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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쿠토는 눈을 끔벅였다. 


달빛이 내려앉은 여름밤이었다. 부원들이 요란하게 자는 소리 너머 멀리서 에어컨 돌아가는 나직한 모터음이 가물가물 들려왔다. 오늘은 여름 합숙을 시작한 첫 날이었다. 창 밖에서 풀벌레 우는 소리도 언뜻 들려오는 것 같다.


피곤해서 베개에 머리를 대자마자 곯아떨어졌는데 어째서인지 이 한밤중에 눈이 뜨였다. 보쿠토는 옆으로 누운 채 눈을 꿈벅거렸다.


그의 옆에는 한 사람이 가만히 누워 잠을 자고 있었다. 살짝 벌어진 입술, 규칙적으로 오르락 내리락하는 가슴팍. 이불은 얌전히 어깨까지 올라와 있었고 베개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은 달빛에 물들어 보드라워 보였다. 


‘어…….’


지난 1년간 줄곧 봐온 얼굴이었다. 처음 봤을 때의 앳된 기미는 이제 흔적만 남아있지만 그래도 변하지 않는 것도 있었다. 얄팍한 턱선이 그랬고 지금은 감긴 눈 아래에 숨어 있는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 그랬다.


오늘 아카아시가 그의 옆에서 누워 자는 것은 마지막까지 보쿠토가 아카아시에게 매달려 장난을 쳤기 때문이었다. 아카아시는 그런 보쿠토를 계속 받아주다가 어느 시점부터 꾸벅꾸벅 조는 것을 뉘어주었더니 그대로 잠들었더랬다. 보쿠토는 그런 아카아시를 뒤에 두고 동기들과 조금 더 놀다가 곁에 누워 함께 잠들었다. 졸려, 자야지 하고 눈을 감자마자 잠에 빠져들었는데. 분명히 그랬는데.


“아카아시……?”


저도 모르게 작게 이름을 중얼거려본다. 아카아시가 몸을 살짝 움직였다.


“으응……선배…….”


아카아시가 그가 있는 쪽으로 돌아눕더니 손을 뻗는다. 보쿠토는 그만 얼떨결에 팔을 내어주고 말았다. 아카아시가 그런 보쿠토의 팔과 손을 살짝 쥐었다가 그 위에 자신의 팔을 걸치듯 내려놓고서는 여전히 눈도 뜨지 않고 쌕쌕 자고 있다.


보쿠토의 세계가 만화경같은 빛으로 산산히 부서졌다. 



*



“보쿠토, 왜 그래. 컨디션 안 좋냐?”

“아니, 팔이……어깨가 뻐근해서.”

“어깨가 왜?”

“잠을 자……잘못 잤거든.”


보쿠토는 어색하게 대답하며 팔과 목을 주물렀다. 코노하가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바라본다. 보쿠토는 헛기침하며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코노하는 연습해야 하는데 괜찮겠냐며 타박과 걱정을 섞은 목소리로 그를 보고 있었다. 보쿠토는 뻐근한 목을 애써 움직이며 괜찮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언제나 신이 나서 밀어넣었던 아침밥이 오늘은 모래를 씹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의 하룻밤 잠을 몽땅 망쳐놓은 사람, 그의 한 살 어린 후배, 부의 주전 세터, 아카아시 케이지는 아무것도 모르고서 식사에 여념이 없다. 뺨이 얄팍해 무언가 작은 것이라도 입에 넣기만 하면 금방 볼록해졌다. 또래들 사이에서는 무척이나 어른스러운 아카아시여서 한 살이라도 많은 선배들은 그런 아카아시의 모습을 보면 못내 귀여워했다.


‘귀엽…….’


“컥, 쿨럭, 쿨럭!”

“보, 보쿠토? 괜찮어? 무, 물. 물 가져와. 보쿠토!”

“괘, 괜찮, 커헉, 쿨럭, 쿨럭!”


격렬하게 기침을 하느라 보쿠토의 얼굴이 목끝까지 새빨개지고 합숙소 식당이 난리가 난다. 아무나 내미는 물잔을 받들고 들이키던 보쿠토는 바로 곁에서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는 아카아시와 그만 눈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아……카…….”

“조심 좀 하지. 뭘 급하게 먹기라도 했어요?”

“컥, 쿨럭쿨럭, 쿨럭!”


그리고 아카아시가 자신의 등을 쓸어주는 순간, 보쿠토는 다시 몸을 훅 접고 기침했다. 아카아시의 목소리가 귓전에서 울렸다. 선배, 괜찮아요, 이런 얘기들이었다. 보쿠토는 황급히 손을 내저으며 괜찮다고 말했지만 아카아시는 곁에서 걱정스러운 눈빛을 거두지 않았다. 보쿠토는 정말로 괜찮았지만 기침이 그의 의지를 배신하고서 자꾸만 나온 탓에 괜찮다는 말은 거짓말이 될 수밖에 없었다. 


오늘 하루종일 보쿠토는 이 모양이었다. 물은 마시다가 흘리고 음식은 사레들려 기침하다 반은 먹고 반은 버려, 걷다가도 제 발에 걸려 휘청거리고 마침내 토스해준 공을 머리에 맞았을 때 아카아시는 후배들 연습 봐주는 것을 멈추고 보쿠토에게 다가왔다. 그를 잡아끌고서 체육관을 나선다. 오늘따라 혼이 나가있던 것이 분명한 보쿠토였던지라 선배들도 가로막지 않았다. 


“보쿠토 선배.”

“히, 히익. 네넵!”


보쿠토는 체육관의 벽에 바짝 기대어 서서 숨을 들이켰다. 아카아시가 심각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본다. 보쿠토는 필사적으로 눈을 굴리며 등에 닿은 벽을 꾹꾹 눌렀지만 보쿠토의 힘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멀쩡한 건물 벽까지 밀어낼 정도는 아니었다.


아카아시가 한 걸음 더 다가왔다. 보쿠토가 다시금 숨을 들이켰다.


“선배.”

“왜, 왜, 왜요.”

“‘왜요?’ 선배야말로 왜 이래요. 오늘 무슨 일 있습니까?”


아카아시가 미간을 모은 채 또 한 걸음 다가온다. 보쿠토는 뒷걸음질쳤지만 등 뒤에 단단한 벽이 그를 가로막고 있었다. 이리저리 눈동자만 굴리던 보쿠토가 턱을 세웠다. 정확히 말하자면 하늘로 고개를 들어서라도 아카아시와 마주보는 것을 피하고 싶은데 그렇게 할 수는 없다는 마음이 충돌하여 이도 저도 아닌 각도가 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아……아무 일 없는데요.”

“보쿠토 선배. 말씀을 하셔야 제가 알죠.”

“아, 아카아시가 알아서 뭐 어떻게 해.”

“무슨 일이 있긴 있죠? 어디 아파요? 아까 코노하 선배 말로는 잠 잘못 주무셨다고…….”


보쿠토는 차마 아카아시를 밀쳐내지도 못하고 뒤로 도망치지도 못하고 사실을 말하지도 못하고, 옆으로 슬금슬금 걸음을 옮겼다.


“보쿠토 선배?”

“아, 아니……야.”

“보쿠토 선배!”

“아무것도 아니야아아아아!”


그리고 보쿠토는 죽을 힘을 다해 내달렸다. 뒤에서 아카아시가 소리 높여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보쿠토는 돌아보지도 못하고 언덕 끝까지 달려 도망치고 말았다. 


숨이 턱까지 차오를 때가 되어서야 멈춘 보쿠토는 뒤를 흘끗 돌아보았다. 아카아시는 보이지 않았다. 보쿠토는 겨우 안심한 표정이 되어 그늘이 커다란 나무 기둥에 팔을 디디고 섰다. 숨이 모자라 몰아쉬는 것도 겨우 할 수 있었다. 한참 숨만 고르고 나서야 보쿠토는 나무 기둥을 발로 걷어찼다.


그럼 어떻게 그 당사자에게 말할 수 있단 말이야? 


좋아한다고! 


“아아아!”


지금까지 스스로 자각하지 못한 것이 더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몇 번이나 나무를 걷어차던 보쿠토는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싫어할 리야 없지 않나. 어떻게 싫어하는 사람에게 그렇게 매달릴 수 있겠어? 


“매달……렸지……. 아아아아!”


그야 좋아하니까 그랬다. 단순히 선배나 후배를 넘어서서 정말 좋은 친구라고 생각했다. 마음이 통했고 생각하는 걸 이해해주고, 서로 믿고, 의지하고. 


‘아니지? 이건 쿠로오하고도 비슷하잖아?’


거기까지 생각하고 아쉬운 듯 안도한 듯 숨을 내쉬려던 보쿠토는 그대로 나무둥치에 이마를 쾅 하고 갖다박았다. 하나도 비슷한 게 없었다. 


자신의 손등 위에 살짝 올라간 그 손이 안타까워서 밤새도록 꼼짝 못한 채 뜬눈으로 지새웠던 그 마음은 무엇과도 비슷한 게 없었다. 


“으아아아!”


보쿠토가 다시 쾅 하고 나무기둥에 이마를 박았다. 설익은 열매가 뚝 하고 떨어져 그의 정수리를 때리고 간다. 보쿠토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갑자기 마음이 변한 것도 아니고 없던 마음이 생긴 것도 아니다. 자신이 아카아시를 보던 마음은 변한 적도 바뀐 적도 없었다. 줄곧 같은 눈길이었을 것이다. 


‘아무도 몰랐어? 다들 멍청이 아냐?’


보쿠토는 괜히 쿵쿵 머리를 더 박으며 투덜거렸다. 어떻게 단 한명도 자신에게 ‘너 아카아시 좋아하지?’라고 물어보지 않을 수가 있단 말이야! 하지만 이제와서 다른 사람 탓을 해본들 달라지는 것은 없고 합숙은 이틀이 더 남았다. 


“으아아아, 어떡하냐고~!”


보쿠토는 나무 앞에서 발도 구르고 손으로 두드려보기도 하다가 벌렁 드러누웠다. 태양이 너무 눈이 부셔서 마주볼 수가 없어서 몸을 돌렸다. 그렇게 보쿠토가 잔디 위에 엎드려 있을 때였다.


“-보쿠토 선배!”


보쿠토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머리 위에서 울리는 목소리는 아마 죽어서도 알아들 수 있을 목소리였다. 


‘어떻게!?’

“보쿠토 선배, 정말 무슨 일 있어요?”

“…….”

“말씀 못할 일이면 말씀 안 하셔도 되는데, 그러면 무리해서 연습을 하…….”

“안해도 돼?”


보쿠토가 벌떡 일어나서 물었다. 아카아시는 허리에 손을 짚고서 언덕 아래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그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뭐 어차피 부족한 연습분은 선배가 알아서 채울거면서요. 그러니까 지금은 무리……선배 이마가 왜 그래요?”

“아니, 그거 말고! 내가 아카아시한테 말 안해도 돼?”

“이마로 뭘 들이 박았습니까?”

“말 안 해도 되냐니까!”

“보쿠토 선배가 말하기 싫다는데 제가 뭘 어떡합니까. 그보다 지금 선배 이마가…….”

“난 싫어!”


보쿠토가 빽 외치고, 아카아시가 황망한 얼굴로 보쿠토를 쳐다보았다.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단 얼굴이었는데 보쿠토는 아랑곳하지 않고 흉흉한 표정으로 아카아시를 붙잡았다.


“나는 아카아시가 말 안 하는 거 싫어!”

“지금 제 문제 얘기하는 게 아니……. 하아……. 저는 말 안 하는 거 없잖아요. 지금 말씀 안 하시는 건 보쿠토 선배인 거 알고 있습니까?”

“그, 그러니까 아카아시도 포기하지 마!”

“뭘 포기를 해요.”

“그러니까…….”


보쿠토가 말을 끝까지 맺지 못하고 입술을 꾸물거렸다. 아카아시가 팔짱을 끼고서 보쿠토를 바라보았다.


“그럼 무슨 문젠지 말해주세요.”

“……아니, 그러니까……. 말은 못하는데…….”

“말은 못하는데?”

“그러니까…….”


하마터면 말해버릴 뻔했다. 보쿠토는 입술을 안으로 말아 꾹 다물었다. 아카아시는 그런 보쿠토를 바라보다가 짧은 한숨을 내쉬고서는 보쿠토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얼결에 일어선 보쿠토는 그 손을 뿌리치지 못했고 아카아시는 그대로 보쿠토를 데리고서 언덕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 아카아시?”

“일단 이마부터 보고 그 다음에 얘기하죠.”

“으, 으응…….”


한여름이었다. 나무마다 매미가 들러붙어 귀청을 찢을 듯이 울어댔고 내리쬐는 태양이 너무 뜨거워 아지랑이에 눈앞이 아찔할 지경이었다. 더워서 더워서 열이 오르고 땀이 난다. 


‘너무 더워.’


날이 너무 더워, 보쿠토는 자신을 이끌고 언덕을 내려가는 아카아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계속 생각했다. 날이 너무 더워, 너무 뜨거워. 



*



“닥쳐.”

“아, 아무, 푸흡, 아무 말 안 했는데요.”

“네 녀석 마음의 소리가 너무 시끄럽다고.”

“아, 아니, 크흐흡, 이마, 이마 뭡니까요, 보쿠토 군~? 대장군 납셨어?”


쿠로오가 빙글빙글 낮게 웃으며 보쿠토의 이마를 가리켰다.


“아카아시가 붙여줬는데 그럼 어떡해!”


보쿠토는 빽 소리치고는 벽에 기대어 앉아서는 이마를 매만졌다. 도톰한 반창고가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다. 매니저들과 다른 후쿠로다니 3학년들은 이미 크게 웃고 난 뒤였다. 쿠로오 역시 선 채로 계속 낄낄거리며 웃고 있었다.


“뭐냐, 이마를 어디다가 갖다 박았길래 그래?”

“지나가는 나무에…….”

“무슨 생각을 하면서 지나갔길래 그렇게 갖다박으셨어요~!”


보쿠토는 벌컥 소리치려다가 목소리를 죽이고서 쿠로오를 돌아보았다. 눈치가 빠르기로는 손에 꼽는 인물이 저 쿠로오 테츠로였다. 


보쿠토가 빤히 쳐다보자 쿠로오가 고개를 갸웃했다. 


“보쿠토?”

“너 알았냐?”

“뭐를?”

“내가 아카아시 좋-우아아앗!”


쿠로오가 곧장 보쿠토를 떠밀었다. 예상치 못한 기습에 바닥으로 엎어진 보쿠토가 빽 소리치며 쿠로오를 돌아보았지만 쿠로오는 깜짝 놀란 얼굴을 하고선 다급히 주위를 둘러볼 뿐이었다. 


“그런 건 조용히 말해, 인마!”

“조용히 말 했어!”

“목소리 크거든!?”

“조…조용히 말했어…….”


보쿠토가 기죽은 목소리로 웅얼거리고 주위를 살펴본 쿠로오가 보쿠토를 잡아끌고서 바깥으로 나갔다. 연습하는 소리, 체육관 바닥에 운동화 끌리는 소리가 점점 멀어진다. 나무 그늘 아래에 섰더니 못참고 그새 매미가 울어댔다. 보쿠토는 멀뚱한 표정으로 쿠로오를 바라보았다. 쿠로오는 또 주변에 사람이 없는지 둘러보고서는 보쿠토를 향해 지긋한 시선을 보냈다.


“너 그래서 오늘 하루종일 엉망이었냐?”

“엉망까진 아니다 뭐.”

“엉망이지~! 내참. 아카아시가 걱정하던데…….”

“걱정했어? 아카아시가?”

“그럼 아카아시가 걱정을 하지요, 이 사람아.”


쿠로오가 혀를 찬다. 보쿠토는 그런 것도 모르고서 자신의 이마를 매만지며 아카아시가 걱정했느냐고 들뜬 표정을 하고 있었다. 쿠로오는 한심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그 시선을 눈치챈 보쿠토가 쿠로오를 노려보았다.


“아 왜! 뭐!”

“자기 마음 이제야 안 것도 한심해 죽겠는데…….”

“아니, 그거는 나도 할 말 있거든?”

“뭔데. 들어나 보자.”

“네가 알았으면 재깍 말을 해줬어야 할 거 아냐!”

“이, 이게 진짜!”

“뭐어! 뭐!”


보쿠토가 가슴을 세우고 쿠로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걸 노려보던 보쿠토는 자신의 이마를 손으로 감싸쥐었다. 반창고가 눌려 진득하고 엷은 통증이 일어났다. 그걸 가만 보고 있던 쿠로오가 허리에 손을 올리고서는 입을 열었다.


“이제 어쩔거야.”

“뭘?”

“뭐 고백을 해서 차인다든가 끝까지 숨긴다거나 해야할 거 아냐.”

“……나 차여?”

“부 선배 뒷바라지 하는 걸로 이미 충분하지 않겠냐?”

“뒤, 뒷바라지 아니라고!”

“하이고. 보쿠토 씨~! 우는 거 달래줘, 쳐지는 거 달래줘, 놀아달라는 거 놀아줘, 이쯤하면 뒷바라지지. 가서 아빠라고 불러라. 아카아시 아빠~!”

“쿠로오!”

“근데 보아하니 넌 숨기는 건 소질이 없다. 아주 빵점이야, 빵점. 빨리 가서 고백하고 차이고 와라.”

“야! 야!”


보쿠토가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가 주위를 둘러보곤 소리를 죽였다. 쿠로오가 멀뚱한 표정으로 턱을 세우며 그를 내려다본다. 뭐, 왜, 그렇게 묻는 표정이었다. 


“나 그렇게 못 숨겨?”

“왜. 계속 숨기게? 말 안하고?”

“그럼 어떻게 말하냐.”


보쿠토는 일부러 정신을 차리려는 것처럼 이마의 상처를 꾹 눌렀다. 아카아시가 붙여준 반창고였다. 그를 앉혀두고서는, 걱정이 뚝뚝 묻어나는 얼굴을 하고서 소독하고 연고도 바르고 반창고도 붙여주었다. 말은 매섭게 했지만 그것이 눈동자를 감추지는 못했다. 푸른빛이 도는 청록색 눈동자가 깜빡, 깜빡할 때마다 그의 가슴에도 깜빡, 깜빡, 그렇게 불이 켜지는 것 같았다. 


보쿠토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거절한 애들 중에 얼굴 다시 본 애 한명도 없어.”

“아하.”


쿠로오는 머쓱하니 머리를 긁적였다. 매사에 어린애같이 군다 하는 보쿠토지만 사실은 그렇지만은 않았다. 


“그 애들하고……너랑 아카아시는 다르지.”

“뭐가 달라? 좋아한다고 말하고 안 된다고 하면 똑같은 거지.”

“아니 그……. 뭐냐……. 뭐 어떻게 말이라도.”


하지만 쿠로오를 바라보는 보쿠토의 눈동자엔 더 이상 흔들림이 없었다. 쿠로오는 더는 말하는 것 없이 어깨만 으쓱했다. 확신이 없는 문제 앞에서 한 발짝을 내딛지 못한다고 해서 그것을 비난하지는 않았다. 그 한 발자국에 바라는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 전부를 가질 수 없다면 일부만이라도 쥐어야 입장에서는 못할 짓인 것을, 쿠로오는 잘 알고 있었다. 


“근데 그렇게 밥도 못 먹고 잠도 못 자면서 언제까지 숨길 수 있겠냐?”

“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아카아시가 걱정했다니까. 혹시라도 무슨 일 있는 거 아냐고 물어봤다고.”

“너한테?”

“그럼 너희 부원들은 전부 무슨 일인지 모르는 것 같은데 너는 계속 이러고, 걔가 누구한테 물어보냐.”


쿠로오는 맘에 들지 않는 것 같은 눈치인 보쿠토를 보며 혀를 찼다. 이것도 마음에 차지 않아서 저러는데…….


“하이고, 그래서 끝까지 숨기시려고.”

“지금처럼 했던 대로 하면 돼.”

“그래서 오늘은 했던 대로 해서 체하고 기침하고 잠도 못자고 난리였어? 이마는 진짜 왜 그랬냐? 혼자서 주체못하고 나무에 갖다박은거지.”

“아 진짜! 쿠로오!”


목까지 새빨개져서는 정곡을 찔린 눈치다. 쿠로오가 그렇게 좀 더 킬킬거리며 놀리려고 할 때 멀리서 인기척이 났다. 두 사람 모두 흠칫해서 뒤돌아본다. 걱정스러운 표정의 아카아시가 주위를 둘러보며 걸어가고 있었다. 아마도 보쿠토를 찾는 것 같았다. 쿠로오는 팔꿈치로 보쿠토를 툭 쳤다.


“쟤 봐라. 너 또 어디갔나 싶어서 찾으러 왔나보다.”

“…….”


아, 사랑이여.


쿠로오는 괜히 보는 쪽이 부끄럽고 머쓱해서 헛기침했다. 아카아시를 돌아보는 보쿠토의 금빛 눈이 바로 이 한여름의 작열하는 태양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일순간 매미소리가 멀어버릴 정도로 눈이 부시다.


“……아카아시…….”


작게 중얼거리듯 부르는 그 목소리, 쿠로오는 보쿠토의 그런 목소리는 처음 들어보았다. 그 소리가 또 들린 모양이었다. 이리 저리 둘러보고 있던 아카아시가 두 사람을 발견하고는 곧장 다가온다. 


“보쿠토 선배! 쿠로오 선배도. 두 분 여기서 뭐 하십니까.”

“인생 상담.”

“쿠로오!”

“틀린 말 아니다? 그럼 나 먼저 들어갈테니까 알아서들~하시오~!”


쿠로오가 손을 휘적휘적 내젓고는 먼저 몸을 돌렸다. 둘만 남은 상황에 보쿠토는 어쩔 줄 모르다가 덥석 아카아시의 옷깃을 붙잡았다. 아카아시가 그를 바라본다. 


“……보쿠토 선배.”

“쿠, 쿠로오가 큰 매미 구경하자고 나온거야. 진짜야.”

“그랬습니까. 큰 매미요…….”

“정말이야! 진짜!”


아카아시는 절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보쿠토를 빤히 쳐다보다가 관두곤 보쿠토를 위아래로 한 번 훑어보기만 했다. 보쿠토는 달리 생채기가 난 곳도 없고 다친 곳도 없고, 컨디션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매미 구경은, 그래서 잘 하셨어요.”

“별로 재미없었어. 뭐 이딴 걸 보러 오자고 해선…….”


보쿠토가 괜히 쿠로오 탓을 하면서 아카아시의 옷자락을 꾹꾹 눌러쥐었다. 아카아시는 그것을 내려다보다 이만 체육관으로 돌아가자고 말을 돌렸다. 보쿠토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 잘못 주무셨던 건 좀 괜찮으시구요.”

“응응~! 완전 멀쩡해!”

“한 번도 잠 잘못 자고 그런 적 없었잖아요.”

“그런가?”

“네.”


아카아시가 단호하게 대답했지만 보쿠토는 그런가, 하면서 여전히 아카아시의 옷깃을 붙잡은 채 걸어갈 뿐이었다. 


“쿠로오 선배하곤 무슨…….”

“……응?”


잠자코 걸어가던 보쿠토가 고개를 갸웃하며 아카아시를 돌아보았다. 아카아시는 이제 한 걸음 앞서 있는 보쿠토의 등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카아시?”

“……아닙니다, 들어가요.”


아카아시는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다물었다. 보쿠토가 고개를 갸웃한다. 하지만 그 화제도 금방 사그러들었다. 부원들이 돌아온 보쿠토를 보곤 어디 갔었냐며 타박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보쿠토는 금방 부원들 사이에서 이리저리 오가며 그 장난을 받아주느라 바빠지고, 아카아시만이 뒤에 남아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카아시? 괜찮아?”

“아……. 네. 날이 너무 덥네요.”


보쿠토를 바라보며 혀를 차고 있던 코노하가 아카아시를 돌아보며 묻는다. 아카아시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고개를 저으며 체육관 안으로 들어왔다. 


매미가 우는 여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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