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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노가 진의 버릇에 대해 알게 된 것은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이었다. 두 사람만의 졸업파티는 진의 자택에까지 이어졌고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소년들은 찬장에 잠들어있던 술병에도 손을 뻗었다. 


술에 취한 진은 그날 프롬 파티의 퀸에 대해 밤새도록 떠들었고 니노는 그런 진의 말을 모두 들어주었다. 지적이고 명석한 그 퀸은 분명히 어떤 면에서는 진의 취향이었던 것 같다. 좋아했던 것도 같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니노는 조금도 마음상한 것 없이, 초조해하는 것도 없이 그의 말을 모두 들어주었더랬다. 


그 다음번에 술을 마셨을 때 진은 같은 대학, 같은 과의 여학생에 대해 떠들기 시작했다. 니노는 빙긋이 웃으면서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진은 그녀가 얼마나 똑똑한지, 얼마나 결단력이 있으며 지적인지, 그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니노는 고개를 끄덕여주었더랬다.


그 다음에는 지금의 상관인 모브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같은 사람을 존경하는, 통하는 바가 있는, 지적이고 냉철한 여자. 니노는 그에 대해서도 얼마든지 웃는 낯으로 들어주었다. 실상 진에게 술을 왕창 먹이는 것도 그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였다. 


진이 지금은 누구를 좋아하는지, 듣기 위해서. 


진은 술에 취하면 자신이 마음에 둔 사람에 대해 이야기했다. 끊임없이.


*


“너 말이다, 나한테만 술을 먹이고…….”

“딱히 먹이는 건 아니지만.”


니노는 가볍게 부정하고는 턱을 괴고 상대를 바라보았다. 눈가가 발갛게 달아오른 진이 술잔을 손에 들고 흔들고 있었다. 니노는 진 앞에 치즈와 말린 과일을 밀어주기만 했다. 그의 부정에 걸맞게 술을 입으로 넘기는 건 진이었다. 


“내가 취하는 게 재밌는 거야?”

“조금?”


니노는 그렇게 말하며 주위를 흘끗 둘러보았다. 고급 식자재를 쓰는 와인바는 사람이 많았지만 그렇게 시끄럽지는 않았다. 모두 목소리를 낮추고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속삭일 뿐이다. 그 중에는 대화를 한 마디도 나누지 않는 테이블도 있었다. 아마도 진을 호위하는 자들일 것이다. 


ACCA의 쿠데타 미수가 있었던 이후로 진의 신분은 공공연한 비밀이 되어, 이렇게 여기 저기에서 몰래 숨어 호위하는 자들이 눈에 띄곤 했다. 진은 그런 것들을 모두 불편해했지만 내버려두었다. 왕실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사는 대가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넌 내가 바보짓 하는 거 항상 재밌어했지, 고등학교 때부터…….”

“그렇지는 않았는데.”


니노의 말에도 진은 술잔을 기울이며 투덜거린다. 그러면서 고등학교 시절의 일을 줄줄이 늘어놓는 것이었다. 대개는 이런 자리에서 따지고 들기는 커녕 기억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울 정도로 사사로운 일들 뿐이다. 니노는 조금 당황해서 그 모든 게 그런 것이 아니었다고 변명했지만 진은 ‘그럼 그게 아니면 뭐냐’라고 그를 몰아세웠다. 


진의 투정 아닌 투정은 그가 테이블 위에 엎어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제야 조금 떨어진 테이블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니노를 흘끗 쏘아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왕자를 취할 때까지 마시게 내버려뒀다는 질책의 눈빛이었다. 니노는 억울했지만 항변하지 않고 진을 부축해 가게를 나섰다.


“진, 제대로 걸어야지.”


부축을 해보지만 진의 걸음은 휘청이기만 한다. 종내에는 체중을 완연히 니노에게 실어댔다. 니노는 그걸 떠받치며 말로는 계속 ‘제대로 걸어야지’, ‘조심해야지’ 따위의 소리를 속삭였지만 진과는 숨 한마디 들어갈 틈도 벌리지 않고서 그를 이끌어 맨션으로 향했다. 


진의 맨션으로 돌아가자 두 사람이 들어오는 소리에 잠이 깬 로타가 가운을 두르고서 걸어나왔다.


“또 술을 이렇게. 니노, 적당히 먹이랬잖아.”

“내가 먹인 게 아니야.”


아리따운 공주의 힐난에 니노는 열심히 항변했다. 로타는 졸린 와중에도 훈계하는 표정으로 니노와 정신차리지 못하는 오라비를 노려보고는 침구를 준비해주었다. 자고 가라는 그녀의 말에 니노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술에 취할 때면 답답하다는 이유로 항상 소파에 드러눕곤 하던 진은 버릇대로 소파에 몸을 파묻고, 그 사이에 로타에게서 베개와 얇은 이불을 받아온 니노는 진의 목 아래에 베개를 넣어주고 이불까지 덮어준 뒤에야 한숨을 돌렸다. 로타가 그에게도 이불과 베개를 내주곤 내일 수업이 있다며 침실로 쏙 몸을 숨긴다. 


로타도 방으로 돌아가고 진은 잠에 빠져, 깨어있는 사람은 니노 혼자인 거실은 고요했다. 너른 창으로 별빛 드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는다. 니노는 턱을 괴고서 잠에 빠진 진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오늘은 무슨 얘기 했더라…….’


진보다야 덜취했다고 해도 그 역시 술을 마시긴 마셨던지라 정신이 몽롱했다. 


진은 매번 니노가 잔뜩 술을 먹인다며 투덜거렸는데, 그에 관해서라면 니노도 할 말은 있었다. 우선 전혀 거절하지 않는 진도 문제가 있다. 마시라고 술을 따라주기는 했지만 진도 ‘됐다’거나 ‘안 마실래’라는 말은 일절 않고서, 항상 또 먹이는 거냐거나 매번 이런 식이라거나 하는 투덜거림만 뱉고는 주는 대로 다 받아 마시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서 ‘그럼 거절하면 되잖아’라고 하면 또 네가 주는 건데 어떻게 그러느냐는 소리를 해서…….


그래도 진에게 술을 내밀고 마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술에 취한 진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를 듣는 것만이 지금 진의 마음을 차지한 것이 누구인지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진의 사랑은 강가의 잔물결처럼 고요하다. 누구에게도 자신의 열띤 마음을 토로하는 법 없이, 그저 고요히 상대를 지켜볼 뿐이었다. 그러다 그 상대를 도와줄 일이라도 생긴다면 기꺼이 도와주지만 그것으로 마음을 사려고 하지는 않는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 진은 그 강물같이 잔잔한 사랑으로 뭍의 모래를 사그러뜨리듯 마음을 접었다.


혹자는 그것이 용기가 없어 지켜보는 것뿐이지 않겠느냐 하겠지만 니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세상에는 천 명의 사람만큼 천 가지의 사랑이 있다. 진의 사랑이 그러하다면, 니노에게는 그것으로 전부였다. 그리고 그 고요한 사랑이 열에 들떠 떠드는 순간은 진이 술에 취했을 때뿐이다. 니노는 그래서 진에게 술을 먹이곤 했다. 그의 사랑이 어디쯤에 다다랐는지 가늠해보기 위해서. 


“어…….”


잠에 빠진 진의 금발을 사륵사륵 쓸며 오늘의 대화를 되새겨보던 니노는 흠칫하며 몸을 뻣뻣하게 굳혔다. 


오늘 밤, 진은 하루 종일 니노의 이야기를 했다. 네가 고등학교 때 어떠했고 대학 때는 어땠고, 그래서 지금은 또 어떠하다고. 와인바에 들어가기 전부터 모든 기억을 다 뒤져봐도 달리 그의 입에서 나온 이름은 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니노의 이야기뿐이었다.


*


“니노?”

“으응?”

“요즘 너 다른 생각 많이 한다.”


진이 담배를 입에 물며 핀잔을 던진다. 니노는 자연스럽게 옆에 선 진을 돌아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는 거야? 술 마시잔 얘기도 하지 않고……. 혹시 도와에서.”

“그런 일은 아니야.”


그러니까 일이 있기는 있는 거네, 진은 속으로 생각을 삼키곤 오랜 친구의 옆모습을 흘끗 바라보았다.


깊이 있는 눈매에 그늘진 머리카락, 언제나 안경을 쓴 모습이 익숙했는데 최근에는 자주 안경을 벗는다. 모든 일이 끝나고 난 뒤부터 그렇다. 그에게는 아마 그 안경도 굴레였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지만 말로 해본 적은 없었다.


“얘기할 상대가 필요하면 말해.”

“……으응.”


말을 해놓고도 새삼스러워서 진은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생각을 해보니 니노가 그에게 딱히 무언가를 털어놓은 적은 없었다. 술을 마실 때도 그렇다. 항상 이야기를 하는 것은 자신이고—무슨 이야기인지 잘 생각은 나지 않지만—들어주는 쪽은 니노다. 일상 생활에서야 말할 것도 없다. 심지어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에도……. 


“오늘 저녁 같이 먹자.”

“오늘?”

“로타는 친구들하고 먹고 들어온대. 저녁 혼자 먹기 싫어.”


이렇게까지 말하면 니노는 거절하지 않는다. 일이 있기 전까지는 무의식중에 알고 있던 것이었는데 이제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의 예상대로, 니노는 잠깐 뺨을 긁적였을 뿐 별다른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곤 휴대전화를 꺼내 이리저리 연락하기 시작했다. 오늘 오후 약속을 미루는 것 같았지만 진은 자신의 제안을 철회하지 않았다. 


말하고 싶어지면 말해, 라는 말로는 니노는 결코 말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에게 달리 자신의 일을 말할 상대가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니노의 30년은 모조리 자신이 집어삼켰으므로. 


평소에는 항상 이런 저런 봐둔 가게가 있다며 그를 이끌고 가던 니노였지만 이번만은 진이 앞장섰다. 그들이 갔던 가게들 가운데에 술과 맛좋은 치즈가 나오던 가게였다. 식사를 하러 가자더니 술이 먼저냐며 한 마디라도 할 줄 알았는데 그런 말도 없다. 진은 자리를 잡고 앉아 술과 요깃거리를 시키고는 니노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요즘 니노는 부쩍 눈에 띄게 말수가 적어졌다. 본인은 인지하지 못한 것 같았지만 진은 알 수 있었다. 평소에는 뻔히 다 알면서도 무슨 일이 있었냐거나 요즘은 재미있는 사람이 없냐거나 하고 묻는 그였는데, 요 근래엔 그런 이야기가 전혀 없었다. 간혹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볼 때는 늘었다. 그 때마다 무슨 일이냐고 물으려고 했지만 니노는 바쁜 일이 생겼다며 훌쩍 자리를 비워버려 질문을 봉쇄했다. 


종업원이 와인과 음식을 내왔다. 진은 니노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평소엔 항상 니노가 먼저 따라줬다는 생각이 언뜻 들었다가 다시 가라앉았다. 잔에서 붉은 포도주가 맑게 찰랑거렸다. 


“니노. 일 하는 건 어때? 할만 해?”

“응? 음, 뭐……. 그냥 그렇지.”


로타와 자신이 신분에 대해 알게 된 후로 궁을 드나들게 되면서 니노의 일도 끝이 났다고 했다. 그 뒤로 아무 일이 없어진 그에게 ‘진짜’ 잡지사 일을 권한 건 진이었다. 일생을 사진 찍는 것만 보고 사진을 찍기만 해온 그였다. 그 사진 찍는 일이 싫지 않다면 다른 방식으로 계속해보는 건 어떨까 했던 것이다. 처음엔 영문 모를 저항감을 느끼던 것 같은 니노였지만 이제는 익숙해진 듯했다.


“며칠 전엔 립스틱을 세워놓고 찍었지……. 색이 고왔어.”

“로타한테 추천할 만한 건 없었어?”

“음, 생각을 못했는데……. 다음번에 한 번 물어보지 뭐.”


그 뒤로 다시 대화가 끊긴다. 진은 와인잔을 홀짝거리며 미간을 모았다. 말 하고 싶지 않다는데야 몰아세울 재주는 없었다. 


하지만 속은 답답한 것이, 이렇게 한 잔 두 잔 홀짝거리고 있다 보면 어느새 니노가 형용하기 어려운 표정으로 그를 빤히 쳐다보는 것이었다. 할 말이 있으면 하라고 해봐도 별달리 소용이 있지는 않았다. 


“피곤해? 들어갈까?”


술도 한 병 비우고 적당히 배도 채웠겠다, 니노는 아무리 두고 있어도 무슨 말을 할 것 같지도 않으니 돌아갈까 하는데 니노가 덥석, 일어나려는 진의 손을 붙들었다.


“……괜찮아. 조금만 더 마시자.”


진은 눈을 깜박거리다 도로 자리에 앉았다. 꼭 말을 해야만 하는 게 친구 사이는 아니다. 그리고 니노에게 필요한 게 시간이라면, 진은 기꺼이 지불할 용의가 있었다. 


니노는 그 뒤로 포도주 두 병을 더 시켰고 진은 투덜거리면서도 니노가 따라주는 술을 모두 받아마셨다. 


*


눈을 떴을 땐 달이 드높은 새벽이었다. 너른 창으로 별과 달의 빛이 몸을 적셔준다. 진은 몸에 두른 익숙한 담요를 끌어안으며 팔을 뻗었다. 곧 그의 손에 물잔이 잡혔다.


“……니노, 깨 있었어?”


잠깐 사이에 잠들었다고 목이 잠겼다. 진은 몸을 일으키며 다른 소파에 앉아 있는 니노를 바라보았다. 


주위를 밝힌 빛이라고는 복도 아랫쪽의 조그만 전구에서 새어나오는 온화한 주황색과 하늘에서 쏟아지는 달빛이 전부였다. 그 속에 니노는 가만히 어둠에 물든 채 앉아서 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전혀 자지 않은 눈치였다. 


“로타는?”

“일찍 자러 들어갔어.”

“……물 마실래?”


마른 목을 축이고 나니 니노의 목소리도 나직이 가라앉아있다는 게 느껴졌다. 진의 질문에 니노가 고개를 젓는다. 진은 몸을 바로하고 앉았다. 술기운에 두통이 느껴졌지만 정신은 뚜렷했다. 


“니노.”

“……응?”

“내가 혹시 술 마시면서 이상한 소리라도 했어?”


니노의 태도가 이상해졌던 건 며칠 전 둘이 나란히 술에 취해 뻗었던 날부터였다. 평소에 자신의 술자리 버릇에 대해서라면 모브 본부장에 대해 거듭 이야기 한다고 했던 것을 들은 적이 있어서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돌이켜보니 그런 대화를 했던 건 ACCA의 쿠데타가 있기 전 딱 한 번이다. 그 뒤로 달리 무슨 소리를 한 건지는 전혀 모른다는 걸 진은 지금에서야 깨달은 것이다. 


“뭐? 아니, 아니야……. 그런 건 아니야.”


그럼 왜 그러느냐고 묻고 싶지만 니노의 눈동자가 달그림자에 물들어있다. 니노는 그대로 한참이나 진을 바라보기만 했다.


“니노?”

“요즘은……. 요즘은 아무 얘기 안 해.”

“예전엔 했어?”

“했지.”

“무슨 얘기.”

“이런 저런 얘기…….”


역시 니노가 무슨 얘길 하는지, 자신이 무슨 말을 한 건지 전혀 기억에 없다. 니노가 아니라고 하면 아닌 것이겠지만. 


진이 무언가 말을 더 해야할지 고심하는 표정이 되었을 때 문득 니노가 눈을 내리깔았다. 지금까지 그를 둘러싸고 있던 팽팽한 공기가 단숨에 물러진 것 같았다. 눈매가 녹진히 풀린 채 그를 보고 있다. 진이 조금 얼떨떨한 얼굴로 바라볼 때야 니노는 말아쥐었던 손을 풀었다.


“니노?”

“아아……. 이제 괜찮아.”

“이제?”


정말로 지금까지 괜찮지 않았던 뜻이지 않으냐고 한 마디 하고 싶었는데 저 풀린 눈동자를 보니 할 말이 사라져버렸다. 


진은 괜히 한숨을 내쉬기만 했다. 니노가 말하고 싶지 않다는데 더는 추궁할 수도 없다. 니노가 괜찮아졌다면 그걸로 된 셈이었다. 자신에게 할 이야기라면 어련히 알아서 이야기할 것이다.


“한 잔만 더 마실까?”

“괜찮아지자마자 나 술부터 먹이는 거야?”

“그런 거 아니라니까.”


말로는 투덜거리면서도 진은 어딘가 모르게 작게 안도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니노의 표정도, 술을 권하는 목소리도 이제야 평소와 다를 바가 없다. 


진이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니노는 진의 부엌 찬장에서 술병을 두 개 더 꺼내왔다. 그 모습을 진이 빤히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니노는 눈동자를 한 번 굴렸다.


“……내가 그렇게 이상했나?”

“이상했어.”


포도주를 맥주처럼 마시면서 진은 투덜거렸다. 니노는 이젠 웃기까지 한다. 얄미워서 정강이를 차줄까 하다가 그만둔 진은 니노의 잔에 왕창 포도주를 따라주었다. 니노는 그것까지 웃는 얼굴로 바라보다가 진에게 물었다.


“걱정했어?”

“넌 가끔 이상한 소리를 하네.”


진은 구워져 나온 빵에 크림치즈를 매끄럽게 바르다 한숨을 내쉬었다. 니노는 지긋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걱정하지, 그럼.”


그 대답이, 니노로서는 몹시 만족스러운 것 같았다. 진은 니노가 배부른 맹수마냥 느긋하게 웃는 것을 보고 고개를 내젓기만 했다. 술은 결국 또 진의 몫이었다.


*


집에서 술을 두 병이나 더 마시고, 정말로 뻗어버린 진을 추슬러주던 니노는 등 뒤에서 느껴진 기척에 침을 꿀꺽 삼켰다. 뒤를 돌아보니 가운을 걸친 로타가 허리에 손을 올리고서 그를 바라보고 있다. 로타의 불효령이 떨어질 거라고 생각했던 니노는 자신을 보고만 있는 로타와 시선을 마주하기만 했다. 한참이나 그를 올려다보던 로타는 어른스러운 한숨을 내쉬고는 ‘괜찮아졌나봐. 오늘만 봐주는 거야!’ 라는 말만 남겨놓고 쌩하니 몸을 돌려 침실로 돌아갔다. 


진을 소파에 뉘어놓고서 담요까지 덮어주고 난 뒤에야 니노는 긴장이 풀린 얼굴로 소파에 기대었다. 진은 눈매까지 붉게 달아올라서는 어린애처럼 잠에 빠져있었다. 


자신이 한동안 이상하기는 무척 이상했나보다, 니노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잠에 빠져든 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시간이 늦어 어둑한 거실에 달빛만이 진의 실루엣을 장식하고 있다. 몇 번이나 본 모습이었는데 오늘만은 어딘가 특별했다. 


다감한 진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가 다시 사그러드는 동안, 니노는 마음의 한 점 꺼림 없이 그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 어려서 사고로 부모를 잃은 뒤로 진은 ‘잃을 수 없는 사람’을 고르는 데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였다. 애당초 강한 성격이 아니었던 탓도 있어 그의 집착은 옅었고 마음은 신중했다. 


그리고 자신은 진에게 이미 그 ‘잃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기다리면 된다. 자신은,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진이 이따금 수줍은 얼굴로 이름을 말하는 그녀들은 결코 진의 그 울타리 안에 들어오진 못할 것이었다. 그 울타리는 보이지 않는 발밑 아래로 하염없이 깊었고 그걸 눈치 채고 있는 건 니노 자신뿐이었다. 진 스스로도 모르는 것을, 그래서 니노는 기다렸다.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다. 


그런데 그 때가 이렇게 빨리 올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술에 취에 열에 들뜬 얼굴로 자신의 이야기만 늘어놓는 진을, 이렇게 빨리 보게 될 거라고는. 


그래서 그 동안 니노는 자신의 마음과 진의 마음을 가늠해보며 어찌할 바 모르기만 했던 것이다. 생각만 해오던 것이 갑자기 눈앞에 닥쳐와 당황한 것과 동시에 진의 마음에서 피었다가 모래처럼 허물어졌던 사람들이 떠오르고 만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어쩌면 자신은 그녀들처럼 져버릴 것이 두려워 아무 말 하지 못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괜찮다. 


니노는 진의 머리카락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붉게 물든 눈가로 자신의 이야기만 늘어놓는 진을 보는 건 그가 상상했던 것과 전혀 달랐다. 심장은 첫사랑하는 소년처럼 급하게 뛰었고 목은 자꾸 말랐다. 진이 취하지 않았다면 그가 손을 뻗어올 때마다 귓가를 붉히는 니노를 알아챘을지도 모르겠지만. 


니노는 작은 웃음을 속으로 삼키고는 허리를 숙이고 진의 머리칼에 입맞춤했다. 이제 그런 모습을 실컷 보이게 될지도 모른다. 진은 처음 보는 자신의 모습에 무어라고 할까. 놀라서 도망칠지도 모르니 이제 도망치지 못하게 끌어안고 자야겠다, 니노는 마음을 먹고는 잠든 진을 추슬러 침실로 향했다. 


진이 잠결에 무어라고 말했지만 니노는 모르는 척했다. 해가 뜨고 진이 일어나서 기겁하며 그를 흔들어 깨울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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