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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화 스포일러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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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량! 내가 먼저 도와달라고 하기 전엔 안 돼, 알았지?》


*


“모르겠어?”

“히잉…….”

“알려줄까?”


슬쩍 몸을 기울이자 물기가 들어찬 눈동자가 이리저리 굴러간다. 마치 달콤한 사탕을 앞에 두고서 꾹 참는 어린애같은 얼굴이었다. 그 표정이 재미있어 마냥 감상하던 제갈량은 그래서 설마 서서가 ‘아니!’라고 말할 줄은 몰랐던 탓에, 그만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서서는 뺨까지 붉히고서 자신의 주먹을 꽉 쥐었다.


“이, 이건 숙제니까. 내 힘으로 할 거야!”


그러면서 다시 붓을 손에 쥐고는 두루마리를 내려보는 것이다. 제갈량은 눈만 깜박이며 그런 서서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괜히 손이 어색해서 부채를 한번 말아쥐어 보지만 서서는 벌써 두루마리에 고개를 박고 공부에 열중하고 있었다. 제갈량은 슬쩍 고개를 기울여 서서가 두루마리에 쓰고 있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건 바람의 움직임을 해석해서…….”

“내, 내가 할 거야! 제갈량은 천재라서 눈 깜박할 새에 다 풀어버리잖아!”


서서가 팔로 두루마리를 감싸 가리며 소리친다. 제갈량은 괜히 입술을 한 번 삐죽하곤 두 손을 들어보였다. 


“알았어. 안 할게.”

“가만히 있어야 돼. 알았지.”

“가만히 있을게.”

“약! 속! 하기야.”

“약속해.”


정말이지, 서서가 재차 물었고 제갈량은 그 말마다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제갈량은 턱을 괴고서 서서가 열중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흠…….’


해준다고 하는데 저렇게 격렬하게 거절당한 건 처음이다, 제갈량은 거기까지 생각했다가 자신이 뭔가 선뜻 나서서 해준다는 얘기를 했던 것도 처음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건 그다지 나쁘지 않은 감각이었다. 


그나저나 서서가 신선 마법을 수련하는 데에는 그다지 열의가 없는 줄 알았는데, 그렇지만도 않은 모양이었다. 제갈량은 손에 쥔 부채를 눈에 띄지 않게 움직이며 생각했다. 


먼 곳에서부터 청명한 공기가 미풍에 실려 왔다. 제갈량은 부채 끝을 움직여 그 바람을 서서에게로 보냈다. 서서는 바람이 자신의 뺨을 간지럽히고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것도 알지 못한 채 입술을 꽉 깨물고 숙제에 여념이 없었다. 잘 풀리지 않는 것이 답답할 법도 한데 그에겐 도움을 청하지 않는다.


자신을 보지 않는 서서와 함께 있는 건 즐겁지 않았지만, 자신을 보지 않는 서서라고 해도 함께 있고 싶었다. 즐겁지 않아도 함께 있고 싶었다.


*


“흐아암……헉, 자버렸다!”


제갈량은 하품을 하다가 깜짝 놀라서 벌떡 일어나는 서서를 보곤 그만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그가 미리 붓을 정리해 두지 않았으면 지금쯤 여기저기 먹이 튀어 엉망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앗! 제갈량, 아직 있었어? 내가 자버렸지, 미안……앗! 어떡해, 숙제 다 못했……는데.”


제갈량은 느릿느릿한 동작으로 부채를 움직이며 서서의 표정을 가만히 관찰했다. 하늘이라도 무너진 듯이 어쩔 줄 모르던 얼굴이 금방 눈을 동그랗게 뜨고 두루마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어……? 다 돼 있잖아.”


안 그래도 큰 눈이 더 크게 뜨여서는 도록도록 굴러간다. 제갈량은 부채로 입가를 가리고서 서서를 바라보기만 했다. 두루마리를 앞뒤로 살펴보던 서서가 제갈량 쪽으로 눈을 돌렸다.


“이거 다 돼있네……?”

“다 하고 잤잖아.”

“아닌데…….”

“숙제 다 했으니 혼나진 않겠네.”

“그건…….”


서서는 생각만큼 기쁜 것 같지 않은 표정이었다. 그 때 서서가 두루마리를 집어 들고는 코를 박을 만치 가까이 들여다보았다. 한참을 살펴보던 서서가 번쩍 고개를 들고 제갈량에게 눈을 돌렸다.


“제갈량!”

“으응?”

“이거 제갈량이 해줬지!”

“아닌데.”


평범하게 생각해 보아도 잠든 사이에 올만한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고 곁에는 계속 제갈량이 있었으니 자신이 하지 않은 거라면 당연히 그의 소행일 것인데, 서서가 그를 추궁하는 건 달리 명확한 근거가 있는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서서가 제갈량에게 두루마리를 들이밀었다.


“이거! 제갈량 이 글자 쓸 때 꼭 이렇게 삐침 넣잖아!”

“……아.”

“제갈량~! 안 하기로 약속 했잖아!”


입술은 꽉 깨물고서, 볼은 빨갛게 달아올라서는 외치는 모양새가 흡사 화가 나기라도 한 것 같아서 이번엔 제갈량이 더욱 놀랐다. 


“……서서, 화났어?”


저래서야 백치 아니느냐고 누군가가 그녀를 향해 핀잔 던지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다. 서서는 그 말을 듣지 못한 것처럼 언제나와 똑같이 웃었지만 제갈량은 알고 있었다. 그녀가 들었다는 것을. “신선마법 꼴찌인 건 사실이잖아, 헤헤…….” 하지만 그네들이 그녀를 보고 그런 말까지 한 것은 단지 신선마법에 대한 것만은 아니었다. 저런 말을 들어도 화낼 줄을 모른다. 사실이니까, 하며 조금 부끄러운 듯이 웃음을 짓는 게 전부. 자길 향해 모욕을 해도 화를 낼 줄 모르니 그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그녀를 대신하여 화를 낸 건 제갈량이었다. 그녀를 향해 그런 말을 했던 신선은 며칠 내내 물벼락을 맞고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연이어 걸려 넘어지고 쓰는 화선지는 먹이 닿자마자 번져 쓸 수 없게 되었다. 그러길 아흐레쯤 했을 때야 서서가 눈치 채곤 그를 보고 웃었다. 난 정말 괜찮아, 제갈량. 괜찮지 않은 건 제갈량이었지만 서서가 그렇게 말했으므로 괴롭히던 것은 관두었다. 


“화 났어! 제갈량이 약속 어겼잖아!”

“……미안.”

“모처럼 열심히 해보려고 했는데…….”


서서는 뚱한 것처럼 뺨을 부풀리고서는 제갈량이 술식을 적어 넣은 두루마리를 쓸어보느라 제갈량을 바라보지도 않고 있었다. 제갈량은 그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을 향해 화를 낸 그녀를 보고서 기쁜 듯한 얼굴을 하고 있는 걸 들킬 수야 없는 노릇이다. 네가 화를 내는 건 내게만이지, 그런 생각을 했다는 걸. 제갈량은 고개를 숙여 표정을 가린 채 말했다. 


“다음부턴 정말 안 그럴게.”

“약속이야, 알았지?”


약속할게. 그 말에 서서는 또 언제 화를 냈냐는 듯이 배시시 웃고는 제갈량의 옷깃을 붙들었다. 내가 먼저 도와달라고 하기 전에는 안 돼, 알았지. 제갈량은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러면서 덧붙였다. 도움이 필요하면 꼭 불러. 


서서가 활짝 웃었다. 당연하지, 제갈량!


*


그러니까 자신을 향해 도와달란 말을 하지 않는 저 서서는 그의 서서가 아니었다.


*


서서가 한 번도 즐거워하지 않았던 신선마법에 열중한 건 인간계로 내려가 군주를 찾기 위해서였다. 제갈량은 그녀가 왜 인간계로 그토록 내려가고 싶어 하는지 알고 있었다. 다감하고 아름다운 그녀는 자신이 아닌 다른 것을 볼 때에도 꼭 그 자신처럼 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인간계도 그렇게 보였을 것이다. 아름답고 찬란하게.


그 인간계가 그렇게 아름답지만은 않다는 걸 제갈량은 알고 있었지만 그녀를 말릴 수는 없었다. 그녀가 바라는 건 무엇이든 이루어주고 싶었다. 모든 것에 냉소적이고 이성적인 제갈량이었지만 이상하게 서서의 일에 있어서는 자꾸만 그 이성이 고장 나고 대책 없는 낙관주의가 뇌리를 잠식했다. 


어쩌면 그녀라면 할 수 있지 않을까? 자신에게 다가와준 그녀라면 드림 배틀도 해낼 수 있지 않을까. 그녀가 선계에서 모두에게 등 돌리고 있던 자신을 찾아냈듯이 인간계에서도 좋은 군주를 찾아내어…….


이성은 말도 되지 않는 일이라고 분명히 알려주는데도, 막연히 그런 생각이 들고 마는 것이었다. 


사실은 알고 있었다. 자신은 단지 그녀를 막아서고 싶지 않았을  뿐이라는 것을. 마음에 두는 것이라고는 없는 천하의 그 제갈량이, 단지 그녀에게 조금의 미움이라도 살까 두려워 말리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그 마음속에는 얄팍하고 비겁한 판단도 숨어있었다. 영웅패를 여럿 부릴 수 있는 대단한 군주들이 나타나고 레인보우 이벤트가 열린다 해도 선계의 수많은 신선들 중 말석인 그녀를 선뜻 선택할 군주는 없을 것이라고. 그의 울타리는 그런 식으로 그녀에게 맞추어 이리저리 움직였다. 마침내 정말로 그녀를 선택한 군주가 나타났을 때엔 네가 위하는 그 군주를 생각해 양보하라고까지 말하고야 말았더랬다. 서서는 제갈량의 말에 화내지 않았다. 저래서야 백치 아니냐는 소리를 들었을 때처럼.


자신을 대신해 그의 신선이 되어주면 안되겠냐는 그녀의 말을 거절했다. 제갈량은 인간계로 내려가고 싶지 않았다. 서서는 인간계가 아름답다고 말했지만 제갈량의 생각은 달랐다. 아름다운 건 이미 그의 앞에 있었고 그 아름다운 것만 혼자 선계에 두고 자신이 내려가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 끝에 서서가 도와달라고 말했다. 


그녀가 도와달라고 했기 때문에, 제갈량은 기꺼이 도와주었다. 흰 신선의 옷을 벗고 검은 양장을 걸친 채 그녀의 주군이 된 척 연극했다. 자신이 바라는 바였기에 그건 더욱 기꺼웠다. 


결국 그 모든 울타리에도 불구하고 끝내는 그녀가 인간계로 내려가게 되었을 때 제갈량은 자신 안에 숨겨져 있는 까닭도 영문도 모를 낙관주의가 또다시 흘러나오는 걸 느꼈다. 강력한 다른 신선들을 모두 놔두고서 굳이 그녀를 선택한 남자였다. 보는 눈이 있는 남자니, 잘 해낼 수 있을지 않을까. 그녀도 좋은 군주를 고른 것일 테다. 선계에서 자신을 찾아냈듯이.


하지만 마침내 그녀의 군주 앞에 그가 무릎 꿇게 되었던 날 제갈량은 달리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처음부터 자신이 그녀를 대신해 그의 신선이 되었다면 다른 결과가 있었을까. 아직 그녀는 선계에 남아 있었을까. 살아 있었을까.


그 어처구니없고 얄팍한 낙관주의는 그녀의 설탕과자처럼 산산히 부서졌고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녀는 왜 자신이 소멸할 위기에서도 도와달라고 하지 않았을까. 자신을 불렀다면 분명 그 목소리는 선계에서도 그의 귀에 들렸을 텐데. 인간계에 몰래 내려갔을 때에도 혼자서 어찌할 바 모르게 되면 언제나 그를 불렀던 서서였다. 그 목소리가 들렸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지상으로 내려갔을 텐데.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을 때에도 그를 불렀으면서 왜 그 때는.


그녀가 왜 부르지 않았는지는 알고 있었다. 배틀의 규칙을 어긴 신선은 다른 군주의 신선이 될 수 없다. 그렇게 서서는 다른 식으로 제갈량에게 부탁을 남겨놓았고 결국 그는 그녀의 부탁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소멸했다 해도, 죽었다고 해도. 그녀가 부탁한다면, 와달라고 한다면 제갈량은 정말……. 


*


그러니까 제갈량은 저 서서가 서서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서서에게만 향했던 어린애같은 낙관주의는 산산조각 났다. 소멸한 신선을 되살릴 방법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도, 만일의 가능성도 하찮기 그지없다는 것도, 때문에 저것은 진짜 되살아난 서서가 아니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서 저 서서가 그의 서서가 아니라고 확신한 것은 아니었다. 자신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와달라는 말도 그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부탁하지 않는다. 적에게 붙들린 상황에서 그를 보고도 도와 달라 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저 서서는 그의 서서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미 소멸한 신선을 되살릴 방법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저 서서가 서서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그런데도 군주를 구하기 위한 공격이 그녀가 아니라 군주와 그녀 사이에 떨어지고 만 건 그녀가 정말 서서와 똑같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서서와 같은 얼굴, 같은 눈매, 같은 입술을 하고 같은 목소리로 말을 한다. 달라진 건 검게 물든 옷뿐이었다. 그 모든 게 껍데기일 뿐이라는 건 잘 알고 있는데도 그리운 마음이 먼저 일었다. 왜 그림 한 장 남겨두지 않았는지 후회했었다. 그녀는 언제나 스스로의 소멸도 각오하고 있었는데 마음가짐이 얕았던 건 그녀가 아니라 자신이었다. 그렇게 볼 수 없었던 얼굴이, 그녀가 인간계로 내려가고 난 뒤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그 서서가, 그녀의 모습이 저기에 있었다. 


그래도 나는 너를 벨 것이다, 제갈량은 생각했다. 그것이 단지 서서의 껍데기를 빌어 썼을 뿐인 가짜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네가 도와달라고 하지 않으니까. 네가 도와달라고 말하기 전엔 해주지 않기로 약속했으니까. 네가 와달라고 내게 말하지 않았으니까. 그러니까. 


네가 도와 달라 부탁하지 않잖아. 나는 네가 부탁했던 것만 들어줄 거야. 넌 네 군주가 이길 수 있게 해 달라 했고 너는 지금 적이니 너를 이기겠다. 그러기 위해 너를 베어야 하니 너를 베겠다. 


그렇지만 그런 약속 따위, 하지 말걸 그랬구나…….


제갈량은 군주의 검에 스러지는 그녀의 허상을 보며 생각했다.


*


아아, 오랜만에 보는 너는 여전히 어찌나 아름다운지.


너를 마지막으로 다시 보여준 이 인간계는 어찌나 아름다운 곳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