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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화 스포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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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자욱한 공간이었다. 제갈량은 가만히 서있기만 했다. 아마도 자신이 잠이 든 모양이었다. 신선은 잠이 필요 없다고 말했지만 그의 군주가 계속 마음을 쓰기에 담요만 덮고 누웠다 생각했는데 정말로 잠이 든 것 같았다. 


’일어날까?’


인간인 그의 군주는 무척 다채로운 꿈을 꾸는 것 같지만 신선인 그의 꿈이란 이 어둠이 전부인 것이다. 그나마 아늑한 어둠인 것은 그가 인간계의 생활에 많이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필요 없는 것을 알면서도 담요를 덮고 누울 만큼. 


그 때였다.


“흑……. 흐윽…….”


어디선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제갈량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신선에게 오류는 있을지언정 ’무의식’의 세계란 없다. 모든 것은 이미 만들어져 있었고 프로그램대로 실행되었다. 그의 꿈이 아늑한 어둠인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그런데 이곳에 그가 모르는 울음소리가 있다. 까닭을 모르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제갈량은 서둘러 이 어둠 속을 헤맸다. 


한참이나 어둠 속을 헤매던 제갈량은 마침내 울음소리의 주인을 찾았다. 조금 떨어진 곳에 희미한 빛이 흐릿하게 감도는 곳이 있다. 거기에 누군가가 웅크리고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이 자욱한 어둠 속에서 구분하지 못할 만큼 새카만 옷을 입고 있는 여자였다. 제갈량은 그 웅크린 등만 보고서도 우는 이가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서서.”


동그랗게 몸을 말고 있던 작은 덩어리 같은 것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를 돌아본다. 보랏빛이 감도는 시선은 푹 젖어있었다. 눈물이 끝없이 흘러내린다. 검은 레이스로 감싸인 여자는 우는 소녀 같은 얼굴로 그를 보고 있었다.


“제갈량……흐윽.”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후두둑 떨어져 내리는데, 제갈량의 마음에서도 어떤 것들이 속절없이 부서졌다. 제갈량은 어쩔 수가 없어서 그녀의 맞은편으로 다가가 무릎을 대고 앉았다. 그를 보고서 서서가 앉은 채 조금 뒷걸음 질쳤다.


“서서.”

“흐, 흐윽, 나, 옷, 안 어울리지…….”

“……조금?”


어울린단 말은 해주고 싶지 않았다. 서서의 눈동자에서 눈물이 또 후두둑 흐른다. 제갈량은 한숨을 한 번 내쉬고는 성큼 다가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괜찮아. 안 어울려도.”

“그치만……그치만…….”

“…왜 여기서 울고 있었어.”


찬찬히 눈물을 닦아주었다. 많이 울었던 것인지 눈매가 붉다. 그녀의 오른쪽 눈매 아래로 보랏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제갈량은 한숨을 삼켰다. 왜 내 꿈에서 울고 있었어. 너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으면서.


“모르겠어, 자꾸만 눈물이 나서…….”

“나를 부르지 그랬어.”


나를 부르지 그랬어……. 네가 부른다면 그게 어디여도 나는 너를 위해 갔을 텐데. 그게 설령 나의 꿈속이어도. 왜 혼자서 울고 있었어. 하지 못한 말은 서서의 눈물에 녹아내렸다. 서서가 그를 올려다보며 눈물에 젖은 얼굴로 빙긋이 웃었다.


“그건 안 돼.”

“…왜.”

“소멸되고 난 이후엔 절대 제갈량 부르지 않게 잠금 걸어 놨으니까.”


한 번도 듣지 못한 이야기였다. 제갈량은 눈을 깜박이며 서서를 바라보았다. 서서는 금세 눈물을 그친 얼굴로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제갈량이 그랬잖아! 난 도구로 이용당할 거라고! 나는 바보니까.”

“…바보라곤 안 했어.”


서서는 제갈량의 말을 들은 척도 않고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그런데 내가 생각하기에도! 그럴 거 같았거든. 서서는 선계 꼴찌니까……. 신선마법도 제일 못했고 약하니까 어쩌면……. 무슨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서서가 자신에게 보내는 편지를 보았을 때 제갈량은 문자 그대로 폐부가 으깨어진다고 생각했다. 서서는 인간계로 내려가기로 마음먹은 그 순간부터 소멸을 각오하고 있었는데, 그 각오가 물렀던 것은 도리어 그였다. 자신에게 남긴 편지는 인간의 말을 빌리자면 그녀의 유서나 다름없었고 그런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제갈량은 상처받고 말았더랬다. 


그녀는 줄곧 자신이 사라지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왔던 것이다. 


“그래서 생각했거든. 누가 나를 도구로 이용할거라면 내 어디를 쓰려고 할까? 나는 선계 꼴찌인데……. 쓸 데도 없을 텐데.”


선계의 모든 신선들 가운데에 말석, 수련에는 흥미가 없고 관심을 둔 것은 인간계뿐인 천진난만한 소녀 같은 신선. 그녀에게 무슨 이용가치가 있겠는가. 할 수 있는 신선마법도 없고 남을 회유할만한 대단한 언변도 없는 그녀가. 


—하지만 단 한 사람.


“그래서 막~! 열심히 생각을 해보니까 제갈량! 제갈량이 딱 생각이 났어.”


그녀가 손을 내미는 것만으로도 마음 돌려줄 단 한 사람이 있다.


“서서는 제갈량하고 친하고, 제갈량은 착하니까……. 누가 나를 이용해서 제갈량을 괴롭힐지도 모른다고! 어때! 내 생각!”

“……그래서.”

“그래서~! 서서가 소멸되고 난 뒤에는! 어떻게 부활해도! 절~대 제갈량에겐 말 걸지 않게! 딱! 잠금을 걸어 놨다구. 내가 살면서 이렇게 열심히 프로그래밍 한 거 처음이었다?”


서서가 방긋이 웃었다. 언제 울었느냐는 듯이.


“그래서 성공했지?”

“……주군에게만 말을 건 게 그래서였어?”

“응! 유비님은 상냥하니까 내가 이렇게 해도 저렇게 해도 고민하실 것 같아서……. 그 때 제갈량이 짠! 하고 도와줘야지, 유비 님을!”

“……주군이 그렇게 좋아?”


서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왜 그런 걸 묻는지 모르겠다는 투였다. 


“제갈량도 좋아하잖아, 유비 님!”

“……서서.”

“응?”

“나는……나는, 너만 좋아하고 싶었어.”


한 번도 인간계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선계를 탐구하지도 않았다. 제갈량이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여 인간계와 선계에 다른 어떠한 빛도 없으리라 단언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선계의 신선들 중 그 누구보다도 우수한 제갈량이었기에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빛은 어디에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무엇도 둘러보지 않았다. 그에게 빛은 이미 있었다.


“나는 너만 있어줬으면 했어. 너만 좋아하고 싶었다. 너만 소중히 하고 싶었어.”


내게는 너만이 유일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이 마음은 모두 너에게 가 있다고, 다른 것들에게는 조금도 낭비하지 않았다고, 너만을 보고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완전무결한 것은 세상 어디에도 없고 무엇이든 시간이 지나면 바뀌고 변한다. 그가 환멸을 느끼는 선계의 시스템이 바뀔지도 모른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것이 지금 이 순간일수도 있다는 것 역시 알았지만 제갈량은 시도하지 않았다. 지금 그의 순간 그 모든 것으로 단 한가지만을 소중히 하고 싶었다. 파도 앞의 모래성 같은 세계 속에서 밀려오는 파도를 보며 방파제를 쌓자고도 할 수 있을 테고 성을 옮기자고 할 수도 있겠으나 제갈량은 그럴 시간과 마음과 힘 그 모든 것을 단 하나에만 쏟아 붓고 싶었다. 모든 것은 가능성의 파편에 불과했다. 같은 방향을 보는 것이 아니라 마주보고 싶었다. 차라리 밀려오는 파도를 보며 사랑으로 만든 모래성 속에서 천천히 매몰되어 가고 싶었다.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그러니까 제갈량, 결국 유비 님도 좋아졌다는 거지?”

“……너는 그런 바보 같은 남자 그 어디가 그렇게 맘에 들었던 거야.”


바보 같고, 순진하고, 터무니없는 소원을 가진 남자. 그 어디가 마음에 들었던 거야. 유비를 보며 울고 싶은 날이 있었다. 왜 저 남자를 지키기 위해서 서서 너는 소멸까지 각오했던 거야?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소중하지 않았어? 너에게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나? 네가 사라지고 나면 나는, 남은 나는 왜 조금도 생각해주지 않고…….


“왜냐니.”


서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그를 보다 활짝 웃었다.


“그야 유비님은 제갈량을 행복하게 해주실 테니까!”


아, 또다시 가슴의 어떤 것들이 뜯겨나간다. 제갈량은 울지도 못하는 얼굴로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서서, 내가 말했잖아. 나는 너와…….”


그녀와 함께 있는 것만이 그의 행복이었는데. 서서는 그런 제갈량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붙잡혔던 자신의 손을 빼내어 이번엔 그녀가 제갈량의 손을 잡았다.


“하지만 제갈량. 그건 행복이 아니야.”

“넌 나와 있는 게 행복하지 않았어?”

“난 내가 제갈량과 있는 것보다, 그런 것보다 더, 제갈량이 더 좋아. 더 많이 제갈량을 좋아해.”

“…….”

“너무 좋아해. 너무 너무, 너무 많이 좋아해서 계속 생각했어. 어떻게 해야 제갈량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지.”

“너만 있으면 됐다고 말했잖아!”


그녀의 생전에 좋아한다는 그 한마디가 고팠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서서는 무척 쉽게 말하곤 했다. 좋아해, 제갈량! 웃는 그 얼굴을 보며 무수히 많은 밤을 생각했다. 저 마음의 깊이가 얼마나 될지. 


이제야 생각한다. 깊이 같은 것이야 없어도 괜찮으니까, 좋아해주지 않아도 좋으니 있어만 주었으면 한다고. 그의 곁이 아니어도 좋다고. 어딘가에 있어주기만 해도. 


하지만 서서는 검은 레이스로 몸을 휘감은 채 빨갛게 부은 눈으로 웃으며 그를 보고 있었다. 


“뚜껑이 닫힌 세계에서.”

“……뭐?”

“우리가 있는 곳은 그랬잖아, 제갈량. 이렇게 유리병이 있으면……. 뚜껑이 꼭 닫혀있는 거야. 제갈량은 알고 있었지? 뚜껑을 열면 나갈 수 있다는 거.”


모를 리가 없었다. 선계에서 그 누구보다도 월등한 제갈량이 그걸 몰랐을 리가 없었다.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지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을 뿐이다. 그들은 뚜껑이 닫힌 유리병 안에 갇혀있었고 그걸 열기 위해선 어쩌면 가진 전부를 퍼부어야 할지도 몰랐다. 그러고서 무엇이 남는가? 가진 전부를 퍼부었는데도 열리지 않으면 그 땐? 


“나는 뚜껑을 열어주고 싶었어. 유비님이 열어주실 거라고 믿었어.”

“…….”


아아, 그리고 너는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지.


“그래서 유리병 바깥에는 이렇게 아름다운 걸로 가득 차 있다고, 말해주고 싶었어.”

“네가.”


내겐 네가 가장 아름답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입이 열리지 않았다. 제갈량은 서서가 자신의 눈을 쓸어가기에 울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갈량은 고집쟁이야.”

“……서서보단 아니야.”

“이것봐, 또 고집부리잖아!”


사실은 유비님이 좋지? 이제 좋아졌지? 서서가 장난치듯, 어린 아이 놀리는 듯한 목소리로 묻는다. 제갈량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단지 자신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신선을 위해서 그리고 영웅패들을 위해서 가진 모든 걸 쏟아 붓는 그를 보며 동시에 그의 안에서 서서를 본다. 처음부터 싫어할 수는 없었다.


어느덧 주위가 밝아지기 시작했다. 제갈량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서서를 바라보았다. 서서의 몸 주위가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사라지는 것 같았다. 서서가 웃는다. 제갈량은 그런 서서를 바라보다 고개를 떨어뜨렸다. 서서의 옷깃 위에 물자국이 뚝뚝 떨어졌다.


“나에게 말 걸지 못하게 해뒀다면서……거짓말쟁이.”

“아하하, 마지막에 쬐~끔 실패했나봐. 선계 꼴찌인 게 이렇게 티 나네.”

“…….”

“제갈량, 가족끼린 미안하다고 하는 거 아니래.”

“그런 게 어디 있어. 잘못했으면 사과해야지.”

“아이참, 제갈량!”


소녀 같은 목소리가 흐려지는 걸 알면서도 제갈량은 그녀를 놓지 못했다. 미안하다고 해. 나를 두고 가서 미안하다고 사과해. 나만 두고 가는 걸 사과 해. 마음속에 넘쳐나는 그의 말을 알기라도 하는 듯이 서서가 고개를 기울여 제갈량의 머리를 감싸 안았다.


“선계에 있었을 때 제갈량은 서서의 하나뿐인 가족이었으니까, 미안하다고 안 할게.”

“그럼 이젠 나만인 게 아니란 거네.”

“응! 유비님도, 관우도, 장비도, 조운도 모두 가족인걸? 제갈량에게도 그렇잖아?”


모르겠다고, 아직 모른다고 말을 하고 싶은데 서서는 자꾸만 흐려져 가기만 한다. 서서가 제갈량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모두와 가족이 되어서 잘 알게 됐어. 내가 제갈량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

“세상에서 제일 좋아해. 너무 좋아해서 제갈량이 행복하기만 바랐어.”


설령 내가 없더라도.


서서의 마지막 말이 흩어졌다. 


그의 세계가 환한 빛으로 물들었다. 


*


제갈량은 천천히 눈을 떴다. 가슴팍에 올려놓았던 손을 들어 뺨을 쓸어본다. 눈물은 그의 손에 닿았다가 천천히 증발했다. 몸을 일으키자 앞치마를 입고 있는 유비가 한 손에는 국자를 든 채 부엌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잘 잤냐며 조금 있다 간식을 해오겠다는 이야기를 하고 다시 부엌으로 들어간다. 제갈량은 아무 대답 하지 않고 소파에서 일어나 뒤뜰의 화단으로 향했다. 


서서가 씨앗을 심었다는 화단에는 꽃이 환히 피어있었다. 제갈량은 그 꽃을 가만히 내려다보다 빙긋이 웃었다. 


거센 파도는 모래성도 유리병도 모두 부수어버렸다. 모래성의 모래도 유리병의 조각들도 그 속에 있던 것들도 모두 파도에 뒤섞여, 이젠 그 파도가 그의 모래성이자 유리병이 되었다. 


“서서, 다음엔 내 씨앗도 곁에 심을게.”


그녀가 곁에 없어도 파도는 밀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