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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노진 | Believe in you

2017. 3. 31. 23:12

++애니메이션 12화까지 시청 후 작성한 글입니다~! 스포일러 있을 수 있어요! 











일과는 규칙적이었다. 눈을 뜨고 일어난다. 바라본다. 지켜본다. 이따금씩 양손을 맞잡고 바라본다. 가는 족적을 따른다. 지켜본다. 기록을 남긴다. 또 지켜본다…….


그것은 사람을 대하는 것이었다기보다는 신을 대하는 것과 비슷했다는 것을, 니노는 스물다섯살이 되던 해 부친이 ‘고등학교에 들어가라’라고 말한 순간 깨달았다. 갑자기 신과 대화를 나누라는 말을 들은 것처럼 당혹스러웠던 것이다. 신의 음성을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다는 것도 그 때 깨달았다.


그리고 그 이후로 몇 년이나 흘러 그의 신은 아직도 멀쩡히 살아 있으며, 심지어 술에 잔뜩 취해 곯아떨어진 채였다. 니노는 테이블에 턱을 괴고서 엎어진 채 자고 있는 맞은편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기대어 있는 팔에는 금빛 머리칼이 흩어져있다. 니노는 손가락 끝으로 금발을 가닥가닥 흐트러뜨리다가 휴대전화를 꺼내들었다. 찰칵, 하고 사진을 찍는다. 


아무에게도 보내지 않는 사진이었다. 


*


“……머리 울려.”

“술을 그렇게 먹었으니까 그렇지!”


꿀색 머리카락을 올려 묶은 소녀가 쨍하니 말하고는 자신보다 색소가 옅은 남자 앞에 따뜻한 김이 올라오는 찻잔을 내려놓는다. 매섭게 말해보려고 하는 눈치였지만 천성이 말미가 달아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얇은 담요를 어깨에 두른 남자는 식탁 이마를 감싸쥐며 소파에 몸을 파묻었다.


“니노는?”

“조금 전에 나갔어.”

“여전히 바쁘네…….”


일이 모두 끝나고 난 뒤부터는 보고같은 건 하지 않아도 되는 거 아니었나, 진은 양손에 머그를 손에 쥐며 숙취로 멍한 머리로 생각했다. 


“응?아, 니노 다시 온대.”

“다시 와?”

“응, 잠깐 뭐 살거 있다고 나갔거든, 사서 온대.”

“뭘 사러 갔지…….”


진은 김이 올라오는 허브티를 입으로 넘기며 중얼거렸지만 정말로 니노가 굳이 주말 아침부터 쇼핑 나간 품목을 궁금해 하는 건 아니었다. 돌아온다면 곧 알게 될 것이고 궁금할 것도 없다. 그러니 중요한 건 니노가 다시 온다는 사실뿐이었다. 


진이 찻잔에 입을 두 번 대기 전에 초인종이 울린다. 진은 고개를 들어 인터폰 쪽을 쳐다보았고 외투에 조그만 크로스백을 두른 롯타가 버튼을 눌렀다. 식탁에선 보이지 않는 현관쪽에서부터 자박자박 걸음소리가 들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눈가로 청록색 머리카락이 스쳐지나가는 장신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니노!”

“롯타, 나가?”

“응, 요 앞에 새로운 케이크 가게가 생겼다고 해서. 그럼 니노도 왔으니까 나 갔다 올게! 니노, 우리 오빠 잘 부탁해! 오빠도 오늘은 얌전히 있어야 돼, 담배 너무 많이 피지 말고!”


소녀가 재잘재잘 주의사항을 늘어놓고서는 조르르 나간다. 니노가 그런 소녀의 뒷모습을 흘끗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멀찍이서 달칵, 문이 닫히며 잠금쇠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고 실내는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숙취 많이 심해?”

“……너 때문이잖아.”

“네가 마신 거잖아?”

“네가 먹이니까 그렇지…….”


니노는 진이 투덜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지갑은 식탁 위에 올려놓고서 자연스레 부엌의 싱크로 향했다. 마치 자기 집인양 익숙한 동작이었다. 포트에 물을 끓이며 상부장에서 머그컵을 하나 꺼낸다. 손에 들고 있던 크래프트지로 만든 종이봉투에서 작은 갈색 유리병이 나왔다. 뚜껑을 돌려 열고 병에 든 액체를 머그잔에 붓는다. 곧 물이 금방 끓었다. 니노는 끓는 물을 머그에 붓고는 티스푼으로 내용물을 휘저었다. 고요한 실내에 달그락거리는 소리만 들린다. 


그 소리가 멎었을 때 니노는 진이 앉아있는 의자 뒤에 서 있었다. 진이 고개를 위로 들어 니노를 바라본다. 니노는 빙긋 웃으며 진의 손에 들린 잔을 빼내고 머그를 내려놓았다. 


“마셔.”

“……이게 뭔데……?”


무엇이냐고 물으면서도 진은 이미 머그를 입에 대고 있었다. 니노는 진의 옆에 있는 의자를 끌어내 앉으며 대답했다.


“숙취해소제. 조금 달게 나온 게 있다길래. 어젯밤엔 약국 문이 다 닫아서 살 수가 없었거든.”

“……이거 사러 갔었어? 네 건.”

“난 술 많이 안 마셨지요?”


많이 마신 건 너잖아, 니노가 식탁에 팔을 올려 턱을 괴면서 빙긋이 웃는다. 진은 ‘달다니, 어디가?’라며 투덜거리면서도 머그잔을 홀짝 홀짝 넘겼다. 


“오늘은……일 없어? 안 나가도 돼?”

“내 일은 지금 숙취에 시달리고 있어서 말이지. 바구니 안에 얌전히 둬야 해.”

“…….”


니노가 손끝으로 진의 이마를 툭툭 친다. 진은 한숨을 내쉬며 니노가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두었다. 


“다음부턴 이런 거 좀 사둬야겠어…….”

“왜?”

“집에 없으니까 매번 네가 사러 갔다오잖아.”

“갔다 오면 되지.”


니노는 진이 마시던 허브티를 대신 넘기며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별 문제 될 게 있는지 전혀 모르겠다는 투였다. 진은 잔을 내려놓고 니노를 바라보았다. 니노는 거실 쪽 탁 트인 창 너머 바깥을 바라보고 있었다. 


“니노.”

“음.”


계속 이야기하라는 뜻이다. 하지만 그의 말은 들어주지 않을 거란 뜻이기도 했다. 진은 니노의 옆모습에서부터 시선을 내려 그의 허리께를 바라보았다. 니노가 자주 걸치는 짙은 색 자라목 스웨터 안에는, 그에겐 보여주지 않을 흉터가 있을 것이었다. 


“그러지 않아도 되잖아, 이제.”


타인에게 헌신하는 삶을 비난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의 마음에는 여러가지 색깔과 형태가 있다. 표현은 더욱 다를 것이다. 니노가 온전히 스스로만을 위하여, 누군가를 오롯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토록 헌신하는 것이었다면 진도 아무 말 하지 않았겠지만. 


“내가 진짜 왕자인 것도 아니고, 니노 너도…….”

“진짜 왕자가 아니라니?”


니노가 천천히 그를 돌아보며 반문한다. 진은 한숨을 내쉬었다.


“혈통상의 문제를 말하는 게 아니라. 지위가 말야. 나는 그냥 진 오터스고 니노 너는…….”


진은 말을 하다가 멈추었다. 


니노는 부드러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진은 눈을 깜박거리며 니노를 바라보았지만 그런다고 해서 전혀 모르던 것을 저절로 알게 되지는 않았다. 진은 머그잔으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불투명한 액체 위로 자신의 얼굴이 비쳤다가 금방 흔들려 일그러졌다.  


아직도 니노의 진짜 이름을 모른다. 


“그래. 너는 그냥 진 오터스, 나는 그냥 니노지.”


니노는 진의 시선이 다른 곳으로 향한 사이에 잠시 주먹을 쥐었다 폈다. 망설임은 금방 흐트러졌다. 니노는 머그를 쥐고 있는 진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니노라는 이름은 도와를 떠나며 지은 것이다. 오로지 눈 앞의 이 남자를 위해 만든 이름이나 다름없었다. 


“누가 시켜서 억지로 이러는 게 아냐.”

“억지로 한다는 뜻이 아니야. 나는 그냥 네가 좀 더 너 스스로를 위해도 좋지 않겠냐는 거잖아. 후라와우에서도, 아니, 열차 사고가 있었을 때에도…….”


니노는 천천히 진의 손 위에서 자신의 손을 뗐다. 진의 표정 없는 푸른 눈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드러나는 표정이 옅은 눈동자 안에서 깊은 부채감이 느껴진다. 니노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처음으로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했던 비 내리는 그 날 밤부터 줄곧 마음에 두고 있었나. 


하지만 그 날이야말로, 10년도 더 전의 그 날이야말로 자신이 이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다 바치겠노라 맹세한 날이었다. 


사고는 예고없이 무정했고 뒤집어진 열차에서 산 자가 나오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진은 부모를 잃었다. 자신은 아버지를 잃었다. 가족을 잃은 건 두 사람 모두 같았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에게는 신이 있었다.


“진.”

“……니노.”

“하느님에게 기도하는 사람들은 하느님을 위해서 기도하는 걸까?”

“…….”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해.”


세계가 다 무너지고 부서졌다고 생각했는데 한 줄기 빛이 있었다. 그에겐 신이 있었다. 믿고 의지해서 버티고 살아갈 수 있었다. 신을 바라보고 위하고 또 바라보며 상처를 치유해 나갔다. 신이 다치지 않게 지키고 보듬으려 했던 건 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였다. 


하지만 진에게는 그런 신 같은 것이 없었다. 신을 가진 건 니노, 그뿐이었다. 


“사람이 주말마다 교회에 나가고 기도하는 건 말야, 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잖아? 하느님 안위를 위해서가 아니라.”

“교회에 다닌다고 총 맞아 죽지는 않아.”

“아하하, 진. 과격해.”


니노가 낮게 웃는데 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니노가 마시던 찻잔을 빼앗아 식탁에 내려놓고서는 그대로 진이 입고 있는 스웨터를 잡아올렸다. 얄팍한 근육이 들어찬 복부 바로 곁을 비껴간 흉터가 있다. 심약한 사람이라면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를 만큼 험한 흉터였다. 


“아, 진. 이거 좀 부끄럽거든…….”

“자기가 죽는 것도 아랑곳 않으면서 자기 자신을 위한다고 말할 수 있어?”

“그건 좀 얘기가 다르지. 일단 나는…….”

“너는?”

“나는, 음…….”


니노는 진의 팔을 천천히 잡아 내리고, 끌려올라간 스웨터도 정돈한 뒤에 다시 진을 식탁 의자에 앉혔다. 격하게 움직이느라 흘러내린 담요도 다시 어깨에 둘러준다. 니노는 말을 제대로 끝맺지 않은 채 진을 바라보았다.


일단 나는, 네가 없으면 살고 싶지 않으니까.


하지만 이런 얘기를 했다간 이 아닌 척 마음이 여린 친구는 또 어쩔 줄 모를 게 분명했다. 차분한 얼굴로 아무렇지 않다는 얼굴을 하면서도 날이 새도록 술을 마실 것이다. 다음날 뻔히 이렇게 숙취로 고생을 할 걸 알면서. 


“키가 크잖아? 너보다 많이 크다고?”

“……니노.”

“농담이 아니라. 그 땐 멍청이들이, 누가 휩쓸릴까 싶어 어영부영 하고 있었거든. 제대로 못 맞출 줄 알았어.”


그러니까 너는 걱정할 거 아무 것도 없어. 더는 제대로 된 대화가 되지 않을 것을 알았는지 진이 한숨을 내쉰다. 거기에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감싸쥐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니노는 따뜻한 물을 더 타주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말인데 좀 더 자.”

“담배 한 대만 피고. 라이터 어디 갔지…….”

“여기.”


니노가 부엌 끄트머리 선반에 놓여있던 라이터를 집어 가볍게 던졌다. 그 사이에 물이 금방 끓어오른다. 니노가 진의 머그에 물을 채워주는 사이에 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런 것까지 다 아는 거야, 정말…….”

“보인 걸 기억해뒀던 것 뿐이야.”

“네가 거기 둔 거겠지.”


내 물건을 찾아주는 건 항상 너잖아. 그 말을 끝으로 진이 자리에서 일어나 바깥으로 향한다. 열린 창으로 잠깐 바깥의 바람이 불어왔다 창이 다시 닫히며 사그러들었다. 


니노는 유리창 너머 진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바람이 불어와 진이 어깨에 두른 담요를 마구잡이로 흔들고 있었다. 조금만 더 거센 바람이 불면 그대로 무언가가 부서져버릴 것 같다. 그 안에 든 것이 그렇게 무른 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니노는 진이 담배를 입에 물고 거실의 테라스 창 바깥으로 향할 때면 항상 그런 감상에 잠기곤 했다. 


“……어? 왜 벌써 들어와?”

“누구 씨가 일을 하시는 것 같아서.”

“어?”


다시 바람부는 소리가 웅웅 울렸다가 사그러든다. 창이 열렸다 닫힌 것이다. 진은 겨우 반도 태우지 못한 담배를 보란듯이 펼쳐보이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정리했다. 그 손끝에서 쌉쌀한 담배 향이 묻어났다.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보는데 어떻게 담배를 피겠어.”

“……그렇게까지 쳐다보지는 않았어.”

“쳐다봤어.”

“아니라니까.”

“잘 거야.”

“……알았어.”

“너도 자자.”

“어?”


니노가 무어라 대꾸를 하기도 전에 진이 니노의 옷깃을 붙잡고 끌었다. 침실까지는 금방이었다. 그 사이에 니노는 진이 피다 말고 꺼트린 담배를 쓰레기통에 넣어주기까지 했지만 진이 자신의 옷깃을 붙잡고 있는 손을 쳐내지는 못했다. 


“숙취를 떠나서 술은 너도 마셨잖아.”

“……알았어, 나도 가서…….”

“그냥 자고 가.”


진이 막무가내로 떼를 쓰듯 말하고는 침대 앞에 닿자마자 담요 채로 침대 위로 몸을 던졌다. 이불을 제대로 덮을 생각조차 없는 것처럼 베개에만 머리를 파묻을 뿐이었다. 


“진,”

“빨리—.” 


눈을 감고서는 재촉하기만 한다. 침대 곁에 섰던 니노는 잔뜩 난처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네네, 왕자님.”

“왕자 아니라니까…….”


외투를 벗고 침대에 반쯤 걸터 앉는다. 담요만 두르고 있는 진의 어깨에도 이불을 둘러준 니노는 천천히 몸을 뉘었다. 


“……잘 자, 니노.”


니노는 진의 등을 흘끗 바라보았다. 잘 자라는 인사 끝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어깨가 고른 박자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니노는 천천히 몸을 움직여 팔을 괴고서는 이부자락을 한 번 더 추슬러 올렸다. 흐트러진 금빛 머리카락을 살살 쓸어 정돈한다. 니노는 이런 손으로 사진을 찍었다면 아마 피사체가 모조리 흔들려 엉망으로 찍혔을 것이라 자조하며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그의 입술 끝에 금빛 머리카락이 스치고 지나갔다.


“잘 자, 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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