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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운찬 조금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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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서 푹 쉬세요, 주군.”

“응. 조운도.”


백자(白瓷)같이 하얀 얼굴의 여자는 살짝 뺨을 붉히더니 자신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 조운은 닫힌 문을 한참이나 보고 있기만 했다. 그와 관련된 기억을 모두 잃은 여자 앞에서 조운이 저도 모르게 눈물을 터뜨렸을 때, 여자는 곤혹스러운 것 같았지만 내치지 않고 위로해주었다. 주군이라는 터무니없는 호칭으로 부르는 것도 받아주었다. 그 혼자 애틋이 여기는 것도, 받아주었다. 


그의 옛 군주는 단지 기억을 잃었을 뿐 여전히 그를 보듬어주고 이따금 손을 잡아주고 우는 그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조운은 그 이상 바라는 것이 없었다. 기억하지 못해도 좋았다. 처음 보는 사람처럼 바라보아도 괜찮았다. 자신이 그녀의 앞에 마주 서있을 수 있으면 그것으로 되었다. 


그리고 그러지 못하는 한 사람을 알고 있다. 


조운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밤이 내려앉은 도원관은 고요에 잠겨있었다. 어둠이 깔린 실내에 유리창으로 달빛이 어슴푸레 들었다. 조운은 소리 없이 기둥에 가려진 창가로 걸음을 옮겼다. 


창가에는 한 사람이 숨소리 하나 내지 않은 채 조용히 서 있었다. 그의 시선은 서리가 낀 창밖을 향하고 있다. 조운은 언제나 그가 서 있는 저 자리, 저 창가에서 무엇이 보이는지 알고 있었다. 


“제갈량.”

“밤 인사는 끝났나?”


조용히 서 있던 남자, 제갈량이 느린 동작으로 그를 돌아본다. 조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갈량의 흰 얼굴 위로 창백한 달빛이 들어있다. 그의 눈매는 담담했다. 저 눈꼬리가 지옥의 벼락 끝자락처럼 보이던 때도 있었다는 게 거짓말 같을 정도다.


“아주 들어가서 재워주지 그래. 손을 못 떼던데. 차라리 신혼방을 차리는 게 어떤가?”

“…….”


조운은 속으로 스스로의 생각을 정정하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하지만 쏘아붙이는 말은 튀어나오지 않았다. 조용한 이 시간에 소란이라도 벌여서 공손찬을 깨울까 저어하는 마음에서였다. 제갈량은 그것을 잘 아는지 희끗이 웃는 얼굴로 가열차게 조운을 놀려댔다. 조운은 한껏 심호흡을 하며 붉어진 얼굴을 정리하며 제갈량의 곁에 서서 그가 보던 풍경을 바라보았다. 


날이 추워지며 이파리가 모두 저문 화단에는 하얀 서리가 앉아있었다. 조운의 숨을 타고 창가의 차가운 공기가 불투명하게 얼어붙었다가 산산이 깨어지기를 반복했다. 


제갈량의 그녀는 이곳에 없다.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그의 앞에서 자신이 공손찬과 웃는 것에 대하여, 조운이 죄책감을 느끼지는 않았다. 쓸데없는 미안함을 느끼지도 않았다. 자신의 행복이 제갈량에게 죄가 되는 것은 아니었고 그의 홀로됨이 조운과 공손찬의 잘못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따금 그를 돌아보게 되었다. 


제갈량은 종종 도원관에 들러 그의 군주와 이젠 사람이 된 옛 장군들에게 안부를 전하곤 했다. 그리고 도원관에 머무는 나머지 시간동안 항상 같은 곳에 있었다. 비가 와도 눈이 와도, 언제나 아름드리 나무 아래의 조그만 화단 앞에. 


지금 그가 이렇게나마 실내에 있는 것은 겨울 서리를 맞고 서 있는 제갈량을 유비가 못견뎌했기 때문이다. 


“……자넨, 군주가 서서였다면 차라리 더 행복했을…….”

“조운. 몸이 사람이 되더니 뇌는 어째 영웅패 시절보다 둔해졌나?”

“…….”


‘장비, 저놈은 얼굴은 꽃봉오리인데 입에서 나오는 건 다 똥이라던 그 말! 이 조운, 동의해 마지않습니다…….’


“내가 다른 군주의 신선이었으면 우리 주군이 드림배틀에서 이길 수 있었겠나? 자네들이 처음에 내 말 안 듣겠다고 주군을 앞세워 나와 한 판 했다 ‘모조리’ 박살난 건 새까맣게 잊었나보군? 내가 없었으면 자네는 지금쯤 저 공손찬님과 손 잡아보는 건 꿈도 못 꾸는 신세였으리라 본다만.”

“…….”

“그리고 서서가 군주였으면.”


신나게 이죽거리던 제갈량이 문득 입을 다물고 다시 창 밖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푸른 달빛이 제갈량의 콧등에 내려앉아 새하얀 경계선을 그렸다.


“그랬다면……. 드림배틀 같은 것에 참가하게 두지 않아.”

“……뭐?”

“이런 말도 안 되는 싸움에 참가하게 뒀을까보냐. 절대 안 될 일. 누가 영웅패를 주려고 하는 것도 쳐내도록 곁에 딱 붙어서 감시했을 것이다.”


그저 사람일 뿐인 서서. 영웅패를 보고서 이게 무엇이냐고 묻는 서서. 자신의 신선이 되어달라고, 제갈량 그에게 말하는 서서…….


“…하지만 서서라면 그 성격에 반드시 드림배틀에 참가했을걸? 자네가 어떻게 방해하더라도.”

“……그랬겠지.”


그랬겠지…….


제갈량은 천천히 중얼거렸다. 묘한 곳에서 고집이 있었던 서서라는 것을 기억하고 있다. 마음 먹은 것은 해내고야 만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결국 그녀는 선택했지 않았던가, 마침내 이 드림배틀에서 우승해 그가 줄곧 의미없다 여겨온 배틀 그 자체를 없애버릴 군주를. 비록 그 끝까지 함께하지는 못했으나. 


“그럼 자넨 서서의 신선이 되었을 테고.”

“아니.”


제갈량은 고개를 저었다. 그 말만은 차가울 만큼 단호했다. 조운이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제갈량의 손끝이 유리창에 닿았다. 서리가 하얗게 번져갔다.


“배틀에 이긴 주군에게 무엇이 남았지.”

“그야…….”

“인간이 된 너희 다섯과 나 하나를 제외하면 무엇이 남지? 그간에 만났던 모든 사람들, 친구였던 손책 님, 조조 님, 연이 닿았던 그 모든 사람들은 기억을 잃었다. 너의 공손찬 님께서도 너를 기억하지 못하지.”

“…….”

“그 기억들은 모두 주군에게만은 남아있고 소중히 여겨주시고 있다는 걸 안다. 하지만 그게 상처가 되었다는 것도, 알고 있다. 너에게도 그렇듯이.”


그녀가 기억하지 못해도 좋았지만. 그를 처음 보는 사람 보듯 해도 괜찮았지만. 그게 상처가 아닐 수는 없었던 것이다. 


“서서에게……서서에게 그런 것을 감당하게 하라고. 그러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서서의 신선이 되면 서서는 내 소멸을 막기 위해서라도 배틀에서 이기려 하겠지. 그리고 그 애는…….”


모두들 그녀를 보고 그저 웃기만 할 줄 아는 백치 같은 신선이라 여겼지만, 사실 그 애는. 서서는.


“서서는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한다. 무엇이든. 그리고 마침내 손에 쥐고 말지.”


제갈량은 천천히 유리창에서 손을 떨어뜨렸다. 


서서는 원하는 걸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한다. 제갈량은 서늘한 표정으로 화단을 바라보았다. 아무도 모르고 있다고, 모두가 속았노라 이따금 외치고 싶은 나날이 있었다. 서서가 당신들 생각만치 들에 핀 꽃 마냥 여리기만 한줄 아느냐고. 그 애는 바라는 것이 있다면, 원하여 손에 넣고 싶은 게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고. 지금 이것을 보라고. 자신이 소멸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면서도 기어코 인간계로 내려갔고 끝내는 소멸되는 것까지 불사하여, 마침내 그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그에게 가족을 안겨주었다. 


“……자네는 행복한가?”

“머리는 둔해졌어도 낯부끄러운 소리를 잘도 하는 것은 영웅패 시절부터 변한 게 없나 보군.”


조운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렇다면, 정말로 행복한 것이라면 이제 이렇게 서서의 화단을 바라보는 것은 그만두라고 말하고 싶었다. 서서가 없는 지금도 진실로 행복하다면 굳이 이럴 것이야 없는 일 아닌가. 그녀를 그리워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제갈량은 조운이 하지 못한 말까지 모두 들은 얼굴로 천천히 그를 돌아보았다.


“그건 서서와 내 마음이 아무런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조운이 입술을 달싹였다. 이해할 수 없어서였다. 제갈량은 어린아이를 토닥이듯 답지 않을 만큼 다정하게 말했다.


“그녀가 있어도, 없어도. 내 마음은 한결같으니까.”


서서가 있었다면 잠든 그녀를 바라볼 시간에, 단지 그녀가 심은 꽃이 묻혀있는 화단을 바라볼 뿐인 것이다. 다를 것은 없었고 따라서 그의 마음이 변할 것도 없어, 그는 서서가 자신에게 안겨준 것들을 깨달은 날부터 줄곧 행복했다. 그리고 그 행복이 서서를 사랑하는 마음을 견고하게 지키고 서 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렇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서서가 곁에 없어도 그의 마음에는 삭풍이 불지 않는다.


“그러니 조운. 자네는 마음 편할 대로 했으면 좋겠군. 내가 서서를 보고 있다고 눈치 주는 일은 그만 하고.”

“누, 눈치를 언제 줬다고!”

“지금도 눈치 주러 온 거잖나.”


제갈량의 말에 조운이 소리를 치려다 겨우 입을 닫았다. 제갈량이 부채를 들어 입을 가리고서 웃는다. 놀리는 투가 역력했다. 조운은 자신이 괜한 짓을 했다며 몸을 돌리고 가버렸다. 


도원관은 다시 고요 속에 가라앉고, 어둔 밤 제갈량은 서리 낀 유리창을 통하여 서서를 바라본다. 눈을 감으면 서서가 웃었고 눈을 뜨면 곧 봄이 올 것이 보였다. 봄이 오면 꽃이 필 테고 꽃 속에는 또다시 서서가 있다. 여름이 오면 파도가 치고 파도 속에도 서서가 있다. 가을이 오면 낙엽이 저물고 낙엽의 끝에 서서가 있고 다시 서리가 희게 이는 겨울이 오면. 


아주 조금은 쓸쓸하지만…….


제갈량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맺혔다. 겨울 서리 속에 서 있는 그를 걱정하는 유비가 있다. 이렇게 잠들지 못하고 그에게 다가오는 조운이 있다. 오늘밤은 조운이었으니 내일 밤은 황충일 것이다. 서서가 안겨준 모든 것들이었고 때문에 그 모든 것들로 서서는 그의 곁에 있었다. 


유리창에 서리가 인다. 이제 겨울이었다. 그리고 다시 곧 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