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이라고도 하고, 초겨울이라고도 하는 날이었다. 아카아시는 초겨울이라는 말이 차라리 낫다고 생각했다. 늦가을이라는 말은 너무 쓸쓸하게 들려서.
새벽 4시, 퇴근하고 돌아가던 아카아시는 집으로 향하는 골목에 기대어있는 건장한 그림자를 보고 잠시 걸음을 멈춰세웠다. 걸치고 있는 건 고급정장이었는데 다 구겨져있었고 넥타이도 풀어져 목에 걸쳐놓은 것이 고작이었다. 새벽인데다가 골목 구석에 그림자까지 드리워져있어 안색은 확인할 수 없었지만 잔뜩 술이 된 것만은 분명했다. 아카아시는 어깨를 으쓱하곤 갈길을 재촉했다. 오늘 손님은 대단히 그를 피곤하게 했다. 뿌리치는 것이 일이었다. 빨리 집에가서 쉬고 싶다.
한 블럭쯤 지나갔을 때 아카아시는 깊은 한숨과 함께 몸을 돌려세웠다. 동료들이 비난의 색을 섞어서 말하곤 했던 그의 무른 성정 탓이었다.
“이보세요.”
으슥한 골목길, 건물의 벽에 아무렇게나 기대어있는 남자는 척봐도 만취상태였다. 아카아시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11월. 부쩍 가까워진 겨울 공기에 뽀얀 구름같은 입김이 서렸다가 흐트러진다. 저기요. 여기서 주무시면 죽어요.
“택시 태워드릴게요. 정신 좀 차려봐요. 여보세요.”
“느아아, 더, 마실 수 있, 슴다아아-!”
갑자기 남자가 벌떡 일어나더니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외친다. 아카아시는 깜짝 놀라서 눈을 깜박거렸다. 벽에 기대어 웅크리고 있을 때에도 작은 키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남자치고도 큰 편인 아카아시보다도 조금 더 컸다. 키는 조금 더 큰데 몸집은 두배쯤인 것 같았다. 선명한 금색 눈동자가 번뜩거렸다가 다시 술기운에 잠식당해 흐려졌다.
“더 마시면 죽습니다……. 집이 어디세요.”
“집? 집~! 우리집!”
“…….”
주정뱅이와 대화를 시도하다니, 이쪽이 어리석었다. 아카아시는 피곤 탓에 지끈거리는 이마를 꾹꾹 눌렀다. 남자는 일어서있긴 했지만 몸은 비틀거리고 있었고 그가 묻는 말에는 도통 대답할 기색이 아니었다. 아카아시는 남자를 부축하며 자연스럽게 품을 뒤졌다. 지갑이나 휴대전화. 지인에게 연락할 참이었다. 하다못해 주소라도 물어보면 되겠지. 하지만 아무리 뒤져도 휴대전화는 보이지 않았고 안주머니엔 지갑이 아니라 목걸이형 카드택이 들어있었다.
카드택 안에는 신용카드 한 장, 사원증 한 장, 그리고 아마도 애용하는 카페의 쿠폰이 한 장 이렇게 세 장 뿐이었다. 사원증 속에 남자는 활짝 웃고 있었다. 이름, 보쿠토 코타로…….
“……쓸모 있는 게 없군.”
날씨만 좀 따뜻했어도 그냥 두고 가는 건데. 아카아시는 남자를 부축하느라 엉망으로 흘러내린 머플러를 겨우 추스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남자는 노래를 흥얼거리다가 이제는 다시 그의 팔에 걸친 채 맥을 못 추고 있었다.
“정신 차려서 걷기라도 좀 하세요.”
“흐어어어…….”
도대체 이 미련한 게 무슨 짓인가, 아카아시는 한탄했다. 하지만 낯선 사람의 다정함으로 한 번 구원받은 적이 있었던 아카아시에게 이건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이었다.
“하아.”
아카아시의 깊은 한숨이 울려퍼졌다.
*
“으와아아아악!”
아카아시가 눈을 뜬 건 실내를 쩌렁쩌렁 울리는 비명소리를 듣고서였다. 그 비명은 바로 귓전에서 들렸다. 아카아시는 머리가 띵하고 아파와 미간을 짚으며 눈을 가늘게 떴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이게.”
그리고 당장 눈 앞에 펼쳐진 풍경에는, 아무리 아카아시라도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그가 혼자 쓰기에 조금 넉넉한 크기였던 침대가 꽉 차있다. 키가 180을 훌쩍 넘는 남자가 둘이나 누워있으니 그렇다. 남자의 얼굴이 거의 코앞에 있었다. 아카아시는 여기서부터 당황했다. 어째서?
눈 앞에서 대차게 비명을 지른 사람은 분명 그가 어제 어찌어찌 부축을 해 집으로 데려온 사람이었다. 조그만 2인용 소파에는 어디에도 앉힐 수가 없어서 바닥에 담요를 깔고 뉘어두었는데 어째서 여기에 있지? 상의는 왜 또 벗고 있고?
“어, 어, 어, 어떻게!”
“……어젯밤에…….”
아카아시는 일단 침대에 팔을 짚고 일어서서 벽이 있는 뒤로 물러서며 지끈거리는 이마를 꾹 눌렀다. 사람 하나가 침대로 올라올 때까지 눈치도 채지 못하고 자버린 모양이었다. 어쨌든 어젯밤에 그 쪽이 술에 취해 길에 쓰러져 있었습니다, 라고 알려주려고 했다. 그러나 그가 ‘어젯밤’이라고까지 말 했을때, 남자가 말 그대로 눈 앞에서 폭탄이라도 터진 것처럼 퍼드득 놀라 허우적거리더니 온 몸에 이불을 감고서 그대로 침대 바깥으로 떨어졌다.
쿵!
아카아시는 듣기만 해도 아픈 소리에 미간을 모으곤 몸을 움직여 침대 아랫쪽을 내려다보았다. 건장한 체구에 어울리지 않게 사색이 된 남자가 떨리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안 아프십니까……?”
아카아시가 물었지만 남자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서, 설마. 내, 내가.”
“네, 그러니까 어젯밤에 술에 취하셔서…….”
“으아아아아악!”
옆집에서 찾아오는 거 아닌가 몰라. 아카아시는 대뜸 남자의 입에서 터진 비명소리에 한숨을 삼키며 생각했다. 남자의 표정은 총천연색이었다. 소리라도 날 것처럼 새빨개졌다가 새파래졌다가, 납빛이 되었다가 창백해졌다가 하기 바빴다. 무지개를 이리저리 비추는 것 같았다.
“몸은 괜찮습니까?”
어제 사람이 인사불성이 되도록 술을 마셨으니 숙취도 상당할텐데. 아카아시가 미약한 염려를 담아 쳐다보는데 남자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르르 빠져나간다. 그리고 남자는 이불이 몸에 반쯤 걸쳐져 엉망인 채로, 바지 버클은 반쯤 풀려있고 상의는 온데간데 없는 그대로 대뜸 침대 위에 앉아있는 아카아시를 향해 무릎을 꿇고서 냅다 고개를 푹 숙였다.
“미, 미, 미안! 미안해!”
“어……. 괜찮습니다. 좀 힘들긴 했지만…….”
운동을 그만두고 가벼운 스트레칭과 조깅 정도밖에 하지 않게된 아카아시로서는 저만한 체구를 끌고 오피스텔까지 돌아오는 것이 정말 농담이 아니라 혼이 쏙 빠져나갈만큼 힘들었다. 정신을 놓은 사람이 가장 무겁다는 말을 실감한 때이기도 했다. 겨우 남자를 눕혀놓고, 씻고, 피곤에 절어 잠이 들었다가 비명소리에 깬 것이 막방금이었다.
“진짜 미안! 정말정말 미안!”
남자가 고개를 들 줄을 모른다. 아카아시는 뺨을 긁적였다. 이렇게 양식있는 반응이 나올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남자가 정말로 어쩔 줄을 모른다. 아카아시는 그 태도에서마저 힘이 펄펄 넘치는 남자를 보며 실없이 경탄했다. 체력 대단하네.
“아뇨, 뭐……. 그럴 수도 있죠. 겉옷은 소파에 걸쳐뒀으니 적당히 씻으시고…….”
“그, 그럴 수도 있다니!”
씻고 챙겨서 가시면 된다고 말하려고 했던 아카아시는 눈을 깜박 떴다. 남자가 번쩍 고개를 들고서 그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내, 내가 이런 말 할 입장은 아니지만! 그러면 안 돼!”
“네, 그런 얘기는 많이 듣습니다만…….”
약한 사람을 보면 지나치질 못하는 무른 동정심, 동료들은 그런 그를 걱정하기도 했고 비난하기도 했다. 칼같이 내칠 것처럼 생겨서는 맺고 끊는 것이 명확하지 못하다며.
“뭐어?”
“네……?”
“아, 안 돼! 하여튼 안 돼!”
남자가 벌떡 일어섰다. 침대 위에 재웃이 앉아있던 아카아시로서는 훌쩍 높은 곳에 다다른 남자가 아카아시의 어깨를 붙잡고 그를 흔들었다.
“안 된다면 안 돼!”
“…….”
“그, 그. 그러니까. 내가 실수 했으니까! 내가 책임질게! 앞으로는 아무하고나 그러면 아, 안 돼!”
아카아시는 대화가 이 모양이 되어서야, 둘 사이에 형용할 수 없는 기막힌 오해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저기.”
“난 보쿠토 코타로! 그……. 어……. 코, 코타로라고 불러야…되겠지…….”
어깨를 붙잡은 손에서 느껴질 만큼 확 하고 열이 오른 목소리였다. 아카아시는 덧없이 입술을 벌렸다가 한숨을 내쉰 다음 천천히 그의 팔을 떼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