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른 전력 - 15 post
- 보쿠아카 | 어깨 위로2 2016.06.11
- 보쿠아카 | 꿈같은 일4 2016.06.09
- 보쿠아카 | Mission Impossible4 2016.05.28
- 보쿠아카 | 첫키스는 레몬 사탕 맛5 2016.05.23
- 보쿠아카 | 불꽃놀이가 피어오르는 순간2 2016.05.14
- 보쿠아카 | 발끝 아래엔 구름조각을3 2016.03.18
- 보쿠아카 | 질투는 녹색 눈의 괴물7 2016.03.12
- 보쿠아카 | 그대 가슴에 입술 자국10 2016.03.04
- 보쿠아카 | 사랑을 주세요!5 2016.02.26
- 보쿠아카 | 흉터4 2016.02.19
- 보쿠아카 | 그대네요6 2016.02.13
- 보쿠아카 | 시작2 2016.02.08
- 보쿠아카 | 충고6 2016.01.01
- 보쿠아카 | Silent night2 2015.12.25
- 보쿠아카| 사막의 밤 2015.12.18
보쿠아카 | 어깨 위로
“아, 더워, 귀찮아, 귀찮아, 귀찮아~!”
“……저 혼자 다녀오겠다고 했잖아요.”
“흐아, 5월인데 벌써 더운 느낌~!”
아카아시는 말을 덧붙이길 관두었고 보쿠토는 처음부터 들은 척도 하지 않았던 것 그대로 아카아시의 어깨에 팔을 걸고서는 축 늘어져 칭얼거렸다. 수업 종이 치기가 무섭게 체육복으로 갈아입었던 보쿠토는 외출하기 위해 저지를 걸치고 있었다. 평상시의 체온도 아이처럼 높은 사람이니 더워할 만도 했다.
두 사람은 은행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품에는 플라스틱 카드가 들려있는데 부비가 모두 들어있는 계좌와 연결된 체크카드로, 이번 황금연휴를 맞이해 하는 합숙에 쓸 현금을 조금 인출해 오라고 시로후쿠가 내어준 것이다. 보쿠토를 붙잡고서 주의사항만 10분동안 떠들던 시로후쿠는 보쿠토가 아카아시를 붙잡고 ‘같이 가자!’라고 말하자마자 그의 손에 있던 카드를 낚아채어 아카아시 손에 쥐어주곤 그에게 필요한 액수만 말해주고 모든 전언을 끝냈다. 보쿠토가 기가 막혀서 쫑알거렸지만 시로후쿠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더우면 걸친 저지라도 벗으세요.”
아카아시가 한숨 쉬는 걸 포기한 건 지난해의 일이었다. 보쿠토는 은행 안으로 들어가서야 겨우 아카아시 곁에서 떨어졌다. 보쿠토는 귀찮다며 고개를 흔들었다. 더워하는 쪽이 더 힘들 것 같았지만 아카아시는 첨언하는 것 없이 ATM 앞으로 향했다.
“뭐 하는데 현금 필요한 거야?”
“음료 파우더가 떨어졌는데 인터넷으로 주문하는 건 배송 날짜를 못 맞출 거라고 하셨어요. 연휴라.”
보쿠토는 물어본 것이 자신이면서도 시큰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크게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일개 고등학교 부활동이었으나 인원이 많고 제법 지원을 받는 터라 계좌 안의 액수도 상당했고 인출한 금액도 고액이다. 아카아시가 카드를 챙기는 사이에 보쿠토가 현금을 촤르르 넘겨보았다. 그마저도 무성의했다. 아카아시는 흘러내린 가방끈을 추슬러올리며 흘끗 보쿠토의 모양새를 살폈다. 어느새 보쿠토는 유리문을 밀어 열고 있었다.
“보쿠토 선배, 돈은 넣고 나가요. 위험하잖아요.”
아카아시는 서둘러 인출기 근처에 비치되어 있던 종이봉투 하나를 꺼내와 보쿠토에게 내밀었다. 보쿠토는 의아한 표정이었다. 뭐가 위험해? 아카아시는 결국 포기했던 한숨을 내쉬었다. 보쿠토는 까닭은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아카아시가 시키는 대로 착실하게 봉투 안으로 현금을 집어넣고 있었다.
“소매치기나 뭐, 그런 거요. ATM들렀다 나오는 사람은 둘중 하나는 현금을 손에 쥐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이 말을 할 때까지만해도 아카아시는 정말로 그런 일이 생길 것을 염려한 것은 아니었다. 매사 인간 사회의 상식과는 동떨어진 것처럼 구는 사람에게 한 마디라도 더 일러주려 하던 평소 습관 쪽에 더 가까웠다.
“혹시 선배 혼자서 올 일 있으면 현금같은 건 잘……!”
유리창에 비친 사람이 손에 금속성 물체를 쥐고서 다급하게 다가오는 걸 알았을 때 보쿠토를 먼저 끌어당긴 것도 또한 평소의 버릇이었다. 행여나 무슨 일이 있다고 해도 자신에겐 보쿠토보다 1년이 더 있다는 것. 그 생각의 위로 빠르게 다른 것들까지 스치고 지나갔다. 바로 내일 모레인 연휴의 합숙, 여름 인터하이, 겨울에 있을 봄고, 그 사이에 있을 가능성이 높은 보쿠토의 추천입학까지.
부욱 하고, 날붙이로 천자락 찌르는 소리와 함께 매서운 통증이 팔을 할퀸다. 아카아시가 주춤하는 사이에 낯선 남자가 아카아시 손에 있던 카드와 보쿠토가 쥐고 있던 종이 봉투까지 낚아챘다. 눈 깜짝할 새의 일이었다.
“아카아시!”
아카아시는 오른손으로 왼팔을 움켜쥐었다. 손끝을 타고 붉은 액체가 뚝 떨어진다. 깊은 상처는 아닌 듯 했고 다행이 보쿠토도 갑자기 낯선 사람과 부딪혀 조금 놀랐을 뿐 다치지는 않은 것 같았다.
“아카아시, 이게 뭐야! 아카아시! 상처!”
“이건 스친 건데 그보다, 인출한 게……. 큰일이네요…….”
소매치기가 저 멀리 뛰어간다. 아카아시가 중얼거리는 말에 보쿠토가 창백한 안색으로 버럭 소리쳤다.
“지금 인출한 게 문제야!?”
“카드도…….”
정지부터 해야겠어요, 아카아시가 차분하게 중얼거리는 사이에 보쿠토가 인상을 왈칵 썼다. 아카아시가 손으로 붙잡고 있는 상처를 한 번 살펴보고는 순식간에 저지를 벗어 아카아시의 어깨에 걸쳐준다. 보쿠토는 거세게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여기 꼼짝말고 있어.”
“보쿠토 선배……? 선배!”
그리고 아카아시가 보쿠토를 채 불잡기도 전에, 그대로 보쿠토가 튀어나가듯 달려갔다. 소매치기가 도망친 방향이었다.
*
보쿠토가 돌아온 것은 은행 ATM 근처에 경찰차와 구급차가 당도했을 때였다. 출동한 구급요원이 응급처치를 하는 동안 얌전히 앉아있던 아카아시는 숨을 들썩거리는 보쿠토의 모습을 보자마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즈와 붕대가 튀어 휘날리고 아카아시의 어깨에 걸쳐있던 보쿠토의 저지도 펄럭거렸다.
“보쿠토 선배!”
“이거 찾아왔고, 그래서 지금 상처는 괜찮아?”
“저는 괜찮다고 했잖아요, 선배, 지금 선배가…….”
“아, 이건 그냥 긁힌 거야. 그래서 이 애 상처는요?”
보쿠토의 손에는 그새 구겨진 종이 봉투가 꽉 쥐어져 있었다. 소매치기가 훔쳐갔던 돈이었다. 뺨이며 팔다리에 자잘한 생채기가 가득하다. 범인을 추격하면서 여기저기 부딪히고 뒹군 게 분명했다.
“보쿠토 선배! 칼 든 상대를 쫓아가면 어떡합니까!”
“넌 그럼 상대가 칼 들고 있는걸 보고도 무슨 짓이야, 이게.”
보쿠토는 땀과 생채기로 범벅이 된 얼굴로 언성을 높이지도 표정을 바꾸지도 않은 채 그저 서늘하게 아카아시를 노려보듯 바라보았다. 옆에서 조치를 하던 구급요원이 서둘러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깊은 상처는 아니고, 반창고를 잘 붙이고 있으면, 일주일은 격한 운동은 삼가시고요, 그런 말들이 의미 없이 두 사람 사이에 흘러갔다.
보쿠토의 자잘한 상처까지 치료하고 경찰들과 얘기까지 나누고 나자 어느새 해가 저물어갈 시간이었다. 사건이 정리되고 관중들까지 흩어질 때 아카아시는 여태껏 걸치고 있던 보쿠토의 저지를 내밀었지만 보쿠토는 고개를 흔들곤 다시 아카아시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아카아시는 자신의 어깨 위로 올라온 보쿠토의 옷을 흘낏 바라보곤 호흡을 골랐다.
“선배.”
“…….”
잃어버릴 뻔했던 돈은 큰 액수이긴 했지만 사정이 그러하니 누구도 탓할 수 없을 것이고 카드는 정지하면 되었는데 그것때문에 칼을 든 사람을 쫓아가는 건 무슨 배짱인지 알 수가 없다. 아카아시는 엄한 목소리를 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위험한 짓을 하면 어떡합니까.”
“그럼 아카아시는?”
보쿠토가 벌컥, 돌아보며 말했다. 그 목소리가 물에서 자맥질하듯 울컥하는 기색이 있어 아카아시가 놀라 눈을 크게 뜨는데 보쿠토의 금빛 눈동자가 그렇게 울렁거리고 있었다.
“너는 왜 그랬어?”
“보쿠토 선배……?”
“네가 한 건 위험한 짓 아냐?”
아카아시는 입술을 달싹거렸다. 보쿠토는 지금 아카아시가 자신을 감쌌던 일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선배, 그건…….”
“내가 뛰어나가서 다치고 굴러오니까 아카아시는 기분 어땠어.”
“……선배. 지금 그거랑 이게…….”
뭐라 말을 이으려 했던 아카아시는 결국 입을 다물어야했다. 보쿠토가 그렁거리는 눈으로, 여전히 매서운 표정을 하고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 마디 더 했다간 그가 울어버릴지 아니면 화를 내버릴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왜 그랬어.”
“…….”
그래도 지켜준 셈인데 이렇게 화를 내시고, 이런 농담이라도 해서 어떻게든 분위기를 풀고 싶었지만 보쿠토의 눈동자는 받아줄 기색이 없다. 아카아시는 보쿠토가 걸쳐준 그의 저지 자락을 꾹꾹 매만졌다.
“내가 주장이라서?”
“……뭐, 그것도 없지는 않죠…….”
“아카아시!”
“에이스잖아요, 선배는.”
아카아시는 최대한 차분하고 침착한 목소리로 말을 늘어놓았다.
“조금 있으면 인터하이고. 보쿠토 선배가 뛰는 거랑 뛰지 않는 거, 코트 분위기가 전혀 달라요. 선배는 없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그럼 내가 배구 그만두면 너도 안 그럴거야?”
“선배!”
보쿠토의 목소리는 낮았다. 노려보듯 직시하는 눈동자 속의 물결은 여전했으나 목소리에서만큼은 그런 기미를 찾아볼 수 없었다. 흔들림없는 진심이었다.
“내가 배구부 주장이고 에이스고 윙스파이커고 이런 게 네가 나 대신 다칠 이유가 되는 거야? 그럼 그거 다 관둘래.”
“선배, 제 상처는 정말로 대단한 게 아닙니다. 그냥 스친 거예요. 꿰매지도 않았고…….”
“그만 둘거야.”
“선배, 왜 이러세요. 보쿠토 선배.”
아카아시가 초조한 목소리로 보쿠토를 부르며 그의 팔을 붙잡았다. 보쿠토는 그 팔을 뿌리치지는 않았다. 하지만 뱉은 말을 철회하지도 않는다. 아카아시는 입술을 깨물었다. 보쿠토가 정말로 마음 먹었으면 그게 무엇이든 그대로 해버릴 위인이라는 것은 처음 만났던 날부터 알고 있었던 일이다.
“보쿠토 선배, 오늘 같은 일은 다신 없을 거예요. 이런 일이 흔하게 일어나는 것도 아니…….”
“백 번 일어나든 한 번 일어나든 일어난 건 일어난 거야.”
“선배, 일단 진정하시고 배구부는 계속…….”
“그만 둘 거야.”
“선배!”
끝내 아카아시가 언성을 높였고 이번에는 보쿠토도 단호한 목소리를 내지는 못했다. 격양되어 흔들리는 눈빛이 아카아시를 돌아본다.
“내가 배구 하고 있어서 아카아시가 이렇게 될 생각을 하는데 그럼 어떻게 계속해!”
“배구하곤 상관 없어요!”
“내가 주장이라서 에이스라서 그런 거잖아!”
“좋아하는 사람이 다치는 꼴을 어떻게 봐요!”
“어떻게 보……. 뭐?”
“……젠장…….”
아카아시는 다치지 않은 오른쪽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며 고개를 푹 떨어뜨렸다. 지금까지 차갑게 화를 내던 사람이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는 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렇게 말하려던 게 아니었는데…….
“어……. 어? 어어……? 아카아시? 지금……. 방금…….”
“…….”
죽어도 말하고 싶지 않았는데…….
“어……. 아카아시, 방금 뭐라고 했어?”
“아무 말 안했습니다.”
“현실도피 하지 말고 빨리 재생해줘.”
“싫습니다.”
“나 배구부 관둔다 진짜?”
“아, 정말이지…….”
아카아시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아무 말 하지 않는데도 앞에 선 사람의 체온이 오르는 걸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고개를 들 자신이 없어서 그저 숙이고만 있는데 불쑥 아래에서 보쿠토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아카아시, 나 좋아해?”
“…….”
“정말이야?”
운동장을 다섯바퀴는 뛰고 온 것처럼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 눈은 조금도 피하지 않는 보쿠토가 그를 바라본다. 아카아시는 휙 고개를 돌렸다.
“정말이야? 진짜? 정말로?”
“예. 정말입니다, 네, 네. 그러니까 이제 배구부 관둔다는 말은 하지 마세요.”
“진짜 나 좋아해?”
듣고싶은 말만 골라 듣는 재주가 탁월도 하다. 아카아시는 다 포기하고서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예, 예.
“왜 이제 말해, 그걸!”
“죽어도 말 안할 생각이었습니다만…….”
“왜! 왜왜! 왜!”
이럴 거 같았으니까요. 유리가루를 흩뿌리는 것처럼 반짝거리는 눈동자였다. 마주보고 있자면 그 빛에 눈이 멀것 같아서 아카아시는 고개를 돌렸다.
“그러니까 배구부를 관두든 계속 하든, 마찬가집니다. 알겠습니까, 보쿠토 선배.”
“……그래도 이러는 건 싫어. 하지마.”
보쿠토가 아카아시의 왼쪽 검지 끄트머리를 꾹 쥐었다. 언제 들떴냐는 듯이, 서늘하게 쳐진 얼굴이었다. 아카아시는 입을 다물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해. 약속할게요. 보쿠토는 진심을 가늠하려는 듯이 한참이나 아카아시의 눈동자를 살피다가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셨다.
“그럼 우리 오늘부터 1일이야?”
“사귀자는 말은 아니었는데요.”
“엑!? 왜! 나도 아카아시 좋아하는데!”
“압니다.”
모를 리가.
가장 좋아하는 건 배구. 모든 걸 다 바치는 것도 배구. 그 배구를 그만두겠다고 말하는 것은 아카아시의 팔을 스치고 간 붉은 자상 때문에.
“근데 왜!”
“……아닙니다. 오늘부터 1일 하죠, 해요. 합시다.”
“아카아시 완전 귀찮다는 말투!”
“아니에요, 그런 거…….”
아카아시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고 그 고갯짓에 맞추어 그의 어깨를 장식하고 있는 저지가 사르르 흔들렸다. 그 모습을 보고서 보쿠토가 순식간에 뺨을 붉힌다. 아카아시는 괜히 그의 사고 과정을 추리했다가 자신까지 얼굴이 달아오를 것 같아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하이큐 > 보쿠아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보쿠아카 | 빛에 관한 기억 (2) | 2016.06.15 |
---|---|
보쿠아카 | Lunatic (1) | 2016.06.13 |
보쿠아카 | 꿈같은 일 (4) | 2016.06.09 |
보쿠아카 | 늦게 피는 수국 (0) | 2016.06.01 |
보쿠아카 | Mission Possible (4) | 2016.05.29 |
보쿠아카 | 꿈같은 일
상사병
마음에 둔 사람을 몹시 그리워하는 데서 생기는 마음의 병.
*
“역시…….”
한여름의 열기는 도통 견디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매미는 목청이 터져라 낮밤을 잊고서 울어댔고 바깥 공기를 한 번 쐬고 올라치면 에어컨의 차가운 공기가 천국의 입구에서 불어오는 숨결처럼 느껴졌다. 얼음 띄운 음료를 숨쉬는 것처럼 마셔대도 이 여름은 도저히 견딜 수 없다는 생각이 모두의 뇌리에 언뜻 스쳤을 때, 자취방에 누워있던 쿠로오가 먼저 말했다.
-더 이상은 무리야. 어디로든지 가야겠어.
응한 건 그 곁에 나란히 누워있던 보쿠토였다.
-찬성. 바다! 바다! 바다!
에어컨 바람이 정면으로 들어오는 곳에 누워있는 두 사람을 흘끗 바라본 아카아시가 ‘챙겨서 가는 게 더 덥겠습니다’라고 핀잔을 주었지만 소용없었다. 매사에 가장 추진력이 남다른 사람이 결정하고 나니 바다로 출발까지는 순식간이었다.
운전대를 잡고 있던 쿠로오는 옆자리에 앉아있는 보쿠토를 흘끗 바라보았다. 먼저 말을 꺼낸 사람은 보쿠토였다. 아카아시는 뒷좌석에서 조용하다 싶더니만 어느새 잠에 빠졌는지 시트에 기대어 조금 비뚠 자세로 눈을 감고 있었다. 차창 밖의 모습을 보고 있던 보쿠토는 이제 백미러를 뚫어져라 본다.
“역시?”
“착각이 아닌 것 같아.”
“착각? 뭐가?”
백미러에 비친 건 잠든 아카아시였다.
“내가 아카아시 좋아하는 거.”
쿠로오가 운전 중이던 차를 어딘가에 갖다박지 않은 건 보쿠토가 무슨 말을 할지 모른다는 걸 이미 알고서 각오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쿠로오는 핸들을 꽉 쥐고서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그 와중에도 보쿠토는 평상시와 조금도 다른 모습을 찾을 수가 없는, 평이한 얼굴이었다.
“그게 뭔 소리냐?”
“작년에 내가 고백했거든.”
“……그건 또 뭔 소리냐…….”
그런 큰 일을 여태껏 저 두 사람 모두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고? 쿠로오가 기가 막혀 헛바람을 들이키는데 보쿠토가 느긋하니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아카아시가 그거 착각이라고 했단 말야.”
“하……. 그래서 알았다 했냐?”
“착각인지 아닌지 확인해 보겠다고 했어.”
“어떻게?”
“찬찬히 생각해 보겠다고.”
“……작년에 고백했다고 하지 않았냐? 1년동안 찬찬히 생각해 봤다는 거야, 지금?”
“응. 생각해봤는데 착각 아닌 거 같아.”
“…….”
신이시여. 저 녀석이 지금 무어라 하는 것입니까……? 지나칠만큼 아무렇지도 않게, 지금껏 친밀하게만 지내온 후배에게 고백했다는 얘기를 하는 친구가 무척이나 당황스러운데 머리의 한 켠에서는 원래 이런 녀석이었다고 자연스레 납득하고 있었다.
“……여러가지로 정말 굉장하네…….”
고백을 한 쪽도, 그걸 거절한 쪽도, 그래서 그걸 다시 1년동안 찬찬히 생각해보겠다며 불잡고 있었던 것까지도.
쿠로오는 옆을 쳐다보지 않기 위해 앞을 똑바로 바라보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런데 아카아시가 거절했다고?’
어째서?
가장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었다. 그리고 그런 아카아시의 심중을, 도저히 헤아릴 자신이 없는 쿠로오는 이번 여행을 제안한 과거의 자신을 정신적으로 폭행하며 운전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
사람이 다른 사람을 마음에 두고 있을 때, 그래서 그 사람을 바라볼 때 그 모든 것들이 어떤 색과 모양을 띄게 되는가?
쿠로오는 그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절친한 친구의 한 살 어린 후배를 통해서 여실히 보아왔기 때문이었다.
목이 마를 때 먼저 한 모금을 넘겨 주는 것, 무너지는 모습 앞에서도 기꺼이 손 잡아 일으켜 세우는 것, 그 어떤 모습 앞에서도 경애의 빛을 꺼트리지 않는 것.
흔들리는 한 호읍까지 떼어놓지 않고서 바라보는 것, 그래서 그 시야를 떨리는 살구색으로 물들이는 것, 내미는 팔을 바라보는 얼굴에 기쁜 듯한 표정이 번지고 마는 것,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서 상대를 떠올리는 것.
그것이 모두 한 곳에 어우러져있는 것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친애의 정? 우정? 존경? 단지 그것 뿐이라고 말한다면 세상에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저 애가 저러는 것을 모르는 건 보쿠토 한 사람 뿐일 거라고 생각했다.
곁에서 계속 지켜보면서 조금 답답하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안타깝다는 생각도 했다. 상대를 바라보는 마음에 대가를 바라지 않는 것이 눈에 보였다. 속도 없지, 저걸 퍼주고만 앉았네. 그러면서 또 생각했다. 으이구, 이 둔한 자식.
그래서 쿠로오는, 보쿠토가 ‘아카아시에게 고백했다’는 얘기를 했을 때 정신적으로는 세 번쯤 차를 갖다 박은 기분을 느껴야 했던 것이다.
알고 있었어? 아카아시가 자길 좋아하는 걸? 그게 아니라는 것도 금방 알게 되었다. 보쿠토 입에서 나온 말의 순서가 바뀌어 있었다. 보쿠토는 자신이 아카아시를 좋아하는 것에 대해 먼저 말했다. 아카아시가 좋아해서가 아니었다. 아카아시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생각해서 고백했던 것이 아니었다. 보쿠토 자신이 아카아시를 좋아하니까, 그 마음으로.
쿠로오는 허망한 표정으로 해변을 바라보기만 했다. 보쿠토는 벌써 바다에 몸을 반쯤 적신 채 들어가있었고 반팔 셔츠를 걸친 아카아시는 몇 걸음 뒤에서 그걸 바라보고 있었다.
아카아시가 거절하며 했다는 말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착각? 저런 게 어떻게 착각일 수 있단 말이야?
웃음이 헤프고 기분이 금방 오락가락 한다는 점이 상대에게 가벼워보일 수도 있다. 금방 웃는 것 같고 아무에게나 웃는 것 같고, 그럴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아카아시가 가장 잘 알고 있을 터였다. 그들 가운데에 가장 깊은 마음으로 보쿠토를 바라보고 있었던 건 아카아시였을 테니까.
그런 아카아시가, 보쿠토를 보고서 그의 마음이 착각이라는 말을 했다고? 쿠로오는 처음부터 끝까지 도무지 이해되는 것이 없어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좋아하면서 어째서 그런 말로 거절을 한 거야, 아카아시?
“쿠로오 선배? 물에 안 들어가십니까?”
“…….”
난 진짜 얘가 무슨 생각 하는지 모르겠다…….
쿠로오는 파라솔 아래에 앉은 채 아카아시를 올려다보았다. 몇 년이나 보아온 얼굴이 알던 그대로의 모습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은 걱정하는 것도 같다. 그야 바다에 오자고 한 건 나니까, 막상 와서 이러고 있으면 걱정스럽기야 하겠지…….
“넌 왜 안들어가냐?”
“저는 바다 오고싶다고 한 적 없는데요.”
“냉정하긴.”
“셋다 들어가면 정리는 누가 합니까.”
투덜거려도 핀잔을 주어도 소용이 없다. 쿠로오는 한쪽 무릎을 끌어당겨 턱을 괸 채로 아카아시를 올려다보다, 그 뒤로 언뜻 언뜻 비치는 보쿠토의 모습을 확인했다. 방금 해변에 도착했으면서 금세 낯선 어린애와 친해져 신이 나 모래성을 쌓고 있었다. 그렇다면 아카아시와 둘이 있을 기회는 아마도 지금 뿐이다. 쿠로오는 둘러가지 않았다.
“작년에 보쿠토가 너한테 고백했다고 하던데.”
“……아.”
아카아시는 이 화제에 대해서 정말 전혀 예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얘기를 듣더니 눈을 한 번 깜박, 한다. 그를 들여다보기 위해 조금 굽혔던 허리를 펴고서는 머리카락 끝을 한 번 매만진다. 아주 오래 전의 일을 되짚어보는 모양새였다.
“그랬……던 적이 있었죠. 어떻게 아셨네요.”
“어떻게 아셨네요오~? 너 영영 말 안할 생각이었지.”
“그야 뭐……. 보쿠토 선배 착각이시고.”
얘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네…….
쿠로오가 기가 막혀 아카아시를 올려다볼 때 아카아시는 몸을 돌렸다. 바라보는 쪽은 보쿠토가 있는 방향이었다. 쿠로오는 그 눈빛이 어떤 색깔인지 보지 않아도 알 것 같다고 생각했다. 진주를 바스라뜨려 개어둔 흰 물감처럼 밀도있고 빛나는 색. 차분한 듯 보이면서도 빛을 받으면 찬란한 색이 나는, 부드러운 시선.
“착각이라니.”
“제가……. 좋아하거든요, 보쿠토 선배를.”
아카아시는 말 할 생각은 없었다는 어조로 얘기하면서도 침착했다. 쿠로오는 피를 토하고 싶은 심정을 꾹꾹 억눌렀다. 당사자에겐 한 마디도 해주지 않은 얘기를 예고도 없이 이 자리에서 자신에게 말해버리는 저 배짱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동시에 세상 천지에 그걸 모르는 건 너희 배구부 애들하고 보쿠토 뿐일거다, 그 말이 까닭 모를 억울함과 뒤섞여갔다.
“네…네가 보쿠토를 좋아하는데 그게 왜 보쿠토가…….”
자기 마음을 착각하는 이유가 되는 거야?
쿠로오가 물었고 아카아시는 잠시 침묵했다. 한여름의 더위가 두 사람 사이를 스치고 지나간다. 아카아시는 한숨을 짧게 내쉬었다.
“보쿠토 선배가, 눈치가……. 있는데 없달까 그런 면이 좀 있어요. 그러니까 눈치는 챘는데 그게 뭔지는 모르는 거죠. 사람이 워낙 단순하니까.”
보쿠토에 대해 말할 때의 아카아시는 언제나 단호하게 끝맺는 어조가 된다. 보쿠토에 대한 자신의 생각, 의견, 판단이 언제나 옳다고 확신하는 것이다. 그렇게 확신을 할 수 있을 만큼 지켜봐온 것이다.
“제가……. 제가 보쿠토 선배를 많이 좋아했어요.”
“현재진행형이잖아.”
“뭐 그렇긴 하죠.”
아카아시가 작게 웃었다. 쿠로오는 속으로 혀를 차며 저 멀리 있는 보쿠토를 바라보았다. 보쿠토는 세상 만사 고민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것처럼 활짝 웃으면서 자기 허리에도 오지 않을 어린애와 모래성 쌓기에 여념이 없었다.
“보쿠토 선배가, 저한테는 좀 관대하신 면이 있어요.”
“저 녀석한테 관대하다는 수식어를 붙일 수 있는 건 세상 천지에 너뿐일걸.”
“그러니까 저한테는 그렇다고 했잖아요.”
관대하다는 말은 보통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너그러이 대할 때나 쓰는 표현이다. 보쿠토를 향해 때로는 매섭게 말을 하기도 하고, 냉정하게 쳐내기도 하는 아카아시였지만 그 누구보다도 보쿠토가 선배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는 것도 아카아시였다.
“제가 좋아하니까……. 제가 자길 대하는 게 어떤 건지 명확하게는 알지 못해도 그냥 그대로 해주는 거예요. 제가 자기한테 잘해주는 거 같으니까 자기도 잘해주려고 하다가 그렇게 생각하게 되신 거겠죠.”
“그래서 보쿠토 녀석의 그 모든 게 착각이다?”
“네.”
아카아시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특별히 주장을 하거나 고집을 부리는 말투도 아니었다. 당연한 사실을 말하는 목소리. 쿠로오는 눈을 가늘게 떴다.
“착각이든 뭐든 너 좋다는데 낚아챘으면 됐잖아.”
“그걸 어떻게 그럽니까.”
“좋아, 뭐. 그건 그렇다고 하고. 보쿠토가 고백했고, 넌 거절했고, 그 다음에 어떻게 됐어?”
“뭐가 어떻게 됩니까. 그냥 그걸로 끝이었죠…….”
“끝 아니었잖아.”
“예?”
아카아시가 의아한 얼굴로 그를 쳐다본다. 정말로 잊은 모양이었다. 쿠로오는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착각인지 아닌지, 확인 해본다고. 하지 않았어?”
“……아.”
아카아시가 당황한 얼굴로 한 박자 늦게 대답할 때 저 멀리서 보쿠토가 목소리를 높여 두 사람을 불렀다. 같이 놀던 어린아이가 양친의 손을 쥐고서 가버린 모양이었다. 쿠로오는 더 이상 아카아시에게 말 걸지 않고서 손을 흔들며 보쿠토에게로 뛰어갔다.
*
사랑이란 미열과도 같다. 조금 들뜨고, 살짝 뺨이 붉어지고, 덥기도 했다가 그런데도 불구하고 추위를 느끼기도 한다. 혼자 하는 사랑도 그 미열은 피해갈 수 없다는 것에 억울함을 느꼈던 것도 꽤 전의 일이다.
아카아시는 걸치고 있는 얇은 유카타 자락을 여미며 신이 난 보쿠토와 쿠로오를 바라보았다. 해가 지고 달이 떠오르자 바닷가 근처의 펜션에 자리를 잡고서는 앞마당에서 불꽃놀이를 시작했다. 아카아시는 계단에 앉아 곁에 내려놓 맥주 캔을 홀짝이며 두 사람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보쿠토는 참 손이 많이 가는 사람이었다. 무언가를 해내면 항상 그를 돌아보며 찬란한 표정으로 웃었다. 매달려서는 칭찬해달라고 조르곤 했고 그걸 못 본 척 하면 토라진 얼굴로 입술을 삐죽거렸다. 자신을 향한 아카아시의 애정을 고스란히 믿는 얼굴이었다. 그 얼굴을 어쩌다 한 번 사랑스럽다고 여긴 것 뿐이었는데, 아차 하는 사이에 조금 열이 오른 것뿐이었는데 다시는 원래의 체온으로 돌아가지 못했고 그게 몇 년 째인지 모를 일이다. 아카아시는 한숨을 삼켰다.
곁에 있는 사람이 항상 조금, 아주 조금 더 뜨거우니 그것이 보통이라고 믿은 것이 보쿠토 답다면 참 다웠다. 거기까지 생각하던 아카아시는 문득 낮에 쿠로오와 했던 대화를 떠올렸다.
착각이라고 해도 낚아채면 됐지 않느냐, 쿠로오는 그렇게 말했지만. 아카아시는 옅게 미소를 그린 채 흘끗 보쿠토를 바라보았다. 태양같이 웃는 저 얼굴은 거짓을 모른다. 뒤늦게 자신이 착각한 것을 알게 되면 자신과 보쿠토 사이에는 진득한 상처만 남게 될 것이었다. 씻어낼 수도 떼어낼 수도 없는 죄책감. 알고도 속였다는 자신의 마음, 상대의 마음을 거짓으로 대했다는 보쿠토의 생각. 진심도 아닌 것을 얻으려고 속여 가지느니 차라리 그대로 두는 것이 나았다.
그리고 단지 보쿠토의 착각이었지만, 그래도 그런 말을 해준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뻤다. 아카아시는 그것이면 족했다. 살면서 들을 수 있을 것이라 상상조차 해 본적 없는 말을 들었으니까.
다만…….
“아카아시, 이리와! 이거, 이거! 불 붙였어~!”
보쿠토가 소리 높여 그를 불렀다. 아카아시는 마시던 맥주를 내려놓고 보쿠토가 손짓하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보쿠토가 활짝 웃으며 그에게 조그만 막대를 내밀었다. 끝에서 조그만 불꽃이 타닥타닥 빛을 튕기며 그의 앞에서 흔들리고 있다.
-다만 쿠로오가 했던 말이 마음에 걸렸다.
<착각인지 아닌지, 확인 해본다고.>
지난 해 보쿠토가 그에게 고백했고 아카아시가 거절했다. 아니에요, 선배. 선배가 지금 착각하시는 거예요. 아카아시의 말에 보쿠토는 차분한 눈으로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그렇게 말했다. 그럼 착각인지 아닌지, 확인 해보겠다고. 생각해보겠다고. 그 뒤로 보쿠토는 더 이상 고백 건에 대해여 얘기하지 않았고 자신과 보쿠토의 사이도 평소대로 돌아가, 아카아시도 그 말은 잊고 있었다.
아카아시조차 잊고 있었던 말을, 그리고 그보다 더 오래된 고백을 쿠로오가 어떻게 알았을까. 보쿠토와 자신 사이의 일인데 자신은 말한 적이 없으니 남은 건 보쿠토 뿐이다.
보쿠토가 말한 것이라면…….
“아카아시? 어……. 어, 아카아시!”
“!”
홀린 듯이 불꽃을 바라보며 생각하던 아카아시는 보쿠토의 부름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가 손끝을 태우는 통증에 쥐고 있던 것을 떨어뜨렸다. 화약 부분에 너무 가까이 들고 있었던 것을, 불꽃이 끝까지 타는 걸 미처 보지 못하고 데이고 말았다. 불티가 튄 손끝이 아릿하게 아파와 차가운 맥주 캔이라도 대고 있을까 싶어 뒤를 돌아보는데 보쿠토가 냅다 아카아시의 손목을 낚아챘다. 누가 무슨 말을 할 새도 없이 그를 끌고서 펜션 안으로 들어간다. 아카아시는 ‘보쿠토 선배’라고 입술을 떼어 부르지도 못했다.
이 정도 상처는 대단한 것도 아니라는 말을 겨우 할 짬이 생겼을 때 보쿠토가 욕실의 세면대에 물을 틀고는 그의 손을 차가운 물에 담갔다.
“보쿠토 선배, 괜찮아요. 별 것도 아니고.”
“별 게 아니기는! 벌써 물집 잡혔네…….”
“이런 거야 운동할 때는 흔한 일이었잖아요.”
“그거랑 이거랑 같아?”
선명한 황금색 눈동자가 상처에서 시선을 뗄줄 모른다. 아카아시는 괜히 욕실이 조금 더운 느낌에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보쿠토는 한참이나 찬물에 손을 대게 하고는, 펜션 주인에게 연락해 화상용 연고까지 빌렸다. 아카아시가 몇 번이나 대단한 상처가 아니라고 만류했지만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보쿠토가 아카아시의 얼굴을 바라본 건 아카아시의 손에 반창고까지 붙이고 난 다음이었다. 두 사람이 난리법석을 떨다가 안정된 것 같으니 쿠로오는 잠시 근처 편의점에 들러 야식거리를 사오겠다고 길을 나섰다. 아카아시는 펜션의 방에 앉아 일회용 반창고를 붙인 자신의 손끝을 바라보았다.
“……보쿠토 선배.”
“그게 다 타는데도 모르고. 무슨 생각을 그렇게 했어? 불꽃놀이 괜히 하자고 했네…….”
삐죽이는 입술, 조금 처진 눈매, 걱정이 물든 시선.
마주앉아 있는 그 모든 것이 어쩔 도리가 없을 만큼 좋아서 아카아시는 작년 이맘때, 보쿠토가 했던 고백을 거절하길 잘했다고 새삼스레 생각했다. 그걸 승낙했다면 어쩌면 지금쯤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한쪽은 착각이고 다른 한 쪽은 그 착각에만 의지하는 관계, 얼마나 위태로웠을까.
“아니에요. 그냥 그 불꽃이 너무 예뻐서……. 계속 보다가 그랬네요. 실수했어요.”
“진짜 놀랐다고!”
유난이라도 떠는 것처럼 언성을 높이는 보쿠토가 사랑스러워서 아카아시는 눈매를 누그러뜨렸다.
“대단한 상처도 아닌데요, 뭘.”
아카아시는 자신이 이렇게 말하면 보쿠토가 또 금방 입술을 삐죽거릴 거라고 생각했다. 표정이 사라진 진지한 얼굴이 제 손을 붙잡은 채 자신을 똑바로 직시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나한텐 대단한 상처야.”
“……선배?”
광택이 도는 검은 테두리, 그 속의 황금색 눈동자는 분명히 매일같이 봐온 것이었는데 오늘따라 유달리 짙어 보였다. 아카아시는 눈을 깜박이며 보쿠토를 바라보았다.
“계속 생각했는데, 정말로 이제 알겠어.”
“선배?”
“나, 착각한 거 아니야.”
‘착각인지 아닌지, 확인 해본다고.’
쿠로오가 했던 말이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그보다 훨씬 더 오래 전의 일이 눈앞에 스르르 떠오른다. 아카아시는 말을 잇지 못하고서 보쿠토를 바라보기만 했다.
“생각했어. 이만큼 했으면, 오래 한 거 맞지?”
“보쿠토 선배, 지금…….”
“나 착각 아니야. 아카아시 좋아하는 거.”
“선배, 잠시, 그거…….”
“나는 정말로 아카아시 좋아. 아카아시는? 대답해주지 않았잖아.”
“저는…….”
보쿠토가 좋아한다고 말해주었다. 상기된 얼굴, 긴장으로 조금 떨리는 목소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를 똑바로 직시하는 눈동자로. 좋아해, 아카아시. 좋아해! 지난해, 보쿠토는 그렇게 말했었다.
아카아시는 말했다. 그건 선배, 착각하시는 거예요. 선배가, 마음을 착각하신 거예요. 그런 게 아니에요.
아카아시는 그렇게 말했었다, 보쿠토의 마음에 대해서.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착각인 게 분명한데 그 앞에서 자신의 마음을 고백할 수도 없었고 착각하고 있는 보쿠토의 마음을 받아줄 수도 없었고, 동시에 그 착각마저도 싫다는 말을 할 수도 없었다. 싫다는 말만은 할 수 없었다. 마음을 받아줄 수 없다는 말도 할 수 없었다. 진심도, 진심이 아닌 것도 말할 수가 없어서 아카아시는 자신의 마음이 아니라 보쿠토의 마음에 대해서만 말했다.
선배의 마음은 착각이라고.
“보쿠토 선배, 지금 저는 선배가,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작년에 말했잖아. 아카아시, 좋아한다고. 그러니까 아카아시가 말했잖아. 그건 내 착각이라고. 그래서 나 생각하겠다고 했고 생각했어. 착각 아니야. 이렇게 다친 걸 보고 속상해 죽겠는데 이게 착각이야?”
“그건 선배하고 제가 친하니까…….”
“쿠로오하고도 친하잖아. 코미하고도 친해. 코노하하고도 친해. 다 친해도, 그 녀석들하고는 다르단 말야.”
“보쿠토 선배, 그건.”
“내가 착각이 아니라고 하잖아. 일년동안 열심히 생각했다고 했잖아. 그런데도 왜 자꾸 착각이라고 하는 거야? 거절할 거라면 그냥 받아줄 수 없다고 하면 되는 거잖아.”
“…….”
그럴 수가 없으니까.
“내 마음 진짜니까, 자꾸 아니라고 하지마.”
“하지만 선배.”
눈동자 속의 섬세한 무늬가 잔물결을 일으킨다. 아카아시는 홀린 듯이 보쿠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보쿠토의 양손이 아카아시의 뺨을 감싸쥐고서 시선을 피할 수 없게 했다.
“왜 아니라고 생각해? 왜 내 마음이 착각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건…….”
너무나 바라왔던 일이기 때문에.
“그건?”
“그건, 보통은 그런……. 그런 꿈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잖아요.”
“……뭐?”
정말로 일어날 리가 없다. 그런 일은. 그런데, 어떻게, 어떻게…….
“보통은 그런 일, 일어나지…….”
않는데.
아카아시는 지금껏 재고의 여지 없이 부정해 왔던 것이, 아니라고 틀렸다고 천을 덮어 가려두었던 것이 태양 아래에 드러나 눈이 멀만치 빛나고 있는 것을 바라보았다.
바라마지않는 꿈같은 일이 이루어지는 것은 종이 위의 세계다. 혹은 무대 위, 혹은 은막 위. 현실은, 현실에서는…….
“일어날 리가 없는 일인데…….”
내려가지 않는 미열은 이제는 익숙해져 아무렇지 않은 척 할 수 있게 되었으나 처음부터 마냥 편하지만은 않았다. 조금은 어지럽고 때로는 앞이 아찔했다. 속이 불타는 듯 뜨거울 때도 있었고 목덜미가 시리도록 차갑게 느껴지는 날도 있었다.
괴롭고 힘들어서 어떻게든 하고 싶다고 불현듯 생각했던 날 깨달았다. 그러기 위해선 이 마음이 식는 것, 혹은 상대가 이 마음을 받아주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다는 것을. 하지만 두 가지 모두 불가능한 일이었다. 마음은 식을 리가 없고 보쿠토가 자신을 그렇게 바라볼 리도 없어, 아카아시는 그것을 깨달았던 날 생각했다. 이 영원히 내려가지 않을 미열을 그저 품고서 살겠다고.
그랬었는데.
“이미 일어나 버렸다고! 아카아시가 좋아 죽겠단 말야!”
끝내 달아오른 뺨, 떨리는 눈동자, 뜨거운 손이 아카아시의 뺨에서 그의 어깨로 내려와 쥐고 흔든다. 아카아시는 그것을 속절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불덩이같았다.
“아카아시는 내가 싫은거야?”
“……그럴 리가요.”
“그러면?”
좋아하니까.
좋아서, 좋아하니까, 너무 좋아서, 그래서.
좋아하니까.
“좋-!”
입술이 떨어지고 목소리가 새어나가려는 찰나였다. 보쿠토의 눈동자가 끓어오르듯 일렁거린다. 햇빛 아래 매달아둔 유리구슬같았다. 금빛 속에 오색 찬연한 빛깔이 뒤섞여 마침내 그를 와락 끌어안는다.
“좋아해!”
아카아시가 미처 다 말하지 못했던 말은 보쿠토의 목소리를 통해 완성되었다. 아카아시는 자신을 세게 끌어안고 있는 품에 갇혀 천천히 그 체온을 셈했다. 뜨거웠다. 이렇게 뜨거운 게 꿈일 리 없다.
“이거, 꿈 아니야.”
“……그렇네요.”
“내 착각도 아니야.”
귓가에 목소리가 닿았다. 꿈이 아니야. 착각이 아니야. 1년을 차곡차곡 쌓아온 확신이었다. 그 어떤 불신과 의심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을 성이었다.
마침내 그 성 앞에서 아카아시는 말했다. 보쿠토가 고백했던 1년 전 그의 앞에서 하지 못했던 말이었다. 아니, 그보다 더 먼저 더 오래 전부터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저도……좋아해요.”
자신을 끌어안은 보쿠토의 팔에 힘이 들어간다. 응석을 부리듯 투덜거리는 목소리도 들렸다. 좋아했으면 그냥 작년에 받아줬으면 좋았잖아. 덕분에 엄청 열심히 생각할 수는 있었지만. 아카아시 나빴어. 너무해. 나빴어.
아카아시는 대답하지 않고서 다만 보쿠토의 등에 팔을 둘렀다. 한참을 씨근거리듯 투덜투덜 말을 늘어놓던 보쿠토도 목소리를 죽인다. 한참의 침묵 끝에 아카아시가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꿈, 아니…에요?”
“아니라니까!”
버럭 외치는 보쿠토의 목소리에는 억울함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아카아시가 웃을 수 밖에 없게 만드는 목소리였다. 보쿠토가 겨우 아카아시를 떼어놓고, 그래도 반창고를 붙여둔 손을 놓지는 못하고서 붙잡고 있을 때 벌컥 펜션의 방 문이 열렸다. 양손에 짐을 한 가득 들고 있는 쿠로오였다.
“자아, 축하파티를 할 것 같아서 이것저것 사왔거든? 사오고도 한참이나 방문 앞에서 눈치보고 있었거든? 축하파티 할 거 맞지?”
“맞아! 할거야! 해야 돼!”
아카아시가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보쿠토가 상기된 얼굴로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쿠로오가 사온 것들을 받아와 펼쳐 놓는다. 대부분이 술, 과자, 아이스크림, 안주거리들이었다. 곧장 과자 하나를 먼저 뜯어 입에 넣으며 장봐온 것을 보고 있던 보쿠토가 또 금방 다시 아카아시의 손을 쥐고 끌고왔다.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린 채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쿠로오가 마치 이럴 줄 알았다는 듯이, 혹은 그것보라는 듯이 아카아시를 향해 눈짓했다. 아카아시가 졌다는 표정으로 눈을 내리깔자마자 보쿠토가 요란하게 그 사이로 끼어든다.
꿈같은 밤이었다.
'하이큐 > 보쿠아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보쿠아카 | Lunatic (1) | 2016.06.13 |
---|---|
보쿠아카 | 어깨 위로 (2) | 2016.06.11 |
보쿠아카 | 늦게 피는 수국 (0) | 2016.06.01 |
보쿠아카 | Mission Possible (4) | 2016.05.29 |
보쿠아카 | Mission Impossible (4) | 2016.05.28 |
보쿠아카 | Mission Impossible
토요일 말고, 일요일! 일요일은 안 돼?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전에 없이 간절하여, 아카아시는 조금 당황스러워하면서도 기꺼이 고개를 끄덕여주었던 것이다.
그 토요일이 바로 오늘이었다.
아카아시는 미간을 모은 채 눈앞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잔뜩 상기된 얼굴의 보쿠토와 그 곁에서 웃고 있는 그 또래의 소녀. 그도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분명히 보쿠토네 반의 반장이라고 했었다. 이름이 뭐였더라, 카토 유라, 그런 이름이었는데.
*
쇼핑몰 7층의 영화관으로 향하는 입구였다. 근처에서부터 팝콘 냄새가 났고 위층의 서점에 들리기 위해 에스컬레이터 쪽으로 향하던 아카아시는 무심결에 돌아보았다가 그대로 보쿠토를 찾아냈다. 수십명의 인파 속에 둘러싸여 있었어도 알아차렸을 테지만, 사람은 주말치곤 그다지 많지 않은 편이었고 그 열띤 목소리를 놓치기란 되레 더 어려운 일이었다.
아카아시는 기둥 근처에 비딱하게 기대어 두 사람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고백은 아카아시였다. 평소와 똑같이 체육관에는 둘만 남았고 평소와 똑같이 보쿠토는 스파이크를 내리치고 아카아시는 그런 보쿠토에게 토스를 올렸다. 무엇하나 다를 것 없이 평소와 똑같았는데 스파이크를 꽂아넣고 착지하고서는, 활짝 웃으며 그를 돌아보는 그 얼굴이. 아카아시! 소리늘 높여 그의 이름을 부르는 그 목소리가. 그 모든 것이 아카아시로 하여금 사랑을 고백하게 만들었다.
땀을 훔쳐내면서, 이제 돌아갈까, 그런 말을 하는 보쿠토에게 홀린듯이 말을 했다. 선배를 좋아합니다. 두 사람뿐인 체육관에서 아무도 공을 던지지 않으니 실내는 고요했고 아카아시의 말은 체육관 전체를 나직하게 잠기게 했다. 처음에 보쿠토는 기계가 고장나려는 전조인 마냥 몸을 크게 움찔하고는, 아하하, 어색하게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나, 나도. 하하, 하하. 나도 아카아시 좋아해~!
보쿠토가 닦아내는 땀이 방금 전까지 운동으로 흘린 땀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지만, 아카아시는 물러서지 못했다. 보쿠토가 불편해하는 것을 알면서도 다시 말했다. 그런 뜻이 아니에요. 보쿠토는 뻣뻣하게 굳은 채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면?’ 아마도 그렇게 묻고 싶었던 것 같았다. 아카아시는 마음이 먼저 서두른 것을 잡아채어 숨을 고르며 천천히 말했다. 그런 뜻이 아니라. 닿고 싶다는, 말이에요…….
문장은 고장난 테이프처럼 느리게 흘러나왔고 그의 호흡까지 한 문장 안에서 끝이 났을 때, 보쿠토는 목부터 피가 오르는 듯이 새빨개지더니 펄쩍 뛰어올랐다. 아카아시는 놀라서 눈을 휘둥그레 뜬 채 바라보아야 했다. 보쿠토는 온몸이 새빨개진 것처럼 한참이나 어쩔 줄을 모르더니, 발만 구르더니, 이윽고 재차 그에게 물었다. 정말이야? 진짜? 아카아시가 얼떨떨한 표정이 되어 고개를 끄덕이는데 보쿠토가 터무니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아카아시의 양어깨를 붙잡고서는 물었다.
-그럼 뽀뽀해도 돼?
-네?
-아, 안되는 거야? 이거 아니야?
금방 또 파랗게 질려서는 번쩍, 아카아시의 어깨를 잡고 있던 손을 놓고서 어쩔 줄을 모르는데. 어떡하지, 어떡하지……. 그렇게 중얼거리는데. 결국 당황한 보쿠토의 옷깃을 붙잡고서 먼저 입을 맞춘 쪽도 아카아시였다. 보쿠토는 또 번쩍 뛰어올랐다.
그 뒤로 2주가 흘렀고 첫 데이트 약속을 잡았다. 처음에 정한 날은 토요일이었는데 그 다음날 보쿠토가 다급하고 간절한 목소리로 애걸하다시피하며 일요일로 미루자고 하였다. 큰 일도 아니어서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더랬다.
아카아시는 턱을 세웠다가, 고개를 기울였다가, 하며 물끄러미 멀리 떨어진 곳에서 두 사람을 바라보기만 했다.
보쿠토와 카토는 영화를 이미 보고 나온 것인지 아니면 다른 목적이 있는 것인지, 한쪽에 놓여있는 것들 중에서 팜플렛 몇 개만 챙겨들 뿐 상영관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정식으로 교제하기로 한 뒤로 고작 2주가 지났다. 보쿠토가 이렇게 빠르고 손쉽게 다른 사람과 다른 뜻을 선보일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아카아시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지금 두 사람의 모습이 남녀 사이의 데이트처럼 보인다고 해도 무언가 다른 까닭이 있을 터였다. 그러니까 이렇게 뒤에서 모습을 숨기고서 지켜볼 필요도 없을 것이고 그냥 앞으로 나아가 보쿠토 선배, 하고 인사를 하면 될 일인데.
아카아시는 보쿠토와 사토가 방향을 틀어 자신이 있는 쪽으로 다가오는 것 같은 모습을 보이자 눈에 띄지 않도록, 하지만 서둘러서 기둥 뒤로 몸을 돌렸다. 그를 두고서 두 사람이 스쳐지나간다. 들린 대화는 몇 마디 없었다. 다음은 옷이야! 보쿠토가 외치는 말에 카토가 웃는 목소리만 언뜻 들렸다.
아카아시는 기둥 뒤에 몸을 숨긴 후로도 한참을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매사에 맺고 끊는 것이 확실한 아카아시였다. 고백하는 말조차 물러서지 않았었다. 이번에도 그러면 되었는데 차마 나갈 수가 없었다. 그런 게 아니라고, 보쿠토의 마음이 돌아선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어째서인지 정면으로 나서서 물어보는 말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 자리에 한참이나 서 있던 아카아시는 퍼뜩 뒤늦게 ‘다음은 옷’이라고 했던 보쿠토의 말을 떠올렸다. 주위를 둘러봤지만 두 사람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아카아시는 에스컬레이터 근처로 빠르게 걸어가, 서둘러 각 층마다 위치한 매장을 확인했다. 2층이었다. 아카아시는 에스컬레이터를 빠르게 걸어 내려갔다.
*
두 사람은 이것저것 옷을 골랐고, 보쿠토는 그 중에서 몇 벌을 선뜻 샀다. 이후 아이스크림콘을 하나씩 손에 쥔 두 사람은 도란도란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더니 번화가에서 조금 떨어진 곳의 카페 안으로 들어간 차였다. 아카아시는 카페 입구에서 조금 떨어진 골목에 숨듯이 서서 가만히 카페의 외부를 바라보기만 했다. 날이 더웠기에 둘은 실내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버려 유리창으로도 두 사람의 모습을 확인할 수 없었다.
아카아시는 거기서 깊은 한숨을 한 번 내쉬고 몸을 돌렸다. 여기까지 몰래 따라온 것만 해도 스스로를 자조할 만했다.
왜 이렇게 답지 않은 짓을 해버린 건가, 어째서 이토록이나 마음이 번잡한 것인가, 그건 보쿠토가 오늘의 만남에 대해 그에게 전혀 말해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만약 보쿠토가 '오늘 반장과 볼일이 있어'라고 한 마디 해주기만 했다면, 그것이 단 둘이 만나는 것이라 하더라도 보쿠토가 미리 말해주기만 했다면.
아카아시가 한 학년 위인 선배의 학급 임원에 대해서까지 알고 있을 만큼 보쿠토는 아카아시에게 무슨 일이든 숨기는 법도 감추는 법도 몰랐다. 이런 것까지 말해주는 까닭에 대해 잠깐이나마 고민했던 건 1학년때의 일이다. 이제 아카아시는 자신에게 있었던 일이라면 무엇이든 늘어놓는 보쿠토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따라서 아카아시가 모르는 보쿠토의 일이란 없다. 아카아시가 모르는 보쿠토의 주위 사람도 없다. 아카아시가 모른다면 그건 보쿠토가 숨기고 감추었기 때문이다. 사실 지금까지 그런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건 아니었다. 보쿠토도 때론 아카아시에게 말하지 않으려는 것이 있었다. 아직 보쿠토가 2학년이던 시절 그가 선배들에게 꾸중을 들었을 때, 중간고사 영어 시험에서 처음으로 낙제를 했을 때, 낯모를 누군가에게서 고백을 받았을 때…….
“아.”
아카아시는 기억 저편에 묻어두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래, 그랬던 적이 있었다. ‘좋아해요’라는, 보쿠토를 향한 낯선 목소리가 들렸던 자리를 우연히 아카아시가 목격한 적이 있었다. 보쿠토는 눈 앞에 조그만 소녀를 두고서 거절의 말을 하고 있었는데 그건 늘상 해온 대사가 있는 것처럼 그답지 않게 능숙한 달변이었다. 소녀가 뺨이 빨갛게 되도록 눈물을 참고서 돌아갔다. 보쿠토가 그 뒷모습을 보다가 크게 숨을 한 번 몰아쉬곤 몸을 돌렸다가 아카아시와 눈이 마주쳤다.
-어, 아, 어어, 어어, 봤어?
고백하는 말을 거절하는 것은 그토록 담담하고 또 익숙했는데 그 순간을 들켜 아카아시를 마주하는 보쿠토의 얼굴은 당황으로 얼룩져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어떻게든 숨기려 했던 것을 끝내 들키고 말았다는 것이 어쩔 수 없이 티나는 얼굴이었다. 아카아시는 그가 이런 일이 있어도 자랑하듯 으스댈 사람이라고 생각했기에 조금쯤 의외라고 생각하며 별 말 없이 넘어갔었다. 보쿠토는 그런 아카아시의 반응을 보고서 까닭을 모르게 시무룩해했지만 금방 회복했고 그 뒤로도 아카아시는 보쿠토에게서 누군가에게 고백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었다.
하지만 과연 없었을까?
아카아시는 이제와 돌이켜보았다. 감정 폭이 들쭉날쭉한 경향이 있다고는 해도 코트에서 그렇게나 멋있게 뛰어오르는 사람이니 그 불꽃처럼 격렬한 모습에 끌린 이들이 있는 것도 당연했다. 그런 일이, 낯선 소녀가 보쿠토에게 사랑을 고백했던 일이 몇 번이나 더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카아시는 모르는 연정에의 토로가 더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렇게 다른 이들의 고백을 아카아시에게 숨겨왔듯이 오늘, 사토와의 만남에 대해 한 마디 언급이 없었던 것일까.
왜 숨겼을까.
그 고백들을 왜 감추었을까. 오늘의 만남을 왜 숨겼을까.
아카아시는 뒤를 돌아보았다. 카페의 입구에 달린 작은 풍경이 짤랑거리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
‘표정 엉망인데…….’
아카아시는 보쿠토와 만나기로 했던 시계탑 아래에 서서 반대편 쇼윈도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을 보곤 숨을 꾸역꾸역 삼켰다. 지난 밤에 잠을 한숨도 자지 못했는데 표정이 멀끔할 리가 없었다. 아카아시는 결국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휴대전화를 들었다 놓았다 하기를 얼마나 반복했는지 모른다. 오늘 뭐 하셨냐고, 그렇게 한 번만 물어보면 되는 일인데 그럴 수가 없었다. 그렇게 자는 둥 마는 둥 하고 약속시간에 맞춰 나온 차였다.
천성이 그런 탓인지 아카아시는 표정을 큰 폭으로 드러내는 데에는 익숙치 못했고 그건 부정적인 감정일 수록 더했는데, 보쿠토만은 아무도 모르는 그 표정을 귀신같이 알아차리곤 했다. 아카아시, 무슨 일 있어? 컨디션 나빠? 무엇 하나에 집중하면 앞뒤 사방 분간을 하지 않는 사람이 그런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눈치가 빨랐다.
“아, 아카아시!”
“……선배.”
아카아시는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몸을 돌렸다가 달싹이던 입술을 다물었다. 보쿠토는 어제 사토와 함께 고른 옷을 그대로 입고 있었다. 차마 아카아시가 ‘다른 여자랑 데이트하면서 산 옷을 입고 왔습니까’라고 말할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였다.
“오, 오래 기다렸어?”
“아뇨.”
마음에 여유가 없어서 그런가 부정하는 말은 빠르고 단호한 구석이 있다. 말을 한 아카아시마저 놀라 움찔했고 보쿠토도 놀라서 어쩔 줄을 모른다. 아카아시는 자신의 뒤통수를 한 번 쓸어내리고는 시계탑 앞의 쇼핑몰 건물을 흘끗 올려다보았다.
“……여기서 뭐 하실 거라도 있어요?”
“어? 아, 어, 어!”
일요일로 날짜를 미루고 이 곳으로 약속 장소를 잡은 것도 보쿠토였다. 특별히 할 일이라도 있느냐 하고 물었더니 보쿠토가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카아시의 손목을 덥석 잡아 끌며 앞장섰다. 보쿠토의 손끝이 쇼핑몰 윗쪽을 가리켰다.
“영화! 영화 보자!”
“……영화요?”
순간 어제 본 풍경이 스쳐지나갔다. 이 쇼핑몰의 7층에 영화관이 있고 그 영화관에서 어제, 보쿠토와 카토가. 아카아시는 마른침을 삼켰다. 하지만 거절하기엔 영화를 얘기하는 보쿠토의 얼굴이 절박하다 못해 비장하기까지 했다. 입술만 달싹거렸더니 반쯤 울것 같은 얼굴로 싫으냐 하고 묻는다. 결국 아카아시는 고개를 흔들어야 했다. 아니에요. 봐요, 영화.
그 대답에 보쿠토가 태양처럼 활짝 웃음을 터뜨렸다.
그 뒤로는 대개가 다 그런 식이었다. 영화를 보는 건지 팝콘을 먹는건지 모르게 한 편을 끝내고 나와서 가만히 있으려니 보쿠토가 이제 밥을 먹으러 가자고 했다. 아카아시는 영화 보는 내내 집중을 하지 못해 팝콘만 열심히 먹었던 터라 배가 불렀지만 거기서 식사 말고 다른 걸 하자고 하기엔 또 보쿠토의 얼굴이 떨리는 듯 간절했고, 결국 아카아시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식사 메뉴를 묻는 말도 없이 생전 처음보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으로 데려가더니 파스타와 피자 메뉴를 주문한다. 아카아시는 테이블 한 상 가득찬 요리를 보며 조금 창백해졌지만 보쿠토는 조금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더부룩한 속에 꾸역꾸역 요리를 밀어넣고 일어서자 윗배가 당기고 현기증이 일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여기서 상태가 안 좋다는 말을 하기에는 보쿠토의 기세가 워낙 날카로울만큼 흉흉하다시피 해서 차마 그러지도 못하고, 마침내 보쿠토의 손에 이끌려 어느 카페 앞까지 당도하게 되었다.
“아.”
“아카아시?”
어제 카토와 보쿠토가 방문했던 바로 그 카페였다. 아카아시는 입끝이 바싹 마르는 기분을 느끼며 아무것도 아니라고 고개를 내저었다. 보쿠토가 뛰듯이 빠른 걸음으로 카페 문을 밀어 열며 아카아시를 향해 손짓했다. 아카아시는 늪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들어가는 기분에 침잠되어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보쿠토가 열어주는 문으로 향했다.
*
카페 내부는 어제 외관으로만 보았던 것보다 훨씬 더 아기자기한 곳이었다. 손님은 많지 않았다. 구석진 곳에 있는 여자 두 사람이 전부 다였다. 보쿠토는 그 여자들이 앉아있는 곳 근처를 맴돌다 울상을 지으며 다른 테이블로 향했다. 아카아시는 조금 느린 걸음으로 그 뒤를 따라갔다.
카페 점원이 웃는 낯으로 두 사람에게 메뉴판을 내어준다. 아카아시가 펼쳐보았지만 앞에서 초조한 것처럼 양손을 맞잡고 있던 보쿠토가 끝내 참지 못했다는 느낌으로 메뉴 두개를 턱턱 찍었다.
“이, 이거 맛있대.”
“……그래요?”
아카아시는 나직하게 대답하고는 보쿠토가 찍어준 메뉴 두개를 내려다보았다. 차갑게 만든 초콜렛 라떼와 청포도 스무디였다. 보쿠토는 단 음료를 즐기지 않는다. 그럼 이건 카토와 마신 걸까. 아카아시는 가만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로 해요.
점원이 주문을 받아가고, 잠깐의 침묵 뒤에 보쿠토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깐 화장실을 갔다오겠다는 것이었다. 보쿠토는 점원에게 화장실 위치를 묻지도 않고서 두리번거리는 기색도 없이 찾아갔다.
“…….”
보쿠토가 자리를 비우자 안 그래도 체한 듯이 찌르는 통증이 일어나는 위장이 더욱 아픈 기분이었다. 아카아시는 테이블의 모서리를 꽉 쥐고서는 입술을 깨물었다. 보쿠토에게 어제의 일을 묻지도 못할 거라면 지금이라도 오늘은 이만 헤어지는 것이 낫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강렬하게 뇌리를 잠식해간다. 아카아시가 속을 다스리기 위해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 때에 점원이 음료를 내어왔다.
“이쪽 분은 오늘도 오셨네요~!”
“아……. 네.”
테이블에 음료를 내어주며 점원이 하는 말은 자리를 비운 보쿠토에 대한 것이었다. 보아서 알고 있었기에 아카아시는 고개를 끄덕였고 점원은 빈 쟁반을 끌어안으며 보쿠토가 들어간 화장실이 있는 쪽을 흘끗 바라보았다.
“예행 연습을 두번이나 하시다니 다정하셔라.”
“……예행 연습이요?”
“아, 애인 분하고 데이트 연습하신다고 어제도 오셨었어요.”
첫 데이트라서 실수하고 싶지 않다고 얼마나 말씀하셨는지 몰라요. 점원은 그렇게 몇 마디를 친근하게 나누다가 카페의 문이 열리는 소리에 퍼뜩 고개를 돌리곤 자리를 비웠다.
아카아시는 그대로 굳어 눈 앞에 놓여있는 음료를 바라보기만 했다.
‘데이트 연습’이라는 말이 종소리처럼 귓가에서 끊임없이 맴돌며 울렸다. 데이트 연습? 어제 보쿠토가 사토와 왔던 것이 데이트 연습이었다고? 아카아시가 제대로 생각하지 못하여 음료를 주시하고 있을 때 보쿠토가 돌아왔다. 세수라도 한 건지 이마 쪽 머리카락에 물기가 있었다.
“어, 나, 나왔네.”
“…….”
“이거 맛있……. 아, 아카아시? 왜 그래? 나 뭐…….”
“데이트 연습이 무슨 얘기입니까?”
더 미루고 돌아가기엔 그의 위장이, 속이 뒤틀려 차갑게 식어버린 손끝이, 그리고 간절하게 바라는 사랑이 허락하지 않았고 아카아시는 보쿠토가 자리에 채 다 앉기도 전에 물었다.
보쿠토가 의자에 앉다가 그대로 미끄러져 의자와 함께 옆으로 굴러 넘어진다. 카페에 요란한 소리가 울려퍼지고 본래 있던 손님과 새로 들어온 손님까지 돌아보는데 아카아시는 여전히 테이블 모서리를 꽉 쥔 채로 넘어진 보쿠토를 바라보기만 했다. 어찌저찌 겨우 몸을 일으켜 다시 의자에 앉은 보쿠토는 혼비백산한 얼굴이었다.
“그, 그, 그게, 무, 무슨…….”
이 얼굴을 본 적이 있다. 자신에게 고백하는 여자아이를 아카아시에게 들켰던 그 날, 보쿠토는 꼭 이런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었다.
“데이트 연습하러 여기 오셨었다면서요.”
“아, 아니, 그, 어, 그게…….”
보쿠토의 목이 타는 듯이 붉었다. 보쿠토는 입이 마르는지 다급하게 손을 뻗어 청포도 스무디를 벌컥 벌컥 들이켰고 급히 찬 것을 먹어 두통이 올라오는지 머리를 감싸쥐었다가 입만 열었다 닫았다 하길 반복했다. 그리고 그 사이, 아카아시는 보쿠토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고 마침내 보쿠토가 테이블에 이마를 떨어뜨렸다.
“모르는 척 해주지…….”
“무슨 얘긴데요.”
“……다 알면서 뭘 무슨 얘기야. 말 그대로인걸.”
웅얼거리는 보쿠토의 목소리에 초조해진 쪽은 아카아시였다. 제대로 듣지 않으면 호흡이 힘겨워질 것처럼 마음이 급했다. 아카아시는 재차 물었다. 그래서 그게 무슨 얘긴지 말을 해 보세요.
슬쩍 고개를 들어 아카아시를 바라보았던 보쿠토가 금방 또 뺨을 붉히고서는 고개를 돌렸다. 드러난 목도 귀도 붉은 빛이어서 그다지 숨기는 데에는 효과가 없었지만 아카아시의 마음을 급하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보쿠토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천천히 더듬더듬 사실을 털어놓았다.
사실 어제 우리 반 반장한테 이것 저것 물어봤어. 아카아시랑은 처음 하는 데이트잖아. 잘 하고 싶은데, 나 한 번도 데이트 같은 거 안 해봐서 모르겠고. 그래서. 영화 보고, 밥먹고, 카페 가고 하는 거라고 해서. 평소하곤 다른 데 가고 싶은데, 그래서 괜히 맛 없는 거 먹고 이상한 거 봐서 기분 상하게 하기 싫었는걸…….
“아, 멋있는 모습 보여주려고 했는데 다 틀렸네!”
“…….”
“그런데 도대체 아카아시 어떻게 알……. 아, 아카아시? 내, 내가 많이 실수한 거야? 화, 화 났어?”
스르륵 고개를 드는 얼굴이, 지금까지의 긴장 상태에서 벗어나 평소와 같이 개구진 기색이 가득한 보쿠토였다. 아카아시의 말없는 얼굴을 보며 고개를 갸웃하던 보쿠토가 깜짝 놀라 말을 늘어놓았고 아카아시는 체기가 올라오는 속을 다스리면서도 어렵사리 마음 편한 미소를 입가에 올릴 수 있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저 체한 것 같아요.”
“체, 체했어? 정말? 무슨 그런 말을 그렇게, 아니, 어, 어떡, 어떡하지! 병원! 병원!”
“아뇨, 약국이면 충분하니까요…….”
보쿠토가 당장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약국까지 뛰어갈 기세였다. 아카아시는 일단 그런 보쿠토를 겨우 붙잡고 주문한 음료를 휴대용 잔에 옮겨 들게하고는, 꽃이 피어나는 것처럼 느린 걸음으로 카페를 나섰다.
*
근처 약국에서 소화제와 체기를 다스리는 약을 사서 입에 털어넣고서, 구석에 위치한 벤치에 앉아 잠시 시간을 보내자 속이 내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아카아시는 한시름 돌린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고 내내 곁에서 안절부절 못하던 보쿠토는 몸을 움츠렸다.
“미안…….”
“아뇨. 보쿠토 선배 탓이 아닌걸요.”
잘못이 있다면 이쪽이다. 아카아시는 그렇게 생각하며 오늘 중 두 번째로 웃음을 그렸다. 곧이곧대로 말하면 보쿠토는 뭐라고 할까. 어떻게 자신을 의심했느냐며 서운해 할까. 아니면 그렇게까지 걱정했느냐며 웃음을 터뜨릴까. 아카아시는 잠시 고민하다가 머리를 기울여 보쿠토의 어깨에 살짝 기댔다.
“……선배, 파스타같은 거 잘 안 드시잖아요.”
“아, 뭐……. 그렇긴 한데 그런 거 다들 좋아한다고 하니까.”
“음료도 이렇게 단 건 안 드시잖아요.”
“이게 그 카페에서 제일 맛있는 거라고……해서.”
보쿠토 손에 들린 초콜렛 라떼는 반 이상이 남아서, 얼음까지 거의 다 녹아 희석되어 있었다. 아카아시는 결국 또 웃음을 흘렸다. 보쿠토가 불퉁한 목소리로 왜 웃어, 했다. 아카아시는 고개를 흔들었다.
“선배가 좋아하는 걸 해야죠.”
“내가 좋아하는 건 항상 하는걸.”
그러니까 아카아시가 좋아하는 걸로 해주고 싶었어, 첫 데이트는. 그리고 앞으로도. 보쿠토의 말은 나직했고 당연한 말을 되새기는 것처럼 평이했다.
“제가 그런 걸 좋아한다고 하지는 않았는데요.”
“……그…건 그렇지만!”
그 말을 할 때 되레 열이 확 오른 것이 닿은 곳으로 느껴졌다. 아카아시는 슬쩍 웃음을 흘렸고 아카아시의 기색을 눈치챈 보쿠토가 발끈해서는 또 입술을 삐죽거렸다.
“빠, 빨리 말해줘. 아카아시 뭐 하고 싶은지.”
“보쿠토 선배가 하고 싶은 거요.”
“!”
아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화끈 달아오른다. 닿은 어깨가 뻣뻣했다. 아카아시는 또 웃었다. 한참 뒤에 겨우 어깨에서 힘을 뺀 보쿠토가 여전히 붉은 목소리로 칭얼거렸다. 아카아시, 계속 놀리고, 웃고……. 왜요. 제가 웃는 게 싫으십니까? 그런 거 아니잖아…….
“다음 번에는 보쿠토 선배가 먹고 싶은 거 먹으러 가요. 그 다음엔 제가 먹고 싶은 거 먹으러 가면 되겠네요.”
“……데이트 또 해주는 거야?”
“안 해주시면 제가 곤란한데요.”
하고 싶은 건 제 쪽이니까요. 아카아시의 말에 보쿠토는 한참이나 말이 없다. 아카아시가 살짝 고개를 떼어 보쿠토를 바라보았을 때, 보쿠토는 무릎에 쥔 손을 꽉 쥐고서 자신의 그 주먹 쥔 손만 바라보고 있었다.
“아카아시.”
“네?”
“나 진짜 뽀뽀 하면 안 될까. 너무 하고 싶은데.”
“…….”
지금 아무도 없잖아, 응? 보쿠토가 무릎만 내려다보며 눈을 꼭 감고서 간절하게 말했다. 아카아시가 그 손등을 톡톡 건드린다. 슬쩍 눈을 뜬 보쿠토가 아카아시를 바라본다. 아카아시는 살짝 몸을 움직여 그 입술에 입맞추었다.
“그런 거 묻지 말고 하시라고 고백했던 건데.”
“…….”
잠시 얼어붙어있던 보쿠토의 금빛 눈에 천천히 빛이 돌아온다. 낙뢰를 삼킨 것같은 그 눈빛에 아, 괜한 말을 해버렸나, 아카아시는 잠깐 후회하다 뺨에 닿는 보쿠토의 손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허락을 얻은 맹수는 두 사람 사이 호흡의 틈을 남길 줄 모른다.
'하이큐 > 보쿠아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보쿠아카 | 늦게 피는 수국 (0) | 2016.06.01 |
---|---|
보쿠아카 | Mission Possible (4) | 2016.05.29 |
보쿠아카 | 첫키스는 레몬 사탕 맛 (5) | 2016.05.23 |
보쿠아카 | 불꽃놀이가 피어오르는 순간 (2) | 2016.05.14 |
보쿠아카 | 우리는 붉은 꽃비를 맞는다 (1) (1) | 2016.05.05 |
보쿠아카 | 첫키스는 레몬 사탕 맛
-아카른 전력 주제 : 키스
-모브 여캐(보쿠토의 여자친구) 등장합니다
첫키스는 무슨 맛?
“별로요, 그냥 그랬는데.”
“뭐어어어!”
부실에 쩌렁쩌렁한 소리가 울려퍼지고 3학년들이 눈살을 찌푸리며 보쿠토를 타박했다. 놀랐잖아, 무슨 큰 소리를 그렇게 내고 그래. 하지만 그런 말에도 보쿠토의 기세는 수그러들줄을 몰랐다. 보쿠토의 맞은편에서 일지를 작성하고 있던 아카아시가 결국은 고개를 들고 만다.
“보쿠토 선배. 왜요.”
“아카아시, 첫키스를 해봤단 말야!?”
“…….”
“……컷흠.”
아카아시가 ‘나이가 몇인데요’라는 표정을 지었고 헛기침 소리는 보쿠토가 아니라 다른 3학년들이 했다. 보쿠토는 여전히 눈을 커다랗게 뜨고서 아카아시를 보고 있기에 바빴다. 아카아시는 사과의 뜻으로 다른 선배들에게 고개를 한 번 까딱하곤 다시 짧게 한숨을 끊어 쉬었다.
대화의 발단은 언제나 그렇듯 보쿠토였다. 첫키스는 레몬 사탕맛이래. 정말일까? 그런 말도 되지 않는 순진무구한 얘기를 아직까지 믿고 떠드는 사람은 보쿠토 정도뿐일 것이었다. 아카아시는 부실의 책상 위에 놓인 조그만 바구니에 담긴 레몬 사탕을 바라보았다. 모두 하나씩 껍질을 까 입에 넣고 있어서 부실엔 레몬향이 떠돌고 있었다.
“왜요.”
“난 아직 안 해봤다고!”
“네, 그런 것 같네요…….”
“나도 안 해봤는데 아카아시가 먼저 하다니!”
그 둘 사이에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지 않나요, 아카아시는 그렇게 말하고픈 표정만 지었을 뿐 굳이 소리 내 말을 하지는 않았다. 그 뒤로도 보쿠토는 한참이나 열을 내기에 바빴고 아카아시는 시큰둥하게 한 두마디씩 받아줄 뿐이었다.
보쿠토의 분노 아닌 분노는 모두가 하교하는 길에도 이어졌다. 두 사람이 각자의 집으로 향하는 골목 앞까지 보쿠토는 쉼없이 투덜거렸고 아카아시는 귀찮아하면서도 꾸준히 대꾸해주었다. 여기서 괜한 소리를 해서 자극해본들 덮어쓰는 건 자신일 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나도…….”
“보쿠토 선배?”
겨우 진정이 된 것 같기도 하여 아카아시가 이제 가보겠다고 인사를 하려는데 보쿠토가 입술을 꽉 깨물고서 활활 타오르는 눈으로 그를 본다. 아카아시는 본능적으로 일이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눈치챘지만 이미 늦은 시점이었다.
“두고 봐! 나만 뒤쳐지지는 않을 거니까!”
“보, 보쿠토 선배?”
아무도 뒤처졌다고는 하지 않았는데 보쿠토 머리 속에서 무슨 과정이 돌아간 것인지 저 난리다. 아카아시는 보쿠토를 붙잡고서 어떻게든 생각했던 것을 바로잡고 싶었지만 몸을 휙 돌린 보쿠토는 이미 저만치 멀어진 뒤였다.
“아…….”
붙잡고 싶은데 닿지 않는다. 아카아시는 침착하게 다음날부터 닥쳐올 것이 분명한 아수라장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
하지만 그의 예상과는 다르게, 보쿠토는 다음날이 되어도 그 다음날이 되어도 얌전했다.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것만은 분명한데 그 생각이 무슨 생각인지는 알 수 없었고 다른 부원들은 시발점이 된 문제를 이미 잊은 뒤였다. 아카아시는 말없이 보쿠토를 주시했지만 보쿠토는 때때로 사냥감을 기다리는 맹수같은 얼굴을 하기만 할 뿐 평소와 똑같았다.
그리고 그로부터 일주일 뒤, 마침내 보쿠토가 의기양양한 개선장군같은 얼굴로 돌아왔다. 아카아시는 방과 후 2학년 교실의 문을 열어젖히는 보쿠토의 표정을 보자마자 그가 무언가 일을 벌였다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보쿠토가 입을 열기 전까지도 도대체 무슨 사고를 쳤는지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아카아시!”
“네, 선배.”
아카아시는 책가방을 어깨에 걸치며 보쿠토의 표정을 살폈다. 어떻게 운을 띄울 필요도 없었다. 아카아시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그저 적절한 대처 뿐이었다. 아카아시가 보쿠토가 있는 교실 뒷문까지 가는 동안 지나가는 같은 반 친구들이 보쿠토를 향해 고갯짓으로 인사를 하며 지나갔고 마침내 아카아시가 뒷문 근처까지 도착했을 때, 보쿠토가 대뜸 아카아시의 손목을 낚아채어 체육관 방향을 향해 당찬 걸음을 내딛었다.
“아카아시이!”
“네에.”
뭔지 들어나 봅시다, 아카아시의 목소리엔 그런 기색이 있었으나 보쿠토는 언제나와 똑같이 전혀 개의치 않고 말했다.
“나도 드디어 여자친구 생겼다!”
“……네?”
아카아시는 한 번 우뚝 멈추어 섰으나 보쿠토가 손목을 틀어쥐고 앞장서는 통에 결국 끌려가고 말았다. 아카아시가 어떻게 버티고 설 새도 없이 힘찬 걸음이었다.
“선배, 그게 무슨 얘기인지……!”
“말 그대로! 나도 여자친구 만들었다고!”
“여자친구가 장난감입니까? 만들게? 설마 진짜 어디 장난감…….”
“사람이거든! 제대로 된 사람! 2학년 4반~! 후지와라 쇼코!”
아카아시는 전혀 모르는 이름이었다. 그리고 아카아시가 알지 못하는 보쿠토의 지인도 친구도 없다. 그러니 보쿠토도 모르는 사람이었을게 분명했다. 그러면 보쿠토가 어떻게 저 후지와라 쇼코라는 사람과 연인 사이가 된단 말인가? 그것도 생전 그런 것에는 관심도 없던 사람이?
“어떻게요?”
“어떻게는, 뭘 어떻게야. 고백하길래~!”
“알던 사람입니까?”
“아니?”
그 때 처음봤는데. 보쿠토가 당연한 것 아니냐는 목소리로 말했고 아카아시는 기가 막혀 눈만 깜박거려야했다. 보쿠토가 말하는 그 때란 고백하는 자리를 말하는 것이었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좋아한다 했다고 그걸 덜컥……. 아니, 그보다 ‘나도’라는 건 무슨 소리입니까. 여자친구 있는 사람이 또 누구 있어요.”
“아, 그러니까 여자친구가 문제가 아니라! 나도!”
뭔가 기세가 등등하여 말을 하려던 보쿠토가 비밀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등 뒤에 보물상자를 숨긴 어린애처럼 뿌듯한 얼굴이었다. 선배? 아카아시가 그 이름을 한 번 더 불렀지만 보쿠토는 고개를 흔들었다. 말 안 할거야!
“보쿠토 선배.”
아카아시는 앞서 걸어가는 보쿠토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를 다시 불렀지만 보쿠토는 즐거운 기색이 만연한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아카아시의 손목은 여전히 할로윈 쿠키라도 숨긴 것 같은 표정의 보쿠토에게 붙들린 채였다.
“선배, 지금…….”
“내 여자친구 무지 예뻐!”
“…….”
그 뒤로는 쭉 보쿠토의 여자친구 자랑이었다. 허리까지 오는 머리카락은 부드럽게 굽이치는 짙은 검은색이고 눈동자는 청록색에 눈을 내리뜨면 그림자가 지고, 꼭 다문 입술로 고백을 해왔다는.
아카아시가 더 이상은 보쿠토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고 그대로 체육관에 도착해 두 사람의 대화는 거기에서 끝이 났다.
*
한참을 늦게까지,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스파이크 연습에 몰두하던 보쿠토는 아카아시의 고갯짓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땀으로 범벅이 된 아카아시는 이마를 타고 흐르는 땀방울을 닦아내고는 체육관 문 밖을 가리켰다. 보쿠토가 그 눈짓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가 그만 손에 든 공도 떨어뜨린다. 바깥에는 조그만 체구의 가냘픈 소녀가 안쪽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보쿠토에게 여자친구가 생긴지 며칠이 되었으니, 저 소녀가 보쿠토의 여자친구인 것이 분명했다.
“쇼코!”
보쿠토가 연신 땀을 훔쳐내며 후다닥 걸음을 서둘러 바깥을 향했다. 아카아시는 허리를 펴며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활짝 웃는 얼굴로 소녀와 무어라 말을 나누던 보쿠토가 덥석 소녀의 손목을 움켜쥐고는 체육관 안으로 끌고 들어왔다.
“아카아시! 내 여자친구야! 2학년! 4반! 후지와라 쇼코!”
소녀를 앞으로 떠밀며 아카아시를 바라보는 보쿠토의 얼굴은 한창 놀이터에서 놀고 온 어린애같았다. 그게 아니면 가장 좋아하는 간식을 주인 앞에 물어다 온…….
아카아시는 거기까지 생각하다 그만두었다. 보쿠토가 이번에는 아카아시의 곁으로 와 서서, 아카아시의 어깨를 붙든 채 소녀를 바라보았다.
“쇼코, 아카아시야!”
실로 간단한 한 마디였다. 그 문장에는 아카아시의 그 무엇도 설명하는 것 없이 단지 이름뿐인 한 마디였으므로 결국은 아카아시가 소녀 앞에서 스스로를 소개해야 했다. 하지만 그것도 몇 마디 하지 못하고 끝이 났다. 아카아시가 자신도 2학년이라는 말을 끝내기도 전에 보쿠토가 ‘어때? 어때?’하며 그의 감상을 물었기 때문이었다.
“사람을 앞에 두고 실례입니다. 그보다 빨리 씻고 가세요. 기다린 모양인데.”
소녀가 수줍게 웃으며 고개를 꾸벅 하는데 보쿠토는 시큰둥하니, 어쩌면 조금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입술을 삐죽거리고는 알았다고 말한다. 아카아시는 유독 보쿠토의 기복을 따라갈 수 없다 싶어 한숨을 내쉬었다. 평소에도 감정이 들쭉날쭉하긴 했어도 그 까닭까지 눈에 그린 듯이 보이는 사람이었는데, 요 근래엔 도무지 그 까닭을 도통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아카아시는 소녀에게 눈인사 한 뒤 먼저 앞서나가는 보쿠토의 뒤를 따랐다. 휙 샤워실로 향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보쿠토는 체육관 출구 쪽에서 아카아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카아시는 별로야?”
“네?”
“내 여자친구.”
“……그걸 왜 저한테 물어보십니까…….”
“아카아시 표정이 안 좋으니까 그렇지!”
그럼 지금 제가 표정이 좋게 생겼습니까. 아카아시는 그렇게 말을 해버릴까 잠시 생각했다가 그만두고서는 곁에서 흉흉한 표정을 짓고 있는 보쿠토를 흘끗 바라보았다. 도대체 왜 저런 얼굴을, 왜 자신에게 하는 건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여자친구를 만든 쪽은 보쿠토가 아닌가.
“제가 어떻게 말을 할 일은 아니지 않나요.”
“그래서 맘에 안 드냐고.”
“아니, 그러니까…….”
이 대화의 양상을 알고 있다. 아카아시는 미간을 모았다. 알고는 있지만 생각한 것을 입 밖으로 내자니 소녀에게 너무 무례한 짓이라는 생각이 들고 만 것이다. 그녀가 듣고 있지 않아도. 아카아시는 한숨을 꾹 삼켰다.
“아뇨. 그게 아니라. 사람을 앞에 두고 이렇다 저렇다 말을 하는 건 실례니까 조용히 있었던 것 뿐이에요.”
“……그럼 맘에 들어?”
“제 맘에 드는 게 그렇게 중요합니까? 선배 여자친구니까 선배 마…….”
“당연히 제일 중요하지!”
그래서 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면 그 땐 어쩌시려고요? 아카아시는 그것을 묻고 싶었지만 흘려보내고서는 곁에 있는 타월을 집어들어 보쿠토에게 내밀었다.
“그보다는. 사람을 그렇게 소개해 주는 경우가 어디 있습니까.”
“웅?”
“아카아시라고만 하면 어떡해요. 다른……. 뭐 다른 건 젖혀두고서라도 이름이라도 제대로 말해줘야죠.”
“그치만 쇼코가 아카아시 이름을 알 필요는 없잖아?”
보쿠토는 타인에게 자신의 말과 생각을 오해 없이 드러내는 데에는 실로 탁월한 사람이었다. 감정의 기복이 심하다는 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두가 다 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모두’ 중에서도 단언컨대 보쿠토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아카아시였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도무지, 도대체가 보쿠토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카아시 마저도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카아시는 별로라는 거네.”
소녀를 그에게 처음 소개할 때만 하여도 꽃핀 듯이 활짝 웃는 얼굴이었던 보쿠토가 시무룩하게 어깨를 늘어뜨리고는 먼저 샤워실로 향한다. 아카아시는 손목으로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저렇게 토라지듯 가라앉아버린 까닭을 종잡을 수가 없었다. 서둘러 뒤를 따라가며 그런 것이 아니라고 말을 붙였지만 쳐진 보쿠토의 어깨는 돌아올 줄 몰랐다.
*
“보쿠토 선배……?”
소녀가 수줍은 듯이 뺨을 붉히고서 그를 올려다보았고 보쿠토는 심각한 표정으로 소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미 해가 저물어가는 하교길이었다. 함께 돌아가려고 했던 아카아시가 한숨까지 내쉬며 두 사람만 보낸 탓에 요 며칠동안 보쿠토는 언제나 소녀와 함께 하교해야 했다. 보쿠토는 그에 대해서 몇 번이나, 아침 연습을 할 때나 점심 시간이나 때로는 늦게까지 연습을 하면서도 투덜거렸지만 아카아시는 엄격했다. 오래 기다리게 했잖아요. 여자친구잖아요.
아카아시의 말은 대개 옳았고 또 옳지 않았다 하더라도 언제나 응할 생각 뿐인 보쿠토였지만 이 건에 대해서만큼은 아카아시가 불만스러웠다. 왜 함께 돌아가지 않겠다는 거야? 그 까닭을 혼자 되짚어보면 남는 결론은 하나뿐이었다.
아카아시는 내 여자친구가 별로인가?
아카아시가 들었다면 자신이 애써 한 설명은 모두 어디로 간 것이냐고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짓겠지만 보쿠토는 스스로의 결론에 도달했고 그래서 지금, 이 시점에서 소녀의 얼굴을 빤히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었다. 도대체 아카아시는, 왜 자신의 여자친구가 별로일까?
깊이 빠져 눈을 내리뜨면 그늘이 지는 청록색 눈동자도, 선이 곧은 몸도, 빛을 삼킨 듯이 까만 머리카락도 그의 눈에는 모두 예뻐 보이는데 아카아시가 동감하지 않는 이유를 도통 알기 어려웠다. 그가 여자친구를 사귀고 싶어한 것에는 다른 목적이 있었지만 그마저도 아카아시가 마음에 들지 않는 내색을 한다면야 모두 무용지물이었다.
“저, 쇼코.”
“네, 네에.”
그간에 보쿠토를 향해 사랑을 고백하는 소녀들은 있었다. 수줍었고 붉었고 또 열렬했고, 그리고 보쿠토는 그 모든 것에 무관심했다. 그에게는 필요하지 않은 부분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필요해진 바로 그 순간에 나타난 사람이 쇼코였고 보쿠토는 쇼코와 마주하자마자 이것이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편지를 받고서 교정 뒷편으로 갔다가 쇼코를 보고서는 귓가에서 상투스가 울리는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게 아카아시의 운명은 아닌 것 같아, 보쿠토는 드러내지 못한 침울함 속에서 그렇게 생각했다.
“나 연습 늦게 끝나니까 기다리지 말고 먼저 갈래?”
늦게까지 기다리는 여자친구의 존재 하나가 그렇게나 같이 하교하지 못할 이유라면 그러지 않게 만들면 되지 않을까. 보쿠토는 고심 끝에 말했지만 그것은 금방 무산되었다. 소녀가 여전히 붉은 얼굴로 서둘러 고개를 내저었기 때문이었다. ‘기다리면서 숙제하고 있으니까 괜찮아요!’ 보쿠토는 자신의 목을 한번 쓸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다고 하는데 먼저 가라고 내치는 것도 조금 그렇다. 게다가 그런 걸 아카아시가 알기라도 했다간 한 소리 들을 게 분명했다.
‘아, 그러면 아카아시랑은 어떡하지?’
이러다 졸업 할 때까지 집에 같이 못가면 어쩌지……. 보쿠토는 소녀의 집 앞에 서서 손을 한 번 흔들어주고는 몸을 돌렸다. 아카아시를 설득하든 소녀를 설득하든, 어떻게든 한 쪽 산을 넘어야 할 것 같았다. 그러지 못하면 결말은 하나 뿐이다. 보쿠토는 뒤통수를 긁적이다 뒤를 흘끗 돌아보았다. 아직 들어가지 않고 현관문 앞에 서 있던 소녀와 눈을 마주쳐 보쿠토는 그만 웃음을 비추고 말았다. 뺨을 발갛게 붉힌 소녀가 다람쥐같은 동작으로 몸을 돌린다.
아카아시한테 혼나기는 싫은데, 어쩐담. 보쿠토의 생각은 얼굴에 드러나지 않았다.
*
날은 화창했다. 점심시간 옥상의 그늘은 도시락을 먹기에 최적의 공간이었다. 그늘 아래는 시원했고 바깥으로 보이는 하늘은 쨍하여 눈이 시릴지경이었다. 조금 드물다 싶을 만큼 날이 좋았다.
그리고 아카아시는 결국 식사를 그만두고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요 근래 보쿠토는 그의 예상 밖으로만 굴러다녔고 그 절정이 바로 오늘이었다. 아침 연습 내리 보쿠토는 말 그대로 축 처져, 부의 모두가 아카아시만 바라보았는데 아카아시도 도무지 방도를 알 수가 없어 속수무책으로 그를 내버려둘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금방 금방 기분이 변하는 사람이라 점심 즈음해서는 괜찮아질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가 않았다. 매사가 기운이 넘쳐 먹는 것도 꼭 그런 사람이 연신 도시락을 깨작깨작거리기를 한참이었다. 이렇게 날이 좋은데 이 곳만 먹구름이 낀 것 같았다.
“보쿠토 선배.”
“……응.”
열심히 세워올린 머리카락이 쳐질만큼 시무룩한 목소리였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한참이나 골몰하던 아카아시는 반짝 한 가지를 떠올렸다. 근래 들어 온통 보쿠토가 이리 튀고 저리 튀게 하는 건 한 가지 뿐이었다.
“여자친구랑 싸웠습니까?”
“엥? 아냐, 그런 거!”
다투기라도 했나 싶어서 물었더니 이건 또 아닌 듯하다. 하지만 여자친구가 문제인 건 맞는 모양이었다. 아카아시는 먹다 만 도시락을 밀어두고서 보쿠토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러면 무슨 일인데요.”
“……대단한 일은 아닌데.”
“저한텐 굉장히 대단한 일이니까 빨리 말해주세요.”
“우와아앗, 내 첫키스가 그렇게 대단한 일인 거야!?”
아……. 신이시여.
아카아시는 눈 앞의 이 사람이 자신보다 한 살 연상의 선배인 것은 신의 안배가 아닐까 생각하다가 마른침을 넘겼다.
“……했습니까?”
“어, 아, 어어, 응.”
“그런데 왜 이래요.”
“아니, 그게…….”
이렇게 캐물이니 겨우 말을 할 생각이 든 것 같았다. 보쿠토가 아카아시를 흘끗 바라보더니 조금 고개를 수그렸다. 자랑하려고 했던 것이 뜻대로 되지 않아 시무룩해진 어린 아이 같았다.
“진짜 레몬 사탕 맛일줄 알았는데…….”
“뭐가요?”
“첫키스…….”
“…….”
“그냥 그렇더라고…….”
여기서 어떤 말을 해야 할까? 아카아시는 아득한 표정으로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제가 그저 그렇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애당초 좋아하기는 했습니까, 그러려고 여자친구 사귀신 겁니까, 떠오르는 문장은 많았지만 입 밖으로 나오는 소리는 없었다. 아카아시가 깊이 한숨을 내쉬자 보쿠토도 함께 어깨를 움츠린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오늘 하루종일 기분이 별로인 겁니까?”
“레몬 맛이라길래 뭔가 했는데 별로…….”
그게 그렇게까지, 이럴 문제인 건가? 아카아시는 단언컨대 보쿠토를 알아온 생애 중에 오늘만큼 지구가 그대로 터져버렸으면 좋겠다 싶은 날은 없었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었다.
“선배, 애당초 그 쇼코? 그 사람 좋아하기는 했…….”
“에에에, 왜 아카아시가 쇼코라고 불러!”
“아. 실례했습니다. 후지…….”
“아카아시, 나한테도 코타로라고 안 하잖아!”
대개 항상 붙어 있는 사람이 있으면 호칭같은 입버릇은 옮겨가기 마련이라, 보쿠토가 매번 ‘쇼코’ ‘쇼코’하고 연발하기에 저도 모르게 그렇게 말했던 것인데 보쿠토가 정색을 한다. 그리고 그 뒤에 나오는 말이 더욱 가관이었다. 아카아시는 이 타이밍에 젓가락이라도 들고 있었다면 필히 떨어뜨렸으리라 생각하며 보쿠토를 바라보았다. 보쿠토는 잃어버린 권리라도 되찾아오겠다는 듯이 기세가 솟아오르는 얼굴이었다.
“나도 코타로라고 불러!”
“…….”
“나도 이름으로 부르라고!”
“……그. 후지와라도 보쿠토 선배를…….”
나름대로는 이치를 따져 화제를 돌려보려고 했더니 또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금빛 눈동자가 아카아시를 바라본다. ‘쇼코가 날 왜 이름으로 불러?’ 보쿠토의 논리는 평소에도 인간 사회의 문명화된 규격과는 어울리지 않는, 맹수 특유의 기질이 엿보이곤 했으나 오늘만큼 심한 적은 또 처음이었다.
“아뇨……. 아닙니다. 아니에요. 밥 드세요, 빨리.”
“…….”
아카아시가 그렇게 말을 해도 보쿠토는 수저를 들 생각 없이 그를 뚫어져라, 반쯤은 노려보듯 바라보기를 계속했다. 여기서 납득시키지 않으면 지금 점심밥이 문제가 아니라 오후 수업도 들어가지 못하게 할 기세였다. 아카아시는 자신의 도시락을 앞으로 끌어오며 말했다.
“그 후지와라를 좋아하긴 했습니까?”
“좋아해!”
“아니, 그러니까 그……. 보쿠토 선배. 애인이라는 건 만드는 것도 아니고요. 곤충 채집으로 잡아온 사슴 벌레 같은 것도 아닙니다.”
“?”
누가 그걸 모르느냐는 얼굴이 그를 빤히 바라본다. 아카아시는 입술을 한번 꾹 닫았다가 침착함을 되찾아 다시 열었다. 점심을 제대로 챙겨먹지 않으면 오후 연습을 버틸 수가 없다.
“단지 생김새나 그런 것이 마음에 든다는 게 ‘좋아한다’는 건 아니라는 말이에요.”
“그럼 뭐가 좋아하는 거야?”
“……굉장히 철학적으로 느껴지긴 하는데……. 보통은 뭐, 떨어지기 싫다거나. 하루종일 생각이 난다거나……. 그 키스 같은 것도 그래요. 좋아하니까 닿고 싶어서 그러다가, 하게 되고 그러는 거고. 그렇게 할 거라고 마음 먹고 해치우듯 하는 게 아니라요.”
“…….”
“레몬 맛이든 사탕 맛이든 좋아해서 해야 그런 거죠.”
아카아시가 나직하게 마무리했다. 보쿠토는 곰곰이 생각을 해 보는 얼굴이었다. 이런 걸 설명을 해야한다는 게 어처구니없기도 했고 보쿠토 답다 싶기도 하여, 아카아시는 다 그만두기로 마음먹고서 보쿠토의 손에 다시 도시락과 수저를 쥐어주었다.
“이제 빨리 점심 드세요. 점심 시간 다 끝나겠어요.”
“…….”
심각한 얼굴의 보쿠토가 묵묵히 밥을 먹기 시작한다. 골몰하는 표정은 여전했지만 아카아시는 일단 보쿠토가 밥을 제대로 먹는 것으로 만족하여, 더는 타박하는 말 없이 자신의 식사에 집중했다.
*
부활동이 모두 끝나고 샤워까지 하고 나와서 부실에서 일지를 정리하던 아카아시는 문득 눈가에서 어른거리는 조그만 상자로 시선을 돌렸다. 레몬 사탕이 한가득 담겨있는 상자였다. 평상시엔 군것질 거리에 관심을 두지 않던 아카아시였지만 요 며칠 온통 그놈의 ‘레몬 사탕맛 첫키스’에 시달린 차다. 아카아시는 살짝 미간을 모으고서 사탕 껍질을 벗겨 알맹이를 입에 집어 넣었다.
오늘도 보쿠토의 여자친구가 기다리고 있어서, 얼른 샤워를 끝마치고 그를 내보냈던 아카아시였다. 아카아시는 미간을 모으고 일지를 내려다보았다. 생각하는 게 남다른 사람인줄은 배구부에 입부했던 첫 해 첫 한달도 지나기 전에 이미 알고 있던 일이었다. 하지만 그게 이 정도일줄은 꿈에도 몰랐다.
‘애인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서…….’
애인이라는 건 곤충 채집으로 잡아 온 사슴벌레 같은 게 아니라고 누누이 말을 했지만, 보쿠토도 알고 있다고 대답했지만 모르는 게 분명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뿔이 예쁜 사슴벌레를 잡아왔다는 투로 자신의 여자친구를 그의 앞에 내보일 수는 없는 일이다.
지금이라도 헤어지라고 해야 하나. 아카아시는 펜대를 굴리며 고심했다. 아카아시 자신이 그녀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것 같다고, 보쿠토 멋대로 결론을 짓고 난 뒤부터 보쿠토는 여자친구라는 것에 시들해진 눈치였다. ‘어린애도 아니고.’ 그런 마음으로 사귀는 건 여자친구 쪽에 실례가 아닐까 생각했지만 자신이 끼어드는 것도 실례인 듯하여 보고만 있었다.
그렇게 아카아시가 사탕 하나를 거의 다 먹고 일지를 덮을 때였다.
벌컥!
“……보쿠토 선배?”
그의 여자친구와 함께 집으로 돌아갔어야 했을 보쿠토가 문을 열어젖히고 나타났다. 얼굴에 웃음꽃이 만연한 얼굴이었다. 아카아시는 갑자기 문이 열려 놀란 와중에도 보쿠토의 얼굴을 보고서 가장 먼저 ‘기분이 나아졌나본데?’라고 생각했다. 아카아시의 코앞까지 다가온 보쿠토가 활짝 웃고는 아카아시 앞에 팔을 짚고서 얼굴을 바싹 가까이 붙였다.
“아카아시!”
“네, 네. 선배, 집에 가셨던 거 아니었습니까? 뭐 두고…….”
“나 알았어!”
“네?”
뭐 두고 가셨어요, 하고 물으려던 아카아시는 눈을 깜빡이며 보쿠토를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몸을 살짝 뒤로 빼려고 하는데 그 순간 보쿠토의 양손이 아카아시의 어깨를 덥석 붙잡았다. 거침없는 손길이었다.
“아카아시가 말한 게 뭔지 알았어!”
“네? 제가 말한 거요?”
내가 무슨 말을 했지? 내가 이 사람한테 또 무슨 말을 해서 이 사람이 이러는 거지? 무언가 사태가 잘못 돌아가도 단단히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아카아시가 필사적으로 생각을 재촉하는데 웃는 얼굴의 보쿠토가 점점 더 가까워졌다. 뒤로 몸을 빼기에도 여의치가 않았다. 보쿠토의 손에 붙들려있는 처지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아카아시가 ‘선배, 우리 너무 가까운 것 같지 않습니까’라고 말하기 위해 입술을 달싹이는 그 순간 무언가가 닿았다. 조금 거칠고 동시에 말캉한 것이었다. 언제나 상대를 직시하던 황금색 눈동자가, 그 속의 잔물결까지 보일만큼 가까운 거리에 있는 눈동자가 스르르 감긴다. 달고 무른 것이 입 안에서 섞여들어가 아카아시는 손에 쥐고 있던 펜에 힘을 주었다. 아카아시가 보쿠토의 가슴팍에 힘을 주어 밀친 건 숨이 턱까지 차올랐을 때였다.
“선, 흡, 선배, 이게, 무, 슨…….”
“역시 진짜는 레몬 사탕 맛이 나…….”
황금과 꿀을 섞어 만든 것이 녹아내리는 것 같은 눈동자였다. 아카아시는 그만 당황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보쿠토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것을 무엇으로 받아들였는지 보쿠토가 서둘러서 다시 가까워지려고 한다. 아카아시는 덥석 보쿠토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지금 당장 숨을 고르고 빨리 다그치지 않으면 버릇이 잘못 들 거라는, 강렬한 예감이었다.
“뭐가 진짜고 이게 뭔지부터 얘기해보죠, 선배!”
“아카아시가 말 해줬잖아! 좋아하는 게 뭔지!”
“네, 제가 말해드리긴 했는데요…….”
“아카아시야!”
세계가 발 아래에서부터 금빛 입자로 부서져 흩날렸다.
아카아시는 활짝 웃는 보쿠토를 바라보았고 보쿠토가 다시 말했다. 그거, 아카아시야!
“뭐, 뭐가. 뭐가 전데요.”
“내가 좋아하는 거 아카아시야!”
“…….”
아카아시는 그만 ‘내가 그럴 줄 알았습니다!’라고 버럭 외치고 싶은 마음이 들어 입을 다물어야만 했다. 싱글벙글 웃는 낯의 보쿠토가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다. 아카아시는 결국 양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아카아시?”
“그렇다고 지금 대뜸 돌아오셔서…….”
키스를!
“응! 알아차렸더니 엄청 엄청 하고 싶어져서! 근데 진짜는 정말로 레몬 사탕맛인줄 몰랐어. 나 진짜 놀랐다. 엄청 맛있어! 또 할래!”
“그건 제가 방금 전까지 레몬 사탕을 먹어서 그런 겁니다!”
“아 그래?”
그럼 내가 먹고 하면 되나?
보쿠토가 눈을 깜박거리더니 레몬 사탕이 담긴 상자 쪽으로 손을 뻗는다. 아카아시는 당장 저 사탕을 상자 통째로 버리겠다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금방 보쿠토의 손이 아카아시의 허리에 휙 감겼다.
“선배, 잠-!”
그리고 또다시 레몬 사탕 맛 입맞춤이.
결국 아카아시는 보쿠토의 품에서, 그 녹아내리는 금빛 눈동자를 바라보며 스르르 눈을 감고 말았다.
.-----
여자친구라서..는 아니고 남자친구였어도 사슴벌레 자랑하듯 했을 우리 보쿠토 선배
'하이큐 > 보쿠아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보쿠아카 | Mission Possible (4) | 2016.05.29 |
---|---|
보쿠아카 | Mission Impossible (4) | 2016.05.28 |
보쿠아카 | 불꽃놀이가 피어오르는 순간 (2) | 2016.05.14 |
보쿠아카 | 우리는 붉은 꽃비를 맞는다 (1) (1) | 2016.05.05 |
보쿠아카 | 발끝 아래엔 구름조각을 (3) | 2016.03.18 |
보쿠아카 | 불꽃놀이가 피어오르는 순간
아카아시는 조금 헐거운 유카타 자락을 여몄다. 본래 보쿠토가 입던 것으로, 보쿠토를 데리러 갔더니 보쿠토의 모친이 호들갑을 떨며 꺼내다 입힌 것이다. 보쿠토가 자기만 입기는 싫다고 그를 밀어붙여 결국 남의 집에서 옷까지 갈아입게 되었다.
“어! 사과사탕! 사과사탕이다!”
“보쿠토 선배, 저건 저렇게 보여도 사람이 먹을 게…….”
“아카아시, 사과사탕!”
“…….”
아카아시는 말을 말자는 표정을 지었고 옆에서 다른 동기들과 선배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보쿠토는 이미 저만치 달려간 뒤였다.
근처 상점가에서 매해 여는 여름 축제를, 평소엔 신경도 쓰지 않더니 갑자기 가자고 난리 법석을 부린 것은 보쿠토였다. 보나마나 옆 학교의 동갑내기 친구인 쿠로오가 축제 건으로 떠들었구나 했다. 다들 어떻게 시간이 맞아 나오게 되기까지는 며칠도 걸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유카타까지 걸치고서 본격적으로 어울리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지만.
“그거, 보쿠토 옷이야?”
“네.”
“품이 좀 넉넉하네. 이리 와봐.”
머리에 꽃장식을 단 시로후쿠는 아카아시가 어떤 경로로 보쿠토의 유카타를 입게 되었는지는 궁금해하지도 않으면서 아카아시를 손짓해 불렀다. 아카아시에게 들고 있던 군것질거리를 쥐어준 시로후쿠가 아카아시의 옷매무새를 다시 봐주었을 때, 두 사람은 잔뜩 심통난 표정의 보쿠토와 마주해야 했다. 양 손에 사과사탕을 세 개씩 들고 있는.
“…….”
“…….”
“…….”
*
보쿠토는 사과사탕 세 개는 한꺼번에 시로후쿠에게 넘겨주고, 아카아시가 들고 있던 그녀의 간식도 다시 그녀에게 돌려주고, 남은 사과사탕 하나는 아카아시의 손에, 하나는 자신의 손에, 다른 하나는 지나가는 아이에게 줘버렸다. 그러고도 심통 가득한 표정은 어떻게 되지 않았다. 시로후쿠는 웃으면서 도망친다며 자리를 피했고 다른 선배나 동기들도 보쿠토가 처음 ‘사과사탕’을 노래하며 멀어졌을 때 이미 제각기 자기가 할 것을 찾아 떠난 뒤였다.
“……사과사탕 맛있겠네요.”
저렇게 입술을 삐죽이고 있는 까닭도 알 수가 없어서 아카아시는 다른 말을 했고 보쿠토가 눈동자를 슬쩍 치켜올렸다. 심통을 부리곤 있었지만 사실은 풀어질 기회만 기다린 것 같았다.
“내가 다 가져왔어!”
“그러시면 안 됩니다.”
“에이, 뭐 어때! 가자, 아카아시! 저 쪽에 금붕어 뜨는 거 있었어!”
언제 또 못마땅한 얼굴이었냐는 듯이 활짝 웃고는 아카아시의 손을 잡아 끈다. 아카아시는 보쿠토의 손에 끌려가며 사과사탕에 살짝 입을 댔다가 역시나 단맛밖에 느껴지지 않아 고개를 흔들었다.
보쿠토는 이 모든 풍경이 생전 처음 맞이하는 것들인 듯했다. 아카아시는 금붕어가 들어있는 수조 앞에서 혼신의 집중력을 발휘하는 보쿠토를 내려다보며 슬쩍 올라오려는 웃음을 삼켰다. 원하고 바라는 게 있으면 그것 외에는 볼 줄을 모르는 사람이라, 여지껏 여름은 언제나 대회 준비와 연습만으로 가득 차 있었을 게 분명했다. 아카아시가 보쿠토를 만나기 전부터 그랬을 것이고 만나고 난 뒤에도 그랬다.
“아! 실패했어!”
“그렇게 하시는 게 아니라……. 줘 보세요.”
걸레짝이 된 뜰채를 보고서 노점의 주인이 만면에 웃음을 흘리고 있다. 아카아시는 멀쩡한 뜰채 하나를 쥐고서 날렵하게 금붕어를 떠올렸다. 보쿠토가 눈과 입을 크게 벌리고서는 굉장하다고 난리 법석이었지만, 아카아시는 떠올린 금붕어를 다시 놓아주고는 보쿠토를 잡아 끌었다.
“에, 왜애!”
“저는 금붕어 못 키우니까요. 보쿠토 선배도 그렇잖아요.”
그래도, 하지만, 보쿠토가 말을 덧붙이며 아쉬워서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지만 아카아시는 단호하게 한 번 더 고개를 흔들었다.
상점가는 정말 사람이 많았다. 오가는 사람들은 모두 제각각이었다. 가족, 형제자매, 연인, 친구, 어쩌면 오늘 처음 만난 사람들. 노점상은 소리를 높여 손님들을 끌어모으기 위해 안달이었고 상점가를 걸어가는 사람들의 반은 그런 것들을 보고 하나 하나 웃음을 돌려주었고 반은 서로에게밖에 관심이 없었다.
그리고 아카아시는 분명히, 상점의 호객 행위에도 관심이 없었고 함께 하고 있는 사람에게도 관심이 없는 쪽이었다. 물론 아주 관심이 없느냐고 한다면 그것은 아니었지만 솔직하지 못하게 경애하는 동아리 선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뜻이었다. 분명히 그랬다.
“그치만 아카아시가 잡은 건데…….”
보쿠토가 눈썹을 축 늘어뜨리고서는 중얼거렸다. 손에 들고 있는 사과사탕도 기울어져 바닥을 본다. 아카아시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상점가는 정말로 정말로 사람이 많았다. 오가는 사람들은 어깨를 부딪힐 수밖에 없고 온통 시끄러워 대화를 하려면 아주 가까이 붙거나 아니면 목소리를 높여야 했다.
“……그러다 금붕어 죽으면 속상해하실 거잖아요. 일단 좀 어디로든 가요.”
길에 서 있으니까 자꾸 부딪히고, 아카아시의 말에 보쿠토가 퍼뜩 고개를 들고는 세차게 끄덕였다. 그리곤 곧장 다시 아카아시의 손을 낚아챈 보쿠토가 개선장군마냥 척척 앞으로 걸어나간다. 상대를 직시하면 박력이 남다른 사람이 체격까지 갖추고서 앞으로 쭉쭉 걸어가니 모세의 기적마냥 길이 트였다.
아카아시는 그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삐죽삐죽 성미대로 솟아오른 머 리카락과 그 아래 드러난 목덜미. 유카타를 걸치고도 영문 모를 만큼 성큼성큼 걸어가는 것이 본인의 성격 그대로였고 지금까지 죽 아카아시가 보아온 보쿠토의 뒷모습 그대로였다.
매일 보던 바로 그 모습인데…….
“아, 이제 사람 좀 없다! ……아카아시? 사과사탕 그렇게 별로였어?”
“……보쿠토 선배가 먼저 드셔 보시든가요.”
“엣.”
보쿠토가 심오한 도전을 하는 것처럼 진지한 표정으로 사과사탕을 노려보더니 와삭 와삭 베어 먹는다. 입에 카라멜과 시럽이 엉망으로 묻고 난리가 나도 꾸역꾸역 먹으려들어서, 아카아시는 결국 한숨과 함께 보쿠토의 손에서 사과사탕을 빼앗았다. 손끝에 금방 끈적한 것이 묻어났다.
“……으어 달아…….”
사과사탕을 억지로 씹어 넘기면서 달다고 응석을 부리는 얼굴이 되는 보쿠토였다.
상점가에서 벗어난 도로는 여름 축제가 있는 날이라서 지나다니는 차량도 거의 없었고 몇몇 드물게 오가는 사람들이 전부 다였다. 상점가 쪽에서 퍼져나온 빛의 잔여물들이 여전히 주위를 비추느라 별빛을 흐릿하게 했다. 밤을 잊은 기운찬 매미소리 사이사이로 겨우 불어오는 바람이 여름의 기분을 오락가락하게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먹지도 못할 거랬잖아요.”
아카아시는 품에서 물티슈 하나를 꺼내 보쿠토에게 건네주었다. 보쿠토는 금방 개구지게 웃으며 슥슥 손을 닦아낸다. 아카아시가 알아온 얼굴 그대로였다. 변한 것도 없었고 달라진 것도 없이, 분명히 알던 얼굴 그대로.
아카아시는 눈을 가늘게 뜨고 보쿠토를 바라보았다.
‘유카타를 입어서 그런가?’
보통은 학교에서 하루종일 만나고, 주말도 연습때문에 얼굴을 보는 것이라 체육복 차림이라 특별히 사복을 입은 걸 볼 일은 드물었다. 그러다가 유카타 같은 걸 입은 모습을 보고 있어서 이렇게 낯선 감각이 자꾸만 신경을 건드리는 느낌이 드는 건가.
“아카아시, 잠시만.”
“네?”
보쿠토의 얼굴을 보고서 골몰히 생각을 하던 아카아시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카아시의 양손에 사과 사탕을 하나씩 쥐어준 보쿠토는, 손을 닦은 물티슈도 어디론가 내던져 두 손 모두 비어있었다.
“보쿠토 선배?”
“시로후쿠가 다시 옷 매줬었잖아!”
덥석 아카아시의 허리춤을 붙잡고서는 끈을 풀었다가 동여맨다. 유카타가 몇 벌이나 있을 만큼 이런 걸 곧잘 입는다고 하더니 매무새를 매만지는 손만은 능숙했다. 아카아시는 자신의 앞에서 몸을 굽히고 있는 보쿠토를 보며 양손을 벌리고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매듭 단단하게 해주셨었는데…….”
“그거랑은 상관없잖아!”
그럼 뭐가 문제인 겁니까? 아카아시의 얼굴이 소리 없이 질문하고, 그걸 알아챈 보쿠토가 시끄러운 표정을 지었다. 몰라, 모르면 됐어, 그렇게 말한 보쿠토가 아카아시의 손에서 제 몫의 사과사탕을 낚아채고는 그 손을 붙잡았다.
성큼성큼 앞서가는 걸음과 앞을 모두 가리는 것같은 넓은 등도 줄곧 보아온 모습 그대로였다. 언제나 봐온 모습이었는데.
아카아시는 자신의 가슴께를 내려다보았다. 새싹이 처음으로 움틀때 이런 느낌일까. 아니면 마지막 눈이 봄 햇볕에 무너져내릴 때, 이런 느낌일까. 가슴 언저리가 술렁거리고 있었다. 불꽃놀이가 올라오기 직전인 것처럼, 무엇이 터질지 모두 알고서 기대하는 것처럼.
“아카아시는, 내 맘도 모르고…….”
더운 여름날이었다.
매해 겪어온 더위였고 꼭 여름이 아니어도 체육관은 금방 견디기 어려울만큼 더워지곤 했다. 그래서 익숙한, 매일이 익숙한 그 더위였다. 지금이 그 매일같다는 착각이 드는 건 틀림없이 덥기 때문이다, 아카아시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렇게 익숙한 매일 매일의 모습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왜.
왜 이렇게 낯설지.
왜 이렇게 불꽃놀이가 곧 올라올 것만 같지. 왜 나는, 그걸 알고 있는 것처럼. 알고서 기대하는 것처럼.
“제가 무얼 모릅니까?”
“내 마음!”
“제가 보쿠토 선배에 대해서 모르는게 있을 리가요.”
“그러면 모르는 척 하는 거야?”
보쿠토가 멈춰서서 돌아보았다. 보쿠토의 머리 위로 가로등의 빛이 쏟아져 찬란한 굴곡을 만들고 있었다. 흐릿한 빛무리 따위는 범접할 수도 없을 만큼.
아카아시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 얼굴을 올려다보기만 했다. 보쿠토의 달아오른 뺨이 더위 탓인지 아니면 다른 까닭이 있어서인지 알 수 없었다. 씨근거리며 노려보듯 바라보는 눈동자 끝에서 아까 보쿠토가 베어 먹은 사과사탕의 단 맛이 나는 것 같았다.
그 모든 것이, 하늘에 조물주라는 것이 있어서 오늘 이곳 여기 이 순간 이 시간에 아카아시 앞에 보쿠토를 세워놓기로 작정이라도 한 것 같은 이 모든 것이, 그래서 그 모습을 보고 말아버린 자기 자신이, 아카아시는 그 모든 게 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아무 말 하지 않고 보쿠토를 보고 있기만 했다.
“아카아시, 모르는 척 하는 거냐고 묻잖아!”
“아니……. 뭘 말씀하시는 건지 모르겠는데요.”
“그럼 모르는 거 맞…….”
“그런데.”
아카아시는 기가 막히단 얼굴로 한참이나 보쿠토를 바라보다가 결국 고개를 떨어뜨렸다.
“제 마음은 알겠네요.”
“아, 아카아시?”
알고 있었음이 틀림 없다. 자신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봄 햇볕에 닿아버리면 겨울의 마지막 눈 같은 건 순식간에 무너져 내린다는 것을. 녹은 눈 속에서 간질거리는 것은 싹이 눈뜰 전조라는 것을.
더위와 함께 터져버리는 불꽃놀이는 언제나 아름다운 형태를 하고 있다는 걸, 불꽃이 피어오르기 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알고서, 알면서…….
“아카아시?”
심통맞은 표정을 하고 있었으면서 금방 또 걱정스러운 얼굴이 되어 다가온다. 아카아시는 언제고 어린애같다는 소리를 곧잘 듣는 선배를 가만히 올려다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엑! 아카아시! 나 보고서 한숨 쉬는 게 어디있어!”
“그러게요…….”
그래도 어쩔 수가 있습니까. 아카아시가 작게 중얼거리고 타이밍을 맞추기라도 한 듯이 저 멀리서 불꽃놀이가 피어올랐다. 보쿠토가 고개를 돌리고 먼 곳을 바라본다. 아카아시는 그 옆모습을 흘끗 바라보았다가 보쿠토와 마찬가지로 불꽃놀이를 올려다보았다.
오늘 이 순간, 사랑에 빠지라고 세상의 모든 것이 그의 등을 떠밀고 있었다.
아카아시는 한참이나 불꽃놀이를 올려다보다 나직하게 말했다. 제가 선배를 좋아하나 봅니다. 불꽃놀이가 터질 소리에 맞추어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남았다고 생각한 불꽃놀이가 터지지 않았고 돌아본 보쿠토의 얼굴이 타는 듯이 붉어서.
아아, 아카아시는 결국 조금 웃고 말았던 것이다. 이 여름 축제의 모든 것이 그의 등을 떠밀고 있었다.
'하이큐 > 보쿠아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보쿠아카 | Mission Impossible (4) | 2016.05.28 |
---|---|
보쿠아카 | 첫키스는 레몬 사탕 맛 (5) | 2016.05.23 |
보쿠아카 | 우리는 붉은 꽃비를 맞는다 (1) (1) | 2016.05.05 |
보쿠아카 | 발끝 아래엔 구름조각을 (3) | 2016.03.18 |
보쿠아카 | 질투는 녹색 눈의 괴물 (7) | 2016.03.12 |
보쿠아카 | 발끝 아래엔 구름조각을
“발목 손목 인대가 좀 늘어났군요. 뭘 어떻게 넘어졌길래……. 아카아시 군, 배구부랬나. 연습 너무 무리하는 건 아닌지?”
“그다지 무리하지는 않습니다만.”
“어쨌든 2주간은 절대 무리해선 안 되고, 찜질 잘 하고. 붕대 감아줄텐데 어떻게 감는지 봐두고.”
“네…….”
의사가 엄중한 표정으로 주의를 준다. 아카아시는 얌전히 대답하며 등 뒤에서 느껴지는 음울한 존재감에 한숨을 꾸욱 삼켰다.
*
“보쿠토 선배. 저 괜찮습니다.”
아카아시는 곤란한 표정을 애써 정리하며 말했지만 축 처진 보쿠토의 얼굴은 펴질 줄을 모른다. 이반만은 어려울지도 모르겠다고 아카아시는 생각했다. 애당초 계단에서 구르게 된 것이 장난치던 보쿠토를 잡아주려다 그런 것이었기 때문에.
본인의 책임에서 회피하는 법이라곤 모르는 보쿠토이니 느끼는 죄책감이 막중할 게 분명했다.
“그치만…….”
보쿠토의 시선이 발목과 손 쪽으로 향하려고 해서 아카아시는 잽싸게 소맷단을 끌어내렸다. 압박붕대를 감아놓아 다쳤다고 광고를 하고 있는 꼴이었다.
“2주만 쉬면 되니까요.”
“…….”
“아, 이번주 네코마하고 연습 경기는 못 나가겠네요. 그래도 다들 잘 하실 거니까…….”
“…….”
아카아시가 애써 말을 늘어놓았지만 보쿠토는 그 말을 듣고 있는 기색이 아니다. 아카아시의 손목에서 다시 발목으로 눈이 어지럽게 오간다.
“그러니까 제가 계단에서는 장난 치지 말라고 얘기 했잖습니까.”
“…….”
“다음부터는 조심하시고…….”
“내가 업고 갈게.”
“네?”
“업혀! 아카아시!”
아카아시가 뜨악한 얼굴로 쳐다보는데도 보쿠토는 진실로 진지했다. 아카아시가 주춤거리는 사이에 보쿠토는 정말로 그를 업어버릴 심산인 듯했다. 등을 보이며 뒤를 돌아보면서 얼른 업히라고 종용하는데 그 표정에는 한치의 거짓도 없다. 아카아시는 뒤늦게 찾아오려는 두통에 이마를 지긋이 눌렀다.
“압박붕대도 감았고, 괜찮습니다. 못 걸어갈 정도는 아니에요.”
“그치만 무리하지 말라고 의사 선생님도 그랬잖아. 빨리 업혀!”
“…….”
이 사람, 지금 정말로 120퍼센트 진심이야. 여기서 설득하지 못하면 꼼짝 않고 업혀가야 한다.
“아뇨, 보쿠토 선배. 전 괜찮으니까. 그것 말고 다른 부탁이 있습니다.”
아카아시는 자연스럽게 걸어가며 말을 돌렸다. 보쿠토가 눈을 깜박이며 주춤 주춤 그와 보폭을 맞춘다. 완벽하게 깔끔한 걸음걸이가 아니어서 조금 절뚝거리기에 보쿠토의 표정이 더욱 흔들리는데, 아카아시는 정면만 바라보며 평소와 똑같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한동안은 제가 코트에 들어가지 못하니까요. 마음에 안 드는 게 있어도 너무 처지지 마시고, 알겠죠. 그게 선배 뜻대로 되는 건 아니겠지만.”
“으응…….”
잔뜩 혼이 난 어린애처럼 축 처진 표정이었다. 그러니까 그 얼굴을 그러지 마시래도. 아카아시의 말에도 불구하고 보쿠토의 얼굴이 펴질 줄을 모른다. 다행히도 업어주겠다는 제안만은 그렇게 피할 수 있었지만 집 앞까지 데려다주겠다는 건 어떻게 하지 못했다.
“아카아시, 진짜 미안해…….”
아카아시의 집 앞에서, 보쿠토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축 처진 눈썹과 같은 모양의 어깨가 그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었다. 아카아시는 일부러 엄한 표정을 짓기 위해 애썼다. 이렇게 쉽게 무엇이든 용서하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는 것도 저 사람이 타고난 재주이리라.
“앞으로 계단에서 장난치면 안 됩니다.”
“으응…….”
이제 저 들어가 볼게요, 그 말에도 보쿠토는 계속 아카아시의 집 앞에서 서성거렸다. 아카아시가 자신의 방에서 창문을 열 때까지 보쿠토는 한참이나 떠나지 못하다가 겨우 발길을 돌렸다.
*
노력해보겠다더니 보쿠토는 정말로 노력하는 것 같았다. 평소였다면 벌써 수십번은 더 ‘아카아시!’ 라고 외쳤을텐데, 혹은 다른 누군가가 간절한 표정으로 아카아시를 바라보게 만드는 상황을 연출했을 보쿠토인데 요 며칠간 전혀 그런 것이 없었다. 같은 부원들은 물론이고 감독과 코치들까지도 놀랐다. 그 정도로 보쿠토는 실로 ‘완벽한’ 상태를 보여주었다. 컨디션에도 큰 기복을 보이지 않았고 무너지거나 멍해지는 일도 없었다.
그러니까 부활동을 하는 동안은 그랬다.
“…….”
“…….”
아카아시는 부의 일지를 기입하던 펜을 멈추고 마른 입술을 다셨다. 맞은편에 가만히 말 없이 앉아있던 보쿠토가 움찔하더니 휙 고개를 들고 그를 쳐다보았다.
“아카아시, 목 말라? 물 줄까?”
“아뇨, 보쿠토 선배…….”
둘만 남은 부실이었다.
발목도 손목도 다치고 무릎마저 염좌가 있다고 하니 정말로 할 수 있는 부활동이란 것이 없었지만 아카아시는 이참에 밀린 부의 일지와 내역이나 비품같은 걸 정리하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조금만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보쿠토에게 그렇게 컨디션이 오락가락하는 걸 적당히 하라고 일러두기는 했어도 그가 정말로 그럴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니 그런 상황이 생겼을 때 코트 밖에서라도 신경써 주기 위해 남아있었던 것도 없잖아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나 잘 할수 있으면서 말이지…….’
하지만 가장 큰 의도였던 마지막 이유는 무참해졌다. 보쿠토는 정말로 같은 사람이 맞는지 의심스러울만큼 거뜬했다. 컨디션의 기복도 보이지 않았다. 평소엔 120점과 50점을 넘나드는 게 보쿠토 코타로였다면, 적어도 아카아시가 코트에 들어가지 못하는 동안은 꾸준히 95점이었다.
부활동 시간 한정 모드이기는 했어도.
“그러면? 뭐 필요한 거 있어? 갖다 줄까?”
“아뇨, 선배, 그러니까…….”
부활동을 하는 내내 사람이 섭섭할만큼 멀쩡하더니, 부활동 시간이 끝이 나면 신데렐라의 12시 종이 치는 것마냥 어깨가 땅끝까지 처져서는 아카아시의 주위를 맴돌았다. 그리곤 아카아시가 입술만 깨물어도 안절부절 하지를 못하는데.
“그러니까 저 괜찮습니다.”
“그치만 아카아시 글씨 삐뚤빼뚤하고…….”
“……왼손으로 쓰니까 그건 어쩔 수 없잖아요.”
“어!? 그러네!? 아카아시 왼손으로도 글씨 쓸 수 있었어?”
뒤늦게 알아차린 보쿠토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카아시는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은요. 전에 한 번 다쳤을 때 불편해서 약간은 쓸 수 있게 연습했었어요.”
“……전에? 언제?”
“중학교 때예요.”
언제냐고 묻는 목소리가 전에 없이 딱딱했다. 아카아시는 알면서도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보쿠토는 금방 또 풍선에 바람이 빠진 것처럼 가라앉았다.
“연습하실 때는 멀쩡하시더니.”
“……그건 아카아시가 그러라고 했으니까…….”
“제가 코트에 있을 때에도 그래주시면 안 되는 겁니까?”
“싫어.”
안 된다는 말도 아니고 싫다는 표현이어서 이번에는 아카아시가 눈을 깜박거렸다. 보쿠토는 책상에 뺨을 댄 채 아카아시는 바라보지 않고서 다시 말했다. 싫어.
“싫어요?”
“응. 싫어.”
아카아시는 보쿠토가 바라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감사히 여기기로 하고서 마른 입술을 꼭 깨물었다. 왼손으로 쓰는 글씨는 불편하고 어색했고 걸음은 아직도 절뚝거렸다. 조금 마음을 놓을라치면 통증이 올라오고 부활동을 못한지 벌써 사흘째, 슬슬 몸은 답답한데.
그랬는데.
“아카아시, 진짜 내가 업고 가면 안 될까? 집까지?”
“……왜 그렇게 업는 걸로 고집을 부리세요.”
아카아시는 겨우 침착하게 말하곤 일지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계단에서 대차게 구를뻔한 보쿠토를 감싸다가 발목과 손목을 비끗해 병원에 들렀던 날부터 보쿠토는 걸핏하면 업고 가겠다는 얘기를 했다. 너무 아무렇지 않게 얘기해서 어처구니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래도 첫 날 잘 마무리가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그 뒤로도 보쿠토는 틈만나면 업고 가면 안 되겠냐는 말을 꺼냈다. 보쿠토는 그냥 아카아시가 땅에 발을 디디고 걷는 게 싫은 것 같았다.
“의사 선생님이 무리하지 말랬잖아.”
“운동 같은 걸 말씀하시는 겁니다. 달리기나 뛰는 거, 그런 거요.”
“무리 안 하면 빨리 낫는다는 말 아냐?”
“그러니까 그 말이 뛰거나 운동을 하거나 그러지 말라는…….”
“어쨌든 걷는 것도 힘든 건 힘든 거잖아. 한쪽 다리 아픈 거고.”
설득을 할 수 있는 기회라고 여긴 것인지 보쿠토의 말이 전에 없이 단호했다. 아카아시는 겨우 보쿠토의 사고 회로를 이해하곤 미간을 모았다.
“제 몸무게가 얼마나 나가는데 저를 업고 가시겠다고요.”
“별로 안 무거운걸.”
“…….”
반드시 이보다 더 찌우고 말겠다, 아카아시는 속으로 아득 다짐을 하고는 인내를 속에 새기며 다시 남은 상냥함을 모조리 끌어왔다.
“저 업고 가시다가 보쿠토 선배가 다치기라도 하면 그건 또…….”
“그럼 좋겠다.”
“뭐라고요?”
매섭게 목소리를 높였는데 평소라면 화들짝 놀라면서 그의 눈치를 봤을 사람이 이번에는 눈도 마주하지 않고 여전히 뺨을 책상에 댄 채로 말을 잇는다.
“그럼 좋겠다.”
“저는 싫습니다. 절대 안 됩니다.”
“…….”
아카아시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보쿠토는 말이 없었다. 두 사람 사이가 고요하다가 보쿠토가 슬쩍 턱을 대고 다시 말했다.
“진짜 업고 가면 안 돼?”
“안 됩니다.”
그 말에 보쿠토가 토라진 듯이 다시 고개를 돌리고 책상에 뺨을 댔다.
*
아카아시는 벤치에 앉아서 네코마와의 연습 경기를 바라보았다. 보쿠토는 여전했다. 날아다녔고 뛰어올랐다. 사실 아카아시가 가장 걱정했던 것이 오늘이었다. 상대방은 보쿠토를 속속들이 알고 있는 네코마고, 오늘은 보쿠토를 어떻게든 신경써 줄 아카아시도 코트에 없다. 여기서 무참히 지기라도 했다간 보쿠토는 어쩌면 일주일 내내 우울해할지도 모른다.
“토스 올려!”
그리고 아카아시는 자신의 고집 부린 오판을 인정했다. 지난 며칠간 그가 코트에 없었을 때 그랬던 것처럼, 아니, 그보다 더 보쿠토는 여전히 쌩쌩했고 거뜬했으며 실로 ‘에이스’다웠다. 코트에 내리꽂히는 공과 흩날리는 땀방울, 그리고 승리를 불러오는 스파이크와 환호성.
“허허. 오늘은 유독 펄펄 나는 것 같은데, 보쿠토 군?”
아카아시는 옆에서 들리는 네코마 감독의 말에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동감을 표시했다.
연습경기는 치열하게 3세트까지 흘러가 후쿠로다니의 승리로 끝이 났다. 서로 땀을 훔치며 인사를 한다. 아카아시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쿠로오와 손을 억세게 맞잡고 인사를 한 보쿠토가 곧장 몸을 돌려 어깨로 땀을 닦으며 아카아시에게로 똑바로 다가왔다. 보폭이 컸다. 네트 근처에서 아카아시가 있는 곳까지 오는 건 몇 호흡도 되지 않았다.
“봤어, 아카아시?”
“네? 아, 네…….”
방금 전까지 격렬하게 경기를 한 탓에 보쿠토의 호흡이 조금 거칠었다. 아카아시는 벤치에 앉은 채 보쿠토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기묘한 서운함을 입밖으로 내기엔 그의 침착함이 허락해주지 않았다. 더군다나 컨디션 난조를 주의하라고 말을 한 게 자신이었지 않은가. 저 없이도 쌩쌩하게 뛰는 모습 잘 보았다는 말은 할 수가 없어서 아카아시는 네, 하고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그 대답을 들은 보쿠토가 체육관 천장을 올려다보며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다른 사람들은 코트를 정리하고 있었다. 마신 음료의 빈 병과 땀에 젖은 수건을 모으고, 네트를 치우고, 바닥을 쓸고 닦는다. 코치와 감독들도 따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어서 벤치에 앉아있는 건 보쿠토에게 붙들린 아카아시뿐이었다.
“나. 아카아시가 하라는 대로 했어, 그치?”
“아……. 네.”
허리에 손을 대고서 숨을 고르던 보쿠토가 마침내 아카아시 앞, 바닥에 무릎을 대고 섰다. 아카아시가 놀라서 눈만 깜박거리는데 보쿠토가 주먹을 꽉 쥔 손을 아카아시의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힘을 주어 파르르 떨리는 손이었다.
“그러니까 이제 진짜 정말로, 진짜 제발, 제발 좀 업고 가게 해줘.”
“……네?”
“빨리 낫자. 손이든 발목이든. 응?”
“자, 잠시만요. 보쿠토 선배. 왜 결론이 그렇게…….”
“나 이제, 농담 안 하고 정말로 머리 터질 거 같거든?”
보쿠토가 한 마디 한 마디 씹어 삼키듯 말하며 간절한 얼굴로 아카아시를 올려다보았다. 아카아시는 무릎에 닿는 보쿠토의 손이 너무 뜨거워 입을 달싹거리기만 했다.
“나 진짜 아카아시 너한테 토스 안 조르고 이만큼이면 잘 한거 아냐?”
“그건, 정말, 굉장히 잘 하셨는데요, 선배, 그런데…….”
“나 진짜 아카아시 없어서 힘들어 죽겠다고! 내가! 내가 못해먹겠다고!”
보쿠토가 빽 소리쳤고 체육관이 조용해졌다. 정리를 하던 사람들이 모두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아카아시가 놀라서 입만 벌리는데 보쿠토가 다다다 빠르게 외쳤다.
“나 때문에 이렇게 됐으니까 내가 업고 다닌……!”
그리고 아카아시는 그보다 잽싸게 손으로 보쿠토의 입을 막았다. 이 사람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보쿠토가 억울해 죽을 것 같은 표정으로 아카아시를 바라보았다.
“선배, 일단 잠시만 진정하시고 어디 다른 데라도 가서 이야-아니, 아뇨! 여기서! 여기서! 선배 잠시! 여기서 하죠!”
다른 데로 가자고 말을 했더니 사람을 업는 것이 아니라 안아들 기세여서, 아카아시는 생에 이보다 더 빠르게 입을 움직인 적 없다는 느낌으로 말했고 겨우 다시 보쿠토를 진정시킬 수 있었다. 이제서야 사람들은 으레 후쿠로다니의 저 한 쌍이 매번 하는 장난 비슷한 거라고 여긴 건지 시선을 돌린다. 아카아시가 한숨을 내쉴 때 보쿠토가 아카아시의 손을 천천히 떼어냈다.
“아카아시, 나 진짜 죽겠단 말야…….”
축 처진 목소리가 응석을 부린다. 그리고는 그의 무릎에 고개를 기대어왔다.
“다리 빨리 나으면 안 돼? 응? 내가 업고 다닐게.”
“…….”
“아카아시가, 하라고 했으니까 버티긴 했는데, 나, 아카아시이…….”
나 진짜 아카아시 없이 너무 힘들어, 힘들어 죽겠어, 아카아시, 아카아시…….
아카아시는 차마, 자신의 무릎에 기댄 보쿠토의 머리를 쓰다듬지 못하고 주먹을 꽉 쥐고는 손등으로 눈을 가렸다. 그러지 않으면 붉어진 얼굴을 금방이라도 들킬 것 같았다.
“그…래도 업는 건 안 돼요. 빨리 낫게 할테니까, 조금만 기다리세요.”
“……진짜 안 돼?”
“안 됩니다.”
보쿠토가 아카아시의 무릎에 얼굴을 묻은 채 그의 셔츠 자락을 쥐고 흔들며 재차 물었다. 안 돼? 안 됩니다. 진짜 안 돼? 안 돼요. 나 정말 완벽하게 잘 업을 수 있는데. 안 돼요. 그럼 공주님 안기는? 그건 죽어도 안 됩니다.
“병원 바꿀까? 다른 병원 가볼까?”
“뭘 다른 병원을 가요. 다 나아가는데.”
“그래도…….”
“빨리 가서 마저 정리하고 오세요.”
“아카아시는?”
“전 일지 정리하게요.”
“부실 가? 업어줄까?”
“…….”
눈을 치뜨고 노려보자 그제서야 그에게서 떨어지는 보쿠토다. 아카아시는 툴툴거리며 공을 정리하러 가는 보쿠토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결국 또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그 숨이 조금 붉은 빛으로 떨렸다.
'하이큐 > 보쿠아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보쿠아카 | 불꽃놀이가 피어오르는 순간 (2) | 2016.05.14 |
---|---|
보쿠아카 | 우리는 붉은 꽃비를 맞는다 (1) (1) | 2016.05.05 |
보쿠아카 | 질투는 녹색 눈의 괴물 (7) | 2016.03.12 |
보쿠아카 | 그대 가슴에 입술 자국 (10) | 2016.03.04 |
보쿠아카 | 사랑을 주세요! (5) | 2016.02.26 |
보쿠아카 | 질투는 녹색 눈의 괴물
아카른 전력 주제 - 질투
여름 합숙은 덥고 힘들었다. 매미는 쉼없이 울었고 땀방울은 훔쳐내는 것보다 턱을 타고 떨어지는 것이 더 빨랐다. 그 와중에 잠깐의 휴식 시간이었다.
“너, 놀랄만큼 마주보질 않네.”
“…….”
마른 목을 축이기 위해 음료를 쭉 들이키던 아카아시는 잠깐 동작을 멈추었다. 말을 건넨 사람은 쿠로오였다. 아카아시는 천천히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언제나처럼 가벼워 보이는 웃음을 입가에 매단 쿠로오가 바닥에 앉아서 그를 올려다보며 다시 말했다.
“좀 마주봐주지 그래? 저렇게 안달하는데.”
아카아시가 보쿠토에게 무관심하느냐 한다면 결코 그렇지 않았다. 그렇게 세심하게 보살펴 주는 것이 누가 봐도 보통 친밀한 사이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보쿠토는 끊임없이 아카아시의 관심을 갈구하여, 옆에서 한 마디씩 하기를 애냐, 정도껏 해라, 그렇게 좋냐, 그런 얘기들 일색이었다.
쿠로오는 보쿠토가 어째서 매번 그러는지 알고 있었다.
아카아시가 보쿠토를 바라볼 때는 언제나 보쿠토가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을 보고 있을 때 뿐이었다.
*
그러니까 보쿠토가 아카아시를 바라볼 때면, 아카아시는 언제나 다른 곳을 보고 있다. 다른 곳, 다른 사람, 다른 물체. 보쿠토가 아닌 다른 방향. 마주치지 않는 시선, 엇갈리는 눈길. 눈이 마주치지 않는데 마음을 어찌 확신할 수 있나, 보쿠토가 아카아시의 관심을 끝없이 갈구하는 건 어쩔 수 없이 당연한 일이었다.
“기가 막히게 눈 한번 마주치질 않아요.”
대화를 나누면서도 둘은 도마에 오른 상대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였다. 그래도 쿠로오는, 보지 않아도 지금 보쿠토가 어떤 모습인지 잘 알고 있었다. 이쪽에 눈을 떼지 못하고 있겠지. 그마저도 오래지 않아 아카아시를 되찾으러 달려올 것이었다. 아마도 곧.
“녀석이 애가 타 죽는데. 일부러 피 말리려고 그러는 거야?”
“글쎄요. 별로 그런 의도는.”
자각은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카아시가 조금 쿠로오에게서 눈길을 피한다. 헤에, 쿠로오는 가벼운 소리를 흘렸다. 저 둘의 관계는 견고한 반석같은 단순한 것처럼 보이는데도 조금만 가까이 눈을 두고서 살펴보면 그렇지 않았다.
“그럼 왜 그래? 너도 싫어하는 건 아니잖아.”
싫어하는 사람에게 그럴 수는 없다. 그 끈기 있고 상냥한 관심은 의무감이나 책임감에서만 비롯되었다고 볼 수 없는 다정한 색이 있었다.
아카아시의 청록색 눈동자 위로 굴절된 한여름의 햇빛이 비쳐 언뜻 초록색인듯 보였다.
“마주하면 알게 되니까요.”
“뭘 알게 되는데?”
아카아시는 한숨을 내쉬며 쿠로오를 바라보았다. 쿠로오는 만면에 흥미가 한가득이었다. 그렇지만 아카아시는 쿠로오의 그런 가면에 속지는 않았다.
“왜 갑자기 그런 게 궁금해지셨습니까? 저 사람이 무슨 얘기라도 했습니까?”
“아-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저 녀석이 바보긴 해도 멍청이는 아니라고? 나한테 네 얘길 할 거 같냐.”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됐다. 하여튼 너도 너무 애 말라붙게 그러지는 마라.”
“안 그럽니다.”
“안 그러는 게 아니니까 하는 말이네요.”
그 말을 끝으로 쿠로오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네코마 쪽으로 향한다. 그 직후에 귓청을 쩡하고 울리는 소리와 함께 묵직하니 무게감 있는 몸이 와락 아카아시에게 매달려왔다.
“아-카아시!”
“……보쿠토 선배.”
“연습 하자! 연습~! 토스 올려줘!”
보쿠토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목소리가 높았고 여전히 씩씩했다. 아카아시는 자신을 끌고 가며 앞을 보고 있는 보쿠토의 옆모습을 흘끗 바라보았다. 정면을 향해 있던 금빛 눈동자가 금방 그를 쳐다본다. 아카아시는 공을 가져오겠다며 자연스레 그 손을 풀고 보쿠토에게서 멀어졌다. 뒤통수에 달라붙은 시선이 느껴져서 뒤돌아보지 않았다.
쿠로오의 말에 동감한다. 보쿠토는 바보였지만 멍청이는 아니었다. 풀죽었다 일어서기가 제멋대로에 들쭉날쭉이고 떼를 쓰고 응석을 부리는 것은 선배에 주장인데도 막내같지만 그런 모습으로 숨길 수 없는 면면이 있었다. 새카만 테를 두른 금빛 눈동자로 상대를 직시하여 꿰뚫어보는 통찰력이 그러했고 그것을 바탕으로 결론짓는 판단력이 그러했다. 아카아시 자신이 온 마음을 다해 그를 지켜보았기 때문에 아카아시가 가장 잘 알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이었다. 그가 보쿠토와 마주하지 못하는 것은.
사랑을 하고 있는데, 왜 나는 아름답지 못한가요.
아카아시는 냉정하고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보쿠토를 향한 자신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보쿠토가 자신에게 기대어 오는 것이 싫지 않았다. 그가 수그러들었을 때 일으키는 것이 자신이라는 사실을 번거로이 여긴 적도 없었다.
그렇게 보쿠토의 웃는 얼굴에 비치는 빛이 좋았다.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바라보는 상대가 자신이라는 것도 좋았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때 가장 먼저 달려오는 사람이 그라는 것도 좋았다. 쉬는 시간이면 당연한 듯이 2학년 교실에 들이닥쳐 그를 끌고 가는 것, 먹고 있던 과자를 선뜻 반으로 나누어 주는 것, 자신의 이름을 소리 높여 부르는 것. 그것들은 모두 보석의 파편이나 별빛의 조각처럼 고운 빛으로 반짝거리고 아름다웠다.
그런데,
분명히 그런데, 그렇지 않은 것들도 있었다.
저는 분명 사랑을 하고 있는데 왜 제 안에 아름답지 않은 것이 섞여 있나요.
묻지 못했고 물을 수 없어서 아카아시는 보쿠토와 마주하지 못했다. 마주하게 된다면 보쿠토는 분명 전부 알아차릴 것이기 때문에.
*
“넌 멍청이는 아닌데 바보는 맞는 거 같다.”
“뭐!?”
보쿠토가 꽥 소리를 지른다. 쿠로오는 배구공을 허리에 낀 채 낄낄거리며 보쿠토를 놀렸다. 열에 차서 손발을 뻗는 보쿠토의 뒤에 붙은 눈길이 있다. 한여름의 햇빛에 굴절되어 초록색으로 변한 눈동자가 고요하게 그들을 향하고 있었다. 보쿠토가 한참이나 소리를 치고 법석을 떨고 나서, 한 김 식어 어깨를 축 늘어뜨리곤 뒤를 흘끗 돌아보았을 때 아카아시는 매니저들의 비품 정리를 돕고 있었다. 잠깐 손발을 쥐었다 폈다 하던 보쿠토는 별다른 인삿말도 남기지 않고 쌩하니 아카아시에게로 달려가 버렸다.
“바보네, 바보.”
자신을 봐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니까 끊임없이 목이 말라서 매달리고 다그치고, 옆에서 그런 자신을 도통 이해하지 못하는 것엔 관심조차 두지 않아 태도가 변하지 않는다. 고작 원하는 순간에 눈이 마주치지 않는 것만으로 보쿠토는 저렇게 확신하는 것이다. 아카아시는 자신에게 마음이 없다고.
보고 있으니까 애틋하게 여기는 것이고 보고 있으니까 알아주는 것이고 그렇게 보고 있으니까 눈을 피할 수 있는 것인데.
보쿠토는 매니저들 사이에 있는 아카아시를 채어와 목이 마르니 어쩌니 얘기를 한다. 아카아시는 한숨을 쉬면서도 크게 타박하는 말 없이 보쿠토에게 음료를 챙겨주었다. 그 손끝은 다정했고 마시는 모습을 보고 있는 눈매에는 차분하게 가려둔 애정이 둥글게 그 형태를 비추고 있었다. 그 끝에 자연스레 마주하지 않고서 비껴나가는 눈빛은 보쿠토가 언제 자신을 쳐다보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알 수 있을 만큼 마음을 기울여 지켜보았기 때문에.
아카아시가 보쿠토를 보고 있는 걸 다른 모두가 알고 있는데 보쿠토만 몰랐다. 아카아시는 영영 말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고 그런 아카아시를, 아카아시가 들이마시고 내쉬는 호흡의 끝자락까지 믿고 있는 보쿠토는 영영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보쿠토가 금방 다른 사람들에게 불리고 아카아시는 자연스레 보쿠토를 보내주었다. 보쿠토가 아카아시를 끌고 가려고 하지만 아카아시가 고개를 젓는다. 정리할 게 있어서요. 보쿠토가 먼저 떠난다. 남는 건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아카아시의 눈동자였다. 바닥을 녹여버릴 듯이 뜨겁게 내리쬐는 한여름의 태양빛 아래에서 언뜻 초록색으로 물들어가는 눈동자.
보쿠토가 아쉬운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뒤돌아보았을 때 아카아시는 보쿠토가 마시고 간 물병을 정리하느라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
“보쿠토가 뭘 알게 된다는 거야?”
“……쿠로오 선배.”
하루 훈련을 마무리 짓고 정리를 마치고서 잠깐 지쳐 앉아있는데 눈 앞으로 그림자가 졌다. 아카아시는 고개를 들었다. 쿠로오의 등 뒤로 지는 해가 비쳐들어 쿠로오의 표정을 구분하기 어렵게 했다. 아카아시는 한숨을 내쉬었다. 쿠로오는 확실히 보쿠토의 친구였다. 이런 끈기 같은 게 똑같은 면을 보면 분명했다. 제대로 얘기하지 않으면 이번 합숙 내내 시달릴 게 눈에 훤하여 아카아시는 반쯤은 포기하는 마음으로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그 끝에는 보쿠토가 있었다. 카라스노의 후배들과 큰 소리로 웃으며 떠들고 있다.
“저 바보는 널 철썩같이 믿고 있는데 뭘 그렇게 겁내는지 모르겠네.”
“믿고 계시니까요.”
“그게 문제야?”
“……‘아카아시는 좋은 녀석’이라고……아주 믿고 계시거든요.”
“그 놈이 그러는 걸 모르는 사람도 있어?”
보쿠토는 마음을 숨길 줄 모른다기 보다는 숨기지 않는 사람이다. 그가 누군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잠시만 보고 있어도 알 수 있었다.
아카아시는 천천히 보쿠토에게서 시선을 거둬들여 노을을 응시하며 나직하게 말했다.
“그런데 전 그다지 좋은 사람은 아니니까요.”
“에에, 예상치 못한 자기비하네.”
“그런 건 아닙니다. 그냥 사실을 말하는 거예요.”
아카아시는 나직하게 대답했다. 관대하지도 않고 속이 깊지도 않다. 그저 좋아하니까 보고 있으니까 잘 알게 된 것 뿐이고 그저 좋아하니까 그 빈틈을 채워주고 싶어했던 것 뿐. 그리고 그 외의 다른 모든 것들은 짙고 질척한 것들 뿐이었다.
다른 사람을 향해 웃는 보쿠토,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하는 보쿠토, 다른 사람이 찾고 부르는 보쿠토……. 그런 것들을 향하는 마음은 소설이나 노랫말 속의 사랑처럼 아름답지도 달콤하지도 않았다. 지독하게 쓴 맛이 깊이 베어든 악몽의 터럭같았다. 버리려고 해도 버릴 수 없었고 거울을 보면 눈동자의 깊은 곳에 뚜렷한 형체를 남기고 감정을 주장했다.
“순정이네~!”
“네?”
“그러니까 예쁘고 착한 모습만 보여주고 싶다 이거잖아.”
“…….”
순간 아카아시의 귓가가 살짝 붉어지고 눈을 피한다. 쿠로오는 웃음을 터뜨리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눌렀다. 그렇게 숨기고 감추고 싶었던 게 고작 질투였어?
“아카아시. 보통은 말야.”
“네?”
“그런 걸 보면 오히려 홀~딱 반하게 된다고.”
“네에?”
아카아시가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본다. 쿠로오는 히죽 웃었다.
“아카아시. 나중에 밥 한끼 쏴라.”
“네?”
“그리고 보쿠토한테는 확실히 설명하고. 알겠냐? 걔가 파워가 5야. 맞으면 골로 간다고.”
“네? 그게 무슨…….”
쿠로오가 양손으로 아카아시의 뺨을 붙잡았다. 아카아시는 눈을 크게 뜨고 쿠로오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리고 두 사람의 눈동자가 점점 더 가까워졌다.
*
과연 전국구, 한 손으로 꼽는 스파이커다운 팔힘이었다. 아카아시는 보쿠토에게 팔을 잡혀 끌려가면서도 생각했다. 살짝 풀어보려고 했는데 꽉 틀어쥔 손은 보쿠토의 허락이 있기 전엔 어떻게 할 수 없을 게 분명해 보였다. 보쿠토가 멈춰선 건 체육관 뒤쪽에 다다랐을 때였다. 아카아시는 등 뒤에서 느껴지는 벽의 미적지근한 온도와 코앞의 보쿠토 사이에 갇힌 채 손목의 은은한 통증을 참았다.
멀리서 매미가 운다. 여름이었다.
“……보쿠토 선배, 무슨 일인…….”
“저기, 아카아시.”
보쿠토의 목소리가 잠긴 것처럼 지독하게 낮았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던 목소리였다. 이 갑작스러운 상황에 대해 물으려 했던 아카아시는 입을 다물었다.
“나 그래도 참았는데.”
“선배……?”
“날 안 보는 건 괜찮거든, 아카아시.”
보쿠토가 아카아시를 벽에 밀친 채 그를 내려다보았다. 땀에 젖어 흘러내린 머리카락 사이로 금빛 눈동자가 번뜩인다. 아카아시는 차마 그 눈을 마주하지 못하고 보쿠토의 어깨 쪽으로 시선을 피했지만 보쿠토가 아카아시의 턱을 붙잡고 들어올렸다.
“그런데 다른 사람을 보는 건 못 참겠어.”
“선…….”
“나 싫어?”
“선배, 잠시만요. 지금 뭔가 오해가…….”
“대답해. 내가 싫어?”
“……그럴 리, 읍-.”
이어진 것은 잡아먹을 것같이 깊 입맞춤이었다. 금빛 눈동자가 그를 뚫어지게 직시한다. 아카아시는 마주한 그 눈동자 안에서 자신의 안에 있는 것과 같은 모양의 것을 보았다. 새카맣고 질척한, 지독하게 쓴 맛이 깊이 베어든 악몽의 터럭같은 것. 그런데 왜 저것은 저렇게도, 아름다워서…….
한참을 이어진 입맞춤은 아카아시가 호흡이 부족해 매달릴 때에야 겨우 끝이났다. 붙잡고 있던 손도 스르르 떨어지고 보쿠토가 고개를 떨어뜨린다. 바로 방금 전까지 그를 붙잡고 격하게 입맞추었던 기세는 눈 깜짝 할 새에 온데간데 없이 사라진 채였다.
“……쿠로오한테 갈 거야?”
묻는 목소리가 처량했다. 아카아시는 부르틀 것 같은 입술을 꽉 다물었다가, 귀를 타고 목끝까지 새빨개진 보쿠토의 정수리를 바라보았다.
같은 것이 그의 눈에도 있었다.
“오해가 있다고 말씀드렸잖습니까, 선배.”
“무슨 오해.”
이렇게 사람을 붙잡고 입을 맞추어 놓고서는, 이제와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 순서가 엉망진창이었는데 밉지가 않았다.
“쿠로오 선배하곤 아무 사이 아닙니다.”
“하지만 아까 뽀뽀했잖아.”
보쿠토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억울함이 가득한 눈동자가 그를 본다. 자기 걸 뺏긴 어린애보다도 더 분하고 억울한 얼굴이었다. 아카아시는 눈매를 누그러뜨렸다.
“아니에요. 눈에 뭐가 들어가서 잠깐 봐주신 겁니다.”
“뭐어!”
억울해하던 얼굴이 창피함으로 새빨갛게 물드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아카아시는 허둥거리는 보쿠토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보쿠토는 한참이나 어쩔 줄 모르다가, 마구잡이로 사과의 말을 읊다가, 또 머리카락을 쥐어 뜯다가, 그 모든 것을 다하고서도 끊어지지 않는 아카아시의 눈빛에 또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을 했다.
“그리고.”
아카아시는 잠깐 호흡했다.
“선배 말고 다른 사람을 본 적 없습니다. 선배를 안 본 적도 없어요.”
“하, 하지만.”
질투로 꽉 찬 목소리가 응석을 부린다. 하지만 내가 볼 땐 한 번도 봐준 적 없었잖아, 하지만 그럴 때마다 다른 사람하고 있었잖아, 하지만, 하지만……. 오랫동안 쌓아온 게 분명한 많은 생각들이 봇물 터지듯 흘러나왔다. 아카아시는 그 단어와 목소리 사이에 잠겨 천천히 보쿠토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선배가 다른 사람하고, 있으면…….”
“……으, 으응?”
그것을 견디지 못하는 스스로를 보일 자신이 없었어요. 그걸 싫다고 말할 수가 없었어요.
오랫동안 자신의 눈동자 안에서 끓어온 괴물을 끄집어내놓는 심정으로 토로한다. 기댄 어깨의 열이 눈에 닿았다. 그런 걸 보이면 실망하실까봐 무서워서 마주할 수가 없었어요.
“……억울해.”
“네……?”
잠깐의 침묵 뒤에 보쿠토가 아카아시의 어깨를 붙잡고 그를 자신에게서 떼어냈다. 그렇게 마주한 얼굴은 까닭 모를 분노와 억울함이 섞여 엉망진창이었다. 아카아시가 눈만 뜨고서 깜박거리는데 보쿠토가 거의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어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
“억울해! 억울해 죽겠어! 아카아시가 나 안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그렇게 생각한 시간 너무 너무 억울해!”
“아.”
“내가! 내가 고작 그런 걸로 아카아시한테 실망할 것 같았어!?”
“……아.”
“아카아시는 바보야. 바보. 바보 멍청이야.”
이번만은 변명할 수가 없네요, 아카아시는 보쿠토에게 안겨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다시 그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그마저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마주하지 못한 만큼 보겠다며, 보쿠토가 금방 아카아시를 떼어내어 그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쥐고 눈을 바라보았던 탓이었다. 시선이 얽히고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면서도 보쿠토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결국 부끄러움을 견디지 못한 아카아시가 그 눈을 피하기 위해서 입을 맞추어야 했다.
노을이 섞인 그림자가 아주 가깝게 붙어 체육관의 뒤쪽으로 길게 길게 늘어졌다.
'하이큐 > 보쿠아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보쿠아카 | 우리는 붉은 꽃비를 맞는다 (1) (1) | 2016.05.05 |
---|---|
보쿠아카 | 발끝 아래엔 구름조각을 (3) | 2016.03.18 |
보쿠아카 | 그대 가슴에 입술 자국 (10) | 2016.03.04 |
보쿠아카 | 사랑을 주세요! (5) | 2016.02.26 |
보쿠아카 | 흉터 (4) | 2016.02.19 |
보쿠아카 | 그대 가슴에 입술 자국
-아카른 전력 주제 : 추억
추억이란 놀라워, 돌이켜 보면 아름다운 것만 남은 것처럼 보이잖아요.
*
“저한테 처음 말 걸었을 때, 기억 납니까?”
아카아시의 앞에 있는 사람은 말이 없었다. 아카아시는 특별한 대답을 기대하지 않은 채, 소파의 팔걸이에 살짝 몸을 기댄 채 테라스 쪽 창을 바라보았다. 너른 창을 통해 보드라운 햇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이른 봄을 알리는 온기는 상냥했다.
“저는, 기억하고 있어요.”
아카아시는 조근한 목소리로 말을 늘어놓았다. 변화무쌍한 표정, 굉장한 스파이크를 성공시키고도 불만족스러운 표정은 어린애가 투정부리는 것처럼 앳되었는데도 눈을 뗄 수가 없는 빛이 있었다. 되짚어보면 그 때 이미 마음을 뺏긴 것이 아니었을까 한다.
“처음으로 손 잡았던 건 기억 안 나시죠.”
손을 잡았다고 말하기도 어려운 거였으니까요, 아카아시는 나직하게 말했다. 연습경기였어요. 저는 처음으로 코트에 들어갔죠. 제가 토스했고 선배가 스파이크했었어요. 성공했죠. 멋진 1점이었습니다.
“나이스 토스, 아카아시…….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아, 손바닥이 마주치는데. 짝 하는 가볍고 경쾌한 소리가 나고, 그 날은 그렇게 잊을 수 없는 날이 되었다.
“처음 고백 들은 날도 생각나네요. 그 날도 술을 잔뜩 마시고오셔서는.”
제가 대학 들어가고 반년도 안 됐을 때였죠. 갑자기 찾아오셔서 그러시는데 제가 얼마나 놀라고 당황했는지……. 무슨 말 했는지 기억, 안 나시죠? 말을 늘어놓던 아카아시는 테라스 바깥의 풍경을 바라보던 고개를 천천히 돌려 앞을 내려다보았다.
“어젯밤처럼 말예요. 기억 안나시죠?”
“아, 아, 아카아시, 그, 그게…….”
그의 앞에는 손끝까지 파랗게 질린 보쿠토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
사건은 한 시간 전으로 돌아간다.
보쿠토는 눈을 찌르는 아침 햇살에 찌뿌드드한 몸을 일으키며 쭉 기지개를 켰다. 등이 뻑적지근하여 둘러보자 침실 바닥이었다. 보쿠토는 졸음이 가시지 않은 멍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제 술을 왕창 마신 기억이 어렴풋하게 떠올랐다. 밤에 자다가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나? 보쿠토는 머리를 긁적이며 바닥에서 일어섰다. 그의 연인은 세상 모르고서 몸을 조금 굽힌 채 새근 새근 자고 있었다. 보쿠토는 그 이마를 살짝 쓸어 입을 맞추곤 침실 밖으로 나갔다.
소파에는 아마도 어제 그가 입었던 것 같은 셔츠가 뉘어져있다. 보쿠토는 테라스의 창을 살짝 열어 환기하고는 부엌으로 방향을 틀었다. 가스레인지 위에 얌전히 앉아있는 냄비의 뚜껑을 열자 숙취해소용이 분명한 국거리가 보인다. 보쿠토는 행복을 가득 담아 히죽 웃었다.
그렇게 보쿠토는 샤워하고 나와서 아침상을 차리고, 그런 뒤 연인을 깨워 늦은 주말의 오전을 만끽할 셈이었다. 그러니까 욕실 문을 여는 순간까지는 그랬다.
“~~!!”
비명을 지르지 않은 건 그간 운동 선수로 활약해온 경력이 쌓아준 순발력 덕분이라고밖엔 말할 수 없다. 보쿠토는 심장이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걸 손으로 틀어막고 꽉 눌렀다. 욕실의 거울에는 보쿠토 그가 비춰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얼굴과 목덜미 하며 흐물한 티셔츠 안으로 보이는 가슴팍에까지 립스틱으로 찍힌 입술 자국이 진득하게 남아있는 자신이.
‘뭐, 뭐지!? 뭐야? 뭔데!?’
어제 분명 회식이 끝나고, 끝나고……. 회식이 어떻게 끝났더라? 보쿠토는 머리를 싸맸지만 그 부분이 새하얗게 비어있었다. 아무리 기억을 헤집어도 떠오르지 않았다. 보쿠토는 당장 샤워기의 물을 틀고, 아직 찬물이 나오고 있는 중인데도 불구하고 샤워기 아래로 뛰어들었다. 서둘러 립스틱 자국을 씻어내고 욕실을 뛰쳐나와 소파에 놓여 있던 옷을 확인해본다. 어제 입은 셔츠였다.
“아……. 으…….”
울음소리는 차마, 침실에서 아직 자고 있을 아카아시를 생각해 낼 수 없었다. 목깃부터 앞판이 놀랄만큼 선명하게 붉은 입술 자국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보쿠토는 샤워하면서 쓴 수건과 셔츠를 같이 뭉쳐 세탁기 안에 집어넣었다. 몇 가지 세탁물이 쌓여있어서 정신없는 와중에도 그것까지 함께 넣고 세탁기를 돌린다.
그리고 그가 주르륵 허물어지듯 몸을 돌렸을 땐 아카아시가 카디건 하나만 두른 채 문틀에 기대어 서 있었다.
농담 없이, 보쿠토는 말 그대로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아, 아, 아……아카, 아시…….”
“일찍 일어났네요, 보쿠토 선배?”
“어, 어어. 햇빛 들어서. 깨, 깼어?”
“네. ……샤워도 하셨네요.”
“어, 어어…….”
“세탁기도 돌리셨어요?”
“으, 으응, 지, 지, 지금…….”
거실을 둘러보며 아카아시가 느리게 하나 하나 말하고, 보쿠토는 방금 샤워를 하고 나왔는데도 불구하고 땀이 나는 기분을 만끽하며 더듬더듬 대답했다. 아카아시는 천천히 거실로 나와 느긋한 동작으로 소파 위에 앉았다. 보쿠토는 주춤거리며 아카아시가 앉아있는 소파 근처로 걸음을 옮겼다. 아니, 옮기려고 했다.
“왜 아침부터, 빨래 하셨어요?”
아카아시가 소파의 팔걸이에 팔을 기대며 묻는다. 시선은 창밖을 향해 있었고 어조는 되레 다정한 듯 상냥하고 나직했다. 보쿠토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아카아시가 턱을 괴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샤워……. 말끔하게 하셨네요. 뭐 묻은 거, 전부.”
그리고 보쿠토는 곧장 아카아시 앞으로 달려가 무릎을 꿇고 앉았던 것이었다.
*
“아, 아카아시, 아카아시! 나 진짜 진짜! 진짜 아무 일도 없었어!”
“그래요?”
아카아시가 신기하다는 듯이 반문하고 보쿠토는 곧장 기가 쑥 죽어 고개를 떨어뜨려야했다.
“지, 진짜, 진짜야…….”
“기억이 안 나신다면서요. 아무 일 없었던 건 기억이 나십니까?”
“그, 그게, 그러니까…….”
아카아시는 덤덤한 목소리로 물었고 보쿠토는 대답하지 못했다. 두 사람 사이에 지옥 비슷한 침묵이 지나갈 즈음 아카아시가 다시 말했다.
“오늘 숙취 있으실까봐 국……. 해놓았는데.”
“고, 고마워.”
“뭐가요? 버릴건데요.”
“…….”
보쿠토가 그렁그렁한 얼굴로 올려다본다. 아카아시는 평소와 똑같은 얼굴로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소파 곁의 협탁 위에 올려놓은 것들을 챙겨 보쿠토에게 내밀었다. 보쿠토의 자동차 열쇠, 지갑, 휴대전화였다.
“나가세요.”
“헉.”
“아, 여기 보쿠토 선배 명의죠? 제가 나갈까요.”
“아, 아, 아냐! 아냐! 아니야! 아카아시는 여기 있어!”
보쿠토는 아카아시가 내미는 걸 손에 쥐고서는 우당탕 소리가 날것 같은 기세로 신발을 챙겨 신고 현관 문을 열었다. 열어젖히는 순간 아카아시를 바라보았지만 아카아시는 엄한 표정으로 말할 뿐이었다. 당장 나가세요.
곧 문 닫히는 소리가 나고 실내는 고요한 정적 속에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아카아시는 한숨을 내쉬곤 세탁기 앞으로 향했다. 투명한 창 너머로 세탁물이 빙글빙글 돌아간다. 거기엔 하얀 셔츠도 있었다.
“저건 드라이 맡겨야 되는 건데…….”
아카아시는 세탁기가 돌아가도록 내버려 두고서 한숨을 내쉬었다. 보쿠토가 정말로 무언가 잘못을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보나마나 같이 술을 마신 동료가 장난을 친 게 분명했다. 새벽에 술이 취해 초인종을 누른 게 기적일 기세로 들어온 보쿠토를 보고 안 것이고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 그에게 장난이나 칠까 했던 것이었는데, 지나치게 당황하며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을 보자 그만 자신도 모르게.
세탁기 돌아가는 것만 가만히 보고 있던 아카아시는 몸을 일으키고 겉옷을 한 겹 더 챙겨 입었다. 보쿠토도 너무했다고 생각하지만 자신의 심술이 지나쳤다는 자각은 있었다. 있다 돌아오면 맛있는 거라도 해줘야겠다, 아카아시는 한숨을 섞어 중얼거리며 지갑을 챙겨들고 밖으로 나섰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지금까지 보쿠토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여전했다. 그를 보면 환하게 웃는 것도, 눈에서 뚝뚝 감정이 보이도록 숨김없이 표현하는 면도, 모든 것에 앞서 아카아시 그를 우선하는 것까지도 여전히 같았다.
그 표정, 목소리, 감정, 과거의 추억이라고 말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현재와 같았고 그저 기억 속에서 아름답게 퇴색되었을거라 여겼던 것들이 매일 매일 모래사장의 파도처럼 연거푸 밀려들었다. 그렇게 파도가 왔다 간 자리엔 시간에 마모되어 부드럽게 둥글어진 조개조각들이 남아 빛을 받고 반짝거렸다. 아카아시는 그 모래사장을 걸으며 그 조개 조각들을 줍고 있었다. 그것들은 하염없이 많았고 끝없이 아름다웠으며 발끝을 간지럽히는 파도는 매일 매일이었다.
“하여튼…….”
그렇게 몰아세우면 자길 믿지 못하느냐고 한 번쯤은 큰 소리를 쳐 볼법도 했을텐데 그러지를 않았다. 아카아시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흘렸다. 자기가 잘못했다고 생각하면 도통 고개를 들지 못하는 면도 여전했다.
아카아시는 느긋하게 장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는 카페에 들러서 커피도 샀다. 보쿠토 본인도 조금 놀랐을테니 달래줄 요량으로 군것질거리도 몇 개 챙겨들고 산책하듯 집으로 돌아온 아카아시는 우선 빨래부터 마무리했다. 세탁기에 돌려버린 셔츠는 일단 말리고, 창을 열어 환기를 한다. 거실은 청소기를 한 번 돌리고 그 사이에 샌드위치를 만들어 아침 겸 점심을 해결한 아카아시는 아까 보쿠토와 얘기를 할 때 앉았던 소파에 다시 앉아 그 협탁 아래쪽으로 손을 뻗었다.
종종 열어보는 앨범이 거기에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로 되돌아가면 확실히 앳된 것도 같은데 그와 동시에 그 위로 지금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그렇게 보면 또 지금과 똑같아서. 아카아시는 앨범을 하나 하나 넘겨보았다. 그의 손끝에서 시간이 흘러간다. 그러다 중간에 탁하게 찍힌 사진 하나를 발견한 아카아시는 넘기던 것을 멈추었다.
한밤중에 찍어, 형광등의 조명 아래에 흐릿한 사진이었다. 보쿠토가 정신없이 뻗어서 자고 있는 얼굴이었다. 언제 찍은 사진인지는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 보쿠토가 처음으로 마음을 고백했던 날이었다.
-사, 랑을, 내가, 너를……!
술에 취해서 인사불성이 되어서는 그의 방문을 두드렸다. 보쿠토는 거의 울고 있었다. 아주 오래된 마음이 견디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미안하다는 사과를 연거푸 했다. 보쿠토의 고백은 고백이되 참회에 가까웠다. 너는 나를 믿어줬는데, 미안해, 미안해, 내가 사랑해서 미안해, 너를, 내가, 사랑을, 미안해…….
깨어난 보쿠토는 그 모든 걸 기억하지 못했다. 자기 마음만은 알고 있는지 허튼 소리를 하지는 않았나 불안해하기는 했으나. 아카아시는 모르는 척 해줘야 하나 생각했지만 그럴 수가 없게 되었다.
자신을 보는 보쿠토의 눈은 언제나 그 순간 그대로였다. 감추지 못하고 억누르지 못해서 흘러나온 모든 감정을 그러쥐고서, 애틋한 사랑이 그저 넘치는 그 눈 그대로였다. 고백하기 전에도 그러했고 고백하고 난 뒤에도 그랬다. 고백을 듣기 전에는 몰랐던 것 뿐이었다. 너무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아주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이, 변함없는 눈빛이었다. 10년 전에도, 5년 전에도, 바로 어젯밤에도, 오늘 아침에도. 그 눈빛이 타오르는 듯이 격렬했던 사랑 고백을 그저 과거의 추억으로 남겨두지 않고 끝없이 현실로, 그의 눈 앞으로 끌어왔다. 의심할 수 없는 눈이었다.
아카아시는 다시 사진을 넘기기 시작해 끝까지 보고서는 천천히 앨범을 덮었다. 몸을 소파에 기대고 눈을 감는다. 그러면 금방 고등학생이던 보쿠토가 활짝 웃으며 손을 휘저었다. 그 얼굴이 지금의 보쿠토와 똑같았다.
*
<아, 아카아시. 진짜 미안한데……. 이, 이제 그만 봐주지 않을래……? 얘 죽겠어…….>
해가 저물 무렵 쿠로오에게서 전화가 왔다. 사과라기보다는 사죄의 뜻이 잔뜩 담긴 목소리였다. 이제 슬슬 보쿠토가 올 때가 되었는데 싶던 차에 때마침 전화가 왔는데 생각보다 쿠로오의 목소리가 절박했다.
아카아시가 쿠로오의 집에 도착했을 때 보쿠토는 거실에서 모로 쓰러지듯 누워 자고 있었다. 눈은 퉁퉁 부은 채로.
“아, 아카아시. 야. 그거 내가 했거든, 그거. 자국 낸 거. 그냥 장난 친거였어.”
“압니다. 인주로 도장 찍듯 해뒀던데요.”
자국 전부가 선명하니 남아 있어서, 한 번 찍을 때마다 립스틱을 새로 칠한 것이 분명했고 다시 말해 그 자국을 남기는 것 자체가 목적이었다는 뜻이다. 놀리려는 의도가 만만인 것을 보자 마자 알고 있었다.
“아, 알면 애 좀 봐주지! 너 집나가버렸다고 울고 불고 난리가 났어……. 좀 전에 펑펑 울다가 지쳐서 뻗어 잤다.”
“제가 집을 나가요? 아……. 중간에 장 보러 갔다왔는데.”
“……애를 쫓아내놓고 장보고 왔냐…….”
쿠로오가 탄식조로 말을 하거나 말거나 내버려 두고서, 아카아시는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고 보쿠토의 머리맡으로 다가갔다. 보쿠토 근처에 빈 이온음료 병이 있다. 아마 쿠로오가 억지로 먹인 것 같았다. 아카아시는 손을 뻗어 잠든 보쿠토의 눈에 손을 올렸다. 열이 맴돌아 뜨끈했다.
“……보쿠토 선배.”
몸을 살짝 숙이고 작은 목소리로 불러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보쿠토가 튕기듯이 벌떡 일어났다.
“아, 아, 아카아시!”
“잘 주무셨어요?”
“어, 아, 아니, 아니, 이게, 그러니까, 잔 게 아니라, 아, 아니…….”
“이제 집에 가야죠.”
“!”
빨갛게 충혈된 눈동자인데도 바라보는 시선은 여전했다. 아카아시는 한숨을 내쉬어 웃음을 감추고서 그의 손을 잡고 일으켜세웠다. 보쿠토는 처음에는 얼떨떨한 표정이다가 이윽고 손에 힘을 꽉 주고 붙들듯이 마주잡았다.
“쿠로오 선배, 감사했습니다.”
쿠로오가 지은 죄가 있다는 표정으로 머쓱하니 인사를 하고, 아카아시는 말이 없는 보쿠토를 데리고서 바깥으로 나왔다. 보쿠토는 운 흔적이 역력하여 눈이 부운 얼굴로 그저 아카아시의 손만 꽉 쥐고 있었다.
“보쿠토 선배.”
“으, 으응.”
“술 그렇게 많이 마실 거예요?”
“아, 안 마실 거야!”
“저 버리고 다른 사람한테 가실 거예요?”
이 질문은 사실 그저 장난이고 심술이었는데, 보쿠토가 그 자리에 우뚝 멈추어 섰다. 아카아시도 손을 잡혀 있어서 설 수밖에 없었다. 보쿠토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카아시는 다시 물었다.
“가실 거예요?”
“……내가 잘못, 했는데, 아카아시…….”
“네, 했는데요?”
“그래도 어떻게 그렇…….”
정도가 지나쳤다며 질책이라도 하려는 것 같은 목소리였는데 끝이 견디지 못하고서 떨렸고 붉은 눈 끝으로 눈물이 뚝 떨어진다. 아카아시는 그의 앞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는 보쿠토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보쿠토 역시 그를 보고 있었다. 한결같았고 여전했다. 고등학교 그 시절 코트 위에서 보는 그 눈이 술에 취해 사랑을 고백하던 그 눈이었고 지금 그의 앞에서 눈물을 떨어뜨리는 이 눈이었다.
“……제가 잘못했어요. 제가 나쁘게 말했네요. 미안해요, 보쿠토 선배.”
“아카아시 미워.”
눈물을 꽉 들어채운 목소리가 원망스레 말한다. 아카아시는 그의 손을 잡아 끌었다. 저도 미웠는데요. 보쿠토가 또 말했다. 이번엔 아카아시가 더 미워. 그렇습니까, 그 말에 보쿠토가 발이라도 구를 기세가 된다. 국이랑 밥이랑 해서 먹어요. 불고기 해줄게요. 보쿠토가 조그맣게 묻는다. 정말이야? 그래요, 아카아시가 대답했다.
파도가 밀려왔다 스르르 물러나는 그 사이에 아름다운 조개 껍질이 반짝반짝 엿보였다. 언젠가 둥글고 부드럽게 마모되어 다시 돌아오겠지, 아카아시는 보쿠토에게 붙잡힌 손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하이큐 > 보쿠아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보쿠아카 | 발끝 아래엔 구름조각을 (3) | 2016.03.18 |
---|---|
보쿠아카 | 질투는 녹색 눈의 괴물 (7) | 2016.03.12 |
보쿠아카 | 사랑을 주세요! (5) | 2016.02.26 |
보쿠아카 | 흉터 (4) | 2016.02.19 |
보쿠아카 | 그대네요 (6) | 2016.02.13 |
보쿠아카 | 사랑을 주세요!
사랑을 주세요!
-아카른 전력 주제 : 감기
보쿠토는 자기 감정에 솔직하고 기복이 들쭉날쭉한 면 때문에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곧잘 막내 취급을 받곤 하지만, 그런데도 사실 그가 그렇게 무너지는 것도 다시 일어서는 것도 자기 자신의 문제일뿐이었다. 그에게 타인의 존재는 큰 의미가 없었다. 그러니까 아무리 강건한 적 앞에서도 결코 굴복하지 않는다. 어린애같은 주제에 잘도 그런 면만은 눈이 부셔서, 과연 주장이라고 모두가 인정할 수 밖에 없게 했다.
다시 말해 그가 사람에게 손을 벌리고 관심을 요구하는 쪽이느냐고 한다면, 오히려 보쿠토는 타인의 시선에는 관심이 없는 쪽에 가깝다는 이야기였다.
*
“…….”
“……보쿠토 선배?”
평소와 같이 아침 연습을 하기 위해 옷을 갈아입고 체육관 문을 열던 아카아시는 뒤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몸을 돌렸다가 눈을 깜박거리기만 했다.
아닐 것 같으면서 부에서 가장 독하게 연습을 하는 사람은 언제나 보쿠토였고, 그에 맞추다보니 함께 등교가 일러지고 하교가 늦어진 건 아카아시였다. 그러니까 이 시간에 체육관에서 인기척을 낼 사람은 당연히 보쿠토인데, 그 보쿠토가.
“선배?”
“……아카아시?”
묘하게 상기된 얼굴인데 언제나 선명하던 눈빛이 조금 흐렸다. 반응도 더디다. 아카아시는 미간을 찌푸린 채 곧장 보쿠토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상태가 왜 이렇습니까.”
“응? 상태……?”
호흡에 열이 있다. 아카아시는 한숨을 내쉬며 보쿠토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서늘한 체온이 마음에 들었는지 보쿠토가 눈을 내리감으며 그 손에 이마를 기댄다. 아카아시는 맞닿은 이마가 뜨거워 한숨을 삼켰다.
“열나네요. 감기입니까?”
“……감기……?”
평생을 아파본 적이 없는 모양이었다. 아카아시는 혀를 찼다. 열에 잠겨 흐릿한 눈이 깜박거린다.
“뭔가 이상한 것 같긴, 했는데…….”
앓아본 적이 없으니 이게 아파서 열이 오른 줄도 모르고서 이상하다고만 생각하고 등교한 것 같았다. 아카아시는 문을 열다 말고 다시 보쿠토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눈가도 붉고 열도 올라서 오늘은 도통 무엇도 할 만한 모습이 아니다.
“지금 시간이 이르긴 하니까……. 집에 가서 좀 누워있다가 병원 들러요.”
“……싫어.”
보쿠토가 잠깐 입술을 달싹거리며 고민하는 것 같더라니 돌연 고개를 내저었다. 아카아시는 미간을 모았다.
“어차피 연습 못해요, 그 상태로는. 말 들으세요, 선배.”
아카아시가 조근조근 달래는 목소리로 보쿠토를 얼렀다. 하지만 보쿠토는 요지부동이었다. 스르르 고개를 젓고는 가지 않을 거라고 고집을 부린다. 하지만 그마저도 금방, 고개를 젓다가 머리가 울렸는지 보쿠토가 몸을 기울여 아카아시의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싫은데…….”
“이렇게 열이 나면서 어떡하려고요. 서 있기도 힘들지 않아요? 가서 쉬어요.”
“집에 가기 싫, 어……. 안갈래…….”
“왜요. 부모님하고 싸우기라도 했어요?”
아카아시는 어깨에 닿은 보쿠토의 몸이 정말로 뜨거워서 어떻게든 보쿠토를 설득하려고 했지만 보쿠토는 도통 말을 들을 기색이 아니었다. 웅얼거리면서 고개를 젓듯이 아카아시의 어깨에 이마를 부볐다. 아카아시는 보쿠토의 등을 쓸어주며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선배, 그러면 양호실에라도 누워있어요. 그러다 점심때쯤 되면 병원도 문 여니까 그 때 병원 다녀오시고.”
“……양호실? 학교……?”
“네, 학교에.”
정말로 집에서 싸우고 나오기라도 한 걸까. 아카아시는 도통 이해 못할 고집을 부리는 보쿠토 생각에 한숨을 꾹 삼켰다. 양호실에 가 있자는 이야기는 그래도 먹힌 것 같았다. 보쿠토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인다. 아카아시는 반쯤 열다 만 체육관 문을 내버려두고서, 보쿠토를 이끌고 양호실로 향했다.
양호실 문은 아직 열리지 않은 채였지만 운동부 주장들에게는 양호실 여벌 열쇠가 하나씩 있었다. 평소 그런 걸 관리하는 데에는 도통 재주가 없는 보쿠토였기에 그 열쇠도 아카아시가 가지고 있었다. 아카아시는 서둘러 문을 열고서 보쿠토를 비어있는 침대 위에 눕혔다. 이불을 목 끝까지 올려주자 그제야 끙끙 앓는 소리가 난다. 평소의 시끄러운 모습에 비하자면 놀라울만큼 기운이 없었다. 아카아시는 보쿠토의 이마에 냉각 시트를 붙여주었다.
“아카아시…….”
“네, 선배. 목마르진 않아요? 뭐라도 마셔야지 싶은데.”
“……상냥해……?”
열에 들떠 흐릿한 목소리가 이상한 질문을 하며 이불 바깥으로 손을 뻗었다. 아카아시는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그 손을 다시 이불 안으로 넣어주었다.
“무슨 말이에요? 일단 잠이나……. 선배, 손을.”
“……싫어어…….”
아카아시의 팔을 끌어안은 보쿠토의 손은, 앓아누운 사람이라는 실감을 할 만큼 힘이 약해 뿌리치려면 어렵지는 않은 일이었다. 그러지 않은 건 바로 그래서였다. 붙잡은 손아귀의 힘이 평소와는 너무 달라서.
사람이 평소에 워낙 활기차고 시끄러워서 그런지 목소리를 낼 기력도 없어 앓고만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절로 마음이 누그러졌다. 가야해? 그렇게 묻는 것 같은 눈동자가 가물가물했다. 아카아시는 잡히지 않은 손으로 보쿠토의 눈을 덮었다.
“……일단 좀 주무세요.”
평소에도 곧잘 뭔가를 하고서 봐주지 않았느냐고 응석을 부리는 보쿠토였지만. 차라리 그 응석이 낫다, 아카아시는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며 보쿠토의 머리맡에 앉아 한숨을 삼켰다.
*
보쿠토는 천근만근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마른 목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고 눈앞이 빙글빙글 돌았다. 눈은 뜨겁고 호흡에 모르는 열기가 섞여 있다. 꿈처럼 몽롱하게 아카아시의 목소리를 들었던 기억이 났다. 선배, 감기예요.
“아, 선배. 깼어요?”
“……아카아시……?”
망막 위로 보고 있어도 보고싶은 후배의 모습이 언뜻 비쳤다. 청록색 눈동자가 일렁거리는 것처럼 보이는 건 자신이 지금 이유를 모르게 어지럽기 때문일 것이다. 뺨 위로 조금 서늘한 손이 닿아온다. 처음에는 깜짝 놀랐다가, 보쿠토는 그 손이 떨어지지 않게 뺨을 기댔다.
“아직 열이 좀 있는데……. 병원 갔다 와요, 선배.”
보쿠토는 고개를 저었다. 언제나 맺고 끊는 것이 확실하게 말하던 후배가, 지금은 전에 없이 조근하고 다정한 목소리였다. 아마도 자신이 아카아시의 말대로 ‘아프기’ 때문에.
“병원 가서 주사라도 맞으면 금방 나을 거예요. 연습, 안 할거예요?”
“그런, 거 아니야…….”
잠긴 목에서 비틀린 소리가 난다. 보쿠토는 시야가 굴곡진 거울에 비추는 것처럼 느껴지는 와중에도 아카아시의 손으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 손은 금방 그의 곁을 떠나갔다.
“아, 아카, 아…….”
“일단은 물 좀 마시고.”
곁에서 사라진 손이 서러워 속에서 무엇인가가 울컥 넘치려는데 돌아섰던 등이 그 손에 무언가를 쥐고 돌아왔다. 철제 컵이었다. 안에는 물이 담겨 찰랑거린다. 아카아시는 보쿠토를 부축해 침대에 앉히고는 그의 입에 물컵을 대주었다. 보쿠토는 이부자락을 쥔 채 꼴깍 꼴깍 물을 받아 먹었다.
“선배, 열이 안 내리는 것 같아요. 병원 가요.”
“…….”
“그래야 빨리 낫죠.”
“…….”
보쿠토는 자신과 시선을 맞추어 조근조근 그를 달래는 아카아시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카아시는 보쿠토가 마시던 물잔을 치워놓고서는, 그의 이마와 뺨을 손으로 한 번 매만져보곤 다시 한숨을 쉰다. ‘약을 먹고 잤는데도 열이 안 떨어지네…….’ 중얼거리는 말은 보쿠토가 듣기를 상정하지 않은 말이다. 그리곤 이부자락을 보쿠토의 어깨에 둘러주고 다시 또, 달래듯이.
“택시 타고 가면 금방이니까, 병원.”
“……같이 가?”
“네? 아……. 그래요, 같이 가요. 그럼 갈거예요?”
보쿠토는 잠시 생각을 하다가 또 그 생각하기에 지쳐 앞으로 몸을 기울어뜨렸다. 아카아시가 조금 놀란 듯하다가 얼른 그를 안아 받친다. 보쿠토는 아카아시의 어깨와 목덜미가 이어진 정애(情愛)의 틈에 고개를 묻었다. 이렇게까지 가까이 있어본 적은 없었다. 경기에서 이겼을 때 저도 모르게 껴안아본 것이 전부였다. 이런 것을 바라고 있었는 줄은 스스로도 몰랐는데 닿은 순간 알게 된다. 떨어지기 싫다는 것을.
“선배, 걷는 것도 힘들어요?”
등을 쓸어주는 손도 숨이 닿는 것을 허락해준 어깨도 자신이 이렇게 아프기 때문에. 그렇다면 영영 낫지 않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
“선배, 병원 가서 빨리 나아야 연습도 하죠.”
“으응…….”
그렇지만 그러면 아카아시가 올려주는 토스도 칠 수 없으니까, 그건 안 되는데. 보쿠토는 열에 멍해진 머리로도 용케 생각하면서도 아카아시의 어깨에서 고개를 들지는 않았다. 귀는 먹먹하고 눈은 뜨거운데도 천 너머로 아카아시의 어깨가 있다는 것만은 새기듯이 다가왔다.
평상시의 아카아시는 할 말은 똑부러지게 했어도 그를 대하는 것은 언제나 확실히 선배를 대하는 투였고 그만큼 거리가 있었다. 모두가 ‘사실은 네가 막내야!’라고 놀리곤 했는데도 아카아시는 한 번도 그를 어린애 대하듯 하지는 않았다. 그 정중한 거리감을, 나 사실은 싫어했구나. 보쿠토는 속으로 생각했다. 지금 아카아시가 어린아이를 어르고 달래기라도 하듯이 다정하게 등을 쓸어주는 손이 너무 좋아, 어떻게 하면 계속 이렇게 해 달라고 말할 수 있을까 고민했으나 떠오르는 방법이 없었다.
지금 이런 것은 그가 아프기 때문에. 감기에 걸려 열이 나고 아프니까. 그러면 나으면, 다 나으면, 그러면.
“병원 안 가면 안 돼……?”
“왜요. 지금 아프잖아요, 선배.”
“그치만…….”
지금은 아프고 괴롭지만, 병원에 가지 않아도 언젠가는 나을 감기였다. 굳이 병원에 가서 조금 더 빨리 나을 필요가 있을까.
“계속 열 나서 힘들잖아요. 보쿠토 선배.”
“그치만, 그치만…….”
막연히 아무 이유 없이 그저 병원 가기 싫다고 떼쓰는 어린아이를 하나 하나 상냥하고 다정한 말로 도닥여주는 것같은 목소리가 귓가에 감겼다. 떨어지기 싫어하는 그를 기어코 떼어내어서는 이마를 쓸어본다. 그를 바라보는 아카아시의 눈가에 깊고 달콤한 걱정이 부드럽게 물결치고 있었다.
“……계속 아플래.”
“선배?”
“계속…….”
아카아시의 시선을 피해 눈동자를 도르르 굴린다. 아카아시의 눈길이 빈틈없이 따라붙어 그를 살펴보았다. 걱정해주고 있었다. 염려해주는 것이었다.
“안 돼요.”
“아, 안 돼……?”
“네. 안 됩니다.”
“왜애…….”
아카아시는 서럽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보쿠토를 보고서 한숨을 꾹 눌러삼켰다. 한 번도 아파본 적도 없던 사람이 열감기를 심하게 앓으니 어리광이 대단했다.
“선배는 우리 에이스잖아요. 얼른 나으셔야죠.”
며칠 뒤면 근처 고등학교와 연습 시합이 있다. 유명 대학의 입학처 사람들까지 보러 온다는 소문이 돌고 있는 시합이었다. 인터하이라거나 봄고같이 성적을 낼 기회는 아직 남아 있지만, 그래도 굳이 그런 자리에서 컨디션이 나쁜 모습을 보일 건 없는 일이다.
“우리 에이스…….”
“그래요.”
“우리 말고…….”
“네?”
뭐라 웅얼거리던 보쿠토가 돌연 또 몸을 앞으로 기울여, 아카아시는 보쿠토가 침대 밖으로 넘어가지 않게 서둘러 받쳐 안아야 했다. 우리 말고, 그런 웅얼거림이 다시 들렸지만 뒷말까지 또렷하게 들리지는 않았다.
*
-아카아시! 아카아시, 지금 거 봤어? 봤어?
가만히 있자면 뜨거운 태양과도 같아서, 사실은 존재감을 모르는 척 하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이었다. 봤어요, 굉장하네요. 아카아시 그가 미사여구를 붙이는 데에는 천성이 능숙하지 못해 짧게 말을 하여도 보쿠토는 그저 천금이라도 가진 듯이 활짝 웃곤 했다.
타인의 칭찬이나 경탄의 말에 금방 우쭐해지는 것은 그가 그런 말과 눈길을 의식한 적 없기 때문이다. 보쿠토가 바라는 건 언제나 단 하나였다. 아카아시 그의 말 한마디.
-아카아시!
활짝 웃는 얼굴로 고개를 드밀고서는, 아카아시, 아카아시, 언뜻 보자면 천진할만큼 솔직하게 칭찬해 달라 매달리는 모습은 어린 짐승의 앳된 모습인 양 사랑스러운 빛깔이었다.
“아카아시! 아카아시, 방금 스파이크 봤……. 왜 그렇게, 봐, 봐……요……?”
방금 후배들의 블로킹을 뚫고서 시원하게 스파이크를 넣은 보쿠토가 아카아시를 찾아 목소리를 높이다 말고, 정작 아카아시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아카아시는 어깨를 으쓱하며 반문했다. 제가 뭘요.
“아, 아니. 그냥. 보고 있어서 놀랐어.”
봤느냐고 물으며 달려오던 사람이 보고 있어서 놀랐다며 어깨를 움츠렸다 편다. 아카아시는 들고 있던 드링크를 내려놓곤 보쿠토에게 다가갔다.
“보쿠토 선배 스파이크 연습인데 보고 있죠. 선배, 잠시만요. 다 나은 것 같긴 하지만…….”
“어, 어어?”
저렇게 활기찬 표정과 웃음만 봐도 상태를 알만은 했으나. 아카아시는 팔을 뻗어 보쿠토의 이마를 한 번 짚어보았다. 다행이 열은 다 떨어진 것 같았다.
병원에 가지 않겠다고 떼쓰는 것을 어르고 달래어 겨우 데려가서는 약을 받아오고 주사까지 맞히고 집까지 데려다 주었다. 집 앞에 도착해서도 가지 않겠다고 열이 올라 반쯤 우는 것 같은 눈으로 그를 붙잡는 걸 뿌리치지 못하고서 결국 집 안까지 들어가 재워주기까지 했던 아카아시였다.
“열도 다 내렸고 안심이네요. 그래도 잘 때 약은 챙겨 드세요.”
“……으응…….”
아카아시는 고개를 갸웃했다. 보쿠토는 어딘가 모르게 시무룩한 표정을 하고서 자신의 이마를 매만지고 있었다.
“선배?”
“……또 아플래.”
“뭐라고요.”
“히익.”
아카아시가 대번에 눈매를 매섭게 모으고 그 표정에 보쿠토가 몸을 움츠리다 배구공까지 내팽개치고선 체육관 바깥으로 도망쳤다. 혼자 남은 아카아시가 당황한 표정으로 주위를 살펴보지만 다들 까닭을 몰라 어깨만 으쓱할 뿐이다. 아카아시는 입술을 꽉 깨물고 한숨을 내쉰 다음 성큼 성큼 걸어 체육관 바깥으로 향했다.
“보쿠토 선배!”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체육관 바깥, 관리가 되지 못해 다 말라비틀어진 화단의 구석에 커다란 몸이 억지로 구겨져 있다. 아카아시는 일부러 발소리를 내며 다가갔다.
“선배.”
“…….”
“그게 무슨 얘기예요. 왜 그래요.”
당장 내일 모레가 연습 시합이었다. 아카아시는 보쿠토의 등을 내려다보았다. 평소에는 넓고 믿음직스러운 등이었는데 지금은 어쩔 줄 모르고 흔들리기만 하는 것 같았다.
“아프면.”
“네?”
“나 아플 때……. 아카아시 엄청 다정하고……. 신경 써주고…….”
“그야 그렇게 컨디션이 안 좋으시니까…….”
“……그러니까 또 아플래…….”
흘낏 뒤를 올려다보는 보쿠토의 얼굴은 목끝까지 새빨간 색이었다. 그걸 멍하게 쳐다보던 아카아시는 천천히 미간을 모았다. 무슨 얘길 들었는지 되짚어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모든 게 입력 되자마자.
“지금 그걸 말이라고!”
“아, 아카아시?”
“사람이 얼마나 걱정을 했는데 지금 그 짓을 또 하겠다고?”
“아, 아니. 내 말은 그러니까.”
“지금 제가 보쿠토 선배를 걱정하다 피말라 죽는 꼴을 보고싶단 얘길 그렇게 하십니까?”
“아카, 아카아시? 잠시만, 저기, 내가 잘못했어! 아카아시!”
“됐습니다. 다른 세터가 더 좋으면 그러시던가요.”
“아냐! 그런 거 아냐! 아카아시! 아카아시!”
아카아시는 다다다 쏘아붙이곤 등을 휙 돌렸다. 떠듬떠듬 변명을 하던 보쿠토가 깜짝 놀라서는 서둘러 아카아시를 따라잡아 그런 게 아니라고 열심히 사과의 말을 해도 아카아시는 목소리를 풀지 않았다.
아카아시의 귀끝을 물들인 붉은 꽃잎같은 색이 바람에 묻어났다.
'하이큐 > 보쿠아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보쿠아카 | 질투는 녹색 눈의 괴물 (7) | 2016.03.12 |
---|---|
보쿠아카 | 그대 가슴에 입술 자국 (10) | 2016.03.04 |
보쿠아카 | 흉터 (4) | 2016.02.19 |
보쿠아카 | 그대네요 (6) | 2016.02.13 |
보쿠아카 | 시작 (2) | 2016.02.08 |
아카른 전력 주제 : 후회
보쿠토의 레그슬리브 아래, 다리 옆으로 길게 찢어진 흉터 자국이 있었다. 사신이 한 번 맛을 보았다가 놓아준 듯이 봉합자국이 쭉 이어진 흉이었다.
*
아카아시는 부실 문고리에 손을 올렸다가 잠깐 멈칫했다. 샤워를 마치고 매니저들의 비품 정리를 도와주고 온 터라 평소보다 조금 늦은 시간이었는데 부실에는 아직까지 불이 켜져 있었다. 남아있는 사람이 있을 시간이 아닌데 싶어 잠깐 고민하던 아카아시는 짧게 한숨을 내쉬고 문을 열었다.
“보쿠토 선배.”
부실 안 창가 자리에 접이식 의자 하나를 펴놓고 건성으로 밖을 보고 있던 사람이 고개를 돌려 쳐다본다. 서늘한 황금색 눈동자, 보쿠토였다. 아카아시는 보쿠토 몰래 심호흡을 하며 천천히 부실 문을 닫았다. 느리고 고요하게 달칵, 하는 소리가 났다.
“왜 이제 와, 아카아시?”
“시로후쿠 선배 일 도와드리느라고요. 안 가셨네요.”
“응. 기다렸어!”
평소와 같이 활짝 웃는 표정의 보쿠토였지만 그 안으로 폭풍이 엿보인다. 아카아시는 마른 입술을 다셨다.
“보쿠토 선-.”
“아카아시, 나 다리 아픈 것 같아.”
저 말은, 오늘은 그에게 져주지 않을 것이라는 신호였다. 아카아시는 보쿠토를 부르려던 목소리를 삼켰다. 보쿠토는 의자에 앉은 채 창가에 등을 기대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창가로 쏟아지는 노을이 눈을 시리게 만든다. 아카아시는 눈동자를 아래로 내리깔고서 보쿠토에게 다가갔다.
“봐요.”
“여기.”
“많이 아파요?”
아직 저지에 반바지를 걸치고 있는 보쿠토가 다리를 조금 더 뻗었다. 아카아시는 그 앞에 한쪽 무릎을 대고 앉았다. 빈틈없이 매끄러운 근육으로 채워진 다리였다. 그리고 평상시엔 언제나 긴 무릎보호대로 가리고 있는 오른쪽 허벅지 옆으로 길고 흉악한 자국이 있었다.
“차가운 수건으로 좀 대고 있을까요?”
“아니.”
“그럼 일단-.”
“-얘기는 어떻게 됐어?”
자신의 상처 위에 올라온 아카아시의 손을 붙잡은 보쿠토가 묻는다. 아카아시는 보쿠토 몰래 마른침을 넘기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뒤에서 눈을 찌르는 노을 탓에 보쿠토의 얼굴을 분간하기는 어려웠지만 그 눈빛만은 알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런 순간 언제나 그를 바라보던 그 눈빛일 게 분명했다. 분노와 독점욕과 집착과 그리고 더할 나위없는, 애정이 가득히 금빛으로 녹아난.
“뭘 어떻게 돼요.”
“그 애가 뭐랬냐니까?”
“……저를, 좋아한다고.”
매일 매일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오후 부활동을 가기 위해 보쿠토가 아카아시를 데리러 왔을 때였다. 가방을 챙겨들고 교실 문을 나서려는데 반장이 수줍은 미소와 함께 그를 붙잡았더랬다.
‘아카아시, 혹시 오늘 부활동 끝나고 잠깐 시간 낼 수 있을까?’
단풍처럼 발갛게 달아오른 뺨과 마주치지 못하는 시선 만으로 이후의 말을 짐작할 수 밖에 없는 얼굴이었다. 그걸 보쿠토도 보았다. 아카아시로서는 그 어떤 달콤한 사랑의 말을 듣는다 하더라도 그저 거절하는 것이 당연한데, 그걸 보쿠토는 알고 있으면서 매번 화가 나고 속이 상해 어쩔 줄 몰라했다.
“……다리가 아파, 아카아시.”
“쿨링 스프레이라도 가져올까요?”
“손 대고 있어줘. ……뭐라고 대답했는데?”
“뭐라고 해요. 미안하다고 했죠.”
거절했어요, 아카아시는 여상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보쿠토는 말이 없다. 아카아시가 부실에 들어오는 순간 비쳤던 험한 웃음같은 것마저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다. 아카아시는 가위손이 할퀴고 간 것 같은 그 상처를 바라보며, 상처를 손으로 쓸곤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숨이 손을 스치고 보쿠토의 상처 위에 머물다 흩어져간다.
보쿠토는 두 어번 정도 아프다는 말을 계속하다가 마지막 말은 마치지도 못한 채 그대로 아카아시의 손을 잡고서 그를 바닥에 쓰러뜨렸다. 보쿠토가 앉아있던 의자가 부실에 나뒹구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퍼지고 두 사람은 이미 입을 맞추고 있었다.
“읍, 읏, 선, 흡…….”
밀도높은 액체가 뒤섞이는 소리가 두 사람뿐인 부실에 울려퍼진다. 아카아시는 모자라는 숨을 어떻게든 하려고 했지만 보쿠토가 놓아주지 않았다. 마침내 아카아시의 뺨이 달아오를 때가 되어서야, 보쿠토는 가까스로 둘의 입술 사이에 틈을 만들어주었다.
“미안하다고, 그 다음엔?”
“…….”
아카아시는 아주 조금 고개를 돌려 겨우 호흡을 되찾았다. 보쿠토가 묻는 말에 빨리 대답해주어야하는 건 알았지만 숨이 찼다. 그가 그저 공기가 부족해서 그러는 것을 알면서도, 보쿠토는 심술과 분노 어드메의 감정을 사랑 위에 덧씌우고서 아카아시의 입술을 물어뜯었다. 반투명한 살갗이 찢겨나가고 서로의 폐부를 공유한 공기가 또다시 뒤섞이는 사이에 아카아시는 말했다.
“좋, 아하는 사람 있으니까……. 안 된다고.”
아카아시는 양손을 보쿠토의 손에 내맡기듯 뺏긴 채 차마 더는 견디지 못하고 눈을 내리감았다. 이렇듯 보쿠토가 그의 위에 올라타는 건 언제나 입맞춤을 위해서였으나 딱 한 번, 아닌 적이 있었다.
-아카아시!
체육관이었다. 위층 관중석의 오래된 펜스가 낡아서 위태로운 것을 알고 있던 사람은 없었고 누군가가 실수로 잘못 넘긴 공이 긴 곡선을 그리고 올라가 펜스에 부딪혔다. 끼이익, 지옥의 입구를 받치는 경첩에서 나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고 은빛 창과도 같은 빛이 눈에 들어왔을 땐 이미 늦은 순간이었다. 그리고 보쿠토가, 그를 불렀다.
갑자기 뒤바뀐 시야에 가득찬 건 웃는지 우는지 알 수 없는 금속성의 금빛 눈동자였다. 왜 자신이 체육관에 누워있고 자신의 위에 보쿠토가 있는지도 이해하지 못했다. 어디선가 쇠냄새 같은 게 난다고 생각했고 그게 피냄새라는 걸 알아차린 건 보쿠토가 그의 어깨에 고개를 떨어뜨렸을 때였다. 보쿠토의 등과 다리를 때린 철제 펜스가 바닥에 구르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아카아시는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다른 곳은 타박상 정도로 그쳤지만 부러진 펜스의 끝에 걸린 다리가 길게 찢어져 보쿠토는 한 뼘이 넘는 상처를 꿰매야 했다. 까딱했으면 다시는 뛰지 못할 뻔했다며, 대단히 운이 좋다고 의사가 말했고 보쿠토는 놀랍다는 듯이 그저 크게 웃는데 아카아시는 화를 내야 했다.
-제정신입니까? 정말 잘못됐으면 어쩌려고 그랬어요!
배구밖에 모르는 사람이 다시는 뛰지 못할 뻔했다는 얘기를 듣고서도 놀라거나 안심한 기색 하나 없이 평소와 똑같이 웃고 있었다. 되레 멀쩡하다는 소식에 더 놀란 것 같았다. 아카아시가 불같이 화를 내자 그제야 기가 죽은 듯이 눈치를 살피는데,
-그치만.
-그치만은 무슨!
-그거 아카아시가 맞았으면 아카아신 죽었을지도 모르잖아.
-안 죽어요!
-그래도 위험했잖아.
어린애처럼 입술을 삐죽하고서는 고개를 돌린다. 토라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이후로 아카아시는 그 일에 대해 더 말하지 않았고 그건 보쿠토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순간까지는 그랬다.
-아카아시, 아파.
그가 처음 상처를 보인 날은 아카아시가 부활동에 쿠키를 한아름 가져온 날이었다. 가정실습 시간에 만들었는데 반 친구들까지 제게 줬어요, 그런 말과 함께 풀어놓았다. 모두가 즐겁게 먹는데 보쿠토는 쿠키에 손도 대지 않았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보쿠토가 그를 붙잡고 그렇게 말했다. 다리가 아픈 것 같아. 그게 아카아시 자신때문에 생긴 상처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도 아카아시가 그에 대해서 얼마나 큰 부채감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조리 알고 있다는 눈동자로, 보쿠토는 그렇게 말했다.
“……좋아하는 사람 있어서 안 된다고 했어?”
언제 화를 냈었냐는 듯이 사르르 녹은 목소리가 그에게 묻는다. 아카아시는 어렴풋이 눈을 떴다. 어느새 해는 넘어가, 그의 눈에는 그저 굴곡진 보쿠토의 얼굴이 선명하게 들어오고 있었다. 미안함과 들뜸이 아무렇게나 섞인 얼굴이 그를 본다. 보쿠토는 마치 개가 주인을 핥는 것처럼 자신이 물어뜯어놓은 아카아시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문질렀다.
“네.”
보쿠토가 자신의 상처를 내보이는 건 이런 순간 뿐이었다. 보쿠토는 자신의 다리에 난 상처가 아카아시의 목줄이라도 되는 듯이 굴었다. 가시철조망으로 만든 목줄, 그래서 당기면 상처입힐 수밖에 없는 것. 그러나 동시에 가장 확실하게 그를 옭아맬 수 있는 것.
아카아시는 무르고 녹진한 입맞춤 속에서 보쿠토의 감긴 눈을 바라보았다.
*
정말로 못 뛰게 됐으면 어쩌려고 그랬어요!
아카아시는 아마 자신이 화를 내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보쿠토는 눈 끝자락이 붉어진 그 얼굴을 바라보며 웃음을 삼키기 위해 애써야했다. 정말로 웃어버리면 아카아시는 울지도 몰라.
배구가 전부, 그 말은 맞았다. 좋아서 잘하고 싶어서 그 공으로 점수를 내고 이기고 싶어서 어쩔 줄 몰랐고 그래서 오로지 그것만 바라보았다. 보쿠토는 선택지 앞에서 갈등하고 고민하지 않았다.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 가장 하고싶은 것이 무엇인지 언제나 확실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아카아시 위로 떨어지는 펜스를 보았을 때에도 보쿠토는 망설이지 않았다. 아카아시 위로 몸을 날릴 때는 이미 그런 것들을 내다버린 뒤였다.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기 때문에.
설령 다시 뛰지 못하게 되었다 하더라도 후회하지 않았을 것이다. 가장 하고 싶은 걸 했으니까. 정신을 차렸을 때 되레 운동에는 지장이 없을 거라는 얘기를 들어 더 놀라기도 했다. 그러니까 사실 그 사고로 남은 흉터는 보쿠토에겐 별다른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되레 매번 아카아시가 그에 마음쓰는 것을 알아 불만이었고 그저 그뿐이었다.
그와 아카아시 사이에 정의된 것이 그 무엇도 없다는 걸 깨달은 건 언제였을까. 언제라도 아카아시를 뺏길 수 있다는 걸 깨달은 건, 언제였을까. 그걸 알아차렸을 때 보쿠토에게도 그 흉터가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상냥하고 다정한 후배는 그 흉이 남아있는 한 절대로 부채감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므로. 오로지 그 흉터만이 둘 사이를 잇는 유형화된 상징이었다.
첫 입맞춤은 폭우가 쏟아지는 날, 부실에서. 새로 입부한 1학년 매니저가 아카아시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걸 보았던 날이었다. 다리가 아프다는 말에 아카아시는 기꺼이 몸을 숙여보였고 보쿠토는 견디지 못하고서 아카아시의 그 손을 움켜쥐고 입맞춤했다. 흉터를 보고서는 결코 자신을 뿌리치지 못하리란 계산을, 아마도 그 빗소리를 들으며 했을 것이다.
좋아한다는 고백은 노을이 창살처럼 눈이 아프던 날, 어느 놀이터의 벤치에서. 아카아시가 누군가에게서 단정하고 둥근 글씨체의 편지를 받은 날이었다. 다리가 아프다는 말에 아카아시는 잠깐 쉬었다 가자고 했고 그를 앉혀두고서 차가운 캔음료 하나를 사왔다. 아카아시가 자신의 상처가 있을 자리에 캔을 대주는 것을 보면서 보쿠토는 말했다. 좋아해. 아카아시, 좋아해. 좋아해서 그랬어. 좋아해서 지켜주고 싶었어. 좋아해서, 좋아해서…….
상처가 있는 것을 알고서는, 아카아시는 결코 뿌리치지 못할 것이므로.
“-그 흉터 때문이 아니에요.”
“아?”
보쿠토는 맹한 표정으로 눈을 꿈벅거렸다. 그의 아랫쪽에 있는 아카아시가 그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카아시는 천천히 보쿠토를 밀어냈다. 보쿠토는 그가 미는 대로 비켜나 부실 바닥에 앉은 채 그를 보고 있었다. 아카아시는 보쿠토의 상처가 정말로 아프지 않은지 한 번 가볍게 눌러 보쿠토의 반응을 보고는 보쿠토를 일으켜 세웠다.
“아니에요. 집에 가요, 이제.”
“어, 으응…….”
아카아시는 옷깃을 정리하곤 입술의 상처에서 베어 나온 피를 꾹 눌렀다. 아릿한 통증이 신경을 태운다. 보쿠토가 그 모습을 보고서는 깜짝 놀라서 서둘러 사과하며 그의 곁을 맴돌았다. 아카아시가 괜찮다며 고개를 흔들어도 반쯤 그를 업고 갈 기세다. 아카아시가 미간에 힘을 주고 나서야 보쿠토는 겨우 진정하고선 투덜거린다. 아카아시는 내 맘도 모르고! 그 말을 하는 얼굴이 평소와 다를 바 없어서 아카아시는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보쿠토가 또 왜 한숨을 쉬냐며 그의 답을 재촉한다. 아카아시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젓고 그를 잡아 끌어 부실을 나왔다.
흉터라도 보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박한 표정이, 분노와 질투와 사랑으로 엉킨 금빛 눈동자 아래에 깔려있었다. 가시사슬로 만든 목줄을 잡아당기느라 온통 상처가 난 보쿠토의 손을 보며 아카아시가 할 수 있는 일은 조금이라도 그 손에 상처가 생기지 않도록 서둘러 끌려오는 것밖엔 없었다.
'하이큐 > 보쿠아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보쿠아카 | 그대 가슴에 입술 자국 (10) | 2016.03.04 |
---|---|
보쿠아카 | 사랑을 주세요! (5) | 2016.02.26 |
보쿠아카 | 그대네요 (6) | 2016.02.13 |
보쿠아카 | 시작 (2) | 2016.02.08 |
보쿠아카 | 사랑이 맴돈다 (13) | 2016.02.05 |
보쿠아카 | 그대네요
-아카른 전력 주제 : 상처
그대네요
*
철썩!
빌딩 안쪽의 출입구를 통해 카페로 들어와 커피를 주문하려던 보쿠토는 카페의 안쪽으로 트여있는 야외석에서 들린 요란한 소리에 놀라 흠칫 돌아보았다. 카운터의 점원도 움찔한 표정으로 안쪽을 살펴본다. 아무리 생각해도 누군가 타인의 뺨을 후려치는 소리였는데.
“히익…….”
“으아…….”
살짝 대각선으로 남녀 한 쌍이 눈에 보였다. 그럭저럭 넓은 카페였는데, 두 사람 모두 자리에서 일어서 있어 눈에 띄었다. 보쿠토는 점원과 함께 비명과 신음과 감탄을 섞은 소리를 내며 그 광경을 훔쳐보았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여자가 어깨를 들썩이며 맞은편의 남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한쪽 손을 쥐고 있는 게 그 손으로 남자를 후려친 모양새다. 상대 남자는 키가 컸다. 180대 초 중반쯤 될까. 여자에게 한 대 맞고도 차분한 모습이었다.
“왜 맞고도 화를 안 내?”
“…….”
“나는, 나한테는, 화를 낼 가치도 없어? 그래?”
대화의 양상이 이상하다고 보쿠토는 생각하며 슬쩍 음료를 주문했다. 아메리카노요, 시럽 넣어서 따뜻한 걸로요. 점원은 화들짝 정신을 차리며 주문을 기입한다. 보쿠토는 카드를 카운터에 따각 따각 부딪히며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흘끗거렸다. 하지만 의외로 사건은 흐지부지 끝이 났다. 여자는 왈칵 울음을 터뜨리곤 헤어지잔 말만 두고서 카페를 뛰쳐나갔고, 남자는 잠깐 그런 여자를 돌아보았다가 붙잡지 않고서 나직한 한숨과 함께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보쿠토는.
“……소, 손님?”
“쉬, 쉿! 쉿!”
남자의 고개가 조금 기울어지는 그 순간 곧장 입구와 카운터 사이의 틈새로 숨어들었다. 운동선수로 오래 활동해온 경력이 빛을 발하는 순발력이었다. 보쿠토가 간절하게 손가락을 입에 대고, 점원은 까닭도 모르고서 숨을 죽였다. 보쿠토는 눈앞이 새하얘지는 와중에도 정신없이 놀라 헐떡이는 숨을 골랐다.
남자는 아카아시였다.
*
왜 좋아하게 되었는지 기억하지 못했기 때문에 마음이 식은 까닭도 알지 못했다. 이유를 몰랐기에 다시 재정비할 방법조차 찾지 못하고서 이별을 말했다. 그리고 자신이 바로 그 이별을 말했기 때문에, 사실은 원한 게 이별이 아니었다는 걸 알고 나서도 되돌아가지 못했다.
되돌아가지 못한 채 그렇게 몇 년이나 지나 겨우 지금이었다. 이별을 말하고 나서야 아카아시가 함께 하는 시간을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헤어지고 나자 얼굴 한 자락 볼 수가 없었다. 이렇게나 간단하게 하루아침에 단 한 순간에 길에서조차 마주칠 기회를 잃어버린 사이가 되었, 었다.
보쿠토는 점원에게 거듭 손가락을 세워 아메리카노를 손에 쥐고서 카페 구석진 자리로 몸을 움직였다. 그리곤 한쪽 벽에 꽂혀있는, 크고 얇은 책 하나를 부산스레 꺼내 얼굴을 가렸다.
‘진짜……. 진짜 아카아시인가?’
책 너머로 흘끗 고개를 들어본다.
야외석에 앉아있는 남자의 옆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목을 감싸는 남색 자라목 니트, 베이지색 면바지. 내리깐 시선 위로 오후의 햇빛이 조각조각 쌓였다가 흘러내리기를 반복하여 테이블을 향하고 있는지 아니면 여자가 떠나고 난 자리를 향하고 있는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아카아시였다. 어째서 뒷모습을 보고도 알아차리지 못했는지 알 수 없을 만큼 너무나도 선명하게 아카아시였다.
‘여, 여자…친구랑 싸웠나…….’
여자친구, 아카아시의 여자친구. 그렇게 생각을 하고 나니 심장을 못으로 박는 듯이 아픈 감각이 먼저 들었다. 그와 아카아시는 헤어졌으니 아카아시에겐 새로운 애인이 있을 수도 있는 일인데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보쿠토는 괜히 울컥해서 손에 힘을 꽉 주었다. 다른 여자와 있었으니까 당연히 아카아시인줄 몰랐던 거야!
‘그런데 어떻게 여기에서…….’
지난 몇 년간 우연히라도 만난 적이 없었다. 그런 영화처럼 운명처럼 편리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게라도 만난다면 무슨 말을 할지는 매일같이 생각했지만. 매일같이, 생각했지만. 그래도 상상이 현실로 나타난 적은 없었다.
단 한 번도.
‘아, 혹시 꿈인가?’
보쿠토는 멍하니 생각하다가 책을 쥐고 있던 양손 중에 한 손으로 뺨을 세게 꼬집어보았다. 순간 저도 모르게 악 하는 비명이 튀어나가고, 보쿠토는 서둘러 책을 고쳐쥐어 사람들의 눈을 피했다. 보쿠토는 괜히 눈물이 핑 돌아 어깨로 볼을 문질렀다. 무시무시하게 아팠다.
‘진짜 아카아시.’
정말로 아카아시였다. 주위가 잠잠해질 즈음 보쿠토는 다시 고개를 삐죽 책 너머로 내밀었다. 아카아시의 옆모습. 아카아시는 자신 앞에 놓인 머그컵을 한 손으로 건드리며 가만히 아무 움직임 없이 거리를 내다보고 있었다. 그 콧날에 햇빛이 들어 뺨에 그림자를 그린다. 깜빡, 깜빡하는 속눈썹 끝으로 먼지가 걸렸다가 사르르 흩어졌다.
꿈에라도 한 번을 나와주지 않았던 모습이었다. 사진조차 남은 게 없었다. 사진을 찍은 사람은 언제나 아카아시였다는 것도 그 때 알았다. 그리워할 자락 하나도 남지 않아서 다행이 잊지 않을 수 있었다…….
보쿠토는 홀린 듯이 아카아시의 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은 뒤늦게 떠올랐다. 그 때 아카아시가 나직한 한숨과 함께 잔을 들어 마시다가 미약하게 인상을 찌푸린다. 보쿠토는 아카아시의 입술에 난 상처를 그제서야 보았다.
“피 나잖아!”
벌떡 일어나 외치는 소리와 함께 앞에 놓여있던 커피 머그가 엎어지며 촤악 하는 소리를 내고서 안에 든 검은 액체를 쏟는다. 카페 안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아보았다.
뚝, 뚝, 뚝…….
쏟아지고 남은 커피가 바닥으로 방울 방울 떨어지는 소리만 들려왔다. 보쿠토는 하얗게 질린 채 뻣뻣하게 굳었다. 아카아시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
“오……오랜, 오랜만이야. 아카아시.”
“……그러네요.”
커피를 쏟아놓고서 아카아시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보쿠토는 일단 머그만이라도 똑바로 세워놓은 뒤에 곧장 달려가 아카아시를 붙잡았다. 아카아시가 이대로 가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아, 아카아시. 잠시만, 잠시만. 잠시만, 얘기, 조금만 하자…….
서두르는 말은 급해서 단어가 순서를 지키지 않고 튀어나갔고 아카아시는 아무 말이 없다가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점원과 함께 쏟은 커피를 치우고, 다시 마실 걸 주문을 하고, 그리고 보쿠토는 방금 전 아카아시의 여자친구가 앉아있던 자리에 앉아서 아카아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여자 진짜!’
그가 보지 못하고 있던, 아카아시의 반대쪽 뺨은 붉은 빛이다 못해 긁힌 자국이 있고 입술은 찢어져서 피가 말라붙어 있다. 보쿠토는 속이 한 번 뒤집혔다가, 다시 바로 되었다가, 그 상처를 보니 또 뒤집혀 애먼 의자의 손잡이만 꾹 쥐었다 놓았다 했다.
“저기……. 여…자친구랑, 싸웠, 어……?”
“……차였네요, 방금.”
아카아시의 목소리가 서늘했다. 보쿠토는 긴장해서 입술을 꽉 깨물었다.
“어, 어어……. 잘 지냈어?”
아, 죽고 싶다! 보쿠토는 겨우 울상을 삼켰다. 방금 여자친구와 다투다 헤어졌는데 잘 지냈냐니, 이보다 더 멍청한 질문이 있을 수 있을까. 아카아시도 어처구니가 없는지 말없이 그를 보고만 있다. 보쿠토는 심정적으론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아, 아니. 그러니까. 그게……. 아, 아프지는 않고? 그, 밥은, 잘 먹고 그런…….”
“글쎄요.”
“…….”
아카아시는 단 한번도 자신에게 차가운 적이 없었다는 걸 지금에서야. 정말로 단 한 순간도 차가운 적이 없었다는 것을, 차가워진 모습을 보고서야 알게 된다.
“그, 어, 어어, 그러니까, 아카아시는 여기까진 어쩐 일로…….”
“여자친구하고 약속이 여기 근처여서요.”
“아, 어, 으응…….”
아카아시는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아카아시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칼날같았다. 스치고 지나갈 뿐인데 상처가 난다. 아카아시는 그냥 하는 말일텐데, 그래, 우리는 이제 남남이니까, 남남보다 못한 사이이니까, 그냥 그렇게 하는 말일텐데. 자신이 그에게 했던 말은 훨씬 더 심한 얘기였을 테니 이쯤은 당연한 것인데.
“저기, 아카아시. 일단 그, 입술에 상처에 약이라도…….”
보쿠토는 어떻게든 대화를 이어가려 애쓰며 품을 뒤적거렸다. 하지만 흔한 반창고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 그러면서 또 깨닫는다. 매번 구르고 부딪히느라 생채기나는 그를 위해 반창고며 연고같은 걸 들고 다닌 사람도 아카아시였다.
“별로, 아프지 않아요.”
“그, 그래도.”
아카아시는 말이 없다. 그리고 보쿠토도 말을 잇지 않자 두 사람 사이에는 새카만 틈 같은 침묵만 자리잡았다. 한쪽에서만 붙잡고 이으려는 대화는 이렇게나 허무하다.
“어, 그, 아카아시. 그러면 언제 돌아가?”
“이제 가야죠.”
아, 그, 그렇지. 보쿠토는 머쓱한 표정을 어찌하지 못하고서 손으로 목덜미를 쓸었다. 여자친구랑 약속 있대서 왔으니까, 이제 갈 일만 남았긴 하다.
“아. 어, 저, 그러면 시간은, 시간은?”
“……왜요?”
왜 그런 것을 묻는지, 진심으로 의아하게 여기고 있다는 목소리였다. 그 의아함 때문에 차가움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그리고 그래서 이번에야말로 보쿠토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아카아시는 한 번도 그런 식으로 응한 적이 없었다. 무슨 일 있어요? 어디 갈 데 있습니까? 사고라도 쳤어요? 그러면서 조그맣게 한숨을 섞어서 그의 대답을 기다린다. 그러면 보쿠토는 무슨 말이든 할 수 있었다. 아카아시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언제나 그의 부름에 응해주었으므로.
“아, 아니, 그러니까, 저기…….”
아카아시의 무엇을 좋아했는지, 왜 좋아했는지 알지 못했다. 무엇이라거나 왜라는 말로 한정시킬 수 없이 그의 모든 것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그 모든 것에 푹 담겨있었다. 익숙하고 당연해진 것을 마음이 식었다고 착각했다. 그래서 아카아시를 겨울에게 돌려준 건 자신이었다.
“……보쿠토 선배?”
순간 몇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은 착각이 든 건 아카아시의 목소리가 누그러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래서, 보쿠토는 자신이 눈물을 떨어뜨리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
“아, 아니. 그러니까, 아, 진짜, 이게, 아, 왜, 왜 이러지.”
보쿠토는 허둥지둥거리며 눈물을 닦아내려고 애썼지만 한 번 쏟아지기 시작한 눈물은 그칠 줄을 모른다. 아카아시는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아무 말 없이. 닦아주는 손도 없었고 안아주는 품도 없이, 가만히. 그리고 아카아시가 가만히 말했다.
“……왜 우세요?”
당신이 왜요?
정말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처럼 나직한 목소리가 푹 하고 보쿠토의 가슴을 찔렀다. 아카아시의 말은 어쩌면 당연했다. 이별을 말한 건 자신이었고 그 이별에 눈물 한 방울 비추지 않은 것도 보쿠토 그였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를 앞에 두고, 이제 와서.
“그, 아, 그러, 그런, 어…….”
후두둑 쏟아지는 눈물이 테이블 위를 장식한다. 그런데도 좋았다. 그래도 이런 말이라도, 차가운 목소리라도 겨우 들을 수 있는 게 좋았다. 술에 취했다는 핑계가 필요해서 술을 마신 날이 있었다. 도통 취하질 않아 죽을 만큼 술을 마셨고 그래서 겨우 전화를 할 수 있었다. 아카아시의 휴대전화는 꺼져있었다. 그렇게 죽을 만큼 술을 마신 적이 두어번 더 있었다. 신호음이 제대로 울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제 들어가요, 선배.”
숙이고 있는 머리 위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서, 보쿠토는 그 말을 이해하자마자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아, 아냐. 잠시만, 아카아시, 잠시만.”
운명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서로가 없어선 안 될 이유가 없는데도 당연한 것처럼 함께 있게 되어, 이것이야말로 운명이라고. 그도 아카아시도 어렸을 때의 이야기였다. 헤어지는 순간에는 잊고 있었고 헤어지고 나서야 다시 그 생각이 떠올랐다.
운명같은 게 아니었는데도 그렇게 느꼈던 건 아카아시가 그렇게 마치 운명처럼 소중하게 여겨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함께 있는게 당연해지고 당연한 건 가치가 없다고 착각한 건 자신이어서.
“그게 아니라, 나, 할 말이, 아직, 있어서…….”
아카아시는 헤어진 상대가 아직까지 마음을 정리하지 못했다는 사실로 위안을 얻는 종류의 사람은 아니다. 헤어지자는 말을 들었다고 해서 그 사실로 상대를 상처입히고 싶어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러니까 지금 하는 얘기조차 오로지 보쿠토 스스로만을 위한 것이다. 그래도 말하고 싶었다. 아주 오랫동안 말하고 싶었다.
“……무슨, 얘기를요.”
보쿠토는 겨우 눈물을 떨쳤다. 청록색 눈동자가 조금 떨리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든다.
“아, 아카아시가 여전히, 좋아.”
“……네?”
“그러니까 좋아해. 쭉 좋아했어. 내, 내가 먼저 헤어지자고 한 건 아는데. 근데, 그, 나, 한 번도, 그러니까, 한 번도 아카아시 싫은 적 없었어. 내가 몰라서, 착각해서 그랬, 었어.”
사랑했고 사랑해서, 아직까지도. 우연 한 번을 바라고 바랐다. 아카아시는 조용했다. 보쿠토는 슬쩍 눈을 들어 아카아시의 눈치를 살폈다.
“그, 그러니까 뭘 어떻게 하자는 건 아니고. 그렇다는 얘기를.”
“……그런가요.”
“어, 으, 으응…….”
“왜, 다른 사람 만나보니 제가 아쉬워졌습니까?”
아카아시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지금까지 차가웠던 것조차 차가운 것만은 아니었다. 지금의 목소리야말로 벼르고 벼른 듯이 잔인해서. 보쿠토는 순간적으로 숨이 턱 막혀 아카아시를 바라보기만 했다. 아카아시는 고개를 돌려 그를 보고 있지 않았다.
“이제와서, 뒤늦게 후회라도 드는 건가요.”
만나던 그 때처럼 담담한 목소리가 가장 날카로웠다. 보쿠토가 숨을 토해낸 건 아카아시가 그말을 끝으로 일어서려는 순간이었다.
“아, 아냐!”
보쿠토는 벌떡 몸을 일으켜 아카아시의 손목을 잡아챘다. 그의 뒤로 의자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굴러간다. 저물어가는 해가 아카아시의 얼굴 위로 지독한 그림자를 만들어 보쿠토는 그제야 굴곡진 눈물을 알아보았다. 아카아시가 울고 있었다.
“헤, 헤어지고 나서 한 명도 만난 사람 없어!”
“…….”
“누구를 만나 봐서 안 게 아니야. 내가, 내가……. 뒤늦게 후회, 하는 건 맞지만…….”
봄날 겉옷을 걸쳐주는 듯한 사랑이었음을, 낮이 지나 밤이 오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낮이 더워 버렸던 겉옷이 전부 봄의 밤까지 생각한 사랑이었다. 그저 달이 뜬 것으로 알게 되었다.
다른 누구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사무치는 후회 속에서 하루 하루를 살아가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후회를 메울 다른 상대를 찾지는 않았다. 이 참혹한 후회도 다정을 몰랐던 벌이라 생각하면 달가웠다. 그렇게 뒤늦은 달의 궤적을 한 호흡도 흘리지 않고 보듬어왔다. 그리고 그러다 언젠가 이렇게 다시 운명처럼 마주한다면 말하고 싶었다. 그 때 정말 미안했어. 내가 몰랐어. 사랑했어, 사랑해. 뒤늦게 그런 말을 해도, 이별을 말해놓고서 마음 한톨 정리하지 않은 채 긴 시간 품어왔다는 말을 한다 해도 부담일 뿐이겠으나 그래도 아카아시라면 그랬습니까, 그런 말 정도는 해주지 않을까 하며.
“아, 아카아시. 진짜, 정말, 미안해. 내가 헤어지자고 해놓고 또 이제와서 이런 말 하고, 그래서. 그런데 정말로 내가 바보같았어. 내가, 나만 몰랐다. 그걸 이제는 안다는 말을……. 말이라도……. 정말로 어떻게 다시 하자는 건, 아니고, 그러니까, 그러니까.”
마음에 상처주었던 보상은 되지 않겠지만. 너를 아프게 해놓고 보니 나 역시 아프다는 걸 알았다는 말로, 상처를 되돌릴 수는 없겠지만.
시간이 철마다 옷을 갈아입는 걸 보면서 그의 후회도 겹겹이 옷을 걸쳤다. 아카아시가 이 때는 이랬지. 저 때는 그랬지. 그의 후회는 그렇게 숨쉬는 일상이었고 그래서 당연했지만, 헤어지자는 말을 듣던 아카아시의 눈을 생각하면 금방 잠에서 깨곤 했다. 그 눈동자만은 항상 떠올릴 때마다 아팠다. 내가 그런 말을 해서 아팠겠지. 아프겠지. 내가 잘못했는데, 아카아시가 아프겠지. 그것도 모두 내 잘못이야…….
“어, 그, 그러니까. 아카아시, 저기, 어……. 입술에 상처만 어떻게 하고 그러고……갈래……?”
“……왜 안 하시는 건데요.”
“아?”
보쿠토는 눈을 꿈벅이며 아카아시를 바라보았다. 아카아시가 그를 보고 있었다.
“왜 다시 시작하자고, 하지 않으시는 건데요.”
“어. 그게.”
그러니까 아카아시는 이제 나 싫…어할테니까……?
보쿠토는 한참이나 멍하게 아카아시를 올려다보기만 했다. 꿈에도 상상도 하지 못한 말을 들어서 그저 그렇게 바라보기만 했다. 그 이별 끝으로, 보쿠토에게 남은 아카아시란 그랬다. 이제는 남남, 그를 만나고 싶어하지도 그리워하지도 좋아하지도 않을 아카아시. 먼저 헤어짐을 말한 것도 보쿠토였으므로. 몇 년이나 시간이 지났으니까. 단 한 번도, 전화벨 울리는 소리조차 허락해주지 않은 아카아시였으니까…….
“어…….”
“……됐습니다.”
아카아시가 보쿠토의 손을 뿌리치곤 등을 돌린다. 보쿠토는 꿈이라도 꾸는 것처럼 멍하니 그 뒷모습을 바라보기만 하다가, 철썩 소리가 나도록 양손을 움직여 스스로의 뺨을 후려쳤다. 번쩍 통증이 일고 정신이 깨어난다. 보쿠토는 그대로 테이블을 밀치며 야외 자리를 박차고 나가 아카아시를 붙잡았다.
“아카아시! 다, 다시 해! 우리 다시 시작하자!”
“…….”
“시, 시작…해 주세요…….”
“…….”
심장이 정신없이 두근거렸다. 아카아시가 그를 바라보다 고개를 뚝 떨어뜨린다. 보쿠토는 그 모습을 보며 활짝 웃었다. 눈에서는 눈물이 거침없이 터져나오는데도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아카아시의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보쿠토 선배가…….”
“어, 으응, 나, 나?”
“……이사한 곳이 이 근처라고……해서.”
운명같은 게 아니었다. 한 번도 운명이었던 적 없었다. 그저 아카아시가 그렇게 마치 운명처럼 소중하게 여겨주고 있었기 때문에.
선배가 밉습니다, 아카아시가 말한다. 보쿠토는 웃으며 말했다. 나는 사랑해. 선배가 싫습니다, 아카아시가 또 말한다. 나는 사랑해. 보쿠토는 웃으며 말한다. 그래도 선배가, 선배가……. 아카아시의 말이 젖어서 흐려져간다. 보쿠토는 웃으면서 울면서 말한다. 나는 사랑해.
“……그, 저기. 다른 여자 친구도 마, 많았…어……?”
겨우 진정하고서, 반창고와 연고를 사들고 편의점 앞의 벤치에 앉아 아카아시의 입술에 발라주던 보쿠토가 조금 의기소침한 목소리로 묻는다. 아카아시는 약간 붉은 눈매로 보쿠토를 흘끗 보고는 대답했다. 네, 엄청 많았습니다. 몇 명인지 셀 수도 없이요.
“…….”
“……그래도 안 됐습니다.”
누구를 만나도, 대신할 수가 없었습니다.
상처가 쌓여 되레 둔탁해진 목소리가 말을 한다. 보쿠토가 그만 연고를 쥔 손에 힘을 주어 튜브에서 연고가 주욱 흘러나왔다. 한참을 허둥지둥 정리하느라 손이 연고 범벅이 된다. 아카아시가 그 모습을 그저 가만히 보고만 있다가 한숨과 함께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닦아주었다.
보쿠토는 아카아시의 손을 붙잡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엉엉 소리를 내어 울었다.
'하이큐 > 보쿠아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보쿠아카 | 사랑을 주세요! (5) | 2016.02.26 |
---|---|
보쿠아카 | 흉터 (4) | 2016.02.19 |
보쿠아카 | 시작 (2) | 2016.02.08 |
보쿠아카 | 사랑이 맴돈다 (13) | 2016.02.05 |
보쿠아카 | 안개꽃 (16) | 2016.02.01 |
-아카른 전력 주제 : 졸업
아카아시는 눈을 끔벅거렸다. 보쿠토는 정말로 대단한 몰골이었다. 뺨은 크게 부풀리고 있고 머리는 반쯤 새집이나 다름없었으며, 평소에도 옷을 정갈히 입는 데에는 대단히 재주가 없는 사람이긴 했으나 오늘은 유독 더했다.
“……선배?”
“…….”
대충 입었다기보다는 전쟁이라도 한 바탕 하고 온 행색이다. 아카아시는 마른 입술을 살짝 다시고는 보쿠토의 안색을 살폈다. 어제까지만 해도 신이 나서 귀가했는데. 아니, 한 순간에도 금방 기분이 오락가락하기 일쑤이니 하룻밤이나 지난 시점에서 어제 기분을 생각하는 건 의미가 없으려나.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엄마랑 싸웠어.”
“네?”
“아침에 학교 가기 싫다고 했다가.”
아카아시는 보쿠토의 모친을 떠올리곤 눈을 가늘게 떴다. 저 보쿠토를 키워낸 사람이라곤 믿을 수 없을만큼 고상한 부인이 아침부터 보쿠토를 잡고 저 난리통이었다면 보쿠토가 정말 어지간히 떼를 썼다고 봐야 한다. 전쟁통이 아니라 겨우 교복이나마 입힌 것이 이 꼴인가 싶다. 고등학교 3학년 운동부 주장을 상대로 이만큼이나 해내다니, 어머니는 정말로 위대한 모양이다.
“선배. 그래도 졸업식 날 정도는 옷 바로 입으시죠.”
“왜?”
“……네?”
싫다거나 토라지면 모를까 반문이 돌아올 줄은 몰라서, 아카아시는 조금 당황해 눈을 가늘게 떴다. 보쿠토가 아랫입술을 쭉 내밀며 어깨를 으쓱했다.
“하기 싧다니까. 싫은데 누구 좋으라고 예쁘게 입어.”
“그래도요. 우리 주장이시잖아요.”
“…….”
어르고 달래는 말을 해 보았으나 보쿠토는 맘에 들지 않는 표정을 풀지 않았다. 아카아시는 한숨을 내쉬곤 결국 손을 뻗어 보쿠토의 교복을 다듬어 주었다. 마구잡이로 삐져나온 셔츠도 다시 잡아당겨 선을 바로해주고 맨건지 만건지 알 수 없는 타이도 정돈해준다. 보쿠토는 표정을 풀지는 않았지만 아카아시가 손을 움직이게 내버려두었다.
“아카아시는.”
“네?”
“아냐, 됐어.”
아카아시는 고개를 휙 돌리는 보쿠토를, 그 뒷모습을 보고서 짤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보쿠토는 마음에 덮개라고는 없어 숨길 줄 모르는 사람이었고 그런 그가 무언가를 좋아하고 싫어하는지는, 누구나 보고 있으면 알 수 있었다.
-아카아시, 아카아시~!
토스 올려달라며 공을 쥐고서 달려오는 표정이. 어느 순간인가부터 이른 아침 햇빛이 호수의 수면에 비쳐 반짝이는 것처럼 눈이 부셨다. 스스로가 어떤 얼굴인지도 모르고서 매일을 영원히 볼 수 있는 것처럼 그런 표정 그런 눈빛으로 아카아시를 불렀다.
그리고 보쿠토는 정말로 그 영원이 영원할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졸업식 당일에 그를 보면서 저런 표정을 지을 리가 없다.
*
..
'하이큐 > 보쿠아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보쿠아카 | 흉터 (4) | 2016.02.19 |
---|---|
보쿠아카 | 그대네요 (6) | 2016.02.13 |
보쿠아카 | 사랑이 맴돈다 (13) | 2016.02.05 |
보쿠아카 | 안개꽃 (16) | 2016.02.01 |
보쿠아카 | 충고 (6) | 2016.01.01 |
-아카른 전력 주제 : 처음
-아무 내용없음
보쿠토 코타로라고 하면 대개 몇 가지 단어로 압축되곤 했다. 배구부 주장, 단순한 사람, 기분파, 에이스. 보이는 모습도 안과 밖이 똑같았다. 기분이 좋으면 활짝 웃고 처지면 울상이 되어 시무룩한 표정, 스파이크가 시원하게 들어가면 환호하고 막히면 토라지는 듯이 눈을 모으는 모습은 어린 아이가 울고 웃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때문에 사람들은 곧잘 보쿠토에게 물러지곤 했는데 그래서 때로 코노하는 혼자서 낯빛 퍼런 표정을 지어야 했다.
...
---
아무리 읽어봐도 노내용을 벗어날 수가 없다는 걸 깨닫게 된다....
'하이큐 > 보쿠아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보쿠아카 | 사랑이 맴돈다 (13) | 2016.02.05 |
---|---|
보쿠아카 | 안개꽃 (16) | 2016.02.01 |
보쿠아카 | Pokarekare Ana (7) | 2016.01.01 |
보쿠아카 | Silent night (2) | 2015.12.25 |
보쿠아카| 부르는 소리, 맞잡는 손 (2) | 2015.12.23 |
보쿠아카 | Silent night
-아카른 전력 주제 :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라곤 해도 아직 봄고가 남아있어서, 그저 연습이 조금 빨리 끝날 수 있는 날 정도의 의미밖엔 없었다. 그래도 특별한 날이라고 매니저들이 간단한 과자와 음료로 파티 비슷한 것을 해주기는 했다. 그것으로 끝인줄 알았는데 연습이 끝나고 체육관을 나오는 길에 펑펑 쏟아지는 눈을 보더니 화이트 크리스마스라며 3학년들이 되레 애처럼 들떠서 이대로는 아쉽다며 누구네 집에 어른이 있니 없니 집이 비니 마니 떠들다가 코노하의 집까지 돌진하게 된 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빠지겠다는 아카아시를 아주 질질 잡아끌고 간 건 보쿠토다.
가는 길에 다들 들떠 튀김이며 찐빵같은 것도 먹고싶은 대로 왕창 사버렸다. 들어가서도 이것 저것 먹고 마시며 떠들고 놀다보니 시계바늘이 무섭게 돌아가는 것도 한 순간이었다. 다행인지는 모르겠지만 텔레비전에서는 마법 학교를 배경으로 한 영화가 아직도 끝이 나지 않고 있어서, 3학년 선배들이 코타츠 안에 몸을 욱여넣고서는 저게 CG이니 아니니 배경은 진짜니 아니니 한가로운 논쟁을 계속하고 있었다.
“아, 목말라……. 생수 다 떨어졌네?”
“없어?”
“어, 이게 마지막……. 야, 보쿠토! 물 좀 사와!”
컵에 빈 물병을 기울여봐도 마지막 한 방울이 또르르 잔 아래로 떨어질 뿐이다. 코노하가 팔다리를 전부 코타츠 담요 안에 집어넣고 있는 보쿠토를 향해 외쳤지만 보쿠토가 대놓고 눈살을 찌푸렸다.
“엑. 싫은데.”
“너만 안 갔다 왔잖아!”
그러고보니 다들 한 번씩 떨어지거나 부족한 간식과 음료를 사러 바깥 편의점에 들렀다가 왔다. 다음 번에 내가 갈게, 하는 말로 매번 미룬 사람은 보쿠토였다.
“그래도 지금 아직도 눈 엄청 오고, 춥고, 귀찮단 말야~!”
보쿠토가 칭얼거리는 어조로 빽빽 말한다. 처음엔 눈을 보고서 들떠 날뛰더니, 손과 귀까지 새빨개지도록 놀고 나서는 금방 질린 모양이었다. 그래도 동기들이 계속 타박을 하고 내보내려고 하자 보쿠토는 벌떡 일어나서 화장실 갈거라며 쪼르르 도망친다. 코미가 한숨을 푹 내쉴 때에 가만히 그 광경을 보고만 있던 아카아시가 몸을 일으켰다.
“아카아시?”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은 보쿠토를 향한 것, 다녀오겠다는 정중한 말은 다른 3학년 선배들을 향한 것이다.
“야, 네가 자꾸 그렇게 받아주니까 쟤가 응석 부리는 거잖아.”
“……그래도요.”
어쩔 수 없죠. 아카아시가 담백하게 말하곤 코트를 챙겨든다. 그 사이 선배들이 잽싸게 눈빛을 주고받았다. 같이 가자, 코미가 말했지만 아카아시는 괜찮다며 사양했다. 그가 현관에서 신발을 챙겨 신을 때 코노하가 먹고 싶은 것도 맘껏 사오라며 지폐까지 쥐어주곤 그를 배웅했다. 그리고 철컥 소리를 내며 현관 문이 닫히는 기막힌 순간에 보쿠토가 화장실 문을 열고 나왔다.
“으아, 추워! 코타츠 빨리이!”
“으이구…….”
“어? 아카아시는?”
코타츠의 담요를 휙 들추고 발부터 집어넣던 보쿠토가 주위를 둘러보며 묻는다. 코노하가 빙글빙글 웃었다.
“나갔어.”
“……에?”
“너 대신 물 사러 나갔다고. 막 방금 나갔어.”
“헉. 혼자?”
“응, 혼자~.”
코미의 말미에 음색이 묻어났지만 보쿠토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금방 안절부절 못하는 표정이 되어 현관문을 쳐다보기에 바빴기 때문이었다. 코노하가 쭉 팔을 뻗어 소파 위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던 자신의 패딩 점퍼를 보쿠토 쪽으로 툭 집어 던졌다.
“바로 가면 따라잡을걸?”
“아, 진짜!”
보쿠토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지더니 지체하는 것 없이 벌떡 일어나 점퍼를 바삐 입고, 신발은 반쯤 발에 걸치다시피하여 집 바깥으로 내달린다. 덕분에 완전히 닫히지 않은 틈새로 찬바람이 몰아쳐서 보쿠토를 보고 낄낄거리던 3학년들은 금세 왈칵 인상을 써야 했다.
*
눈이 오는 크리스마스는 오랜만이었다.
....
'하이큐 > 보쿠아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보쿠아카 | 충고 (6) | 2016.01.01 |
---|---|
보쿠아카 | Pokarekare Ana (7) | 2016.01.01 |
보쿠아카| 부르는 소리, 맞잡는 손 (2) | 2015.12.23 |
보쿠아카| 사막의 밤 (0) | 2015.12.18 |
보쿠아카| 다시, 첫눈에 (6) | 2015.12.18 |
보쿠아카| 사막의 밤
-보쿠아카+쿠로켄 약간 있습니다.
-아카른 전력 주제 : 반지
아카아시는 이따금씩 보쿠토의 애정이 사막 한낮의 태양과도 같다고 생각했다. 숨기는 것도 감추는 것도 없이 솔직하게 쏟아지는 태양, 얼마나 불타오르는지 누구라도 한 눈에 알아차릴 수 있는 사막의 태양.
그래서 아카아시는 그 사막에 밤이 올까 그것이 두려웠다.
*
'하이큐 > 보쿠아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보쿠아카 | Silent night (2) | 2015.12.25 |
---|---|
보쿠아카| 부르는 소리, 맞잡는 손 (2) | 2015.12.23 |
보쿠아카| 다시, 첫눈에 (6) | 2015.12.18 |
보쿠아카| 병이에요 (3) | 2015.12.17 |
보쿠아카 | 민들레 (1) | 2015.12.16 |