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른 전력 - 3 post
- 이와오이 | 발렌타인 데이1 2016.02.14
- 이와오이| 고백6 2016.01.03
- 이와오이| 여름의 승리를2 2015.12.27
이와오이 | 발렌타인 데이
-오이른 전력 주제 : 소문
이와이즈미가 정중하지만 단호한 표정으로 대답한다. 그 표정에는 충분히 미안하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상대는 잠시 말이 없다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긴장으로 굳은 얼굴이 까닭을 알지 못해 헤매고 있었다. 이와이즈미는 잠시 말이 없다가 대답했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서.”
“아…….”
탄식 같은 소리를 흘렸던 여학생의 눈동자 위로 금방 눈물방울이 차올랐다. 이와이즈미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가 고개를 꾸벅 떨어뜨렸다. 미안. 거듭된 사과의 말이 오히려 상처였을까, 여학생은 고개를 흔들고는 빠르게 몸을 돌려 그의 앞에서 도망치듯 사라졌다. 이와이즈미는 말 없이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마른 입술을 다시며 한숨을 내쉬었다.
발렌타인 데이였다.
*
이와이즈미는 부실 밖에서부터 들려오는 웅성거림에 혀를 찼다. 일년에 한 번 있는 날이라도 매해 이렇게 난리 법석이면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역시나, 문이 열리자마자 단내가 퍼지듯 덮쳐왔다.
“선배, 올해도 굉장하네요…….”
“그, 글쎄. 일단 이거 좀 잡, 으아아!”
얼굴을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무언가를 껴안고 들어오던 오이카와가 결국엔 뭔가를 놓쳤는지 부실 바닥 위로 들고 있던 걸 쏟고 말았다. 자잘한 종이 상자 같은 것이 우르르 퍼져나간다. 달콤한 향기가 한층 더 진해졌다. 저지를 찾아 걸치던 이와이즈미는 혀를 찼다.
“하여튼…….”
“이, 이와쨩. 좀 도와줘!”
바닥에 앉아서 겨우 수습을 하던 오이카와가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그를 올려다본다. 이와이즈미는 눈살을 찌푸리고선 산더미같은 초콜릿을 바라보기만 했다.
겉으로 보기에 무게가 없어 보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의외로 부활동 외의 친교에는 연약하게 군 탓인지, 오이카와에게 진심으로 부딪혀 오는 상대는 드물어 모두들 그가 절벽위의 꽃이라도 되는 양 굴었고 저 산더미같은 초콜렛이 그 사실의 증거였다.
“아, 큰일났네…….”
사물함 아래에까지 굴러간 초콜렛도 수습해 겨우 정리하는데 오이카와가 곤란한 표정으로 초콜렛 더미를 내려다보며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정리를 함께 도와준 후배가 무슨 일이냐는 표정이 된다. 오이카와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머쓱하게 웃고는 손을 내저었다. 후배들이 부실을 나가고 나서야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를 바라보았다.
“뭔데?”
“다 섞였어. 나눠먹어도 되는 거랑 안 되는 거 구분해 뒀거든, 애들도 주려고…….”
“뭔 기준으로.”
“어, 그러니까 우정초코……? 나눠먹어도 된다고 말해준 거랑 아닌 걸로.”
그랬는데 다 섞여버렸네. 오이카와가 뺨을 매만지며 곤란한 표정으로 말한다. 이와이즈미는 저 초콜렛 더미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매해 받아온 걸 어쩌지 못하고 곤욕스러워하더니 올해만은 수를 쓴 것 같았다. 다 무산되기는 했지만.
오이카와는 의식의 모든 걸 단 하나에만 쏟고 있었는데 그게 바로 배구였다. 애정도 끈기도 집중력도 모두 그 하나, 그래서 그걸 제외한 다른 것들에겐 터무니없이 무르곤 했다. 가령 그를 향해 오는 꽃잎같은 마음과 말들이라거나.
‘그래도 이렇게 밤새 직접 만들었다는걸, 어떻게 거절을 해…….’
시라토리자와로 오라는 권유는 칼같다 못해 냉랭하게 걷어차더니, 누가 뭔가 주는 것 앞에서는 봄날 마지막 눈마냥 흐물흐물 녹았다. 혹자는 왕자님다운 상냥함이라고 일컬었으나 이와이즈미만은 알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그런 곳까지 쓸 단호함이 남아있지 않은 것이다.
“어쩌려고.”
“어쩌긴, 집에 가져가서 먹어야지. 흐아…….”
오이카와가 어색하니 웃더니 금방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와 벌써 짠게 먹고싶다는 이야기를 하며 옷을 갈아입었다. 이와이즈미는 말없이 그 초콜렛 더미를 바라만 보았다.
*
오이카와와 이와이즈미는 서로가 지나치게 가깝기 때문에, 되레 교내에서 상대에 대한 소문에는 느리고 둔했다. 으레 둘 다 알고 있으리라 여겨서 학교의 사람들이 당사자들에겐 상대에 대한 얘기를 드문히 하는 탓이었다.
“에, 에엑? 진짜?”
오후 연습을 다 끝냈을 때였다. 누군가가 이와이즈미에게 말을 걸었다. 선배, 오늘 발렌타인 초콜렛 다 거절하셨다면서요. 오로지 오이카와에게만 매몰찰 뿐인 이와이즈미였으므로 후배들에게 인망은 두터워 그의 일은 금방 뜨겁게 화제가 되었다. 그리고 그 중에 누군가가 말했다.
-선배, 좋아하는 사람 있으시다고!
말 한 마디로 체육관 안의 시선이 모조리 이와이즈미에게로 쏠렸다. 그 박력은 이와이즈미도 움찔할 정도였다. 그리고 그 선봉장에 오이카와가 있었다. 오이카와는 생전 처음 듣는 얘기라는 표정이었다.
“이와쨩,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어?”
“어.”
오이카와의 표정이 벼락이라도 친 듯이 흔들렸다. 그리고 오이카와의 그 얼굴을 보고서 다들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이와이즈미의 말이 진실이라고 확신한 모양이었다. 체육관이 금방 쩡하고 달아올랐다. 이와이즈미가 몇 반의 누구냐고 캐묻는 말들, 언제부터냐는 추궁같은 것들을 건성으로 걷어내며 샤워실로 돌아간다. 그 뒤에 남겨진 오이카와는 마치 비련의 여주인공 같았다.
“오이카와, 차였냐!”
동기들이 깔깔대며 놀리고서 지나간다. 투닥거리기는 하여도 지나치게 사이가 좋아서 사귀는 것 아니냐며 놀리는 말들이 곧잘 나오곤 하던 두 사람이었다.
“으아! 그런 거 아니거든! 아니, 그런데 나 진짜 전혀 몰랐어…….”
“네가 그런 반응일 게 뻔하니까 말 안했겠지.”
친구들이 핀잔을 주며 지나가고 그 사이에 서 있는 건 마츠카와와 하나마키였다. 오이카와가 뒤를 획 돌아보며 둘을 쳐다보았다.
“둘은 알고 있었어?”
“뭐를.”
“이와쨩이 조, 좋아한다는 사람…….”
하늘이 무너져도 저런 표정을 짓지는 않지 않을까. 하나마키는 나직하게 혀를 차며 생각했다.
“뭐 소문은 있었지. 오늘 들어오는 초콜렛은 전부 거절했다는 모양이니까.”
“왜 나, 나만 몰랐지?”
그러니까 그걸 몰랐다는 점에서, 이와이즈미의 마음이 어느 쪽으로 향하고 있는지 알아채야 하지 않나 싶지만. 마츠카와는 조금 고개를 기울어뜨렸다.
한 사람은 보통을 뛰어 넘어 눈에 띄고 옆의 사람은 그에 비하자면 놀랄만치 담백한 편이다. 그 화려한 불균형이 둘의 기묘한 관계에도 연막을 치고 있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진작 둘은 도마 위에 올라간 생선 꼴이 되었을 것이다. 그 정도로, 가만히 들여다보면 누구나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제대로 모르는 건 주위만이 아니었다. 당사자들조차, 아니, 당사자조차.
모두들 너라면 이와이즈미의 일을 모조리 알고 있을거라 생각하여, 아무도 굳이 너에게는 얘기하지 않은 것인데.
“맛키, 누군지 알아? 이와쨩이 좋아한다는 사람.”
“글쎄. 나도 누군지까진.”
하나마키는 능숙하게 모른척했다. 정신이 하나도 없는 모양인지 오이카와는 오랜 친구의 거짓말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마츠카와가 어찌할 바 모르고서 발만 구르는 오이카와의 옷깃을 잡아채어 샤워실로 향했다.
“뭐 이와이즈미가 좋아하는 애가 있을 수도 있지.”
“아, 안 되지!”
“뭐가 안 돼.”
“나한테 말도 안 하고…….”
“말 하면?”
“어?”
마츠카와가 툭 하고 던지듯 묻는다. 오이카와가 평소와 달리 당황이 버무려진 멍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마츠카와는 수건을 챙겨들며 다시 물었다.
“너한테 말하면, 뭐 어떡할건데.”
“아니, 꼭 뭘 어떡하려고 말을 하는 건 아니잖아…….”
“어쨌든 너 이와이즈미를 도와줄 생각은 아니잖아? 그러니까 말 안했겠지.”
“!”
스스로의 마음도 모르고서 화들짝 놀란 얼굴이 그를 올려다본다. 마츠카와는 혀를 찼다. 사랑받고 자란 사람만의 그 시야 좁은 오만함을 좋아한다. 그래서 오이카와도 좋아하는 편이었지만, 이럴 땐 오이카와를 이 모양으로 빚어놓은 이와이즈미를 향해 탄식을 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
세 사람이 샤워실로 들어갔을 땐, 이와이즈미는 이미 씻고 나간 것 같았다. 마츠카와는 반쯤 얼이 나간 것 같은 오이카와를 하나마키에게 떠안기곤 대충 휘리릭 씻고서 바깥으로 향했다. 수건으로 머리를 적당히 털며 부실로 향한다. 문을 열자마자 단내가 훅 하고 풍겼다. 대부분이 오이카와가 받아온 초콜렛들이었다.
“이와이즈미.”
때마침 부실에는 이와이즈미 한 사람 뿐이었다. 마츠카와는 적당히 이와이즈미 곁으로 가서 캐비넷을 정리하는 척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 수는 그다지 먹히지 않았다.
“그냥 물어봐.”
“갑자기 왜 맘이 변했어?”
이와이즈미는 마음을 밝힐 생각이 없었다, 지금까지 계속해서. 마츠카와도 하나마키도 알고 있는 일이었다. 두 사람이 옆에서 몇 번 부추긴 적도 있었지만 그 때마다 이와이즈미는 부드럽고 단호하게 넘어갔다.
-글쎄, 봐서.
옆에서 보기엔 오이카와와 이와이즈미의 방향이 너무나 명확하여 머뭇거릴 이유조차 없는 것 같았는데도 이와이즈미는 꼼짝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본인이 움직이지 않겠다는데 제3자가 나서서 감놔라 배놔라 하는 것에도 정도가 있어서 그대로 둔 채 지금까지 이어진 것이었는데.
“아니, 별로 마음이 변한 건 아닌데……. 조금 짜증나서.”
“짜증?”
“저거.”
이와이즈미는 셔츠를 꿰어입으며 턱짓으로 오이카와의 초콜렛 더미를 가리켰다. 마츠카와는 눈을 가늘게 뜨며 그와 초콜렛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칠렐레 해서 다 받아 오는 거…….”
“네가 받지 말라고 하면 저 녀석도 안 받을 거 아냐.”
“그렇게 말하긴 싫고.”
저 고집들을 이해할 수가 없다. 마츠카와는 혀를 찼고 그의 뜻을 알아들은 이와이즈미는 약간 머쓱한 표정을 짓고는 해명하듯 말했다.
“비슷하겐 말해봤는데. 어차피 먹는 것도 고역스러워 하니까. 그런데 거절하는 말 하는 게 더 힘든 거 같길래.”
“……그럼 왜 네가 그러고 있는데?”
“나중에 되돌려주게.”
“뭐?”
“뒤에 가서 얘기할 때 나는 안 받았다고 말하려고.”
그래야 오이카와 녀석 콧대를 눌러주지. 이와이즈미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뭔가를 의도한 말투는 아니었다. 둘에 대해 적당히 알고 있는 마츠카와가 그에게 물었고, 그러니까 그 나름대로는 성심성의껏 솔직하게 생각을 말해주는 것 뿐.
“그 ‘뒤’가 언젠데?”
“글쎄……. 그건 생각 안 해봤는데.”
형태가 없기 때문에 영원을 확신할 수도 있다. 오이카와와 이와이즈미의 관계란 그런 것이었다. 그저 오래된 친구라기엔 지나쳤으나 연인이라고는 누구도 먼저 확언하지 않아, 그 무엇도 아닌 채 두 사람은 뭉근하고 둥근 관계 속에서 맴돌고 있었다. 모르는 건 오이카와, 지키는 사람은 이와이즈미였다.
“뭐 오늘일 수도 있고. 한 오십년 쯤 뒤일 수도 있으려나.”
마츠카와는 어처구니 없다는 마음을 표현할 기력도 없어 혀를 차곤 고개를 저었다. 때마침 부실의 문이 열리며 오이카와와 하나마키가 들어왔다. 오이카와가 곧장 이와이즈미에게 다가가는 거센 걸음에 문가에 기대두었던 종이봉투가 넘어져 안의 초콜렛이 우르르 쏟아졌지만 오이카와는 돌아보지 않았다.
“이와쨩!”
“어, 왜. 머리나 말려.”
“좋아한다는 애 누구냐니까! 왜 말 안해주고 도망 가!?”
샤워를 끝내자마자 뛰어왔는지 오이카와의 머리카락에서 뚝뚝 물방울이 떨어졌다. 이와이즈미는 눈살을 찌푸리며 캐비넷에서 수건을 꺼내 오이카와의 머리에 얹어주었지만 오이카와는 그 수건을 잡아채며 다시 이와이즈미에게 물었다.
“이거 말고, 누구냐구!”
“아 없어. 없다고. 머리 당장 안 말리냐, 오이카와.”
“……없어?”
눈앞에 당장 닥친 시비를 피하기 위한 변명인 게 분명한 ‘없다’는 말인데도, 오이카와는 마치 갈대가 바람에 휩쓸리듯 감정의 방향을 틀고서 이와이즈미를 바라보았다.
“없어. 그냥 둘러댄 말이야. 그리고 넌. 머리, 말리라고.”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의 손에서 다시 수건을 빼와 그의 머리에 올리곤 거칠게 부벼주었다. 수건에 시야가 가린 오이카와가 아프다며 빽빽거렸지만 처음 부실에 들이닥칠 때의 박력은 없었다.
오이카와가 이와이즈미의 압정 아래에 겨우 반쯤 머리를 말렸을 때 하나마키가 소리쳐 둘을 불렀다. 넷이 모여 부실 바닥에 산개한 초콜렛을 겨우 치우고 정리한다. 그 와중에 오이카와가 무엇이 우정초콜렛이었는지 알 수가 없다며 울상을 지으면서 중얼거려, 마츠카와가 흘끗 이와이즈미를 바라보게 했다. 이와이즈미가 시원하게 오이카와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악! 아파! 이와쨩! 왜!”
“단내 퍼져서 짜증나.”
“윽…….”
오이카와가 조그만 목소리로 사과의 말을 한다. 그리고 초콜렛을 사이에 둔 둘의 실랑이는, 적어도 교내에서의 실랑이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마츠카와는 양손에 커다란 종이봉투를 주렁주렁 쥐고서 귀가하는 오이카와와 이와이즈미의 뒷모습을 흘끗 바라보았다. 거리가 멀어지며 흐릿해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와쨩, 이거 먹는 거 도와줄거지?’ ‘안 도와준 적 있었냐.’ 여느 때와 똑같이, 오후의 햇살처럼 강렬하고 굴곡없이 평이한 음성은 금방 골목 너머로 사라졌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관계는 사소한 가시 하나에도 상하고 틀어질 수 있다. 그 관계를 이것도 저것도 아닌 채로 유지하기 위하여, 오이카와의 찬란한 외양보다 더한 연막이 필요하다면 이와이즈미는 기꺼이 그리할 셈인 것이었다.
'하이큐 > 이와오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와오이 | 비밀 (1) | 2016.02.15 |
---|---|
이와오이| 고백 (6) | 2016.01.03 |
이와오이| 여름의 승리를 (2) | 2015.12.27 |
이와오이| 사랑의 말 (0) | 2015.12.19 |
이와오이| 착한 아이입니다 (0) | 2015.12.15 |
-오이른 전력 주제 : 처음
이와이즈미에게 여자친구가 생겼다.
“어? 진짜? 누군데?”
오이카와는 마시던 드링크를 곧장 입에서 떼고 몸을 휙 돌렸다. 덕분에 먹다 만 음료가 주륵 흘러서 이와이즈미는 미간을 찌푸리곤 수건 한 장을 오이카와의 얼굴에 부볐다. 오이카와가 수건을 걷어내며 재차 물었다.
“누구냐니까!”
“말하면 아냐, 네가.”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의 얼굴에 묻은 액체가 적당히 닦인 걸 확인하곤 땀을 닦았다. 오이카와가 그런 이와이즈미의 체육복을 붙들었다.
“그래도, 누군데? 언제부터?”
“어제부터.”
“왜 자꾸 누구인지 말을 안 하는 건데에!”
“후배야, 후배. 2학년인데…….”
이와이즈미는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배구 외에는 관심도 없는 녀석이 말한들 알겠나 싶어서, 말해봤자 소용없겠다 여긴 것 뿐인데 숨긴다고 생각하기라도 하는 건지 오이카와는 물러날 줄을 몰랐다.
“어제? 어제 언제?”
“어제 연습 끝나고.”
“……학생회 회의 있었을 때?”
“어어.”
이와이즈미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는 한 달에 한 번씩 학생회에서 동아리 부장들과 함께 진행하는 회의가 있는 날이었고 한 달 중에 딱 하루, 이와이즈미가 혼자 귀가하는 날이기도 했다.
“이와쨩 좋아하는 사람 있는 줄 전혀 몰랐는데…….”
오이카와가 먹다 만 드링크 병을 양손으로 쥐고서 시무룩하니 쳐진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이와이즈미는 머쓱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 그냥 나 좋다고 하니까…….”
“엑.”
“뭐, 뭔데.”
“이와쨩 헤퍼! 헤퍼!”
“너야말로 너 좋다고 하면 금방 칠렐레 해서 사귀잖냐!”
“나는……!”
뭐라 말을 하려던 오이카와는 결국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기만 하다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이와이즈미는 그런 오이카와의 이마를 꾹 눌러 밀어냈다. 자기는 신명나게 여자친구를 만들었다가 헤어졌다가 만들었다가 헤어졌다가 하더니.
“너는 뭐.”
“나랑은 경우가 다르지!”
“뭐가, 어떻게 다른데.”
이와이즈미는 땀을 다 닦아낸 수건을 어깨에 걸치고서 오이카와를 바라보았다. 오이카와는 여전히 그저 병을 양손에 쥔 채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처진 표정을 바꾸지 못했다.
“하여튼 애예요, 애.”
“몰라…….”
오이카와의 표정에는 온통 섭섭함이 엉망진창으로 묻어 있었다. 이와이즈미는 손가락으로 오이카와의 이마를 한 번 튕겼다. 오이카와가 한 손으로 발갛게 달아오른 이마를 매만지며 먼저 코트로 나가는 이와이즈미의 뒷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
오이카와는 쿨다운을 위해 스트레칭하며 멍하니 이와이즈미의 여자친구에 대해 생각했다. 여자친구, 여자친구.
그가 알기론 이와이즈미의 첫 여자친구였다. 그 전까지 이와이즈미는 여자 문제엔 도통 무감각하게 굴곤 했으니까. 줄기차게 여자친구를 갈아치운 건 오이카와 쪽이었다. 오이카와는 왈칵 바닥에 엎어지고 싶은 마음을 겨우 추슬렀다.
‘왜 갑자기 여자친구를! 좋아하지도 않는다면서!’
포인트는 그것이다.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저 쪽에서 좋아한다고 해서 사귀게 되었다고 했다. 그러니까 이와이즈미는 깊은 마음이 있어서 응한 건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사귈 필요 없는 거 아니야? 하지만 그런 말을 할 근거가 부족했다. 이와이즈미의 말대로, 누가 좋다고 하면 금방 사귀고 하기를 반복했던 건 오이카와 그였다.
‘하지만 나랑은 경우가 다르잖아!’
으아아아!
오이카와는 결국 참지 못하고 체육관 바닥에 대자로 드러누웠다. 내가 누구때문에 아무나라도 만나고 다닌 건데! 오이카와는 팔뚝으로 눈을 가린 채 발을 굴렀다. 죽어도 말을 할 수는 없고, 말을 할 수 없으니 말릴 수도 없다. 오이카와는 차라리 죽고 싶다고 생각했다. 내가 왜그랬을까. 마음이 그래도 그냥 아무도 만나지 말고 있을걸.
‘좋아하게 되면, 어떡하지…….’
이러니 저러니 해도 사람에게 진실되고 다정한 이와이즈미였다. 그러니까 매번 오이카와 그가 어리게 때로는 어리석게 굴어도 곁에 있어준 걸 안다. 상대방이 그저 좋다고 했기 때문이라고 해도 관계가 시작된 이상은, 분명 이와이즈미도 최선을 다할 게 분명했다. 최선을 다하다보면 자연스레 마음도 기울지 않을까. 그리고 그렇게 마음이 기울면.
“오이카와. 뭐하냐. 일어나.”
“흐업.”
오이카와는 깜짝 놀라서 얼굴을 가리고 있던 팔을 치웠다. 이와이즈미가 위에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후다닥 몸을 일으켜세웠다.
“어, 이와쨩. 벌써 교복 갈아입었어?”
“어어. 오늘은 나 먼저 간다.”
“에……?”
오이카와는 바닥에 앉은 채 멍하니 눈을 깜박거리기만 했다. 이와이즈미가 눈살을 찌푸리고 그를 보고 있다가 팔 사이에 손을 넣어 번쩍 일으켜세운다. 오이카와는 입으로 맥아리없는 비명을 지르며 겨우 몸을 바로했다.
“여자친구가 어디 가자고 해서 그런다 했어. 먼저 갈테니까. 내일 보자.”
“어……. 어어, 응…….”
오이카와는 스스로도 느낄 수 있을 만큼 울적한 목소리로 대답하고 말았다. 이와이즈미가 또 애냐, 하고 그의 등을 한 번 내리치고는 척척 걸어 체육관을 벗어난다.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에게 맞은 등을 애써 매만지며 겨우 울상을 지었다.
애라고 구박할 거면 애 취급을 해달란 말이야. 애를 혼자 두고 가는 게 어딨어……. 하지만 그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미적거리며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오이카와는 교복 위에 저지를 걸치고선 터덜터덜 체육관 밖으로 나왔다. 부 일지까지 적당히 정리를 마치고 나자 아무도 남은 사람이 없었다.
학생회 회의도 없는 날인데 혼자 돌아가는 건 처음이야……. 오이카와는 노을 사이로 가로등 불빛이 하나씩 하나씩 들어오는 걸 보며 생각했다.
그러고보면 그에게는 모든 처음이 이와이즈미였다. 그가 눈을 떴을 때 이미 세상에는 이와이즈미가 있었다.
‘그야 이와쨩 생일이 나보다 더 빠르니까 당연하지!’
그의 손을 이끌고서 어른 손의 반도 차지 않을 발걸음으로 어린 세상의 가장 먼 곳까지 이끌고 가주었던 것도 이와이즈미였다. 눈을 뜨고 본 생에 첫 친구였다. 서로가 싫다며 빽빽 소리를 지르면서 머리를 쥐어뜯고 싸운 것도 이와이즈미가 처음, 한겨울 눈밭에서 구르고 뛰놀다가 오이카와 혼자 감기에 걸려 골골댈 때에 병문안을 와 준 것도 이와이즈미가 처음이었다.
배구 ‘놀이’에 함께 어울려 준 것도 이와이즈미가 처음, 방황하는 그를 때려가면서까지 일으켜 세운 것도 이와이즈미, 그리고…….
‘처음이란 처음은 전부 다 가져갈 줄 누가 알았겠어!?’
오이카와는 돌연 억울해져 길거리에 굴러다니던 빈 깡통을 발로 걷어찼다. 요란한 소리가 나면서 앞에 있던 초등학생들이 놀라 그를 돌아보곤 쌩하니 도망친다. 오이카와는 엉거주춤 사과를 하려던 손을 떨어뜨렸다.
-사랑에 빠진 것도,
이와이즈미가 처음…….
오이카와는 기력이 쭉 빠져 걷다 말고 가로등에 몸을 기댔다. 죽고 싶다……. 우울함이 발끝에서부터 꾸역꾸역 기어올라오는 감각에 오이카와는 치를 떨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로서도 항변할 말은 있었다. 사랑에 빠질 수 밖에 없었노라고. 넘어져 울고 있으면 툴툴거리면서도 달려와 일으켜주었고, 열이 올라 정신을 차리지 못할 땐 눈을 뜨는 순간마다 걱정어린 표정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허튼 짓을 하려 들면 손을 쥐고서 놓지를 않았고 늪에 파묻혀 허우적거릴 때에는 거침없이 그를 끌고 나왔다.
그가 어떤 잘못을 해도 어떤 실수를 해도 이와이즈미는 자신의 생에 오이카와를 내친다는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처럼 무슨 수를 써서라도 기어코 오이카와가 똑바로 걸어가게 만들어주었다. 옆을 보면 뚱한 표정으로 무슨 일이냐고 했지만 그렇게 언제나 옆에 있어 주었다.
정말로 사랑에 빠지는 것 말고는 도리가 없잖아.
그리고 그와 동시에, 마음을 말한다는 선택지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일생의 전부를 친구로 지내왔고 서로가 단 하나뿐인 절친한 친구라고 믿고 있었다. 말을 입 밖으로 꺼내게 되면 돌이킬 수 없게 된다. 오이카와는 마음을 깨달은 순간부터 저울을 기울여보고 있었다. 마음을 고백하는 대가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친구에게 솔직했다는 알량한 자기 위안, 그리고 아마도 미안하다는 이와이즈미의 사과. 그 이후의 어색하고 서먹한 거리감, 어쩌면 그대로 이별. 아주, 아주 어쩌면 이와이즈미가 고개를 끄덕여줄지도 모를 일이지만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를 두고서 도박한다는 선택지를 고를 수는 없었다.
그러니까 말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어차피 지금도 좋아한다는 말은 얼마든지 할 수 있으니까 그걸로 됐다고, 사귀어봤자 만나고 헤어지기밖에 더하겠어, 그러니까 이 마음은 평생 마음 속에만 묻어두고서 계속 함께 하겠다고.
‘으흑, 이건 생각 못했다고! 이와쨩한테 여자친구는!’
그래도 때로는 차마 이와이즈미에게 모두 보여주지 못한 마음이 넘쳐 흘렀다. 그럴 때면 오이카와는 그저 혼자 철철 흘러넘치는 것들을 애써 손으로 끌어모으다 어쩔 줄 몰랐다. 그러다 그런 순간 그에게 다가오는 사람이 있으면 오이카와는 그것들을 모아서, 넘치고 흘러버린 것들을 모아서 줘버리곤 했다. 이와이즈미에게 해주지 못하는 것들을.
오이카와의 여자친구들은 모두 그런 식이었다. 모두가 한 사람 대신이었고 그래서 오래가지 못했다. 잘못했다는 생각은 있었다. 이와이즈미가 안다면 무슨 짓을 한 거냐고 그의 머리를 후려칠지도 몰랐다.
그리고 이와이즈미는 그런 사람이기 때문에, 그의 여자친구에게 오이카와가 그랬듯 그러지는 않을 게 분명했다. 오이카와와 같은 이유로 만나는 것도 아닐 것이다. 진심으로, 자기 마음까지 기울만큼 진심으로 다정하려 노력하겠지.
오이카와는 쿵 하고 전봇대에 머리를 한 번 박았다가 비끗하여 쓰린 상처를 매만지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
“……오늘은 여자친구랑 안 가?”
“우리 부활동은 늦게 끝나잖아. 먼저 가라고 했어.”
아, 그렇지. 오이카와는 겨우 조금 풀어진 미소를 그렸다. 어제 하루 이와이즈미를 먼저 다른 길로 보낸 것뿐이었는데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아주 오랜만인 것처럼 느껴졌다. 오이카와는 저절로 새어나오려는 안도의 한숨을 안으로 끌어모았다.
“어제는 데이트 잘 했어?”
“어, 뭐. 그럭저럭.”
“또 그런다! 이와쨩 여자친구한테 그러면 미움받아요!”
“내 여친이 넌줄아냐.”
“그…….”
나 지금 내장이 푹 하고 긁힌 기분 들지 않았어? 오이카와는 속으로 왈칵 눈물을 삼켰다. 이와이즈미가 그에게 언제나 툭툭 던지곤 하는 그런 말일 뿐인데도 마음처럼 유연한 반응을 해낼 수 없었다. 오이카와는 애써 웃었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너 이마는 또 뭔데? 왜 그래?”
“어? 아…….”
오이카와는 깜짝 놀라서 앞머리가 스쳐지나가는 쪽 이마를 손으로 가렸다. 어제 괜히 속이 상해서 전봇대에 대고 쿵쿵거리다가 이 꼴이 났다곤 죽어도 말할 수 없었다. 차라리 좋아한다고 고백을 했으면 했지! 오이카와의 결연한 표정을 보고서 대번에 이와이즈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뭔데. 어디다 또 갖다 박았냐?”
“아, 아니. 그게. 길 가다가…….”
아아, 지금 오이카와 씨 표정 엉망일게 분명해요. 오이카와는 속으로 울상을 삼키곤 더듬더듬 말을 늘어놓았다. 이와이즈미가 팔을 뻗어 이마를 가리고 있는 오이카와의 손을 휙 잡아내렸다.
“또 약도 안 발랐지?”
“어어…….”
“얼굴 말곤 볼 것도 없는 놈이.”
“아, 아니거든! 이 오이카와 씨가 좀 잘생기긴 했지만!”
겨우 보통 때처럼 발끈하는 얼굴을 만들어서 빽 소리쳤더니 이와이즈미가 그의 등을 퍽 하고 내리쳤다. 집에 가서 연고 똑바로 발라, 임마. 이와쨩, 아파……. 오이카와는 으레 그러듯 홧홧한 등을 매만지며 울상을 지었고 이와이즈미가 전혀 신경쓰지 않는 얼굴로 정면을 본다. 오이카와는 어렵게 눈을 피해 입술을 삐죽거렸다. 고작 이런 걸로 내가 받은 마음의 상처가 어떻게 될 거라고 생각하지 마! ……내가 마음에 상처를 받았는지도 모르겠지만.
“이제 이런 거 알아서 좀 해라. 나이가 몇인데.”
“……왜? 이와쨩이 챙겨줄 거잖아!”
“이게 사람을 진짜 보모인줄 알지?”
이와이즈미가 확 눈썹을 치켜올리며 그를 돌아본다. 오이카와는 아니라며 서둘러 부정에 부정을 하고 사과까지 십수마디를 더 덧붙인 뒤에야 이와이즈미의 표정을 원래대로 되돌려놓을 수 있었다.
그 날 이후로 이와이즈미는 때때로 여자친구와 약속이 있다며 오이카와를 두고서 먼저 돌아가는 일이 생겼고,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를 붙잡지는 않았다. 데이트 에스코트는 잘 해주느냐고 놀리는 말을 겨우 할 뿐이었다.
“……오늘도 데이트 있어?”
“어, 아아…….”
이와이즈미가 교복을 평소보다 서둘러 갈아입으면, 그건 그 날 그녀와의 일정이 있다는 뜻이다. 오이카와는 스스로의 상태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눈동자를 굴리며 짚어보았다. 오늘 오이카와 씨는 표정부터 웃는 얼굴이 나와주질 않네요. 그야 이와쨩이 어제도 데이트 갔으면서 오늘 또 가니까!
“이와쨩, 그거……. 꼭 가야 돼?”
“……꼭 가야되는 게 아니라 약속이니까 그렇지.”
이와이즈미가 답지않게 조금 어르듯이 말한다. 오이카와는 겨우 웃을 수 밖에 없었다. 차라리 등을 후려치는 이와쨩이 나아. 여자친구랑 약속 어기고 싶지 않아서 억지로 상냥해지기까지 하는 이와쨩이라니, 정말로 최악이야.
“그으~렇지, 뭐! 그럼 안녕히 다녀오시죠, 이와쨩! 오이카와 씨는 오늘도 혼자 돌아가겠습니다아.”
오이카와는 장난기를 한껏 섞어 투덜거렸다. 그 말에 이와이즈미가 돌아서지 않고 가만히 멈춰서서 그를 바라보았다.
“……뭐가 그렇게 섭섭하냐.”
그를 구박하는 것 같기도 했고 답을 구하는 것 같기도 하고, 억지로 웃는 얼굴을 만드는 데에 모든 기력을 쏟아붓고 있는 오이카와로서는 감정을 종잡을 수 없는 질문이었다. 오이카와가 무슨 그런 질문을 하냐는 듯이 입술을 툴툴거렸다.
“섭서업? 당연히 섭섭하지! 여자친구 생기고 나서부터 이와쨩이 나한테 불성실해졌다구?”
“……말은 잘해요. 너도 그랬거든!”
“나, 나는 안 그랬어!”
오이카와는 이 말만은 진심을 담아 빽 소리쳤지만 이와이즈미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눈치였다. 그래, 그래, 건성으로 대답하곤 몸을 돌려 체육관을 나간다.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결국 손에서 힘을 푼 오이카와는 고개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내가 여자친구 만들었을 때 상처받은 것처럼 말하고 있어…….
그런 거, 전혀 아니면서.
*
연인들이 할 수 있는 수없이 많은 처음에 대하여 어째서 생각하지 못했느냐 한다면, 오이카와는 억울해서 버럭 외칠 말이 많았다. 나도 사람인걸! 아픈 생각은 피하고 싶은 게 당연하잖아!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생각해두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싶어지고 만다. 이와이즈미가 데이트도 갔겠다 아무도 건드릴 사람이 없으니 신명나게 혼자서 서브 연습을 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오이카와는 처음엔 가로등 뒤에 어찌어찌 숨었다가 이 얇은 기둥으로는 무엇도 가리지 못한다는 걸 깨닫고는 얼른 골목을 찾아들어갔다. 멀찍이서 두 사람이 걸어오고 있었다. 서로 한 손을 맞잡고 있다. 그리고 그 둘 중에 한 명은, 오이카와가 그림자만 보고도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이와쨩……이랑 이와쨩 여자친구다…….’
으아. 지나가는 길인가? 어쩌지? 진짜로 보고싶진 않은데. 오이카와는 골목길 사이에 주저앉아서 배구공을 꽉 끌어안은 채 이 난관을 어떻게 해결할지 고민했다. 담이라도 타고 넘어볼까? 진심으로 담벼락을 올려다보았지만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넘어가는 건 무리일게 뻔했다.
다행이 두 사람은 오이카와가 있는 골목길까지 오지는 않았다. 이 근처가 이와이즈미의 여자친구네 집인 모양이었다.
‘데려다줬나보네. 하긴 나도 데려다주는데.’
오이카와는 골목 너머로 흘끗 쳐다보곤 괜히 뺨을 부풀리고 투정조로 생각했다가 그것도 그만두었다. 왈칵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하지만 뭐라고 하고 울겠는가. 친구한테 여자친구가 생겨서요? 여자친구를 집까지 데려다줘서요? 오이카와는 입술을 꽉꽉 깨물고서 하늘만 올려다보았다. 두 사람이 무어라 대화를 나누는 것 같은데 목소리까지는 들리지 않았다.
그러다가 문득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땐 대화 소리가 멎은 뒤였다. 오이카와는 슬쩍 골목 너머로 고개를 내밀었다가,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가로등의 어둑한 불빛 아래에서도 이와이즈미의 얼굴은 선명하게 보였다. 그리고 이와이즈미가 앞에 선 소녀의 머리카락을 살짝 쓸어넘겼다. 그를 대할 때와는 전혀 다른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이와이즈미가 천천히 고개를 숙이고, 그리고…….
뚝, 오이카와는 자신의 손등에 떨어진 빗방울을 내려다보았다. 늦은 밤이었으나 구름 하나 없이 청명한 날이었다. 오이카와는 덧없는 웃음이라도 지어보려고 했지만 빗방울은 쉴새없이 툭투둑 떨어져내렸다.
생각, 했어야했는데.
뒤늦은 후회가 물밀듯이 쏟아졌다. 생각을 하고 있었어야 했는데. 아무런 각오도 다짐도 없이 직시하고 만 현실은 몹시도 아팠다. 둘은 연인사이이고, 몇 번이나 데이트도 했고, 손을 맞잡고 귀가하니까, 그 다음도 어쩌면 당연한데.
그런데…….
“……오이카와.”
“흐압.”
배구공 위에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던 오이카와는 깜짝 놀라서 번쩍 고개를 들었다. 등 뒤로 가로등 빛을 인 이와이즈미가 눈살을 찌푸린 채 그를 보고 있었다. 놀란 오이카와가 뒤로 넘어가려는데 이와이즈미가 덥석 그의 팔을 잡아채 일으켜 세웠다.
“어, 어떻게.”
“뭘 어떻게야. 숨는 것부터 다 봤거든.”
“지, 진짜?”
오이카와를 세워놓고서, 이와이즈미는 팔짱을 낀 채 오이카와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오이카와는 놀라서 눈물이 그쳐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어쩔 줄 모른 채 이와이즈미의 눈을 피했다.
“울었냐?”
“아, 아니거든요? 이 오이카와 씨가 왜 울어요?”
“흠.”
‘안 믿어’라는 뜻의 흠, 이다. 오이카와는 자신의 입을 때리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기만 했다. 그 뒤로 한참이나 오이카와를 바라만 보던 이와이즈미가 덥석 오이카와의 손을 낚아챘다.
“가자.”
오이카와는 손을 뿌리치지도 않고 맥아리 없이 이끌려가며 이와이즈미의 뒷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어렸을 때와 똑같았다. 그가 처음으로 또래 친구들과 다투었을 때, 이와이즈미는 어디선가 번쩍 하고 나타나서는 다툼도 시비도 다 주먹으로 꽝꽝 끝내버리곤 이렇게 그의 손을 잡아 끌고 집으로 향하곤 했다.
“……어어, 이와쨩, 여기 어디…야……?”
집으로 향하곤 했는데……. 오이카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집에서 조금 멀리 떨어져 자주 가지 않는 공원이었다. 시간이 늦어 지나가는 사람도 없이 한적했다. 공원 벤치 쪽에 다다랐을 때 이와이즈미가 오이카와의 손을 놓고 뒤돌아서서 그를 바라보았다.
“너 왜 울었는데.”
“크헙.”
이와쨩, 너무 직구야……. 오이카와는 굳은 표정을 풀질 못하고서 입술을 달싹거리기만 했다.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의 말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뭐가 그렇게 서운해 죽겠는데?”
“……어어, 그게요…….”
“왜 울었어. 뭘 보고 울었는데. 거기 숨어서 뭐했어?”
“아, 아니…….”
나 안 그래도 요즘 쭉 서러워서 죽을 것 같았는데 그렇게 추궁하면. 오이카와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면서 어떻게든 둘러댈 말을 쥐어짜고 싶었지만 이와이즈미가 입맞추는 현장을 목격한 충격과 근래의 마음고생 탓인지 생각만큼 머리가 돌아가질 않았다.
“저기요, 이와쨩…….”
“어. 말해봐.”
“그러니까 그게요…….”
마음이 짓이겨지고 그렇게 흐르는 진물이 차고 넘쳐서 버럭 외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런데도 말하지 않는 것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어떻게도 이와이즈미를 잃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랬는데…….
“야, 아, 아니. 야, 오이카와. 내가 뭐, 뭐랬다고 울어. 야. 야야.”
“우, 우는 거 아니거든!?”
오이카와는 빽 소리치고는 결국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으아, 눈물아 좀 그쳐봐! 주인님 인생이 망하고 있다구! 하지만 말을 들을 줄 모르는 눈물은 그칠 줄도 모른다. 한참을 당황해 허둥거리던 이와이즈미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꾸 오해하게 하지 마라, 오이카와.”
“무, 무슨 오해요.”
오이카와는 앵도라진 목소리를 내면서도 서둘러 눈물을 그치게 하려고 애썼다. 노력한 것은 보람이 있어서 목소리에는 눈물이 꽉 들어차긴 했으나 그나마 멈출 수 있었다.
“내가 여자친구 생긴 게 뭐라고 네가 이렇게 우냐.”
“…….”
이와쨩에게 여자친구가 생긴 게 뭐라고 내가 우냐고? 그야, 내 세계가 전부 망가지게 생겼으니까. 이 말을 할줄 알고. 죽어도 안 할거야. 죽어도. 죽어도, 절대, 죽어도…….
“너 이렇게 울고 그러면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줄 알긴 하냐? 어? 멍청아.”
“무, 무슨 생각을 하는데.”
바보라는 생각? 멍청이라는 생각? 아, 이미 멍청이라고 불렀지. 그러면 귀찮고 번거롭다고 생각할까? 손이 많이 간다고?
오이카와는 답은 이미 알고 있다며 젖은 뺨을 쓱쓱 닦아냈고.
“아, 나 좋아하나? 하고 생각하거든.”
오이카와의 눈물로 젖은 종이같은 세계가 단번에 찢어졌다.
*
오이카와는 처음에는 얼어붙었다가 그 다음에는 입을 딱 벌리고서 이와이즈미를 바라보았다. 이와이즈미는 아까 전부터 쭉 그를 곧게 바라보고 있었다. 오이카와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
어떻게 알았어,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 손에 잡힐 듯이 보이는 표정이었다. 이와이즈미는 끝내는 오이카와의 시선을 피하고서 한숨을 쉬었다. 햇빛은 모두 자취를 감춘 어둑한 밤이어서 붉어진 목덜미는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여자친구는 도대체 왜 만들고 다녔냐?”
“마, 만든 건 이와쨩이잖아!”
“네가 먼저거든.”
일부러 평소마냥 구박하는 투로 말을 해보는데 겨우 그치게 해두었던 오이카와의 눈물이 또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내가 죄인이지, 이와이즈미는 한숨을 푹푹 내쉬며 오이카와의 뺨을 손바닥으로 쓱쓱 닦아냈다. 그래도 눈물은 멎지를 않았다.
“그리고 울기는 왜 우냐고, 도대체.”
“이, 이와쨩이 뽀뽀했잖아! 여자친구랑! 첫키스!”
“……이게 진짜. 일단 안했고 했어도 첫키스는 아니거든!?”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오이카와가 세상이 다 무너진 표정을 지으며 이와이즈미를 바라본다. 이와이즈미는 부글부글 끓는 속을 꾹꾹 내리눌렀다. 이 녀석 새까맣게 다 잊어먹었구만?
“그, 그럼 누구랑 했어? 나 몰래 했어?”
“뭘 너 몰래 해!”
“그럼 누구냐니까!”
“너다, 임마! 너! 너! 초등학교 때 대차게 박아놓곤 다 까먹었지? 어?”
“……아?”
오이카와가 둥글게 뜬 눈을 깊이있게 깜빡, 했다. 남은 눈물이 후두둑 쏟아졌다. 그제야 눈물을 그친 형상이다. 이와이즈미는 머리가 띵하고 아파서 아까부터 연거푸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그에겐 아무 관심 없다는 듯이, 몇 번이나 여자친구가 바뀌는 것을 아무 말 하지 못하고 보기만 해야했다. 그런가보다 했다. 자신의 마음은 열병으로 생각해 묻어두기로 했다. 언제나 아슬아슬하고 위태로워 눈을 뗄 수 없었던 그의 소꿉친구는, 그의 시선도 관심도 마음도 모조리 가져가놓고서는 모르는 척 새침하게 웃기만 했다. 그래, 그만해야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돌아서는 그를 보는 오이카와는 언제고 수도꼭지가 터질 듯이 아슬아슬 울듯 말듯한 얼굴로 그를 보고 있었다. 세상의 마음 아픈 것은 모두 자기 심장에 둔 것처럼 다쳐서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그 얼굴을 보고 있자면 또 금방 마음이 흔들려서 약속도 무엇도 다 그만두고 저 녀석 챙겨 집에 가야겠다, 싶다가도. 그러지 않기로 했잖아, 했다가도.
“말해.”
“네, 넵?”
“말하라고. 나한테. 지금. 네가 하는 생각.”
저렇게 울려가면서까지, 하고 싶은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당장 말해.”
“……도망 안 간다고 약속해.”
“약속해.”
“서먹해지지 않을 거라고 약속해줘.”
“약속한다.”
“앞으로도 쭉 나랑 있어줄 거라고도 약속해.”
“……빨리 말 안하냐?”
오이카와가 고개를 푹 떨어뜨렸다. 머리카락이 흩어졌다. 우느라 지쳐, 귓가에는 땀방울이 맺혀있다. 닦아주고 싶었다.
“이와쨩이 좋아…….”
“맨날 하는 말이잖아.”
“…….”
“어떻게 좋은데.”
“그, 그럼 이와쨩은?! 나 좋다고는 한 번도 말 안했-.”
오이카와가 번쩍 고개를 들고 빽 소리치다가 그의 목소리가 이와이즈미의 입술에 푹 묻혔다. 은하수 흐르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 정적 뒤에 이와이즈미가 겨우 오이카와를 놓아주었다. 이와이즈미는 제발 붉어진 얼굴이 들키지 않기를 바라며 말했다.
“이렇게 좋다고.”
“…….”
“어떻게 좋은데, 넌.”
하지만 이와이즈미는 결국 오이카와의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오이카와가 그의 옷깃을 붙잡은 채 하늘을 보고 펑펑 울어버렸던 것이다. 아주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울기만 한다. 이와이즈미는 우는 오이카와의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오이카와는 정작 기억도 하지 못하는 불꽃같은 첫 입맞춤의 추억을 연거푸 말해주어야 했다.
'하이큐 > 이와오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와오이 | 비밀 (1) | 2016.02.15 |
---|---|
이와오이 | 발렌타인 데이 (1) | 2016.02.14 |
이와오이| 여름의 승리를 (2) | 2015.12.27 |
이와오이| 사랑의 말 (0) | 2015.12.19 |
이와오이| 착한 아이입니다 (0) | 2015.12.15 |
이와오이| 여름의 승리를
오이른 전력 주제 - 선물
맴맴맴맴
벌써부터 매미가 울기 시작한다. 해가 다 떨어져가는데도 매미는 쉴 줄을 몰랐다.
한창 서브 연습에 열중하던 오이카와는 멀찍이서 이와이즈미가 그를 부르는 소리에 움직이는 것을 멈췄다. 할 수만 있다면 계속 연습하고 싶었지만, 학기 초에 염좌로 잠깐 고생했던 일이 있었던 탓에 이와이즈미의 말이라면 꼼짝을 못 하게 되었다.
‘안 그래도, 원래 꼼짝도 못했는데!’
오이카와는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얌전히 샤워실로 향했다. 생각이 표정으로 드러났는지 이와이즈미의 표정이 심상찮다. 오이카와는 입술을 꼭 모으고서 애띠게 웃었다.
“이, 이와쨩?”
“집에 가서 몰래 연습 더 해봐라, 한 번?”
“그, 그런 생각 안 했거든요!”
몰래 했다가 염좌 오는 바람에 된통 걸렸지 않던가. 오이카와는 자기도 모르게 헬쓱한 표정을 지었다. 그 때의 이와이즈미는 정말로 굉장했다. 제대로 화도 내지 않고 그를 병원에 처박아 놓고서는 그 뒤로 며칠간 그에게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등하교는 꼬박꼬박 하던대로 같이 하고, 그런데 말은 하질 않고, 두 사람이 겨우 화해 아닌 화해를 한건 오이카와가 다시는 무리하지 않겠다고 반쯤 울며 빌고 난 뒤였다.
“거짓말 하면 내가 어쩐다고 했지?”
“……죽여버린댔어요…….”
“잘 알고 있네.”
칼같이 서늘하게 말한 이와이즈미가 수건 하나를 챙겨들고 먼저 샤워실로 향한다. 오이카와는 이미 둘 밖에 남지 않아 빈 체육관을 한 번 뒤돌아보곤 이와이즈미를 따라 샤워실로 향했다.
인터하이 예선이 다가오고 있었다.
*
고등학생, 소꿉친구. 이 두 단어가 만나면 보통 두 사람 사이에 10년 이상의 시간이 축적되어 있다는 뜻이 된다. 말인즉슨 매년 다가오는 생일을 챙기는 게 점점 더 일이 된다는 얘기다.
그래도 오이카와와 이와이즈미는 나름 서로의 생일을 정성껏 챙기는 편이었다. 케이크나 파티같은 건 친구들과 다같이 하더라도 선물만은 직접 고른 것으로. 새벽 12시가 되는 순간, 서로의 집 앞에서. 그 직접 고른 것이 대개는 배구화라거나 무릎보호대일 때가 많았지만 어떤 날은 무늬가 특이한 창문용 커튼이었고 어떤 날은 품이 꼭 맞는 후드티였다.
하지만 이번 여름만은.
오이카와는 배구공을 양 손으로 쥔 채 코트 너머를 주시하며 심호흡했다. 이번 여름, 다가오는 이와이즈미의 생일에는 아주 특별한 걸 선물로 주고 싶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주지 못했던 것, 하지만 매년 주고 싶었던 것이었다. 줄 수 있는 기회를 가지는 것마저 올해가 마지막.
오이카와는 공을 띄우고 코트 쪽을 향해 힘주어 발을 내딛었다. 몸을 낮추며 한 발 한 발 달린다. 응축된 힘으로 몸을 띄우며 젖히고 그대로 내리친다. 콰앙, 체육관을 울리는 요란한 소리가 난다. 가볍게 바닥에 착지한 오이카와는 곧 민망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다른 생각 좀 했기로서니 곧장 아웃일 건 뭐람~!’
“오이카와.”
“……왜, 왜 그러십니까아, 이와쨩.”
때마침 체육관에 들어온 이와이즈미가 빗나간 서브를 본 모양이었다. 굴러가는 공을 흘끗 보더니 오이카와를 바라본다.
“집중 못하겠으면 쉬어.”
“그, 그런 거 아냐.”
오이카와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 한 번 공을 띄우고 서브를 넣었다. 이번에는 코트 안쪽에 확실히 들어간다. 그 공을 잠시 바라본 이와이즈미가 알았다는 표정을 짓고는 워밍업을 위해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오이카와가 공 던지는 것 하나만 봐도 상태를 알겠다는 태도였다. 하긴 그러니까 조금 무리를 할까 말까 싶으면 귀신같이 알아채서는 끌고 가는 거겠지, 오이카와는 그렇게 속으로 생각하며 다시 공을 손에 쥐었다.
-이와쨩은 배구 하고 싶어?
중학교 때 묻지 못했던 질문이었고 지금도 묻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도 묻지 못할 거다.
자신이 배구를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더라, 그것은 뚜렷하게 기억에 있었다. TV에서 보았던 모습에 푹 빠졌다. 저렇게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손에 공을 쥐었다. 위로 던졌다, 앞으로 달렸다, 뛰어올라 내리쳤다. 그래도 부족했다. 더, 좀 더, 좀 더, 앞으로, 좀 더, 위로.
정신없이 내달리다가 퍼뜩 고개를 들었을 때 자신의 옆에는 이와이즈미가 있었다. 가장 오래된 기억 속에는 배구공 가지고 노는 그를 시큰둥하게 바라보던 어린 이와이즈미의 얼굴이 있었다. 그러니까 그가 배구를 시작하게 되었다면 아마도 자신때문이다.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싫은 것에, 오로지 타인을 위해서 이렇게까지 몰두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와쨩, 아닌 척 해도 엄청 다정한걸…….’
오이카와는 결국 서브를 넣지 않은 채 공을 꽉 쥐었다. 때때로 하는 말은 매섭고 그가 허튼 소리를 한다 싶으면 후려치는 데에 망설임이라곤 없는 이와이즈미였지만, 그런 것으로는 지울 수 없는 그의 다정함이 있었다. 아직 스물도 되지 않았으니 짧다면 짧은 인생일 것이나 그 시간동안 그를 끌어들였던 늪에서 매번 그를 건져올린 것이 이와이즈미였다. 온힘을 다하여, 함께 빠져드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오로지 오이카와를 위해서.
이와이즈미가 오이카와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오이카와 역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오이카와 그가 이와이즈미에 대해 잘 아느냐고 묻는다면, 둘과 오랜 시간을 보낸 친구들은 당연하다며 고개를 끄덕일 것이었으나 오이카와 본인만은 속으로 부정했다.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에 대해 모르는 게 너무 많았다. 그가 배구를 하게 된 것도, 윙스파이커라는 포지션을 잡게 된 것도, 마침내 아오바죠사이의 에이스가 된 것까지도 너무나 자연스럽게 물흐르듯 흘러가버렸고 때문에 오이카와는 그 모든 길목에서 이와이즈미에게 하고 싶으냐고 묻는 것을 잊고 말았다.
어렸을 때에는 물을 줄 몰랐고 도중에는 묻는 것을 잊었고 이제는 묻는 것이 두려워,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가 당연히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라고 믿는 것마저 때로는 자기세뇌가 아닌가 돌이켜보곤 했다.
‘그~래도!’
아무리 그래도, 배구에 관심도 없으면서 여기까지 왔다고 한다면 이와이즈미는 초등학교 시절도, 중학교 3년년과 고등학교 3년까지도 전부 오로지 오이카와 그만을 위하여 그 모든 시간을 배구에 쏟아부은 셈이 된다. 그럴리야 없을 거다. 아무리 이와이즈미라도. 그러니까 좋아서, 배구가 좋아서. 여기까지 온 것이겠지. 그리고 그렇게 믿기 때문에.
오이카와는 가볍게 숨을 들이키고, 몇 백번 몇 천번 몇 만번 해와 몸에 익은 동작 그대로 위를 향해 공을 띄웠다. 아름답게 궤적을 그리며 날아오르는 공을 따라 첫발에 힘을 주어 내딛는다. 몸을 억누르듯 굽힌다. 달린다. 튕기듯 뛰어올라, 목표로 한 곳을 향해 내리친다.
콰앙!
체육관 바닥에 거세게 부딪힌 공이 튀어간다.
오이카와가 이와이즈미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확신하는 건 몇 되지 않았다. 그 몇 되지 않는 것 중에 하나였다. 시작이 어찌되었든 이와이즈미가 지금 아오바죠사이의 에이스 윙스파이커라는 사실은.
그래서 오이카와는, 지난 시간 내내 생각해왔다. 이와이즈미에게 주고 싶은 것을.
*
내 에이스에게,
눈부신 승리를…….
바닥에 떨어지는 공은 이쪽 코트에 있었다. 정렬하고 인사를 하고, 그리고 물러설 때까지 오이카와아는 굳은 얼굴이기는 했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전국으로의 길은 또다시 시라토리자와 앞에서 무너지고 말았다. 몇 번째인지 세지는 않았다. 학교로 돌아오는 버스 안은 고요했지만 학교에 도착했을 때, 오이카와는 웃는 얼굴로 부원들을 다독거리고 해산시켰다. 감독님과 코치님이 그를 한 번씩 바라보았다.
그리고 모두가 돌아가 휑한 체육관에는 오이카와와 그의 뒤에 서 있는 이와이즈미 두 사람 뿐이었다.
“오이카와.”
오이카와는 등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를 알면서도 대답하지 않았다. 웃는 얼굴은 마지막 한 사람이 체육관을 나가는 순간 함께 잃어버렸다. 오이카와의 고개가 천천히 아래로 낙하한다. 이와이즈미는 뒤에 서서 그 모습을 보고만 있었다. 끝내 오이카와의 아래에, 빗방울 떨어지는 것 같은 소리가 날 때까지.
“오이카와.”
한 번 더 이름을 불러본다. 그래도 돌아보지 않는다. 이와이즈미는 걸음을 옮겨 오이카와의 앞에 섰다. 오이카와는 울고 있었다. 눈물을 닦아내지도 않고 그저 흘러넘치게 두고서.
강호라는 학교에 있지만 라이벌은 있었고 이긴 횟수만큼 진 적도 많았으나, 오이카와는 언제나 패배에는 면역이 없는 듯이 지고 난 다음이면 진정할 줄을 몰랐다. 그래도 이렇게까지 우는 걸 마지막으로 본 건 중학교 3학년 때였는데. 이와이즈미는 다시 한 번 이름을 불렀다.
“야, 오이카와.”
“흐어엉, 이와쨩~!”
그리고 마침내 오이카와가 풀썩 주저앉더니 그의 바짓단을 붙잡고 어린애처럼 엉엉 소리를 높여 운다. 이와이즈미는 깜짝 놀랐다가 서둘러 마주 앉아서 어떻게든 그가 울음을 그치게 하려고 했지만, 오이카와는 그저 터뜨리듯 울기만 할 뿐이었다.
“흐어어엉!”
목을 놓고 꺼이꺼이 울어댄다. 온 뺨이 눈물로 젖어들어간다. 이와이즈미는 그 눈물을 어떻게든 닦아주려고 했지만 그의 손이 훔쳐내는 것보다 쏟아지는 게 더 많았다.
“봄고, 하기로 했잖아.”
패배 앞에서 다시 한 번 더 일어서기로, 모두와 함께 결의하였다. 한 번 더 도전하기로. 말을 꺼낸 건 오이카와 본인이었으므로 그 얘기로 그를 달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웬걸, 되레 왈칵 오이카와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늦어! 그건 늦는단 말야!”
오이카와는 결국 고개를 떨어뜨리고 울었다. 봄고는 남아 있으니 거기서 한 번 더. 하지만 그것과는 다른 문제였다. 이 여름은, 6월의 승부는, 그래서 얻을 초록빛 승리는 올해가 마지막이었다. 올해가 마지막 인터하이였다.
하지만 그를 달래기 위해 그저 앞에서 어색한 위로의 말을 늘어놓고 있는 이와이즈미에게 할 수 있는 얘기는 아니어서 오이카와는 하염없이 떼라도 쓰듯 엉엉 울기만 했다.
너에게 승리를 주고 싶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다가올 너의 생일에 그동안 우리가 가장 갖고 싶었던 것, 내가 나의 단 하나뿐인 에이스에게 가장 주고싶었던 것을 안겨주려 했다.
“뭐가 늦는데. 뭐에 늦어. 너 왜 우는 건데.”
다른 부원들 앞에서는 잘도 의연한 척을 해놓고서 돌아서면 분해 어쩔 줄 모르는 거야 익히 아는 바였지만, 모두와 함께 봄고에 다시 가자고 말한 본인의 얘기가 이상하다.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의 뺨을 거칠게 문지르며 윽박지르는 듯이 또는 다정하게 달래는 듯이 말했다.
“내가, 이와쨩한테……!”
오이카와가 홱 고개를 들고 이와이즈미의 얼굴을 바라본다. 이와이즈미는 눈물로 젖어서, 그리고 그가 눈물을 닦아낸답시고 문지르는 통에 발갛게 달아오르는 뺨으로 그를 보는 오이카와를 보며 한숨을 삼켰다. 패배 앞에서 익숙해지지 않고 익숙해지지 않으려하는 모습은 익히 봐왔다. 하지만 오늘의 눈물은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나한테? 너 다른 땐 몰라도 오늘은 실수한 거 없었어.”
“그런 말이 아니야!”
“그럼.”
“이와쨩은……. 이와쨩은 내 맘 몰라!”
“그래, 모른다. 모르니까 좀 알려줘 보라고! 이 멍청아!”
그래도 오이카와는 계속 계속, 소리 높여 울기만 했다. 이와이즈미는 입술을 꽉 깨물고 한숨을 삼켰다.
“야. 오이카와. 목 쉬니까 이제 그만 울어.”
“허어엉, 허어어엉!”
“내일 애들이 뭐라고 생각하겠냐. 하, 눈도 다 붓겠네. 야, 오이카와.”
이 어린 녀석을 어찌하면 좋습니까, 신이시여! 이와이즈미는 천장을 쳐다보고 한탄했다. 자신이라고 해서 오이카와가 이렇게 우는 걸 듣는 것이 아무렇지 않은 게 아니건만.
“오이카와!”
“이와쨩은, 이와쨩은 내 맘 몰라!”
“너도 몰라! 너야말로 몰라!”
이와이즈미가 결국 참지 못하고 윽박지르듯 버럭 외치는 말에 오이카와가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눈꼬리를 타고 남은 눈물이 한 번 넘쳤다가 마지막 남은 방울이 또르르 타고 흐른다. 겨우 울음을 그친 모양새였다.
“아. 이제 좀 그쳤네. 진정 좀 해라. 일단 나가서 포카리 사올테니까…….”
“내, 내가 뭘 모르는데? 이와쨩?”
“그럼 너부터 왜 우는지 말해보던가.”
“……나, 나는. 우리가 져서.”
“그것만이 아니잖아. 내가 너 거짓말하면 어쩐댔냐.”
“……죽여버린댔어요…….”
“그럼 이실직고 해라.”
이와이즈미가 몰아세우고 결국 오이카와가 다시 고개를 떨어뜨렸다. 이와이즈미는 동그란 머리를 내려다보며 한숨을 삼켰다.
“……생일 선물…….”
“생일 선물?”
“이와쨩 생일 선물, 주고 싶었어…….”
“아직 며칠 남았어. 주면 되겠네.”
“아 진짜! 이와쨩! 눈치라고는 없어가지고!”
결국 오이카와가 팩 고개를 들고는 그를 노려본다. 이와이즈미는 험악하게 웃으며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린 채 오이카와의 양뺨을 붙잡고 쭉 잡아늘렸다.
“아, 아하(아파)!”
“다시 말해봐. 내 생일 선물을 주고 싶었는데 뭐 어쨌다고?”
“아야야야~!”
“설마 ‘전국으로 가는 승리를 생일선물로 주고싶었어’이딴 얘기는 아니겠지? 그래서 선물을 못 줘서 지금까지 이렇게 울었다는 그런 얘기는 정말로 아니겠지, 바보카와?”
“…….”
오이카와가 아프다는 소리도 내지 못하고서 또 금방 그 눈꼬리에 눈물을 채웠다.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의 뺨에서 손을 떼고 그의 등을 철썩 내리쳤다.
“웃기는 소리 하지 마!”
“아, 아파! 이거, 이거는 진짜로 아팠어! 이와쨩!”
“그건 내가 너한테 줄 거였어!”
“……아?”
오이카와가 눈을 깜박거린다. 두 어번, 더 깜박거렸고 덕분에 또 눈물이 뚝 떨어졌다.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의 얼굴을 차마 마주하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다가오는 7월, 여름이 한층 더 불타오를 때.
가장 신록으로 물들었을 그 승리를,
내가, 너에게…….
“그러니까 넌 주제넘는 소리 하지 말고 그만 집 가자. 나 진심으로 배고프다.”
“어, 이와쨩? 그러니까…….”
이와이즈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가방을 챙겨드는 와중에도 오이카와는 체육관 바닥에 주저앉은 채 그를 올려다보고만 있다. 결국 이와이즈미는 깊이 깊이 한숨을 내쉬곤 오이카와의 겨드랑이에 손을 집어넣고 번쩍 일으켜세웠다. 집 가자고. 이와이즈미가 으르렁대듯 말하자 오이카와가 고개를 끄덕이지만 표정은 여전히 어쩔 줄 모르는 그대로였다.
“이 멍청한 걸 주장으로 세워놓고, 우리도 참 잘하는 짓이네…….”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의 가방까지 챙겨들고서 그의 손을 낚아채듯 쥐어 잡고 끌었다. 밖으로 향하자 끌려오긴 한다. 이와쨩, 하고 뒤에서 그를 부르는 목소리는 여전히 습기에 차 있었다.
기왕 울게 할거라면 기쁨의 눈물을 선물로 주고싶었지만.
“올해 생일 선물은 늦다, 바보카와.”
“어, 어어?”
“겨울에 줄 거니까 그렇게 알아.”
해가 지는 줄도 모르고서, 매미가 계속 울고 있었다.
-------
으ㅇ..앙... 행쇼...
'하이큐 > 이와오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와오이 | 발렌타인 데이 (1) | 2016.02.14 |
---|---|
이와오이| 고백 (6) | 2016.01.03 |
이와오이| 사랑의 말 (0) | 2015.12.19 |
이와오이| 착한 아이입니다 (0) | 2015.12.15 |
이와오이| 빛 (4) | 2015.12.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