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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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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나 죽어,

내 사랑을 홀로 내버려두게 되니…….

Save that, to die, I leave my love alone



*



남자는 가장 먼저 빨래를 어떻게 하는지 차근차근 알려주었다. 세제는 얼마나 넣고, 섬유유연제는 어떤 것을 쓰면 되는지, 의류에 따라 세탁기에 돌리면 안되는 것, 손빨래를 하거나 세탁소에 맡겨야 하는 것, 색이 짙은 것은 함께 세탁기에 넣으면 안 된다는 것, 주머니가 있는 옷은 세탁하기 전에 주머니를 확인해야 한다는 것, 그런 것들을 끈기있고도 집요하게 알려주었다. 보쿠토는 관심이 없는 것에는 한없이 무딘 사람이었고 빨래는 그의 관심사가 전혀 아니었기 때문에, 보쿠토가 빨래를 제대로 하기까지는 한참이나 걸렸다.


남자는 그 다음엔 간단한 요리를 일러주었다. 처음에는 달걀을 쓰는 것. 토스트. 밥. 한그릇 요리. 요리에도 특별히 솜씨는 없기 매한가지였으나 그래도 빨래보다는 사정이 나았고, 보쿠토는 투박하기는 해도 그럴 듯한 요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다만 도통 국만은 제대로 간을 보지 못하여 남자는 웃으며 됐습니다, 하고 포기했더랬다.


그 이후엔 어떻게 방을 청소하는지 곁에서 붙어 꼼꼼하게 알려주었다. 장식장의 먼지는 주기적으로 털어주어야 하고 쓰레기 버리는 날은 맞추어서 내놓아야 한다는 것, 플라스틱과 캔은 따로 분리수거 할 것, 신상정보가 적혀있는 건 폐기해야 한다는 것.


반년 동안 남자는 보쿠토를 붙들고 끈기있게 그 모든 걸 알려주었다. 그 사이에 겨울에서 여름으로 계절이 바뀌었고 남자는 집안의 커튼을 얇고 투명한 것으로 바꾸고 소파의 커버도 밝은 색 천으로 덧씌웠다.


그리고 이후 반년 동안 남자는 보쿠토에게 이별을 가르쳤다. 처음에는 들어오는 시간이 늦어졌다. 이르게 나갔고 늦게 들어왔다. 그 다음에는 주말 내리 아예 다른 곳에 가 있었다. 함께 있는 동안 다정한 말이 줄었다. 상냥한 손이 줄어갔다.


그리고 겨울이 왔을 때, 남자는 이제 다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가 보쿠토에게 가르쳐줄 것은 남아있지 않았다.


남자가 떠났다.



*



“보기만 해도 춥다, 진짜…….”



코노하는 건성으로 비밀번호를 누르고 안으로 들어와 주위를 둘러보았다. 언제 와도 어느 때 방문 해도 이 집안은 강박적일만큼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마치 모델하우스를 그대로 뚝 떼어온 듯이 생활감이 없었는데 인테리어의 대부분이 여름용 장식과 색이라 한겨울에는 보고만 있어도 등골이 선득해지는 느낌이었다. 실내에 난방이 미리 되어 있지 않았더라면 코노하는 수건이라도 떼어 와서 장식들을 모조리 덮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코노하는 가져온 반찬통을 냉장고 안에 넣어놓고 허리를 폈다. 매끈하게 마른 싱크대, 먼지하나 앉지 않은 식탁, 조미료를 담은 병들이 가지런히 놓여있다. 마치 요리같은 건 하지 않는 것처럼 정갈한 부엌이었지만 여기서 매 끼니가 조리되는 걸 알고 있었다. 코노하는 혀를 끌끌 차고는 침실 문을 열어보았다. 침실도 비슷한 꼴이었다. 가지런히 각잡혀있는 침구와 베개, 협탁에 놓인 생화는 무척이나 생생해서 되레 조화 같았다. 옷장을 열어봤지만 다림질까지 된 옷가지가 완벽하게 걸려있는 것밖에 볼 수 없었다.


거실도 다를 바가 없다. 코노하는 발코니 앞에 서서 얇고 투명한 천자락에 손을 감았다. 한여름에나 쓸법한 커튼이었다. 겨울에는 그 얇은 커튼 너머로 바깥 풍경이 비치는 걸 보기만 해도 추운 느낌이다. 으으으, 코노하는 어깨를 한 번 움츠리고는 거실 쪽으로 몸을 돌렸다가 그만 맥이 탁 풀려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모든 것이 지나칠만큼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실로 완벽한 그림이었다. 소파 곁 협탁에 올라와있는 책 한 권 까지도.


놓여있는 책은 셰익스피어의 소네트 모음집이었다. 코노하는 입술을 악물고 그 책을 집어들었다. 책은 오래된 것 갈기도 했고 새것 같기도 했다. 언뜻 보아서는 도무지 시간을 알 수 없는 까닭은, 보쿠토가 이 책을 마치 목숨처럼 아꼈기 때문이었다. 코노하는 책을 찢으려고 힘을 주어 펼쳤다가 차마 그러지 못하고서 다시 책을 도로 접고 말았다.


남아있는 물건은 이것밖에 없었다.


그 때 현관문에서 열쇠 돌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코노하는 책을 쥔 채 당황하다가 얼른 들고 온 가방에 책을 집어 넣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렸다.



“어? 누구……. 코노하!”

“……보쿠토.”



조금 일찍 돌아온 보쿠토였다. 코노하를 보고서 반가운 표정을 한다. 코노하는 예정에 없이 만난 친구의 얼굴을 보고서 말 없이 그의 어깨를 몇 번 두드려주고는 부엌을 가리켰다.



“집에서 찬거리 넉넉하게 싸주셔서 좀 가져왔다. 챙겨놨으니까 이따 먹어.”

“헉, 진짜? 불고기도 있어?”

“이게 주는 대로 안 먹지? ……있다, 인마.”



보쿠토가 어린애처럼 활짝 웃고는 냉장고로 뛰어간다. 그러고서는 기껏 코노하가 신경써서 챙겨넣은 반찬통을 하나 하나 꺼내보며 좋아하는 것이었다. 코노하는 가만히 그 모습을 주시하다가 더는 바라보지 못하고 창 밖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하늘에는 슬금슬금 잿빛 구름이 들이차고 있었다. 곧 겨울비가 쏟아질지도 모른다. 코노하는 우산을 챙겨오지 않았다는 핑계를 대고 현관을 향했다. 보쿠토는 그 새 벌려놓았던 반찬통을 모두 정리해 집어넣은 뒤였다. 대충 신발에 발을 집어넣던 코노하는 보쿠토가 벗은 구두가 이미 신발장에 들어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집에 우산 많아! 빌려 줄게.”

“됐어, 인마. 그렇게 가져간 우산만 벌써 몇갠데 아, 그러네. 지난 번에 빌려갔던 것도 또 깜빡하고 안 가져왔네…….”

“괜찮다니까.”



보쿠토는 친구와 헤어지기 싫어하는 어린애같은 천진난만한 얼굴이었다. 코노하는 그 얼굴을 쳐다보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반찬통은 알아서 가져다 주라는 말만 두고서 몸을 돌렸다. 보쿠토가 바깥까지 나오려고 했지만 코노하가 만류했다. 보쿠토가 다음에 보자는 말로 그를 배웅한다.


코노하는 엘리베이터에 타고 나서야 깊은 한숨을 몰아쉬었다. 가방이 쇳덩이라도 집어넣은 것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코노하는 어깨에 걸친 가방 안을 흘끗 바라보았다. 셰익스피어의 소네트였다. 이 책 한 권으로 무엇도 변할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가져와버리고 말았다. 주인에게는 말도 없이. 코노하는 양손을 맞잡았다. 하지만 할 수 있는 기도는 없었다.



*



코노하가 보쿠토의 아파트 열쇠와 비밀번호를 얻게 된 것은 아카아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그 때의 보쿠토는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지 못했다. 두 사람이 마지막 반년간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알고 있었던 코노하는 처음엔 그게 그나마 불행 중에 다행이었다고 생각했지만, 보쿠토의 모습을 보고서 그 생각을 취소했다. 그 중에 다행인 것은 무엇도 없었다. 그 어떤 것도 소용이 없었다.


살아 있는 사람 하나만이라도 건사하기 위하여 코노하는 보쿠토를 거의 쫓아다니다시피 했다. 보쿠토가 아카아시를 따라 죽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사람들은 그 혼자만이 아니었다. 그 때 보쿠토의 상태는 정말로 그랬다. 아카아시의 장례식 소식마저 뒤늦게 들어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게 보름이 지났을 때 코노하는 소리쳤다.


아카아시가 너 이러고 있는 거 보면 참 잘했다고 하겠다!


금빛 눈동자에서는 이미 혼이 빠져나갔고 잿빛 머리카락이 아주 무채색처럼 보였다. 보쿠토를 땅에 붙잡아 두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코노하는 살려는 생각을 하지 않는 보쿠토를 붙잡고서 악에 받쳐서 외쳤는데 그 말 한 마디에 마치 벼락처럼, 그 금빛 눈동자가 깨어져나갔다.


코노하는 지금도 그 때 그렇게 말했던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보쿠토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신의 음성을 들은 것같은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코노하는 그렇게 감정이 뚜렷하게 살아있는 보쿠토의 얼굴이 너무 오랜만이어서 얼떨떨하게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그 뒤부터였다. 보쿠토의 집은 그가 정신을 차리기 전에도 사람 사는 것 같지 않았지만, 그가 정신을 차리고 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코노하도 한 시름 놓았다고 생각했다. 보쿠토를 욕실에 밀어넣었다가도 그가 오래도록 나오지 않으면 행여나 욕조에 몸 담그고 죽어버릴까 싶어 욕실 안으로 쳐들어가기까지 했던 코노하로서는 보쿠토의 번듯한 모습이 눈물날 만큼 반갑고 또 안심이 된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점점 더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알게 됐다.


마치 결벽할 만큼 똑같은 모습을 유지하는 집, 언제나 반듯한 차림새를 하고 있는 보쿠토, 현관의 비밀번호는 한결같이 아카아시의 생일이었고 그런 보쿠토에게서는 아카아시를 잃은 흔적을 엿볼 수가 없었다. 아카아시가 죽었다는 그 사실만 보쿠토에게서 증발한 것 같았다. 보쿠토는 밤이 늦으면 집에서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서둘러 귀가했고 특별한 날마다 꽃과 케이크를 샀다. 12월이 되면 생일 선물을 준비하느라 매일매일 귀까지 빨개져서 어쩔 줄을 몰랐다.


죽은 사람의 생일 선물을 준비하는 얼굴 그 어디에도 그늘이라곤 없었다. 그 첫 번째 겨울이 왔을 때야 코노하는 보쿠토의 집 어디에도 무엇하나 달라진 게 없다는 걸 깨달았다. 모든 것이 여름 그대로였다. 시린 듯이 얇은 커튼, 벽에 달린 조개 장식, 푸른 톤의 소파, 그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코노하는 보쿠토가 이런 것엔 도통 능숙하지 못하여 그저 계절을 따라가지 못하고서 방치해 둔 것뿐이라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는 걸 알았다.


보쿠토가 강박적으로 청소하고 유지하고 관리하는 것은 바로 아카아시와 함께 오로지 기쁘기만 한 시간을 보냈던 바로 그 여름의 풍경이었다. 그 풍경 속에서 보쿠토의 시간은 멈춰있는 것 같았다. 여전히 아카아시가 어딘가에 살아있는 것 같았다.


그걸 깨달았을 때 코노하는 사색이 되어 보쿠토를 붙들었다. 하지만 그 순간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말은 없었다. 뭐라 말한단 말인가? 아카아시는 죽었어! 코노하는 자신의 숨이 끊어져도 보쿠토 앞에서 그 말은 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그를 보고 있는 보쿠토에게 마침내 토하듯 말해버리고 말았다.


-아카아시는 죽었어!


외침이 허여멀건하게 울려퍼졌다. 코노하는 보쿠토에게서 무언가 반응을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당황이나 좌절이나, 분노라도 좋았다. 하지만 보쿠토는 멀거니 눈을 뜨고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응. 알아. ……왜?


왜냐고? 코노하는 머리 끝까지 피가 몰려, 정작 그가 죽어버릴 것 같았다. 보쿠토는 천연덕스럽기까지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알고 있어. 왜? 무슨 일이야?


보쿠토는 코노하의 말에 상처를 받은 것도 아니었고 현실을 회피하는 것도 아니다. 코노하는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보쿠토는 너무나 멀쩡했지만, 그게 정말로 멀쩡한 것이 아니라는 것만 알 수 있을 뿐이었다.


-아카아시가 다 알려줬어.

-전부 가르쳐줬어, 어떻게 해야하는지.

-이제 알겠어.

-그러니까 그대로 하면 돼.

-걱정하지 마, 코노하.


그를 향해 웃는 보쿠토는 자못 의젓하기까지 했다. 마치 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 3학년들이 선배라며 아이스크림을 잔뜩 사들고서 체육관으로 향하던 그 날, 그들을 돌아보던 것처럼 짓궂고 의젓한 모습이었다.


가르쳐주다니 무엇을?


코노하의 질문에 보쿠토는 녹아날 듯이 진득히 웃으며 하나 하나 모두 그에게 말해주었다. 입는 것, 먹는 것, 그리고 살아가는 것……. 꽃을 들이고 분갈이를 하는 것도, 저녁에 맥주와 곁들일 수 있는 간단한 안주를 만드는 것도, 재미있는 TV 채널도,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수십권의 책, 모두 알려주었다고.


코노하는 알았다. 아카아시는 그 모든 것을 준비해온 것이다. 신중하게, 무엇도 빠뜨리지 않고서, 보쿠토가 혼자 남겨지더라도 망가지지 않도록. 무엇이든 할 수 있도록. 그리고 그것들 중에서 아카아시가 가장 가르치고 싶었던 것이 무엇인지도 코노하는 알 수 있었다. 마지막 반년간 까닭을 몰랐던 두 사람의 불화.


이별…….


반년에 걸쳤던 두 사람의 불화와 냉담은 오로지 아카아시만의 뜻이었다. 아카아시가 가장 알려주고 싶어했던 것이 그것이었던 게 분명했다. 다른 모든 것들을 처음 반년동안 모두 일러주었다면 이별만은 그것 하나만 공을 들여 반년 내도록, 보쿠토에게 알려주려 했던 것이었다. 코노하는 눈물을 흘리고 싶었다. 그것이 가장 무참한 실패였다.


보쿠토의 집은 정말로 무엇 하나 변하는 게 없었다. TV가 고장났을 때 보쿠토는 같은 모델을 구해왔다. 커튼도 소파의 커버도 침구도 그대로였다. 벽지도, 가구도, 장식장의 조미료 병마저 변하는 게 없었다. 가장 근사한 모습 그대로, 마치 잡지나 모델하우스에서 그대로 떼어온 것처럼 가장 깨끗한 모습 그대로였다.


보쿠토는 알고 있다고 했지만 아니, 보쿠토는 모른다. 보쿠토에게 아카아시의 상실은 없는 일이다. 같은 책을 몇 년이나 같은 장소에 계속해서 두면서 하염없이 펼쳐 보는 것이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던가. 코노하는 부정할 수 있었다. 그럴 수는 없다고.


그런데 그 그럴수 없는 것이 몇년 째였다.


한 해가 지나면 보쿠토도 지치겠지, 코노하는 그렇게 생각했다. 두 해가 지나면 보쿠토도. 3년, 4년……. 기대는 허물어졌고 보쿠토는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이 어떻게 일평생을 그렇게 살 수 있단 말인가. 가장 아름다웠던 시간의 장소에 붙박혀 그 사람의 죽음이 없는 일인 것처럼, 어떻게 그렇게. 코노하는 차갑게 식은 자신의 두 손을 세게 움켜쥐었다.


보쿠토는 몇 년이나 책 한권을 같은 장소에 두고서 목숨처럼 아꼈다. 아카아시가 남겨놓은 유일한 물건이기 때문이었다. 남은 유품이, 제대로 된 물건이 단 하나도 없다고 했다. 옷은 모두 기부하거나 버렸고 소지품도 마찬가지여서 그들에게 주어진 건 영정 사진 속의 단정하고 희끗한 그 얼굴 뿐이었다. 마치 어제 만나고 헤어질 때처럼 그 모습 그대로. 그런 가운데에 딱 하나 남은 것이 바로 이 책이었다. 셰익스피어의 소네트 모음집.


아카아시는 죽음을 선고받고 남은 1년을 오롯이 보쿠토를 위하여 모두 썼다. 아카아시가 이런 결말을 바라지는 않았다는 걸, 코노하는 알고 있었다. 그러니 아카아시도 용서할 거야. 코노하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


사랑만은 세월의 놀림감이 아니어라,

Love’s not Time’s fool

장밋빛 입술과 뺨은 세월의 낫에 희생될지라도…….

though rosy lips and cheeks

within his bending sickle’s compass come



코노하는 시집을 손끝으로 찬찬히 훑었다. 학창시절에도 지금도 이런 시 같은 것에 관심을 둔 적은 없었다. 보쿠토의 일이 아니었으면 그가 평생가도 펼쳐볼 일은 없었을지 모른다. 시집은 군데 군데 밑줄이 그어져 있기도 했고 접힌 곳도 있었다. 아마 생전에 아카아시가 그런 것일 테다.



‘장밋빛 입술과 뺨은 세월에 희생될지라도…….’



하지만 세월에게 휘둘릴 장밋빛 입술도 뺨도 이미 없다. 아카아시는 그들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반듯하게 웃고 있는, 한 구석에는 소년같은 색이 여전히 남아있는 청년이었다. 영원히.


세월에게 희생될 육신은 이미 재가 되어 앞으로도 영영 변할 리가 없고 남은 것은 그저 사랑 뿐이다. 코노하는 보쿠토가 왜 이 시집을 버리지 못하는지 알 것 같다고 생각했다.



사랑은 짧은 시일에 변치 않고

Love alters not with his brief hours and weeks



보쿠토에겐 평생마저 짧은 시간이다.


그리고 짧은 시간동안 영원히 변치 않을 셈인 것이다.



단지 견디어 나가느니라, 운명의 끝까지…….

But bears it out even to the edge of doom.


이것이 틀렸노라 증명된다면,

If this be error and upon me proved,


나는 글을 쓰지 않으리라, 사람을 결코 사랑하지 않으리라

I never write, nor no man ever loved.



코노하는 고개를 들었다. 겨울비가 매섭게 쏟아지고 있었다. 창을 모두 닫아두고 있는데도 한기가 여기까지 느껴졌다. 코노하는 지긋이 눈을 내리감았다.


이 생각이 틀렸다면 결코 사람을 사랑하지 않겠다. 이 생각이 맞다면, 평생을 변치 않는 사랑 속에 산다는 뜻. 무엇을 어떻게 말한다 해도 보쿠토에게는 한 사람뿐이라는 이야기였다.


아카아시가 남기고 간 단 한권의 책이 영원한 사랑을 노래하는 한 보쿠토는 돌아서지 않는다. 그럴 수 없었다. 코노하는 이 책을 불살라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러려고 해도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그에게도 이 책은 아카아시의 단 하나뿐인 유품이었다. 코노하는 마른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



코노하는 현관 문을 제대로 닫지도 못했다. 만일 보쿠토가 그를 의심한다면 코노하는 모른 척 잡아뗄 작정이었다. 화를 낸다 해도 그러려고 했다. 하지만 보쿠토는 그저 떨리는 몸으로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참혹할 만큼 애달픈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입술이 파랗게 물들어 있고 추위에 하얀 입김이 피어올랐다.



“보쿠토, 너 비를 이렇게 맞으면…….”

“코노하.”

“…….”

“있지, 내……내가 되게 아끼는 시집이 하나 있는데…….”



그의 몸보다 목소리가 바르르 떨렸다. 코노하는 아연한 표정으로 보쿠토를 바라보기만 했다. 보쿠토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하며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나 정말 그거 없으면 안 되는데, 그게……. 그게 갑자기 없어져서……. 그런데 어디에 뒀는지 생각이 안나. 항상 두는 곳에 둔 것 같았는데, 그게 없어져서…….”

“보쿠토, 너 비 너무 많이 맞았다. 일단 좀 뜨거운 물에 씻…….”

“아무리 찾아도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어. 코노하, 모르겠어…….”



그래, 보쿠토는 의심같은 걸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코노하는 자신의 마음이 어딘가 짖이겨지는 걸 느끼며 보쿠토를 바라보았다. 보쿠토의 뺨에 빗물이 아닌 것이 뚝 흘러내렸다.



“나 정말 그거 없으면 안 되는데 못 찾겠어, 어떡하지? 코노하, 어떡하지…….”

“……아카아시가 남기고 간 거……말하는 거야?”



보쿠토는 다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이 더없이 간절했다. 코노하는 일단 보쿠토를 끌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손에 닿은 보쿠토의 몸이 얼음장같았다. 아무 말 없이 보쿠토를 억지로 씻기고 옷을 갈아입혔지만 보쿠토는 마음이 다른 곳에 가 있는 사람처럼 그저 어쩔 줄 모르기만 할 뿐이었다. 코노하는 마른 입술을 다셨다.



“……비슷한 책으로 하나 더 사자. 비도 이렇게 오는데…….”

“아, 안돼. 찾아야 돼. 안 돼.”

“아카아시 유품이라서?”

“……그 책에…….”



보쿠토가 천천히 고개를 들고 코노하를 바라보았다. 금빛 눈동자가 아주 먼 곳을 바라본다. 코노하는 눈을 깜박거렸다. 카메라의 렌즈가 이리저리 초점을 잡는 것처럼, 보쿠토의 눈동자가 시간의 초점을 잡고 있었다. 아아, 과거로. 지금보다 더 과거로. 조금 더 과거로. 아카아시가 살아있던 겨울을 거슬러, 가을을 지나, 다시 여름으로…….



“그 책에, 내 사랑이라는 단어마다……. ‘my love’라는 말 마다…….”



-아카아시가 밑줄을 그어뒀어.



그 말을 하는 보쿠토는 친구와 싸웠다는 걸 고백하는 것처럼 쑥스러운 것 같았다. 코노하는 눈을 깜박이며 보쿠토를 바라보았다. 보쿠토는 찾지 못하는 책을 두고 절망하면서도 동시에 그 때의 기억에 잠겨 한 치의 틈도 없이 행복한 듯 보였다.



“가을 겨울에 나랑 아카아시, 정말 많이 싸웠거든……. 그래서……. 아카아시 진짜 엄청 냉정했단 말야, 그 때. 완전 북극처럼 찬바람 쌩쌩이어서…….”



어제 싸워서 이제 화해할 마음을 먹는 것처럼 조금은 부끄러워하는 목소리로 사랑을 고백한다. 우리 많이 다퉜어, 그래서. 사랑한다는 말도 안 해줬단 말야, 그래서. 그치만 거기에는 아카아시가 밑줄 전부 그어뒀어, 그래서. 그걸 보면 아카아시가 날 사랑했던 걸 알겠어,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 책이 아니면 안 돼. 그 책이 없으면 안 돼…….”



눈동자가 다시 현재를 바라본다. 그 눈을 마주하고 코노하는 얼굴을 감싸쥐고 말았다.


고장난 부품을 빼어버리고, 제대로 된 것을 다시 끼워서, 그렇게 번듯하게 살아가주었으면 했다. 아카아시가 그것을 바랐던 걸 안다. 보쿠토가 자신과 이별하고, 그 이별이 비록 죽음이어도, 그래도 이별 후에 다시 똑바로 걸어가길 바랐던 것을 알고 있었다.


보쿠토는 고장난 부품을 빼어버릴 의지도 제대로 된 것을 다시 끼울 의지도 없었다. 고장난 부품을 빼어버리면 그저 그대로 멈춰버릴 작정이었다.


없으면 안 돼, 그렇게 말하던 보쿠토가 스르르 허물어진다. 코노하는 놀라서 다급하게 보쿠토에게 다갔다. 당황해 이름을 부르니 이마가 고열로 들끓고 있었다. 코노하는 입술을 세게 깨물고 고개를 들었다. 내일이 아카아시의 기일이었다.



*



내 사랑이 진실된 사랑을 맹세하면

나 그것 거짓인줄 알면서도 믿노니…….

When my love swears that he is made of truth

I do believe him, though I know he lies


그러나 단정코 나의 연인은

잘못 비유된 그 누구보다도 진귀하여라

And yet, by heaven, I think my love as rare

as any he belied with false compare


시 속에서 나의 사랑이 오래도록 빛나게 하는 수밖에……

In black ink my love may still shine bright.



코노하는 천천히 시집을 넘겨보았다. 보쿠토의 말 그대로였다. My love, 그 말마다 아래에 검은 잉크로 밑줄이 그여 있었다. 조금 망설인 것같기도 했고 다정하고 천천히 그은 것 같기도 한 선이었다. 코노하는 단어를 손 끝으로 매만져보았다.



다만

나 죽어,

내 사랑을 홀로 내버려두게 되니…….

Save that, to die, I leave my love alone



어쩌면 아카아시는 소용없을 거라는 걸 알았을지도 모르겠다. 코노하는 보쿠토의 침대 곁에 앉아 그가 깨어나길 기다리며 그렇게 생각했다. 알아도 내버려두지 못했던 것 뿐이었을지도.


마침내 보쿠토가 눈을 떴을 때 코노하는 나직하게 사과의 말을 전했다. 미안. 내가 잠깐 보다가 가방에 넣고 깜빡했어. 보쿠토는 그런 코노하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고 코노하는 보쿠토의 곁에 시집을 내려놓았다. 보쿠토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하룻밤 새에 많이 수척해진 모습이었으나 그 눈빛에 천천히 생기가 돌아오는 모습은 코노하가 알던 그대로였다.



“괜찮아.”



그 말에 코노하의 가슴이 까닭도 모르고서 덜컥 내려앉았다. 보쿠토는 저린 팔을 주무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가 어디인지 가늠하려는 모습이었다. 코노하는 화제를 돌리기 위해 서둘러 이것 저것 얘기를 늘어놓았다. 갑자기 열이 끓어 하룻밤 입원해 있었다는 얘기에 보쿠토는 조금 놀란 듯이 눈을 끔벅이다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겨울비 좀 맞았다고 열이 나다니, 하며 스스로의 체력에 한탄하는 모습이었다. 정말로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보쿠토, 진짜 미안하다. 내가 책을…….”

“아냐, 괜찮대도!”



보쿠토가 다급히 사과하는 코노하의 말을 끊었다. 그가 책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천천히 쓰다듬는다. 코노하는 파리한 낯빛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괜찮다고 말하는 보쿠토의 표정과 목소리가 마치 그를 고등학교 시절로 되돌려 놓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이 완벽했던 그 때로. 봄이 되어 꽃이 피고 여름 되어 천둥이 쳤다가도 가을에 낙엽이 아름답게 흩어지고 겨울엔 눈이 왔던, 그저 완벽했던 그 때로.


하지만 시간은 거꾸로 흐를 수가 없고 그들 사이에 아카아시는 없다. 그런데 어떻게.



“코노하, 그거 알어? 아카아시 진짜 절~대 꿈에 안 나와준다?”

“…….”



보쿠토가 자못 섭섭한 듯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코노하는 저 얼굴을 본 기억이 있었다.


-아카아시가 어젯밤에 전화도 안 받은거 있지!


고등학교 때였다. 점심시간에 나온 팩음료를 꾸깃꾸깃 접으며 투덜거리던 보쿠토의 얼굴. 바로 그 얼굴이었다.



“목소리도 절~대 안나와. 얼굴도 안 나와. 뭐 이러냐, 진짜. 제발 한 번만 나와 달래도 죽어도 사람 말은 안 들어줘. 고집 대박이야, 진짜.”



보쿠토는 웃으면서 말하고 있지만 그것이 얼마나 간절했는지 코노하는 알고 있었다. 아카아시가 죽은 직후 보쿠토가 매달린 건 그것뿐이었다.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보고싶다고 보쿠토는 몸이 부서질 것처럼 울었다. 코노하는 바로 옆에서 그 모습을 계속 봐왔다. 보쿠토가 돌연 번듯하게 살아가게 된 그 순간에도, 코노하는 전부 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남아 있는 거, 이거 뿐이었는데……. 그런데 이제 알겠어. 왜 아카아시가 꿈에도 안 나오는지.”



보쿠토가 또 녹진히 녹아날 듯이 꿈같은 표정으로 미소지었다. 코노하는 입술을 달싹였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꿈에 나올 필요 없어.”



코노하는 아니야, 하고 외치고 싶었다. 그게 아니야, 그렇게 소리치고 싶었는데 누군가가 목구멍을 움켜쥔 것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다. 코노하는 한 마디도 하지 못하고서 보쿠토의 꿈꾸는 듯한 얼굴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항상 함께 있으니까, 괜찮아.”



사람을 홀려 미치게 만드는 아름답고 견고한 성이 완성되어 가는 소리였다. 코노하는 아연하게 얼어붙어 그 성을, 보쿠토를 바라보기만 했다.


아카아시가 꿈에 옷깃 한 자락 흘리지 않아도 보쿠토는 이제 괜찮다. 아카아시의 마지막 손길이 남아있는 시집을 잃어버리게 되어도, 보쿠토는 이제 괜찮다. 집안의 모든 가구와 커튼을 바꿔도, 이사를 해도, 보쿠토는 이제 괜찮다. 저 시집이 눈 앞에서 불타버린다 해도 보쿠토는 여전히 괜찮을 것이다.


고장난 부품은 빼어버리고 제대로 살아가주었으면 했다. 코노하는 웃는 보쿠토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오로지 사랑으로 이루어진 견고한 성이 마침내 완성되어 그 문을 닫고 있었다. 고장난 부품을 몇 번, 몇 십번, 몇 백번 빼내도 똑같다. 보쿠토에겐 그것과 똑같은 모양새의 부품이 영원만큼 있었다.



“……아, 그치만~! 그래도 꿈에 나와주면 덥석 붙잡아야지!”



그래서 꿈에서 깨지 않으려고.


코노하는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다. 보쿠토가 이제 멀쩡해졌다며 팔을 붕붕 휘젓다가 때마침 들어온 간호사에게 꾸중을 들었다. 링거를 갈아준 간호사는 병실을 나갈 때 결국 웃으면서 나섰다. 항상 타인을 웃게 만드는 보쿠토였다. 하지만 자신은 이제 영영 보쿠토로 인해 웃음지을 수 있는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보쿠토는 돌아가겠다는 코노하를 붙잡았다. 병실에 그 한사람 뿐이라 심심하다는 이유에서였다. 결국 코노하는 붙들리고 말았다. 해가 저물 때까지 수다는 그치지 않았고 그 대화 사이사이에 아카아시의 이야기가 파도처럼 들어왔다 나갔다 했다. 파도는 영원히 그치는 법이 없고 성은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을, 코노하는 받아들이기로 했다.












다만

나 죽어,

내 사랑을 홀로 내버려두게 되니…….

Save that, to die, I leave my love alo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