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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기 시작한다. 아카아시는 흘끗 창밖을 바라보았다. 한참 전부터 계속 눈이 내리고 있었다. 




*




작년 겨울, 아직 해가 저물기 직전의 어느날이었다.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으며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는데 불쑥 옆에 있던 보쿠토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부모님 추운 거 질렸대.


갑작스러운데다가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이라 아카아시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제 곧 3학년으로 진급하는 이 선배는 종종 혼자서 생각이 앞서나간 뜻모를 말을 할 때가 있었다. 


보쿠토가 캐비닛 안을 바라보며, 여전히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이번 연말연시에……어디랬지 호주랬나 간다고……. 그래서 집에 나밖에 없거든.

-아.

-아카아시, 놀러올래?


사실 아카아시는 여기서 ‘이 사람이 이렇게 작게도 말할 수 있었나’하고 놀랐지만, 그건 다른 긴장감을 속이기 위한 장치에 불과했다. 


왜냐하면 아카아시는 고등학교 입학하고 반 년이 지났을 때, 작은 목소리를 내는 것만으로도 놀라운 마음이 들게 하는 이 선배와 눈을 마주하고 손을 맞잡는 사이가 되었던 것이다. 


다른 사람들을 의식한 것이 분명한 속삭이는 듯한 음성도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는 미약한 수줍음도 둘만을 위한 것이다. 아카아시는 잠깐 침묵했다가 소리로 대답하는 것을 대신해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긴장한 것 같았던 보쿠토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두 사람이 처음으로 함께 보냈던 새해 첫 날은 풋풋하고 따뜻했다. 안온한 공기가 감도는 거실에 나란히 앉아서 실없는 웃음을 터뜨리는 TV 프로그램을 시청하다가 허물어지듯 졸기도 했다. 가끔 입을 맞추는 것만으로도 떨렸던 겨울이었다. 


그 겨울이 다시 한 번 더 왔다. 이번엔 보쿠토의 부모님이 오스트리아의 어딘가로 갔다고 했다. 아카아시는 당연한 것처럼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보쿠토가 또 활짝 웃었고, 그래서 지금, 12월 31일 바로 이 순간 둘은 보쿠토의 집 거실에 함께 앉아 있었다. 


“아. 이거 맛있다…….”

“더 먹을래?”

“더 있어요?”


보쿠토가 전골 냄비를 앞두고 벌떡 일어나더니 부엌으로 뛰어갔다. 아카아시는 탁상에 살짝 팔을 괴고서 보쿠토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냉장고 문을 열더니 이것 저것 꺼내고 들여다보기 바쁘다. 한참이 지났을 때 보쿠토가 조그만 완자가 들어있는 밀폐용기를 손에 쥐고 돌아왔다. 


그렇게 전골 냄비를 비우고, 냄비와 식기를 치우고 정리하고 나면 금방 달이 깊어졌다. 두 사람이 저녁을 준비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내리던 눈은 아직까지도 송이송이 쏟아지고 있었다.


등에는 소파를 대고서 가만히 있으면 말 없이 조용히 보쿠토가 옆으로 붙어왔다. 아카아시는 그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가짜 웃음소리가 연이어 나오던 TV는 어느새 눈이 내리는 멜로 영화로 바뀌어 있었다. 화면 속의 연인이 부드럽게 키스한다. 무심결에 옆을 바라보았던 아카아시는 그대로 보쿠토에게 얼굴을 붙잡혀 쪽 소리나게 입을 맞추었다. 


“보쿠……으음.”


잠깐 멀어지려 했던 호흡은 금방 다시 가까워지고 떨어지는 것이 제 살점을 덜어내는 것처럼 시려서 멀어질 수가 없다. 금방 다시 붙었다. 겉에 두르고 있던 담요가 물결치고 몸이 겹친다. 아카아시는 카펫 위로 누워 자신의 옷깃을 쥐고 있는 보쿠토를 내려다보았다. 금색 눈동자가 알지 못하는 기이한 광채를 내며 빛나고 있었다. 그의 위에 앉아 몸을 숙인다. 더웠다. 입고 있는 니트의 목깃을 늘어뜨려 보지만 답답하다. 다시 입술을 맞부딪힌다. 타액이 뒤섞이는 소리가 귓가에 들리고 등골이 쭈뼛 섰다. 옷자락을 쥐었던 손은 이제 그의 몸을 붙들고 있었다.


“아카…아시.”


어째서인지 꽉 잠긴 보쿠토의 쉰 듯한 목소리가 그의 이름을 부른다. 아카아시는 소리 없이 입술과 혀를 움직여 대답했다. 여기 있어요. 기다리고 있어요. 여기 있어요, 저 여기 있어요…….


자신의 허리와 몸을 움켜쥔 보쿠토의 손에 어찌나 힘이 들어갔는지 아플 지경이었고 떨어지지 않아 연거푸 같은 호흡을 교환해 숨이 찬다. 자꾸만 더웠다. 눈앞이 언뜻 흐려질 것 같았다. 보쿠토의 눈빛이 잡아먹을 것처럼 그를 바라보고 있다. 입술까지 모두 먹히는 기분이 든다. 


먹혀도 좋아…….


아카아시가 마침내 그렇게생각했을 때였다. 갑자기 바닥과 천장이 휙 하고 뒤바뀌었다. 지금까진 그가 보쿠토 위에 올라탄 형국이었는데 어느새 자신이 아래에 있었다. 뒤통수를 받치고 있는 것은 보쿠토의 손이다. 보쿠토는 언제 그를 잡아먹을 듯 바라보았냐는 것처럼 그저 열에 들뜬 유쾌한 얼굴로 그의 위에 올라탄 채 뺨을 부볐다.


“아카아시이~!”

“……네.”


목이 쉰 것 같은 소리가 나오는 건 이제 아카아시였다. 연거푸 살을 부비며 쪽쪽 뺨이며 콧잔등까지 입을 맞추어대던 보쿠토가 그 목소리에 눈을 동그랗게 뜨곤 벌떡 일어나서 부엌으로 달려간다. 아카아시는 살짝 몸을 일으켜 눈동자로 그의 등을 좇았다. 


보쿠토가 유리컵에 생수를 담아온다. 누워있던 몸을 완전히 일으키고 소파에 기대어 앉은 아카아시는 나직히 한숨을 내쉬었다.


“아, 아카아시? 감기야?”

“……아닙니다.”


아카아시는 고개를 내젓고서는 보쿠토가 내미는 물을 넘겼다. 보쿠토는 정말 감기인지 아닌지 잔뜩 걱정이 되는 표정이었다. 아카아시는 물잔을 내려놓고 보쿠토의 옷깃을 끌어당겼다. 보쿠토는 저항없이 끌려왔다. 이마를 맞대어본다. 보쿠토의 얼굴이 빨갛게 물든다. 하지만 그 이상은 없었다.


“보쿠토 선배 쪽이 더 뜨거운 것 같은데요.”

“그, 그런가?”


쑥스러워 하는 얼굴이 마냥 소년같기만 하다. 아카아시는 결국 한숨을 내리누르고 보쿠토를 놓아주었다. 보쿠토는 금방 아카아시 곁에 앉아서 다시 TV를 보기 시작한다. 아카아시는 심술이라도 부리듯이 꼿꼿하게 앉아있었지만 이윽고 보쿠토가 자세를 허물어뜨리고 그에게 기대었다. 이러면 어쩔 수가 없다. 


아카아시는 괜히 보쿠토의 코 끝을 한 번 튕기고는 정면의 화면에 눈을 집중했다. 보쿠토가 곁에서 울상을 지으며 그를 보챈다. 아카아시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보쿠토의 코끝을 달래듯 문질러주었다. 


생각해보면 보쿠토가 또래들 사이에서 성적인 대화에 응한 것을 본 기억이 없다. 하다못해 어떤 타입이 취향이다 정도의 말이라도 할 법했는데 들은 적이 없었다. 원체 무엇에 집중하면 그것 하나만 보는 사람이니, 좋아하는 배구 그 외의 것에는 무지한 것이라 해도 납득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정말이지.’


닿고 싶은 것은 이쪽 뿐인가, 그렇게 생각하면 조금 쓸쓸하다. 아무것도 모른다 하더라도 닿고 싶은 마음에 이끌려 함께하게 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은.


아카아시는 살짝 턱을 들어 커튼 틈새로 보이는 창 밖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눈이 내리고 있었다. 신년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퍼지기 시작한다. 보쿠토는 이제 곧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된다. 그와 함께하는 마지막, 어쩌면 마지막…….


“아카아시! 새해 복 많이 받아!”

“보쿠토 선배도요.”

“올 한해도 잘 부탁해!”


아래에서 그를 올려다보는 보쿠토가 씨익 웃고 있었다. 아카아시는 눈을 접으며 한숨을 섞어 웃음짓고 말았다. 모르면 무어 어떻겠는가. 시간은 있었다. 그래요. 네, 올 한해도. 보쿠토가 아카아시의 허리를 와락 끌어 안았다.



 *



멀찍이 TV에서 아나운서가 새해를 맞이한 인사를 던지는 목소리가 멀었다. 보쿠토는 곁에는 아카아시를 두고서 거실 바닥에 드러누워 천장 벽지의 무늬를 세고 있었다. 단위가 세자리 수까지 갔을 때 보쿠토는 고개를 돌려 곁에서 잠이 든 아카아시를 흘끗 바라보았다. 평소 잠드는 시간을 넘겨도 한참 넘긴 때이기는 했다. 


“……아카아시, 진짜 자……?”


조그맣게 속삭이듯 말해본다. 들리는 건 새근거리는 규칙적인 숨소리 뿐이었다. 보쿠토는 호흡을 꾹 눌러 죽이고서는 거실에서 뒹굴다 어느샌가 꺼내왔던 이불을 끌어당겼다. 천자락 스치는 소리가 실내에 울려퍼진다. 보쿠토는 조심스레 아카아시의 몸 위로 이불을 덮어주었다. 팔을 더듬어 리모컨을 손에 쥔다. 삑 하는 소리와 함께 실내에 정적이 깔렸다. 보쿠토는 소리나지 않게 몸을 일으켜세웠다. 아카아시는 여전히 세상 모르고 잠든 채였다.


보쿠토는 곧장 욕실을 향해 내달렸다. 말이 내달렸렸다는 것이지 사실은 기척을 죽이기 위해 까치발을 들고서 빠르게 걸은 것이 한계였다. 보쿠토는 곧장 샤워부스의 수도꼭지 물을 틀고서 몸을 던졌다. 아무리 난방을 하고 있는 실내라 하더라도 한겨울에 찬물을 몸에 끼얹으니 정신이 번쩍 든다. 


“나…나무아미타불…….”


그 다음은 뭐였지, 생각나는 것이 없다. 마음을 쏟아 들어본 적이 없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늘에 계신 우리……부모님……? 뭐였더라……. 아 하여튼 아무나 빨리 관세음…….”


보쿠토는 찬물에 온 몸이 다 젖을 때까지 앞뒤도 맞지 않는 말을 계속 웅얼거리다가 입술이 퍼렇게 얼어붙을 지경이 되어서야 욕실을 나섰다. 젖어서 움직이기 어려운 옷을 겨우 벗어 세탁기에 집어넣고선 대충 몸만 닦아낸다. 평소라면 겨울이라도 반바지에 반팔 차림이었을텐데 지금은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어디 있는지도 모를 긴 면티와 바지를 찾아내 걸친 보쿠토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서는 아카아시의 곁으로 파고들었다.  


“으응……. 보쿠토 선배……?”


졸음에 겨운 목소리가 그를 부른다. 보쿠토는 이불을 끌어올리고 아카아시의 가슴팍을 가볍게 도닥였다.


“아냐, 자자. 자자…….”


아카아시가 스르르 눈을 감고는 그의 품으로 파고든다. 잠깐 얼어붙었던 보쿠토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는 목을 꺾듯이 위로 젖히고서 아카아시의 몸에 팔을 둘렀다. 


“하…….”


탄식을 뱉어본다. 아무도 들어주는 사람은 없다. 보쿠토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아카아시……. 아카아시, 진짜……. 1년 빨리 지나가라 제발…….”


입을 맞출 때면 살짝 눈을 떠본다. 그러면 호흡이 섞이는 곳에 그의 연인이 눈을 감고 있었다.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 간혹 깜빡거리는 눈동자는 열에 흐려져 있다. 그것이 이따금 그를 미치게 만들었고 동시에 그를 잡아채어 못박힌 채 서 있도록 했다. 


이 겨울이 지나면 보쿠토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며 성인이 된다. 그리고 한 번만, 딱 한 번만 더 겨울을 보내면 그 때는 아카아시의 차례였다. 


분명 찬물에 몸을 씻어 춥다는 생각이 들어서 긴팔을 걸쳤던 것인데 금방 다시 더워진다. 보쿠토는 고개를 꺾은 채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속으로 방금 전 욕실에서 읊조렸던 아무 기도말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



“아, 아카아시!”


마지막 봄고를 앞두고서 연습은 가열찼고 다시 돌아온 한 해의 마지막 날에도 그것은 변하는 게 없었다. 때문에 늦게까지 부활동을 하고서 교문을 나서던 아카아시는 후배들에게 둘러싸인 보쿠토를 보고서 그만 웃음을 지어야 했다. 아카아시가 남아서 일지를 정리하는 사이에 먼저 돌아갔던 부원들이 전설로 남아있는 선배를 만나고서는 동경의 마음을 주체하지 못한 것 같았다.


“보쿠토 선배.”


보쿠토를 둘러 싸고서 눈을 빛내던 후배들도 그 목소리에는 모두 뒤를 돌아본다. 지금까지 후배들 앞에서 한껏 우쭐거리는 표정을 짓고 있던 보쿠토의 표정이 지금은 그저 환한 빛으로만 가득 차있었다. 


“아카아시! 아카아시~! 너희, 주장님 말씀은 잘 듣냐? 어?”

“제일 말 안 듣는 건 보쿠토 선배죠.”

“아카아시이~!”


아카아시 곁으로 조르르 달려와 후배들에게 장난스러운 훈계를 늘어놓던 보쿠토가 울상을 짓는다. 아카아시는 웃음을 참고는 후배들과 인사했다. 후배들은 보쿠토를 계속 흘끗거렸지만 보쿠토의 눈길이 한 곳에 고정되어 있었던 탓에 더는 미련 두지 못하고 깊이 인사하고서는 돌아갔다. 시끌시끌했던 것이 거짓말처럼 조용해지기까지는 한 순간이었다.


“왜 학교로 오셨어요. 제가 간다니까.”


후배들을 모두 보내고 나란히 걸음을 맞추어 걸으면서 아카아시가 물었다. 작년 이맘때에는 보쿠토의 부모님 댁에 들렀었다. 올해엔 보쿠토의 자취방으로 놀러가기로 했다. 보쿠토가 역으로 몇 정거장 정도 되는 거리의 대학에 진학하고 난 뒤부터였다. 


“오늘 우리도 연습 일찍 끝나서! 춥지, 아카아시. 빨리 가자.”


보쿠토가 아카아시를 잡아 끌었다. 학교 근처의 가도 쪽에 차 한 대가 주차되어 있다. 보쿠토는 보조석의 문을 열어 아카아시를 들이밀고는 서둘러 운전석으로 돌아갔다. 


차 안은 훈기가 감돌고 있었다. 옆자리에 앉아 안전벨트를 메고서 고개를 들었던 아카아시는 바로 코앞에 와 있는 보쿠토의 얼굴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가 이윽고 눈꺼풀을 내리감았다. 보쿠토의 입술이 곧장 붙어왔다. 이것을 기다리지 못해 차를 이끌고 학교 앞까지 찾아온 것이다. 하지만 기다리지 못한 건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차 안의 공기가 가빠질 정도로 깊은 입맞춤이 겨우 끝이 난다. 아카아시는 붉어진 얼굴을 가다듬기 위해 서둘러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보쿠토가 아쉬운 듯이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그래도 그 눈길은 금방 정면으로 돌아갔다. 


“저녁은 뭐 먹어요?”

“전골!”

“……보쿠토 선배가 만든 거요?”

“아니, 히이라기 씨가 재료 준비해 줬……아카아시 그 목소리 뭐야?”

“아닙니다. 다행이네요.”

“아카아시이이!”


보쿠토가 와락 울상을 한다. 아카아시가 웃음을 삼키고는 보쿠토의 고개를 정면으로 돌렸다. 선배, 운전요. 


이번 한해 내도록 몇 번이나 들렀던 보쿠토의 자취방은 아카아시에게도 익숙했다. 짐을 내려놓고, 부모님께는 친한 선배와 함께 있다고 연락을 하고, 이미 손질된 재료로 저녁을 준비한다.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전골을 열심히 해치우고 먹고 난 그릇을 씻고 정리하면 또 달이 높은 시간이었다. 


아카아시는 작년 이맘때에 있었던 곳에 비하자면야 훨씬 좁은 곳에 기대어 앉아서 흘끗 발코니 쪽의 작은 창을 바라보았다. 학교를 나설 때만 해도 공기가 차가울 뿐이었는데 어느새 또 눈이 내리고 있었다. 


“아카아시? 뭐 보고 있어?”

“아……. 지금 눈 오네요.”

“어, 그래?”

“네. 작년에도 제작년에도 눈이 왔는데 올해도 그러네요.”

“작년에도 눈 왔었어?”

“……그랬잖아요, 기억 안나요?”


따끈하게 김이 오르는 머그컵을 양손에 하나씩 들고 오던 보쿠토가 고개를 갸웃한다.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연말연시는 항상 정신이 없어서…….”

“뭐 그렇긴 하죠.”


아카아시는 그렇게 대답하고는 보쿠토가 내미는 머그를 받았다. 자취방의 TV에서는 신년을 기다리는 특집 방송과 시상식 같은 것들이 연이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소리를 배경음악으로 두고서 언제나의 이야기를 나눈다. 부활동은, 학교는, 진학은, 그런 이야기들이다. 함께하지 않는 시간이 늘어 이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면 보쿠토는 지치지도 않고 재잘거렸다. 떨어져 있는 동안 알지 못하게 된 것들을 보상받으려는 것처럼. 


“이제 곧 있으면 12시네.”

“그러게요.”


아카아시는 TV 화면 한쪽에서 깜박거리는 숫자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11시 56분이었다. 정말로 곧 있으면 12시, 새해가 된다. 


“뭔가 실감이 안 나.”

“뭐가요?”

“올해가 끝난다는 게.”

“작년에도 아무렇지 않으셨으면서 새삼스럽게, 무슨.”


아카아시는 타박하듯 말을 하고는 조금 초조한 것처럼 자신의 손을 꾹꾹 매만졌다. 실감이 나지 않는 것은 보쿠토보다 자신 쪽일 것이다. 올해가 지나면 자신은 성인이 된다. 자신이 이 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보쿠토는 꿈에도 모를 것이었다.


“보쿠토 선배.”

“응응.”


보쿠토가 홀린 듯이 TV화면만 뚫어져라 보고 있다. 아카아시는 그 옆모습을 흘끗 보고는 입술을 달싹였다. 


“이제 조금있으면 저도…….”

“열 두시다!”

“네? 아, 네.”


아카아시가 무어라 말을 할 틈도 주지 않고 보쿠토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TV에서는 종소리가 울려퍼지고 있었다. 입술만 열었다 닫았다 하던 아카아시는 결국 그저 ‘열 두시다!’라는 보쿠토의 외침에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그 때 보쿠토가 아카아시를 번쩍 들어 뒤에 놓인 침대 위에 앉혔다.


“서, 선배?”

“아카아시, 새해 복 많이 받아!”

“아, 네. 선배도…….”


아카아시는 얼떨떨한 얼굴로 침대에 손을 뻗어 지탱하며 그에 응하다가 그만 손끝으로 리모컨을 건드리고 말았다. 전자음이 울리고 채널이 돌아간다. 화면에서는 감미로운 음악과 함께 어떤 영화의 한 장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카아시가 화면으로 고개를 돌린 순간 보쿠토가 그런 아카아시의 뺨을 붙잡았다. 새해 복 많이 받으라고 외쳤던 것과는 전혀 다른 얼굴, 전혀 다른 표정을 하고 있는 보쿠토가 그를 보고 있었다. 


“보쿠…….”

“이제 이름으로 불러줘.”


그가 갑자기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 수가 없어서 아카아시가 눈만 깜박이는 그 순간 보쿠토가 입술을 겹쳐왔다. 아카아시가 겨우 보쿠토를 불렀을 때 아카아시는 이미 침대에 누워있었다. 그의 위에 올라탄 보쿠토가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이름.”

“네? 선배, 잠깐만…….”

“이제 더는 못 기다려.”


급하게 입술이 닿아온다. 잡아먹을 것처럼 격렬하기도 했고 꽃잎에 숨결 부비듯 다정하기도 했다. 아카아시가 어쩔 줄 모르고 흔들리는 사이에 보쿠토의 손이 아카아시의 허리로 파고들었다. 보쿠토가 응석이라도 부리듯 아카아시의 입술을 깨물었다 놓는다. 


“오늘만 기다렸어. 하지만……. 아카아시, 싫으면 지금 말해.”


싫다고 하면 안 해. 아카아시는 멍하니 그 금빛 눈을 올려다보았다. 싫다고 하면 죽어버리겠다는 얼굴이면서 어떻게 그런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아카아시는 보쿠토의 목에 팔을 감았다. 선배만 기다린 게 아니에요. 그 말에 마침내 무엇인가가 끊어졌다. 보쿠토 안의 어떤 것이었다. 매해의 첫날을 함께 보내면서도 그 날 눈이 왔는지 떠올리지도 못할 만큼 견디고 기다리게 했던 것이었다. 


“……이제 못 멈춰.”

“그런 거 바란 적 없어요.”


아카아시가 먼저 몸을 살짝 들어 보쿠토의 입술에 입을 맞대었다. 홀린 듯이 금빛 눈을 바라보다 천천히 눈을 감는다. 이윽고 서로가 서로의 색으로 물들어가는 깊은 입맞춤이, 그리고 더 깊은 것들이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