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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아시가 보쿠토를 혐오하는 눈길로 바라보기 시작한 바로 그 사건은, 입학식이 있고서 3주가 채 지나기도 전에 일어났다.


그 날 일학년 아카아시는 왜 공을 주워오는 것은 언제나 일학년의 몫인지에 대해 고찰하고 있었다. 공을 주워올 사람이 필요하긴 할 것이다. 하지만 그건 공을 날려버린 사람의 몫이 아닐까? 왜 그걸 무조건 일학년에게 시키는 것인가? 어째서 그런 전통이 생긴 걸까?


누군가에게 물어본다 한들 ‘그건 원래 막내 학년이 하는 거야’ 따위의 대답이 돌아올 뿐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입 밖으로 내지 않은 채, 아카아시는 체육관 바깥으로 굴러간 공을 주워오기 위해 밖으로 나선 길이었다.


오후의 햇살에 눈이 부셔서 잠깐 미간을 모았다 푼 아카아시는 공이 굴러간 궤적을 따라간다. 공은 어느새 체육관 근처를 돌아 뒤뜰로 향하고 있었다.


그렇게 아카아시가 타박타박하던 걸음을 멈춘 건 뒤뜰에 먼저 도착한 선배를 알아보았기 때문이다.


‘보쿠토…선배?’


2학년이면서도 벌써 주전으로 뛰고 있는 스파이커, 아카아시가 고등부에 입학하기 전에도 이름을 떨쳤던 2학년 선배였다. 제멋대로 세워 올린 은회색 머리카락은 아카아시가 살아온 시간을 다 따져도 그밖에 본 일이 없어 뒷모습만 보고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그런 그의 맞은편에는 다른 사람이 서 있다. 아마도 보쿠토와 같은 학년의 소녀인 것 같았다. 공은 보쿠토의 발 근처까지 굴러가 있는데 왠지 선뜻 주우러 향할 수가 없어서 아카아시는 잠깐 벽에 몸을 붙인 채 뒤뜰의 분위기를 살폈다.


“…는 안 되겠어. 헤어져.”


정말 못 나가겠는데, 아카아시는 속으로 생각했다.


보아하니 소녀와 보쿠토는 헤어지는 것 같았다. 정확히는 보쿠토가 차이는 것 같다. 어디에서나 주목을 한 몸에 받는 보쿠토이다보니 그에 관한 것이라면 원치 않아도 알게 되는데, 그러고 보니 여자친구에 관한 이야기는 들은 바가 없다. 그 정도면 저쪽에서 헤어지자고 할 법하기도, 아카아시는 또 속으로 생각했다.


보쿠토는 이제는 전 여자친구가 된 그녀를 특별히 붙잡지 않고 보내주었다. 여자친구가 물기 어린 눈으로 보쿠토를 바라보다 뛰어간다. 아카아시는 모르는 척하기 위해 일부러 다른 방향을 바라보았다. 보쿠토는 차인 것이 머쓱한지 뒤통수를 긁적이며 발끝으로 바닥을 헤집는 중이다.


‘빨리 가셨으면….’


애인에게 차인 것이야 그의 사정이고, 친한 선배도 아닌지라 위로의 말을 전할 일도 없으며, 당장 급한 것은 저 보쿠토가 아니라 보쿠토 근처의 배구공이다. 하지만 아카아시의 고난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몇 분 지나기도 전에 한 사람이 더 나타난 것이다. 아까 자리를 뜬 사람과는 다른 사람이었다.


“보, 보쿠토! 나와줬구나!”

“어? 아, 어 …….”


나와줬구나? 꼭 나와달라고 말한 건 저 사람인 것 같다. 보쿠토도 덤덤한 몸짓이었다. 나온 사람은 긴장했는지 떨리는 목소리로 보쿠토를 몇 번 더 불렀다. 보쿠토는 크게 재촉하는 바 없이 상대의 말을 기다려주었는데…….


“조, 좋아해! 사귀어주세요!”

“에…나하고?”

“응!”

“나는 너 잘은 모르는데…….”

“괜찮아!”

“그래, 그럼! 사귀자!”

 

명쾌한 대답이었다. 잔뜩 긴장해있던 상대가 활짝 웃더니 그러면 부활동 끝나면 보자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보쿠토가 시간을 잠깐 셈하는가 싶더니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가 손을 흔들며 인사하고 설레는 목소리로 뛰어나간다. 보쿠토는 그런 상대에게 손을 흔들어주고는, 어깨를 으쓱하곤 뒷목을 쓸어내렸다.


“어…어?! 너 우리 부 1학년? 여기까진 어쩐 일이야?”


아카아시가 딱딱한 걸음으로 나타나자 보쿠토가 놀란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곤 맞이해준다. 의외의 곳에서 같은 카테고리에 속한 사람을 만난 반가움이었다.


“아~! 공 가지러 왔어? 내가 가지고…….”

“—제가, 가지고 가겠습니다.”


보쿠토가 공을 주워 가려고 했는데 아카아시가 그 공을 낚아챘다. 후배의 목소리가 전에 없이 날이 선 듯 서늘하다는 것을 알아챈 보쿠토가 고개를 갸웃하려다 그의 청록색 눈동자와 마주하곤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고 말았다. 공을 챙긴 후배는 그대로 몸을 돌려 척척 돌아간다. 그 발걸음마저 냉랭한 기색이 풀풀 감돌고 있었다.


보쿠토가 내뻗은 손이 어색하게 내려갔다.


*


요즘 보쿠토의 뇌리를 지배하는 것이 있다면 둔해진 것 같은 리시브나 옆 학교 친구에게 스파이크가 족족 막힌다는 것에 대한 것도 아닌, 바로 입부 한 지 얼마 안 된 세터 지망이라는 신입생이었다.


아직 중학생 티를 다 벗지 못한 듯 아닌 듯한 얼굴에다 살도 근육도 부족하여 마릇한 몸의 이 신입생은, 가만히 있으면 눈매가 매서워 보여도 옆에서 동기가 말을 걸면 금방 부드러운 얼굴을 하고 대화를 나누곤 했다. 세터 지망이라면 앞으로 손을 맞춰볼 일이 있을 테니 연습하는 것을 몇 번 보곤 했을 뿐 아직 대화다운 대화는 한 번도 나눈 일이 없었는데…….


‘왜지!? 뭐지!? 뭐야!?!?’


보쿠토가 실상 그 전까진 이름도 몰라서 속으로 대충 ‘세터지망’ 정도의 호칭으로 생각하고 있던 그 후배가 자신만 보면 도끼눈을 뜬다. 정확히는 경멸의 눈동자를 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보쿠토는 살면서 자신을 그렇게 차갑게 쳐다보는 사람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북풍이 휘몰아치는 와중에 분리수거함의 분리수거 안 된 것을 보는 듯한 눈길.


처음으로 말문을 터보았던 건 그 후배가 뒤뜰로 공을 주우러 왔을 때였으니까, 2학년 중 누군가가 공 주워오라고 시킨 건가 하는 생각도 살짝 해보았으나 그 후배는 다른 2학년에게도 3학년에게도 정중했고 동기들에게는 살가웠다.


그러니까 정확히, 보쿠토 코타로 그만을 향해 그렇게, 그렇게,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눈빛을 한다는 거였다. 보쿠토가 살면서 단 한 순간도 정면으로 받아본 적이 없는 그런 표정을.


새 학년이 시작되고 한 달이 넘어가자 다른 동기들도 후배들도 감독과 코치도 남아있는 1학년들을 신뢰하기 시작했고 다들 말문을 터 가며 웃음기 어린 대화를 나누는데 보쿠토만 도통 그 대화에 끼질 못하는 중이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그 역시 후배들과도 동기들과도 선배들과도 즐겁게 대화를 하긴 하는데, 부의 동료들과 와하하 하고 크게 웃으며 신나게 대화를 나누다가도 퍼뜩 정신을 차려보면 그 후배는 온데간데 없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걸 알아차리고 나면 웃으면서 대화를 할 기분이 사라져 어물쩍 말을 줄이다 그도 자리를 떴다.


하지만 후배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단 둘만 있으면 노골적으로 그를 피해간다. 여럿이 있을 땐 절대 눈을 마주치지 않았고 정면으로 시선을 마주하게 돼도 진솔하게 질색하는 얼굴을 조금도 감추지 않았다.


‘말이나 해봤어, 우리가!?’


누군가가 나를 싫어한다는 게 이렇게까지 충격적일 일인가? 보쿠토가 지난밤 곱씹은 화두는 이것이었는데, 결국 아무 결론도 내리지 못했다. 한 번도 그런 대접을 받은 일이 없어 속에서 천불이 올라오는 거라는 얄팍한 판단이 전부였다.


그렇게 후배의 경멸 어린 시선을 견딘 지 어언 열흘째, 결국 보쿠토는 부활동 끝마치고 돌아가는 후배의 가방끈을 붙잡고 말았다.


타악!


“아, 아카아시?”


잡은 손은 바로 그 순간 매섭게 내쳐졌다. 보쿠토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정작 뿌리친 후배도 조금 놀란 듯한 표정에 다른 사람들이 되레 보쿠토를 탓했다. 후배를 놀라게 하지 말란 것이었다. 후배가 어렵사리 사과의 말을 하고 보쿠토는 손을 내젓는다. 대단치 않은 일이었기에 부원들은 다시 금방 흩어졌다. 보쿠토가 잠깐만, 하고 불러세우는 말에 후배가 의도를 가늠하는 듯이 매서운 눈으로 그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모두 적당히 하교하고 사라진 뒤에, 보쿠토는 겨우 아카아시를 끌고 체육관 뒤뜰로 향할 수 있었다.


이제 봄이 저물고 여름이 찾아오기 시작하는 교정은 푸릇푸릇한 색으로 물들어가는 중이었다.


“…무슨 일이죠?”


냉기가 뚝뚝 묻어난다. 어지간한 강호를 상대하는 와중에도 긴장한 적은 없었는데 절로 침이 꿀꺽 넘어가는 차가운 목소리였다. 보쿠토는 후배의 면면을 쳐다보다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너 말야.”

“네.”

“너, 너! 너 왜 그렇게 나를 싫어하는데!?”

“……네?”


버럭 소리치듯 물으면서도 눈을 꼭 감고 말았는데 살며시 한쪽 눈을 뜨자 후배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보고 있다.


‘에? 착각이었나?’


싫어하는 게 아니었나? 보쿠토가 잠깐 그런 생각을 하는 찰나였다.


“모르…모릅니까?”

“…진짜 싫어해!?”

“좋아할 수 있는 쪽이 더 신기한 것 같은데요.”

“아, 아니, 왜!? 왜? 우리 얘기도 몇 번 안 했잖아! 너, 너는 후배면서, 어어, 선배를 어떻게…….”


후배의 눈동자 속 온도가 점점 떨어짐에 따라 보쿠토의 목소리도 점점 사그러들었다. 마침내 보쿠토가 입을 다물게 되었을 때 후배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보쿠토의 몸이 움찔한다.


“도대체가……. 사귀던 애인하고 헤어진 지 2분 만에 새 애인을 사귀는 사람은 어디 있으며…….”

“!”

“그 애인하곤 또 어제 헤어지셨다면서요?”

“아…그건 걔가 헤어지자고 해서…….”

“뭐 선배가 애인 어떻게 사귀든 그건 선배 맘이고 제가 뭐라 할 건 아니지만요. 쓰레기 아니라곤 못 하겠네요.”


칼같이 떨어지는 비난에 단언이었다. 보쿠토의 눈에 억울함이 방울방울 차올라도 저 북극 같은 후배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는 것 같다. 말을 마친 후배가 이제 됐죠, 라며 돌아서려는 찰나에 보쿠토가 빽 하고 소리쳤다.


“그, 그런 거 아니, 아니야!”

“……?”

“아니, 그러니까 막, 내가 어떻게 한 게 아니라고…….”


후배가 보쿠토를 쳐다본다. 보쿠토는 서둘러 말을 이으려고 애썼다.


“아니 그 애가, 그, 사귀자고 했는데……. 싫다고 하면 상처받잖아…….”

“…?”

“그래서 알았다 했지. 근데 일주일쯤 되니까 헤어지자고 해서……. 헤어지자고 하는데 내가 뭐라 하기는 좀 그렇잖아. 그래서 알았다고 했는데.”

“…….”

“근데 다른 애가 사귀자고 해서, 나는 너 잘 모르는데 괜찮냐고 하니까 괜찮다고 하길래, 그래서 거절하기 좀 그렇잖아!? 닳는 것도 아닌데!? 전에 있던 애한텐 차였으니까 양다리도 아니었다고?! 그래서 그냥 사귀자고 하는 말에 알았다 한 거 뿐이었단 말야!”

“…….”

“너 진짜 너무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후배의 얼굴이 형용할 수 없는 표정으로 물들어 갔지만 눈을 꼭 감고 소리치는 보쿠토는 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