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쿠아카 | 썸머 웨이브 Summer Waves 샘플
140*210 | 약 200p | 16,000원 예정
+3~5편의 여름 이야기 단편이 들어갈 예정입니다!
+샘플은 추가될 수 있습니다.
+8월 서울 코믹월드 보쿠아카 소설본 신간
++샘플++
1. Wishing Star
맴맴맴맴
아카아시는 조그마한 휴대용 선풍기를 켜고 멀거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모터 돌아가는 작은 소리가 들린다. 그의 앞에 보쿠토가 눈을 데록데록 굴리며 계절에 어울리지 않게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보쿠토 선배.”
“으, 으응.”
“이번 여름에 뭐라고요?”
“바다 같이……같이 갑시다…….”
“이건 뭐라고 해요?”
“26점이요…….”
아카아시는 손에 든 성적표를 내려놓고 그 옆의 다른 것을 집어들었다. 요란한 가채점을 마친 시험지는 오랫동안 서랍 안에 방치되어 있어서 구깃구깃했고 습기 찬 종이 특유의 냄새까지 났다. 채점을 했던 붉은 색 잉크는 번진지 오래다. 아카아시는 그 시험지를 내려놓았다.
“이 시험지는 만점인 것 같은데요.”
“나도 그런 줄 알았어…….”
“그런데요.”
“답을…….”
“답을? 설마 밀려 썼다거나 그런…….”
“…….”
“겁니까.”
보쿠토가 고개를 들지 못한다. 아카아시는 기가 막혀서 말 없이 그 시험지를 쳐다보기만 했다.
하고 싶은 것만 하려고 드는 어린애, 보쿠토를 처음 본 사람들이 대개 하는 생각이었다. 그다지 틀린 생각은 아니다. 실제로 보쿠토는 그런 부분도 분명히 있으니까.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그런 그들이 모르는 면이 무엇이냐고 한다면 아카아시는 선뜻 말할 수 있었다. 보쿠토는 하고 싶은 것만 하려고 드는 사람이 아니다. 보쿠토는 하고 싶지 않은 것도 하려고 든다.
그 거대한 욕심 덩어리를 처음 마주했을 때는 그야말로 기가 질리고 말았다. 하고 싶다거나 하기 싫다거나 하는 것보다 앞서는 마음, 그건 해내고야 말겠다는 의지였다. 자신이 가려는 길에 방해가 되는 건 그게 자기 자신이라고 해도 걷어차고야 마는 사람이고 그래서 기어코 모든 걸 손아귀에 거머쥐고 마는 사람이었다, 보쿠토 코타로는.
그래서 아카아시는 ‘고등학교 공부는 지능지수가 아니라 의지와 암기력이다!’라는, 언뜻 듣기에는 길거리 전도사나 할 법한 이야기를 밀어붙이는 담임 교사의 말도 믿게 되고 말았던 것이다. 산 증인이 눈앞에 있기 때문에.
자기가 가려는 길을 막아서는 건 그게 자기 자신이라고 해도 못 견디는 게 보쿠토 코타로였고 그런 그의 사고 방식은 보쿠토의 일상을 온전히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보쿠토는, ‘낙제한 바람에 추가 시험을 봐야 해서 합숙에 참가하지 못하는 사태’같은 걸 염려하는 것에도 몸서리를 쳤다는 뜻이다.
이해가 되지 않으면 붙잡고 전부 외워서라도 시험을 치는데 그걸 보고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그런 덕분에 보쿠토의 성적은 어울리지 않을 만큼 제법 상위권이었다. 그런데도 이따금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영문인지 가늠도 할 수 없는 성적을 받아왔는데…….
참으로 그답게도 한 번 밀고 나가면 돌아보질 않아서, 이렇게 답안을 밀려 작성하거나 하면 수습할 엄두가 나지 않는 처참한 성적이 나와버리고 마는 것이다. 26점이나 나온 것도 시험 문제를 8번부터 밀려 썼기 때문이다. 7번까지는 전부 맞췄다는 말이다.
*
“뭐냐, 신젠고 2학년생~? 그새 실력이 늘었어? 콱 부셔버린다~!”
“후배한테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에엑.”
다른 학교 후배를 보며 놀리고 있던 보쿠토의 뒤로 아카아시가 지나가며 툭 말을 내던졌다. 그 틈에 얼굴이 허옇게 질린 다른 학교 후배가 후다닥 도망친다. 보쿠토가 울상을 지으며 아카아시를 돌아보았다.
“장난친 건데.”
“보쿠토 선배 무섭게 생기셨거든요.”
“나 무섭게 생겼어?”
“네.”
그야 지금처럼 징징거리는 얼굴은 전혀 무섭지 않았지만, 코트 맞은편에서 보는 저 얼굴은 매 순간 순간이 위압감 넘친다. 그런 상대에게서 부셔버린다느니 박살내버리겠다느니 그런 말을 들으면 속부터 쪼그라드는 것이 인지상정이었다.
2. Full Moon
보쿠토는 눈을 떴다. 한 밤중이어서 실내는 새카맣게 어둡기만 하다. 눈을 겨우겨우 떠서 시간을 확인했다. 협탁에 놓아둔 전자시계가 새벽 2시 34분을 가리키고 있다. 몸이 홧홧하고 공기가 뜨끈했다. 가슴팍을 쓸어내리자 땀이 묻어난다. 보쿠토는 손을 휘저어 멀찍이 있는 에어컨의 리모콘을 붙잡고 급히 삑삑거렸다.
“더워…….”
잘 때는 분명히 에어컨을 켜놓고 잤는데 지금은 발치에 닿는 조금 식은 공기만이 냉풍의 잔재를 알려주고 있었다. 슬리퍼를 대충 꿰어 신고 부엌까지 향해 냉수를 콸콸 들이킨 보쿠토는 에어컨의 희망 온도를 가차없이 낮추었다.
“더워어어.”
천장에 매달린 흰 기계에서 삑삑거리는 소리가 난다. 날개가 움직이며 플라스틱이 스쳐 나는 소리도 들렸다. 보쿠토는 침대의 발치에 에어컨 리모콘을 내던지고는 풀썩 침대로 몸을 돌렸다. 여름의 열기가 남아있는 침대가 은은한 불쾌함을 불러온다.
하지만 그가 세 번쯤 뒤척일 동안에도 냉기는 와닿지 않았다. 베개에 엎어져있던 보쿠토는 잠시 침묵했다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 에어컨을 바라본다. 에어컨의 송풍구 날개는 이리저리 움직이는데 바람은 조금도 불어오지 않았다.
“뭐야…….”
잠이 서서히 깬다.
보쿠토는 침을 꿀꺽 삼키곤 다급하게 침대 위를 더듬어 방금 전 내던졌던 에어컨의 리모콘을 찾았다. 무릎까지 꿇고 앉아서 양손으로 에어컨을 조작해본다. 리모콘의 액정에 뜨는 희망온도는 18도였고 그 숫자는 그가 올리면 올리는 대로, 내리면 내리는 대로 이리저리 움직였지만 천장 위의 하얀 기계는 의미 없이 날개만 까딱거릴뿐 찬바람을 토해내지는 않았다.
“아, 안 돼.”
이럴 수는 없어, 안돼, 에어컨님, 제발, 안 돼요, 보쿠토는 간절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리모콘의 버튼을 차례대로 눌러보았다. 제습, 냉방, 파워냉방, 송풍, 다시 제습, 냉방…….
에어컨의 플라스틱 날개가 끼릭거리는 기묘한 침묵 속에서 보쿠토의 손에 있던 리모콘이 침대 위로 툭 하고 떨어지는 소리만 울려퍼졌다.
그렇게 한참을 굳은 자세로 있던 보쿠토는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이 이 여름밤 속에서 불가해하게 빛나고 있었다.
“에어컨이 고장났으니까…….”
어쩔 수 없지?
보쿠토는 트렁크 위에 품이 넉넉한 반바지와 티셔츠 하나를 후다닥 걸치고는 휴대전화와 지갑만 챙겨들었다. 잠깐 고민하다가 자동차 열쇠까지 마지막으로 챙긴다. 신발장에서 슬립온에 발을 집어넣는 보쿠토의 표정은 이제 웃음꽃이 완연해 있었다.
곧잘 차가운 표정을 짓곤 하는 그의 하나뿐인 후배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달리면 내치질 못하는 성미였다. 에어컨이 고장났다며 칭얼거리면 한숨을 내쉬면서도 자신의 자취방에 그를 들여놓아 줄 터였다. 그게 이 새벽이라고 해도.
*
보쿠토가 아카아시의 자취방이 있는 빌라 앞에 차를 댈 때까지만 해도, 보쿠토는 희망과 행복에 가득 차 있었다.
에어컨은 고장 났고 이 한여름에 그걸 고치려면 못해도 일주일은 기다려야 수리 기사가 오겠지만 그건 달리 말해 일주일이나 아카아시의 자취방에 부빌 기회라는 뜻이기도 했다. 한낮에는 10분이 뭐냐, 5분만 서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 계절에 에어컨이 고장 난 자취방으로 밀어 넣을 만큼 매몰찬 후배는 아니었다. 물론 자취방에 가질 못하면 근처 호텔로 가도 되는 일이지만 절대 그 쪽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않을 참이다.
빌라 건물 2층으로 올라갈 때까지만 해도 즐거웠다. 희희낙락했다는 말이 더욱 옳을 것이다. 쳐들어가니까 숙박비라고 해야 할지 선물이랍시고 사들고 온 맥주와 안주거리가 잘그랑잘그랑 소리를 냈다. 보쿠토는 자동차 열쇠를 던졌다 받았다 하며 계단을 올라갔다. 새벽이라 고요했기에 콧노래만은 꾹 참았다. 그런데 그가 2층에 채 다다르기도 전에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조심히 들어가.”
“타카히로도 와있는걸, 걱정 마. 남은 거 부탁할게 그럼.”
곧 다시 문이 닫히고 또각또각 하는 구두 소리가 난다. 긴 머리를 허리까지 굽이치게 늘어뜨린 여자는 풍성한 스커트에 검지 손가락만한 힐을 신고 있었다.
3. Summer Wave
“아카아시! 이것봐라~! 이 애가 아이스크림 줬어!”
작열하는 태양 아래, 눈부신 모래 위에서 해맑게 웃고있는 보쿠토는 위도 아래도 바닷물에 흠뻑 젖은 채였다. 그 손에 하얀 소프트콘이 들려있다. 그의 곁에는 보쿠토의 허리에도 닿지 않을 어린애가 우쭐한 표정으로 아카아시를 바라보고 있었다.
겨우 겨우 웃는 낯을 만들어 낯선 휴양객에게 휴대전화를 빌려서 경찰서에 연락을 마치고 돌아온 차였던 아카아시는 이 상황에 무슨 말을 해야할지 가늠도 하지 못했다.
“…….”
“와, 이거 진짜 맛있다! 아카아시도 한 입 먹어!”
“…….”
아카아시는 와락 입안에 밀려 들어오는 하얀 아이스크림을 한 입 삼킬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 보쿠토는 곁의 어린애와 신나게 노느라 모래를 박차며 해변가를 뛰어다닌다. 아카아시는 황망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지금…….’
왜 낯선 사람에게 휴대전화를 빌려야만 했던가. 보쿠토는 왜 저기서 미취학아동에게 아이스크림을 얻어먹고 있는가.
첫 번째, 그건 지금 두 사람 모두 휴대전화가 먹통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야 전자기기를 바닷물에 담그면 깨끗하게 먹통이 되기 마련이다. 물론 아카아시는 그렇게 될 거라고 생각해서 전자기기를 담아둘 수 있는 방수팩도 구매했었다. 그리고 그건 두 사람의 짐가방에 들어가 있었다. 휴대하지 않았던 건 숙소를 찾아가기도 전에 바다부터 들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고 그 찰나의 방심이 두 사람의 휴대전화를 모두 앗아갔다.
두 번째, 휴대전화가 고장나는 사이에 그들의 지갑도 바닷물에 떠밀려갔고 덕분에 두 사람은 빈털털이였다. 한 여름의 바다는 파도부터 격렬했고 그들이 정신없이 물장구를 치다가 모래사장에 섰을 때 품에 남은 건 물을 먹어 전원도 들어오지 않는 휴대전화 뿐이었다. 학교 락커의 열쇠까지 없어졌지만 그건 도리어 사소한 일이다. 지금은 보쿠토의 주머니에서 나온 100엔이 그들이 가진 전 재산이었다.
그리고 그게 전 재산이 된 건 해변에 놓아두었던 그들의 짐가방을 고스란히 도둑맞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걸 찾기 위해 경찰서에 전화를 하고 오는 길이었는데 보쿠토는 해맑게 웃으며 어린애와 함께 해변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한 손에는 그 어린애가 사주었다는 아이스크림 콘을 들고서.
아카아시는 백사장의 파도소리도 갈매기의 울음소리도 매미가 울어대는 소리도 멀게만 들려서, 자신의 발치를 덮치는 파도도 큰 소리로 웃고 있는 보쿠토도 멀거니 바라보기만 했다.
*
보통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짐을 풀고 어딘가에 앉아 쉬거나 할 텐데 풀 짐은 잃어버렸고 몸은 소금물에 흠뻑 절여져서 무엇도 할 수가 없었다. 잠시 밖을 내려다보던 아카아시는 재채기를 시작한 보쿠토부터 욕실로 밀어 넣었다. 보쿠토가 들어가면서도 같이 샤워하자고 칭얼거렸지만 못 들은 척했다.
‘이제 어쩌지? 진짜 어쩌지? 어떡하지?’
솔직히 말해서, 바닷가에서 그 짐을 전부 분실하고도 새 방을 잡은 것까지도 기적 같았다. 아니, 기적이 분명하다. 어딘가에서 무언가가 그가 모르는 신의 손 같은 게 작용한 게 틀림없었다.
그러면 앞으로는 어쩐단 말인가? 자신이야 어떻게 허기를 참는다고 쳐도 보쿠토는 어찌하나? 저 사람은 연비가 말하자면 최고급 외제차와 같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걸어가기만 해도 1초에 50엔씩 팅, 팅 나가는 식으로 칼로리를 소모해댔다. 즉 뭐라도 먹여주지 않으면 당장 어떻게 될지 모른다.
그런데 두 사람의 전 재산은 100엔.
‘보쿠토 선배로 치면 고작 2초분…….’
4. Star Flood
비가 오는 기세가 심상치가 않다.
아카아시는 보쿠토의 빌라에 방문했다가 비가 쏟아지기 시작해서, 오늘 하룻밤은 자고 가기로 일정을 바꾸었다. 어차피 공부하는데 필요한 짐은 모두 챙겨온 차였다.
“으아, 비 쏟아지네.”
지하 주차장에 대어놓은 자신의 차에서 아카아시의 짐을 모두 가져온 보쿠토가 아카아시에게 짐을 넘겨주며 에어컨 밑으로 달려간다. 잠깐 사이에도 습기찬 공기가 끈적하게 달라붙는 게 싫었던 모양이었다.
“제가 갔다 온다니까요.”
“아카아시는 공부해야지!”
금방 습기를 날려보낸 보쿠토가 아카아시에게 불쑥 다가와 그의 허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아카아시는 알만하다는 표정으로 보쿠토의 이마를 튕겨냈다. 오래한 시간이 길어지고 거리는 얕아진다. 보쿠토는 이마를 감싸며 불퉁한 표정을 지었다.
“아카아시!”
“새 차가 그렇게 좋습니까?”
“……에헤헤…….”
투정을 부리는 것 같은 표정이었던 얼굴이 금방 생일 선물을 받은 천진한 소년처럼 변한다. 아카아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번 봄에 졸업을 한 보쿠토는 곧장 선수로 뛰기 시작했다. 그러고 몇 달 지나지 않았을 때 보쿠토는 동료 선수가 새 차를 구매한 걸 보고서 눈빛이 변해서는 아카아시에게 달려왔더랬다. 대학 때에도 차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건 부모님이 주신 것이고, 자신이 번 돈으로 직접 차를 사고 싶다는 것이었다.
아카아시는 특별히 반대하지 않았다. 보쿠토의 수입을 생각했을 때 자동차 정도야 부담되는 정도에 미치지도 못했다. 다만 지금은 시기가 시기이다 보니, 장마철은 넘기고 신차를 구매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만류했을 따름이다.
물론 보쿠토는 그 만류를 듣지 않았다. 갖고 싶은 차는 여름 지나서 나올 신차가 아니라 눈앞에 있는 저 차였고 장마철을 넘기나 마나 저 차는 똑같다는 게 보쿠토의 요지였다. 그 고집에 누가 이기랴, 아카아시는 마음대로 하라고 했고 보쿠토는 곧장 차를 끌고 왔다. 그게 며칠 전의 일이었다.
보쿠토는 틈만 나면 자신의 애마(?)를 보고 흡족해하기 바빴다. 그 전에 몰던 차는 누가 옆을 긁고 가도 전혀 신경 쓰지 않더니 이 차는 보행자가 근처를 걸어가기만 해도 촉각을 곤두세웠다. 지금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굳이 차에 두었던 아카아시의 짐을 가지러 내려간 것도 이참에 자기 차를 한 번 더 보려고 그러는 것이다.
‘저 사람이 저러기도 하네.’
예전부터 물건에는 별다른 집착이 없던 게 보쿠토다. 그도 그럴 법한 게, 부서지면 새로 사면 되고 망가지면 새로 사면 되고 없어져도 새로 사면 되는 사람이니 물건에 매달릴 일이 없다.
그런 사람이 뭔가 하나에 좋다고 매달려서 저렇게 애지중지하는 건 처음 보는 일이었다. 아카아시는 책상 앞 의자에 앉아 등받이를 기울이며 현관을 흘끗 쳐다보았다가 다시 책상 위의 논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자신이 직접 산 자동차가 좋아서 매 시간마다 흘끗거리는 보쿠토를 보는 건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
아카아시는 빗방울이 창을 때리는 소리에 어렴풋이 눈을 떴다. 얇은 커튼을 통과해 빗방울이 그리는 밤의 그림자가 두 사람 위에 얼룩을 그리고 있었다.
‘비가 많이 오네…….’
낮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는 밤이 되어도 쉬지 않고 쏟아붓는 중이었다.
옆을 흘끗 보자 보쿠토는 자신의 허리를 끌어안고서 정신없이 꿈나라를 헤매고 있다. 에어컨의 찬공기에도 굴하지 않는 뜨끈한 체온이 그를 감싸고 있었다. 아카아시는 눈을 감으며 얇은 이불을 끌어와 보쿠토의 어깨에 둘러주었다.
*
여자는 빗방울에 젖은 어깨를 털어내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보니까 밤새 비가 엄청 와서요, 지하주차장에 물이 찼나 봐요. 보니까 지상까지 꽉 찼던데. 저는 차가 없어서 괜찮은데…….”
여자는 바깥이 너무 시끄럽기에 나가봤더니 그런 얘기였더라며 빌라의 차주들을 향해 동정을 표하곤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아카아시는 그대로 문도 닫지 못한 채 뻣뻣하게 굳고 말았다.
“아카아시?”
집안에서 보쿠토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린다. 아카아시는 천천히 문을 닫고 몸을 돌렸다. 어깨에 수건을 두른 보쿠토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5. Sun Flare
아카아시는 부 일지를 정리하다가 문득 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거기엔 3학년 선배 두 사람이 열심히 손가락 씨름에 열중하고 있었다.
논리는 이런 식이다. 부 일지는 어차피 한 사람이 써야 한다. 그야 그네들 양손이면 전부 가리고도 남는 작은 노트 한 권을 몇 명이나 달라붙어서 쓸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면 그들 중 누가 쓰는가? 물론 보통은 주장이 할 일이겠으나 그들의 주장이란 바로 저 보쿠토 코타로였다. 제멋대로 치켜세운 머리카락에 언뜻 보면 무섭게 보일 만큼 맹렬한 금빛 눈동자, 그리고 그에 걸맞은 대담한 필체의 소유자!
그래서 또한 이어지는 논리도 이런 식이었다. 저 보쿠토가 부 일지를 어떻게 쓰든 누군가는 그걸 고쳐 써야 한다는 것, 그러면 그걸 누가 고쳐 쓰겠는가? 부주장인 아카아시 아니겠는가. 그럴 바에야 아카아시가 처음부터 부 일지를 작성하고, 주장은 그런 아카아시를 기다렸다가 함께 돌아가면 서로 모두 공평한 것 아니겠나!
아카아시는 그 주장에 몹시 강력한 맹점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선배들의 체면을 생각해 입을 다물고 잠자코 일지 기입이라는 역할을 받아들였다. 내년에는 기필코 무슨 일이 있어도 일지 작성을 부주장에게 미룰 거라고 다짐하면서 말이다.
그래서 아카아시가 지금 이렇게 일지를 기입하는 동안 주장인 보쿠토와 3학년 중 한 사람인 코노하는 그를 기다려주며 신명나게 손가락 씨름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카아시는 괜히 심통이 나 그런 두 사람을 뚱하니 쳐다보았지만 둘은 아카아시가 쳐다보는 줄도 모르고서 손을 잡고 씨름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다가 기어코 두 사람 사이에 힘의 균형이 깨어져 둘이 바닥을 굴렀을 때야 아카아시는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일지로 고개를 돌렸다.
“아야야…….”
“아우, 아파…….”
“어쨌든 내가 이겼다? 보쿠토 아이스크림 쏘기~!”
“우씨.”
보쿠토는 분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건 손가락 씨름으로 내기를 걸었던 아이스크림 때문이 아니라 순수하게 경쟁에서 졌기 때문이다. 아카아시는 고개를 내젓고는 일지를 덮었다. 두 사람이 곧 다 끝났냐며 반색을 하며 돌아보았다. 아카아시는 고개를 끄덕이며 가방을 챙겨들었다.
여느 평범한 나날이었다.
*
작년, 자신이 1학년이고 보쿠토가 2학년일 때는 정말로 무언가를 해주어야 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올해에 하는 것처럼 작년에도 똑같이 모두가 돈을 걷어 생일케이크를 사고 축하해주기도 했거니와 작년에는 따로 생일 선물을 줄 사이도 되지 않았다. 그 때까지 말이나 몇 번 해 봤을까? 후쿠로다니 배구부는 부원들도 아주 많았고, 보쿠토는 2학년이면서도 주전으로 뛰고 있었다. 1학년이었을 때에도 몇 번이나 경기에 출전했던 실력자였던 보쿠토는 그가 2학년이었을 때에도 장차 에이스라는 호칭에서 ‘장차’라는 말이 생략될 때가 많았다.
그런 보쿠토와 일개 1학년 부원이 무슨 말을 얼마나 해보았겠는가. 보쿠토와 친해진 건 봄고를 거치면서였다. 보쿠토는 작년 겨울 그의 생일에 아주 그럴듯한 생일 선문을 해주었었다. 이번엔 받았던 걸 갚고 싶었다.
“하…….”
그런데 마땅한 것이 없다. 아카아시는 자신의 머리를 거칠게 헤집었다. 고등학생의 용돈 수준이나 이런 걸 넘어서서, 보쿠토는 일단 갖고 싶은 것이나 필요한 게 없었다.
엄밀히 말해서 가지지 않은 갖고 싶은 물건이 없고 소유하지 않은 필요한 물건이 없다. 개구진 동네 골목대장이나 할 것처럼 매일같이 기세등등하게 뛰어다니는 보쿠토였지만 사실 대단히 유복한 집안의 도련님인지라, 갖고 싶으면 그냥 가졌고 필요한 건 당연히 있어서 옆에서 무언가 해줄 만한 게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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