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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오후 무렵부터 부슬부슬 비가 왔다. 안개가 흩뿌리는 것 같은 비였다.


*


“우왓, 칠석이라고 비 오나봐! 제갈량, 빨리 걷어서 들어가자!”


도원관의 앞마당에서 유비가 빨래 걷는 것을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던 제갈량은 고개를 갸웃했다. 


“날짜가 비가 오는 것과 관련이 있는 겁니까?”

“응? 견우 직녀 몰라? 우왓, 빨래, 빨래!”


유비는 바쁜 와중에도 제갈량이 바라만 보고 있는 것을 탓하지 않고 서둘러 빨래를 걷었다. 마당을 꽉 채우고 있던 빨랫감이 모두 걷히는 건 눈 깜빡할 새였다. 


드림 배틀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유비의 영웅패들은 모두 사람이 되었다. 그들은 당연한 것처럼 다시 유비를 찾아 도원관으로 왔고, 덕분에 도원관의 가사도 부쩍 늘었다. 유비는 답게도 싫은 소리를 하는 법이 없었지만 장수도 주군 혼자 일하게 두지 않았던 터라 도원관 살림은 그럭저럭 굴러갈 수 있었다. 제갈량은 이따금 도원관으로 내려와 그들이 하는 양을 지켜보다 돌아가곤 했다. 오늘도 그런 날들 중 하루였다.


제갈량은 도원관 도장 바닥에 집채만 한 남자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빨래 개고 있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다가 불쑥 물었다. 유비는 간식을 준비하겠다며 부엌에 들어가 자리를 비웠다.


“견우 직녀가 무어냐?”

“응? 제갈량, 그런 것도 몰라? 아주 basic한 동화인데!”


말을 받아준 것은 조운이었다. 옛 주군인 공손찬에게는 말 한마디 제대로 못 건네면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입이 가볍고 매섭다. 제갈량은 손에 쥔 부채를 한 바퀴 돌렸다.


“자네는 사람이 됐지만 난 여전히 신선이지. 다스리기를…….”

“아, 알았어! 말 해줄게! 말 해주면 될 거 아냐!”


조운은 빨래를 개면서 그 ’견우와 직녀’에 대한 것을 늘어놓았다. 인간계에서는 평범한 동화인 것 같았다. 제갈량은 젠체하는 조운의 말투를 지적하지도 않고 잠자코 그 얘기를 듣기만 했다. 


조운이 그렇게 한참이나 얘기를 늘어놓다가 돌연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제갈량은 고개를 돌리지 않고도 누군가가 귀가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조운이 개던 빨래가 흩날리는 것도 개의치 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다른 장수들이 소년처럼 구는 그를 보고서 낮게 웃음을 흘린다. 조운은 제갈량에게 으스대듯 말하던 것은 온데간데없이, 다른 장수들이 웃는 것에도 신경 쓰지 못하고서 수줍은 꽃이 핀 것 같은 표정으로 현관으로 달려갔다. 귀가한 이는 목덜미를 겨우 덮는 단발머리에 얼굴이 새하얀 소녀 같은 여자였다. 그녀의 손에 들린 것은 작은 책 두어 권뿐이었는데 조운은 그것도 견디기 힘들다는 듯이 굴었다. 제갈량은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조용히 바깥으로 향했다. 공손찬이 스쳐지나가는 제갈량을 보고서 아는 척했지만 제갈량은 고개만 한 번 까딱하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


삼백년은 어쩌면 짧은 영원과도 같다. 백 년도 되지 못하는 찰나의 시간을 사는 인간에게 대자면 그러할 것이다. 본래 제갈량은 그 길지 않은 영원을 천천히 소요할 작정이었다. 


줄곧 드림배틀에는 참가할 뜻이 없었다. 군주를 찾으려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를 제외한 신선들 가운데에 누군가가 드림 배틀에서 우승할 것이고, 자신은 300년의 시간을 마치고 소멸하리라. 아무 의미 없는 생이었으나 싫지만은 않았을 뿐이었다. 서서와 함께 사라지게 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서서가 홀로 남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적은 있었지만—서서는 종종 터무니없는 일을 잘도 하곤 했으므로—, 설마하니 자신이 홀로 남을 거라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한 번이라도 이런 생각을 했더라면. 


제갈량은 서서가 심었다는 꽃밭 앞에 서서 가만히 안뜰을 내다보았다. 이슬비가 사르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저무는 해의 따뜻한 색이 방울방울 굴절되어 서서의 소맷자락을 떠올리게 한다. 


한 번이라도, 이렇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더라면 자신은 무슨 말을 했을까. 여기 있자. 여기에 있어줘. 여기에서, 나와 함께. 이런 말이 아니라 조금 더 다른 말을…….


“저기요.”


멍하니 생각을 거듭하던 제갈량은 낮은 곳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목덜미까지 겨우 오는 짧은 단발머리, 동그란 눈동자에 눈처럼 하얀 얼굴의 소녀 같은 여자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슬비의 따뜻한 색이 비쳐 그 위로 다른 이의 얼굴이 잠시 겹쳐 보였다 다시 흐려졌다.


“공손찬 님.”

“곧 있으면 저녁때니까 들어오라고, 유비가요.”


배틀은 끝났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기억을 잃었다. 그의 앞에 있는 그녀 역시 자신을 비롯하여 드림 배틀 때 만났던 모든 인연을 잊었다. 기억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것은 천하의 멍청이들뿐이다. 저기서 자신의 옛 주군만 보면 뺨을 붉히느라 바빠 말도 제대로 붙이지 못하는 조운이라던가. 


조운은 빗속에 서 있는 공손찬을 발견하고는 허겁지겁 달려와서 그녀의 머리 위로 손그늘을 만들어주었다. 비 한방울이라도 닿을까 싶어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이었다. 공손찬은 그것이 어색하기는 해도 싫지는 않은 듯이 그 그늘에 의지해 도원관 안으로 다시 돌아갔다. 조운은 자신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공손찬을 보면서도 조금도 서운하지 않은 듯했다. 


유비는 그런 조운이 굉장하다고 했고 제갈량은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서서가 돌아온다면, 돌아오기만 한다면. 자신을 잊은들 그게 무어 대수랴. 그에게 마음 한 톨 돌려주지 않는다 하여도 그게 무어 대수랴, 돌아와주기만 한다면.


주지 못한 마음은 넘쳐흘러 그의 발밑을 질척하게 만들고 있었다. 언젠가 그의 목까지 차올라 그를 익사시킬지도 몰랐다. 


*


“—량! 제갈량!”


제갈량은 눈을 번쩍 떴다. 잠깐 잠이 들었나? 신선은 잠들지 않는데, 하지만 그런 생각보다 앞서는 것이 있다. 여기가 어디인지, 지금이 언제인지, 그런 것보다 앞서는 것이 있다. 


제갈량은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슬비는 물안개처럼 주위를 흐리게 만들었다. 그 속에 또렷한 것은 단 하나뿐이었다.


“……서…서.”

“아잇참, 제갈량! 아까부터 계속 불렀잖아!”


소녀 같은 얼굴의 여자가 허리에 팔을 올리고서는 그를 본다. 단발머리, 새하얀 얼굴, 커다란 눈동자. 뚱한 듯이 입술을 삐죽거리고 있다. 서서였다. 제갈량은 한참이나 입술을 달싹거리기만 했다. 단어가 머리속에서 회오리쳤고 모두 엉망이 되어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은 없었다. 


서서가 결국 방긋이 웃고는 그에게 다가와 덜컥 그의 손을 붙잡았다.


“제갈량! 이리 와!”


서서가 그의 손을 붙잡고 어디론가 향한다. 홀린 듯이 따라가던 제갈량은 잠깐 멈춰 섰다.


“제갈량, 빨리이!”

“잠깐만. 서서.”


신선은 잠을 자지 않는다. 꿈을 꾸지도 않는다. 소멸된 서서가 돌아올 수 있는 방법도 없다. 제갈량은 충돌하는 정보와 사실 사이에서 방황하지 않았다. 


걸치고 있던 흰색 코트의 단추를 하나 하나 풀고 벗은 제갈량은 그 코트를 한 번 정리해 서서의 어깨 위에 씌워주었다.


“제갈량?”

“비 오잖아.”

“그치만 그럼 제갈량도 비 맞잖아~!”

“나는 괜찮아. 어디 갈 거였어?”


말을 돌리자 서서는 금방 또 눈을 반짝이곤 다시 앞장섰다. 점점 어디가 어디인지 알 수가 없다. 돌아가는 길도 물빛 안개 속에 흐릿해져갔다. 제갈량은 돌아갈 길을 궁금해 하지도 않았다. 여기서 끝이라 해도 좋았다. 


“제갈량은~! 선계에 대해서는 아는 게 아무것도 없지!”

“그런 것 같아.”

“아휴, 정말이지 도술만 할 줄 알고!”

“서서가 있으면서 알려주면 되잖아?”


아, 이런 대화를 했었다. 왜 그렇게 말했을까. 가지 말라는 말을 왜 하지 못했을까. 정이 많은 서서는 그가 눈물로 호소하면 있어주었을지도 모르는데. 그 마음이 그와 같은 것이 아니라고 하여도. 


하지만 정정하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목이 틀어 막힌 것 같았다. 무슨 말을 하려고 해도 입술을 버끔거리는 것이 고작이다. 서서가 그런 제갈량을 돌아보며 웃었다. 꽃이 피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지금 그러고 있잖아?”


지금? 이곳이 선계인가? 제갈량은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위치를 특정 지을 수 없었다. 이슬비와 물안개가 자욱했고 선계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선계에 비가 왔던 것은 백여 년 전 딱 한번, 제갈량이 신선마법을 응용하여 빗방울이 흩날리게 만들었던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서서가 인간계의 무지개를 궁금해 했기 때문이었다. 


“앗, 다 왔다!”


돌연 서서가 멈춰 섰다. 숲의 한쪽 구석, 버드나무 가지가 꽂혀있었다. 갓 파묻은 듯이 짙은 색을 드러낸 흙이 소복이 덮여있다. 그 앞에 무릎을 대고 선 서서가 제갈량을 향해 손짓했다. 얼른 다가오란 뜻이었다. 제갈량은 서서의 곁에 서서 그녀의 머리 위로 손그늘을 만들어주었다. 빗방울이 그의 손등에 닿았다. 서서가 조금 웃더니 파묻은 흙을 살살 훑어냈다.


“서서, 내가 할게.”

“안! 돼! 요! 서서가 해야 해.”


서서가 고집을 부릴 때의 목소리였다. 제갈량은 서서가 하는 것을 그녀의 뜻대로 가만히 지켜보았다. 흙이 묻은 손은 씻어주면 되고 상처가 나면 치유해주면 된다. 그다지 깊이 파묻지 않았는지 서서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안에 든 것을 꺼냈다. 조그만 나무로 만든 상자였다. 


“유비 님한테 재미있는 걸 배워서! 거기에도 묻어뒀지만, 제갈량에게도 따로 해주고 싶었거든.”

“아…….”


어떤, 정체 모를 것이 묵직하게 제갈량의 가슴 안에 내려앉았다. 서서는 흙이 묻은 상자를 무릎 위에 올린 채 애틋하게 쓸어보고 있었다. 


“그런데 제갈량은~! 도술만 잘하지 선계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으니까 말야.”


그러니까, 가지 말고. 


계속, 내 곁에서. 


하지만 입은 떨어지지 않았다. 서서가 제갈량에게 작은 나무함을 불쑥 내밀었다. 조금 쑥스러운 듯이 배시시 웃는 얼굴이었다. 제갈량은 떨리는 손으로 나무함을 받아들었다. 상자에서 흙의 싱그러운 비린내, 튿어진 풀잎에서 새어나오는 향취, 그리고 과일의 단내가 함께 흘러왔다. 


조심스레 상자를 연다.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투박한 상자 안에는 작은 것이 화선지에 싸여있었다. 제갈량이 그 화선지를 펼쳤다.


“헤헤, 요건 유비 님한테 받은 씨앗이야. 내 화단, 알고 있지? 거기에 제갈량도 같이 심자! 그리고 이건 공손찬 님께 배운 건데, 이렇게 실로 장식을 만들 수 있다고 해서……. 제갈량 부채 엄청 엄청 멋있잖아? 거기에 달면 예쁠 것 같았어!”


천으로 감싼 조그만 주머니와 청록색 수실로 만든 술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제갈량은 고개를 들었다. 시야가 일렁거렸다. 자신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는 것을 알았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이렇게 혼자 남겨질 것을 알았더라면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서서. 다른 데 가지 말고 나와 함께 있어주면 안 될까. 가지 않으면 안 될까. 이렇게 비가 오는 날이면 내가 빗방울을 가려줄 수 있게, 허락해주면 안 될까. 


그 모든 게 안 된다면, 그러면 나를 데리고 가주면…….


“제갈량은 선계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니까 말야, 평~생 못 열어보나! 했다고.”

“서서, 나는…….”


유비와 조운에게서 견우와 직녀에 대해 들었다. 칠월 칠석에 대해 들었다. 고작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요동쳤다. 별보다 먼 곳에 있는 그대를 만날 수 있는 날이라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어쩔 수 없이 일렁거렸다.


너는 소멸했고 돌아올 수 있는 길은 없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아는 내가 흔들렸어. 말도 되지 않는 일이라는 걸 잘 알면서도 까닭도 모르고서 너의 화단 앞에 서 있었다. 네가 올 거라고 기대했던 걸까. 그게 아니면 나는.


하지만 모든 아무리 애를 써도 말을 할 수가 없다. 말을 할 수가 없어 말 대신 눈물이 흘렀다. 물안개가 그의 뺨을 스치며 상처를 낸다. 서서가 그를 보며 웃었다. 서서의 손끝이 그의 뺨을 스쳤다. 


“돌아와서, 전부 알려줄게.”


하지 못했던 말은 할 수 없다. 시간은 거스를 수 없다. 서서는 돌아올 수 없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 역시 사라지지 않는다. 무엇도 바꿀 수 없고 바뀌지 않았다. 


물안개같은 비가 계속 내렸다. 견우와 직녀가 만나는 날이었다.


*


제갈량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어디선가 빗방울이 떨어졌지만 날은 완연히 개어, 남빛 하늘에는 선명한 은하수가 흐르고 있었다. 별빛이 쏟아질 것처럼 빛이 난다. 한참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던 제갈량은 서서의 화단 앞에 한쪽 무릎을 대고 앉았다. 저녁 내내 내린 이슬비에 젖은 화단에서는 생생한 꽃무리가 환히 피어있었다. 살짝 건드리자 꽃잎을 타고 그의 손끝으로 물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그 역시 빗방울을 가려주고 싶었다. 손에 든 작은 꽃송이 하나도 대신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하지 못했던 말을 전할 수 없고 잡지 못했던 손을 잡을 수 없으며, 가려주지 못한 빗방울은 영원히 그의 뺨에 대신 흐를 것이었다.


전하지 못한 마음이 여전히 그의 안에 켜켜이 쌓이다 넘쳐흐른 것들이 맑은 웅덩이를 만들어 그의 발을 적셨다. 그것들은 시간과 함께 차오르며 흩날리는 꽃잎이 닿기만 해도 출렁거릴 것이다. 별보다 먼 곳에 있는 연인과 만나는 날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만 해도, 사랑하는 이에게 달콤한 것을 전해주는 날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만 해도, 빗방울에 노을이 비쳐 그녀와 같은 색으로 빛이 나는 것을 보기만 해도. 


제갈량이 선계로 다시 돌아간 것은 다음날의 아침 해가 붉은 빛으로 떠오를 때였다. 제갈량은 자신이 내년 이맘때면 또다시 빗속을 헤매리란 것을 알았다.

 

그의 부채 끝에 청록색 술이 가지런히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