다. 


보쿠토가 필요했다.


이 사람이 없으면 안 되어서.


그 어린 소년이 없으면, 살 수가 없어서.


“보쿠토 씨. 나는 그냥……. 보쿠토 씨한테 줄 게 없는데 보쿠토 씨가 필요하기만 해서. 없으면 안 돼서……. 그래서 더 늦기 전…에.”


무어라 말을 하려고 했던 아카아시는 조금 놀라서 입을 다물었다. 보쿠토의 얼굴에 빛이 깃들어 있었다. 찬연하게 빛나는 얼굴이 그를 바라본다. 극야의 끝에 처음으로 비치는 햇빛 같았다. 


“내가 필요해?”

“……네.”

“없으면……안 돼?”

“…….”


모든 걸 다 잃었을 때, 그를 향해 손을 벌리고 울고 웃는 소년만이 그의 생을 밝히는 빛이었다. 지금도 그러했다. 너무 소중해서 감히 달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아카아시, 나는 그거면 돼…….”


그 말이면 돼.


보쿠토가 눈을 깊이 휘어뜨리고 웃었다.


아카아시.


이제 나는 정말로, 어떻게 해도, 


아카아시를 싫어할 수가 없게 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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