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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색 걷기 혹은 달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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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쿠토×아카아시
140*210 | 인쇄 | 먹박 | 98p | 9,000원
중학생 때 서로를 처음 만나게 되어 고등학교까지 이어지는 보쿠토와 아카아시의 이야기
가을이 마지막 잎새를 떨어뜨리는 때였다. 하얀 서리가 서서히 옷자락을 드리우는 오후, 아카아시는 낯선 교정을 가로질렀다.
이런 애매한 시기에 편입하게 된 것은 양친의 전근 탓이다. 양친이 어떻게든 다른 방법을 강구하려고 했지만 아직 중학교 3학년도 되지 못한 어린 아들을 혼자 둔다는 선택지는 고르지 못한 결과였다. 덕분에 아카아시는 생각지도 못한 편입 시험까지 준비해야 했다.
‘체육관인가?’
아카아시는 조금 걸음을 멈춰세웠다. 있던 학교에서는 배구부 활동에 열중했었지만 학교를 옮기게 되면서 그것도 애매하게 되었다. 미안해하는 양친에게는 그저 부활동일 뿐이었다고 말해두기도 했고, 표정도 말수도 적은 자신의 성격으로는 도중에 끼어들어도 어색함만 만들게 뻔했다. 그런 걸 다 감수해가면서까지 계속 공을 잡고 싶으냐고 한다면 확답을 할 수 없는 아카아시였다.
그랬는데 그게 그렇지만도 않은 모양이었다. 아카아시는 목덜미를 손으로 쓸었다. 반쯤 열린 체육관 문 사이로 누군가가 열심히 공을 때리는 모습이 보였다. 해가 저물어가는데도 혼자서 열심이었다. 아카아시는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그 모습을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윙스파이커인것 같았다. 공을 올려주는 사람은 없는지 혼자서 공을 띄우고 내리친다. 중학생이라고 보기 어려운 힘이 엿보였다.
그 때 그 사람이 휙 몸을 돌렸다. 정면으로 마주친 눈은 마치 맹금류의 그것처럼 번뜩이는 황금빛이었다. 아카아시는 저도 모르게 죄라도 지은 것처럼 눈을 피하고서는 얼른 가던 길로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그러니까 그걸로 될 줄 알았다.
“워어! 야!”
“!”
뭔가 박차는 소리가 들렸나 싶자마자 눈앞에 사람이 불쑥 튀어나왔다. 바로 방금 전 마주했던 눈동자가 그를 보고 있었다. 아카아시는 마른침을 삼키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보다 반뼘은 더 큰것 같았다. 땀에 흠뻑 젖은 얼굴, 왠지 모르게 간절한 표정.
“너 심심해?”
“네……?”
“잠깐 공놀이 좀 하자!”
그렇게 대뜸 손목을 낚아채고는 다시 체육관 쪽으로 그를 끌고간다. 아카아시의 체구가 조금만 더 작았어도 괴롭힘 내지는 납치 정도로 보였을 꼴이었다. 아카아시는 얼결에 끌려가 체육관 안까지 들어오고 나서야 겨우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저기, 저는.”
“너 몇 학년?”
“2학년인데, 저…….”
“있잖아, 별로 어려운 건 아니거든? 내가 먼저 공을 던져줄건데, 그거를 토스……그건 좀 어렵나. 그럼 그냥 저기서 공 하나를 집어서 내 쪽으로 던져주면 돼.”
뭐라 말할 틈도 없이 상대는 빠르게 말을 잇고는, 그의 어깨에서 가방을 끌어내리고 교복 재킷도 벗겨 그를 끌고서 네트 앞으로 간다. 아카아시는 입술을 달싹거렸다.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이야?
“적당히 올리면 돼!”
“아니, 저기…….”
“괜찮아, 괜찮아! 좀 못해도 돼!”
상대는 태양처럼 웃기만 한다. 아카아시는 지금 이 현실을 이해해보기 위해 미간을 모았다. 그러니까 저 사람은 아마도 스파이크 연습을 하는 것 같은데 누구도 도와주지 않아서, 지나가는 사람 아무나 하나를 붙잡고 토스를 올려달라고 하는 그런 상황…….
‘정말로 그런 상황인 건가?’
상대는 아카아시가 공을 가지고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서 가만히 있는 거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빨리 공을 던져달라고 재촉을 하다가 결국 다시 아카아시 곁으로 돌아와 그의 손에 있던 공을 뺏들었다.
“자, 봐봐. 이렇게 던지기만 하면 된다니까? 이거 생각보다 재밌어!”
이 사람은 정말 스파이커인가 보네. 아카아시는 체육관의 철문 틈새로 보아도 파워 넘치던 스파이크에 비하면 어리숙한 토스를 흘끗 보며 생각했다. 아카아시는 잠시 고민하다가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이곤 가볍게 스트레칭해 몸을 풀었다.
“어? 너 운동부야?”
워밍업 하는 게 제법 익숙해보였는지 상대가 눈을 꿈벅이며 묻는다. 아카아시는 잠시 고민하다가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적당히 어깨를 풀고, 아카아시는 보쿠토에게 공을 넘겼다.
“던져주세요. 토스 올려드릴게요.”
“어, 어어?”
어리둥절한 표정이던 얼굴이 금방 번뜩였다. 공을 칠수만 있다면 사정이 어떤 것이든 아무 상관없다는 표정이다. 아카아시는 저런 얼굴을 하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었다. 승리에 탐욕을 보이는 종류의 인간들, 그의 예전 학교 주장이 꼭 그런 눈빛을 하고서 그에게 토스 올려달라 말을 하곤 했었다.
“자, 그럼. 조금만 놀아달라고, 후배님?”
저런 사람들은 포기를 모른다는 걸 알면서도, 아카아시는 자신에게 넘어오는 공에 손을 올렸다.
**
아카아시는 부원들 중 누구라도, 코치나 감독 중 한 사람이라도 이 작태에 대해 한 마디를 해주길바랐다. 학기가 끝나가는 겨울에 제대로 된 등록 절차도 없이 편입생을 끌고 와서 지금부터 부원이 되었다고 주장하는 이 작태에 대해서 말이다. 하지만 다들 그러려니 하는 눈치였다. 저 보쿠토가 제멋대로 구는 것이 하루이틀이냐며.
“그래, 세터였다고?”
코치가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아카아시를 바라보며 물었다. 보쿠토가 어떻게 지난 학교에서 배구부 활동을 하던 편입생을 잘도 끌고 왔는가 여기는 기색이 뚜렷했고 아카아시는 세상의 모든 것을 다 포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라고 해서 배구부 활동을 피하려고 한 것도 아니었다. 하고 싶었다. 하고 싶었지만, 자신의 상황이나 이쪽의 상황을 생각해서 참으려고 했던 것 뿐이었다.
“그럼 한 번 봐볼까.”
“코치! 그 녀석 나랑 할건데~!”
“욘석아, 모두하고 다 한 번씩은 해봐야지.”
아카아시는 손에 공을 쥐며 날뛰는 보쿠토를 바라보았다. 그의 예전 학교에 비하면 확실히 부원도 많았고 설비도 좋았다. 아카아시는 바닥에 공을 한 번 튀겨보았다. 듣기 좋은 울림이었다.
아카아시가 토스를 올리고 스파이커가 번갈아가며 공을 친다. 여럿이서 하는 연습은 오랜만이었다. 모두가 처음보는 낯선 사람들인데도 이런 연습이 오랜만이어서 그런가 마냥 반가웠다. 그리고 마침내 중간에 끼어든 보쿠토가 그의 토스를 내리치고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그를 돌아보았을 때.
“보쿠토 네가 왜 날뛰냐.”
“아 그치만~!”
다른 3학년이 금방 보쿠토를 잡아 끌고 간다. 코치와 감독이 무어라 기록을 보면서 평가하는 동안 아카아시는 그 앞에 얌전히 서서 대답을 기다렸다. 그 사이 그를 흘끗거리는 시선이 느껴진다. 위장이 따끔거리는 것 같았다.
“흠, 이전에도 배구부였다고? 주전이었지?”
“아, 네…….”
아카아시는 손을 앞으로 모으고 고개를 끄덕였다. ‘주전’이라는 말에 꽂히는 시선에 강도가 더해지는 느낌이었다. 아카아시는 그런 것들을 모두 이해했다. 이해 못하는 건 보쿠토 코타로, 저 사람 한명 뿐일거야.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신장은 앞으로도 더 클 것 같고……. 보쿠토 녀석, 웬일로…….”
“그나저나, 이렇게 어정쩡한 시기에 편입을 했다고?”
“부모님이 전근을 오시게 되어서요.”
“똑똑하기까지 한가보네, 아카아시 군.”
아카아시는 대답 없이 고개만 조금 숙였다. 금방 사람들 사이에서 탈출한 보쿠토가 쪼르르 달려오더니 그의 목에 확 팔을 감았다.
“어때! 어때요!”
“너는 이제 얘랑은 같이 뛸 시합도 없으면서 뭐 그렇게 신이 났어?”
“왜 없어요? 고등부에서 같이 뛰면 되지! 그치? 어, 이름이……. 그러니까…….”
“……아카아시요.”
이 사람은 정말로 알 수가 없다, 아카아시는 한숨을 삼키며 생각했다. 그야 큰 일이 없는 한 고등부로 진학을 할 테고 또 큰 일이 없는 한 배구부활동을 하겠지만.
보쿠토는 금방 또 공이 부르는 쪽으로 달려갔다. 아카아시가 그 뒷모습을 흘끗 바라보는 것을 알아차린 코치와 감독이 아카아시를 보고서 빙긋이 웃었다.
“보쿠토가 막무가내로 끌고 와서 온 것 같은데…….”
“…….”
“그래도 저 녀석이 아무나한테 그러지는 않는단다. 저래봬도 주장이기도 하고.”
둘러 말하지만 선택받았다, 그런 뜻인 것 같았다. 아카아시는 부정할 기력도 없어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
보쿠토 선배 : (음성 연결)
보쿠토 선배 : (23 : 15)
**
버스에 올라가자 보쿠토는 창가 쪽 자리에 앉아서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옆은 비어있다. 언제나 거긴 아카아시의 자리였다. 평소 때였으면 아카아시도 의식하지 않고 옆에 앉았겠지만 아무래도 오늘은 보쿠토가 조금 화가 난 것 같으니까, 아카아시는 괜히 옆에서 말을 붙이느니 조금 떨어진 곳에서 보쿠토의 화가 가라앉기를 기다릴까 하고 생각했다. 보쿠토가 여전히 고개는 돌린 채 자신의 옆자리를 탕탕 두드리지 않았다면 그랬을 것이다.
아카아시는 자신을 보지 않는 보쿠토의 어깨를 흘끗 바라보곤 얌전히 그 옆에 앉았다. 버스가 출발을 하는데도 보쿠토는 말이 없다. 아카아시는 뺨을 긁적이며 자신의 앞좌석만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시합을 끝냈으니 주전으로 뛴 선수들은 피곤하여 뻗어 자기 시작하고 다른 사람들도 분위기에 휩쓸려 모두 잠에 빠져들 무렵이었다. 한참이나 창밖을 보고만 있던 보쿠토가 툭 내뱉듯 말했다.
“나 화난 거 같은 거 안 보여?”
“네?”
“화 풀어주려고 뭐라도 해야 되는 거 아냐?”
화났다기보다는 오히려 토라진 것처럼 샐쭉한 목소리였다. 아카아시는 옆을 돌아보았다. 보쿠토는 여전히 그에게 등을 보이고 있어 얼굴을 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아카아시는 보쿠토의 표정을 알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니……. 화나신 건 알겠는데.”
“알겠는데, 뭐.”
“화났는데 괜히 말 걸어서 더 화내실까봐.”
“아카아시! 그럴 땐 더 열심히 화 풀어주려고 막 애써주고 그래야 내가 화가 풀리지!”
왈칵 돌아본 얼굴은 엉망진창이었다. 눈가까지 빨개져서는 입술을 꽉 깨물고서 아카아시를 노려보고 있다. 아카아시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보쿠토를 바라보았다.
“아……. 그렇습니까?”
“그래! 아카아시 바보야!”
“보통 화났는데 화나게 한 사람이 옆에서 자꾸 말 걸면……. 더 화나지 않나요?”
“……내가 아카아시 화나게 했을 땐 얌전히 입 다물고 있으라고 지금 말해주는 거지…….”
“그런 뜻은 아니지만.”
《Dear M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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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쿠토×아카아시
140*210 | 인쇄 | 동박 | 250p | 15,000원
어린 도련님 보쿠토와, 불가피한 사정으로 함께 지내게 되면서 그런 도련님과 놀아주게 된 아카아시의 이야기입니다. 어린 보쿠토와 중학생인 아카아시가 만나서 성인으로 성장하며 여러색깔의 정을 쌓아나가요! 전체 연령가의 가벼운 이야기입니다 :) 라고 쓰고 역키잡물이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집이라고 하기 보다는 성에 가까운 호화로운 저택이었다. 그에게 주어진 방은 그가 부모님과 살던 집과 비슷했다. 이 모든 걸 거저 받을 수는 없다는 아카아시에게, 류이치로는 말했다. 그렇다면 일과를 끝낸 저녁 무렵에 아이라도 봐주었으면 한다고.
그리고 눈 앞에서 그를 향해 ‘보쿠토 씨라고 해!’라고 외친 이 꼬마가, 류이치로가 말한 그 아이였다.
‘몇 살이라고 했더라…….’
만 여섯살이라고 했던가, 일곱살이라고 했던가. 중학교 3학년인 그보다 일곱살 어리다는 이야기는 언뜻 들었다. 하지만 잿빛이 섞인 머리카락 너머로 언뜻 보이는 굳은 금빛 눈동자는 여느 평범한 어린 아이 같은 느낌은 아니었다. 보통 애가 면전에다 대고 자기를 보쿠토 씨라고 부르라고 외치지도 않겠지만.
저 소년, 보쿠토 코타로는 그가 어적잖히 마음에 차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카아시는 자신과 보쿠토 앞에 놓인 요리가 식어가는 걸 보며 재차 한숨을 삼켰다.
“식사. 안 드십니까?”
“안 먹어!”
보쿠토가 빽 소리치곤 고개를 돌린다. 아카아시는 스스로를 돌이켜보았다. 그렇게 첫눈에 밉보일 짓을 했던가? 코타로 님이라고 부르려고 했던 게 그렇게 큰 잘못이었나? 하지만 보쿠토 씨라고 부르라 하는 얘기에 곧장 그렇게 해주었는데도 뭐가 마음에 안 드는거지.
“그래요. 알겠습니다.”
이 저택의 주인은 그에게 자신의 아이를 돌봐달라고 하긴 했지만, 아카아시는 밥 먹기 싫다고 뻗대는 아이를 붙잡고 하나하나 먹이는 재주는 없었다. 뒤에 선 고용인들이 안절부절 못하는 게 보였으나 아카아시는 묵묵하게 수저를 집어들었다.
곧 실내는 아카아시가 식기 부딪히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아카아시가 조용히 밥을 먹는 동안 보쿠토는 여전히 고개를 휙 돌린 채였다. 5분 쯤 지났을 때 소년이 슬금슬금 고개를 돌려서 그를 본다. 아카아시는 눈도 마주치지 않고서 밥을 먹었다. 아카아시가 식사를 끝냈을 때 옆에 서 있던 고용인이 조그만 접시에 반으로 자른 양갱과 차를 내어왔다. 후식이었다.
“어.”
그리고 ‘안 먹어!’ 이후로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소년이 처음으로 소리를 냈다. 아카아시는 고개를 들고 소년을 쳐다보았다. 소년의 눈동자가 반짝 빛난다. 옆에서 고용인들이 빙긋 웃고 있는 게 익숙한 반응인 듯 싶었다. 좋아하는 건가.
“이건 후식입니다만.”
“…아?”
식사를 거른 소년에게 좋아하는 과자라도 먹이려고 한 건지 웃는 얼굴로 양갱을 한 접시 더 내오던 고용인들이 소년의 뒤에서 멈칫했다. 아카아시는 무표정한 얼굴로 양갱을 한술 떠 입에 집어넣고는 다시 말했다.
“밥을 먹고 난 후에 먹는 겁니다. 보쿠토 씨는 식사 안 하셨으니 못 드시죠.”
“……아, 안 먹을거야! 나도 알아!”
소년이 빽 소리치고 뒤에 서 있던 고용인들은 다시 안절부절 못하는 얼굴이 되어서 쩔쩔 매는 걸 알면서도 아카아시는 말을 물리지 않았고 소년은 고집을 물리지 않았다. 아카아시는 자신이 식사를 모두 끝내고 고용인들이 테이블을 전부 치우는 것까지 보고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
아카아시는 자신이 엎어두었던 책을 집어들며 한숨을 삼켰다. 아니나 다를까, 소년은 금방 또 꾸벅거리기 시작한다.
“보쿠토 씨.”
“헙. 아, 안 잤어.”
이름을 부르면 퍼뜩 깨어났다가, 다시 또 졸고. 아카아시는 그 모습을 쳐다보다 자리에서 일어나 소년을 번쩍 안아들었다. 소년은 안 잤다며 내려놓으라고 버둥거렸지만 잠기운에 취해 힘이 있는 동작은 아니었다.
“너, 이름……. 뭐야…….”
한참을 그러던 소년이 잠에 겨운 목소리로 묻는다. 아카아시는 소년을 안아든 채 조금은 어색한 동작으로 등을 토닥거리며 대답해주었다. 아카아시 케이지입니다. 아카아시, 그 말을 중얼거리던 조그만 고개가 툭 그의 어깨에 기대었다.
아카아시는 처음보다 훨씬 더 세심한 동작으로 주의를 기울여 소년을 침대에 뉘어주었다. 이불을 덮어주는데 소년이 잠결에 팔을 뻗어 그의 손을 꽉 쥔다. 아카아시는 소년의 머리카락을 살살 쓸어주었다. 그의 손가락 사이로 잿빛 머리카락이 사르르 흩어진다. 소년의 손에서 천천히 힘이 빠졌다. 아카아시는 문 닫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용히 소년의 침실을 빠져나왔다.
*
아카아시는 하교하고서 교복도 갈아입지 못한 채 소년의 방으로 향해야 했다. 중학교 3학년, 마지막 학기 수업이 시작된지 이틀째였다. 고용인들이 잔뜩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걸음을 빨리한다. 아카아시가 소년의 방에 들어갔을 때 소년은 방 안에 없었다.
“도련님, 아카아시 님 오셨어요! 도련님!”
저택의 입구에서부터 아카아시를 기다려 데려온 고용인이 서둘러 목소리를 높였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난 건 반쯤 문이 열린 침실쪽에서였다. 아카아시는 어깨에 매고 있던 가방을 벗으며 고용인을 따라 침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드넓은 침대에 조그맣고 동그란 뭉치가 천을 뒤집어쓰고서 웅크리고 있다. 아카아시는 넥타이를 헐겁게 만들며 침대 쪽으로 다가갔다.
“보쿠토 씨.”
“…….”
덩어리가 움찔하지만 풀리지는 않는다. 아카아시는 설명을 구하는 표정으로 고용인을 바라보았다. 고용인이 귀애하는 마음과 곤란함을 적당히 섞은 표정으로 속삭였다.
‘아카아시 님이 늦게 오셔서 많이 기다리셨어요.’
기다려? 나를? 아카아시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한숨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속을 꾹 누르며 조그만 덩어리를 내려다보았다. 만나서 하는 말 중에 제일 자주 들은 말은 ‘싫어!’, ‘안 해!’ 인데.
“보쿠토 씨? 숨막히지 않습니까, 그거.”
“…….”
“아니면 말고.”
“수, 숨막혀.”
소년이 풀썩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트를 감싼 채 웅크리고 있었던 탓인지 뺨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황금색 눈동자가 그를 쏘아보았다.
“왜 이렇게 늦은거야! 아카아시!”
“오늘부터 늦는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진짜 늦을 줄 몰랐다고!”
“진짜 늦습니다.”
“왜!?”
말도 되지 않는 얘기를 들었다는 것같은 표정이었다. 아카아시는 팔을 뻗어 소년을 가볍게 들어올렸다. 소년은 버둥거리지 않았고 아카아시는 소년을 바닥에 세워줄 수 있었다.
“그야 학교 수업도 있고 부활동도 있으니까요.”
한 걸음 앞서서 침실 밖으로 향하자 소년은 그를 놓칠세라 빠르게 따라붙었다. 종종거리는 발이 넘어지지 않도록 아카아시는 조금 걸음을 늦춰주었다. 침실 바깥쪽에 마련된 테이블에는 저녁상이 올라오고 있었다.
“부활동?”
“네, 부활동. 배구부.”
“배구?”
“공놀이 같은 거예요.”
“공놀이…….”
아카아시는 소년이 제대로 올라갈 수 있도록 의자를 빼주다 속으로 혀를 찼다. 소년의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이 난다. 반드시 뭐라도 해버릴 기세였다. 괜한 얘기를 꺼냈나 하는 후회가 들지만 늦었다.
“재밌어?”
“글쎄요.”
“……재미없어?”
배구를 하는 게 재미 문제였던 건 초등학교 때 이미 끝이 났다. 아카아시는 그 얘기를 어떻게 할까 고민하며 수저를 손에 쥐었다.
“재미보다는, 음. 잘하고 싶으니까요.”
“잘하고 싶어?”
소년은 그다지 이해가 되지 않는 듯 고개를 갸웃한다. 아카아시는 쉽게 설명할 단어를 찾을 수 없어서 그냥 나직하게 말했다.
“네.”
“……그럼 아카아시는 나보다 배구가 더 좋아?”
“네.”
“…….”
아카아시는 담백하게 긍정했다. 소년의 얼굴이 보기좋게 찌그러진다. 곧 소년도 숟가락을 집어들었다. 밥을 퍼올리는 작고 앳된 손이 전에 없이 폭력적이었다. 아카아시는 나직하게 말했다.
“밥풀 튑니다, 보쿠토 씨.”
“~~!”
소년이 숫제 억울한 얼굴로 그를 획 쳐다보았다가 다시 고개를 떨어뜨렸다. 잿빛이 섞여든 검은 머리카락에 감싸인 조그만 정수리가 보인다. 소년의 숟가락질이 강제로 억눌린 느낌이 들 때, 아카아시는 소년의 밥숟갈 위에 고기 조림 하나를 올려주었다. 귀까지 빨갛게 된 소년이 소리 없이 입술만 삐죽거리다가 반찬이 올라간 밥을 한 입에 집어넣고 기세좋게 우물거렸다. 아무 말 없이 밥을 먹는 모습만은 조금 귀여워서 아카아시는 한 번 더 반찬을 올려주었다.
*
“아카아시, 힘들어?”
보쿠토가 그 사이 또 쪼르르 그에게 다가와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카아시는 아무 말 없이 보쿠토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천진한 금빛 눈동자가 그를 올려다본다. 아카아시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아카아시, 낮잠 잘래?”
“낮잠 주무실 분은 보쿠토 씨죠.”
“나는 아까 잤어!”
그러셨습니까. 그 말에 보쿠토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의 손을 이끌고 침실로 향한다. 정말로 괜찮은데요, 그렇게 말해도 보쿠토는 듣는 기색이 아니었다. 아카아시는 결국 보쿠토의 손을 뿌리치지 못하고 침대에 앉고서 쓴웃음을 지었다.
“자, 얼른!”
“저 졸립진 않습니다만…….”
“그래도 힘들면 자야해!”
아카아시의 손에 반절이나 찰까 싶은 조막만한 손이 팡팡 침대를 두드렸다. 아무래도 그가 침대에 눕기 전까지는 양보하지 않을 기세다. 아카아시는 어쩔 수 없이 일단 침대에 누웠다. 보쿠토가 침대에 몸을 기대어 그를 바라본다.
“얼른 자!”
“…….”
그게 옆에서 그렇게 보고 있는데 몇 초만에 뚝딱 잠들고 그러지는 못합니다만. 아카아시는 차마 하고 싶은 말은 하지 못하고 네, 하며 얌전히 누운 채 눈을 감았다. 그 사이에 보쿠토가 부산스럽게 침대머리맡과 다리쪽을 오가며 그의 몸 위에 이불을 덮어주기까지 한다.
“…….”
“……아카아시, 자?”
몇 분이나 지났을까. 귓가로 어린 애가 조심조심 묻는 목소리가 맴돌았다. 아카아시는 웃음이 올라오려는 걸 꾹 누른 채 자는 척했다. 조그만 손이 그의 가슴께 근처를 토닥 토닥 도담이는 것이 이부자락 너머로 느껴졌다.
“헤헤, 아카아시 잔다…….”
아카아시는 그 목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의식 아래로 파고들었다. 밤은 언제나 혼자만의 시간이었고 어둠 속에서 침대의 시트에 몸을 기대는 순간은 속의 어딘가가 휑하니 비었다는 것을 실감하게 했다. 그래서 그에게 잠은 그저 고된 의무였다.
“아카아시, 잘자아.”
소년의 목소리에 들뜬 감정이 실린 채 그의 근처를 맴돈다. 머나먼 곳까지 향하는 밤길, 조그만 반딧불이 점점이 켜져간다. 아카아시는 어쩐지 나른해져 눈을 뜰 수가 없어서 그 어린 목소리에 몸을 맡기고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
몸에 꼭 맞춘 정장을 걸치고 머리를 정돈한 보쿠토는 일개 고등학생이라고 보기 어려운 박력이 있었다. 꾸준한 운동으로 다져진 몸과 훤칠한 키도 한 몫했다. 표정, 그저 어린애같이 감정이 확연히 드러나는 표정만이 조금 위화감을 불러 일으킬 뿐이다.
“아카아시는…….”
“……?”
커프스 단추를 소맷단에 매달던 아카아시는 고개를 들고 보쿠토를 쳐다보았다. 준비를 다 끝낸 보쿠토가 아카아시의 방에 들이닥친 차였다. 커프스를 모두 단 아카아시가 타이로 손을 뻗을 때까지, 보쿠토는 말이 없었다.
아카아시는 거울 너머로 보쿠토를 바라보았다. 보쿠토가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이 역력한 얼굴로 그를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보쿠토 씨?”
“…….”
결국 아카아시는 넥타이를 목에 감다 말고 뒤를 돌아보았다. 보쿠토가 양손을 들어올렸다가 주먹을 쥐었다가 다시 축 떨어뜨린다.
“……아카아시도 잘 어울려…….”
“……잘 어울린단 표정이 아니신데요.”
“아냐, 진짜야……. 정말이야…….”
갑자기 잔뜩 시무룩해져서는, 보쿠토는 터덜터덜 아카아시 방에 놓여있는 소파에 털썩 몸을 묻었다. 기운이 쭉 빠진 것마냥 무릎을 끌어올려서는 몸을 한껏 웅크린다. 아카아시는 속으로 혀를 차며 손에 들고 있던 타이를 내려놓고 보쿠토에게 다가갔다. 왜 갑자기 기분이 또 엉망이 된 건지.
“보쿠토 씨. 왜요.”
저러다 옷 다 구겨지겠다 싶어서 어떻게든 일으켜세우고 싶은데, 보쿠토는 아카아시를 흘끗 쳐다보곤 다시 무릎에 고개를 묻었다.
“……아카아시, 우리 가지 말까?”
한참만에 내놓은 보쿠토의 말은 터무니 없는 소리였다. 얘기를 듣자마자 아카아시는 미간에 힘을 주었다. 사람이 안 간다고 말을 할 때는 정색을 하면서 화를 내놓고 이제와서 가지 말자고?
“아, 아니. 내 말은 그러니까.”
아카아시의 기색이 험악해진 걸 눈치챘는지 보쿠토가 다급하게 변명조로 말을 늘어 놓는다. 아카아시는 할 말을 해보라는 표정 그대로 말 없이 보쿠토를 바라보았고 보쿠토는 서둘러 그냥 해본 말이었다고 말을 돌렸다.
*
“아, 벌써 재미 없을 것 같아.”
나카시마 사택까지 가는 길, 차 안에서 제멋대로 구겨뜨린 자세로 과자 하나를 입에 넣고 있던 보쿠토가 창밖을 바라보다 말고 돌연 휙 몸을 날려 아카아시의 무릎을 베고 누우며 투덜거렸다. 아카아시는 먼저 보쿠토의 손에 들린 과자를 뺏고 입가를 털어주며 한숨을 쉬었다.
“그렇지만도 않을 겁니다. 또래 친구분들도 있을 거예요.”
“친구는 아카아시도 있는데.”
“……제가 친굽니까, 네?”
“그, 그럼.”
아카아시가 웃음기를 섞어 묻는 말에 보쿠토가 귀를 빨갛게 물들이곤 획 고개를 돌렸다. 그래봤자 아카아시의 품에 더 파고드는 꼴이었다. 아카아시는 몸을 조금 숙여 보쿠토의 뺨에 묻은 부스러기를 세심하게 털어주었다. 이런 면은 아직도 아이같기만 하다.
“우리, 놀다가 도망칠까?”
“그럼 못 씁니다.”
“하아아. 아카아시 엄격해.”
“누구누구씨가 억지로 가자고 끌고와서요.”
“쳇.”
보쿠토가 한껏 투덜투덜 입을 삐죽거리며 아카아시의 정장을 잡아당겼다가, 안에 받쳐입은 흰 셔츠를 한 번 건드렸다가, 돌아누웠다가, 팔을 쭉 뻗었다가 그렇게 온통 정신산만하게 굴며 아카아시를 괴롭혔다. 그럴 때마다 아카아시는 정장과 셔츠는 바로하고 보쿠토가 돌아눕느라 구르지는 않을지 지긋이 바라보다가, 팔을 쭉 뻗는 건 자동차의 문에 부딪히지 않도록 손으로 가볍게 붙들었다.
“아카아시.”
“네.”
보쿠토는 쭉 뻗은 팔을 아카아시에게 맡긴 채 고개를 젖히고 아카아시를 올려다보았다. 아카아시가 보쿠토의 팔을 한 짝씩 다시 내려주며 보쿠토를 쳐다본다. 보쿠토가 물었다.
《Sincerely You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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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쿠토×아카아시
140*210 | 인쇄 | 금박 | 210p | 15,000원
보쿠토보다.. 많이 어린.. 보쿠토의.. 약혼자 소년 아카아시 두 사람이 만나서 성장해나가며 연애하는 이야기입니다. (전작 Dear Mine과는 스토리 상으로는 전혀 연관이 없으며 소재가 짝을 이루어 제목과 표지를 맞추었습니다! Dear Mine - 아이보쿠토x어른아카아시, Sincerely Yours - 어른보쿠토x아이 아카아시)
보쿠토는 그만 걸음을 딱, 멈춰 서고 말았다.
뒤따라오던 부친의 비서가 그의 등에 코를 박고는 울상을 짓는 것을 알았지만 보쿠토는 알고도 움직일 수 없었다. 방은 전통식으로 만들어 단아한 구석이 있었으나 장식이 적어 조금 휑했고, 그 다다미 위의 탁상에는 김조차 올라오지 않은 찻잔이 두 개 놓여있었다. 맞은편에 앉아있는 소년의 자태는 다소곳했다. 조금 여린 몸이 바르게 앉아있다가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본다. 가느다란 눈매 아래의 청록색 눈동자가 언뜻 엿보였다.
그러니까, 저 자리에 앉아 있기로 한 사람은,
오늘 그의 맞선 상대였다.
*
보쿠토는 그대로 몸을 돌려 비서의 넥타이와 옷깃을 쥐어틀고 방을 나왔다. 고용인들이 허둥거리다 일단은 방문을 닫고 보쿠토는 곧장 비서를 쥐고 짤짤 흔들었다.
“미쳤어!?”
“도, 커헉, 도련님, 그것이…….”
“애잖아! 애! 초등학생 아냐? 저거?”
“마, 말씀 드렸는데요!”
“언제! 들은 적 없거든!”
보쿠토의 말에 비서가 억울함 그득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지만 보쿠토는 다시 비서를 쥐고 흔들며, 방금전 그가 보았던 믿을 수 없는 풍경만 되새겨보았다.
찻잔을 앞에 둔 상대는 초등학생이라고 쳐도 선이 가느다란 어린 소년이었다. 먹을 부어 만든 듯이 새카만 머리카락 아래에 얼굴이 희끗했고 그를 올려다보는 눈동자는 어린애 다운 기색 하나 없이 차분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애였다. 어린애.
“이번은 뭐 결혼 생각 어쩌고 하라며.”
“네, 그렇습니다. 이미 결정이 됐고요…….”
“뭐?”
보쿠토는 눈을 가늘게 떴다. 금빛 눈동자 안에 흉폭한 기류가 몰아치는 것을 똑똑히 확인한 비서가 침을 꿀꺽 삼켰다.
이 집안의 하나 있는 도련님은 기세가 등등하기로는 여느 무도가 못지 않고,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 앞에서 가차없기로는 시정잡배 뺨을 양쪽으로 날리고도 한 대가 더 남는 인물이었다. 좋게 말하자면 아직 젊어 혈기가 넘쳤고 나쁘게 말하자면 어디서 무슨 짓을 당할지 모르니 아무도 나쁘게 말하지는 않았다.
하여 그런 인물인데, 또 성적으로는 더할나위 없이 담백하여 여지껏 옆에 둔 사람이 하나 없었다. 부친이 어떻게 짝을 지어주려는 상대마다 차버리기 일쑤였다. 웃기만 하면 금방 순진한 표정을 할 수도 있으면서 그러지를 않았으며 눈을 매섭게 뜨면 박력이 남달라 그 얼굴로 날카롭게 몇 마디를 하면 버텨내는 사람이 없는 탓이었다. 보쿠토는 틀림없이 오늘 자리도 그렇게 튕겨낼 심산이었을 것이었다.
**
보쿠토는 터덜터덜 안으로 들어가 소년 앞에 털썩 앉았다. 주위에 눈짓을 하자 사람들이 우르르 빠져나가고 실내에는 두 사람만 남았을 때 보쿠토는 타는 목을 다스리기 위해 다 식은 찻잔을 들이켰다.
“야.”
“…….”
“얘기 들었냐? 너랑 나랑 결혼해야 된다는 거?”
“……정식 혼약은 제가 성인이 되고 난 이후입니다.”
앳된 목소리가 또랑또랑하게 대꾸했다. 하아? 보쿠토는 눈을 깜박이며 소년을 바라보았다. 소년의 무릎 위에 올라가 있는 조그만 손까지 한 눈에 들어왔다. 꽉 쥐고 있어서 하얗게 질린 손이었다.
“그 전까지는, 약혼으로…….”
“어……. 근데 그게 무슨 뜻인지는 알아?”
보쿠토는 찻주전자를 집어들고 조막만한 찻잔에 다시 찻물을 채우며 물었다. 소년은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니, 모르지. 꼬맹이, 너 막 너희 반에서 제일 좋아하는 애 있지, 걔랑 손도 못 잡을지도 몰라.”
“그런 거 없어요.”
“…….”
보쿠토는 마른침을 삼켰다. 마냥 어리다고만 여겼는데 생각보다 훨씬 더 애같지 않은 표정과 말투였다. 소년이 조금 고개를 떨어뜨렸다. 보쿠토의 주먹만한 정수리였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응? 뭐가?”
차와 함께 나온 양갱을 한 입에 털어넣은 보쿠토가 고개를 갸웃했고 소년은 고개를 들지 않은 채로 대답했다.
“보쿠토 씨는 애인, 만드셔도 괜찮습니다. 그 나이는 참기 어렵다고 들었습니다.”
보쿠토는 양갱을 먹다가 사레에 들려 황천에 발을 담그고 돌아와야 했다.
**
“저 혼자서 갈 수 있는데…….”
보쿠토는 알아, 알아 하며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처음부터 데려다 줄 생각을 한 건 아니었다. 이런 쪽으로는 생각이 닿지 않는 보쿠토가 떠올릴 수 있었던 건 비서가 먼저 연락을 해주었기 때문이었다. 소년의 등하교를 마중해줄 사람을 보내주겠다는 말을 하며. 보쿠토가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 무슨 데려다 줄 사람까지 필요하느냐 하였더니, 비서가 돌연 정색을 했던 것이다. 요즘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 그런 안일한 소리를 하느냐고.
통화를 하다 말고 낮잠을 자고 있는 아이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는데 괜히 없던 걱정이 솟아올라서, 보쿠토는 그건 알겠으니 자신이 알아서 데려다 주겠다 말하고 비서가 보내주겠다 한 사람들을 모두 물렸다.
그리하여 오늘이었다.
아파트 바깥으로 나오자 등교를 하는 어린 아이들이 삼삼오오 몰려있는 게 눈에 띄었다. 품 안의 소년이 내려달라는 말을 한 번도 했지만 보쿠토는 흘려 듣고는 성큼성큼 학교 쪽을 향해 걸어갔다.
“봄이라도 아침은 조금 추운 것도 같은데……. 아카아시, 안 추워?”
“괜찮습니다.”
아이가 단정한 목소리로 대답했지만 보쿠토는 그다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괜찮지 않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는데 괜찮다는 말을 어떻게 믿어.
“아니, 왜 애들 교복을 다 반바지를 입히고 난리람.”
“…….”
“추우면 말해야 돼, 아카아시. 알았지.”
“……네.”
“학교에서 누가 괴롭혀도 말해, 알았지.”
“그럴 일 없어요.”
“그래도. 학교에서 뭐 가져오라고 하는 건 바로 말해주고, 음음.”
“……네.”
“모르는 사람이 뭐 맛있는 거 준다고 해도 따라가면 절대 안돼.”
결국 소년은 소리 내 대답하는 것도 그만두고서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학교까지는 10분이 조금 걸릴까 말까 한 거리였다. 보쿠토는 교문 근처에 몸을 숙이고 앉아 무릎 위에 소년을 앉혀놓은 채 지금까지 들고 온 신발을 신겨주고서 소년을 일으켜 세웠다. 지나가는 학부모들이 흘끗거렸지만 보쿠토는 알아차리지도 못한 채 소년의 어깨에 조그만 책가방을 메어주었다.
“수업 언제 끝난다고 했더라……. 데리러 올 테니까, 나 안 오면 전화해.”
“혼자서 갈 수 있…….”
“안 돼. 안 오면 전화해, 알았지.”
**
“보, 보쿠토……씨?”
보쿠토는 자신과 얼추 비슷하게 눈을 마주하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소년이 경호원의 품에 안겨 있었다. 다른 한 사람이 보쿠토를 보고서 고개를 까딱한다. 보쿠토는 현관 문고리를 손에 쥔 채 세 사람의 모습을 바라만 보다가 인상을 확 찌푸리곤 소년을 채어오듯 경호원의 품에서 뺏들어 안았다. 경호원은 보쿠토에게 순순히 아이를 내어주었다.
“왜 애를 안고 와?”
조금 험악한 보쿠토의 목소리를 알아챈 소년이 그의 옷깃을 쥐었다.
“아, 저 신발……. 잃어버려서.”
“신발?”
보쿠토가 현관 안으로 들어오며 소년의 무릎 아랫쪽을 바라보았다. 과연 그 말대로 단화 없이 양말뿐이었다. 보쿠토는 아이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며 뒤쪽의 경호원들을 쳐다보았다. 어떻게 된 거냐는 질문이 담긴 눈빛에 두 사람이 고개를 내젓는다. 보쿠토는 일단 쿵쾅거리며 안으로 들어왔다.
**
어젯밤 보쿠토는 몰래 아카아시의 방으로 들어와 이 안내문을 가져가려고 했는데, 곧바로 들키는 바람에 아카아시가 곧장 보쿠토의 방에 있던 서류 세단기에 안내문을 돌려버린 것이었다. 아연실색하는 보쿠토를 놔두고서 방으로 돌아간 아카아시는 쿨쿨 잘만 잤고 보쿠토만 세단기 앞에서 엉엉 울었더랬다. 그 뭉치를 아침에 몰래 챙겨서 출근한 보쿠토였다.
“하아.”
가느다랗게 잘린 문서를 한 줄 한 줄 맞추며 보쿠토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도 가고 싶었다. 회사 동료가 말을 꺼낸 놀이공원. 하지만 동료가 생각하고 있을 이 반지의 또다른 주인은, 적어도 보쿠토 또래의 회사원이거나 아니면 대학생 정도가 고작일 게 분명했다. 고등학생도 되지 못한 어린애가 아니라.
아카아시에게 그런 논조로 가자는 얘길 하면 소년은 거절하지 않을 것이었다. 아주 어렸던 그 날부터 소년은, 정말 이렇게 말을 하자면 기가 찰만한 얘기였으나 적어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약혼자로서의 의무에 있어서는 결코 허술히 하려는 법이 없었다. 요구하는 것은 뭐든지 하려고 했다. 소년의 목에 걸려있는 반지가 그랬고 꼬박꼬박 그의 부친과 함께 하는 식사자리가 그랬다.
‘심지어 처음 봤을 때는 뭐, 뭐라고. 애인 만들어도 된다고!’
자신은 애인이 아니라 단지 어쩔 수 없이 맺어진 결혼 상대일 뿐이라는 걸 확실히 알고 있다는 걸 알려주는 말이었고 동시에 본인은 약혼자의 의무를 다하겠다는 말이었다. 그 말이 되레 족쇄가 되어 보쿠토는 소년과 만난 뒤로 그 누구와도 연애 비슷한 것조차 해보지를 못하고 있었다.
보쿠토는 탄식을 담아 한숨을 푹 내쉬며 가느다란 종이 한줄 한줄 글자를 맞추어 붙여나가기 시작했다. 그 전에 세단기에 돌렸던 것들과 섞여 있어서 작업은 한참이 걸렸다. 게다가 회사에서 일도 해야 해서, 실제로 이 작업에 몰두할 수 있는 시간은 많지 않았다.
“!”
쉬는 시간 틈틈이, 점심시간까지 겨우 다 바쳐 학부모 참관수업 안내문을 바로 잡은 보쿠토는 속에서부터 울컥 올라오는 북받침에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이걸 진짜로 해낼 줄이야!
**
말을 할 수 없는 이유는 무수히 많을 것이다.
퇴근하고 돌아온 보쿠토는 천천히 현관문의 비밀번호를 눌렀다. 집 안은 낮에도 난방을 그치지 않아 따뜻했지만 불을 켜지 않아 어두웠다. 보쿠토는 서류 가방을 현관 근처에 아무렇게나 내팽개치고서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보쿠토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도심 야경의 빛이 얼어붙어 그의 눈가로 낙하했다. 보쿠토는 허리를 굽힌 채 입가를 가렸다가 마침내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무슨 일인지 추궁하려던 것이 아니었다. 만약 오늘 저녁 약속에 정말로 무언가, 아카아시가 그에게 말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건 보쿠토 자신을 위한 것이 분명할 테니 그게 무엇인지 알고자 했을 뿐이었다. 그 사이에 어떤 치명적인 거짓말이 있다고 해도 아무 말 없이 넘어가려고 했다. 그저 궁금했다. 그랬다.
그랬는데.
말을 할 수 없는 이유는, 그에게는 말을 하지 못한 이유는 무수히 많을 것이다…….
보쿠토는 현관에서 전자음이 들릴 때까지, 몇 시간이나 꼼짝하지 않고서 소파에 앉아있기만 했다.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려도 움직이지 못했다.
“보쿠토 씨……? 왜 불을 켜지도 않고 계세요. 늦게 왔어요?”
아카아시가 들어와 거실의 불을 켜며 그를 본다. 보쿠토는 고개를 들고 아카아시를 바라보았다. 교복 위로 얄팍한 코트 한 장인 차림새였다. 바깥의 추위에 노출된 얼굴은 핏기가 가셔 희었다. 청록색 눈동자가 동요 없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아무것도 없지는 않았다. 스며든 것은 평소와 다른 것 같은 보쿠토를 향한 걱정이었다.
“보쿠토 씨, 무슨 일 있…….”
“…저녁은 잘 먹었어?”
“아, 네……. 보쿠토 씨는요? 뭐 드셨어요?”
아카아시가 부엌 쪽을 향하며 물었다. 어깨에 가방조차 풀지 않은 채였다. 부엌에 요리를 하거나 음식을 데운 흔적이 없는 걸 확인한 아카아시가 다시 거실로 돌아왔다.
“보쿠토 씨?”
바깥에서 뭐 드시고 오셨어요? 아카아시가 물었다. 보쿠토는 고개를 들고 아카아시를 바라보다가 손을 뻗었다. 손을 쥐어본다. 이제 겨우 굳은살이 배기려고 하는 손이었다.
왜 말 안 했어?
왜 비밀로 한 거야?
왜 나하고 가자고 하지, 않, 았…….
“보, 보쿠토 씨? 보쿠토 씨, 잠시만요. 손 놔주세요, 보쿠토 씨. 보쿠토 씨.”
아카아시가 보쿠토의 눈동자에서 후두둑 떨어져 내리는 것을 어떻게든 하고 싶어서 손을 빼내려고 했지만 보쿠토는 손을 풀지 않았다. 보쿠토 씨, 보쿠토 씨. 아카아시가 몇 번이나 간절하기까지 한 목소리로 부르고 난 이후에야 보쿠토가 입을 열었다.
《연하의 남친이 직장 상사입니다!》
SOLDOUT
보쿠토×아카아시
140*210 | 인쇄 | 42p | 5,000원
아카아시가 보쿠토의 직장 상사로, 사귀는 두 사람의 짧은 에피소드입니다. 집에서 실수했더니 회사에서 구박받는 보쿠토의 아카아시 뒷담!
※ 인터넷 게시글과 댓글이 주된 내용으로 통신어체 + 자음 등이 난무합니다.
보쿠토는 움찔하며 차장이 가리키는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모니터 위에는 PPT 몇 장이 떠 있었다. 그가 이틀 내리 붙잡고 한 작품이었다. 걸작이야, 보쿠토는 때를 잊고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가 차장의 서늘한 눈치에 다시 몸을 움츠렸다.
“아, 그, 그게. 뭐였지…….”
“그리고 컬러톤이 너무 쨍한 빛이지 않나요.”
“에에.”
“이 폰트 말고 다른 좀 더 모양이 뚜렷한 걸로 쓰시고, 템플릿 전체적인 색깔 바꿔오세요. 좀 보기 편한 색으로. 내용은 나쁘지 않지만 텍스트가 좀 많은 편이니까 그것도 줄이고.”
“하지만 이거 슬라이드 진짜 많……. 네에…….”
보쿠토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뒤통수로 차장의 눈길이 꽂히는 것이 느껴진다. 다시 책상 앞에서 모니터에 파일을 띄워본다. 두자리수의 슬라이드가 그를 열렬하게 환호했다.
결국 보쿠토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인터넷 브라우저를 열었다.
*
제목 : 회사에서 남친이 짜증냄
글쓴이 : 유채남편
내용 :
남친이 상사인데 집에서 실수한 걸로 회사에서 짜증내 ppt 슬라이드 다 고치라고 함
보쿠토는 재빠르게 타다다닥 입력하고는 작성 완료 버튼을 눌렀다. 익명의 사람들이 잔뜩 모이는 웹사이트였고, 연인이자 직장 상사인 아카아시가 그를 못살게 굴 때면 줄곧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이용하는 곳이기도 했다. 대부분 아무도 반응해주지 않았지만 이렇게 어딘가에 털어놓는 것만으로도 제법 위안이 되었다.
보쿠토는 그렇게 글을 올려놓고, 아카아시가 말한 대로 프리젠테이션 파일의 템플릿을 수정하기 시작했다. 실상 무의미한 작업이었고 그러니 그의 말과 생각이 옳았다. 아카아시는 그저 심술을 부리고 있는 것이었다.
한창 전투적으로 작업을 하고서 다시 웹사이트를 열었더니 웬걸, 댓글이 달려 있다. 보쿠토는 눈을 반짝이며 자신의 게시글을 다시 열었다.
└ 네로 : 집에서 뭔 실수를 했는데?
“윽…….”
하필이면 제일 대답하기 찔리는 부분을 묻는다. 그냥 무시할까? 보쿠토는 잠깐 고민하다 그 아래에 답글을 달았다.
└ 유채남편 : 그게 밤에. 하자고.
└ 네로 : [산딸기]? 자꾸 하자는 거 님이 거절해서 그럼?
└ 유채남편 : 아니 남친이 쉬자는데 내가 계속 하자고 해서.......
└ 네로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유채남편 : 참을걸...
보쿠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카아시는 웬만해서는 보쿠토를 거절하는 법이 없었다. 매사에 칼 같아보여도 분명 보쿠에게는 무른 면이 있었다. 그러니까 그 아카아시가 안 된다고 하면, 그 때는 말을 들어야했는데 어제 그만 열이 오른 탓에 고집을 부리고 말았던 것이다.
└ 안경닦이k : 지난번에 남친 컵 깨고 까인 거랑 동일인물인가
└ 네로 : 그건 또 뭔 얘기야
《꽃잎의 행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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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쿠토×아카아시
140*210 | 인쇄 | UV코팅 | 410p | 20,000원
1월, 2월, 3월 웹에 공개된 원고 모음집. 미공개 원고가 들어갑니다.
웹 공개 원고는 http://rrdrops.tistory.com/ 에서 확인해주세요!
재록본이기 때문에 샘플 공개는 없습니다.
수록된 작품은 <어린애>, <달콤한 당신>, <민들레>, <병이에요>, <다시, 첫눈에>, <사막의 밤>, <부르는 소리, 맞잡는 손>, <Silent night>, <충고>, <안개꽃>, <사랑이 맴돈다>, <시작>, <그대네요>, <흉터>, <사랑을 주세요!>, <그대 가슴에 입술 자국>, <질투는 녹색 눈의 괴물>, <발끝 아래엔 구름조각을>
그 외에 비공개 원고 분량이 약 100P 가량으로 단편 <술버릇>과 중편 <Pokarekare Ana>가 완결까지 실려있습니다. 재록본이기 때문에 별도의 샘플 공개는 없습니다.
+표지 일러스트 :: Butters님이 힘써주셨습니다. 사랑합니다..S2
《빗방울의 행방》
SOLDOUT
보쿠토×아카아시
140*210 | 인쇄 | UV코팅 | 317p | 18,000원
5월, 6월 웹에 공개된 원고 모음집. 미공개 원고가 들어갑니다.
웹 공개 원고는 http://rrdrops.tistory.com/ 에서 확인해주세요!
재록본이기 때문에 샘플 공개는 없습니다.
표지 일러스트 Butters님께서 힘써주셨습니다♥
<불꽃놀이가 피어오르는 순간>, <첫키스는 레몬사탕 맛>, (Mission Impossible>, <Mission Possible>, (꿈같은 일>, <어깨 위로>, <Lunatic>, <여전히 꿈결>, <사냥꾼과 인어공주>, <늦게 피는 수국> 이 수록됩니다.
《빛에 관한 기억》
SOLDOUT
보쿠토×아카아시
140*210 | 인쇄 | 먹박 | 132p | 10,000원
코노하가 바라보는 보쿠토와 아카아시의 이야기
그 녀석은 처음부터 아주 특별했다. 누군가는 보쿠토 옆에 머무는 그 녀석의 모습을 보고서 초승달같다느니 하는 가벼운 소리를 했지만 틀린 얘기였다.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그저 가만히 서있기만 해도 눈을 끄는데 그런 것이 초승달 같이 있는듯 없는듯 은은한 것일 리가 없다.
그 녀석은 처음부터, 아주 특별했다. 그걸 제일 먼저 알아본 사람은 나였다.
*
아카아시 케이지입니다. 중학교 때엔 세터였습니다.
그 녀석은 단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긴장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갓 중학교를 졸업한 것치고는 어른스러운 목소리였다. 주위의 녀석들이 왜 이제와서, 어쩌다 이렇게 늦게, 그렇게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 4월 중반이 다 넘어가는 시기였다. 어지간한 동아리들은 가입 신청기간까지 모두 끝냈고 그건 우리 배구부도 마찬가지다. 요 며칠간의 연습으로 떨어져나갈 녀석들은 가버리고 남은 인원만 추슬러 정비를 마쳤는데 갑자기 신입부원이라니 영문을 알수 없을 만 했다.
그 녀석이 사실은 학년에서 손에 꼽힐 만한 성적으로 입학을 했고 척보기에도 침착하고 차분해 보이는 모습 탓에 선생님들이 학생회로 끌고 오려고 꽤나 난리였다는 건 뒤에 알게 되었다. 그것을 어떻게든 수습을 하려고 하다가 입부가 늦었다는 것이었다. 다른 교사들이 녀석을 붙들고 학생회에 넣니마니 하는 것을 코치와 감독에 고문까지 나서서 빼어왔다고 했다. 그래서 이런 애매한 시기에 입부가 가능했다고.
먹을 부은 듯이 새카만 머리칼 아래에 크게 뜨고 있는 눈은 아니었는데 눈매가 길었다. 누군가 아주 가느다란 붓으로 가늘게 그려 뺀듯이 얄쌍한 선이었다. 입고 있는 교복은 목 끝까지 단추를 채웠고 타이도 빈틈이 없다. 블레이저의 단추는 모두 잠그고서 단정하게 허리를 펴고 서 있는 녀석은 이리봐도 저리봐도 운동부 같지는 않았다. 제 말대로 학생회나 하면 딱일 인상이었다.
누군가가 말했다. 저래서 버티겠어? 그 말은 이런 어정쩡한 시기에 특별 취급을 받는 신입생을 향한 터무니없는 질투만은 아니었다. 녀석은 이제 겨우 고등학교 1학년이었고 그 ‘겨우 고등학교 1학년’이라고 하기에 어울리는 체격이어서, 180도 미치지 못하는 키에 아무리 봐도 마른 편이었다. 고생이라고는 모르고 자라서 뛰노는 동급생들을 내려다보며 책이나 펼치면 모를까 아무리 봐도 코트 위에서 뛰는 모습은 연상이 되질 않는 것이었다.
우리의 우려와 함께 부활동은 이어졌고 아카아시는 큰 소음 없이 부활동에 적응해나갔다. 큰 소음 없이, 라고 하기보다는 그럴 수 밖에 없었지만. 3학년 선배들은 코치나 감독까지 관심을 기울이는 신입생을 눈여겨 보기는 했어도 정도 이상의 친절을 베풀지는 않았고 신입생들은 제 또래라기엔 침착하다 못해 서늘한 인상의 동기와 제대로 말문조차 트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리고 2학년들은.
우리에게는 괴물이 하나 있었다. 입학하여 배구부에 들어올 때부터 모두의 관심을 휘어잡은 사람, 1학년때부터 차기 에이스로 당연하다는 듯이 이름이 거론되었던 녀석. 그 괴물의 이름은 보쿠토 코타로였다.
신입생 때부터 키도 체격도 남다르고 파워도 상당하여, 한 번 스파이크를 내리치면 미들블로커가 따라붙어도 거뜬히 뚫어냈다. 힘과 재능과 기회, 그 모든 것이 응축되어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그것에 붙은 이름이 보쿠토 코타로였다. 녀석은 혼자서 빛을 발하는 태양같아서 누구나 돌아보았고 모두 그 앞에서 찬탄의 말을 올리는 것이 당연해졌다. 하지만 태양은 가까이 오는 것들을 모두 태워버리는 존재이기도 했다.
동기들은 그의 불꽃에 모두 불타고 남은 잿빛 그림자가 되었다. 저런 건 대단한 천재라고, 따라갈 수 없는 게 당연하다고 여길 수 있었다면 그나마 나았을텐데 그러지도 못했다. 보쿠토는 아침 저녁 할 것 없이 연습에 소홀한 적이 없었다. 개구진 표정에 재미없는 건 하기 싫다고 내뺄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서 제일 먼저 체육관에 왔고 제일 늦게 체육관에서 나갔다. 주위 사람들 전부가 차기 에이스라고 추켜세워주는 것으로 콧대 세울 법도 했는데 행여나 코트에서 실수라도 하면 하면 모두가 알 수 있을 만큼 축 처졌고 그런 날이면 시간 가는줄 모르고서 실수한 것을 또 연습하고 연습했다.
이름을 부르면 어린애처럼 천진한 표정으로 웃었고 가진 것을 내세우지도 않아 보쿠토 코타로는 진정으로 태양이었다. 우리는 그를 시기하지도 못하고 질투하지도 못하고 미워하지도 못하고서, 그저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그 누구도 향하지 못한 오갈 데 없는 감정의 응어리들은 우리 사이를 항상 떠돌면서 우리들을 엮어놓았다. 그걸 쥐고 흔드는 건 보쿠토였다. 보쿠토가 열을 올리면 우리도 관심을 기울였고 보쿠토가 관심없는 듯이 고개를 저으면 우리도 시들해졌다.
그렇다고 해도 보쿠토가 특별히 낯을 가리는 편은 아니었다. 오히려 사람에겐 금방금방 살갑게 구는 녀석이었다. 다만 필요하지도 않고 관심도 없고 특별한 것도 없는 사람에겐 놀랄만큼 시큰둥한 태도를 보이곤 했는데, 보쿠토에겐 1학년들이 딱 그짝이었다. 이제 겨우 중학교를 졸업하고 올라온 신입생들은 보쿠토의 연습량조차 따라가지 못했고 보쿠토는 거기에 대해서 실망도 하지 않았지만 그걸 어떻게 해 보겠다고 붙어있지도 않았다. 보쿠토의 그런 태도는 우리에게도 자연스럽게 퍼져서 다들 제 할일에만 몰두할 뿐 후배들과는 묘하게 데면데면했다.
그러니까 그 녀석을 가장 먼저 알아본 건 나였다.
*
저래서야 버티겠어, 누군가 그렇게 말했던 것이 기억에서 흐려져갔다. 아카아시는 특별히 친하게 지내는 부원은 없었으나 자연스럽게 부활동에 적응해갔고 연습도 거르지 않고 거뜬히 소화해냈다. 그다지 거뜬히는 아니었고 죽을만큼 힘을 냈었노라 훗날 말해주었지만, 어쨌든 그랬다.
부원이 워낙 많다보니 매니저들은 주로 3학년과 2학년을 챙기기에 바빠서 1학년들은 수건이나 음료를 알아서 해결해야 했다. 알아서라고 하면 거창하게 느껴지니 직접 챙겨마셔야 했다, 정도가 좋을 것 같다. 그게 뭐 대단히 서럽고 고달픈 일은 아니었고 그냥 수건과 음료가 조금 더 멀리있는 정도였다.
한창 리시브 연습을 하고서 마른 목을 축이고 있는데 아카아시가 눈에 들어왔다. 사실 눈에 들어왔다기 보단, 내가 이 곱상하게 생긴 후배에게 계속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게 더 맞는 말이겠다. 저렇게 생겨서는 운동부 활동을 얼마나 잘할지 궁금하기도 했고 코치에 감독에 고문까지 붙어 학생회에서 빼올 정도라면 보쿠토에 준하는 녀석이 아닐까 하는 기대도 있었다.
하여간 아카아시는 뚝뚝 떨어지는 땀을 훔쳐내며 몸을 숙인 채 호흡을 고르고 있는데, 녀석의 손에도 마실 게 없고 병이 놓여있어야 할 곳도 텅 비어 있었다. 나는 내 손에 쥔 음료의 뚜껑을 열며 아무 생각없이 아카아시를 흘끗거리다가 퍼뜩 떠오르는 것이 있어 내 음료를 내려다보았다.
그건 그 날의 소박한 충동이었고 동시에 우리들 중 누구도 표현하지 못하고 간직하고 있는 뾰족한 마음을 내보이고 싶다는 반발심리였다. 보쿠토가 관심 두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까지 그럴 필요는 없잖아. 보쿠토가 그러라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목 말라?”
“…….”
숨을 고르던 아카아시가 고개를 들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눈동자가 청록색이라는 건 그 때 처음 알았다. 나는 아카아시의 눈은 아주 까만 색일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조금 놀랐다. 후배는 잠시 말이 없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요.
“마실래?”
“코노하 선배는요?”
여기선 사실 정말 크게 놀랐다. 이 후배가 내 이름을 알고 있을 거라곤 전혀 생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사람이 열 몇명 밖에 없는 소박한 곳도 아니었고 내가 하늘같이 느껴질 3학년도 아니었으며 그렇다고 내가 누구나 돌아볼 만큼 대단한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닌데, 말 한마디 해본 적 없는 1학년 후배가 내 이름을 알고 있을 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을까.
“난 괜찮아. 아까 마셔서. 너 마셔.”
나는 아카아시에게 내 몫이었던 드링크병을 반쯤은 강제로 쥐어주고서 곧장 몸을 돌렸다. 사양하는 말을 들을까 싶어서이기도 했고 아까 마셨다는 말은 거짓말, 보쿠토의 음료를 뺏어마실 작정이었기 때문이었다.
보쿠토 녀석은 뭐야, 네 건, 하며 투덜거리기는 했지만 반쯤 남은 드링크를 넘겨주었다. 나는 나만 눈여겨보고 있는 후배에게 건네줬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아카아시가 내 이름을 알고 있다면 다른 사람들의 이름도 알고 있을 것이고, 그건 그 애에겐 특별할 것도 없는 일이란 뜻이었다. 그런 걸 붙잡고서 호들갑 떨고 싶지는 않았다. 치기어린 자존심이었다. 누군가가 보쿠토에게 마실 것이며 수건을 챙겨주는 게 당연한 것처럼 아카아시에게도 당연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 것도 있었다. 누구에게도 대수롭지 않은 일을 굳이 입 밖으로 떠벌려본들 무엇할까.
그 뒤로 며칠이 지났고 그 동안 아침 저녁으로 부활동이 있었지만 아카아시와 내가 특별히 친밀하게 지내는 일은 없었다. 여전히 우리는 후배들과는 데면데면했고 3학년과 2학년에 주전이 밀집되어 있는 만큼 그런 분위기를 탓하는 사람조차 없었다. 내 소소한 반란 아닌 반란은 그 날로 끝이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보쿠토가 평생을 다해 내 주스에 고마워해야 하는 그 일이 없었다면 아마 계속 그랬을 것이다.
내가 아카아시에게 내 몫의 드링크를 주었던 날로부터 일주일이 채 지나기 전의 어느 날이었다.
배구부원들끼리 특별히 대단한 의리나 친목을 다지는 건 아니었지만 학생식당에서 마주하면 합석 정도는 편하게 하는 사이였고 그 날도 그랬는데, 함께 한 자리에서 유독 보쿠토가 들떠있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들떠있었다기 보다는 체육관 조명 수리 건으로 아침 연습을 못한 분량 만큼 에너지가 남아 넘치는 것 같았다. 하여간 그렇게 온몸에 기력이 넘치는 티를 감추지 못하고서 밥을 먹는 건지 전쟁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싶었는데 기어코 보쿠토가 사고를 쳤다. 큰 소리로 이야기하며 팔을 휘두르다가 후식으로 나온 사과맛 음료를 냅다 후려쳐버렸는데, 입부할 때부터 차기 에이스로 거론되던 배구부 윙스파이커가 넘치는 힘을 주체하지 못하고 쳤으니 팩에 담긴 음료는 그대로 기운차게 날아가 학생식당 바닥에 떨어졌다. 아직 포장도 뜯지 않은 것이라 제때 줍기만 했으면 수습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참 기가 막히게 그 순간 그걸 또 누가 밟아버렸고 퍽, 하는 소리가 나더니 사과향이 훅 퍼졌다. 보쿠토의 주스가 누군가의 발 아래에서 터져버린 것이다.
밟았던 사람이 휘청하며 뒤로 넘어가는 걸 다른 사람이 붙잡아 겨우 세워주는데도 보쿠토는 터져버린 자신의 사과맛 음료를 바라보며 거의 울것 같은 표정을 짓느라 바쁘다. 밟은 쪽은 후배였는지 놀라서 사과부터 하고 있었다.
도대체가 세상이 무너진 듯이 굴기에 나는 혀를 차며 내 몫의 팩을 내어주었더랬다. 얼굴도 모르는 후배에겐 적당히 괜찮노라 말을 해주고 어떻게 상황을 수습하려는데, 보쿠토의 그러잖아도 큰 눈이 화등잔만해지더니 또 활짝 웃는다. 좋다고 신이 나서 팩에 빨대 꽂는 모습을 보며 나는 혀를 찼다. 차라리 이 녀석을 시기하고 질투하고 미워할 수 있었다면.
그렇게 자리에서 일어설 때였다. 불쑥 내 눈 앞에 다시 그 음료 팩을 든 손이 나타났다.
“어……. 아, 아카아시.”
보쿠토의 음료 팩을 밟아 터뜨린 사람이 아카아시의 같은 반 친구였던 듯했다. 나는 의외의 장소에서 마주친 후배의 모습에 놀라서 움찔했다가 나도 모르게 보쿠토를 한 번 흘끗 쳐다보았다. 보쿠토는 벌써 빨대를 입에 물고 있었다. 한 번 입술을 움직일 때마다 팩이 홀쭉해지기를 반복한다. 보쿠토는 아카아시가 누구인지 궁금하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이미 알고 있는 것인지 특별히 감정이 드러나는 표정은 아니었다.
“안녕하세요.”
아카아시가 꾸벅 인사했다. 나만을 향한 인사는 아니었다. 다른 동기들도 어 안녕, 하며 조금 어색한 목소리로 인사한다. 아카아시는 담백한 목소리로 사과의 말을 전했다. 사실은 밟고 넘어질 뻔한 사람이 있었으니 정말 미안한 건 이 쪽이라서 서둘러 손을 내젓는데 아카아시가 들고 있던 걸 내게 내밀었다.
“-이거, 하나 남아서요. 코노하 선배 드세요.”
아카아시는 얼떨떨해하는 내가 뭐라 대꾸할 기회도 주지 않고서 내 손에 팩을 쥐어준 뒤 꾸벅 인사를 하고는 몸을 돌렸다. 나는 직감했다. 뜬금없이 식단 메뉴 중에 하나였던 주스가 남을 리 없다는 것과 이것이 며칠 전 내가 양보해주었던 드링크의 답례라는 것을. 그리고 동시에 내가 여기서 저 애가 우리 부의 1학년이고 이름은 아카아시 케이지이며 중학교때는 세터를 했었다는 애라는 설명을 해야하는지 아니면 그래도 일단은 모두 같은 부원이니까 알고 있을 거라는 가정 하에 자연스레 넘어가야하는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데 돌연 보쿠토가 물었다. 녀석이 먹던 음료는 이미 깨끗하게 비어서 빨대에서 한 번 거친 소리를 냈다.
“코노하. 너 쟤랑 친해?”
“어? 아니, 조금. 그냥.”
“그래?”
보쿠토가 다 비운 팩을 반으로 접어 휙 던졌다. 팩은 조금 멀리 떨어져있는 쓰레기통에 빨리듯 깔끔하게 들어갔다. 이런 곳에서까지, 그런 생각에 나는 속으로만 혀를 내두르다가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보쿠토는 우리를 보고 있지 않았다. 팩을 던지는 그 순간에도 한 곳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친구와 함께 멀어지는, 아카아시의 뒷모습이었다. 까닭을 모르고서 등골이 쭈뼛 섰다. 서로 불러도 듣지 못할 만큼 멀리 떨어졌던 아카아시가 문득 뒤를 돌아본다. 나는 그 애의 청록색 눈동자를 알아보았다. 아카아시가 다시 꾸벅, 우리를 향해 인사했다.
보쿠토의 질문은 보쿠토가 이미 아카아시를 인지하고 있었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는 걸 나는 며칠 뒤 아침에 알아차렸다.
*
아침에는 연습하기 전 20분 정도 운동장을 달리는데, 물론 선두에 있는 건 보쿠토와 3학년 선배 몇 명뿐이었다. 나머지는 뒤에 적당히 뭉쳐가고 1학년들은 대부분 그보다 뒤다. 위계 질서를 맞추어 뛰는 것이 아니라 체력과 속도가 되는 대로 하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었는데 아카아시는 첫번째 그룹과 두번째 그룹 사이쯤에서 뛰고 있었다. 나는 저 괴물들만큼 체력이 되진 않아서 조금 뒤에서 달리며 아카아시의 등을 보고 있었다. 작년까지 봤던 건 선배들과 보쿠토의 등이었지만.
요 며칠간 나는 아카아시와 제법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지켜본 바, 아카아시는 여전히 특별히 친밀하게 지내는 사람은 없었지만 부활동에는 차고 넘치게 열의가 있었다. 너처럼 생긴 애가 이러는 건 좀 반칙 아니냐? 내 질문에 아카아시는 멀뚱히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손짓 발짓을 섞어가며 생각을 말했다. 아무리 봐도 학생회나 하게 생겼으면서 이렇게 배구부 활동 열심히 하는 거 말야. 완전 안 어울리는 느낌이라고. 내 말에 아카아시는 곰곰이 생각하는 표정이 되더니 나를 보곤 말했다. 그건 선배도 그런데요.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허를 찔려 입만 벌리고 있으려니 아카아시가 조금 헛기침하면서 짧게 사과했다. 녀석 딴의 농담이었다. 나는 그냥 갑자기 주체하지 못할 만큼 웃음이 터져서 그 날 하루종일 실실거렸고 아카아시는 나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왠지 부끄러워하는 듯이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나늘 오늘에서야 저 애를 눈여겨보고 있는 건 나만은 아니었을거라는 걸 알아차렸다. 앞에서 달리는 쪽에선 뒤에서 누가 뛰는지는 관심도 가지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선두에서 달리던 보쿠토가 흘끗 뒤를 본다. 보는 쪽은 명확했다. 아카아시였다.
이 때 내가 왜 배신감을 느꼈는지 정말 모를 일이다. ……아니, 솔직히는 알고 있지만. 나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쿠토는 인식조차 하지 못한 귀한 것을 나만 알아차렸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사실 보쿠토도 진작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 왜 여태껏 모르는 척했느냐고 따져 묻고 싶은 마음이었다. 보쿠토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괜히 원망스럽고 억울했다. 사실 보쿠토가 잘못한 건 무엇도 없지만.
잘못한 것이 없는 상대를 미워하는 감정은 결국 스스로에게 생채기를 낼 뿐이었다. 지난 1년동안 지독하게 깨달아온 것이기도 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위해, 스스로를 보호하고 싶어서, 그리고 사실은 정말 어떻게 해도 싫어할 수가 없어서 보쿠토를 좋아했지만 이미 자라난 감정이 어디론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건 언제나 터질 준비를 하고서 우리 주위를 맴돌았고 나는 그 보이지 않는 것을 붙들고서 제발 졸업할 때까지만 버텨달라고 내내 기도하고 있었다.
기도는 끝났다.
나는 천천히 뛰던 것을 멈추고 몸을 숙였다. 앞이 어질어질했다. 지금 이렇게 뛰던 것이 문제가 아니라 앞으로 부활동을 어떻게 해야할지 막막했다. 이런 마음으로는 누굴 봐도 헛소리나 지껄일 게 분명했다.
“코노하! 괜찮아?”
“코노하 선배!”
그랬는데.
나는 내 시야에 들어오는 신발 두 쌍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하나는 익숙한 것이고 하나는 낯선 것이었다. 천천히 고개를 들자 두 사람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하나는 보쿠토였고 하나는 아카아시였다. 순간 눈 앞이 빙글 돌았다. 내가 휘청거리자 두 사람이 놀라서 부축하려고 한다. 서로 손을 부딪히고는 흠칫하는 것까지 보고서, 나는 결국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코노하, 괜찮아? 많이 어지러워?”
옆에서 보쿠토가 주인 잃은 개마냥 어쩔 줄을 모르고 부산스레 굴었다. 실질적으로 도움이 된 건 후배인 아카아시였다. 누구와 살갑게 말하는 건 한 번도 보질 못했는데 곧장 매니저에게 달려가 차갑게 적신 수건과 음료를 들고 온다. 보쿠토는 그걸 보면서 눈을 휘둥그레 떴다가, 다시 나를 보고서 어쩔 줄을 모르다가 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양호실 갈래? 업어줄게!”
“……됐어, 치워, 인마.”
날파리처럼 허둥거리는 팔을 쳐내고 아카아시가 내미는 찬 수건을 목에 댔다.
왜 너희가 왔냐, 묻고 싶었다. 무릎을 세워 얼굴을 묻었다. 왜 하필 너희야. 왜 하필 너야. 너때문인데, 진짜, 이렇게까지 미워하지도 못하게, 왜 너야.
보쿠토가 모를까. 아니.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 녀석은 바보는 맞지만 멍청이는 아니다. 다 알고 있을 것이다. 중학교 때부터 휘황찬란하게 빛났다고 모두가 얘기했다. 중학교 때부터 그랬을테니 자신의 주위를 둘러싼 아름답지만은 않은 감정의 기류를 보쿠토 역시 알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내가 어떻게 어떤 마음으로 보는지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달려와주면. 알면서도 와주면. 알면서도 진심으로 저렇게 걱정하는 얼굴을 하고 있으면.
정말로 어떻게도 미워할 수 없게 이렇게.
“코노하아…….”
당황이 역력한 얼굴이 뜻하는 것은 너를 걱정하고 있다는 것. 옆에서 눈을 떼지 않고 바라보는 것도 같은 의미였다.
나는 깊은 탄식처럼 한숨을 내쉬고서는 다시 무릎에 고개를 묻었다. 나만이 아카아시를 알아보았던, 짧고 꿈결같던 시간의 끝이었다. 고개를 든다. 두 쌍의 눈동자가 나를 보고 있었다. 이젠 저 두 사람의 시간이라는 걸 내가 어떻게 알아차렸는지는 나도 모를 일이다. 다만 목에 닿는 수건을 쥐고서 생각했다. 아카아시, 누구하고도 곧잘 말 할수 있었으면서 왜 그 땐 드링크 찾아 마시지 않은 거야. 괜한 심통이었다.
*
나만 아카아시를 눈여겨보고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부의 모두가 지켜보고 있었다. 심지어 보쿠토까지 보고 있었으니 말 다했다. 조금 마른 편이라 체격은 부족해도 공을 만지는 걸 보고 있으면 그 센스가 얼마나 탁월한지는 누구나 알 수 있었다. 다만 녀석의 입부가 조금 늦었고 그 과정이 이미 충분할 만큼 특별취급이라, 이 이상 부 내에 위화감 조성을 막기 위해서 다들 은연중에 관심이 없는 척을 해온 것이었다.
“코노하 선배. ……보쿠토 선배.”
아침에 도움받은 게 고마워서 인사라도 하려고, 오후 부활동 하기 전 스트레칭하며 몸을 풀고 있는 녀석에게 다가갔다. 살짝 기척을 내자 나를 알아본다. 하지만 뒤따라나온 말은 나도 예상밖이라 몸을 휙 돌렸는데 내 뒤에 어느새 보쿠토가 와 있었다. 보쿠토가 내 어깨 너머로 아카아시를 삐죽 내려다본다. 나는 괜히 속이 뒤틀려서 보쿠토의 허리를 팔꿈치로 후려쳤다.
“억! 왜, 왜! 아씨, 코노하! 아파!”
“저리 가, 인마. ……아카아시. 스트레칭 도와줄까?”
“네? 아뇨……. 전 다 했어요. 제가 도와드릴까요.”
나도 다 했으니까 괜찮다고 거절하고서 오늘 아침의 일을 말하려고 하는데 대뜸 보쿠토가 끼어들었다.
“그럼 내 스트레칭 해줘!”
“……네?”
여기서 내가 그만 참지 못하고 웃어버린 건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마냥 어른스럽고 차분한 줄로만 알았던 후배가 대놓고 ‘도대체 이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라는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흠칫하며 뒤로 빠지는 몸짓까지 누가 봐도 구조요청이었다. 천하의 보쿠토 코타로를 저런 취급 하는 것은 내가 배구부를 들어와 한 번도 보지 못한 광경인지라 정말 허리가 끊어질 때까지 웃고 말았고, 내가 웃는 사이에 보쿠토는 아카아시를 붙들고서 기어코 스트레칭을 해냈다.
지금까지 무관심 일색이었던 태도가 무색하게 친근하게 구는 보쿠토가 당황스러운지 아카아시는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스파이크 연습을 마치고서 숨을 고르며 보쿠토를 흘끗 바라보았다. 보쿠토는 드링크를 쭉쭉 마시면서도 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공을 정리하고 있는 아카아시였다.
“너 아카아시 맘에 들었냐?”
“어? 아……. 어. 맘에 들어.”
맘에 들어, 그 말은 글자를 눌러 새기는 것같았다. 도대체 왜 갑자기, 어떤 점이? 왠지 조금 짜증도 나고 억울하기도 했다. 요 며칠 새 내가 보쿠토를 보며 느끼는 감정이었다. 나는 눈살을 찌푸린 채 보쿠토를 쳐다보았다.
“갑자기 어디가 그렇게 맘에 든 거야?”
“다른 사람 이름도 알고 있는 점이.”
그게 너무 의미 불명의 대답이라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보쿠토가 아카아시를 마음에 들어한다면 그럴 점은 많았다. 아카아시가 배구에 보이는 열의도 그러했고 아카아시가 때때로 선보이는 실력도 그러했다. 좀 더 나가자면 생긴 것도 단정했고 말투도 정중하여, 후배로서든 학생으로서든 흠잡을 데라곤 없는 녀석이었다. 그런데 모든 것을 뒤 한 저 뜬금없는 소리는 뭐란 말야?
“다른 사람 이름? 누구?”
도대체가 이 녀석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서 눈살을 찌푸렸는데 보쿠토가 돌연 창피한 표정을 지었다. 부끄러워하는 것같기도 했다. 나는 그 표정을 짓는 까닭도 알 수 없어서 미간을 모으기만 하다가 불현듯 벼락처럼 알아차렸다.
“아!”
보쿠토는 거의 뺨까지 빨개져서는 입을 삐죽거리고는 공을 한 번 위로 띄웠다 받는다. 나는 그 등을 후려쳤다. 보쿠토가 놓친 공이 굴러간다. 심술과 억하심정과 그간에 쌓아둔 오갈 데 없는 질투를 모두 실은 한 방이었다.
“아, 아파! 아 진짜! 코노하 야! 너 진짜 세게 때렸어!”
“이……. 이 오만방자한 새끼가 진짜!”
“아 그래도 그런 애 처음인 걸 어떡해!”
2학년 둘이서 큰 소리를 내자 1학년들은 놀라 쳐다보고 3학년 선배들이 웃으면서 주의를 주었다. 나는 그래도 몇 번 더 보쿠토를 때렸다.
그래, 지금 1학년 부원들 중에서 보쿠토 코타로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배구부가 아닌 사람도 태반은 알고 있을게 분명했다. 우리 학교 배구부는 나름 명문이고 성적도 좋은 편이라 시합이 있으면 응원을 오는 사람들도 상당했다. 부활동을 할 때에도 단연코 눈에 띄는 보쿠토를 모르는 신입 부원이 과연 있을까?
그러면 그 보쿠토 코타로가 아닌 다른, 부원들을 아는 신입생은? 저 1학년들 중에서 내 이름을 아는 녀석이 과연 있을까. 아마도 없을 것이다. 이제 겨우 한달이 될락말락 하는 시점이고 2학년도 3학년도 한 손으로 다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부원이 있는데 그렇다고 선후배 관계가 특별히 돈독한 것도 아닌 이 상황에서 누가 내 이름까지 알고 있을까? 그것에 대해 특별히 열등감이나 서운함을 느낀 건 아니었다. 그게 당연한 일이니까. 보쿠토의 이름이 튀는 게 특별한 경우일 뿐이니까.
하지만 보쿠토는 언제나 그랬을 것이다. 언제나. 상대의 이름을 알기 전에 상대가 먼저 그의 이름을 알고 있었겠지. 그의 옆에 있는 사람들의 이름은 몰라도 그의 이름은 알고 있었겠지.
보쿠토는 목소리에 색이 있다면 단언컨대 빨갛다고 할 수 있는 목소리로 말을 늘어놓았다. 저 후배가 내 이름만 아는 게 아니라 네 이름이며 다른 부원들 이름까지 모두 알고 있는 것 같다고. 그런 거 좋은 애라는 뜻 아니겠냐고.
그 목소리 안으로 처음으로 조금 무른 살을 보았다. 나는 미간을 꾹 찌푸려야했다. 그 살갗에 나 있는 생채기가 있었다.
잘못한 건 아무것도 없는데, 하고 싶어서 열심히 하기만 했을 뿐이었을텐데. 보쿠토도 알고 느끼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주위를 둘러싼 공기. 차마 자신에게로 겨누지 못한 감정의 응어리들. 자신을 좋아해서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싫어할 수 없어서 좋아할 수밖에 없는 것이 분명한 동료들. 자신과, 자신 외의 사람들. 같은 팀 안에서도 나뉘어져있는 보이지 않는 벽.
그게 보쿠토에게도, 그런 것들이 보쿠토에게도…….
그에게도 상처였다.
머쓱한 얼굴로 머리를 한 번 긁적인 보쿠토는 금방 쌕 웃고는 다시 스파이크 연습을 하겠다고 달려갔다. 나는 그냥 입술만 꽉 깨문채 보쿠토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냥 웃으면서, 등 몇번 내리치면서 네가 무슨 드라마 속 재벌 2세냐, 날 특별취급하지 않은 건 네가 처음이야 뭐 그런 거냐며 웃으면서 농담할 수 있었다면.
하지만 나 역시 그런 사람들 중 하나였다. 그 보이지 않는 하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감정의 기류 사이에 서서, 벽 너머에서 보쿠토를 바라보던. 있는 감정을 없는 척하며 바라보던 사람 중에 하나.
나는 결국 짜증스레 머리를 헤집었다. 보쿠토가 뻔뻔하게 굴어주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내가 그를 향해 소리쳤던 것처럼 정말로 오만하게 턱을 세우고서 다른 사람을 깔보고 우쭐거리는 녀석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저런 녀석, 실력만 좋을 뿐이지 친해지고 싶진 않다며 뒤에서 험담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보쿠토는 정말로 사람이 바라는 대로는 해주지 않는, 제멋대로인 녀석이었다.
“야! 보쿠토! 같이 가! 나도 할거야! 스파이크!”
꽥 소리를 치며 그쪽으로 달려가자 공을 쥐고 있던 보쿠토가 놀란 듯이 눈을 끔벅이며 나를 돌아보았다. 보쿠토는 정말, 정말로 놀란 것 같았다. 나는 괜히 친한 척을 한 것처럼 민망해서 그의 등을 한 번 더 때려주고는 공을 빼앗았다.
그렇게 돌이켜보자면 아아. 얼마나 소중할까.
처음으로 동료가 자신에게 아무 생각 없이 다가올 수 있게 해준 그 후배가, 보쿠토에게는 얼마나 소중할까…….
*
아카아시는 담담하게 말했다. 명부를 보고서 이름을 모두 외웠다고. 깜짝 놀라서 쳐다봤더니 아카아시는 조금 담담한 얼굴로 눈을 내리깔고서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제가 입부가 며칠 늦었잖아요. 다들 아는데 저만 모른다고 티내는 건 좀 아닌 것 같아서. 명부에 사진까지 붙어있는 건 아니지 않느냐고 했더니 그냥 사람들이 대화를 나누는 걸 보면서 하나씩 매칭시켰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는데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보쿠토는 곁에서 그 얘기를 듣고는 정말로 놀란 것 같았다.
“그걸 다 보고 끼워맞췄다고?”
“급하니까 어쩔 수 없죠…….”
아카아시는 담담하게 말하면서 쭉 몸을 뻗어 스트레칭했다. 팀으로 플레이하는 종목에 늦었는데 편하게 있을 수는 없잖아요. 당연히 해야할 일을 했다는 투였다. 나는 킬킬 웃음을 터뜨렸다. 이 녀석도 딱 보쿠토같았다. 남들을 그림자로 만들어버릴 재능을 가지고 있으면서 미워할 수 없게 만드는 점이.
“그랬구나……. 내 이름도?”
“예.”
“외워서 끼워맞췄어?”
“예.”
“어떻게?”
“어떻게라기보다는…….”
아카아시는 이런 것까지 말을 해야하는지 도통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선배가 묻는 말이라 그런 건지 아니면 본래 성격이 그런 것인지 차분하게 대답해주었다.
“코노하 선배가 보쿠토, 하고 부르시는 걸 보고요.”
그건 아마도 거짓말이겠지만.
나는 들은 순간 그렇게 생각했으면서도 그냥 웃었다. 중학교 시절부터 고등부에서 탐을 낼 실력, 입부한지 며칠만에 누가 누구를 어떻게 부르는지 모두 귀담아 들을 만큼의 주의력까지 있으면서 보쿠토 코타로를 모른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그러니까 아카아시가 여기서 그렇게 말을 해준 건 함께 대화하고 있는 내 기분을 헤아려주기 위해서였다. 보쿠토의 실력이 대단하여 이미 알고 있었노라 말한다면 같은 학년에 같은 부인 나는 뭐가 되겠는가.
그런데 정작 보쿠토의 눈동자가 일렁거렸다.
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관대하게 생각하자면 그야 보쿠토가 이럴 법도 하기는 했다. 지금껏 이 녀석이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대접 받은 적이 있기나 하겠는가. 그리고 그 탓에 주욱, 우리와는 그 사이에 어떻게도 할 수 없는 공기가 있었고 지금 뿐만이 아니라 지난 중학교 시절에도 줄곧……. 거기까지 생각하던 나는 또 심통이 나서 와락 얼굴을 찌푸리곤 보쿠토의 등을 후려쳤다. 아카아시가 날 위해 해준 배려인데 그 배려를 알아차리도 못한 채 제가 더 감격스러워 하는 꼴이 보기 싫었다.
아카아시는 보쿠토가 왜 저렇게 날뛰는지 모르고서 ‘이 사람 왜 이럽니까’라는 얼굴이 되어 내쪽으로 몸을 뺀다. 나는 보쿠토를 외야로 떠밀었다. 한 번 밀려 휘청거리는 녀석이 억울한 표정으로 우리를 쳐다본다.
하지만 아카아시가 정말로 보쿠토를 모르는 건 아니었다. 나는 그 점이 더 굉장하다고 생각했다. 누가 봐도 차기 주장, 팀의 에이스인 선배를 추앙하여 환심을 사고자 할 수도 있었을텐데 그러지 않은 점이.
“사실은 보쿠토, 알고 있었지.”
3학년 선배가 스파이크 연습을 하자고 부르는 소리에 보쿠토가 먼저 자리를 떴다. 코트 쪽으로 가면서 남은 우리 둘을 뒤돌아보는 보쿠토의 얼군엔 처음으로 새콤한 맛의 사탕을 입에 댄 어린애처럼 찬란한 기쁨이 가득한 눈동자가 떠 있었다. 나는 그 눈동자가 멀어지는 것을 보고서 조용하게 물었다. 아카아시는 잠시 말이 없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사실 알고 있었으면서 어째서 그랬느냐고 물었고 아카아시는 되레 이해하기 어렵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더니 대답했다. 배구는 여럿이서 하는 경기잖아요. 그것이면 대답이 되었다는 아카아시의 얼굴에 나는 더 묻지 못했다. 그 말을 이해한 건 이 날로부터 반년이 훌쩍 더 지났을 때였다.
*
솔직히 말해서 처음에는 아카아시가 조금 고분고분한 성격이라고 생각했다. 생긴 것은 서늘한 데가 있어도 사실은 유순한 성격이라고. 조금 난해하고 곤란한 질문을 해도 성심성의껏 생각하고 답해주는 모습을 보면 충분히 그런 생각을 할 만했다. 그러니까 나만의 터무니없는 오해는 아니었다.
녀석이 실은 만만찮은 성격이라는 걸 알게 된 건 기말고사가 끝난 뒤다.
“네? 낙제요?”
보쿠토의 연습 의욕은 사실 3학년도 따라가지 못해서 보쿠토는 매번 혼자서 연습을 끝내고 돌아가곤 했다. 그걸 알고 있는건 며칠에 한 번 꼴이나마 내가 보쿠토의 연습에 함께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쿠토는 드디어, 1년이 지나서 드디어 함께 연습을 해줄 사람을 찾아냈다. 아카아시였다.
사실 어렴풋하게 보쿠토가 그러지 않을까 생각하기는 했다. 보쿠토는 실력이나 행실과는 별개로 어린애같은 면이 뚜렷한 녀석이었는데, 그러니까 좋아하는 건 꼭 좋아하는 사람과 같이 하고 싶어하는 걸 숨기지 않는 면이 그랬다. 의외로 어른스러운 점은 그런 마음을 거절당해도 크게 개의치않는 점일까.
《Happy Beginning》
보쿠토×아카아시
140*210 | 인쇄 | 청박 | 52p | 5,000원
보쿠토와 아카아시가 동거를 시작하며 집을 알아보는 이야기. Butter님의 만화 신간 《HAPPY END》와는 「동거」라는 키워드를 공유하고 있지만 내용이나 배경설정 등은 이어지지 않아요! 표지 일러스트 Butters님께서 힘써주셨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 아무런 말없이, 동의를 구하는 말도 그에 따르는 대답도 없이, 아카아시가 대학에 입학하고 보쿠토가 졸업할 때까지 그리고 마침내 아카아시까지 대학을 졸업하는 지금까지 이어져왔던 이 생활도 이제 시작이 그랬던 것처럼 그 끝도 자연스레 끝날 때가 되었다. 아카아시는 그것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참이었다.
그러니까 이런 갑작스러운 동거 제안은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설마 누구 나 말고 다른 사람 있어!?”
“그런 얘기가 아니잖습니까…….”
이 사람은 도대체 뭐가 문제지? 아카아시는 기가 막혀서 미간을 꾹꾹 누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보쿠토의, 조금 이해하기 어렵다는 저 시큰둥한 표정이 말하는 바가 명백했다. 다른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라면 도대체 왜? 안될 이유가 있어? 보쿠토의 머릿속에는 두 사람이 함께 하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저도 당신도 우리는 대학도 졸업을 했고, 지금부터 함께 지낸 다는 것은 대학시절을 함께 한 것과는 조금 다른 문제이고, 앞으로의…….
아카아시는 입을 다물었다. 보쿠토의 저 표정은 몰라서 짓고 있는 얼굴이 아니었다. 그 모든 것을 알고 전부 건너 뛰어, 그러고서도 저런 얼굴을 하고서 그를 바라보는 것이다.
아카아시는 여기서 언쟁을 할 자신도, 보쿠토를 납득시킬 자신도, 그에 뒤따라올 대화를 감당할 자신도 없어서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혼자 사는 것보다야 둘인 것이 나을 것이고 그 상대가 학창시절 전부를 함께 해온 선배라면야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아카아시의 승낙에도 보쿠토는 큰 감정의 기복을 보여주지 않았다. 당연한 결과라는 것 같은 반응이었다.
*
아카아시까지 대학을 졸업하기까지, 두 사람이 함께 생활을 해온 것은 동거와 다를 바 없었으나 어떠한 합의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집은 각자의 원룸이었고 따라서 서로의 집을 오가며 좀 더 어떠했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바는 있을지언정 그것이 진지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아카아시는 같이 살자는 보쿠토의 말에 난색을 표했었다. 진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없이 굴러갔던 두 사람의 생활이었고 앞으로 정식으로 함께 산다는 것은 필히 진지하게 고려해야 하는 점이 있었다.
마음이 깊어진 결정체가 서로 부딪히면 상처를 남기게 된다. 그렇게 상처입고도 버틸 수 있는가? 아카아시는 자신의 마음도 보쿠토의 마음도 과신하지 않았다. 사람이란, 사람의 일이란 모르는 것이다.
모르는 것인데.
“아카아시! 내가 좀 알아왔어!”
아카아시는 익숙하게 전자 도어락의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서는 보쿠토를, 정확히는 보쿠토가 손에 쥐고서 흔들며 들어오는 물건을 황망히 바라보았다. 무언가를 잔뜩 인쇄한 용지 한 뭉치였다. 신발을 거의 집어던지듯이 벗고서 안으로 들어온 보쿠토가 그 종이뭉치를 아카아시 앞의 테이블 위에 턱하니 올려놓았다.
“알아…오셨다고요?”
“응! 우리 살 집!”
“…….”
보쿠토는 당연한 일을 해온 것처럼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씨익 웃고 있기만 했다. 아카아시는 보던 책을 내려놓고 보쿠토가 펼쳐놓는 종이 뭉치를 쳐다보았다. 보쿠토가 몇 번이나 넘겨보았는지 스테이플러로 고정시켜놓은 뭉치는 제법 너덜너덜했고 곳곳에 메모 같은 것이 있다. ‘역에서 제일 가깝~!’ ‘부엌 커’ ‘거실!’ 이런 말들이 날아가는 필치로 적혀 있었다.
아카아시는 보쿠토를 다시 쳐다보았다.
“응? 아카아시, 왜?”
“아뇨, 아무것도…….”
“시간나면 집 보러 가자!”
생각보다 훨씬 더 본격적이었다. 아카아시는 마른침을 살짝 넘기며 보쿠토의 눈치를 살폈다. 솔직히 말해서 보쿠토가 대뜸 ‘그냥 네가 우리 집 들어오면 되는 거 아냐?’라고 할거라 생각했다. 그게 아니면 ‘내가 아카아시 집에 가면 안 돼?’라고 하거나. 그러면 ‘함께 산다는 게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에요.’라고 적당히 흐지부지하게 할 셈이었다.
“왜? 많이 바빠?”
“아뇨, 그런 게 아니라.”
아카아시는 고개를 흔들고는 보쿠토가 챙겨온 서류 뭉치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생각해보면 고등학교 때부터 결단력과 실행력 하나만큼은 남다른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이 ‘함께 사는 것’에 대해서 보쿠토가 정말로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보쿠토가 진지할 때에는 누구도 말릴 수가 없다.
그리고 말릴 수 없다면 함께 하는 것이 낫다. 이 역시 고등학교 때부터 깨닫고 있는 일이었다.
“저도……. 저도 알아볼 테니까요.”
이제는 정말로 물릴 수가 없다는 것을 직감한 아카아시는, 어째서인지 입가에 자꾸만 미소가 맺히려고 하여 입가에 꾹 힘을 주어야 했다.
*
그리고 그 대작이 몇 번 이어졌더니 코노하와 보쿠토가 완전히 만취해버렸다. 혀가 술에 전 발음으로 알아서 갈 수 있다는 코노하를 만류하고 그 코노하의 집에 함께 가겠다는 소리를 늘어놓는 보쿠토까지 겨우 겨우 말려 반은 업고 반은 끌다시피 보쿠토의 자취방까지 돌아왔을 때 아카아시는 술이 다 깨어버리고 만 상황이었다.
현관에 선배 두 사람을 내다버리듯이 눕혀놓고서 샤워를 하고 나오자 침대가 강렬하게 유혹하는 것이 느껴진다. 아카아시는 깊은 한숨을 푹 내쉬고는 익숙하게 여분의 이불을 꺼내들었다. 일단 거실에 자리를 만들고서 현관에 널브러져 있는 두 사람을 하나씩 끌고 온다. 머리 아래에는 베개를 대어주고 그 위로 이불까지 덮어주고 나자 온 세상의 노역은 혼자 다 한 것처럼 눈앞이 아찔했다.
“으음, 아카아시…….”
집주인이고 선배고, 침대 위로 올려줄 기력 같은 건 남아있지 않았다. 아카아시가 냉철하게 자신 몫의 베개를 들고 침대로 올라올 때 바닥에서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보쿠토가 눈을 부비며 일어나 앉고 있었다. 그의 어깨 아래로 이부자락이 스르르 흘러내렸다.
“아카아시…….”
이제 20대 중반인 사람의 목소리인데 어린애 칭얼거리는 응석처럼 앳된 구석이 있다. 제대로 된 방향을 보지도 않고서 무작정 팔을 뻗는다. 아카아시는 한숨을 삼키고서는 그 팔을 맞잡았다.
“선배, 주무세요. 침대에서 주무실래요?”
“으응…….”
제대로 된 대답이라기보다는 그냥 귓가에 들리는 목소리가 익숙하여 안심해서 나오는 소리에 가깝다. 아카아시는 자신의 무릎에 기대어 오는 보쿠토의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불을 끈 방은 어둑했으나 금방 거리의 빛이 은은히 새어 들어와 실루엣을 구분할 정도는 되었다.
“선배, 누워서 주무세요.”
“응…….”
아카아시의 손이 닿자 금방 잠에 빠져든 보쿠토였지만 똑바로 눕지는 않았다. 아카아시는 결국 한숨을 내쉬며 다시 아래로 내려와 보쿠토를 뉘어주었다. 여전히 한쪽 손은 보쿠토에게 잡힌 채였다. 이불을 다시 덮어주고 몸을 한 번 도닥여주고 나서도 풀 줄을 모른다.
“보쿠토 선배…….”
부르면 또 가느다랗게 눈을 뜨려고 한다. 아카아시는 아직 자유로운 한 손으로 보쿠토의 눈을 덮어주었다가 그마저도 보쿠토에게 붙잡힌 바람에 고개를 흔들어야 했다. 코노하는 이미 죽은 듯이 세상모르고 자고 있었다. 보쿠토도 저렇게 자주면 얼마나 좋을까, 아카아시는 숨을 죽여 한탄했다.
매번 이런 식이었다. 결코 술이 약한 편도 아닌데 흥이 오르면 자제하지 않고, 그러다 보면 뻗을 때까지 마시고 만다. 뻗고 나서는 얌전히 자면 좋을 텐데 꼭 곁에 아카아시가 없는지 확인을 하는 것이다. 정신도 제대로 못 차리는 주제에 아카아시만은 귀신같이 알아차려서 다른 사람이 아카아시인 척하며 손을 잡아주어도 소용이 없었고 아카아시는 오로지 보쿠토를 멀쩡히 재우기 위한 목적만으로 모든 것이 깔끔하게 정리된 후에 불려온 적도 있었다. 아카아시가 없으면 보쿠토는 인사불성이 되어 제대로 걷지도 못하면서 밖으로 그를 찾아 나서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
보쿠토의 그 모든 것이 소리 높여 외친다. 네가 특별하다고.
단 하나, 보쿠토의 목소리만 제외한 그 모든 것이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Starry Starry Night 별이 빛나는 밤》
SOLDOUT
보쿠토×아카아시
140*210 | 인쇄 | 무광금박 | 88p | 8,000원
'이기는 사건'만 맡는다는 소문이 있는 차가운 인상의 검사 아카아시와
여전히 불의에 열을 내는 형사 보쿠토의 이야기.
주의사항 - 강간 사건을 다룹니다.
“못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거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아카아시가 남자의 뒤쪽에서 안절부절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향해 눈짓했다. 그들이 조심스레 문을 닫는다. 아카아시는 펜을 내려놓지 않고 서류를 계속 들여다보며 대답했다. 보쿠토가 큰 보폭으로 실내를 가로질러 책상 바로 앞까지 와서 그의 펜을 빼앗았다.
“그럼 왜 안하는 건데.”
“…….”
펜을 뺏긴 아카아시는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고 미간을 꾹꾹 눌렀다. 떼를 쓰는 어린애 보듯이 피곤하게 여기는 동작에 보쿠토의 눈썹이 하늘로 치켜올라갔다.
“묻잖아. 왜 안하는 거냐고!”
“그 쪽 형사님께서는 재판으로 끌고가서 뭘 어떡하고 싶으신지, 그게 더 궁금합니다만.”
“뭐, 뭐?”
“재판으로 가서 뭘 하고 싶으시냐고 물었습니다.”
아카아시는 상대를 올려다보았다. 타오르는 것 같은 황금색 눈동자, 잿빛이 섞여든 머리카락은 아마 본래 쭈삣쭈삣 세워두었을 것이겠으나 여기까지 오는 난리통에 엉망으로 헝클어져 있었다. 아카아시는 책상 위의 플라스틱 책꽂이에 꽂아두었던 사건 파일을 꺼냈다.
“당연히 감방에 쳐넣…….”
“용의자가 타치바나 도기 회장의 하나 있는 손자인 건 압니까? 법정이 아주 대단한 꼴이 되겠군요. 매스컴도 타겠습니다. TV에 나오고 싶으셔서 그럽니까?”
“뭐, 뭐야?”
“제 말이 이해가 안 되십니까? TV에 나오고 싶으셔서 그러냐 물었습니다만.”
“이 개새끼가 지금 말이면…….”
“아니면, 법정에 한 번 세우고서 무죄 확정 찍어주고 내려오시려고 그러십니까?”
아카아시가 차갑게 폴더를 닫으며 그를 쳐다보았다. 그와 눈을 마주한 보쿠토가 이를 바득 갈았다.
“……뭐라고?”
“말을 못 알아 들으시는 겁니까, 아니면 이해를 안 하시는 겁니까? 무죄 확정 받아주고 싶어서 그러시냐 물었습니다.”
“……지금 질 것 같으니까 기소 안 하겠다, 이거냐?”
“솔직하게 말해서, 예. 그렇습니다.”
보쿠토의 금빛 눈동자가 이글이글 타올랐다. 마주하고 있는 아카아시를 눈빛만으로도 찔러 죽여버릴 것 같은 시선이었다.
“애가 죽을 뻔했어. 그 새끼 때문이라고. 그런데 기소를 못하시겠다? 질 게 뻔하니까?”
“자살 미수라고 알고 있습니다만.”
“그래! 자살! 그 어린 게 왜 목을 맸겠냐!”
“지금 의식 불명에 유서 한장 남아 있지 않았다는데 그걸 누가 압니까.”
“이 개새끼가……!”
아카아시가 무표정한 얼굴로 보쿠토를 쳐다보았다.
“저도 설득하지 못하면 이 건은 법정에 세워보았자 소용 없습니다. 타치바나 회장은 하나뿐인 손자를 포기할 마음이 없으니까요.”
“뭐, 무슨…….”
“상대 변호사가 누군지 아십니까.”
“누, 누군데!”
“그것도 모르시면서 이 정도로 기소해 달라고 하시면 곤란합니다.”
“이…….”
“나가보세요.”
아카아시가 지나치게 담백하여 무정하게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하며 손을 내밀었다. 가져간 펜을 되돌려달라는 뜻이었다. 보쿠토가 이를 바득 갈고는 손에 있던 펜을 반으로 뚝 부러뜨려 아카아시의 손 위에 떨어뜨려주었다. 검은 잉크가 그의 손 위로 후두둑 쏟아지는 것을 보며 보쿠토가 몸을 휙 돌렸다.
*
“헷갈리는데, 검사님.”
“뭐가 말입니까.”
“기소 못한다며, 질 게 뻔하니까. 그런데 여기서 뭐하는 거야? 그것도 검사님이 직접?”
“지나가는 길이라고 했잖습니까.”
“어디로 가는 길인데? 여길 지나가서?”
“저쪽으로 쭉 가면 마티니를 끝내주게 해주는 바가 있습니다.”
“아 정말? 그렇게 맛있어? 어디……. 커흐흠. 아니 그걸 묻는 게 아니잖아!”
“어디로 가는 길이냐고 하시길래요.”
아카아시가 뚱하게 대답한다. 보쿠토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매사에 칼같은 줄 알았는데 의외의 모습이었다. 보쿠토의 얼굴을 보고서 아카아시가 붙잡힌 자신의 손목을 조금 비틀었다. 보쿠토는 자신의 손안에서 빠져나가려고 힘을 주는 아카아시의 손목을 내려다보다 손에서 힘을 풀었다.
“여기서 뭘 봤어?”
“지나가는 길이라고 말한 걸로 아는데요.”
아카아시가 다시 걸어가려고 해서, 보쿠토는 씩 웃으며 날렵하게 그의 앞을 막아섰다. 아카아시가 다른 방향으로 발을 내딛었지만 다시 그 앞도 막아선다. 아카아시가 결국 포기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곤 고개를 틀어 가로등이 비추는 길 너머 먼 곳을 바라보았다. 보쿠토 역시 아카아시의 눈길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찍힌 증거 화면이 너무 흐릿해서, 그것으론 부족했습니다.”
“그, 그건 나도 알아!”
“그렇지만 틀림없이 어딘가에 좀 더 선명하게 찍혀있을 겁니다.”
아카아시가 보쿠토의 대답엔 크게 신경 쓰지 않은 채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보쿠토는 아카아시가 바라보는 방향으로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깨진 가로등이 날카로운 빛을 내리찍는 2차선 차도 너머, 수풀을 지나 그 사이로 아주 작고 빨간 불빛이 한 번 반짝거렸다가 다시 나뭇잎 사이로 사라졌다.
“어!?”
“여기, 그런 장소로 유명하니까요. 분명 몰래 찍어대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아카아시가 차도를 건너 수풀가로 척척 걸어간다. 보쿠토가 허겁지겁 그를 따라가며 물었다.
“그, 그런 장소라니?”
“인적이 드물고 CCTV도 별로 없어서 주로 불륜 커플들이 카섹…….”
“와와와왓! 아, 알았어! 알았어! 뭔지 알겠어!”
보쿠토가 화들짝 놀라서 아카아시의 말을 끊었다. 형사로 밥벌어 먹고 산 세월이 있으니 거친 말이나 표현은 숨 쉬는 것처럼 익숙한데 저 희끗한 표정의 검사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는 건 왠지 견딜 수 없이 부끄러웠다.
*
할 얘기라도 있는 거야? 보쿠토의 질문에 아카아시는 잠시 걸음을 내딛는 속도를 늦췄다. 보쿠토 역시 주춤하며 그를 돌아보았다. 아카아시?
“바라는 것 하나만 보고 달려가는 사람은......., 그 바라는 것 하나가 갑자기 꺼질 것처럼 흔들리면 견딜 수가 없습니다.”
“뭐......?”
“꺼질 걸 상상도 해 본적이 없다면 더하죠.”
아카아시의 목소리는 진득하고 깊었다. 보쿠토가 아카아시의 손목을 잡아챘다.
“아카아시?”
“......그 아이의 얘깁니다. 의대에 들어와서, 그 이후로도 한 시도 공부를 놓지 않을 정도라면 이루고 싶은 게 있어서겠죠. 안 그렇습니까?”
“.......”
보쿠토는 천천히 손을 풀었다.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로 말을 하는 아카아시는 여전히 앞을 보고 있었다.
“앞만 보고 왔겠죠. 다른 걸 돌아볼 시간은 없었겠지요. 그것밖에 없는 겁니다. 그런 사람일수록 흔들기 쉽지요. 알리바이만이라도 깨면 그 다음은 할 만할 겁니다.”
아카아시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보쿠토는 잠시 말이 없다가 아카아시의 등을 팡팡 내리치며 자신만 믿으라 큰소리쳤다.
“믿겠습니다.”
아카아시가 보쿠토를 보며 고개를 까딱했다. 그대로 대로로 나가 안녕을 말하고는 돌아선다. 멀어지는 걸음은 여전히 느렸지만 보쿠토의 시야에서 아카아시가 사라지기까지는 눈 깜빡할 새였다.
*
“드라이브가 터널 드라이브는 아니었는데.......”
“멀다고 말 했잖아요.”
“아, 아냐. 누가 뭐래!?”
운전대를 잡고 있는 보쿠토가 빼액 소리쳤다. 두 사람은 차 안이었다. 터널을 지나는 중이라 차 내부도 어둑했다. 아카아시는 보쿠토의 말에 툭 응대해주고는 다시 손에 쥐고 있는 휴대전화로 고개를 돌렸다. 보쿠토가 옆을 흘끗 바라보았다.
“뭐 급하게 올 소식이라도 있어? 아까부터 계속 폰만 쳐다보고 있고. 뭐 애, 애, 애인이라도 있는 거야?”
“애, 애, 애인은 없고, 볼 풍경이 마땅찮아서 그냥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만. 보쿠토 씨 말대로 터널이잖습니까.”
“......놀리지 마.”
놀린 것처럼 들렸습니까, 아카아시의 말에 보쿠토가 눈동자를 피하며 입을 삐죽거렸다. 그 모습을 보던 아카아시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취조실에선 박력이 대단하시더니.”
“‘취조실에선’? 여기선 아니란 말이야?”
“어린애.......”
“뭐어!”
“아닙니다.”
“다 들었거든!?”
“그러셨습니까?”
보쿠토는 빽빽거리다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서 핸들에 몸을 기대었다. 운전에 집중하셔야죠, 하는 아카아시의 말에도 ‘집중하고 있어!’라고 뚱하게 대답하기만 했다.
“......취조실에서는 뭐 아직 사회생활도 안 해본 애 가지고 박력 어쩌고 할 게 있냐.”
“그래도요.”
“게다가 반은 네 말대로 한 건데 뭐.”
보쿠토는 슬며시 허리를 펴며 아카아시를 흘끗 바라보았다. 세상 물정도 모르는 대학생 풋내기를 상대로 윽박지른 것이 무어 박력씩이나 필요한 일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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