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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rely, truly yours





아카아시 케이지, 21세, 매해 닥치는 인생의 위기…….


“아니, 저기……. 나 정말로 단건 잘.”

“가, 가지고 가서 버리셔도 되니까요! 받아만 주세요!”

“그게 아…….”


아카아시가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끝을 흐렸지만 그의 앞에 선 상대는 아카아시의 품에 정성스레 포장한 뭉치를 밀어붙이고는 후다닥 도망쳐버리는 것이었다. 아카아시는 막막한 표정으로 품 안의 상자를 내려다보았다. 달콤한 향이 떠돈다. 


밸런타인이었다. 



*



훤칠한 키에 세련된 미형의 남자가 명석하고 일처리도 유능하며 배려심도 깊을 때 어떻게 되는가? A대학 B학과의 N학번 C군은 그에 대해 간단하게 말할 수 있었다. 


바로 여기 아카아시 케이지를 보십시오! 


오늘 아카아시는 하루 종일 곤혹스러운 표정이었다. 그에 대해 가볍게 시기하는 투로 말하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아카아시의 곤란한 심정을 헤아려 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카아시는 누구의 고백도 받아주지 않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받아만 주세요’ 혹은 ‘들어만 주세요’가 빗발쳤던 것이다. 거절하는 쪽의 마음도 편치만은 않은 것이 인지상정 아니던가. 


심지어 올해는 달리 마음에 둔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까지 했는데도 불구하고 작년과 크게 바뀐 것이 없다. 당황하는 아카아시에게 누군가가 나직하게 일러주었다. 그걸 누가 믿냐. 모두가 고백을 난처해하는 아카아시 나름의 상냥한 거짓말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아카아시가 품에 이것저것, 심지어 꽃다발까지 한아름 안고 있는 것을 본 과 선배가 위로의 뜻을 담아 그의 등을 툭툭 치고 지나갔다. 언젠가 한 번 유난히 힘들어하는 그를 향해 차라리 즐기지 그러느냐고 마음을 다해 충고했던 선배였다. 


밸런타인 날짜가 방학 한 가운데의 어정쩡한 날이어서 다행이지, 행여나 학기 한 가운데였으면 여간 난처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카아시는 받은 것을 챙겨들고 과실을 나섰다. 평소에는 단정하던 아카아시의 걸음이 축축 늘어진다. 아직 다 가시지 않은 겨울의 찬 공기가 그의 입 근처를 스치며 달큰한 안개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 안개가 한 번 눈앞을 흐렸다 깨어지고 가벼운 경적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카아시는 호흡이 티나지 않게 숨을 들이켰다. 아카아시의 앞으로 세단 하나가 미끄러지듯 들어온다. 운전석에 내리는 사람은 키가 훤칠해 그저 내려서는 동작만으로 주위의 이목을 잡아끌었다. 이제 서른은 넘었을까 싶은데 표정에 빛이 넘쳐 되레 나이를 가늠할 수가 없다. 흰 셔츠에는 가느다란 빗줄기같이 보일 듯 말듯 은사 자수가 들어가 있었고 기세 좋게 움직이는 몸을 따라 넥타이도 휘날렸다. 하지만 그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금빛 눈동자였다. 사람의 것이라기보다는 맹렬한 짐승의 것 같다는 느낌이 돌았는데 그가 어떤 것을 마주하는 순간 눈이 녹은 것처럼 달게 녹아내린다. 


그 시선 끝에 바로 아카아시가 서 있었다.


아카아시는 입술을 꾹 닫고서 오늘의 일을 헤쳐 나가기 위해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그의 한참 연상인 약혼자는 도무지 한 번 심통이 나면 물러주는 법이 없었다.


“아카아시!”

“……보쿠토 씨. 오셨어요.”

“응~! 오늘 우리도 일찍 끝나서. 수업은? 다 끝났어?”

“예, 뭐…….”


아카아시는 최대한 침착하게 대답하고는 몸을 돌려 보조석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 시도는 그다지 소용이 있지는 않았다. 보쿠토가 들떠서 보조석의 문을 열어주다가 기어코 봐버리고 만 것이다.


“……아.”


금빛 눈이 크게 뜨였다가 천천히 가라앉는다. 아카아시는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동작으로 짐 꾸러미를 뒷좌석에 내려놓고는 자리에 앉았다. 곧 운전석으로 돌아온 보쿠토는 처음의 불타는 태양같이 웃는 낯은 온데간데없이 잔뜩 시무룩하니 축 처진 얼굴뿐이었다. 아카아시는 암담한 표정을 애써 감춘 채 안전벨트의 버클을 잡아당겼다.


“그, 보쿠토 씨…….”

“……응…….”


아, 이미 끝나버렸다. 아카아시는 손에 얼굴을 묻고 싶은 심정으로 안전벨트를 꽉 쥐었다. 


보쿠토가 밸런타인데이만 되면 기가 죽어서 맥을 못 추는 것이 올해로 몇 년이나 된 일인지 모른다. 아침부터 긴장과 근심 걱정에, 아카아시가 초콜릿이나 선물 따위를 실제로 바리바리 받아온 것을 보면 그 날은 내내 우울해져서 표정을 펴질 않았다. 아카아시가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다. 그가 교복 차림으로 이 옆자리에 앉았을 때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았다.


세단이 미끄러지듯이 학교 정문을 벗어나 시내로 향한다. 아카아시는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서 어떻게 보쿠토를 달랠 수 있을지 고민했다. 이쪽은 정말로 약혼을 해 장래를 기약한 사이이고, 심지어 그것을 떠나 자신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받을 뜻이 아주 조금도 없다는 것은 이미 귀에 못이 박히게 이야기 했던 것들이다. 보쿠토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머리로는 알아도 마음으로는 납득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보쿠토 스스로도 그런 자신이 답답한 것 같았지만…….


“보쿠토 씨.”

“…….”

“보쿠토 씨, 전화 울려요. 받으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이사님이신데…….”

“아! 아! 자, 잠시만! 어!”


혼자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핸들을 쥐고서 앞만 어질어질 바라보고 있던 보쿠토가 다급하게 골목으로 차를 집어넣고 세웠다. 평소에는 간단한 통화는 운전 중에도 받아 끝내곤 했는데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는 것 같았다. 


“아, 네. 이사님. 아……. 네? 그거는 이미 시뮬이 끝난 모델인데 왜……. 아 지금? 아니 오늘 날이 무슨 날인데 퇴근한 사람을……아니 그게 아니라, 아니 크긴 다 컸죠, 대학 입학한 지가 언젠데요! 아니……그래도 아직 앤데요 제가 저녁을……아닙니다……네……가야죠……. ……네…….”

“…….”


아카아시는 곁에 조용히 앉아서 드문드문 들린 대화의 내용을 바탕으로 상대방이 했음직한 말을 추리했다. 보쿠토가 있는 기업의 이사쯤 된다 하니 보쿠토의 정혼 상대인 자신에 대해서도 알고 있는 듯했다. 보쿠토와는 한참 나이가 차이나는 어린 정혼자인 자신에 대해서. 그리고 아마도 보쿠토는 지금…….


아카아시는 옆을 바라보았다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보쿠토는 그림으로 그린 듯이 울상이 되어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있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보았는데 참 한결같은 사람이다.


“가 보셔야 돼요?”

“……히잉…….”


자신이 초등학교 다닐 적에는 이 사람이 참 컸다. 숨어서 울고 있으면 이부자락은 밑에서부터 위까지 전부 들춰내고 책장의 책은 모두 거꾸러뜨려서라도 자신을 찾아내어 안아 올리는 이 사람이 정말로 컸었다. 마음껏 웃는 얼굴은 그의 깊은 곳까지 비춰주는 빛이 되었다. 그래서 빨리 자라고 싶어서 숨이 찼다. 목에 걸린 약혼반지가 그의 손에 너무 커서, 그것이 맞을 때까지 한 시라도 빨리 자라고 싶어서 호흡이 급하고 잠이 급하고 시간이 급했다. 


그래서 다 자라보니, 이제 손을 맞대어도 정면에 서서 상대를 바라보아도 모자라지 않을 만큼 자라보니, 이제 알 것 같았다. 평생을 더 자라도 저 빛을 앞지를 수는 없다는 것을. 


“일 급하게 서둘러 끝내놓고 온 거죠.”

“아, 아니. 그게 아니구…….”

“얼른 다시 가 보세요. 갔다 와서 저녁 먹을까요.”

“그치만……. 그치만 오늘 발렌타인이고…….”


이런 것은 알지도 못하던 사람이었다. 아카아시는 부드럽게 웃었다. 밸런타인데이 같은 건 챙기지도 않던 사람이었다. 그가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는 이것저것 받아오기 시작하니까 그 때부터 깜짝 놀라서는 챙기려고 들었던 것이었는데 한 번 마음을 먹은 뒤로는 거르는 법이 없었다. 달력에 적혀있는 기념일이라는 기념일은 전부 하나 하나 별처럼 소중하게 챙겨주었다. 


“그러니까 갔다 와서요.”

“……응, 그럼 집까지만 데려다 주고 갔다 올게. 아카아시, 미안…….”

“아니에요, 괜찮으니까요.”


특별히 약속을 한 것도 아니었으니 이렇게 미안해 할 필요가 없는데도 보쿠토는 어쩔 줄을 몰랐다. 어깨가 축 처지는 것 같았다. 직장생활을 시작하고 나서부터는 올리지 않았던 머리카락이 그의 눈가를 스친다. 아카아시는 손을 뻗어 보쿠토의 앞머리를 살짝 정리해주었다. 


“저녁으로 맛있는 거 먹어요.”

“응…….”


어쩌면 차라리 이편이 더 잘 된 일일지도 몰랐다. 적어도 자신이 받아온 선물 쪽에서는 신경이 떠난 모양이니까, 아카아시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



아카아시는 천천히 실내에 빛을 올렸다. 보쿠토는 집 안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했지만 아카아시가 고개를 흔들어 내보낸 차였다. 일 빨리 끝내고 와주세요, 그 말에 보쿠토는 돌연 기운을 얻었는지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파트 단지 입구에서 차를 몰아 돌아갔다. 


두 사람이 10년을 훌쩍 넘게 지내온 아파트였다. 처음 몇 년쯤 지났을 때 새로 건설하는 아파트로 이사하지 않겠느냐고 보쿠토의 부친이 말을 꺼냈었지만 아카아시가 선뜻 대답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서 보쿠토가 거절해주었다. 


그 뒤로 함께 한 시간이 쌓여있다. 실내는 조금 더웠다. 함께 지내게 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서먹하게 시간을 보내는 와중에 어린 자신이 감기에 걸린 적이 있었다. 그 뒤로 보쿠토는 겨울을 춥게 나는 법이 없었다. 이쯤하면 더우니까 난방은 됐다고 해도 감기 걸릴까 걱정이 된다며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  


아카아시는 발코니 쪽 창가에 서서 바깥을 내려다보았다. 2월의 늦은 눈이 군데군데 남아있었다. 


서로가 기억하는 첫 만남이 어땠더라, 한다면 아카아시는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너른 전통의 한가운데에 마련된 내실이었다. 가는 길은 조용했다. 멀찍이서 잉어 꼬리가 살짝 튀어 오르는 소리가 들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말로 그런 소리가 들렸을 리는 없고, 아마도 어딘가에서 그저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났던 것일 테다. 어린 자신에게는 조금 높은 탁상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상대를 기다렸다. 눈앞에 놓인 찻잔에는 손을 데지 않았다. 처음엔 뜨거워서였고 나중엔 쓴 맛을 느껴서였다. 영원 같은 시간이 지나고, 자신에 비할 바도 없이 이미 어른이었던 남자가 놀란 표정을 하며 자신을 보았더랬다…….


보쿠토의 부친이 필요한 건 아카아시 가문의 이름이었고 어린 아카아시에게 필요했던 건 혼자 남겨진 그를 보살펴줄 사람이었다. 그 사이에 보쿠토가 책임과 의무를 떠맡게 되었다. 어린 마음에도 그것이 정말 미안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보쿠토가 하고 싶은 대로 해주어야 한다고도 생각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약혼 같은 걸 깨고 싶어 한다면 그렇게. 자신이 독립할 수 있게 되면, 그렇게 해주어야 한다고. 그에게서 10년의 시간을 아이를 책임지는 데에 쓰게 했으니 그 이후는 마땅히 보쿠토가 바라는 대로 해주는 것이 옳다고. 


그 10년이 되기 전에, 그런 걸 바라지 않는다고 눈물로 말해준 보쿠토였다. 어린 그를 안아드는 손은 두텁고 어깨는 넓어, 안겨있으면 마냥 큰 사람만 같았는데 그렇게 눈물을 터뜨리는 모습은 아이 같았다. 


아카아시는 겉옷을 적당히 식탁 근처에 걸어놓고는 서재로 들어갔다. 보쿠토는 아카아시가 곁에 있으면 아카아시 외의 것에는 제대로 집중을 하지 못해서 결국 서재에 따로 책상을 내놓았다. 보쿠토는 반쯤 울려고 했지만 보쿠토에게 붙은 비서까지 찾아와 울며 부탁해 도리가 없었다. 아카아시는 가끔 보쿠토가 집에 없을 때면  서재에 들어와 먼지를 털기도 하고 간단히 정리를 하기도 했다. 산만할 것 같은데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놓치는 법이 없어 정리를 할 게 많지는 않았다. 그 중에서 아카아시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건 서재 가장 안쪽 책꽂이 높은 곳에 놓아둔 상자였다. 


못 보던 것이기에 그 상자를 처음 본 날은 보쿠토에게 지나가는 듯이 뭐예요, 하고 물었었다. 그랬는데 밥을 먹던 보쿠토가 덜컥 사레에 들려서는 죽을락 말락 격하게 기침을 하곤 얼굴까지 붉히고서 어쩔 줄을 모르는 것이었다. 그렇게 당황하니 정말로 뭐가 들었나 궁금한 마음에 추궁을 해 알아냈었다. 


그 상자를 열면 가장 위에 끝이 사선으로 잘린 베이지색 리본이 있다. 그 아래엔 은회색 리본도 있고 종이 안에 철심을 넣어 만든 고정 핀도 있었다. 리본들을 치워내고 나면 한 번 무언가를 감싸는 데에 썼던 것 같은 포장지가 겹겹이 쌓여 있다. 그 포장지를 덜어내고 나면 그 아래는 빈 상자였다. 초콜릿을 담았던 납작한 함이나 조그만 장신구 같은 것을 포장했던 상자 같은 것들이다. 그리고 그보다 아래엔 펠트로 구깃구깃 어설프게 만든 붉은 장미와 도화지를 접어 만든 카드가 있다. 장미 뒤에는 옷핀으로 고정시켜 놓은 걸, 카드 안에는 색종이를 찢어 붙여 글자를 만든 것이 있다는 걸, 아카아시는 보지 않아도 알았다. 자신이 만든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주 어렸을 때 보쿠토에게 직접 만들어 주었었다. 그걸 받고 보쿠토가 눈물을 흘렸다.


빈 상자는 자신이 보쿠토에게 주었던 초콜릿과 선물들을 담았던 것이었다. 포장지는 그 상자를 감쌌던 것이고 리본은 그 끝을 장식했던 것들이다. 모두 자신이 보쿠토에게 주었던 것이었다. 모두. 아주 어려서부터.


보쿠토는 그것을 하나하나 열어보는 아카아시를 두고서 부끄러워 어쩔 줄을 몰랐다. 목까지 빨갛게 달아올라서는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서 뒤에서 왔다 갔다 하며 변명처럼 무슨 말을 하려고 했다가 다시 다물었다. 아카아시는 어려서 기억 못하는 거야, 그렇게 말하고 싶은 것 같았다. 하지만 보쿠토와 함께 한 이후로 아카아시 역시 잊은 것이 없었다. 보쿠토가 이렇게 모두 담아두는 것처럼. 


그렇게까지 부끄러우면, 부끄러우니까 못 보여준다고 하면 됐을 텐데 아카아시에게 무엇이든 숨기는 게 싫다고 보여준 것도 보쿠토답다면 다웠다. 그리고 그렇게 서재 가장 깊고 높은 곳에 놓인, 먼지 앉는 일이 없는 상자는 아카아시에게도 기쁨이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기쁨이 생기기 전에 했던 대화가 어렴풋이 떠올랐다.


제가 어려서 답답하지 않아요?


아직 교복을 벗기 전, 오늘처럼 보쿠토가 운전하는 차의 보조석에 앉아서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핸들을 쥐고 있던 보쿠토가 죽을 것처럼 기침을 했다. 이 사람은 당황하면 이렇게 기침하는구나, 아카아시는 옆에 앉아서 생각했더랬다. 보쿠토는 반쯤 죽다 살아나서는 산소가 부족해 창문을 내리고 겨우 목을 가다듬었다.


답답은 아니야. 

그럼요?

무서운 거지.

뭐가요?


그렇게 물었을 때 보쿠토는 그 자리에서 대답하지 못했다. 그가 하교하는 걸 데리러 와서도 아무 말 하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와서야 말해주었다. 차마 어린 아카아시를 마주하지도 못하고, 입고 있던 정장을 제대로 벗지도 못한 채로. 


아직 아카아시는 많은 걸 못 봤잖아. 사회에도 안 나가봤고, 대학도 아직이고…….


그래서 답답한 건 어쩌면 자신이었다. 아카아시는 가만히 보쿠토의 얘기를 들으면서 생각했다. 보쿠토는 아, 담배 이래서 피는구나,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나는 했잖아. 대학도 나왔고. 사회생활도 하고 있고. 해서 알겠거든. 다 보고, 그렇게 결정한 거거든. 그런데 아카아시는 아직이잖아?


처음 봤을 때부터 태양처럼 빛났다. 그가 흔들리는 건 상상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런 보쿠토가 입술을 깨물며 나직하게 말하는 목소리는 정말로 무언가 무서운 듯이 불안한 듯이 떨리고 있었다.


그래서 나중에 가서, 이것저것 다 보고, 보니까, 아, 이 사람이 좋아요……더 좋은 사람이 생겼어요, 그럴 까봐.


그런데 난 그래도 못 보내주거든.


그러니까 좀 무섭지.


내가 무섭지.


내가, 무서운 사람이지…….


천천히 떨림이 잦아들어가고 목소리는 나직하게 가라앉아간다. 보쿠토는 말을 하면서도 아카아시를 똑바로 바라보지는 않았다. 조금 먼 곳을 보는 듯이 시선이 비껴가 있다. 


그래서 아카아시는 비로소 웃을 수 있었다. 


그 모든 기억, 아주 어려서부터 지금까지의 기억이 쌓여있는 집이었다. 아카아시는 발코니의 창에 몸을 기대고 앉아서 창밖을 바라보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하기를 반복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보내줄 수 없다 했던 그 말이 소년 시절의 자신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모른다. 기다릴 수 있는 힘이 되어주었다. 아주 어려서 목에 걸었던 보쿠토와의 약혼반지가 손에 맞을 때까지 기다릴 수 있는 힘이 되었다. 



*



서둘러 일을 마쳤지만 달이 중천에 떠있다. 보쿠토는 허겁지겁 현관문을 열었다가 어둠이 내려앉은 실내를 보곤 죽은 듯이 숨을 멈췄다. 발코니 쪽에 조그만 그림자가 눈 인형처럼 가만히 형상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 그늘에 스치는 달빛만 보아도 누구인지 알 수 있다. 아카아시였다. 보쿠토는 소리 나지 않게 서류 가방을 내려놓고서 살금살금 다가갔다. 아카아시는 발코니의 창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었다. 잠든 것 같았다. 


이렇게 잠에 빠진 모습을 보면 아직도 앳된 기미가 남아 있다. 고등학교까지 졸업한 게 언젠데 아직도 이렇게 애 취급을 하느냐고 종종 아카아시는 입술을 비죽이곤 했지만 그 모습을 보면 더욱 앳되고 어린 것 같았다. 눈을 감고 잠에 빠지면 어여뻤고 눈을 뜨면 시선을 뗄 수가 없어, 그게 지금도 여전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눈에도 그런 것을 안다. 


아주 가끔은 그저 가둬놓고 싶었다. 어디에도 가지 못하게, 누구도 보지 못하게, 그냥 보쿠토 그만 바라보고 그만 생각하게. 다른 사람을 배려할 일도 없고 신경써줄 일도 없게. 누구도 아카아시를 보지 못하게. 


그러지 못하는 건, 아카아시가 붙잡으면 붙잡혀줄 것 같아서였다. 말도 안 되는 억지 부리지 말라며 그를 밀쳐내면 농담처럼 말이라도 해 볼 텐데 정말로 그가 바라는 대로 그늘에 갇혀줄 것 같아서였다. 자신의 터무니없는 욕심인 것을 스스로도 알고 있는데. 


그래도 평소에는 드러내지 않을 수 있는데 오늘 같은 날은 마음이 어쩌지를 못했다. 아카아시가 남들에게서 받아온 사랑을 보면 마음속에 싸매어 두었던 새카만 것들이 고삐를 잃고서 날뛰었다. 네 눈에만 보석인 줄 알았어? 남들 눈에도 그래. 이것 봐, 다들 탐내잖아. 잃고 나서 후회할거야?


그걸 다시 매듭지어주는 것이 자신을 바라보는 아카아시의 푸른 눈동자였다.


“……아카아시, 들어가서 자자.”


보쿠토는 조금 잠겨 갈라진 목소리로 아카아시를 부드럽게 흔들었다. 아카아시가 천천히 눈을 뜬다. 달빛이 물든 청록색 눈동자가 그를 바라본다. 상냥한 그 눈길이 보쿠토 안의 새카만 마음에 매듭을 지어주었다. 보쿠토는 아카아시가 아주 어린 날에 했듯이 그를 향해 팔을 뻗었다. 이젠 잠결이 아니면 안겨주지 않는 아카아시였지만 지금은 괜찮을 것 같았다. 안아 올리자 졸음에 겨운 뺨을 그의 가슴팍에 부빈다. 보쿠토는 아카아시의 이마에 가볍게 입맞춤하고는 아카아시를 침대 위에 뉘어주었다. 


“보쿠토 씨, 왔어요……?”

“응, 지금 왔어. 자자.”

“외식하러…….”

“내일 가자. 미안, 내가 너무 늦어서.”


아카아시는 어렴풋이 눈을 뜨고 보쿠토를 바라보았다. 보쿠토의 등 뒤로 달빛이 비쳐들어 그의 윤곽을 빛나게 하고 있었다. 보쿠토의 눈동자가 새카만 금빛으로 반짝거린다. 아카아시는 보쿠토의 손에 뺨을 파묻었다.


“아니에요. 내일 가요…….”


가두고 싶은 사람이 여기 있다. 갇히고 싶은 사람이 여기 있다. 사랑으로 지어진 감옥이 입을 벌리고 있는데 그 문으로 누구도 들어갈 수 없게 막아서는 것도 사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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